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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
== 원문 ==
<nowiki>
그러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었는가? 이 문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해결(未解決)의 문제로서 남아져 왔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원리(原理)를 통하여서만 명확히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면 제물을 쪼개야 하는 이유는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그러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었는가? 이 문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해결(未解決)의 문제로서 남아져 왔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원리(原理)를 통하여서만 명확히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면 제물을 쪼개야 하는 이유는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은 선과 악을 분립하여 악을 멸하고 선을 세움으로써 선주권(善主權)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아담 한 존재를 가인과 아벨로 분립한 후에 헌제(獻祭)해야 했던 것이나, 또 노아 때에 홍수(洪水)로써 악을 치고 선을 분립했던 것 등의 목적은 모두 선주권을 복귀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제물을 쪼개 바치게 함으로써, 아담이나 노아로써 이루지 못하였던 선악 분립의 상징역사(象徵役事)를 이루려 하셨던 것이다.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은 선과 악을 분립하여 악을 멸하고 선을 세움으로써 선주권(善主權)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아담 한 존재를 가인과 아벨로 분립한 후에 헌제(獻祭)해야 했던 것이나, 또 노아 때에 홍수(洪水)로써 악을 치고 선을 분립했던 것 등의 목적은 모두 선주권을 복귀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제물을 쪼개 바치게 함으로써, 아담이나 노아로써 이루지 못하였던 선악 분립의 상징역사(象徵役事)를 이루려 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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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노아 때에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내주셨던 10대와 40수를 동시에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하시기 위하여 400년이란 사탄 분립기간을 세우시고, 그 분립기대(分立基臺) 위에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그 제물을 또 사탄에게 바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상징헌제’로써 아브람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한 탕감기간(蕩減期間)이었던 노아 이후의 400년 전도기간도 역시 사탄에게 내주시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하기 전의 입장이며, 따라서 노아가 방주(方舟)를 짓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입장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서는 이 400년이란 사탄분립기간을 다시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고역하는 400년 기간은, 노아나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출발하려 했었던 그 입장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여 모세를 그 터전위에 세우시기 위한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 고역기간(苦役期間)은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로 인한 벌을 받는 기간인 동시에,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를 위하여 사탄 분립의 터를 닦는 기간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 때에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내주셨던 10대와 40수를 동시에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하시기 위하여 400년이란 사탄 분립기간을 세우시고, 그 분립기대(分立基臺) 위에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그 제물을 또 사탄에게 바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상징헌제’로써 아브람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한 탕감기간(蕩減期間)이었던 노아 이후의 400년 전도기간도 역시 사탄에게 내주시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하기 전의 입장이며, 따라서 노아가 방주(方舟)를 짓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입장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서는 이 400년이란 사탄분립기간을 다시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고역하는 400년 기간은, 노아나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출발하려 했었던 그 입장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여 모세를 그 터전위에 세우시기 위한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 고역기간(苦役期間)은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로 인한 벌을 받는 기간인 동시에,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를 위하여 사탄 분립의 터를 닦는 기간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한 제단에 3제물을 동시에 드리는 ‘상징헌제’에 성공하심으로써 소생(蘇生), 장성(長成), 완성(完成)으로 표시된 모든 섭리를 동시에 이루려 하셨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논술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를 중심한 섭리는 다시 이삭을 거쳐 야곱까지 3대에 걸친 연장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상징헌제’실패는 노아의 방주(方舟)를 중심한 ‘상징헌제’와 가인 아벨을 중심한 ‘상징헌제’등의 실패를 반복한 것이 되어 버렸다. 295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한 제단에 3제물을 동시에 드리는 ‘상징헌제’에 성공하심으로써 소생(蘇生), 장성(長成), 완성(完成)으로 표시된 모든 섭리를 동시에 이루려 하셨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논술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를 중심한 섭리는 다시 이삭을 거쳐 야곱까지 3대에 걸친 연장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상징헌제’실패는 노아의 방주(方舟)를 중심한 ‘상징헌제’와 가인 아벨을 중심한 ‘상징헌제’등의 실패를 반복한 것이 되어 버렸다. 295
(2) 아브라함의 이삭 헌제  296
 
==== (2) 아브라함의 이삭 헌제  296 ====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한 후 다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시어(창 22:2), 그로써 ‘상징헌제’의 실패를 탕감복귀하시려는 새로운 섭리를 하셨다. 예정론(豫定論)에 의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뜻을 위하여 예정되었던 인물이 그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 장본인을 다시 세워 쓰실 수는 없게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그 헌제로써 찾아 세우려던 모든 뜻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을 다시 세우시어 이삭 헌제로써 그의 ‘상징헌제’의 실패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려는 섭리를 하실 수 있었던 것인가?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한 후 다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시어(창 22:2), 그로써 ‘상징헌제’의 실패를 탕감복귀하시려는 새로운 섭리를 하셨다. 예정론(豫定論)에 의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뜻을 위하여 예정되었던 인물이 그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 장본인을 다시 세워 쓰실 수는 없게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그 헌제로써 찾아 세우려던 모든 뜻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을 다시 세우시어 이삭 헌제로써 그의 ‘상징헌제’의 실패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려는 섭리를 하실 수 있었던 것인가?
첫째로,‘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아담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2차였고,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2차였으며,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3차였다. 그런데 3수는 완성수 (후편 제3장 제2절 Ⅳ)이기 때문에,‘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시려는 섭리가 연장되기 제3차 만이었던 아브라함 때에는 이 섭리를 완성해야 할 원리적인 조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실체로 헌제하여 보다 큰 것으로서의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움으로써,‘상징헌제’실수로 인하여 상징적으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첫째로,‘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아담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2차였고,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2차였으며,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3차였다. 그런데 3수는 완성수 (후편 제3장 제2절 Ⅳ)이기 때문에,‘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시려는 섭리가 연장되기 제3차 만이었던 아브라함 때에는 이 섭리를 완성해야 할 원리적인 조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실체로 헌제하여 보다 큰 것으로서의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움으로써,‘상징헌제’실수로 인하여 상징적으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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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이삭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삭을 통하여 이루어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이삭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삭을 통하여 이루어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이 이삭을 다시 하늘편으로 분립함으로써 새로운 섭리노정(攝理路程)을 출발하기 위하여, 모리아산상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는 데 3일 기간을 소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3일 기간은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새로운 섭리노정을 출발하는 데 있어서의 사탄을 분립하는 기간으로 필요한 것이 되었다. 야곱도 하란에서 그 가족을 이끌고 가정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출발할 때에 사탄 분립의 3일 기간이 있었고(창 31:20~22), 모세도 역시 애급(埃及)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였을 때에 사탄 분립의 3일 기간을 지난 후에야 홍해(紅海)를 향해 출발하였었다(출 8:27~29) 예수님도 영적으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실 때 사탄 분립의 무덤 3일 기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도, 본진에 앞서 그들을 인도한 법궤가 사탄분립의 3일노정을 걸었던 것이다.(수 3:1~6)
아브라함은 이와 같이 이삭을 다시 하늘편으로 분립함으로써 새로운 섭리노정(攝理路程)을 출발하기 위하여, 모리아산상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는 데 3일 기간을 소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3일 기간은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새로운 섭리노정을 출발하는 데 있어서의 사탄을 분립하는 기간으로 필요한 것이 되었다. 야곱도 하란에서 그 가족을 이끌고 가정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출발할 때에 사탄 분립의 3일 기간이 있었고(창 31:20~22), 모세도 역시 애급(埃及)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였을 때에 사탄 분립의 3일 기간을 지난 후에야 홍해(紅海)를 향해 출발하였었다(출 8:27~29) 예수님도 영적으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실 때 사탄 분립의 무덤 3일 기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도, 본진에 앞서 그들을 인도한 법궤가 사탄분립의 3일노정을 걸었던 것이다.(수 3:1~6)
(3)뜻으로 본 이삭의 위치와 그의 상징헌제  299
 
