통일교 교리 원문/통일사상요강/005
통일사상요강 원문 005/012.
- 문헌 색인: 통일교 교리 원문/통일사상요강
- 시작 부분: 수 있는 가치관이어야 하며, 과학을 포용하고 지도할 수 있는 가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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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가치관이어야 하며, 과학을 포용하고 지도할 수 있는 가치관 이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지닌 가치관이란 절대자인 하나님의 참사 랑을 중심한 절대적 가치관이다. 이것이 바로 미래사회의 대비를 위하 여 오늘날 절실히 요구되는 새로운 가치관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대비해야 할 미래사회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회인가 를 살펴보자. 미래사회는 본연의 인간에 의해서 건설되는 사회이다. 본연의 인간이란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의 참사랑을 지닌 인격人格의 완 성자를 말한다. 여기서 인격이란 심정을 중심하고 균형적으로 발달한 지․정․의의 기능을 터로 한 인품(품격)을 말한다. 따라서 미래사회는 하 나님의 심정을 중심하고 지․정․의의 기능이 조화롭게 발달된 인간들로 써 구성된 사회이기 때문에, 여기의 새로운 가치관의 ‘가치’란 본래의 지․정․의의 기능에 대응하는 가치를 말한다. 지․정․의의 기능은 각각 진․미․선의 가치를 추구하게 되는데 이러한 가치의 추구를 통하여 진실사회, 예술사회, 윤리사회가 실현되게 된다. 여기서 ‘진실사회’는 ‘진眞’의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실현되는, 거짓이 없는 ‘참의 사회’를 말하며, ‘예술사회’는 ‘미美’의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실현되는 ‘미의 사회’를 말하며, ‘윤리사회’는 ‘선善’의 가치를 추구함으 로써 실현되는 ‘선의 사회’를 말한다. ‘진실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이론 으로서 필요한 것이 교육론이요, ‘예술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이론으로 서 필요한 것이 예술론이며, ‘윤리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이론으로서 필요한 것이 윤리론이다. 그리고 가치론은 진․선․미의 가치를 총합적으 로 다루는 부문이므로 가치론은 이들 세 가지 이론의 총론이 되는 셈 이다. 미래사회는 이와 같이 진․선․미의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일 뿐만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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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경제는 고도의 성장을 이룩함으로써 경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풍요한 사회가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은 주로 가치를 실현하면서 그 가치를 즐기 는 생활이 되기에 이른다. 심정을 중심하고 진․선․미의 가치가 실현된 사회가 바로 심정문화의 사회요, 통일문화의 사회이다. 이상으로 미래 사회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하다는 데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그런데 새로운 가치관은 미래사회에의 대비를 위해서 뿐 만 아니라 오늘의 현실세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앞 에서 언급한 대로 오늘의 현실세계는 여러 요인들로 인하여 가치관이 총체적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는데, 이것을 수습하기 위하여 건전한 가 치관의 재정립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가치관은 문화의 통일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오늘의 세계의 혼란을 궁극적으로 수습하기 위해서는 여러 전통문화의 통일이 또한 필요하다. 그런데 여러 문화는 각각 일정한 종교 또는 사상을 터 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나 사상은 일정한 가치관을 갖고 있 다. 따라서 문화통일을 위해서는 여러 가치관의 통일, 예컨대 기독교 가치관, 불교가치관, 유교가치관 등의 통일이 요구되며 또한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가치관의 통일이 필요하다. 따라서 여기에도 모든 가치 관을 포섭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의 제시가 요구된다.
一. 가치론 및 가치의 뜻
새로운 가치관이란 통일원리에서 본, 가치에 대한 견해를 말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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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치관을 제시함에 앞서서 가치론과 가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1) 가치론의 뜻
가치론價値論은 일반적으로 경제학, 윤리학 등의 분야에서도 다뤄지지 만, 철학에서는 주로 가치철학을 가리킨다. 즉 가치일반에 관한 이론 을 다루는 철학부문이다. 가치론이 근대에 이르러 철학체계의 한 부문 이 되고 있지만 그 내용은 비록 단편적이나마 고대에서도 발견되며(후 술), 칸트가 사실문제와 가치문제를 구별하고 사실의 부문과 가치의 부문을 구분한 이후 가치론은 철학상의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특히 로체(Rudolph H. Lotze, 1817~1881)가 존재와 가치를 분리 한 후 존재의 세계에 가치의 세계를 대치시키는 동시에, 존재의 세계 는 지성知性(Verstand)에 의해서 파악되지만 가치의 세계는 감정感情에 의해서 파악된다고 주장하면서, 철학상에 가치개념을 끌어들임으로써 가치철학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2) 가치란 무엇인가
가치라는 말은 본래 경제적 생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주로 경제 적 가치를 의미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이 말이 일반화하여 사회, 정 치, 법률, 도덕, 예술, 학문, 종교 등 인간생활의 거의 전반에 걸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는 가치를 크게 물질적 가치와 정 신적 가치로 구분한다. 물질적가치란 상품가치와 같이 생활자료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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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를 뜻하며, 정신적가치는 지․정․의의 기능에 대응하는 진․미․선을 말한 다. 본 가치론에서는 그 중 정신적가치만을 다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가치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하기가 불가능1) 하기 때 문에 가치현상을 통하여 분석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본 가치론에서 는 주체主體(주관)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對象의 성질을 가치라고 규정한다. 즉 어떤 대상이 있어서, 그것이 한 주체의 욕망이나 소원을 충족시켜 주는 성질을 가질 때, 그 주체가 인정하는 그 대상의 성질을 가치라고 한다. 즉 가치는 주체가 인정하는 대상가치對象價値이며, 주체 에게 인정되지 않으면 그것은 현실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예컨대 여 기에 아름다운 꽃이 있다고 하자. 주체가 이 꽃의 아름다움을 인정하 지 않는다면, 그 꽃의 가치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가치가 나 타나기 위해서는 주체가 대상의 성질을 인정하면서 평가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3) 욕 망
가치란 이미 언급한 대로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의 성질 을 의미하기 때문에, 가치를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체가 가지고 있 는 욕망을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가치(물질적 가치를 포함)를 다루어 온 많은 사상가들은 인간의 욕망의 문제를 배 제하고 그 가치의 현상만을 객관적으로 취급해왔다. 그러나 그러한 가 치관은 뿌리없는 나무나 토대없는 건축물과 같이 취약성脆弱性을 면할 수가 없다. 뿌리없는 나무는 시들 수밖에 없고 토대없는 건축물은 곧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기존의 사상체계는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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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사회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그 무력성無力性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다. 예컨대 물질적 가치를 취급하는 경제이론까지도 현재의 경제혼란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거의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노사관계가 기업 실적에 미치는 영향 등 이전의 경제학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왜 이러한 결과가 올까. 그것은 종래의 경제학자들이 인간의 욕망을 올바르게 분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 제학자들은 경제활동의 동기가 욕망인 것을 알면서도 그 욕망을 분석 하지 않음으로 해서 결국, 그들의 이론은 토대가 없는 건축물과 같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나타난 현상을 올바르게 이해하 기 위하여 욕망欲望의 분석에서부터 접근하고자 하지만, 이에 앞서 먼저 가치론의 통일원리적 근거를 다루고자 한다.
二. 가치론의 원리적 근거
가치론의 통일원리적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통일원리에 의하면, 인 간은 성상․형상의 통일체統一體이면서 목적과 욕망을 갖고 있다. 욕망은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창조본성(원리강론, 1987, p. 97)이다. 그리고 목적도 욕망도 각각 이중성二重性을 띠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통일가치론이 성립하게 된다.
(1) 성상․형상과 이성목적二性目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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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된 인간에게는 일정한 피조목적(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주어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피조목적을 지닌 인간은 이성성상의 중화체요 통 일체이다(즉 영인체와 육신의 이중체二重體요, 생심과 육심의 이중심적二 重心的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피조목적이 주어져 있다는 것은, 인 간의 성상性相에도 목적이 주어져 있고 형상形狀에도 목적이 주어져 있음 을 뜻한다. 전자를 성상적목적이라 하고, 후자를 형상적목적이라고 한 다. 이 양자를 합해서 ‘이성목적二性目的’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성성상 에 대응하는 목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가치론에 있어서, 성상은 바로 생심을 뜻하며 형상은 바로 육심을 뜻하기 때문에 성상적목적이란 생심이 지닌 목적이며, 형상적 목적이란 육심이 지닌 목적이다. 따라서 성상적목적이란 생심의 목적 인 ‘진․선․미․애愛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뜻하며, 형상적목적이란 육심 의 목적인 ‘의․식․주․성性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뜻한다.
(2) 성상․형상과 이성욕망二性欲望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성상․형상의 통일체요, 생심生心과 육심肉 心 의 이중심적 존재이기 때문에 목적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욕망에도 성상적욕망과 형상적욕망이 있게 된다. 이것을 ‘이성욕망’이라고 부르 기로 한다. ‘이성목적’과 마찬가지로 ‘이성성상에 대응하는 욕망’이라는 뜻인 것이다. 성상적욕망이란, 生心의 욕망으로서 진․선․미․애의 생활에 관한 욕망이요, 형상적욕망이란 肉心의 욕망으로서 의․식․주․성의 생활 에 관한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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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중목적과 이중욕망
원리에 의하면 인간은 또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이라는 이중목적을 지 닌 연체聯體이다(원리강론, 1987, p. 52). 이것은 성상(생심)도 전체목 적과 개체목적이라는 이중목적을 지니고 있고, 형상(육심)도 전체목적 과 개체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성상적목적(생심의 목적) 에도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이 있고, 형상적목적(육심의 목적)에도 전체 목적 및 개체목적이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욕망欲望이란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려는 마음의 충동이다. 따라서 욕망에는 전체목적을 달성하려는 욕망과 개체목적을 달성하려는 욕망이 있게 된다. 전자를 가치실현욕 이라 하고 후자를 가치추구욕이라 한다. 이 양자를 합해서 ‘이중가치 욕二重價値欲’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성상적욕망과 형상적욕망이 각각 이 중목적二重目的을 실현하기 위한 이중욕망二重欲望 즉 가치실현욕과 가치추 구욕의 이중욕망을 포함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하여 성상적욕망에도 가치실현욕과 가치추구욕이 있으며, 형상적욕망에도 가치실현욕과 가 치추구욕이 있다. 여기서 이중목적 및 이중욕망과 관련해서 이중가치에 대하여 살펴보 자. 목적에 이중목적이 있고, 욕망에 이중욕망이 있는 것처럼 가치에 도 이중가치가 있다. 그것이 실현가치實現價値와 추구가치追求價値이다. 가 치실현욕에 의해서 실현코자 하는 가치 또는 실현된 가치가 ‘실현가 치’요, 가치추구욕에 의해서 추구코자 하는 가치 또는 추구된 가치가 ‘추구가치’이다. 따라서 이중목적과 이중욕망과 이중가치는 서로 대응 관계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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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욕망의 유래와 창조목적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앞에서 언 급한 대로 창조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창조목적이란 하나님에 있어서는 대상(인간과 만물)으로부터 기쁨을 얻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피조물의 입장에서 보면, 이 창조목적은 피조목적被造目的을 의미하게 된 다. 특히 인간은 하나님께 미를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 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즉 인간의 피조목적 은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만물을 주관하라는 3대축복三大祝福을 성 취함으로써 달성된다. 따라서 인간의 창조목적(피조목적)이란 곧 3대 축복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목적만을 주고 욕망 을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기껏해야 다만 “창조목적이 있다”, “3대 축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실천의 당위성은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충동적 衝動的 인 의욕意欲 즉 하고 싶다, 얻고 싶다는 마음의 충동성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충동성이 욕망이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창 조목적(피조목적), 즉 삼대축복을 달성하고자 하는 내적인 충동을 느끼 면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의 터전이 심정이다. 인간은 이미 언급한 대로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이라는 이중목적을 지 닌 연체이다. 따라서 창조목적의 실현은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을 실현 하게 된다. 인간의 전체목적이란 참사랑을 실현하는 것, 즉 가정, 사 회, 민족, 국가, 세계 그리고 구극적究極的으로는 인류의 부모인 하나님 에게 봉사하는 것이며, 인류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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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리고 개체목적이란 개체가 그 자체의 성장과 기쁨을 얻고자 하 는 것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도 모두 전체를 위하는 목적과 개체 를 위하는 목적의 이중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창조목적의 이중 성, 즉 피조목적의 이중성이다. 만물과 인간은 창조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그 방법이 다르다. 무 기물은 법칙에 따라서, 식물은 자율성(생명)에 따라서, 그리고 동물은 본능에 따라서 각자의 창조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하 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욕망에 따라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기 책임으로 창조목적을 달성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욕망이란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마음의 충동이었다. 따라서 목적에 전체목적과 개체 목적의 이중목적이 있는 것처럼, 이에 대응해서 욕망에도 가치실현욕 과 가치추구욕의 이중욕망이 있다. 그리고 이 이중목적과 이중욕망에 대응하는 가치가 실현가치와 추구가치의 이중가치였다. 이상을 이성목 적, 이성욕망, 이성가치와 관련지어서 서로의 관계를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4-1과 같이 된다.
