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 교리 원문/통일사상요강/제6장 윤리론 문서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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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사상요강 제6장 윤리론''' 원문이다. * 문헌 색인: [[통일교 교리 원문/통일사상요강]] * 상위 문서: [[통일교 교리 원문/통일사상요강|통일사상요강 구조 색인]] __TOC__ == 원문 == == 제6장 윤 리 론 == Ethics 오늘날의 세계를 볼 때, 가장 개탄慨嘆스러운 것은 도덕관념이나 윤리관념이 급속히 소멸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그와 동시에 반도덕적反道德的인 사고방식이 급속히 증대하고 있으며,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도 좋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만연되어 가고 있다. 그 결과 각종사회범죄가 속출하고 있으며, 질서가 무너지고, 사회는 대혼란大混亂의와중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혼란의 원인의 하나는 인간의의식이 물질위주의 방향으로 흐른 데에 있고, 또 하나는 종래의 가치관, 윤리관의 붕괴에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사회적인 대혼란을 수습하고 사회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여기에 새로운 윤리관이 제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미래사회를 대비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윤리론이 요청된다. 미래사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진․선․미의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일 뿐만 아니라 진실과 예술과 윤리가 혼연일체화渾然一體化가 된영원한 사랑의 세계이다. 따라서 미래사회는 진실사회인 동시에 예술사회요 윤리사회이다. 그 중 윤리사회는 선을 실천하는 선한 사람들이사는 사회이다. 선을 실천하는 선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윤리론이 수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기존 가치관의 결점을 보완하면서 새로운 윤리관을 대안으로 제시하여 혼란된 윤리관을 바로잡는 동시에 새로운 윤리생활을 보여줄 수 있는 이론체계가 요구된다. 미래의 윤리사회는 또한 전인류가 하나님을 부모로 모신 가운데 서로 형제자매의 관계를 맺고 사는 사회이며, 하나님의 참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사회이다. 그러한 사회 속에서 사랑의실천방안이 되는 것이 윤리론이다. 한편 인간은 지상세계와 영계의 화동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미래의 윤리사회는 지상세계 뿐만 아니라 영계까지 포함하는 윤리사회이다. 따라서 새로운 윤리론이 제시하는 규범은, 지상세계의 혼란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영계의 혼란까지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역할을 다 하고자 세워진 것이 본 통일윤리론이다. === 一. 통일윤리론의 원리적 근거 === 통일원리 가운데 본 윤리론의 성립의 근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참사랑’이며, 둘째는 ‘가정적4위기대’의 이론이며, 셋째는 ‘3대상목적’의 개념이다. 이에 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원리적 근거의 첫 번째는 하나님의 참사랑이다. 참사랑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그 사랑의 실체대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이 완성한후, 하나님의 심정과 함께 사랑을 상속해서 일상생활을 통하여 그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선·미眞․善․美의 가치의 터전이 된다. 진․선․미에 각각 대응하는 학문인 교육론, 윤리론,예술론의 성립의 근거도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특히 윤리론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사랑은 윤리론의 성립에 있어서 궁 극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다. 원리적 근거의 두 번째는 가정적4위기대家庭的四位基臺이다. 하나님의 참사랑이 온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가정적4위기대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현실적으로는 가정적4위기대(하나님․부․모․자녀의4위치)를 통하여 나뉘어져서 분성적分性的사랑(또는 분성애分性愛), 즉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하나님을중심하고 볼 때, 부모나 부부나 자녀는 모두 하나님의 대상이 된다. 부모는 하나님의 제1대상이 되고, 부부는 하나님의 제2대상이 되고,자녀는 하나님의 제3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중심한 부모의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을 합쳐서 3대상사랑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본 윤리론은 가정내의 4위치를 중심한 사랑의 관계를 전적으로다루게 된다. 원리적 근거의 세 번째는 3대상목적이다. 완성한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을 중심하고 부부가 되어 서로 사랑할 때,1) 하나님을 닮은 자녀가출생한다. 그 때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부父(남편)와 모母(아내), 그리고 자녀라는 네 위치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가정적4위기대가 형성되는데, 이 때 조부모祖父母가 있을 때는 그 조부모가 가정에서 하나님을대신한 위치에 서게 되어서 조부모祖父母를 중심으로 부父와 모母 그리고자녀에 의한 가정적4위기대가 형성된다. 그런데 조부모 중심의 가정적4위기대에 있어서 각각의 위치는 세개의 대상을 대하게 된다. 즉 조부모는 부․모․자녀를 그 대상으로 대하고, 부父는 조부모․모(아내)․자녀를 그 대상으로 대한다. 