==== (3)뜻으로 본 이삭의 위치와 그의 상징헌제  299 ====
 
아브라함은 일단 그의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하였지만, 그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룰 수 있는 원리적인 조건이 있었다는 데 관해서는 이미 위에서 상론(詳論)한 바 있다. 그러나 예정론(豫定論)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고 실패한 장본인인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또다시 같은 섭리를 되풀이 할 수는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상징헌제에서 실패한 아브라함을 실패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세워야 했던 것이고, 또 그로부터 연장된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연장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세워야 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燔祭)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창 22:2)
아브라함은 일단 그의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하였지만, 그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룰 수 있는 원리적인 조건이 있었다는 데 관해서는 이미 위에서 상론(詳論)한 바 있다. 그러나 예정론(豫定論)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고 실패한 장본인인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또다시 같은 섭리를 되풀이 할 수는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상징헌제에서 실패한 아브라함을 실패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세워야 했던 것이고, 또 그로부터 연장된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연장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세워야 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燔祭)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창 22:2)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이삭)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루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4~5)고 하심으로써 이삭을 통하여 선민(選民)을 부르실 것을 약속하셨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그 약속의 자식인 이삭을 죽이려 했던 충성은,‘상징헌제’에 실수함으로 인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자기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과 같은 입장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입장에서, 침범하였던 사탄을 분립하였고, 더 나아가서 뜻을 중심하고 이삭과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이삭)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루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4~5)고 하심으로써 이삭을 통하여 선민(選民)을 부르실 것을 약속하셨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그 약속의 자식인 이삭을 죽이려 했던 충성은,‘상징헌제’에 실수함으로 인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자기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과 같은 입장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입장에서, 침범하였던 사탄을 분립하였고, 더 나아가서 뜻을 중심하고 이삭과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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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뜻이 이삭에게로 옮겨진 후,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 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를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수양으로 번제(燔祭)를 드렸으니, 이것은 그대로 이삭을 중심하고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세워진 '상징헌제(象徵獻祭)'가 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뜻이 이삭에게로 옮겨진 후,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 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를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수양으로 번제(燔祭)를 드렸으니, 이것은 그대로 이삭을 중심하고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세워진 '상징헌제(象徵獻祭)'가 된 것이었다.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갔던 사실로 보아 아브라함이 수양을 번제로 드리는 데 있어서도 이삭이 그를 협조하였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따라서 아브라함이 수양으로 '상징헌제‘를 드렸다 하였지만,뜻으로 보면 그와 한 몸이 되어 그의 사명을 계승한 이삭 자신이 헌제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이와 같이 이삭은 아브라함의 사명을 인계하고 그를 대신한 입장에서 '상징헌제’에 성공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였던 것이다.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갔던 사실로 보아 아브라함이 수양을 번제로 드리는 데 있어서도 이삭이 그를 협조하였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따라서 아브라함이 수양으로 '상징헌제‘를 드렸다 하였지만,뜻으로 보면 그와 한 몸이 되어 그의 사명을 계승한 이삭 자신이 헌제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이와 같이 이삭은 아브라함의 사명을 인계하고 그를 대신한 입장에서 '상징헌제’에 성공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였던 것이다.
Ⅱ. 실체기대
 
=== Ⅱ. 실체기대 ===
 
이와 같이 이삭은 아브라함을 대신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中心人物)로서, 수양으로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렸으므로 ‘믿음의 기대’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삭을 중심하고‘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우려면, 여기에서 또 다시 그의 자식 에서와 야곱을 가인광 아벨의 입장에 분립하여 놓고 ‘실체헌제(實體獻祭)’를 함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삭은 아브라함을 대신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中心人物)로서, 수양으로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렸으므로 ‘믿음의 기대’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삭을 중심하고‘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우려면, 여기에서 또 다시 그의 자식 에서와 야곱을 가인광 아벨의 입장에 분립하여 놓고 ‘실체헌제(實體獻祭)’를 함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수하지 않았더라면 이삭과 그의 이복형(異服兄)이 되는 이스마엘이 각각 아벨과 가인의 입장에 서 가지고 가인과 아벨이 이루지 못하였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했던 것이다.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헌제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입장에 이삭을 대신 세우시고 이스마엘과 이삭의 입장에는 각각 에서와 야곱을 대신 세우시어 그들로 하여금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게 하는 섭리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을 중심한 에서와 야곱은 아담을 중심한 가인과 아벨의 입장인 동시에 노아를 중심한 셈과 함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수하지 않았더라면 이삭과 그의 이복형(異服兄)이 되는 이스마엘이 각각 아벨과 가인의 입장에 서 가지고 가인과 아벨이 이루지 못하였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했던 것이다.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헌제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입장에 이삭을 대신 세우시고 이스마엘과 이삭의 입장에는 각각 에서와 야곱을 대신 세우시어 그들로 하여금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게 하는 섭리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을 중심한 에서와 야곱은 아담을 중심한 가인과 아벨의 입장인 동시에 노아를 중심한 셈과 함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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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에서와 야곱이 ‘실체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일찍이 아담가정으로부터 ‘실체헌제(實體獻祭)’를 탕감복귀하여 나온 종적인 역사노정을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노정 중 이삭가정에서 비로소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에서와 야곱이 ‘실체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일찍이 아담가정으로부터 ‘실체헌제(實體獻祭)’를 탕감복귀하여 나온 종적인 역사노정을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노정 중 이삭가정에서 비로소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에서를 태중(胎中)에서부터 미워하였다고 로마서 9장 11절 내지 13절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와 같이 그는 야곱에게 굴복하여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였기 때문에 복귀한 가인의 입장에 설 수 있게 되어 드디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따라서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다만 그가 복귀섭리(復歸攝理)의 탕감조건(蕩減條件)을 맞추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사탄편인 가인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미움을 받을 수 있었던 그 입장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에서를 태중(胎中)에서부터 미워하였다고 로마서 9장 11절 내지 13절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와 같이 그는 야곱에게 굴복하여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였기 때문에 복귀한 가인의 입장에 설 수 있게 되어 드디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따라서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다만 그가 복귀섭리(復歸攝理)의 탕감조건(蕩減條件)을 맞추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사탄편인 가인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미움을 받을 수 있었던 그 입장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Ⅲ. 메시아를 위한 기대
 
=== Ⅲ. 메시아를 위한 기대 ===
 
아담가정에서부터 세우려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복귀섭리의 중심인물들이 그들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3시대에 걸쳐 연장되어 아브라함에까지 이르렀었다. 그러나 이 뜻을 완성해야 할 아브라함이 또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수함으로 인하여 이 뜻은 다시 이삭에게로 연장되었었다. 그런데 이삭가정을 중심하고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이루어짐으로써 이때에 비로소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메시아는 응당 이때에 강림(降臨)하셔야 될 것이었다.
아담가정에서부터 세우려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복귀섭리의 중심인물들이 그들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3시대에 걸쳐 연장되어 아브라함에까지 이르렀었다. 그러나 이 뜻을 완성해야 할 아브라함이 또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수함으로 인하여 이 뜻은 다시 이삭에게로 연장되었었다. 그런데 이삭가정을 중심하고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이루어짐으로써 이때에 비로소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메시아는 응당 이때에 강림(降臨)하셔야 될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중심하고 볼 때, 메시아를 맞기 위한 이 기대의 사회적인 배경은 어떠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중심하고 볼 때, 메시아를 맞기 위한 이 기대의 사회적인 배경은 어떠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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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인한 탕감노정을 담당한 야곱은 하늘 뜻을 위한 지혜로써 에서로부터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빼앗는 개인적인 싸움에서 성공하였고, 사탄세계인 하란으로 들어가 그의 외숙부(外叔父) 라반으로부터 장자의 기업을 가정적으로 빼았는 21년 간의 싸움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가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또 천사(天使)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인간조상이 타락된 이후 타락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천사에 대한 주관성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음으로써 선민(選民) 형성의 기틀을 잡았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인한 탕감노정을 담당한 야곱은 하늘 뜻을 위한 지혜로써 에서로부터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빼앗는 개인적인 싸움에서 성공하였고, 사탄세계인 하란으로 들어가 그의 외숙부(外叔父) 라반으로부터 장자의 기업을 가정적으로 빼았는 21년 간의 싸움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가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또 천사(天使)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인간조상이 타락된 이후 타락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천사에 대한 주관성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음으로써 선민(選民) 형성의 기틀을 잡았던 것이다.
야곱은 이러한 노정을 걸어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비로소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으므로, 그는 사탄을 굴복시키는 전형노정(典型路程)을 성공적으로 걷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전형노정을 따라서 모세도 걸었고 예수님도 걸으셨으며 이스라엘 민족도 또한 걸어야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사는 사탄을 민족적으로 굴복시켜 온 그 전형노정의 사료(史料)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사가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의 중심사료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야곱은 이러한 노정을 걸어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비로소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으므로, 그는 사탄을 굴복시키는 전형노정(典型路程)을 성공적으로 걷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전형노정을 따라서 모세도 걸었고 예수님도 걸으셨으며 이스라엘 민족도 또한 걸어야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사는 사탄을 민족적으로 굴복시켜 온 그 전형노정의 사료(史料)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사가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의 중심사료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Ⅳ.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가 우리에게 보여 준 교훈
 
=== Ⅳ.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가 우리에게 보여 준 교훈 ===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첫째로 우리에게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豫定)이 어떠하신가를 보여 주셨다. 복귀섭리는 하나님의 뜻만으로써는 이루어질 수 없고,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이 합해져서만 비로소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려 하셨으나, 그가 자기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첫째로 우리에게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豫定)이 어떠하신가를 보여 주셨다. 복귀섭리는 하나님의 뜻만으로써는 이루어질 수 없고,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이 합해져서만 비로소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려 하셨으나, 그가 자기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 어떠하신가를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예정하셨으나, 아브라함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명은 이삭을 거쳐 야곱에로 옮겨졌던 것이다.
둘째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 어떠하신가를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예정하셨으나, 아브라함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명은 이삭을 거쳐 야곱에로 옮겨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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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로눈 제물을 쪼개는 것으로써, 우리들도 각자를 제물로서 쪼개어 선과 악으로 분립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신앙생활은 자신을 제물의 입장에 세워 놓고 선과 악으로 쪼개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축(牲畜)의 제물로 바치는 생활이다.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중심하고 자신을 쪼개지 않을 때에는 거기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는 것이다.
넷째로눈 제물을 쪼개는 것으로써, 우리들도 각자를 제물로서 쪼개어 선과 악으로 분립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신앙생활은 자신을 제물의 입장에 세워 놓고 선과 악으로 쪼개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축(牲畜)의 제물로 바치는 생활이다.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중심하고 자신을 쪼개지 않을 때에는 거기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는 것이다.