이성성상 이중심 목 적이성목적 이중목적 욕망 이성욕망 이 중욕망 가 치 이성가치 이중가치 성상 생심 성상적목적 전체목적 개체목적 성상적욕망 가치실현욕 가치추구욕 성상적가치 실현가치 추구가치 형상 육심 형상적목적 전체목적 개체목적 형상적목적 가치실현욕 가치추구욕 형상적가치 실현가치 추구가치
그림 4-1. 욕망, 목적, 가치의 이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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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가치의 종류
(1) 성상적 가치
가치란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의 성질이었다. 성상과 형 상의 이중적 존재인 인간의 욕망에는 성상적 욕망과 형상적 욕망이 있 으므로 상술한 바와 같이 가치에도 성상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성상적 가치와 형상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의 성질(가치), 즉 형상적가치가 있다(도표 4-1). 성상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성상적 가치는 진․미․선과 사랑이다(사랑은 사실은 가치 그 자체라기보다는 진․미․선의 가치의 기 반이다). 진․미․선이란 마음의 3기능인 지․정․의에 대응하는 가치이다. 즉 주체가 대상이 가지는 가치적 요소를 평가할 때, 지․정․의의 3기능 에 따라 다르게 판단한 것이 각각 진․미․선이다.
(2) 형상적 가치
한편, 형상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가치는 의․식․주의 생활자료의 가치, 즉 물질적 가치(상품가치)를 말한다. 물질적 가치는 육신생활을 위한 가치이며, 육심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가치이다. 육신생활은 영인체를 성장시키고 3대축복을 완성시키기 위한 토대가 되기 때문에 형상적 가치는 성상적 가치의 실현에 있어서 필수조건이 된다. 여기서 사랑이 진․미․선의 가치의 기반이 된다는데 대해서 구체적으 로 언급하고자 한다. 주체가 대상을 사랑하면 할수록, 또 대상이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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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 주체에 있어서 그 대상은 한층 참되고 아름답 고 선하게 보인다. 예컨대 부모(주체)가 자식(대상)을 사랑할수록, 또 자식이 부모를 사랑할수록, 부모에 있어서 자식은 아름답게 보인다. 그리고 자식이 아름답게 보이면, 부모는 자식을 보다 더 사랑하고 싶 게 된다. 진과 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을 사랑할수록 그 자 식은 더 참되고 선하게 보인다. 즉 사랑을 터로 하고 진․선․미가 세워 진다. 사랑없이도 진․선․미가 느껴질 때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엄 격히 말해서, 이 때에도 실은 무의식중에 주체의 잠재의식 속에 사랑 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랑은 가치의 원천이며 기반이 된다. 사랑이 없으면 참 된 가치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고 사랑의 생활을 하게 되면 오늘날까지 경험한 것 보다 훨씬 더 빛나는 가치를 체험하거나 실현할 수가 있게 된다. 이상에서 가치 에는 성상적 가치와 형상적 가치가 있음을 밝혔는데 본 가치론에서는 주로 성상적 가치만을 다루기로 한다.
四. 가치의 본질
(1) 가치의 본질적 요소와 현실적 가치
가치에는 대상이 지니고 있는 성질로서의 가치와, 주체와 대상 사이 에서 결정되는 가치의 두 가지가 있다. 전자를 잠재적가치潛在的價値라 하 고 후자를 현실적가치現實的價値라고 한다. 위에서 ‘주체主體의 욕망을 충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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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켜 주는 대상의 성질性質이 가치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잠재적 가치 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가치는 현실적으로 반드시 평가되는 것이며, 이 때의 평가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수수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이 평가(수수작용)에 의해서 결정되는 가치가 현실적가치이다. 그런데 잠재적가치, 즉 대상이 지닌 성질이란 가치의 본질적요소本質的要素로서, 대상이 지닌 내용, 속성, 조건 등을 말한다. 즉 미나 선이나 진의 가치 는, 그 자체로서 대상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가치가 될 수 있는 요소(본질적요소)로서 대상의 내부內部에 잠재潛在해 있는 것 이다. 이것이 대상이 지니고 있는 잠재적 가치이다.
(2) 잠재적가치(본질적요소)
그러면 가치의 본질 즉 대상의 본질적요소(내용, 속성, 조건)란 구체 적으로 어떤 것일까? 그것은 대상이 지닌 창조목적創造目的과 대상 속에 있는 상대적요소相對的要素 상호간의 조화調和이다. 모든 피조물에는 반드 시 만들어진 목적, 즉 창조목적(피조목적)이 있다. 예컨대 꽃에는 미美 로써 인간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창조목적이 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예술작품이나 상품의 경우에도 반드시 제 작된 목적이 있다. 그리고 상대적 요소의 조화란 주체적요소와 대상적요소의 조화를 말 한다. 만물은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이기 때문에 원상을 닮아서 반드시 그 내부에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 주요소主要素와 종요소從要素 등의 주체 적요소와 대상적요소의 상대적요소가 깃들어 있다. 이 상대적요소 사 이에는 반드시 수수작용에 의한 조화가 나타난다. 이 때의 수수작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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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형對比型의 수수작용이다. 이리하여 창조목적을 중심으로 상대적요 소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가치의 본질이다.
五. 현실적가치의 결정과 가치기준
(1) 가치의 결정
가치는 주체인 인간과 대상인 만물과의 상대적 관계에서, 즉 수수작 용에 의하여 결정 또는 평가되는 것으로서, 대상이 구비해야 할 조건, 즉 대상적조건對象的條件은 상술한 바와 같이 창조목적 중심한 상대적요 소 상호간의 조화이다. 한편, 주체에도 주체가 구비해야 할 조건 즉 주체적조건主體的條件이 있다. 먼저 주체가 가치추구욕價値追求欲과 대상에의 관심關心을 가지는 것이 가치결정의 전제조건이 된다. 그리고 가치결정 을 좌우하는 요소는 주관적 요인主觀的 要因으로서 주체가 가지고 있는 사상, 취미, 개성, 교양, 인생관, 역사관, 세계관 등이 있다. 주체의 이 주관적요인과 가치추구욕 및 관심 등은 모두 주체가 지녀야 하는 주체 적 조건들이다. 현실적가치는 이 주체적조건과 대상적조건과의 상대적 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다.(그림 4-2)
그림 4-2. 가치의 결정
(2) 주관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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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한 바와 같이 가치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주관적 요인들이 크게 작용한다. 즉 주체의 사상, 세계관, 취미, 개성, 교양 등의 주체적조건 이 대상에 반영되어서(또는 대상적 조건에 첨가되어서) 그 주체만이 느끼는 특유한 현실적가치現實的價値가 결정된다. 이와 같이 주체적조건과 대상적조건이 성립할 때, 거기에 수수작용 이 행해짐으로써 구체적인 가치가 결정된다. 구체적인 가치가 결정된 다는 것은 가치의 실제의 양量과 질質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 치의 양이란 꽃의 경우 매우 아름답다라든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와 같이 가치평가의 양적인 측면을 말한다. 또 가치에는 질적인 측면도 있다. 예컨대 예술론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후술) 미에는 우아 미優雅美라든가 외경미畏敬美, 장엄미莊嚴美, 익살미 등 여러 가지 차이성의 미가 있는데, 그것은 질적인 측면의 차이를 보이는 미(가치)이다. 그런데 같은 달(月)도 어떤 사람에게는 슬프게 보이고, 또 어떤 사람 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또 같은 사람이 보아도 슬플 때 보면 달도 슬프게 보이고, 기분이 좋을 때 보면 달도 아름답게 보인 다. 주체의 마음가짐에 따라 미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것은 미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선이나 진의 가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 한 것은 상품가치에 관해서도 말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주관主觀이 대 상에 반영됨으로써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가치의 차이가 생기는데 이러 한 주체적조건의 작용을 주관작용主觀作用이라고 한다. 즉 주체의 주관이 대상에 반영되는 작용이 주관작용이다. 이것은 미학美學에 있어서 맆스(T. Lips)의 ‘감정感情의 이입移 入 ’(empathy, Einfühling)에 해당한다 하겠다. 감정의 이입이란, 자연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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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을 볼 때나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자기의 감정이나 구상을 대상에 투사投射해서 그것을 감상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주관작용의 예를 한 두 가지 더 들어보자. 먼저 문 선생님의 말씀中에서 예를 들면 다 음과 같다.
하나님의 아들(예수님)이 당신에게 손수건을 주었다고 생각해 보 자. 그 손수건은 돈보다도 귀하고, 생명보다도 가치가 크다고 할 것이다. 또 무엇보다도 귀한 가치를 지녔다고 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신은 어떤 보잘 것 없는 곳에서 살고 있더라도 거기는 궁전이나 마찬가지로 느낄 것이다. 그때는 의복이 문제가 아니며, 거처하는 집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왕자들이기 때문이다.”2)
이 말씀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각自覺을 가지면 오막살 이 집도, 그대로가 궁전같이 휼륭하게 보인다는 뜻으로서 주관작용主觀 作用 의 적례適例인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는 네 마음속에 있느니 라’(누가 17:21)는 성구가 있는데 이 역시 주관작용의 예이다. 또 불교 에는 “삼계유심소현三界唯心所現”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삼계, 즉 세계 전체의 모든 현상은 ‘마음의 나타남’이라는 뜻이다.3) 모두가 주관작용 의 예인 것이다.
(3) 가치의 기준
1) 상대적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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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한 바와 같이 주관작용으로 인하여 가치결정(평가)의 결과는 사 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주체적조건에 공통성이 많을 때에 는 가치평가에도 일치점이 많아지고, 따라서 같은 종교나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의 가치평가의 결과는 거의 일치한다. 예컨대 유 교의 덕목인 “부모님께의 효도”는, 유교사회에서는 언제나 일치되게 평가되는 보편적인 선이다. 이것은 종교나 사상을 같이 하는 사회에서는 가치관의 통일이 가능 함을 뜻한다. 로마의 평화(Pax-Romana)시대에는 스토아 철학이 일반 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극기적정신克己的精神과 세계시민주의世界市民主義는 그 당시의 지배적인, 통일된 가치관이었다. 또 중국의 당나라시대나 한반도의 통일신라시대 때에는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불교적인 덕목 이 중심적인 가치관이었다. 또 기독교국가인 미합중국美合衆國에 있어서 는 오래도록 기독교(신교)의 도덕관이 미국민의 통일된 가치관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종교나 다른 문화의 배경을 가진 사회 사이에서는 가치관의 차이가 나타난다. 예컨대 힌두교에서는 쇠고기 먹는 것을 금 지하고 있으나 이슬람교에서는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또 공산주의가 말하는 평화관平和觀과 자유주의세계가 말하는 평화관은 그 개념이 전혀 다르다. 즉 공통된 종교나 공통된 사상이 시행되고 있는 지역이나 사회에서의 가치관은 국민간에 대개 일치하지만 종교나 사상 이 서로 다를 때에는, 가치관의 일치는 일정한 범위 내에 머물게 된 다. 이와 같이 공통되는 가치평가의 기준이 일정한 범위에 국한될 때, 이러한 가치평가價値評價의 기준을 ‘상대적 기준’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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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절대적 기준
가치의 상대적 기준으로 전인류全人類의 가치관을 통일할 수는 없다. 가치관의 차이에 의한 대립이나 투쟁을 무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인류의 진정한 평화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차이, 문 화적인 차이, 사상적인 차이, 민족적인 차이 등을 극복할 수 있는 평 가기준, 즉 전인류에 공통되는 가치평가의 기준이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가치평가의 기준이 절대적絶對的 기준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절대적 기준은 어떻게 해서 세워질 수 있을까. 그 것을 위해서는 모든 종교, 모든 문화, 모든 사상, 모든 민족 등을 있게 한 근원자가 하나임을 밝히고 그 근원자로부터 유래된 여러 공통성들 을 발견하면 된다. 존재론存在論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주 만물은 천태 만상千態萬象이지만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질서정연하게 운행되고 있으 며, 또 모든 만물은 공통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주 만물 이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산재해 있는 여러 종교, 문화, 사상, 민족은 각각 그 가치관이 다른 것이 보통이지만, 그 것들을 발생시킨 근원자는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근원자 로부터 유래하는 공통성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오늘날까지 수많은 종교가 출현하였지만 각각의 교조敎祖들이 자기 마음대로 종교를 만든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최종적으로 구하기 위하여 일정한 시대와 일정한 지역에 일정한 교조를 세워서 우선 그 시대, 그 지역의 사람들을 선의 방향으로 인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때와 장소에 따라서 언어, 습관, 환경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시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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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적합한 종교를 세워서 구원섭리救援攝理를 전개해 오셨음을 뜻한 다. 따라서 각 종교의 공통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를 세운 근원자根源者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주만 물의 근원자를 유대교에서는 야웨, 이슬람교에서는 알라, 힌두교에서 는 브라만, 불교에서는 진여眞如, 유교에서는 천天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모두 동일한 존재이다. 그런데 이들 각 종교가 근원자의 속성에 대해서는 명확히 규명하지 않고 있다. 예컨대 유교에서는 천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밝히지 못하고 있으며, 불교에서의 진여眞如나 힌두교의 브라만도 그러하다. 또 기독교의 하나 님이나 유대교의 야웨, 이슬람교의 알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뿐 만 아니라 이들 각 종교의 근원자가 왜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셨는지에 대해서도 명백히 밝히지 않고 있으며, 비참한 인류를 왜 하루 속히 또 일시에 구할 수가 없었는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와 같이 각 종교의 근원자는 베일에 감추어져 있어서 막연하게만 인 식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각 종교의 근원자에 관한 설명들은 그 근 원자의 일면만을 파악한데 불과했기 때문에 각 종교를 세운 근원자는 서로 다른 것처럼 보여지기까지 하였다. 이들 각 종교의 근원자가 결국은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서는, 그 근원자가 어떠한 분인가를 정확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하나님의 속성, 창조목적, 우주창조의 법칙(로고스) 등을 정확히 이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각 종교는 동일한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형제의 종교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겪 어온 대립과 투쟁의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 화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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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정확히 아는 것이 문제 해결의 열 쇠가 되는 것이다. 