그리고 모母는조부모․부(남편)․자녀를, 자녀子女는 조부모․부․모를 각각 그 대상으로 대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가정적사위기대의 네 위치는 각각 3대상을 대 하게 되는데 가정에 있어서 인간의 피조목적은 이 3대상을 대함으로써(사랑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때의 창조목적(피조목적)을 3대상목적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4위기대의 각 위치에서 3대상을 사랑할 때3대상목적이 달성되게 된다.2) 3대상목적三對象目的의 실현은 세 대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코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가정적4위기대에 있어서의 위치와 방향성에 따라 분성화分性化(또는 분리)되어 분성적사랑(분리애分離愛)으로 나타난다. 분성적 사랑은 기본적으로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이라는 세 종류의 사랑, 즉 3대상 사랑인것이다(이미 말한 바와 같이 3대상이란 하나님의 제1대상인 부모와 제2대상인 부부와 제3대상인 자녀를 뜻한다). 부모의 사랑은 부모로부터 자녀로 향하는 하향성下向性의 사랑(내리사랑)이고, 부부의 사랑은 부부간의 횡적橫的인 사랑(가로사랑)이며, 자녀의 사랑은 자녀에게서 부모로 향하는 상향성上向性의 사랑(올리사랑)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분성적分性的 사랑이 하나님의 3대상의 사랑인 동시에 가정적4위기대의 네 위치에서 각각 3대상을 상대로 하는 사랑이기도 하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에는 12개의 방향성이 있다. 그 결과 가정애家庭愛에는 색조가 다른 여러 가지의 사랑이 있게 되며,각각의 사랑의 실현에 있어서 여기에 걸맞는 덕목이 필요하게 된다. 이상을 정리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이상이란 인간이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며 가정적사위기대를 완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통일윤리론의 목적은 가정적4위기대를 기반으로 하는 사랑의덕목을 다루는데 있다. === 二. 윤리와 도덕 === ==== (1) 윤리와 도덕의 정의 ==== 가정에 있어서 각 구성원은 개인, 즉 개성진리체로서 내부에 마음과몸, 또는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수수작용에 의한 4위기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이 내적사위기대이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 상호간에도 수수작용에 의한 4위기대가 형성된다. 이것이 외적사위기대이다. 생심과 육심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내적사위기대가 형성될 때, 생심은 주체主體, 육심은 대상對象이 된다. 그러나 인간 조상의 타락이후 인간의 생심과 육심의 관계는 역전逆轉되었다. 즉 육심이 주체가 되어서생심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육심의 목표인 의․식․주의생활과 성생활이 선차적先次的인 것이 되었고, 생심에 의한 가치의 생활은 이차적二次的인 것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생심과 육심의 관계를 복원復元하는 노력이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온 것이다. 여러 성현들에 의해서 강조되어온 수도생활修道生活, 인격도야人格陶冶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개인의 완성을 위한 노력이지만, 한편 가정의 완성 즉 가정적사위기대의 완성을 위한 노력도 역사를 통하여 꾸준히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여기에서 윤리와 도덕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자. 윤리란 가정에서 가정의 구성원이 지켜야 할 행위의 규범이다. 즉 가정을 기반으로 한 인간행위의 규범이요, 가정에 있어서 사랑 중심의 수수법授受法을 따르려는 인간행위의 규범이며, 가정적4위기대家庭的四位基臺를 형성할 때의 규범이다. 따라서 윤리는 연체로서의 규범인 동시에 제2축복 즉, 가정완성 을 위한 규범이기도 하다. 도덕이란 개인이 지켜야 할 행위의 규범이다. 즉 개인생활에 있어서의 인간행위의 규범이요, 내적으로는 개인의 내면생활에 있어서 심정중심의 수수법을 따르려는 행위의 규범이며, 가정적4위기대를 형성할때의 규범이다. 따라서 도덕은 개성진리체로서의 규범인 동시에 제1축복 즉 개성완성을 위한 규범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은 주관적 규범主觀的 規範 인 반면에 윤리는 객관적 규범客觀的 規範임을 알 수 있다. ==== (2) 윤리와 질서 ==== 가정적4위기대의 일정한 위치에서 일정한 목표를 향한 행위 -3대상(3방향)으로 향하는 행위- 의 규범이 윤리임을 이미 밝혔다. 이때의행위의 내용은 물론 사랑이다. 따라서 윤리는 바로 사랑의 위치, 즉질서 위에서 성립한다. 다시 말하면 윤리는 질서를 떠나서 세워질 수가 없다. 그런데 오늘날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간의 질서, 부부간의 질서, 형제자매간의 질서가 경시輕視 내지 무시無視되고 가정에서의 질서가흐트러지고 있는데, 이것이 사회질서 붕괴의 주요主要한 원인이 되고 있다. 본래 사회의 질서체계의 근거지여야 할 가정이 오늘날에는 질서붕괴의 시발점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랑의 질서는 성性의 질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윤리는 사랑의질서인 동시에 성의 질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회 풍조는 성의 질서가 심히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성의 질서란 성적결합性的結合 의 질서, 즉 남녀 쌍男女 雙의 질서를 말한다. 부모의 쌍雙과 자식의쌍雙 사이에 질서가 있음은 물론이요, 형의 부부와 동생의 부부 사이에 도 질서가 있어야 한다. 즉 동생이 형수兄嫂를 성적性的으로 사랑해서는안 되는 것이요, 형이 제수弟嫂를 성적으로 사랑해도 안 된다. 그런데오늘날에 이르러 남녀의 불륜한 성관계는 더욱 더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적질서의 파괴를 가져온 원인중의 하나는 기존 가치관의 붕괴로 인해서 형성된 동물적 인간관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관능적 성문화를 조장하는 일부 매스컴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성의 신성성神聖性은 사라지게 되었고, 성의 퇴폐현상은 오늘날 차마 눈을 뜨고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해와가 천사장天使長의 유혹에 의해 천사장과 불륜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사랑의 질서와 동시에 성의 질서가 파괴된 상태와 흡사한 것이다. 가정을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치관이 요청되는데, 그것은 사랑의 질서와 성의 질서를확립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면 안 된다. 