== 제2장 모세와 예수를 중심한 복귀섭리 ==


제2장 모세와 예수를 중심한 복귀섭리
아모스 3장 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에 관한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원리를 몰랐기 때문에, 성서를 보아도 그 숨은 뜻을 알 길이 없었다. 성서에서는 하나의 선지자(先知者)의 생애에 대한 기록도 그것의 실상은 단순히 그의 역사에만 멎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선지자의 생애를 통하여 타락인간(墮落人間)이 가야 할 길을 보여준 것이다. 여기에서는 특히 하나님이 야곱과 모세를 세워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을 걷게 하시어, 그것으로써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걸으실 섭리노정을 어떻게 미리 보여주셨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겠다.
아모스 3장 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에 관한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원리를 몰랐기 때문에, 성서를 보아도 그 숨은 뜻을 알 길이 없었다. 성서에서는 하나의 선지자(先知者)의 생애에 대한 기록도 그것의 실상은 단순히 그의 역사에만 멎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선지자의 생애를 통하여 타락인간(墮落人間)이 가야 할 길을 보여준 것이다. 여기에서는 특히 하나님이 야곱과 모세를 세워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을 걷게 하시어, 그것으로써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걸으실 섭리노정을 어떻게 미리 보여주셨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겠다.
제1절 사탄 굴복의 본보기 노정
 
=== 제1절 사탄 굴복의 본보기 노정 ===
 
이삭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있어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우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이었던 야곱이 아벨의 입장을 확립하여 가지고,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사탄을 굴복시켜 나아가던 전노정은, 야곱에 의한 그 상징노정(象徵路程)을 형상적(形象的)으로 걸어야 할 모세노정이나, 또 그것을 실체적(實體的)으로 걸어야 할 예수님의 노정에 대한 전형노정(典型路程)이었다. 그리고 이 노정은 이스라엘 민족과 전인류가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탄을 굴복시키면서 걸어가야 할 본보기노정이기도 하다.
이삭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있어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우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이었던 야곱이 아벨의 입장을 확립하여 가지고,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사탄을 굴복시켜 나아가던 전노정은, 야곱에 의한 그 상징노정(象徵路程)을 형상적(形象的)으로 걸어야 할 모세노정이나, 또 그것을 실체적(實體的)으로 걸어야 할 예수님의 노정에 대한 전형노정(典型路程)이었다. 그리고 이 노정은 이스라엘 민족과 전인류가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탄을 굴복시키면서 걸어가야 할 본보기노정이기도 하다.
Ⅰ. 예수님의 전형노정으로 야곱노정과 모세노정을 세우신 이유
 
=== Ⅰ. 예수님의 전형노정으로 야곱노정과 모세노정을 세우신 이유 ===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으로서 사탄을 자연굴복(自然屈伏)시키고 주관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조상으로서 메시아의 사명을 맡고 오신 것도, 사탄굴복의 최종적인 노정을 개척하여 모든 성도(聖徒)들로 하여금 그 노정을 따라가게 함으로써, 사탄을 자연굴복케 하시기 위함이었다.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으로서 사탄을 자연굴복(自然屈伏)시키고 주관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조상으로서 메시아의 사명을 맡고 오신 것도, 사탄굴복의 최종적인 노정을 개척하여 모든 성도(聖徒)들로 하여금 그 노정을 따라가게 함으로써, 사탄을 자연굴복케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도 순종굴복(順從屈伏)하지 않았던 사탄이 인간조상으로 오시는 예수님과 성도들에게 순종굴복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원리적인 책임을 지시고 야곱을 세우심으로써, 그를 통하여 사탄을 굴복시키는 상징노정을 본보기로 보여주셨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도 순종굴복(順從屈伏)하지 않았던 사탄이 인간조상으로 오시는 예수님과 성도들에게 순종굴복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원리적인 책임을 지시고 야곱을 세우심으로써, 그를 통하여 사탄을 굴복시키는 상징노정을 본보기로 보여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야곱을 세우시어 사탄을 굴복시키는 본보기노정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모세는 이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그 형상노정(形象路程)을 걸음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야곱노정을 밟아온 모세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그 실체노정(實體路程)을 걸음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었으며, 한편 또 성도들도 그 노정을 따라 걸음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키고 주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야곱을 세우시어 사탄을 굴복시키는 본보기노정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모세는 이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그 형상노정(形象路程)을 걸음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야곱노정을 밟아온 모세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그 실체노정(實體路程)을 걸음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었으며, 한편 또 성도들도 그 노정을 따라 걸음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키고 주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세가 자기와 같은 선지자(先知者) 한 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실 것이라고 한 것은(사도행전 3장 22절), 모세와 같은 입장에서 모세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섭리노정을 걸으셔야 할 예수님을 표시한 말이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 19절에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미 모세를 세워서 보여주신 본보기노정을 그대로 걷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다음에 오실 예수님의 모의자(模擬者)가 되는 것이다(사도행전 3장 22절).
모세가 자기와 같은 선지자(先知者) 한 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실 것이라고 한 것은(사도행전 3장 22절), 모세와 같은 입장에서 모세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섭리노정을 걸으셔야 할 예수님을 표시한 말이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 19절에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미 모세를 세워서 보여주신 본보기노정을 그대로 걷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다음에 오실 예수님의 모의자(模擬者)가 되는 것이다(사도행전 3장 22절).
Ⅱ. 야곱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노정과 예수노정
 
=== Ⅱ. 야곱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노정과 예수노정 ===
 
야곱노정은 바로 사탄을 굴복시켜 나아간 노정이다. 그리고 사탄을 굴복시키는 노정은 사탄이 침범했던 그 경로를 되돌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야곱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노정과 예수노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야곱노정은 바로 사탄을 굴복시켜 나아간 노정이다. 그리고 사탄을 굴복시키는 노정은 사탄이 침범했던 그 경로를 되돌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야곱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노정과 예수노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① 인간은 원래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이었는데, 천사장(天使長)으로부터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함으로써 타락(墮落)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야곱이 하란에서 처자(妻子)와 제물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復歸)하여 가정적으로 가나안 복귀 완성자가 되기 위하여는, 사탄과 생명을 걸고 싸우는 시련에서 승리해야 했던 것이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天使)와 생명을 걸고 싸워 승리함으로써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은 것은(창세기 32장 25~28절) 바로 이러한 시련을 넘기 위한 것이다.
① 인간은 원래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이었는데, 천사장(天使長)으로부터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함으로써 타락(墮落)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야곱이 하란에서 처자(妻子)와 제물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復歸)하여 가정적으로 가나안 복귀 완성자가 되기 위하여는, 사탄과 생명을 걸고 싸우는 시련에서 승리해야 했던 것이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天使)와 생명을 걸고 싸워 승리함으로써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은 것은(창세기 32장 25~28절) 바로 이러한 시련을 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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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뜻을 이루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은 사탄세계에서 하늘세계에로 복귀하는 노정을 걷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므로 야곱은 사탄세계인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하는 노정을 걸었고(창세기 31장 33절), 모세는 사탄세계인 애급에서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복귀하는 노정을 걸었으며(출애굽기 3장 8절), 예수님도 이 노정을 걸으시기 위하여 출생하자마자 애급으로 피난갔다 돌아오셔야 했던 것이다(마태복음 2장 13절).
⑦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뜻을 이루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은 사탄세계에서 하늘세계에로 복귀하는 노정을 걷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므로 야곱은 사탄세계인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하는 노정을 걸었고(창세기 31장 33절), 모세는 사탄세계인 애급에서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복귀하는 노정을 걸었으며(출애굽기 3장 8절), 예수님도 이 노정을 걸으시기 위하여 출생하자마자 애급으로 피난갔다 돌아오셔야 했던 것이다(마태복음 2장 13절).
⑧ 복귀섭리의 최종적인 목적은 사탄을 괴멸(壞滅)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야곱은 우상(偶像)을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고(창세기 35장 4절), 모세는 금송아지로 된 우상을 부수어 그 가루를 물에 뿌려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시게 하였으며(출애굽기 32장 26절), 예수님은 그의 말씀과 권능으로 사탄을 굴복시킴으로써, 이 죄악세계를 진멸(殄滅)하셔야 했던 것이다(전편 제3장 제3절 Ⅱ.2참조).
⑧ 복귀섭리의 최종적인 목적은 사탄을 괴멸(壞滅)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야곱은 우상(偶像)을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고(창세기 35장 4절), 모세는 금송아지로 된 우상을 부수어 그 가루를 물에 뿌려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시게 하였으며(출애굽기 32장 26절), 예수님은 그의 말씀과 권능으로 사탄을 굴복시킴으로써, 이 죄악세계를 진멸(殄滅)하셔야 했던 것이다(전편 제3장 제3절 Ⅱ.2참조).
제2절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
 