문화, 사상, 민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문화, 사상, 민족을 발생시킨 근원자가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알면 그 문화의 공통성, 사상의 공통성, 민족의 공통성 등도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면, 가치평가의 절대적기준이 될 수 있는 공통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참사랑(절대사랑)과 하나님의 참진 리(절대진리)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통해서 기쁨을 얻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기독교의 아가페,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仁, 이슬람교의 자애慈愛 등으로 표현되지만, 사실은 모 든 종교의 사랑은 한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 있어서 가정을 통하여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 이라는 3대상三對象의 사랑으로서 나타난다[여기의 ‘자녀의 사랑’은 자 녀의 부모에 대한 사랑과, 자녀 상호간(형제자매간)의 사랑을 말한다]. 기독교의 이웃사랑의 실천, 불교의 자비慈悲의 실천, 유교의 인仁의 실 천, 이슬람교의 자애慈愛의 실천 등은 그 내용이 전부 이 3대상三對象 사 랑의 실천이었다. 그리고 영원성을 지닌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주의 운행을 지배하는 진리眞理(이법)는 영원불변한 것이다. 우주에 공통되는 보편적인 사실은 우주의 모든 존재자가 자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것 이 아니고, 타他를 위해서 전체를 위해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 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즉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따 라서 보편적인 선악善惡의 기준은 타인他人(인류)을 위해서 사는가,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가에 따라 좌우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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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절대적 기준과 인간의 개성
이렇게 해서 가치결정의 절대기준이 세워진다. 즉 하나님의 참사랑 과 참진리에 의해서 세계 만민의 가치판단價値判斷(결정)이 일치되게 된 다. 그러면 그때 인간의 개성個性은 어떻게 될 것인가. 가치결정이 일치 화一致化된다고 해서 인간의 개성이 무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치판 단은 개인의 주관적主觀的인 요소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개성에 따라서 가치평가에 반드시 차이가 생길 것임에도 불구하고 절 대적 기준하에서 가치결정이 일치화된다면 개인의 개성個性은 무시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 기준에서 가치판 단이 일치화한다 할지라도 개성은 무시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편상(공통성)과 개별상(특수성)을 닮고 있으며, 또 연체聯體 이기 때문에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을 함께 지니고 있다. 따라서 가치평 가의 절대적 기준은 보편상(성상, 생심, 심정, 로고스)과 전체목적에 근거한 평가기준이요, 주관작용은 개별상 및 개체목적에 기인한다. 따라서 아무리 절대적 기준에 의해 절대적가치가 결정된다 할지라도 주관작용에 의한 개인차는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절대 가치란 개인차를 포함한 보편가치이다. 그것은 마치 개성진리체가 개 별상을 포함한 보편상을 지닌 개체인 것과 같다. 따라서 전체목적을 우선시키면서 개체목적을 추구하고, 보편상을 지니면서 개성(개별상)을 나타내는 것이 인간이다. 절대적 기준에 있어서 가치평가를 함에 있어 서도 이와 같이 인간의 개성에 따른 주관작용主觀作用을 피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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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공통성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차이성差異性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차이성에 의한 가치관의 혼란은 있을 수 없다. 왜냐 하면 이 때의 차이는 질적質的차이가 아니라 양적量的차이일 뿐이기 때문 이다. 예컨대 선善의 판단의 경우 ‘빈자貧者를 돕는다’는 것은 종교나 사상여 하思想如何를 막론하고 선으로 판단된다. 그것을 악으로 판단(질적판단) 하는 사람은 이상세계理想世界에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판단하는 사람 에 따라서 그 선이 ‘크게 선하다’ ‘중간쯤 선하다’ ‘보통으로 선하다’ 등과 같이 양적量的인 평가의 차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미 나 참眞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치판단의 절대적 기준이란 요컨대 질적판단質的判斷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그런데 타락사회는 이기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질적차이마저 생기게 되어서 그 결과 가치관에 혼란 이 일어나기 일쑤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 및 가치관의 통일이 가능하게 된다. 즉 가치관의 개별성을 살리면서 가치평가의 기 준을 절대진리絶對眞理, 절대사랑絶對愛을 중심하고 일치화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관이란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과 절대적 진리를 기반으로 한 가치관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가치관의 가치가 바로 절대적 가치 이다.5) 이러한 절대가치로 모든 가치관을 화합, 조화시킬 수 있다. 이 것이 바로 가치관의 통일이다. 이러한 가치관의 통일에는 하나님의 속 성, 창조목적, 심정, 사랑, 로고스 등에 관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 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종교통일, 사상통일도 가치관의 통일로써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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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 종래의 가치관의 취약성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가치관의 붕괴의 원인의 하나는, 종래의 가치관 -주로 종교적 가치관- 이 설득력을 상실한 데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종래의 가치관이 설득력을 잃어버렸는가, 여기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1) 기독교 가치관의 취약성脆弱性
기독교에는 다음과 같은 성구聖句를 통하여 훌륭한 덕목德目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 22:39), “원 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 5:44),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태 7:12) “심령心靈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 요, 애통哀痛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 溫柔 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矜恤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 이 청결淸潔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和平 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산상수훈山上垂訓, 마태 5장).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1은 사랑이라”(고전 13:13),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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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聖靈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慈悲와 양선良善 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 아 5:22~23). 그런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라고 되어있는 바와 같이 덕목의 기초가 되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요한 4:7~8)라고 기록된 것과 같이 사랑의 기초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근대에 이르러 니체, 포이엘 바하, 마르크스, 러셀, 사르트르 등에 의해서 하나님의 존재가 부정되 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러한 사상에 대해서 기독교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즉 유신론과 무신론의 이론적 대결에 있어서 기독 교는 패배敗北만을 거듭해 왔다. 그 결과 많은 젊은이들이 무신론의 포 로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또 기독교 가치관에 대한 공산주의의 의도적인 도전이 있었 다. 공산주의는 기독교가 말하는 절대적 사랑이나 인류애를 부정하고, 진정한 사랑은 계급애階級愛 또는 동지애同志愛라고 주장한다. 이해가 대 립하고 있는 사회속에서 계급을 넘은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보기 때 문이다. 인간은 프롤레타리아트 측에 서거나 부르주아 측에 서거나 양 자택일을 해야 한다. 따라서 인류애를 부르짖는 것은 말뿐이며, 실제 로는 인류애人類愛를 실천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계급사회라고 주장 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을 얼른 들으면 확실히 계급애가 현실적이고, 기독교 의 사랑은 관념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사랑의 원천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상태에서, 종래와 같은 기독교의 신관神觀(사랑관)에 설득력이 있을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아니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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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다. 그리하여 최근에 이르러 제3세계에 해방신학解放神學과 종속이론從屬理論 이 대두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해방신학에 의하면, 예수는 그 시대 의 억압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고, 혁 명가였다는 것이며, 따라서 참다운 기독교인은 사회혁명을 위해 나서 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독인의 빈민貧民에의 동정은 공산주의의 계급애階級愛와 부합하는 것이니, 현실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공산주의와 제휴提携할 필요조차 있다고 하는 주장까지 있었다.6) 종속이론도 제3세계의 빈곤은 선진제국先進諸國과 제3세계와의 구조적 모순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에, 제3세계가 빈곤에서 해방되 기 위해서는, 제3세계는 선진제국 즉 자본주의 제국과 대결하지 않으 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해방신학과 마찬가지로 종속이론도 공산주의 와의 제휴를 도모했다.7) 해방신학이나 종속이론은 공산주의와 같은 확 고한 철학, 역사관, 경제이론이 없으므로 결국은 공산주의에 휩쓸려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하여 아무 런 조치를 강구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2) 유교 가치관의 취약성
유교에는 다음과 같은 덕목이 있다. ① 5륜五倫 …… 고래古來로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서, 붕 우유신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이 인륜人倫의 기초가 되었으 며 맹자孟子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다. ② 4덕四德 …… 맹자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4덕四德을 강조했다. 후에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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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의 동중서董仲舒는 여기에 신信을 더하여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는 5상 五常 의 도道를 세웠다. ③ 4단四端 ……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불쌍히 여겨서 언짢아 하는 마 음), 수오지심羞惡之心(불의를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 음), 사양지심辭讓之心(사양할 줄 아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시비를 가릴 줄 아는 마음)을 4단四端이라 하여 각각 인의예지仁․義․禮․智의 기본으로 삼 았다. ④ 8조목八條目 ……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格物․致知․誠意․ 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8)
⑤ 충효忠孝
그런데 유교(공자)의 덕목의 기초가 되는 것은 인仁이며, 인의 기초 는 천天이었다.9) 그런데 유교에 있어서 天이란 무엇인가가 명확히 밝 혀지지 않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토대와 상부구조의 이론을 적용함으로써, 유교의 가 르침은 봉건시대에 있어서 지배계급이 일반대중을 순순히 복종시키기 위하여 만들어낸, 계급지배의 합리화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보았 고, 따라서 오늘날의 권리 평등과 다수결원칙을 취지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유교를 비판하였다. 그 결과, 유교의 덕 목들은 오늘날 거의 사장되다시피 하였으며, 더구나 사회가 도시화되 고 가정이 핵가족화 함으로써 유교적가치관은 더욱 붕괴해 가게 되었 고, 그 결과 사회의 무질서와 혼란은 가중되어 갔던 것이다.
(3) 불교 가치관의 취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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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근본적인 덕목은 자비慈悲이지만,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수행생활이 필요하다고 한다. 인간은 수행생활을 통하여 성문聲聞(부처 의 설법을 듣고 4제四諦의 이치를 깨달아 스스로 아라한阿羅漢의 제자가 되기를 이상으로 하는 불도수행자佛道修行者), 연각緣覺(부처의 가르침에 의 하지 않고 홀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리를 깨달아 자유경에 도달한 성 자)을 통과하고, 보살(성불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으로서 위로는 부처를 따르고 아래로는 일체의 중생을 교화하는 부처의 버금 되는 성인), 불타佛陀(스스로 불교의 대도를 깨달은 성인)에 이르게 되 며, 자비는 보살, 불타의 단계에서 이를 실천하게 된다. 성문, 연각의 과정에서는 아직 자비를 실천하는 단계가 아니라고 한다. 인간은 세상의 모든 사물이 변화한다는 것, 즉 무상하다는 것을 자 각하지 못하고, 현실생활에 집착하고 있다. 이것이 고苦의 원인이다. 따 라서, 고苦를 없애기 위해서는 수행생활을 통하여 집착執着을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집착에서 떠나고, 고에서 해방되는 것이 곧 해탈解脫이 다. 이처럼 해탈하여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가야 비로소 참된 자비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석가의 사상을 체계화한 것이 4제四諦와 8정도八正道의 가르침이다. 4 제란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를 말한다. 고제苦諦란 ‘현세에서 의 삶은 모두 고통이다’라는 가르침이다. 집제集諦는 ‘고苦의 원인은 끝 없는 집애執愛(갈애渴愛)에 있다’라는 가르침이다. 멸제滅諦는 열반의 경지 를 이상으로 한다는 내용으로서 ‘고에서 해탈하기 위해서는 집착을 버 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도제道諦는 ‘열반에 이르는 데는 올바른 수행의 길이 있다’고 하는 가르침이다. 그 길이 팔정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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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의 요목要目이 있다.