통일윤리론이 제시된 이유가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3) 윤리․도덕과 천도 ==== 인간은 우주의 구성요소를 총합한 실체상이요, 우주를 축소한 소우주인 것같이 가정은 우주의 질서체계를 축소한 소우주 체계이다. 따라서 가정의 규범, 즉 윤리는 우주의 법칙(이법)이 축소되어 나타난 것이다. 즉 가정윤리는 바로 천도이다. 우주는 예컨대 태양계의 경우, 달-지구-태양-은하계의 중심-우주의중심이라는 종적질서縱的秩序와, 태양계에 있어서 태양을 중심으로 한 수성-금성-지구-화성-목성-토성-천왕성-해왕성-명왕성의 횡적질서橫的秩 序 가 있는 것같이, 가정에도 손자-자녀-부모-조부모-증조부모로 연결되는 종적질서와, 형제자매와 같은 횡적질서가 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질서에 대응하는 것이 조부모 및 부모의 자녀에 대한 자애慈愛, 자녀의 부모에 대한 효성·효행孝誠․孝行 등의 종적인 덕목이고, 부부의 화애,형제의 우애, 자매애姉妹愛와 같은 횡적인 덕목들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윤리는 연체로서 가족 상호간에 지켜야 하는 규범인데 대하여, 도덕은 가정에 있어서 개인이 단독으로 즉 개성진리체로서 지켜야하는 규범이다. 따라서 도덕도 천도 즉 우주의 법칙을 닮은 것이다. 우주내의 모든 천체(개체)는 일정한 위치에서 반드시 내적사위기대를 형성하고 있다. 즉 그 내부의 주체와 대상간에 반드시 원만한 수수작용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개인으로서 일정한 위치에서 반드시 내적으로 생심(주체)과 육심(대상) 간에 원만한 수수작용이 벌어짐으로써 내적사위기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내적사위기대를 형성할 때의 행위의 규범이 도덕이다. 따라서 도덕도 천도인것이다. 이 내적인 수수작용은 하나님의 심정 또는 창조목적을 중심한수수작용임은 물론이다. 도덕상의 덕목은 순진, 정직, 정의, 절제, 용기, 지혜, 극기, 인내, 자립, 자조自助, 공정, 근면, 청결 등이 있다. ==== (4) 가정윤리의 확대적용으로서의 사회윤리 ==== 통일사상에서 볼 때,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는 가정의 가족관계가 그대로 확대된 것이다. 예컨대 연장자年長者와 연소자年少者가 있어서, 그 연령의 차가 30세 또는 그 이상일 경우, 연장자는 연소자를 자녀와 같이사랑하고, 연소자는 연장자를 부모와 같이 존경해야 한다. 또 그 연령 年齡 의 차이가 10세 이내일 경우, 연장자는 연소자를 동생과 같이 사랑하고 연소자는 연장자를 형이나 누님과 같이 존경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가정윤리는 모든 윤리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가정윤리를 사회에 적용하면 사회윤리가 되고, 기업에 적용하면 기업윤리가되고, 국가에 적용하면 국가윤리가 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덕목 또는 가치관이 성립하게 된다. 국가에 있어서 대통령이나 정부는 부모의 입장에서 국민을 사랑하고국민에게 선한 정치를 펴야 하며, 국민은 대통령이나 정부를 부모처럼존경해야 한다. 또 학교에서 스승은 부모와 같은 입장에서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학생을 가르치고, 학생은 스승을 부모처럼 존경해야 한다. 또한 사회에서 연장자는 연소자를 애호하고, 연소자는 연장자를존경하지 않으면 안 되며, 회사에서 상사는 부하를 잘 지도하고, 부하는 상사를 잘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들은 가정에 있어서의 종적인 가치관(덕목)이 확대 적용된 것이다. 가정에 있어서 형제자매간의 사랑의 범위가 동료, 이웃, 사회, 국가,세계에로 확대될 때 그 사랑은 화해, 관용, 의리, 신의, 예의, 겸양, 연민, 협조, 봉사, 동정 등의 횡적인 덕목(가치관)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회도 국가도 세계도 대혼란상태에 빠져 있으며 좀처럼 수습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혼란상태가 계속되는 근본원인은사회윤리, 국가윤리의 기반이 되는 가정윤리가 쇠퇴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혼란상태에 빠진 오늘의 사회를 구하는 길은 새로운 가정윤리를 확립하는 것, 즉 새로운 윤리관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가정을 파탄에서 구하는 동시에 세계를 혼란에서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사회가 형성된 이래 약 2백여년이 되었지만 그동안 항상문제가 된 것이 계급적 착취와 억압의 문제였으며, 노사간의 분쟁의문제였다. 마르크스나 레닌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출현한 것도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폭력혁명에 의해서 이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그 결과는 완전한 실패로 나타났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자체가 지상에서 소멸되기에까지 이르렀다. 착취와 억압의 문제나, 노사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가정윤리에 입각한기업윤리가 확립되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통일윤리론의입장이다. === 三. 질서와 평등 === ==== (1) 오늘날까지의 질서와 평등 ==== 근대 이후 민주주의는 중세 이래의 신분제도와 그 제도에 수반된 여러 특권들을 폐지하고, 법 앞에서의 평등과 정치참여에 있어서의 평등, 즉 보통선거 제도를 실현했다. 그러나 법 앞에서의 평등은 실현되었지만 경제적인 평등은 실현되지 않았으며, 계층간의 빈부의 차差는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이 빈부의 격차가 해소되지 않는 한, 법 앞에평등이 실현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명목상名目上의 평등일 뿐, 실질적인 평등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마르크스는 경제적인 평등을실현하기 위해 사유재산의 폐지와 무계급사회인 공산주의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러시아혁명 후 70여 년간 공산주의를 실시해 본 결 과는 새로운 특권계급의 출현으로 인한 새로운 형태의 빈부의 격차가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역사개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평등을 희구해 왔지만 아직도 참다운 평등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여기에서 ‘질서秩序와 평등平等’의 문제가 제기된다. 모든 인간이 권리에 있어서 완전히 평등하다면, 통치자統治者와 피통치자被統治者라는 권리의 차를 인정하지 않게 되어, 사회는 무정부의 무질서 상태가 되어 버릴 것이다. 또 한편 질서를 중시하면 평등이 손상되게 된다. 