Ⅰ.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의 개관
=== 제2절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 ===
 
=== Ⅰ.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의 개관 ===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에서 이미 세워진 '메시아를 위한 기대'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탕감복귀하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해야 된다는 원칙은 그에게 있어서도 다름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섭리를 담당한 중심인물(中心人物)들이 달라졌으므로, 그 인물들 자신도 또한 그러한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않고는 복귀섭리의 뜻을 계승할 수 없었으며, 또 그 섭리의 범위가 가정적인 것에서 민족적인 것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에 있어서는 다음의 기록이 보이는 바와같이, 이 기대의 조성을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의 내용이 전의 것에 비하여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에서 이미 세워진 '메시아를 위한 기대'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탕감복귀하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해야 된다는 원칙은 그에게 있어서도 다름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섭리를 담당한 중심인물(中心人物)들이 달라졌으므로, 그 인물들 자신도 또한 그러한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않고는 복귀섭리의 뜻을 계승할 수 없었으며, 또 그 섭리의 범위가 가정적인 것에서 민족적인 것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에 있어서는 다음의 기록이 보이는 바와같이, 이 기대의 조성을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의 내용이 전의 것에 비하여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1. 믿음의 기대
 
(1)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
==== 1. 믿음의 기대 ====
 
==== (1)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 ====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말미암은, 그 후손의 애급고역(埃及苦役) 400년기간이 끝난 다음,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지(福地)로 복귀하는 노정에 있어서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은 모세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가 이 '믿음의 기대'를 어떻게 세웠는가 하는 것을 알기 전에, 복귀섭리로 본 모세의 위치를 상고(詳考)하여 모세 이전의 섭리노정(攝理路程)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려던 다른 인물들, 즉 아담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에 비하여, 모세의 다른점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말미암은, 그 후손의 애급고역(埃及苦役) 400년기간이 끝난 다음,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지(福地)로 복귀하는 노정에 있어서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은 모세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가 이 '믿음의 기대'를 어떻게 세웠는가 하는 것을 알기 전에, 복귀섭리로 본 모세의 위치를 상고(詳考)하여 모세 이전의 섭리노정(攝理路程)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려던 다른 인물들, 즉 아담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에 비하여, 모세의 다른점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그것은 첫째로, 모세는 하나님 대신의 신(神)으로 세워졌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기 4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선지자 아론 앞에서 신과 같이 되리라고 하셨고, 또 출애굽기 7장 1절에는 그를 바로에게 있어 신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다.
그것은 첫째로, 모세는 하나님 대신의 신(神)으로 세워졌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기 4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선지자 아론 앞에서 신과 같이 되리라고 하셨고, 또 출애굽기 7장 1절에는 그를 바로에게 있어 신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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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모세의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은, 바로 그대로가 아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바와같이,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걸으실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전형(典型)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모세의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은, 바로 그대로가 아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바와같이,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걸으실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전형(典型)이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가 예수님의 모의자(模擬者)였다는 사실은 신명기 18장 18절 내지 19절에 하나님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예수님)를 세우실 것을 예언하시면서,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벌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도 역시 하나님이 모세를 시켜, 장차 예수님이 행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가 예수님의 모의자(模擬者)였다는 사실은 신명기 18장 18절 내지 19절에 하나님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예수님)를 세우실 것을 예언하시면서,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벌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도 역시 하나님이 모세를 시켜, 장차 예수님이 행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
 
==== (2)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 ====
 
모세는 위에서 논한 바와같이, 모세 이전의 섭리노정(攝理路程)에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여 온 다른 중심인물들과는 다른 입장에 서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아벨이나 노아나 아브라함과 같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고 '40일 사탄분립기대'만을 세우면,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할 수 있었다.
모세는 위에서 논한 바와같이, 모세 이전의 섭리노정(攝理路程)에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여 온 다른 중심인물들과는 다른 입장에 서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아벨이나 노아나 아브라함과 같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고 '40일 사탄분립기대'만을 세우면,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할 수 있었다.
그 이유를 더 들어 보면, 첫째, 모세는 아벨 노아 이삭등 3차에 걸친 '상징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상징헌제'에 의한 섭리를 모두 완료한 기대 위에 섰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더 들어 보면, 첫째, 모세는 아벨 노아 이삭등 3차에 걸친 '상징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상징헌제'에 의한 섭리를 모두 완료한 기대 위에 섰었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시조가 타락하여,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게 됨으로 말미암아, 타락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말씀 대신의 조건물로 세운 것이 제물이었다. 그런데 모세 때에 이르러서는, 제물을 조건물로 세워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던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는 지나가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대할 수 있는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로 들어왔기 때문에, '믿음의 기대'를 위한 '상징헌제'는 필요없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인간시조가 타락하여,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게 됨으로 말미암아, 타락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말씀 대신의 조건물로 세운 것이 제물이었다. 그런데 모세 때에 이르러서는, 제물을 조건물로 세워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던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는 지나가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대할 수 있는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로 들어왔기 때문에, '믿음의 기대'를 위한 '상징헌제'는 필요없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 아담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연장되어감에 따라, 사탄이 침범하여 연장되었던 그 섭리적인 기간을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노아가 방주(方舟)로써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하여는 '40일 사탄분립기대'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400년기간을 탕감복귀하여 40일 사탄분립기대 위에 선 후에야,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상징헌제'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400년간 고역하게 되었던 것도, '40일 사탄분립기대'를 탕감복귀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인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던 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되어 복귀섭리시대에 있어서는 '40일 사탄분립기대' 위에서 제물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고 서기만 하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 아담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연장되어감에 따라, 사탄이 침범하여 연장되었던 그 섭리적인 기간을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노아가 방주(方舟)로써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하여는 '40일 사탄분립기대'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400년기간을 탕감복귀하여 40일 사탄분립기대 위에 선 후에야,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상징헌제'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400년간 고역하게 되었던 것도, '40일 사탄분립기대'를 탕감복귀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인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던 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되어 복귀섭리시대에 있어서는 '40일 사탄분립기대' 위에서 제물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고 서기만 하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2. 실체기대
 
==== 2. 실체기대 ====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에 있어서는 '가정적인 실체기대'를 세우는 섭리를 하셨었다. 그러나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에 들어와서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세우는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모세는 하나님 대신이었으므로(출애굽기 4장 16절, 출애굽기 7장 1절) 예수님의 입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하여는 부모의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모세는 예수님에 앞서서 그의 길을 개척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선지자(先知者)로서 자녀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세워야 할 중심인물로서 아벨의 입장에도 설 수 있어야 하였다.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에 있어서는 '가정적인 실체기대'를 세우는 섭리를 하셨었다. 그러나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에 들어와서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세우는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모세는 하나님 대신이었으므로(출애굽기 4장 16절, 출애굽기 7장 1절) 예수님의 입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하여는 부모의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모세는 예수님에 앞서서 그의 길을 개척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선지자(先知者)로서 자녀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세워야 할 중심인물로서 아벨의 입장에도 설 수 있어야 하였다.
아벨은 아담 대신 부모의 입장에서 헌제(獻祭)를 하였기 때문에, 그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아담이 세워야 할 '믿음의 기대'와 함께 '실체헌제(實體獻祭)'를 위한 아벨 자신의 입장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과 동일한 원리에 의하여 이때에 있어서 모세도 부모와 자녀의 두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도 역시 부모의 입장에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게 되면, 그와 동시에 자녀의 입장에서 '실체헌제'를 하기 위한 아벨의 위치도 확립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아벨은 아담 대신 부모의 입장에서 헌제(獻祭)를 하였기 때문에, 그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아담이 세워야 할 '믿음의 기대'와 함께 '실체헌제(實體獻祭)'를 위한 아벨 자신의 입장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과 동일한 원리에 의하여 이때에 있어서 모세도 부모와 자녀의 두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도 역시 부모의 입장에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게 되면, 그와 동시에 자녀의 입장에서 '실체헌제'를 하기 위한 아벨의 위치도 확립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모세가 아벨의 위치를 확립한 후, 이스라엘민족이 가인의 입장에서 모세를 통하여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면 거기에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모세가 아벨의 위치를 확립한 후, 이스라엘민족이 가인의 입장에서 모세를 통하여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면 거기에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3. 메시아를 위한 기대
 