①정견正見…모든 편견을 버리고 만물의 진상을 바르게 판단하라 ②정어正語…바르게 말하라 ③정업正業…살생이나 도둑질을 하지 말라 ④정명正命…정법正法에 따른 바른 생활을 하라 ⑤정념正念…잡념을 떠나 진리를 구하는 마음을 언제나 잊지말라 ⑥정정正定…번뇌로 인한 어지러운 생각을 털어버리고 바르게 정신을 집중시켜 마음을 안정시켜라 正思惟 ⑦정사유 …바르게 생각하라 正精進 ⑧정정진 …일심一心으로 노력하여 아직 발생하지 아니한 악을 낳 지 못하게 하고 선善을 발생하게 하라
그리고 인간에게서 괴로움이 생긴 원인을 추구하고, 12사항의 계열 을 세운 것이 12인연因緣(12연기緣起)의 가르침이다. 그것에 의하면 인간 에게 있어서 괴로움의 근본원인은 갈애渴愛로서 그 안쪽에 무명無明이 있 다고 한다. 무명이란 진여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데, 고통이나 번뇌는 본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으로서, 이 무명에서 일체 의 번뇌가 생긴다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 되기 위해서 지켜 야 하는 여섯 가지의 덕목이 있는데, 그것이 다음과 같은 6파라밀六波羅 密 (6파라밀다六波羅密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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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보시布施……자비심으로 남에게 조건없이 베풀어 주는 것 ②지계持戒……계율을 잘 지키는 것 ③인욕忍辱……고통을 참는 것 ④정진精進……불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 ⑤선정禪定……정신통일을 하는 것 ⑥지혜智慧……옳고 그른 것, 선악善惡과 시비를 판단하는 것
이상의 8정도나 6파라밀 등의 덕목의 근본이 되는 것은 자비이다. 그리고 자비의 기초가 되는 것이 우주의 본체로서의 진여眞如이다.10)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불교의 가치관도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불교 가치관의 설득력이 약화된 원인은 불교의 교리에 다음과 같은 문제점 이 있기 때문이다. 즉 우주의 본체라고 하는 진여가 구체적으로 어떠 한 것인가 하는 것이 분명치 않다는 것, 제법諸法(우주만상)이 어떻게 생성(연기緣起)되었는가 하는 것이 분명치 않다는 것, 무명은 왜 생겼는 가에 대한 근본적 해명이 없다는 것, 현실문제(인생문제, 사회문제, 역 사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수도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 수도생활이 현실문제의 해결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등이다. 그 외에 공산주의에 의한 도전이 또한 있어 왔다. 공산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공격하곤 했다. “현실사회에는 착취, 억압, 빈부의 격차 등 사회악이 충만해 있는데 그 원인은 무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본 주의사회의 체제적 모순에 있다. 불교의 수행은 개인의 구제를 위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요, 문제해결의 회피인 것이다. 현실문제를 해결하 지 않고 수행하는 것은 위선일 뿐이다.” 이와 같이 공격해 올 때 불교 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유효有效한 반론反論을 제시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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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슬람교 가치관의 취약성
이슬람교에서는 예언자 중에서 마호멧이 가장 위대하며, 경전 중에서 코란이 가장 완전하다고 믿고 있으며,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을 마호 멧과 같은 예언자로 믿고 있다. 그리고 코란 이외에 모세5경, 다윗의 시편詩篇, 예수의 복음서도 경전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교의 덕 목에는 유대교나 기독교의 덕목과 공통되는 점이 많은 것이 특징이 다.11) 이슬람교에는 6신과 5행이라는 믿음과 실천의 가르침이 있다. 6신이란 신神, 천사天使, 경전經典, 예언자豫言者, 내세來世, 예정天命에 대한 믿음을 말하며, 5행이란 신앙고백, 예배, 금식, 희사喜捨, 순례를 말한 다. 신앙의 대상은 알라신이며, 알라는 절대․유일하며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지배자이다. 알라는 어떠한 신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 이슬람 교의 신학자들은 99가지의 속성을 들고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본적 인 속성으로서 “깊은 자비”, “넓은 자애”를 들고 있다.12) 따라서 이슬 람교의 덕목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자비 또는 자애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이슬람교의 가치관에는 본래, 타종교의 가치관과의 공통 성, 조화성을 지니고 있으나 현실에 있어서는 오늘날까지 이슬람교 내 부에서의 교파간의 싸움, 타종교와의 전쟁 등 심각한 대립을 많이 보 여왔다. 그리고 그와 같은 대립에 편승便乘하면서 공산주의가 침투하곤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인류애는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다. 이슬람 교파간의 싸움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계급사회에 있어서는 계급애가 있을 뿐이다.” 이리하여 공산주의자들은 이슬람교와 타종교와의 대립을 이용하면서 이슬람교 국가의 일부를 친공親共 또는 용공容共으로 유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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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슬람교는 내적으로 교파간에 대립을 보일 뿐 아니라 외적 으로 타종교(예컨대 유대교, 기독교)와도 오래 전부터 심각한 대립관계 에 있어 왔던 것이다. 같은 종교 내의 교파끼리, 그리고 다함께 하나 님의 창조와 섭리를 믿는 타종교와 이 같은 심각한 대립을 보이고 있 는 것은, 그 자체가 일반인에게 대해서 이슬람교의 가치관의 설득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5) 인도주의 가치관의 취약성
인도주의人道主義(humanitarianism)는 휴머니즘(humanism, 인본주의) 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인도주 의와 휴머니즘은 구별된다. 휴머니즘이 인간의 해방을 목표로 삼고 인 격의 자주성을 추구해 온 사조思潮인데 비하여, 인도주의는 윤리적인 색 채가 강하며, 인격의 존중, 박애주의, 사해동포주의 등을 주장하고 있 다. 인간에게는 동물과 다른 인간다움이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존 중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막연한 사고방식이 인도주의이다. 그러나 인 도주의에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기본문제가 명확히 해명되지 않 고 있다. 그 때문에 인도주의는 공산주의의 공격에 대해서 약점을 노출시켜 왔던 것이다. 예컨대 인도주의적인 어느 경제인이 있다고 하자. 공산 주의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도 모르 는 사이에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 인간으로서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을 갖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청년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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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 그러면 공산주의자가 와서 그에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공부하고 있는가. 자기의 출세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 은 결국 부르주아를 위하여 봉사하는 결과만을 가져온다. 우리들은 인 민을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비판할 때 양심적인 청 년들은 반론하기 어려울 것이며,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더라도 마음속 으로는 공산주의 이론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 이 인도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의 공격 에 대하여 속수무책이었다. 이리하여 과거 적지않은 인도주의자들이 공산주의로 넘어가기도 했다(공산주의가 무너진 오늘날에 와서 물론 그들은 공산주의가 결국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지만).
이상으로 종래의 여러 가치관들이 오늘날에 와서 그 설득력을 상실 하게 된 경위를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가치관을 회복하는 길 은, 확고한 신관의 터 위에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七.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
새로운 가치관이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절대적인 가치관을 의미한 다. 가치관이 붕괴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에 와서 새로운 가치관의 정 립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나, 상대적 가치관을 가지고서 그 붕괴현상을 방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즉 절대적 가치관이 아니면 안된 다. 절대적 가치관은 절대자인 하나님이 어떤 속성을 갖고 있으며,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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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목적(창조목적)과 법칙(로고스)를 가지고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셨 는가 하는 것을 명백히 밝힌 기반 위에서만 세워지는 가치관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통하여 기쁨을 얻고자 사랑의 대상으로 인간을 창 조하셨다. 또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 인간의 사랑의 대상으로 서 만물을 창조하셨다. 절대적가치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절대적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세워진 진․선․미의 가치, 즉 절대적인 진, 절대 적 선, 절대적 미를 말한다. 새로운 가치관이란, 이와 같이 절대적인 사랑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한다는 견해이다. 그런데 가치관의 통일이란 가치(특히 선의 가치)의 판단기준判斷基準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의 덕목이 절대적가치 의 여러 표현형태表現形態라는 것, 따라서 모든 덕목은 절대적 사랑을 실 천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가치관은 종래의 기독교, 유교, 불 교, 이슬람교 등의 가치관을 완전히 부정하고 새롭게 세우자는 것이 아니다. 종래의 가치관의 기반이 붕괴되었으므로, 다시는 붕괴되지 않 는 확고한 것으로, 그리고 과거의 여러 가치관들을 다시 소생시킬 수 있는 것으로서 세워진 것이 새로운 가치관이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가치관이 그 절대성을 보증받기 위해서는 동 가치관은 다음과 같은 신 학적, 철학적, 역사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1) 신학적 근거의 제시
신학적 근거의 문제는 우주의 절대자, 즉 기독교의 “하나님”, 유교 의 “천”, 불교의 “진여”, 이슬람교의 “알라” 등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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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상호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가 풀리기 위해서는 절대자인 하나님이, 왜 인간과 우주 를 창조하셨는가 하는, 종래의 종교에서 밝히지 못했던 미해결의 문제 가 먼저 해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상론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하나님은 바로 심정의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심정이란 “사랑을 통하여 기쁨을 얻고자 하는 정적인 충동”이었다. 그 충동 때문에 하나님은 사 랑의 대상으로서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우주를 만드신 것이다. 즉 하나님을 `심정의 하나님'으로 규정함으로써 하나 님의 우주창조에 대한 필연적인 이유가 합리적으로 설명될 뿐만 아니 라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서 완성하기를 원하셨 으며,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기쁨은 최고에 이르게 된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3대축복을 내려주신 것이다. 즉 인간이 인격을 완 성하고, 가정을 완성하고, 주관성을 완성하게 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인간이 3대축복을 완성함으로써 성취되게 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종교의 덕목은 3대축복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창 조목적을 실현하는 데에 그 덕목의 취지가 있음을 알게 된다.
(2) 철학적 근거의 제시
다음은 철학적 근거의 제시에 관해서 살펴보자. 기독교나 유교, 불 교, 이슬람교의 가치관은 기원전 6세기경부터 기원후 7세기에 걸쳐 나 타났다. 당시는 군주의 명령을 백성들이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였다. 살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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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백성들에게는 이론적 비판력이라곤 태무殆無했기 때문에 권위 앞 에 무조건적인 순종은 당연지사當然之事였다. 따라서 석가, 예수, 마호멧 등 권위있는 분들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백성들은 무조건 따르는 사회 였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가치관을 현대의 합리적, 논리적인 사고방 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현대의 지성인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설명 방식을 통하 여 그들의 가치관을 현대인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현대인이 수용할 수 있는 방식이란 어떠한 것일까? 그것도 자연과학적 방법이다. 아무리 윤리적 덕목이라 하더라도 그 덕목이 과 학적인 법칙의 뒷받침을 받게 된다면 그러한 덕목은 현대의 지성인들 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자연을 연구하여 거기에서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발견하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나 동양에서 흔히 행해져 온 방법이었다. 예컨대 주자朱子는 자연법칙이 그대로 인간사회에 있어 서 윤리법칙이 된다고 함으로써 자연법칙과 윤리법칙의 대응성을 주장 하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와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연법칙을 잘못 인식하기는 했지만, 역시 주자와 같이 자연법칙과 사회법칙(사회생활 의 규범)의 동일성을 고집하면서, 사회도 자연변증법에 의해서 발전해 왔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데 있어서도 자연이나 우주의 관찰 을 통하여 거기에 작용하고 있는 근본적인 법칙을 발견한 후 거기에서 가치관을 도출하는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으며, 뿐만 아니라 우주를 꿰뚫고 있는 일관된 법칙, 즉 천도가 인륜․도덕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 이것이 곧 철학적 근거의 제시이다. 여기서 자연법칙과 윤리법칙은 과연 대응하는가, 즉 자연법칙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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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 윤리법칙에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통일사상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성상과 형상의 양 측면을 통일적으로 구비하고 있다. 따라서 성상면의 법칙인 윤리법칙과 형상면의 법칙인 자연법칙 에는 대응관계가 있다는 결론이 자동적으로 도출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을 어떻게 올바르게 인식할 것이냐 하는 것 이다. 이미 존재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은 대 립물의 투쟁에 의하여 자연이 발전한다고 봄으로써 자연을 잘못 파악 했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에 대한 잘못된 파악의 터 위에 세워진 투쟁 하는 인간상은 그릇된 인간상이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우주(자연)에 작용하고 있는 근본법칙은 변증법 이 아니고 수수법(수수작용의 법칙)이다. 그리고 존재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수수법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즉 ‘상대성’, ‘목적성과 중 심성’, ‘조화성’, ‘질서성과 위치성’, ‘개별성과 관계성’, ‘자기동일성과 발전성’, ‘원환운동성’ 등이다. 여기에서 우주의 법칙에 따라 새로운 가 치관(통일가치관)을 논하고자 한다. 우주에는 종적인 질서와 횡적인 질서가 있다. 달은 지구의 주위를 돌고,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으며, 태양계는 은하계의 중심핵 을 중심으로 돌고, 은하계는 우주의 중심을 중심하고 돌고 있다. 이것 이 우주에 있어서의 종적인 질서이다. 한편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 수 성, 금성, 지구, 화성, 수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이 일정한 궤 도를 그리며 돌고 있다. 이것이 우주에서의 횡적인 질서체계의 하나이 다. 이것들은 모두 조화로운 질서체계이며 모순이나 투쟁은 전혀 보이 지 않는다. 이 우주의 질서체계를 축소한 것이 가정질서이다. 따라서 가정에도 종적질서와 횡적질서가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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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종적질서에서 종적가치관이 성립된다. 가정에 있어서 부모는 자녀에게 자애를 베풀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한다. 이것이 가정에서 의 종적가치관이다. 이것을 사회, 국가에 적용하면 여러 가지의 종적 가치가 도출된다. 군주의 국민 또는 신하에 대한 긍휼이나 선정善政, 국 민 또는 신하의 군주에 대한 충성, 스승의 제자에 대한 사도師道, 제자 의 스승에 대한 존경과 복종, 연장자年長者의 연소자年少者에 대한 애호愛 護 , 연소자의 연장자에 대한 존경尊敬, 상관의 부하에 대한 권위와 명령, 부하의 상관에 대한 복종 등이 그것이다. 가정의 횡적질서에서 횡적가치관이 성립된다. 가정에는 부부간에 화 애和愛, 형제자매간에는 우애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동료, 이웃, 동포, 사회, 인류 등에 대한 가치관으로 확대․전개된다. 그리하여 화해, 관용, 의리, 신의, 예의, 겸양, 연민, 협조, 봉사, 동정 등의 덕목이 횡적가치 로서 성립하게 된다. 이와 같은 종적 및 횡적인 가치가 잘 지켜지면 사회는 평화를 유지 하고 건전하게 발전하나, 그렇지 못할 때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이러 한 가치관은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봉건사회의 유물이나 잔재 가 결코 아니며 인간이 영원히 지키지 않으면 안될 보편적인 인간 행 위의 규범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의 법칙이 영원하듯이 인간사회의 법칙도 이 우주의 법칙에 대응해서 영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주의 법칙에는 개별성의 법칙이 있는데 이에 대응한 것이 개 인적 가치관이다. 우주의 모든 개체는 각자의 특성을 지니면서 우주의 질서에 참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사회에 있어서도 각 개인은 고유 한 인격을 형성하면서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 개인적 가치관에는 순 수, 정직, 정의, 절제, 용기, 지혜, 극기, 인내, 자립, 자조, 자주, 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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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면, 청결 등이 있다. 이것들은 전부 개인으로서 자기를 수양하기 위 한 덕목들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종적가치관, 횡적가치관, 개인적가치관이 덕목으 로서는 특별히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공자, 석가, 예수, 마호멧 등이 이미 가르쳤던 내용들이다. 단지 종래의 가치관은 철학적 근거가 막연 함으로 인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그 설득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그 래서 여기에 확고한철학적근거를제시함으로써전통적인가치관까지도소 생될수있게된다.