그래서인간의 본심이 희구하는 참다운 평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질서와 평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의 평등은 경제적 평등이 아니라, ‘권리평등’을 뜻한다. 이 권리평등이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의 하나가 되고 있음은 주지의사실이다. 이런 의미의 평등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질서의 개념과 상반관계에 있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 즉 평등을 강조하다 보면 질서가무시되기 쉽고, 질서의 확립을 강조하다 보면 평등이 무시되기 쉽다. 이것이 오늘까지의 ‘질서와 평등’에 관한 일반적 견해였다. ==== (2) 원리적인 질서와 평등 ==== 통일사상에서 볼 때, 원리적인 평등平等은 사랑의 평등이며, 인격의평등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진심으로 희구하는 평등이란, 인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 아래에서의 자녀의 평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태양의 빛이 만물을 평등하게 비치는 것같이, 하나님의 사랑이 만민에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평등이다. 따라서 원리적인 평등이란 주체인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대상인 인간이 마음대로 취득할 수 있는 그러한 평등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정에서 질서를 통하여 분성적分性的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사랑의 평등은 질서를 통한 평등이다. 질서를 통한 사랑의 평등이란 사랑의 충만도充滿度의 평등이다. 즉 모든 개인의 위치와 개성에맞도록 사랑이 충만될 때 주어지는 평등이 사랑의 평등이다. 사랑의충만이란 만족이며, 기쁨이며, 감사이다. 따라서 원리적인 평등은 만족의 평등이며, 기쁨의 평등이며, 감사의 평등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은 인간이 완전한 대상의식對象意識 -하나님을 시봉侍奉하는 마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을 가지고 있을때, 비로소 느껴지게 된다. 대상의식을 가지지 않는 한,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 커도 충족감을 느낄 수 없고,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권리평등’의 권리는 프랑스혁명 때의 로크의자연권(생명, 자유, 재산을 지키기 위한 권리)을 위시해서 ‘인권선언’(1789), 미국의 ‘독립선언서’(1776),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1948)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은 자연권을 말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직위상의 권리와 직위상의 평등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직위에는 반드시 직책과 의무가 부여됨과 동시에 각 직위에 부합하는 권리가 주어지기 때문에 직위상의 권리는 두 말할 것도 없이 평등일 수가없다. 그러나 본연의 세계에 있어서는 이러한 직위상의 권리의 차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차별을 초월한 평등의 측면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이 바로 사랑의 평등, 인격의 평등, 만족의 평등인 것이다. 여기서 남녀평등에 관해서 살펴보자. 역사 개시 이래 여성은 남성에비해서 지위, 권리, 기회라는 측면에서 항상 뒤떨어져 있었으며, 뿐만아니라 남성의 지배를 받아 왔다. 이 사실을 의식적으로 자각하고 남 성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여성 해방운동이라는 이름하에 태동胎動하기 시작한 이 운동은 프랑스혁명 때부터였다. 민주주의의기본이념이 자연권(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권리)의 평등이기 때문에민주주의의 혁명과 함께 여성들의 자연권의 평등에 대한 주장은 지극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 운동이 그 후, 여러 가지의 사회운동과 표리일체表裏一體가 되어서 꾸준히 전개되어 오다가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는 여성 해방 운동의 요구조건들이 전면적으로자유국가들의 법률에 반영되기에 이르렀다. 그 주요한 것이 바로 지위의 평등, 권리의 평등, 기회의 평등이었다. 이러한 여성의 평등의 요구를 법률이 보장한 것은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부터 여성 해방 문제가 새롭게 대두擡頭하였다. 남녀평등은 법률상으로만 보장되었을 뿐, 실제에 있어서의 남녀평등은부분적으로만 실시될 뿐만 아니라 많은 영역에서는 여전히 남녀불평등관계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법률적으로 남녀평등을 보장한 결과는 남녀가 권리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사고방식이 확산되면서 부부사이의 가정불화는 다반사가 되기에 이르렀으며, 그 때문에 갖가지의 비극과 가정파탄이 속출續出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권리에 관한 한, 기본적으로 완전한 남녀평등이 있을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리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요건이기 때문이다. 생리적으로 남녀는 사명이 다르다. 남자의 근골筋骨의 발달, 둔부臀部의 협소狹小와 벌어진 양 어깨 등은남자의 사명이 대외적인 억센 활동에 있음을 보이는 것이요, 여자의연약한 근골筋骨, 둔부臀部와 유방의 발달, 양 어깨의 협소 등은 여자의사명이 가정에서의 생산과 양육에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리적 조건을 무시하고 권리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남녀의 사명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자가 여자의 생산과 포유哺乳의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여자도 남자의 역할인 억센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뱁새가 황새걸음을할 수 없고 황새가 뱁새걸음을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면 남녀(부부) 사이에 평등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다. 남녀(부부)사이에도 평등이 필요한데 그것은 권리평등이 아니라 사랑의 평등이요, 인격의 평등이요, 기쁨의 평등인 것이다. 