==== 3. 메시아를 위한 기대 ====
 
모세가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고,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민족이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하면, 그것이 바로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그 기대 위에서, 오시는 메시아로 말미암아 중생(重生)되어 원죄를 벗고, 하나님과 심정적인 일체를 이룸으로써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하면 '완성실체'가 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고,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민족이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하면, 그것이 바로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그 기대 위에서, 오시는 메시아로 말미암아 중생(重生)되어 원죄를 벗고, 하나님과 심정적인 일체를 이룸으로써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하면 '완성실체'가 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Ⅱ.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
 
=== Ⅱ.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 ===
 
모세가 사탄세계인 애급(埃及)에서 이스라엘 선민을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로써 인도하여, 홍해(紅海)를 건너고 광야를 돌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노정은, 장차 예수님이 이 죄악세계(罪惡世界)에서 제2 이스라엘인 기독교 신도들을 이적과 기사로 인도하여, 이 죄악세계의 고해(苦海)를 건너고 생명의 물이 마른 사막을 돌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창조본연의 에덴으로 복귀케 될 그 노정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모세가 사탄세계인 애급(埃及)에서 이스라엘 선민을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로써 인도하여, 홍해(紅海)를 건너고 광야를 돌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노정은, 장차 예수님이 이 죄악세계(罪惡世界)에서 제2 이스라엘인 기독교 신도들을 이적과 기사로 인도하여, 이 죄악세계의 고해(苦海)를 건너고 생명의 물이 마른 사막을 돌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창조본연의 에덴으로 복귀케 될 그 노정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이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3차로 연장된 것과 같이, 예수님을 중심한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도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3차로 연장되었던 것이다.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여기에서는 모세노정과 예수노정과의 세밀한 대조설명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것은 본절과 다음 절을 대조함으로써 소상히 밝혀질 것이다.
한편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이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3차로 연장된 것과 같이, 예수님을 중심한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도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3차로 연장되었던 것이다.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여기에서는 모세노정과 예수노정과의 세밀한 대조설명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것은 본절과 다음 절을 대조함으로써 소상히 밝혀질 것이다.
1.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 1.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
 
==== (1) 믿음의 기대 ====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간을 애급에서 고역(苦役)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초래된 민족적인 탕감기간(蕩減期間)은 끝나게 되었었다. 여기에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영도(領導)하여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인물이 되기 위하여, 민족적 탕감기간인 400년을 다시 개인적으로 탕감함으로써, 40일 사탄분립의 기대를 세워야 했던 것이다. 모세는 이 목적과 함께, 타락전 아담이 믿음의 기대를 위하여 세워야 했던 40수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후편 제3장 제2절 Ⅳ) 사탄세계의 중심인 바로궁중에 들어가 40년을 지나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간을 애급에서 고역(苦役)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초래된 민족적인 탕감기간(蕩減期間)은 끝나게 되었었다. 여기에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영도(領導)하여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인물이 되기 위하여, 민족적 탕감기간인 400년을 다시 개인적으로 탕감함으로써, 40일 사탄분립의 기대를 세워야 했던 것이다. 모세는 이 목적과 함께, 타락전 아담이 믿음의 기대를 위하여 세워야 했던 40수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후편 제3장 제2절 Ⅳ) 사탄세계의 중심인 바로궁중에 들어가 40년을 지나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남 모르게 그의 유모(乳母)로 세워진 어머니로부터 선민의식(選民意識)에 불타는 교육을 받으면서 바로궁중생활 40년을 마친 후, 선민의 혈통에 대한 지조(志操)와 충절(忠節)을 변치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불어 고난을 받기를 잠시 바로궁중에서 죄악의 낙(樂)을 누리는 것보다 기뻐하여, 그 가운데서부터 뛰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히브리서 11장 24~25절). 이와같이 모세는 바로궁중생활 40년으로써 '40일 사탄분립기대'를 세워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남 모르게 그의 유모(乳母)로 세워진 어머니로부터 선민의식(選民意識)에 불타는 교육을 받으면서 바로궁중생활 40년을 마친 후, 선민의 혈통에 대한 지조(志操)와 충절(忠節)을 변치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불어 고난을 받기를 잠시 바로궁중에서 죄악의 낙(樂)을 누리는 것보다 기뻐하여, 그 가운데서부터 뛰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히브리서 11장 24~25절). 이와같이 모세는 바로궁중생활 40년으로써 '40일 사탄분립기대'를 세워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였던 것이다.
(2) 실체기대
 
==== (2) 실체기대 ====
 
모세는 믿음의 기대를 세움으로써, 동시에 위에서 이미 논한 바와같이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아벨의 위치도 확립하게 되었었다. 이제 가인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민족이, 그들의 부모의 입장인 동시에 자녀로서의 아벨의 입장에 있었던 모세에게, 믿음으로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그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이어받음으로써 선(善)을 번식하게 되었더라면, 그 때에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가지고,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와같이 모세를 따라 애급을 출발하여 가나안 복지로 돌아가는 기간은, 바로 그들이 이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우기 위한 기간이 되는 것이었다.
모세는 믿음의 기대를 세움으로써, 동시에 위에서 이미 논한 바와같이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아벨의 위치도 확립하게 되었었다. 이제 가인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민족이, 그들의 부모의 입장인 동시에 자녀로서의 아벨의 입장에 있었던 모세에게, 믿음으로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그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이어받음으로써 선(善)을 번식하게 되었더라면, 그 때에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가지고,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와같이 모세를 따라 애급을 출발하여 가나안 복지로 돌아가는 기간은, 바로 그들이 이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우기 위한 기간이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이는 것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모세는 자기의 동포가 애급인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불타는 동포애(同胞愛)를 이기지 못하여 그 애급인을 쳐 죽였던 것이나(출애굽기 2장 12절), 실상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참경(慘景)을 보시고(출애굽기 3장 7절) 울분을 느끼신 그 심정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모세를 중심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모세를 따라서 사막을 횡단하는 가나안 복귀노정을 성공적으로 출발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사실을 결정짓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이는 것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모세는 자기의 동포가 애급인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불타는 동포애(同胞愛)를 이기지 못하여 그 애급인을 쳐 죽였던 것이나(출애굽기 2장 12절), 실상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참경(慘景)을 보시고(출애굽기 3장 7절) 울분을 느끼신 그 심정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모세를 중심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모세를 따라서 사막을 횡단하는 가나안 복귀노정을 성공적으로 출발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사실을 결정짓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129번째 줄: 163번째 줄:
모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같은 심정으로 모세의 애국심에 감동되어, 그를 더 존경하고 더 믿고 모시며 따랐더라면, 그들은 모세를 중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홍해(紅海)를 건너거나 시내광야를 도는 일이 없이 바로 블레셋으로 가는 곧은 길을 통하여 가나안복지로 들어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 노정은 야곱의 하란 21년노정을 탕감하는 21일 노정이 되었을 것이었다.
모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같은 심정으로 모세의 애국심에 감동되어, 그를 더 존경하고 더 믿고 모시며 따랐더라면, 그들은 모세를 중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홍해(紅海)를 건너거나 시내광야를 도는 일이 없이 바로 블레셋으로 가는 곧은 길을 통하여 가나안복지로 들어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 노정은 야곱의 하란 21년노정을 탕감하는 21일 노정이 되었을 것이었다.
출애굽기 13장 17절에는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급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보아서 하나님은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블레셋 땅의 곧은 길로 통하게 하려 하셨던 것인데, 이스라엘민족이 모세를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이 노정은 출발조차도 해보지 못하고 말았고,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때는 제1차 때와 같이 그들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 가나안 복귀의 도중에서 애급으로 되돌아갈까 염려하여 홍해(紅海)를 건너고 광야를 돌아서 가도록 인도하셨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애굽기 13장 17절에는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급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보아서 하나님은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블레셋 땅의 곧은 길로 통하게 하려 하셨던 것인데, 이스라엘민족이 모세를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이 노정은 출발조차도 해보지 못하고 말았고,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때는 제1차 때와 같이 그들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 가나안 복귀의 도중에서 애급으로 되돌아갈까 염려하여 홍해(紅海)를 건너고 광야를 돌아서 가도록 인도하셨던 것임을 알 수 있다.
(3)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 (3)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
 