(3) 역사적 근거의 제시
다음은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앞에서 언급한 새로운 가치 관은 역사적으로도 실증될 수 있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자연현상이 투 쟁에 의해 발전하듯이 인류역사도 역시 투쟁(계급투쟁)에 의해서 발전 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론’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역사는 투 쟁에 의해서 발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역사의 발전은 어디까지나 주체와 대상(지도자와 대중)의 조화적인 수수작용에 의해 이루어져온 것이다. 역사상에 투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계급투쟁은 아니었 다. 보다 선한 세력과 보다 악한 세력과의 싸움이었다. 가치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가치관과 가치관의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천도에 보다 가까운 편의 가치관(선편)과, 천도에서 보다 먼 편의 가치관(악편)과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는 선편이 악편에 패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결국은 천도에 가까운 선편이 승리해 왔다. 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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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도 “순천자順天者는 존存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라고 했다. 그런데 선악의 투쟁은 역사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역사를 보다 선의 방향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제8장 “역사론”을 참조).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국가의 여러 주권들이 흥망을 반복해온데 비하 여 선을 표방했던 종교는 계속하여 오늘날까지 존속해 왔다. 또 성인 이나 의인들이 비록 악의 세력들에 의하여 희생되는 수가 많았지만 그 대신 그 성인이나 의인들의 가르침과 업적은 후세 사람들의 삶에 교훈 과 귀감龜鑑이 되곤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천도가 그대로 살 아서 역사에 작용해왔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역사는 어떤 주 권자라도 이 천도를 거역할 수 없다는 것과 만일 천도를 거역하게 되 면 그 거역한 자가 비운에 쓰러지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 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역사의 법칙은 역사의 출발점에서 이미 목표가 세워져 있었다는 점이다. 우주는 목적(창조목적)을 중심하고 이법理法 (로고스)에 따라 창조되었다. 생물의 성장을 보아도 종자(또는 알)속에 이미 이법理法이 내재해 있고, 그 이법에 따라 종자는 성장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민족의 역사,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도 역시 출발점에 일정 한 이념이 있었고, 그것을 목표로 하여 역사는 발전해 온 것이다. 즉 역사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역사의 출발점에 이미 숨겨져 있었던 것이 다. 그것이 신화나 설화 등에 상징적으로 표시된 인류나 민족의 이상理 想 , 건국의 이상이었다.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인류역사는 죄악사로서 출발했으나, 하나님은 복귀해야 할 창조이상의 세계상을 상징과 비유가 섞인 일종의 신화형 식으로 인간에게 알리곤 하셨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의 사건의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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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나, 이사야서나 계시록 내의 예언적 기사, 그리고 한민족의 경우 의 단군신화檀君神話 등이 그 예이다. 대개 오늘날까지의 인류의 이상, 민족의 이상이란 선하고 밝고 평화로운 세계, 행복한 세계의 실현이었 다. 그것이 바로 천도에 맞는 세계의 구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역사 의 출발점에 이미 역사의 목표(천도의 세계의 실현)가 세워져 있음을 하나님은 신화나 예언의 형식으로 가르쳐 주곤 하셨다. 따라서 역사가 목표로 삼고 있는 미래의 세계는 천도에 부합된 세계이며 가치관이 확 립된 세계이다. 이상으로 신학적, 철학적, 역사적 근거의 제시를 마친 다.
八. 가치관의 역사적 변천
종래의 서양 가치관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자. 이것은 절대 적 가치를 탐구하던 그리스철학과 기독교가치관이 상대적인 가치관에 압도壓倒되어 결국은 무력화되어 버린 역사적인 과정을 파악하기 위해 서이며, 새로운 가치관(절대적 가치관)에 의하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세 계적인 혼란을 수습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1) 그리스시대의 가치관
1) 유물론적 가치관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이오니아지방에 유물론적인 자연철학이 출현했다. 그 당시 그리스는 씨족사회로서 신화를 중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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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였으나, 이오니아의 철학자들은 자연현상에 대한 신화적인 설명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와 인생을 자연법칙을 통하여 설명하고자 했다. 이오니아지방에는 밀레토스라는 도시가 있었으며, 그곳은 무역이 왕 성하여 상인들은 지중해의 전역에 걸쳐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현실 적이고 행동적이었다. 그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점차 신화적 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 무역도시 밀레토스에 기원전 6 세기경부터 유물론적인 철학자들이 출현하였다. 이들을 밀레토스학파 라 하며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등이 그 대표자였다. 이들은 주로 만물의 근원根源(arche)에 대해서 물음을 던졌던 것이다. 만물의 근원에 관하여 탈레스(Thales, 624~546 B. C.)는 그것을 물水이라고 설명하였고,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611~547 B. C.)는 무한자無限者(apeiron),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585~528 B. C.)는 공기空氣라고 하였으며, 그 외에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535~475 B. C.)는 불火이라고 하였고,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460~370 B. C.)는 원자原子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연철학 (유물론)과 더불어 객관적,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2) 자의적 가치관(궤변적 가치관)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에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여 민주정치가 발 달하였다. 청년들은 입신출세立身出世를 위하여 지식을 배우려 하였고, 그 때문에 특히 변론술辯論術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변론술을 가르쳐서 일정한 보수를 받는 학자들이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소피스트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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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그리스철학은 자연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으나, 자 연철학만으로는 인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서부터 인간사회의 여러 문제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런데 자연법칙 은 객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비하여 인간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법이나 도덕은 나라에 따라 다르고, 또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법이나 도덕에는 어떤 객관성이나 보편성이 없었으며, 그 때문에 사회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사람들은 주로 상대주의相對主義 혹은 회의주의적 懷疑主義的 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예컨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481~411 B. C.)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尺度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진리의 기준이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뜻이며, 따라서 이것은,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상대주의를 표시하는 말이다. 소피스트들의 활동은 처음에는 민중을 각성시키는 일종의 계몽적啓蒙 的 인 효과를 주었다. 그러나 점차로 회의론의 입장을 취해가면서 ‘진리 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들은 변론辯論의 방법만을 중시하고, 궤변을 해서라도 논쟁에 이기려 고만 하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궤변가詭辯家라고도 불려지게 되었다.
3) 절대적 가치관
① 소크라테스 이러한 상황하에 소크라테스(Socrates, 470~339 B. C.)가 나타나서 이같은 현상을 크게 개탄하였다. 그는 “소피스트는 아는 척하나 실제 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인간은 먼저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지적하면서 인간은 먼저 자신이 무지함을 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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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참다운 지에 이르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역설했다. 그리고 도덕의 근거는 인간의 내면에 내재하는 신(다이모니온)에서 구했으며 따라서 도덕은 절대적․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덕이 란, 진실하게 살기 위한 지知의 애구愛求를 의미하며 “덕이 지이다”라는 것이 그의 핵심사상이었다. 또 그는 덕을 안다면 반드시 실천하지 않 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 참다운 지를 얻을 수 있을까. 참다운 지 는 타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며, 또 자기자신에 의해서 깨달아지는 것도 아니다. 타인과의 대화(문답)를 통해서만 자기와 타인이 함께 납 득할 수 있는 보편적진리(참다운 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스크라테스 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절대적․보편적인 덕을 확립함으로써 아테 네를 사회적 혼란에서 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② 플라톤 플라톤(Platon, 427~347 B. C.)은 변화하는 현상계(감각계)의 배후 에 변치 않는 본질의 세계가 있다고 보고 그것을 이데아계(예지계)라 고 불렀다. 그런데 인간은 혼이 육체에 갇혀 있기 때문에 보통 감각계 를 참된 실재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본래 인간의 혼이 육체에 깃들기 전에는 이데아계에 있었으나 육체에 깃들게 되면서 이데아계를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인간의 혼은 항상 참된 실재인 이데아계 를 동경憧憬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이데아의 인식이란 흔히 이 전에 알고 있던 것을 상기想起하는 일에 불과하다. 윤리적인 이데아에는 정의의 이데아, 미의 이데아, 선의 이데아가 있으나 그중에서 선의 이 데아가 최고의 이데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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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인간이 가져야 할 덕으로서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네 가지 덕을 들었다. 특히, 국가를 통치하는 자는 지혜의 덕을 가진 철 학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바로 선의 이데아를 인식한 사람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선의 이데아는 모든 가치의 근원이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계승하여 절대적인 가치를 탐구했던 것 이다.
(2) 헬레니즘․로마시대의 가치관
헬레니즘시대란 알렉산더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 B. C.)이 페르샤제국을 멸한 후부터 로마군이 애급을 정복하여 지중해 세 계를 통일할 때까지의 약 3세기간을 말한다. 이 시대는 오로지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구하는, 개인주의 풍조가 지배하던 때였다. 폴리스 국가의 붕괴로 국가를 중심으로 한 가치관은 소용이 없게 되었고 그리 스人들은 불안정한 사회정세하에서 부득이 개인의 생활방식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4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 (cosmopolitanism)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사상은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회의학파 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개인주의의 사조속에서 인간은 자기의 무력성 을 통감하게 된다. 그러다가 로마시대에 이르러 인간은 인간이상의 위 치에 있는 어떤 존재에 의지하기를 원하게 되면서 점차로 종교적인 경 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드디어 신플라톤주의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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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토아학파
우주만물에는 로고스(법칙, 이성)가 깃들어 있으며 우주는 법칙에 따 라 질서정연하게 운행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로고스가 깃들어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이성에 의해 우주의 법칙을 알고 “자연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 스토아학파의 주장이었다. 스토아학파는 인간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정욕情欲이 있기 때문이라 고 생각하고 정욕을 떠나 아파테이아(apatheia) -어떤 것에도 미혹되 지 않는, 완전히 평정한 마음의 상태(이욕상태離欲狀態)- 에 도달해야 한 다고 하면서 금욕禁欲을 주장하였다. 즉 아파테이아가 최고의 덕이었다. 그리스人이거나 동방인이거나 전부 우주의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스토아학파에 있어서의 로고스는 신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로서 동포인 것이다. 이리하여 사해동포주의(cosmopo- litanism)가 세워지게 되었다. 스토아학파의 창시자는 키프로스의 제논 (Zenon, 336~264 B. C.)이었다.
2) 에피쿠로스학파
금욕을 주장한 스토아학파와는 반대로 쾌락을 선으로 설명한 사람들 이 에피쿠로스(Epikuros, 341~270 B. C.)를 창시자로 하는 에피쿠로 스학파이다. 에피쿠로스는 현세에서의 개인적 쾌락만이 그대로 덕과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이 쾌락은 육체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며, “육체에 있어서 고통이 없는 것과 영혼에 있어서 흐트러짐이 없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고통이 없는 평안한 마음의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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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아타락시아(ataraxia) -이고상태離苦狀態- 라고 부르고, 이것을 최고 의 경지로 삼았다.
3) 회의학파
인간은 사물에 대해서 이렇게 또는 저렇게, 즉 어떻게든지 판단하려 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고로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면 일체一切 의 판단을 정지하라고 엘리스의 퓌론(Pyrrhon, 356~275 B. C.)은 말 했다. 이것을 판단중지判斷中止(에포케, epoche)라고 한다. 인간에 있어 서 진리는 인식할 수 없으므로 일체의 판단을 그만두는 것이 소망스럽 다고 회의학파懷疑學派는 주장했다.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도, 에피쿠 로스학파의 ‘아타락시아’도, 회의학파의 ‘에포케’도 모두 개인적인 마음 의 평안을 얻고자 하는 시도였다. 이때에 이르러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이 탐구했던 가치의 절대성은 의문시되기 시작한다.