부부夫婦가 하나님의 참사랑을 주고받을 때, 차별감이나 불평등감이 사라지고 동위권同位圈 에 서 있음을 자각하게 됨과 동시에 충만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지위의 평등에 관해서 언급해 보자. 여성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 있다. 여성으로서 학교 교장도 될 수 있고,회사의 사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남녀의 동등권同等權의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학교나 회사는 가정의 확대형이기 때문에 가정에서모성母性이 부성父性을 대신해서 가장家長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회사에서도 그 회사의 어머니 격으로서 사장이 될 수도 있고, 학교의 어머니 격으로서 학교의 교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세계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는 여성들이 도리어 앞장서는 것이바람직하다. 왜냐하면 가정에 있어서 평화의 주역은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세계의 참된 평화를 위해서는 억센 공격적攻擊的인 일에 적합한 남성보다도, 체질적으로 평화의 일에 적합한 모성(여성)들이 앞장서는 것이 필요하기 조차한 것이다. 이상으로 남녀평등에 관한 원리적 견해를 밝혔다. === 四. 통일윤리론에서 본 종래의 윤리관 === 마지막으로 기존의 윤리관 중에서, 근대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칸트와벤담의 윤리관을, 또 현대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분석철학과 프래그머티즘의 윤리관의 요점을 소개하고 통일사상의 입장에서 그 내용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 (1) 칸트 ==== ==== 1) 칸트의 윤리관 ==== 칸트(I. Kant, 1724~1804)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참다운 도덕률은‘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라’라는 가언명법仮言命法(hypothetischer Imperativ)이어서는 안 되며, 무조건적으로 ‘무엇 무엇을 하라’라는 정언명법定言命法(kategorisher Imperativ)이 아니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훌륭한 사람으로 불려지기 위해서는 정직하라’라는 조건부의 명법이 아니라, ‘정직하라’라고 하는 무조건적인 명법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정언명법은 실천이성에 의해서 세워지는것이다. 이 실천이성이 우리들의 의지에 명령하는 것이다(이와 같은실천이성을 ‘입법자立法者’라고 한다). 이 실천이성의 명령을 받은 의지가 선의지善意志이다. 그리고 이 선의지가 행동을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칸트는 도덕의 근본법칙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즉 “네 의지의 격률格率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가 그것이다.3) 여기서 격률(Maxime)이란 개개인이 주관적으로 정하는실천의 원칙을 말하는 것으로서 칸트에 의하면, 그와 같은 주관적인 원칙(즉 격률)이 보편성을 띤 것이 되도독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칸트는 마치 자연법칙과 같이 모순이 없는 보편타당한 것을 선으로, 그렇지 않는 것을 악으로 규정했다. 칸트는 인간 안에 있는 도덕률은 의무의 소리로서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의무여, 네 숭고하고 위대한 이름이여, 이 이름을 띤 너는 아첨하며 여러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아무도 갖고 있지 않는데도 오로지 복종을 요구한다. …… 자연히 사람의 마음에 들어와서싫어도 정의를 획득할 수 있는 법칙을 세우는 것뿐이다.”4)와 같이 칸트가 주장한 도덕은 의무의 도덕이었다. 또 칸트는 선의지가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유가 요청되지 않으면 안 되며, 불완전한 인간이 선을 완전히 실현코자 하는 한 영혼의 불멸이 요청되지 않으면 안 되며, 또 완전한 선 즉최고선을 추구할 때, 그것이 행복과의 일치가 가능케 되기 위해서는하나님의 존재를 요청해야 한다고 했다. 이리하여 칸트는 영혼의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를 실천이성의 요청(Postulat)으로서 인정하였다. ==== 2) 통일사상에서 본 칸트의 倫理觀 ==== 칸트는 순수이성純粹理性(이론이성)과 실천이성實踐理性을 구별했다. 순수이성이란 인식을 위한 이성이며, 실천이성이란 의지를 규정하고 행위를 인도하는 이성이다. 칸트에 있어서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정언명법에 의한 행위가 왜 선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행위가 선인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할 경우, 그 행위의 결과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칸 트는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무엇 무엇을 하라’라는 정언명법에 따른행위라야 선이라고 하였다. 가령 A라는 사람이 노상路上에서 육신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B라는사람을 만나 ‘B를 도우라’는 내부로부터의 정언명법에 의하여 A는 그B를 병원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 B는 남에게 신세지기를 원치 않는 사람일 경우도 있으며, 따라서 B는 그 도움을 사양하고 단독으로 병원에 가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움을주고자 하는 A는 실천이성이 내린 정언명법에 의해서 행동하고 있으므로 그것으로써 만족할 것이다. 즉 A의 행동은 A에게는 무조건 선이되겠지만, B에게는 달갑지 않은 친절이 되어서 선이라고는 느껴지지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동기만 좋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입장이 되어버린 것이 칸트의 입장이어서, 상식적인 선의 개념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칸트가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즉 인식과 실천을 분리했기 때문에 생긴 아포리아(난점難点)이다. 사실상 순수이성과실천이성은 둘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다. 理性은 하나이며, 그 하나의이성에 따라서 결과를 확인하면서 행동하는 것이 실제의 실천인 것이다. 