가인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벨의 입장에 있는 모세에게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더라면,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이는 것을 보고 도리어 그를 오해하고 나쁘게 발설하였으므로, 바로는 이 소문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2장 15절). 이에 모세는 할 수 없이 바로의 눈을 피하여 이스라엘민족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게 되었으므로 그 실체기대는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며, 따라서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복귀노정은 2차 내지 3차까지 연장되게 되었던 것이다.
가인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벨의 입장에 있는 모세에게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더라면,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이는 것을 보고 도리어 그를 오해하고 나쁘게 발설하였으므로, 바로는 이 소문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2장 15절). 이에 모세는 할 수 없이 바로의 눈을 피하여 이스라엘민족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게 되었으므로 그 실체기대는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며, 따라서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복귀노정은 2차 내지 3차까지 연장되게 되었던 것이다.
2.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 2.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
 
==== (1) 믿음의 기대 ====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不信)으로 말미암아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모세가 그의 '믿음의 기대'를 위하여 세웠던 바로궁중 40년기간은,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모세가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출발하기 위하여는 사탄 침범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바로 궁중생활 40년기간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기간을 다시 찾아 세워,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모세가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광야로 들어가 다시 40년기간을 보내게 되었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40년기간에는 이스라엘 민족도 모세를 불신한 죄로 더욱 더 비참한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不信)으로 말미암아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모세가 그의 '믿음의 기대'를 위하여 세웠던 바로궁중 40년기간은,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모세가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출발하기 위하여는 사탄 침범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바로 궁중생활 40년기간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기간을 다시 찾아 세워,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모세가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광야로 들어가 다시 40년기간을 보내게 되었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40년기간에는 이스라엘 민족도 모세를 불신한 죄로 더욱 더 비참한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 40년으로 '40일 사탄분립기대'를 새로이 세웠기 때문에,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애급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급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급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애굽기 3장 7~10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 40년으로 '40일 사탄분립기대'를 새로이 세웠기 때문에,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애급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급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급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애굽기 3장 7~10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2) 실체기대
 
==== (2) 실체기대 ====
 
모세는 미디안 광야 40년으로써, '40일 사탄분립기대'를 다시 만들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동시에, 다시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아벨의 위치도 확립하였다. 따라서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경우와 같이, 가인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벨의 입장에 있는 모세를 절대로 믿고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므로 여기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할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 40년으로써, '40일 사탄분립기대'를 다시 만들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동시에, 다시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아벨의 위치도 확립하였다. 따라서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경우와 같이, 가인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벨의 입장에 있는 모세를 절대로 믿고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므로 여기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할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려 하였을 때에,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였던 것과 같은 목적으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때에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3대 기적(삼대기적(三大奇蹟))과 10재앙(십재앙(十災殃))의 권능을 주시어 애급인을 치게 하심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려 하였을 때에,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였던 것과 같은 목적으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때에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3대 기적(삼대기적(三大奇蹟))과 10재앙(십재앙(十災殃))의 권능을 주시어 애급인을 치게 하심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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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이 신광야에서 떠나 르비듬에 장막(帳幕)을 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시어 호렙산의 반석(磐石)을 쳐서 물을 내어 그들에게 먹이셨다(출애굽기 17장 6절).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였으니, 이 행사는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생명수(生命水) 샘물로(요한복음 4장 14절) 모든 사람을 살리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가 다음에 시내산에서 받게 되는 두 석판(石板)도 예수와 성신(聖神)을 상징하지만, 반석(磐石)은 석판의 뿌리가 되므로 이것은 또한 하나님도 상징한다. 모세가 석판의 뿌리가 되는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먹여 살린 터전이 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모세가 석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법궤(法櫃)와 성막(聖幕)을 지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신광야에서 떠나 르비듬에 장막(帳幕)을 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시어 호렙산의 반석(磐石)을 쳐서 물을 내어 그들에게 먹이셨다(출애굽기 17장 6절).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였으니, 이 행사는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생명수(生命水) 샘물로(요한복음 4장 14절) 모든 사람을 살리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가 다음에 시내산에서 받게 되는 두 석판(石板)도 예수와 성신(聖神)을 상징하지만, 반석(磐石)은 석판의 뿌리가 되므로 이것은 또한 하나님도 상징한다. 모세가 석판의 뿌리가 되는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먹여 살린 터전이 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모세가 석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법궤(法櫃)와 성막(聖幕)을 지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르비듬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패하였다. 그러므로 아론과 훌은 돌을 쌓아 모세를 그 위에 앉히고, 그의 손을 내려지지 않도록 좌우에서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앞에서 싸운 여호수아는 아말렉왕과 그 백성을 쳐서 승리하였다(출애굽기 17장 10~13절). 이것도 장차 예수께서 오실 때에 되어질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으니, 여호수아는 예수를 믿는 신앙자를, 아말렉은 사탄세계를, 그리고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고 서 있는 것과 그 앞에서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쳐서 멸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예수님과 성신의 3위신(三位神)을 모신 신앙자들은 그 앞에 오는 모든 사탄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여호수아가 르비듬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패하였다. 그러므로 아론과 훌은 돌을 쌓아 모세를 그 위에 앉히고, 그의 손을 내려지지 않도록 좌우에서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앞에서 싸운 여호수아는 아말렉왕과 그 백성을 쳐서 승리하였다(출애굽기 17장 10~13절). 이것도 장차 예수께서 오실 때에 되어질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으니, 여호수아는 예수를 믿는 신앙자를, 아말렉은 사탄세계를, 그리고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고 서 있는 것과 그 앞에서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쳐서 멸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예수님과 성신의 3위신(三位神)을 모신 신앙자들은 그 앞에 오는 모든 사탄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3) 성막을 중심한 복귀섭리
 
==== (3) 성막을 중심한 복귀섭리 ====
 
우리는 먼저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받게 된 경위를 알아야겠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말렉과 싸워서 승리한 후 제3월 초에 시내광야에 이르렀다(출애굽기 19장 1절). 여기에서 모세는 장로(長老) 70인을 거느리고 시내산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뵈었다(출애굽기 24장 9~10절). 하나님은 특별히 모세를 시내산정(山頂)으로 부르시사, 석판에 기록한 십계명(十誡命)을 받기 위하여 40주야의 금식(禁食)을 하라고 명하시었다(출애굽기 24장 18절). 모세는 시내산에서 금식을 하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법궤와 성막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출애굽기 25장 31장). 그리고 40일간의 금식이 끝났을 때 모세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석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것이다(출애굽기 31장 18절).
우리는 먼저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받게 된 경위를 알아야겠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말렉과 싸워서 승리한 후 제3월 초에 시내광야에 이르렀다(출애굽기 19장 1절). 여기에서 모세는 장로(長老) 70인을 거느리고 시내산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뵈었다(출애굽기 24장 9~10절). 하나님은 특별히 모세를 시내산정(山頂)으로 부르시사, 석판에 기록한 십계명(十誡命)을 받기 위하여 40주야의 금식(禁食)을 하라고 명하시었다(출애굽기 24장 18절). 모세는 시내산에서 금식을 하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법궤와 성막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출애굽기 25장 31장). 그리고 40일간의 금식이 끝났을 때 모세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석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것이다(출애굽기 31장 18절).
모세가 이 석판(石板)을 가지고 시내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 앞으로 나아갔을 때, 그들은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어 가지고,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埃及)에서 인도한 신(神)이라고 섬기고 있었다(출애굽기 32장 4절). 이것을 본 모세는 대로(大怒)하여 손에 들었던 석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출애굽기 32장 19절).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처음것과 같은 석판을 깎아 만들어 오면 거기에 다시 십계명의 말씀을 써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애굽기 34장 1절). 이 말씀을 받은 모세가 다시 40주야를 금식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석판에 다시 십계명을 기록하여 주셨다(출애굽기 34장 28절). 모세가 이 석판을 가지고 다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나타났을 때 비로소 그들은 모세를 받들게 되어 법궤를 만들고 성막을 건축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35장 ~ 40장).
모세가 이 석판(石板)을 가지고 시내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 앞으로 나아갔을 때, 그들은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어 가지고,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埃及)에서 인도한 신(神)이라고 섬기고 있었다(출애굽기 32장 4절). 이것을 본 모세는 대로(大怒)하여 손에 들었던 석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출애굽기 32장 19절).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처음것과 같은 석판을 깎아 만들어 오면 거기에 다시 십계명의 말씀을 써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애굽기 34장 1절). 이 말씀을 받은 모세가 다시 40주야를 금식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석판에 다시 십계명을 기록하여 주셨다(출애굽기 34장 28절). 모세가 이 석판을 가지고 다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나타났을 때 비로소 그들은 모세를 받들게 되어 법궤를 만들고 성막을 건축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35장 ~ 4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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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 백성들은 이미 그 보호자가 떠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밥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 반면에 자기들은 여호와가 보호자시니 두려워 말고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자고 외쳤던 것이다(민수기 14장 9절).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도리어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하였다(민수기 14장 10절). 이 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시어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민수기 14장 11절)고 하시면서,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여 그 40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민수기 14장 31~34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 백성들은 이미 그 보호자가 떠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밥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 반면에 자기들은 여호와가 보호자시니 두려워 말고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자고 외쳤던 것이다(민수기 14장 9절).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도리어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하였다(민수기 14장 10절). 이 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시어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민수기 14장 11절)고 하시면서,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여 그 40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민수기 14장 31~34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와같이 제3차 성막을 위한 기대도 복귀할 수 없게 되어, 제2차 21개월 광야노정(曠野路程)은 제3차 40년 광야노정으로 연장되었다.
이와같이 제3차 성막을 위한 기대도 복귀할 수 없게 되어, 제2차 21개월 광야노정(曠野路程)은 제3차 40년 광야노정으로 연장되었다.
(4)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 (4)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성막을 위한 기대'가 3차나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타락성(墮落性)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은 세울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제2차로 세우려던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하지 못하게 되어,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로 연장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성막을 위한 기대'가 3차나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타락성(墮落性)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은 세울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제2차로 세우려던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하지 못하게 되어,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로 연장되었던 것이다.
3.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 3.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
 