4) 신플라톤주의
헬레니즘 시대에 이어지는 로마 시대에 있어서도 그리스 철학은 그 대로 계승되었으나 헬레니즘․로마시대의 철학이 궁극에는 플로티누스 (Plotinus, 205?~270)의 신플라톤주의에 당도했던 것이다. 플로티누스 는 일체의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유출流出되었다고 하는 유출설流出說을 주장했다. 즉 처음에는 하나님의 완전성에 가까운 누스(nous, 이성), 다음에 영혼, 그리고 가장 불완전한 물질이라는 식으로, 단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본래 그리스철학은 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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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이 대립한다는 이원론적인 입장이었으나 플로티누스는 하나님이 전체라고 함으로써 일원론을 주장했다. 인간의 혼은 한편으로는 감성적인 물질세계로 흘러감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누스에서 하나님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그래서 인간은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떠난 후 하나님을 직관直觀함으로써 하나님과 하 나가 된다고 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최대의 덕이라고 하였다. 그리 하여 무아無我(엑스타시스, ecstasy)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 가 된다고 하면서 그것을 최고의 경지라고 하였다. 그리스풍의 철학은 플로티누스와 더불어 종언을 고했지만, 신플라톤주의는 다음에 나타나 는 기독교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3) 中世의 價値觀
1) 아우구스티누스
기독교신앙을 철학적으로 기초를 세운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354~430)였다. 그에 있어서 하나님은 영원, 불변, 전지, 전능하고, 최고의 선, 최고의 사랑, 최고의 미적美的 존재이며 우주의 창조주였다. 플라톤에 있어서 이데아의 세계는 그 자체로서 독립된 세 계였으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데아를 하나님의 정신속에 존재하는 것 으로 보았으며 모든 것은 이데아를 원형原型으로 하여 창조되었다고 주 장했다. 또 세계는 하나님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유출된 것이라고 하는 신플라톤주의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떠한 재료도 사용하지 않고 완전 한 무에서 자유로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창조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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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죄罪의 존재인가. 인간시조 아담이 자유를 악용한 후 하나님 을 배반하여 타락했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恩寵에 의 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 님의 구원을 소망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참다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여 믿음, 소망, 사랑의 세 가지 덕을 권하였다.
2) 토마스 아퀴나스
기독교신학을 확립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덕으로서 신학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을 들었다. 신학 적인 덕은 기독교의 3원덕三元德, 즉 믿음, 소망, 사랑이며, 윤리적인 덕 은 그리스철학의 4원덕四元德, 즉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이다. 신학적인 덕은 인간을 지복至福으로 인도하는 바, 그 중에서도 사랑이 궁극적인 것이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인간은 지복을 받기에 합당하 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윤리적인 덕은 이성의 질서에 복종하는 것이 다. 윤리덕은 신학적인 덕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4) 근세의 가치관
중세가 지나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이렇다할 새로운 가치관이 나타나 지 않았다. 근세의 가치관은 그리스철학이나 기독교 가치관의 연장 또 는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는 종래의 모든 가치관을 의심 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소위 회의주의懷疑主義는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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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회의를 통하여 보다 더 확실한 것을 알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 결 과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근본원리에 도 달하였다. 그는 인간이 이성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여기에 인 간은 이성에 의해 정념을 지배하면서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행위해야 한다는 데카르트의 도덕관이 생겨났다. 파스칼(B. Pascal, 1623~1662)은 인간을 위대함도 갖고 있고, 어리 석음도 갖고 있는 모순적 존재라고 보았다. 그것을 그는 “인간은 생각 하는 갈대”라고 표현했다. 인간은 자연속에서는 가장 약하나 “생각함” 으로써 가장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참 행복은 이성에 의한 것 이 아니며 신앙에 의해서, 즉 심정에 의해서 하나님께 이르는 데에 있 다고 주장했다.13) 칸트(I. Kant, 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 력비판’에서 각각 진․선․미가 어떻게 해서 성립하는가를 논하였다. 동시 에 그는 이 3개의 비판에서, 인간은 이러한 각각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특히 선, 즉 도덕에 있어서 인간은 실천이성으로 부터 오는 “무엇 무엇을 하라”라는 무조건적인 명령 -정언명법- 에 따라 행위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벤담(J. Bentham, 1748~1832)은 고통이 없는 쾌락의 상태를 행복 이라 하면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원리를 세웠다. 이것이 그 의 공리주의功利主義이다. 그는 쾌·고快․苦를 양적量的으로 계산함으로써 인 간 행위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산업 혁명을 배경으로 하여 생긴 가치관으로서 형상적形狀的인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1813~1855)는 인간은 미적 실존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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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的 實存段階 , 윤리적 실존단계倫理的實存段階를 거쳐서 종교적 실존단계宗敎的實 存段階 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실존의 3단계三段階를 주장했다. 즉 인 간은 쾌락 속에서만 사는 것(미적 단계)은 아니며, 또 윤리를 지키면서 양심적으로 사는 것(윤리적 단계)만으로도 불충분하며,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종교적 단계)고 역설했다. 키에 르케고르는 참다운 기독교의 가치관을 부흥시키려고 애썼던 것이다. 니체(F. Nietzsche, 1844~1900)는 19세기말의 유럽을 모든 가치가 붕괴되어 가는 니힐리즘의 시대라고 보았다. 그에 있어서, 기독교는 강자를 물리치고 인간을 평균화한 노예도덕이며, 니힐리즘을 초래한 최대의 원인자였다. 그래서 그는 “권력에의 의지”를 기준으로 한 새로 운 가치관을 제시한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세계에서 강력하게 살자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었다. 진․선․미의 가치를 통일적으로 다루면서 가치를 철학의 중심문제로 취급한 사람은 신칸트학파의 빈델반트(W. Windelband 1948~1915)였 다. 칸트는 사실문제와 권리문제를 구별하였으나 이것을 이어 받은 빈 델반트는 사실판단事實判斷과 가치판단價値判斷을 구별하였다. 그리고 철학 의 임무는 가치판단을 취급하는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판단은 사실을 개관적으로 인식한 명제命題이며, 가치판단은 사실 에 대하여 주관적인 평가를 내린 명제이다. 예컨대, “이 꽃은 붉다”라 든가, “그는 … … 을 하였다”라는 것은 사실판단이며, “이 꽃은 아름 답다”라든가, “그 행위는 선이다”라고 하는 것은 가치판단이다. 그리 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연과학이 다루어 온 것은 사실판단이고, 철 학이 다루어 온 것은 가치판단이라고 하면서 사실과 가치를 완전히 분 리해서 다루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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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기에 이르러 “언어의 논리적 분석”을 철학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분석철학이 생겨났다. 분석철학은 가치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입장 을 취하였다. ①가치는 직각直覺에 의해 알 수밖에 없다. ②가치판단이 란 발언자의 도덕적인 찬성·불찬성贊成․不贊成이라는 감정의 표명에 불과 하다. ③가치론은 가치언어의 분석에만 의의가 있다. 이리하여 분석철 학은 대체적으로 철학에서 가치관을 배제하려고 하였다. 듀이(J. Dewey, 1859~1952)에 의해 대표되는 프래그머티즘은 생활 에 대한 유용성有用性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따라서 진․선․미와 같은 가치개념價値槪念도 사물을 유효하게 처리하기 위한 수단이요, 도구 밖에 되지 않는다고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입장에 있어서, 무엇이 가치있는 것인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며 비록 동일인물에 있어서도 때 에 따라 달라진다. 이 같은 듀이의 입장은 상대적인 가치다원론價値多元論 이었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의 가치관을 살펴보자. 공산주의의 가치관으로서는 예컨대 투가리노프(B. P. Tugarinov, 1898~)의 다음과 같은 정의가 있다. “가치란 역사적으로 특정한 사회 또는 계급에 속한 사람들에게, 현실의 것으로서 또는 목적 내지 이상 으로서 유용하고 필요한, 자연 및 사회의 현상이다.”14) 즉 공산주의에 있어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유용하다는 것이 가치의 기준이었다. 여기에서 부르주아적 가치관이라고 일컬어지는 기존의 종교적 가치관 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 공산주의 가치관의 전제가 되고 있다. 그 리고 공산주의에 있어서의 도덕이란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는데 있어 서 집단생활을 추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헌신, 복종, 성실, 동지애, 상호부조 등이 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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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새로운 가치관의 출현의 필요성
이와 같이 역사상에 많은 가치관들이 나타났으나, 그것은 절대적 가 치를 수립하려고한 시도들이 모두 붕괴되어 온 역사였다고 볼 수 있 다. 고대 그리스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참다운 지를 추구함 으로써 절대적인 가치를 수립코자 하였다. 그러나 폴리스사회의 붕괴 와 더불어 그리스철학의 가치관도 붕괴되어 버렸다. 다음에 기독교가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중심으로 하여 절대적인 가치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결국 기독교의 가치관은 중세사회를 지배하였으나, 중세사회 의 붕괴와 더불어 점차 힘을 잃고 말았다. 근대에 이르러 데카르트나 칸트는 그리스철학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중심으로 한 가치관을 수립했으나 가치관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파 악이 애매함으로 인하여 그 가치관은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였다. 한편 파스칼이나 키에르케고르는 참다운 기독교의 가치관을 부흥시키 려 했지만, 확고한 가치관을 수립하지는 못하였다. 신칸트학파는 가치의 문제를 철학상의 주요문제로서 다루었으나 가 치를 취급하는 철학과 사실을 취급하는 자연과학을 완전히 분리시켜 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과학자들이 가 치를 도외시하고 사실만을 연구한 결과, 인류를 대량으로 살육하는 병 기의 개발, 자연환경의 파괴, 공해문제 등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던 것 이다. 공리주의나 프래그머티즘은 물질적인 가치관으로서 완전히 상대적인 가치관이 되었으며, 분석철학은 가치부재價値不在의 철학이었다. 그리고 니체의 철학이나 공산주의는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반가치反價値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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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철학이나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가치관은, 오늘날 더 이상 효력이 없는 것으로 보여지게 되었으며, 전통적인 가치관은 취약화되면서 자연과학에서 분리되어 드디어는 철학의 영역에서도 배 제되기에 이르렀다. 그럼으로써 오늘의 사회혼란은 극도에 달하게 되 었다. 여기에 전통적인 가치를 소생시키면서 절대적 가치를 수립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의 출현이 절실히 요청된다. 따라서 새로운 가치관 은 유물론을 극복하고, 올바른 가치관으로 과학을 인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치와 사실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관계에 있는 것이어서 사물 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이 통일되어 있는 것과 같이, 가치와 사실도 본 래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고 자 출현한 것이 본 가치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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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교 육 론
Theory of Education 오늘날 청소년의 탈선, 성도덕性道德의 퇴폐, 폭력사건의 빈발頻發 등에 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은 위기에 처해 있다. 그 러나 이와 같은 혼란을 구할 수 있는 교육이념은 발견되지 않은 채 오 늘의 교육은 방향감각을 잃고 있으며, 사제師弟의 도道마저 붕괴되고 있 다. 즉 학생은 스승을 존경하지 않으며, 스승은 권위와 정열을 상실하 고 있다. 그 결과 일부의 스승은 지식을 팔고 학생은 지식을 사는 것 같은 관계가 되어 학교는 지식의 매매장賣買場으로 전락되어 버린 경향 마저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대학가大學街에 침 투하여 학내學內를 광란狂亂의 장場으로 삼았으며, 교육이념 부재의 상황 속에서 공산주의의 공세를 강화시키곤 하였다. 민주주의의 교육이념이란, 주권재민主權在民, 다수결주의多數決主義, 권리 평등權利平等 등의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면서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자기의 책임을 다한 터 위에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 즉 민주 적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교육이념에 대하여 공산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공격하곤 했다. 계급사회에서 지배층이 노동자, 농민들의 권리를 존중 할 수 있는가. 계급사회에서 의무와 사명을 다 한다는 것은 권력층의 충실한 종이 되는 것 아닌가. 이것은 참다운 민주주의가 아니다. 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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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민주주의란 인민대중인 노동자나 농민들을 위한 민주주의, 즉 인민 민주주의여야 한다. 따라서 참된 민주주의교육은 인민을 위한 교육이 어야 하며, 참된 교육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사회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선전한다. 공산주의의 이와 같은 참소는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착취, 억압, 부정, 부패 등의 사회적 구조악構造惡이 남아있는 한, 설득력을 잃지 않을 것 이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와 같은 사회악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가 치관운동이 전개되어야 하며, 새로운 교육이념이 확립되어야 할 것이 다. 새로운 교육이념은 인간의 성장에 대하여 본래 하나님이 원했던 기준 을 근거로 해서 세워져야 한다. 그것은 혼미한 오늘의 교육에 방향성 을 제시하고 미래사회에 대하여 교육의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 이어야 한다. 즉 다가오는 미래의 이상사회를 대비하기 위한 교육론이 어야 한다. 본 교육론(통일교육론)은 바로 이와 같은 교육론으로서 제 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육이론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교육의 이념, 목 표, 방법 등에 관한 것으로서 소위 교육철학이 이에 해당하고, 다른 하나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교육현상을 취급하는 측면으로서 교육과학 敎育科學 이 이에 해당한다. 교육과학은 교육과정(커리큘럼), 교육평가, 학 습지도, 학생지도, 교육행정, 교육경영 등을 연구하는 측면이다. 교육에 있어서의 이 두 가지 측면은 성상과 형상의 관계에 있다. 그 리하여 교육철학은 성상적교육性相的敎育이고, 교육과학은 형상적교육形狀的 敎育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과학적 교육학이 과학 존중의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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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속에서 크게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철학은 경시되어 쇠퇴하 고 있다. 오늘날의 교육이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곧 교육철 학의 부재不在를 뜻한다. 따라서 오늘날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은 새 로운 교육철학의 확립이며, 통일교육론統一敎育論은 바로 그러한 교육철학 에 해당하는 것이다.