또 칸트의 도덕률에 있어서 주관적인 격률을 보편화시키는 경우 그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보편화가 가능한가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또 칸트는,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도덕적인 인간이 되면 그것으로 행복이 실현될 것이라고 말하고, 또한편으로는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는 가언적仮言的이므로 선이라고할 수 없다고도 하였다. 인간이 행복을 희구하고 있음을 알면서 행복 을 목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요청하여 완전히 선을 행하면 그 상태가 행복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칸트의 여러 문제점들은 모두 그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모르는데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목적이라면 무조건 자애적自愛的, 이기적利己的인 것으로만 생각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창조목적에는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이 있고, 인간은 전체목적을 앞세우면서 개체목적을추구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목적이라면 모두 개체목적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모든 목적을 부정해 버렸고, 그의 도덕률은 그 기준이 애매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편으로, 칸트는 도덕률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영혼의 불멸과 하나님의 존재가 요청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신이나 영혼은 감각적 내용이 없으므로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이들을 배제해 버렸다. 여기에도 칸트철학의 아포리아가 있다. 칸트는 하나님을 요청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가정적인 神일 뿐, 참다운 신이거나 실존하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신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칸트는 실천이성實踐理性에 근거하는 의무감만을 선의 기준으로삼고 있다. 의무 그 자체는 차가운 것이다. 따라서 칸트가 말한 선의세계는 차가운 의무의 세계, 냉랭한 규율만을 지켜야 하는 병영兵營과같은 세계인 것이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의무나 규율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목적은 참된 사랑의 실현에 있으며, 의무나 규율은참사랑의 실현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2) 벤담 ==== ==== 1) 벤담의 윤리론 ==== 벤담(J. Bentham, 1748~1832)의 선악관은 다음과 같은 전제로부터출발하고 있다.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권자의 지배아래에 두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를 (우리에게) 지시하고,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쾌락과 고통뿐이다.”5) 이 전제에서 벤담은 쾌락(pleasure)과 고통(pain)을 선악의 기준으로 하는 ‘공리성功利性의 원리原理’(principle of utility)를 주창하였다. 벤담은 쾌락과 고통을 양적量的으로 계산하여, 가장 많은 쾌락을 가져오는 행위를 선으로 보고 ‘최대다수의 최대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을 그 원리로 삼았다. 그는 인간에게 쾌락과 고통을 가져오는 것으로 “네 개로 구별되는 원천이 있으며 그것들은…… 물리적, 정치적, 도덕적 및 종교적인 원천이라고 불려지고 있다”6)고 하였고,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물리적인원천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물리적인 쾌락과 고통만이 객관적으로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균등하게 물질적인 부를 얻는 것을 가장 소망스럽게 생각하였다. 칸트는 목적이나 물질적 이익에 구애되지 않는 순수한 선을 주장했지만, 벤담은 선의 행위는 인간에게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 주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특히 물질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사상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그 배 경으로 한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사회주의운동가 로버트 오웬(R. Owen, 1771~1858) 등에 영향을 주었다. 오웬은 벤담이 말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자기의 사상의 기초로 삼으면서, 불란서의 계몽주의사상과 유물론의 영향하에 환경의 개선운동을 전개하였다.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므로 환경을 좋게 하면 인간의 성격은 선량하게 되고 행복한 사회가 실현된다고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미국의 인디애나주에 ‘뉴 하모니 평등촌’을 건설했지만, 그의 노력은 동료들간의내부분열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와 같은 사회주의운동의 영향하에서 공리주의자들은 사회개혁의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선거법의 개정, 빈민법의 개정, 소송수속의 간소화, 곡물조례의 폐지, 식민지의 노예해방, 참정권의 확대,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의 개선 등등의 운동을 추진함으로써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의 개혁에 크게 기여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 2) 통일사상에서 본 벤담의 윤리관 ==== 벤담은 칸트가 주장한 ‘의무로서의 선’이 아니라 선의 행위 그 자체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선을 주장했는데, 그 점에 관한한 통일사상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을 물질적인 쾌락에 있다고 본 그의 견해는 통일사상과 다르다. 