==== (1) 믿음의 기대 ====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이 실패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이 노정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세웠던 미디안 광야 40년 기간은 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偵探) 40일 기간을 믿음과 순종으로 찾아 세우지 못함으로써, '날'을 '해'로 환산하여 광야를 떠돌아 다니다가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오는 40년 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2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여 제3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 광야 40년 기간을 오직 믿음과 충성으로 성막(聖幕)을 모시고 표류하다가 가데스바네아로 다시 돌아온 모세는,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울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이 노정의 민족적인 '실체헌제(實體獻祭)'를 위한 아벨의 입장도 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이 실패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이 노정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세웠던 미디안 광야 40년 기간은 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偵探) 40일 기간을 믿음과 순종으로 찾아 세우지 못함으로써, '날'을 '해'로 환산하여 광야를 떠돌아 다니다가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오는 40년 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2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여 제3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 광야 40년 기간을 오직 믿음과 충성으로 성막(聖幕)을 모시고 표류하다가 가데스바네아로 다시 돌아온 모세는,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울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이 노정의 민족적인 '실체헌제(實體獻祭)'를 위한 아벨의 입장도 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실체기대
 
==== (2) 실체기대 ====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 40일 노정을 믿음과 순종으로 찾아 세우지 못하고 불신과 반역(反逆)으로써 실패하였으므로 '성막을 위한 기대'는 여전히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제2차 노정을 위한 실체기대(實體基臺)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성막을 충성으로 받들고 모셨던 모세의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는 여전히 남아져 있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표류(광야표류(曠野漂流))의 40년기간을, 변치않는 신앙으로 성막을 받들고 있는 모세에게 순종굴복함으로써 정탐 40일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는 기대를 세우면, 그 때에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가 조성되는 동시에 성막을 위한 기대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대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믿음과 순종으로, 성막을 중심한 모세를 받들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그때에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 있어서의 '실체기대'는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 40일 노정을 믿음과 순종으로 찾아 세우지 못하고 불신과 반역(反逆)으로써 실패하였으므로 '성막을 위한 기대'는 여전히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제2차 노정을 위한 실체기대(實體基臺)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성막을 충성으로 받들고 모셨던 모세의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는 여전히 남아져 있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표류(광야표류(曠野漂流))의 40년기간을, 변치않는 신앙으로 성막을 받들고 있는 모세에게 순종굴복함으로써 정탐 40일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는 기대를 세우면, 그 때에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가 조성되는 동시에 성막을 위한 기대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대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믿음과 순종으로, 성막을 중심한 모세를 받들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그때에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 있어서의 '실체기대'는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광야 40년 표류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3차 노정에 있어서의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기간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는 '성막을 위한 기대'를 세워가지고 제2차 노정에 그들이 모세를 받들고 성막을 건축하던 입장으로 돌아감으로써, 제3차노정의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기 위한 기간이었다.
따라서 광야 40년 표류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3차 노정에 있어서의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기간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는 '성막을 위한 기대'를 세워가지고 제2차 노정에 그들이 모세를 받들고 성막을 건축하던 입장으로 돌아감으로써, 제3차노정의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기 위한 기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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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예시(豫示)한 것인가? 이미 논한 바와 같이 돌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상징한다. 따라서 12지파를 대표한 열두 사람이 법궤로 인하여 물이 갈라진 요단강 가운데서 열 두 돌을 받들었다고 하는 것은, 장차 12지파의 대표형으로 부름을 받을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이 죄악세상이 선악(善惡)으로 갈라질 때, 그 곳에서 예수님을 받들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예시(豫示)한 것인가? 이미 논한 바와 같이 돌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상징한다. 따라서 12지파를 대표한 열두 사람이 법궤로 인하여 물이 갈라진 요단강 가운데서 열 두 돌을 받들었다고 하는 것은, 장차 12지파의 대표형으로 부름을 받을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이 죄악세상이 선악(善惡)으로 갈라질 때, 그 곳에서 예수님을 받들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들이 열 두 돌을 받들었다가 가나안땅의 안정된 진(陳)에 한데 모아 놓았을 때, 여호수아는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여호수아 4장 24절)고 말하였다. 이것은 장차 돌로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는 열두 제자가, 한마음 한뜻으로 한 곳에서 하나로 뭉쳐야만,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를 완성하여 하나님의 전능(全能)하심을 영원히 찬양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다.
그들이 열 두 돌을 받들었다가 가나안땅의 안정된 진(陳)에 한데 모아 놓았을 때, 여호수아는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여호수아 4장 24절)고 말하였다. 이것은 장차 돌로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는 열두 제자가, 한마음 한뜻으로 한 곳에서 하나로 뭉쳐야만,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를 완성하여 하나님의 전능(全能)하심을 영원히 찬양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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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통일교 교리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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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7일 (화) 17:29 기준 최신판

원리강론 원문 005/008.