一. 통일교육론의 원리적 근거
(1) 하나님에의 닮기(상사성)와 3대축복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셨으며(창세기1:27), 창조가 끝난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 만물을 주관하라(창세기1:28)는 축복 (3대축복)을 내리셨다. 이것이 교육의 근거가 된다. 즉 교육이란 하나 님을 닮도록 자녀를 양육시키는 것이며,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을 닮도 록 인도하는 노력인 것이다.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신상神相과 신성神 性 을 닮는다는 뜻이다. 인간은 날 때부터 신상(성상․형상, 양성․음성, 그 리고 개별상)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주 극히 미숙한 상태 에 있으며, 성장하면서 점차로 하나님의 신상神相을 닮아간다. 신성神性 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성장하면서, 신상에 있어서는 하나 님의 성상·형상性相․形狀, 양성·음성陽性․陰性, 개별상個別相을, 그리고 신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심정心情, 이법理法, 창조성創造性 등을 온전히 닮게 되 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 신 후,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만물을 다스리라는 3대축복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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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다. 즉, “생육하라”(be fruitful)는 말은 개체의 인격을 완성하라는 뜻이며,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는 말은 부부가 되어 자손을 번식 하라는 의미이고 “땅을 정복하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 ”는 말은 만물을 주관主管하라는 의미이다. 이 3대축복을 성취함으로써 인 간은 하나님의 신상神相과 함께 하나님의 신성神性, 즉 심정, 이법, 창조 성을 계승하여 완전성完全性, 번식성繁殖性, 주관성主管性에 있어서 하나님을 온전히 닮게 되는 것이다(그림 5-1). 다음에 완전성, 번식성, 주관성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로 한다. 이 3대축복에서 교육의 이념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림 5-1. 하나님에의 닮기와 삼대축복
1) 완전성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 라”(마태 5:48)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으라는 뜻 이다. 완전성이란 성상과 형상의 통일을 말한다. 하나님에 있어서 성 상과 형상은 심정을 중심하고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원만한 수수작 용을 함으로써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를 이루고 있다. 이 상태가 완전성完全 性 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는다는 것은 인간에 있어서도 심정을 중심으로 하여 성상과 형상이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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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형상에는 ‘본성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네 가지의 유형類型이 있지만 여기서는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을 말한다. 그래서 생심과 육심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생심이 주체主體, 육심이 대상對象이 되지 않으면 안 된 다. 즉 생심이 육심을 주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심은 진선미의 가 치를 추구하고, 육심은 의식주 및 성性을 추구한다. 따라서 생심과 육 심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진선미의 생활을 제1차적으로, 의식주의 생 활을 제2차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생심과 육심의 수 수작용의 중심은 심정이며 사랑이다. 결국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진선 미의 생활을 중심으로 의식주의 생활이 영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것이 바로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는다는 뜻이다. 인간이 어렸을 때는 진선미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하지만 성장함에 따라 점차 심정이 발달하 여 사랑을 중심한 참된 생활, 선한 생활, 아름다운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점차로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아가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영인체와 육신의 이중적 존재이므로 인간의 성장에는 영인체의 성장과 육신의 성장이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생육하라”라 는 제1축복은 육신의 성장의 의미도 있으나, 주로 영인체의 성장, 즉 심령기준心靈基準의 향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비록 영인체의 성장이라 하 더라도, 육신을 터로 하고서만, 즉 성상(영인체)과 형상(육신)의 수수 작용에 의해서만 영인체가 성장한다. 이렇게 해서 다 성장하여 하나님 의 완전성을 상속받으라는 뜻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제1의 예약축 복豫約祝福이다.
2) 번식성
인간은 하나님의 번식성繁殖性을 닮으라는 것, 즉 인간이 자녀번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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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에까지 성장하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양성, 음성의 조화체이듯이 이 하나님의 양성․음성의 조화를 닮으라는 뜻이다. 인간에 있어서의 양 성․음성의 조화란 부부의 조화를 말한다. 하나님의 속성인 성상․형상의 수수작용(통일)과, 양성․음성의 조화에 의해서 인간이 창조되었다. 이것 은 하나님의 번식성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도 마음과 몸의 통일과 양 성․음성(남성과 여성)의 조화에 의하여 자녀를 번식하게 된다. 하나님의 번식성을 닮으라는 말은, 하나님과 같이 양성․음성이 원만 한 수수작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한 남성 과 한 여성이 결혼을 하여 자녀를 번식하는 자격을 구비하도록 성장하 라는 의미이다. 즉 남성은 남성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갖추고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갖추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남편으로 서의 도리,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 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성장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자격을 갖춘 후 결혼하여 자녀를 번식하라 는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제2의 예약축복豫約祝福이 된다.
3) 주관성
그리고 또 인간은 하나님의 주관성主管性을 닮지 않으면 안 된다. 주 관성을 닮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는다는 뜻으로서 하나님 의 창조성이란 심정(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대상(신생체)을 만드는 능 력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창조성을 가지고 인간 및 만물을 창 조하고 주관하고자 한다. 본래, 인간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받아서 심정을 중심으로 하여 만물을 주관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 다. 즉 인간이 완성하면 그와 같은 능력을 구비하게 되며, 이것이 제3 의 예약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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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모든 산업활동은 일종의 만물주관에 해당한다. 농민이 논밭 을 경작하는 것은 토지에 대한 주관이요, 노동자가 공장에서 기계를 사용하여 원료를 제품으로 만드는데, 이것은 기계나 원료에 대한 주관 이다. 또 어업은 바다나 물고기에 대한 인간의 주관이요, 임업은 산이 나 나무에 대한 인간의 주관이다. 만물을 주관한다는 말은, 만물에 대하여 창조성을 발휘한다는 뜻이 다. 창조성은 4위기대의 측면에서 보면, ‘내적4위기대’와 ‘외적4위기대’ 를 형성하는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농업에 있어서 농민은 새로운 아 이디어(창조성)를 가지고 창의적으로 보다 많은 수확을 올리고자 노력 하게 된다. 상업에 있어서도 아이디어와 창의력이 없으면 성공하지 못 한다. 요컨대 농업, 광업, 공업, 상업, 임업, 어업 등은 모두 인간의 창 조성 발휘의 대상이며 만물의 주관이다. 과학이나 예술도 만물주관의 범주에 들어가며, 사회를 주관하는 것 즉 정치하는 것도 만물주관 속 에 속한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성을 계승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성은 심정을 중심한 창조성인데 타락으로 인하 여 심정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자기 즉 이기심을 중심한 창조성이 되 고 말았다. 그 때문에 인간은 이러한 창조성을 가지고 사회나 자연에 피해를 끼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전쟁무기의 생산이라든지 공해증 대 등이 그 예이다. 따라서 학생을 지도함에 있어서 교사들은 새로운 교육론의 입장에서 학생들이 심정을 중심한 창조성을 발휘하도록, 즉 하나님의 주관성을 닮도록 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인간의 성장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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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으나, 태어나면서 곧바로 하나님을 닮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는 일정한 성장기간이 없어서 는 안 된다. 피조세계는 시간․공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 간은 소생蘇生, 장성長成, 완성完成의 3단계에 걸쳐 성장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을 닮게 된다. 닮되 완전성完全性, 번식성繁殖性, 주관성主管性을 닮게 된다. 따라서 성장이란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으로서 하나님의 인격 적인 측면과 하나님의 양음의 조화의 측면,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아 나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3대축복이란, 인간이 완성한 후, 하나님 의 완전성, 번식성, 주관성을 상속받는다는 의미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3대축복은 ‘3대 예약축복’이다. 그런데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이 3대축복은 성취되지 않았다. 이 3대축복은 창세기에 있는 대로 “…… 하라”는 따위의 명령형식命令形式의 축복이다. 비록 인간은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취소된 것이 아니며, 명령(축복) 그 자체 는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이것은 천의天意가 인간의 잠재의식을 통하여 3대명령, 즉 3대축복을 성취하도록 작용해 온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간은 무의식중에도 3대축복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노력하게 된다. 즉 타락사회에 있으면서도 인간은 모두 자기도 모르게 그와 같은 천의天意 에 따라 비록 서툴기는 하지만 인격적으로 성장하여, 좋은 상대를 찾 아서 가정을 만들고 자연을 지배하거나 사회를 개선하고자 노력해 왔 던 것이다. 인간에게 성장욕成長欲, 결혼욕結婚欲, 지배욕支配欲, 개선욕改善欲 등이 있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욕 망이 오늘날까지 온전히 달성되지 못하였으니 그것은 인간시조의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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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었다. 여하간에 본연의 세계에 있어서, 인간은 3대축복을 완성하기 위하여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 이외의 만물도 성장한다. 그런데 만물 은 원리자체의 자율성自律性과 주관성主管性에 의해 성장한다. 즉 생명이 지향하는 대로 맡겨두면 자연히 성장하는 것이다. 원리자체의 자율성, 주관성이란 바로 생명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 육신 은 만물과 마찬가지로 원리자체의 자율성과 주관성에 의해 성장하지 만, 영인체의 성장은 그렇지 않다. 영인체는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할 때에만 성장하게 되어 있다. 인간에게 책임분담이 부과된 것은 그 때 문이다. 책임분담에 의한 성장이란 인간이 자신의 책임과 노력에 의해 인격을 향상시켜 나아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의사로써 규 범(원리)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체험)하도록 노력하지 않으 면 안 되는 것이다. 인류시조인 아담․해와는 하나님의 계명戒命을 지키면서 성장하여 하나 님의 심정을 체휼한 다음, 부부가 되어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담․해와는 전인류를 대표하는 최초 의 인류의 조상이 되어야 했으므로 그들에게는 자기의 책임분담 뿐만 아니라 후손의 대부분의 책임분담까지도 메워져 있었다. 따라서 하나 님은 아담․해와의 책임분담에 대하여 절대로 干涉하시지 않는다. 아담․해와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와 같은 무거운 책임분담을, 하나님 의 계명을 지키면서 완수하게 되면, 그 자손들은 지극히 적은 분량의 책임분담만으로도, 즉 부모의 가르침에 순순히 따르기만 하면, 완성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 때문에 아담․해와의 경우, 이 3대축 복을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순전히 자신들의 책임만으로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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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담․해와가 완성한 뒤, 자녀들 이 그 부모의 가르침에 순순히 따른다는 말은 부모의 가르침 즉 부모 의 교육을 자식들이 받아야 함을 뜻한다. 여기에 부모의 자녀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이 생긴다. 바꾸어 말하면 자녀가 해야할 책임분담을 위해서 부모의 교육이 필요하다. 여기에 교 육의 이념이 세워진다. 즉 부모가 자녀들을 가르쳐서 3대축복을 완성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교육의 근본이념이 되는 것이다. 따라 서 교육의 본래의 장소는 부모가 상주하는 가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정보량이나, 교육내용이 증대하게 되어 현실적 으로 부모만으로는 불가능하므로, 교육의 장소는 필연적으로 가정에서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로 옮겨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 대신 학교 에서 스승이 부모를 대신하여 교육하게 된다. 따라서 교사는 부모의 심정으로 부모를 대신해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본래의 교육의 모습이다.
(3) 교육의 3대이념
이리하여 통일교육론에 있어서의 교육의 목표는 피교육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완전성, 번식성, 주관성을 닮게 하는데 있다. 이것이 통일교 육론의 교육의 이념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는 것을 개체완 성(개성완성)이라 한다. 개체완성은 제1축복의 완성으로서 인격의 완 성을 의미한다. 또 번식성을 닮는 것을 가정완성이라 한다. 이것은 남 성과 여성이 장차 결혼하여 부부의 조화를 나타내면서 원만한 가정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즉 제2축복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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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을 닮는 것을 주관성완성이라 한다. 이것은 만물의 주관을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곧 제3축복의 완성을 뜻 한다. 이리하여 통일교육론에 있어서의 교육의 3대이념은 제1축복완성 을 위한 개체완성(개성완성)과 제2축복완성을 위한 가정완성과 제3축 복완성을 위한 주관성완성인 것이다.
二. 교육의 3형태
이와 같은 이념을 기반으로 할 때, 인간에게는 어떤 형태의 교육이 필요할까. 개체완성을 위해서는 심정교육心情敎育이 필요하고, 가정완성 을 위해서는 규범교육規範敎育이 필요하고, 주관성완성을 위해서는 기술 교육, 지식교육, 체육 등의 주관교육主管敎育이 필요하다. 다음에 이 세 가지 교육의 형태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심정교육
1) 개체완성을 위한 교육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게 하는 교육이 심정교육이다. 하나님의 완전 성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상과 형상의 통일상統一性을 닮는다는 것으로서, 그것은 생심과 육심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수수작용을 하여 하나된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 은 심정을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통일을 이루고 있다. 따라 서, 생심과 육심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심정과 같은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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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심과 육심의 수수작용의 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심정이 생심과 육심의 중심이 되려면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해서, 개인의 중심 이 되는 그 심정이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되어야 한다. 개인의 심정이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하도록 하는 교육을 심정교육이라고 한다. 그러 므로 심정교육은 개체완성을 위한 교육이 된다. 심정교육心情敎育이란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 럼, 피교육자로 하여금 만민과 만물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으로 기르 는 교육이다. 그와 같은 인간으로 양육하기 위해서는 피교육자로 하여 금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학생(피교 육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 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2) 하나님의 심정의 표현 형태
하나님의 심정은 창조와 복귀섭리의 과정을 통하여 세 가지의 형태 로 표현되었다. 즉 소망의 심정, 슬픔의 심정, 고통의 심정이 그것이 다.