물질적인 쾌락에 의해서는인간의 참된 행복이 실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날 선진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스스로 행복하다고 자인하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왜냐하면 물질적 번영과 함께 사회혼란과 각종 범죄가 증대하고 있어서,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리주의에 의해 참된 행복이 실현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통일사상에서 본 벤담의 사상은 환경복귀를 위한 사상이었다고 말할수 있다. 이상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인간 복귀와 함께 환경 복귀가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섭리적으로 볼 때, 재림再臨의 때가 가까워옴에 따라서 이와 같은 사상의 출현은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벤담과는 대조적으로 칸트의 경우는, 인간 복귀를 위한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공리주의사상도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불충분한 것이어서 인간의 행복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 그 후 나타난공산주의도 환경 복귀를 위한 사상이었으나 폭력혁명이라는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그 결과 행복한 사회가 실현되기는커녕 오히려 비참한 사회를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정신적행복과 물질적 행복이 통일되어야 하는데, 인간이 안고 있는 정신적문제와 물질적 문제를 통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선의 기준이 세워질때 비로소 참된 행복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 (3) 분석철학 ==== ==== 1) 분석철학의 윤리관 ==== 철학의 임무는 일정한 세계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언어의 논리적 분석을 통하여 철학을 일종의 과학적인 학문으로 삼고자 한 것이 분석철학이다. 무어(G. E. Moore, 1873~1958), 러셀(B. Russell, 1872~1970),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1889~1951)등의 케임브리지 분석학파와 슈릭(M. Schlick, 1882~1936), 카르냅(R. Carnap, 1891~1971), 에이어(A. J. Ayer, 1910~1971) 등의 빈학파 혹은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 그리고 현대 영국의 일상언어학파 등을 총칭한 것이 분석철학이다. 분석철학 중에서 윤리학설의 대표적인 것들을 들자면 무어의 직각설直覺說 (intuitionism)과 슈릭, 에이어의 정서설情緖說(emotive theory) 등이 있다. 무어에 의하면, 선이란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말하고 있다. “‘선’이란 ‘황금’이 단순한 관념인 것과 같이 역시 단순한관념이라는 것, 그리고 ‘황색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이미 황색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도 설명할 수(도, 대답할 수도)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이란 무엇인 가라는물음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도, 대답할 수도) 없다”7)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의 대답은 ‘선이란선이다’라는 것이고, 그것으로 끝이다”8)라고 하여 선이란 직각(intuition)에 의해서 파악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무어에 있어서의가치판단은 사실판단과 완전히 독립한 것이었다. 또, 슈릭이나 에이어에 의하면 선이란 주관적主觀的인 정서를 표현하는 말에 불과하고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의사개념疑似槪念이었다. 따라서 ‘돈을 훔치는 것은 나쁘다’고 하는 윤리적 명제는 발언자의 도덕적 불찬성의 감정 혹은 기분의 표명에 지나지 않고, 참도 거짓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 2) 통일사상에서 본 분석철학의 윤리관 ==== 첫째로, 분석철학자들의 윤리관의 특징은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분리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사실판단이나 가치판단은 어느쪽이나 객관적인 것으로서 일체가 되어 있다고 본다. 단지 사실판단은누구나 감각에 의해 인정할 수 있는 현상에 관한 판단이므로 쉽게 객관성이 인정되는데 대하여, 가치판단은 한정된 종교나 철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된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아니어서 주관적인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심령기준心靈基準이 높아져서 우주에 일관되게 작용하고있는 가치법칙을 만인이 정확히 파악하게 된다면 가치판단도 보편타당성을 띠게 될 것이다. 자연과학은 오늘날까지 사실판단事實判斷만을 다루어 옴으로써 사물의인과관계因果關係를 추구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자연과학자들은 인과관계의 추구로는 자연현상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시점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자연현상의 의미나 그 이유를 의문으로 삼게됨으로써 사실판단과 더불어 가치판단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사실事實과 가치價値, 즉 과학과 윤리는 통일된 과제로서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통일사상의 견해이다. 둘째로 분석철학자들의 윤리관의 특징은 선이란 정의할 수 없는 것,혹은 의사개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선은 명확히정의할 수 있다. 즉 인간은 가정적사위기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실현한다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목적에 적합한 사랑의행위를 마음의 의적기능으로 평가한 것이 선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선은 현실적인 사실(행위)에 대한 평가이므로 가치와 사실은 분리할수 없는 것이다. ==== (4) 프래그머티즘 ==== ==== 1) 프래그머티즘의 윤리관 ==== 형이상학을 배제하고 경험적, 과학적 인식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프래그머티즘도 분석철학과 동일한 기반 위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퍼어스(C. S. Peirce, 1839~1914)에 의해서 제창된 프래그머티즘은 제임스(W. James, 1842~1910)에 의해서 일반화되었다. 제임스는 ‘유효한 것(It works)이 진리이다’라고 했다. 예컨대 누군가가 현관에 와서 ‘계십니까’하고 기척을 낼 때, 주인은 방안에서 그를보기 전에 그 찾는 음성만을 듣고서 그가 K씨라고 생각했다고 하자. 그리고 나서 현관에 나가 보고 그가 실제로 K씨였음이 확인되었다면,주인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진리라고 간주하게 된다. 즉 행위를 통하여 검증된 지식이 진리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진리란 작업가치(working value)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의 개념에 대한 진리란 그 개념에 내속內屬해 있는 고정된 성질이 아 니다. …… 사건(일의 결과)에 의해서 참이 되는 것이다. 진리의 진리성 은 사실에 있어서 하나의 사건, 하나의 과정인 데에 있다. 즉 진리(진리 성)가 자기 자신을 진리화해 가는 과정, 진리의 진리화의 과정인 데에 있다. 진리의 효력이란 진리의 효력화의 과정인 것이다.9) 이와 같이 진리의 기준 그대로가 가치의 기준, 선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어떤 윤리적 명제는 이론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마음의 만족이나 평안함을 준다는 점에서 진리이며, 또 선이다. 따라서 선이란 절대불변의 것이 아니며, 인류전체의 경험에 의해서 날마다새로이 수정, 개선되어 가는 것이다. 프래그머티즘의 완성자는 듀이(J. Dewey, 1859~1952)였다. 듀이는지성知性은 미래의 경험에 대해서 도구적으로 작용하는 것, 즉 지성은제문제를 유효하게 처리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도구주의(instrumentalism)를 주장했다. 제임스의 경우는 종교적인 진리도 인정했지만, 듀이는 일상생활의 입장에 서서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완전히 배제하였다. 이와 같은 듀이의 사고방식은 인간을 하나의 생명체 또는 유기체로보는 인간관에서 유래한다. 생명체는 항상 환경과 상호작용 하에 있으나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면, 거기에서 벗어나서 안정된 상태로 옮아가고자 한다. 그 때, 도구道具로써 활용되는 것이 지성知性이며, 이러한 지성을 터로 하고 풍요豊饒한 사회,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선한 행위라고 보았다. 듀이는 과학적인식과 가치인식을 동질적인 것으로 보았다. 지성을사용하여 합리적으로 행동하기만 하면 반드시 좋은 상태가 도래한다고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사실과 가치의 분열은 없다. 선이란, 욕망이 충족되도록 생활의 요구에 따라 일보일보 인식을 성장시키면서실현해 가는 것으로서, 일거一擧에 인식되는 것 같은 구극적究極的인 선을 부정했다. 선의 개념도 문제를 유효하게 처리하기 위한 도구요, 수단에 불과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도덕적 원리란 일정한 방법으로 행동을 하라든가, 행동하는 것을 보류하 라는 식의 명령은 아니다. 원리는 어떤 특별한 상황을 분석하기 위한 도 구이며, 정사正邪는 규제 그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상황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다.10) ==== 2) 통일사상에서 본 프래그머티즘의 윤리관 ==== 제임스는 유효한 것, 유용한 것이 진리이며 가치라고 했다. 이것은일상생활에 지식이나 가치를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일상적인 의․식․주의 생활에 지식이나 가치를 종속시키는 것은 전도轉倒된 사고방식이다. 의식주의 일상생활은 진․선․미의 가치를 기준으로 해야 하며, 진․선․미의 가치는 창조목적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창조목적이란 참된 사랑(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목적에 일치하는 행위가 선이 되는 것이지, 생활에 유용한행위가 반드시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생활에 유용한 행위가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적합하면 선이 된다. 제임스는 생활에 유용한 것을 진리와 선의 기준으로 삼았지만 생활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가 라는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듀이에 의하면, 선의 개념을 포함한 지성은 도구이다. 그러나 지성이 도구라는 주장은 과연 올바른 것일까. 통일사상에서 보면 심정(사랑) 혹은 목적을 중심으로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이 수수작용함으로써 로고스(사상)가 형성된다. 내적성상은 지․정․의의 기능이고, 내적형상은관념, 개념, 수리, 원칙 등이다. 여기서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은 주체와대상의 관계에 있으므로, 내적형상은 내적성상의 도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내적성상인 지․정․의의 기능도 사랑의 실현을 위한 도구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듀이의 경우, 지성도 선의 개념도 모두 사회개량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였다. 듀이가 말하는 도구설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면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단순히 일상생활의 풍부함을 목적으로 하는한, 그것은 옳지 않다. 선의 개념들 속에는 생활의 목적은 될지언정그 수단으로는 될 수 없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선의 개념은바로 생활의 수단이 아니고 목적인 것이다. 또, 듀이는 사회를 개선하기 위하여 과학을 발전시키면, 그것은 그대로 가치와 일치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이 그대로 가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 창조목적의 실현-하나님의 사랑의실현-을 목표로 하게 될 때 비로소 사실과 가치는 일치하게 된다. [[분류:통일교 교리 원문]] [[분류:통일사상요강]]
통일교 교리 원문/통일사상요강/제6장 윤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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