① 소망의 심정 소망所望의 심정이란, 우주 창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으로서, 무 한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가장 사랑하는 최초의 자녀, 아담과 해와를 얻는다는 기대와 소망에 찬 기쁨의 감정을 말한다. 이 소망의 심정이 달성되었을 때 말할 수 없는 만족에 찬 기쁨을 느낀다. 실제로 아담․해 와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기쁨은 표현할 길이 없는 만족에 찬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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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던 것이다. 최근 물리학에 의하면, 150~200억년이라는 오랜 기간 전에 우주가 생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은 통일원리로 볼 때 150~200억년 전에 우주가 창조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오랜 기간 을 두고 우주를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가장 사랑하는 자 녀인 아담․해와를 창조하시기 위함이었다. 그 한 자녀를 얻기 위한 한 때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와 같은 오랜 기 간을 걸쳐서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다. 희망에 찬 하나님은 우주 창조 의 과정이 아무리 길고 어렵더라도 그것이 길다거나 괴롭다고는 느끼 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즉 기쁜 결과를 바라보면서 일을 준비할 때는, 그 일이 아무리 어려운 것같이 예견되 더라도 실제로 부딪혀 보면 그렇게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시간은 속히 흘러간다. 그것은 머지않아 기쁨이 다가온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기쁨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는 우리 인간들이 경험하는, 그와 같은 기쁨에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큰 것이었 다. 그리고 실제로 아담과 해와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기쁨은 비할 바 없이 크고 깊은 것이었다.
② 슬픔의 심정 슬픔의 심정이란,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여 사망권내(사탄의 지배하) 에 떨어졌을 때의 하나님의 감정을 말하는 것으로서 자식을 잃고 슬퍼 하는 부모의 감정과 같은 하나님의 감정을 뜻한다. 초창기때 선생님의 설교 말씀이 아담․해와의 타락에 미치게 되면, 그 때의 하나님의 그 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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픈 심정을 소개하면서 슬피 통곡하시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다. 그 리고 아담․해와의 타락 직후부터 복귀섭리를 시작한 후에도 장차 뜻이 이루어질 미래의 기쁨과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며 하나님은 섭리를 진 행시키셨지만,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그 섭리를 아랑곳 하지않고 퇴폐와 난폭만을 일삼고 있었으니, 이 광경을 바라보시면서 그때마다 또 다시 탄식하시고 슬퍼하시곤 하셨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역사를 섭 리해 오신 하나님은 슬픔의 하나님인 동시에 恨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 다. 즉 창조할 때의 기대와 소망이 너무 컸기 때문에 타락에 의해 초 래된 하나님의 실망의 슬픔은 그 만큼 더 컸던 것이다. 속세俗世에서도 사랑하는 자식이 죽었을 때 부모 특히 그 어미母는 심 히도 애통해 한다. 비록 자식의 병이 위중해서 불치의 병이라고 선고 되었더라도, 실제로 숨이 끊어지면 슬퍼서 어쩔 줄 모르는 모정이 적 지 않다. 아담․해와가 타락했을 때의 하나님의 슬픈 심정과, 감옥과 같 은 사탄세계에서 고생하는 아담․해와와 그 후손들의 모습을 보시는 하 나님의 슬픔의 심정은, 자식을 잃은 세속적인 부모의 슬픔과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것이었다. 역사이래 하나님처럼 슬픈 인간은 일찍이 이 세上에 없었다는 것이 문 선생께서 알려주신 하나님의 심정의 모습 의 하나였다.
③ 고통의 심정 고통의 심정이란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섭리역사의 중심인물들이 사탄과 그 앞잡이들로부터 박해를 당하면서 고통당하는 것을 보실 때의 하나님의 아픈 감정을 말한다. 즉 타락한 인간을 버리 지 아니하시고, 되살리기 위해서 선지선열先知先烈과 성현聖賢들을 보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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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기는 커녕 도리어 그들을 박해하 고 때로는 학살까지 하는 광경을 바라보실 때마다 하나님의 가슴은 못 이 박히고 창에 찔리는듯이 아프셨던 것이다. 타락세계의 인간들을 기 어이 살리시기 위해서 보내신 성현들이나 의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당하는 멸시蔑視와 조소嘲笑, 박해迫害와 천대賤待는 바로 하나님 자신에 대 한 멸시와 조소로 느끼셨으며, 하나님 자신에 대한 박해와 천대로 느 끼신 것이다. 이리하여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또 하나의 심정은 고통의 심정이었다.
3) 하나님의 심정의 이해
심정교육을 위해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세 가지 심정을 피교육자(학 생)들에게 이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복귀노정에서의 하나님의 심정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참고로 아담가정, 노아가정, 아브라함 가정, 모세노정, 예수님노정 등의 복귀노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은 문 선생께서 소개하신 하나님의 심정에 관한 내용이다.
① 아담가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 소망 가운데 아담․해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한없는 소망과 기쁨으 로 가득차 있었으나, 아담․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한없이 비통해 하셨다. 그래서 아담가정을 구하기 위하여 아담․해와의 자식인 가인과 아벨에게 헌제獻祭를 시켰으며,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의 헌제가 성공할 것이라는 큰 소망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임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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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전지전능하므로 아담․해와나 가인․아벨이 실패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탄하고 슬퍼했 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비록 인간이 타락할 수 도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심정의 하 나님이요, 따라서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기를 바라 는 마음이 타락의 가능성에 대한 예지豫知에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 로 강했던 것이다. 헌제獻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헌제에 걸었던 하나님의 기대는 엄청나게 컸던 것이다. 헌제에 건 하나님의 소망이 이처럼 강했기 때문에 헌제의 실수의 가능성에 대한 예지豫知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계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심정(사랑)과 이성의 차 이가 있는 것이다. 심정의 충동력 그 자체는 이성을 압도하리만큼 강 력한 것이다. 이리하여 아담․해와 때도 가인․아벨 때도 하나님의 심정은 성공만을 원하신 소망의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아담․해와도, 가인․아벨도 실패하 고 말았으므로 그 슬픔이 비길 데 없이 컸음은 상술한 바와 같다. 그 런데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은 그 슬픔을 외부로 표현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런 장면마다 항상 사탄이 함께 있어서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슬픔을 외부에 나타내면 슬픔에 젖은 그 하나님의 모습이 사탄에게는 위신도 권위도 없는, 하나님답지 않은 초라한 모습으로만 비쳐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묵 묵히 고개를 숙이고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누르면서 비장悲壯한 얼굴로 그곳을 떠나가신 것이다. 이것이 초창기에 문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아 담가정에서의 하나님의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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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노아가정에서의 하나님의 심정 아담가정을 떠난 하나님은 160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광야曠野의 길을 걸으시면서 지상의 협력자를 찾아 헤매셨다. 그동안 인간들은 모 두 하나님에게 등을 돌릴 뿐, 누구도 하나님을 맞이하는 자가 없었다. 이리하여 세상에는 하나님이 머물 수 있는 한 채의 집도, 설 수 있는 한 치의 땅도, 상대할 수 있는 사람 하나도 없었다. 문자 그대로 천애 天涯 의 고독단신孤獨單身의 처량한 신세가 되어서 쓸쓸한 길을 걸으신 것 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하나님은 한 사람의 협력자인 노아를 만나셨 다. 하나님의 기쁨은 비할 데가 없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섭리적 사정 때문에 사랑하는 노아에게 엄한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 이 바로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이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노아는 사람들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모든 정성을 다 바쳐서 120년간 방주를 지었다. 노아는 단지 하나님 앞에 세워진 종이요, 의인이었을 뿐,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록 종일지라도 그와 같은 노아를 만난 것이 그렇게도 기뻐서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종의 입장으로 내려 와 노아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으신 것이다. 그런데 홍수심판을 거친 뒤에 노아의 아들 함이 책임분담을 다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홍수심 판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가정이었던 노아가정에 다시 사탄이 침범한 결과가 되어 버렸다. 그 때 하나님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같은 아픔과 슬픔을 느끼면서 또 다시 쓸쓸한 모습으로 노아가정을 떠나신 것이다.
③ 아브라함가정에서의 하나님의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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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4백년만에 아브라함을 찾아 세웠다. 아브라함노정에 있어서 아브라함에게 가장 괴로웠던 것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독자 이 삭을 제물祭物로 바칠 때였다. 비둘기와 양과 암소를 바치는 상징헌제象 徵獻祭 에 실패한 아브라함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 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그 때 아들을 살릴 것인가, 천명天命에 따라 자 식을 바칠 것인가, 즉 인륜人倫을 따를 것인가 천륜天倫을 따를 것인가를 두고 아브라함은 고민했다. 자기의 아들을 바치는 대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싶을 정도로, 이삭을 살리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로 했다. 인륜 을 끊고 천륜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모리아 산을 향해 가는 3일 간의 기간은, 아브라함에 있어서 천륜이냐, 인륜이냐를 택일해야 하는 고뇌의 시간이었다. 그 때 하나님은 멀리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아이를 바쳐라”라는 엄한 명령을 내리시고는, 아 브라함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아 니 그 이상으로 괴로워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자식 이삭을 제물 로 바치기 위해 칼을 들고 죽이려 했을 때, 하나님은 드디어 그를 죽 이지 말라고 황급히 말리시면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아노라”(창세기 22:12)고 말씀하셨다. 그 때 하나님의 뜻을 대하 는 아브라함의 심정과,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과 충성은 이미 그로 하여금 이삭을 죽였다는 입장에 서게 한 것이다. 따라서 이 삭을 죽이지 않아도 죽인 것과 같은 조건條件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 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 죽이는 것을 중지시키고, 대신에 숫 양을 번제로 드리게 했다. 여기에 “이제야 …… ”라고 하신 말씀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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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동안 아브라함에 대해 느끼셨던 하나님의 섭섭함과, 이삭헌제獻祭 에서 보인 아브라함의 충성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함께 표현되어 있 는 것이다.
④ 모세노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 애급의 왕자로서 성장하던 모세는 동족인 이스라엘민족이 받고 있는 고통의 현장을 목격한 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복귀시키기로 작정하고 천신만고 끝에 그들을 광야로 인도했으나, 이 스라엘백성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지도자인 모세에 대해 반역을 하곤 했다. 한 번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간의 금식을 마친 후, 두 개의 석판을 받아 가지고 산에서 내려오면서 보니 이스라엘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빌고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을 모 독하는 이 불신의 행위를 보고 크게 화를 내면서 석판을 던져버렸다. 그 때 하나님은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애급 32:9~10)고 하셨다. 그 때의 모세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이스라엘백성들의 불신이 괘 씸했으나 “이 백성을 내가 진멸하겠다”는 하나님의 진노를 대할 때, 순간적으로 그의 애족愛族, 애국愛國의 심정이 솟구쳤다. 그리하여 그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해도 이 민족을 살리고 싶었으며, 할 수만 있으 면 함께 가나안땅에 들어가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매달려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 리지 마옵소서……”(출세기 32:12)라고 하면서 민족을 살려달라고 간 구했다. 하나님은 모세의 그 애족심愛族心어린 호소의 기도를 용납하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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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드디어 이스라엘민족을 진멸코자 했던 뜻을 철회하신 것이다. 그런데 40년간 광야를 유랑流浪한 후, 가데스바네아라는 곳에 이르렀 을 때, 이스라엘백성들은 마실 물조차 없다면서 모세를 또 원망하였 다. 그 때 모세는 불신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 대한 노여움 때문에 한 번 쳐야할 바위를 두 번 쳐버린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짓이었다. 그 후 하나님은 비스가 산상에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백성이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을 보여 주면서 “너는 …… 그리로 들어가지 못 하리라”(신명기 32:52)라고 하신 것이었다. 80 노구를 이끌고 40일 금식을 두 번씩이나 했던 모세, 불신하는 민족을 붙들고 40년간이나 신광야에서 고생했던 모세였다. 사실상 출애급의 주역인 모세를 가나 안 땅에 인도하고 싶은 하나님이었지만 사탄의 참소 때문에 할 수 없 이 눈앞에 있는 그 곳을 환상으로만 보여 주시고는 그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슬픔과 아픔과 안타까움 이 있었던 것이다.
⑤ 예수노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 구약성서에 기록된 대로(이사야 9:6) 예수님은 지상에 메시아로 오 셨다. 온 땅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으면 안 될 구세주였음에도 불 구하고 그는 어릴 때부터 배척排斥당하였다. 가족들이 예수를 몰랐고 유 대교가 예수를 불신했으며, 결국 이스라엘백성들이 예수님을 쫓아낸 것이다.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던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은 3년간의 공생애노정을 포함해서 33년간 쓸쓸하고 고독한 생애를 보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人子는 머리둘 곳이 없도다”(누가 9:58) 라고 하면서 그 고독한 심정을 토로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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