원문

그러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었는가? 이 문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해결(未解決)의 문제로서 남아져 왔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원리(原理)를 통하여서만 명확히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면 제물을 쪼개야 하는 이유는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은 선과 악을 분립하여 악을 멸하고 선을 세움으로써 선주권(善主權)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아담 한 존재를 가인과 아벨로 분립한 후에 헌제(獻祭)해야 했던 것이나, 또 노아 때에 홍수(洪水)로써 악을 치고 선을 분립했던 것 등의 목적은 모두 선주권을 복귀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제물을 쪼개 바치게 함으로써, 아담이나 노아로써 이루지 못하였던 선악 분립의 상징역사(象徵役事)를 이루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물을 쪼개는 것은, 첫째로 아담가정에 있어서 선악(善惡)의 모체(母體)인 아담을 선과 악의 두 표시체로 분립하기 위하여 아벨과 가인으로 갈라 세운 것과 같은 입장을 복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둘째로는 노아가 홍수 40일로써 선과 악을 갈라 세웠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함이었으며, 셋째로는 사탄 주관하(主管下)에 있는 피조세계(被造世界)에서 선주권(善主權)의 세계를 갈라 세우는 상징적인 조건을 세우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넷째로는 사탄과의 혈연관계(血緣關係)를 통하여 들어온 사망의 피를 뽑아 성별(聖別)하는 조건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293 그러면 쪼개지 않은 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는가? 쪼개지 않은 것은 첫째로 가인과 아벨을 분립하지 않은 입장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대할 수 있는 아벨적인 대상이 없었고,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에게 합당한 헌제가 되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가인 아벨의 헌제 실패는 탕감복귀(蕩減復歸)되지 않았다. 둘째로 그것을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에 있어서의 홍수심판(洪水審判)에서 선악을 분립하지 못하였던 상태 그대로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상대하여 섭리하실 수 있는 선의 대상이 없게 되어 홍수심판에서 실패한 입장으로 되돌아간 결과가 되었다. 셋째로 그것은 사탄 주관하에 있는 피조세계에서 하나님이 상대하실 수 있는 선주권의 세계를 분립하는 상징적인 조건을 세우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네째로 그것은 사망의 피를 뽑아 성별(聖別)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상대하여 섭리하실 수 있는 성물(聖物)이 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고 바침으로 인하여 그것은 사탄 것 그대로를 바친 것이 되어, 결국 그것은 사탄의 소유물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여 준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소생(蘇生)을 상징하는 제물인 비둘기가 사탄의 소유물로 남아지게 되었으므로, 소생의 기대위에 세워야 할 장성(長成)과 완성(完成)을 상징하는 양과 암소에게도 역시 사탄이 침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상징제물(象徵祭物)은 모두 사탄에게 바친 결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이 범죄가 된 것이다. 294 그러면 다음에는 상징제물에 솔개가 내렸다는 것은 (창 15:11)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인간 시조(始祖)가 타락한 이후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뜻 앞에는 반드시 사탄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즉 창세기 4장 7절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헌제를 할 때에도 사탄이 그들을 엿보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노아 때에도 심판 직후에 사탄이 노아가정에 침범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것을 까마귀로써 보여 주셨다(창 8:7).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할 때에도 그 제물에 침범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던 사탄은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을 보고 곧 그 제물에 침범하였었다.그리하여 성경은 이 사실을 솔개가 제물위에 내린 것으로 표상(表象)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헌제’의 실수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가? 아브라함의 ‘상징헌제’실수로 말미암아 그 ‘상징헌제’로써 탕감복귀하려던 모든 것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결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방(異邦)인 애급에서 400년 간 고역을 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노아 때에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내주셨던 10대와 40수를 동시에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하시기 위하여 400년이란 사탄 분립기간을 세우시고, 그 분립기대(分立基臺) 위에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그 제물을 또 사탄에게 바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상징헌제’로써 아브람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한 탕감기간(蕩減期間)이었던 노아 이후의 400년 전도기간도 역시 사탄에게 내주시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하기 전의 입장이며, 따라서 노아가 방주(方舟)를 짓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입장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서는 이 400년이란 사탄분립기간을 다시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고역하는 400년 기간은, 노아나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출발하려 했었던 그 입장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여 모세를 그 터전위에 세우시기 위한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 고역기간(苦役期間)은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로 인한 벌을 받는 기간인 동시에,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를 위하여 사탄 분립의 터를 닦는 기간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한 제단에 3제물을 동시에 드리는 ‘상징헌제’에 성공하심으로써 소생(蘇生), 장성(長成), 완성(完成)으로 표시된 모든 섭리를 동시에 이루려 하셨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논술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를 중심한 섭리는 다시 이삭을 거쳐 야곱까지 3대에 걸친 연장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상징헌제’실패는 노아의 방주(方舟)를 중심한 ‘상징헌제’와 가인 아벨을 중심한 ‘상징헌제’등의 실패를 반복한 것이 되어 버렸다. 295

(2) 아브라함의 이삭 헌제 296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한 후 다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시어(창 22:2), 그로써 ‘상징헌제’의 실패를 탕감복귀하시려는 새로운 섭리를 하셨다. 예정론(豫定論)에 의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뜻을 위하여 예정되었던 인물이 그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 장본인을 다시 세워 쓰실 수는 없게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그 헌제로써 찾아 세우려던 모든 뜻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을 다시 세우시어 이삭 헌제로써 그의 ‘상징헌제’의 실패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려는 섭리를 하실 수 있었던 것인가? 첫째로,‘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아담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2차였고,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2차였으며,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3차였다. 그런데 3수는 완성수 (후편 제3장 제2절 Ⅳ)이기 때문에,‘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시려는 섭리가 연장되기 제3차 만이었던 아브라함 때에는 이 섭리를 완성해야 할 원리적인 조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실체로 헌제하여 보다 큰 것으로서의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움으로써,‘상징헌제’실수로 인하여 상징적으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는, 위에서 상술(詳述)한 바와 같이 헌제를 드리는 아브라함의 입장은 곧 아담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사탄은 아담과 그의 자식 가인에게 침범함으로써 2대에 걸친 그들을 빼았아 갔었기 때문에, 탕감복귀원칙(蕩減復歸原則)에 의하여 하늘편에서도 아브라함과 그 자식의 2대에 걸쳐서 빼앗아 올 수 있는 섭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로, 아담은 직접 헌제를 하지 못하였으나 섭리적으로 보아 노아는 아담과 같은 입장에 있으면서도 소생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성공한 아벨의 심정의 터 위에 있었기 때문에 방주로써 직접‘상징헌제’를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소생,‘상징헌제’에 성공한 아벨의 터전과 장성,‘상징헌제’에 성공한 노아의 기대 위에 부름받아 완성‘상징헌제’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그렇듯 ‘상징헌제’에 실수하였지만, 하나님은 아벨이나 노아가 ‘상징헌제’에 성공한 역사적인 심정의 기대를 조건으로 그를 다시 세워 한번 더 헌제를 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297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릴 때에도 ‘상징헌제’를 하던 때와 같이 먼저 아담가정을 복귀하는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이삭헌제를 위한 믿음을 세워야 했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다시 자기의 처(妻) 사라와 남매(男妹)의 입장에 서 가지고 사라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빼앗기어 일단 그의 처가 되어진 처지에서 다시 찾아오는 역사(役事)를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때에도 사라와 함께 인류를 상징하는 노비와 만물세계를 상징하는 제물을 찾아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창 20:1~16)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삭 헌제(獻祭)를 어떻게 하였는가? 아브라함이 그의 절대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축복(祝福)의 자식으로 받았던 이삭을 번제(燔祭)로 드리기 위하여 죽이려 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시면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은 아노라(창 22:12)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이나 그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과 충성에서 나온 행동은, 벌써 그로 하여금 이삭을 죽였다는 입장에 서게 하였기 때문에 이삭으로부터 사탄을 분리하게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탄이 분리된 이삭은 벌써 하늘편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제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의 실수에 대한 책망과 이삭헌제의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아울러 강조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이삭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삭을 통하여 이루어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이 이삭을 다시 하늘편으로 분립함으로써 새로운 섭리노정(攝理路程)을 출발하기 위하여, 모리아산상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는 데 3일 기간을 소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3일 기간은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새로운 섭리노정을 출발하는 데 있어서의 사탄을 분립하는 기간으로 필요한 것이 되었다. 야곱도 하란에서 그 가족을 이끌고 가정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출발할 때에 사탄 분립의 3일 기간이 있었고(창 31:20~22), 모세도 역시 애급(埃及)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였을 때에 사탄 분립의 3일 기간을 지난 후에야 홍해(紅海)를 향해 출발하였었다(출 8:27~29) 예수님도 영적으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실 때 사탄 분립의 무덤 3일 기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도, 본진에 앞서 그들을 인도한 법궤가 사탄분립의 3일노정을 걸었던 것이다.(수 3:1~6)

(3)뜻으로 본 이삭의 위치와 그의 상징헌제 299

아브라함은 일단 그의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하였지만, 그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룰 수 있는 원리적인 조건이 있었다는 데 관해서는 이미 위에서 상론(詳論)한 바 있다. 그러나 예정론(豫定論)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고 실패한 장본인인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또다시 같은 섭리를 되풀이 할 수는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상징헌제에서 실패한 아브라함을 실패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세워야 했던 것이고, 또 그로부터 연장된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연장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세워야 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燔祭)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창 22:2)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이삭)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루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4~5)고 하심으로써 이삭을 통하여 선민(選民)을 부르실 것을 약속하셨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그 약속의 자식인 이삭을 죽이려 했던 충성은,‘상징헌제’에 실수함으로 인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자기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과 같은 입장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입장에서, 침범하였던 사탄을 분립하였고, 더 나아가서 뜻을 중심하고 이삭과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죽음의 자리에서 같이 살아난 이삭과 아브라함은 서로 그 개체는 다르면서도 뜻을 중심하고 보면 한 몸이 되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중심한 섭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삭을 중심한 섭리에로 연장되더라도 그 섭리에서 이삭이 성공만 하면 이 성공은 바로 이삭과 한 몸 된 아브라함의 성공도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그 섭리는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연장되었어도, 뜻을 중심하고 보면 아브라함이 실패도 하지 않았고 또 그 섭리가 연장도 되지 않은 것과 같이 되었던 것이다. 이삭 헌제 때의 그의 연장은 분명치 않다.그러나 그가 번제(燔祭)에 쓸 나무를 지고 갔을 뿐만 아니라(창 22:6), 번제에 쓰일 양(羊)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그것이 어디에 있는 가 하고 그의 부친(父親)에게 물어 봤던 것(창 22:7)으러 미루어 보아, 그는 이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릴 때에 이삭 자신이 그것을 협조하였으리라는 사실도 또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뜻에 대한 사리(事理)를 분별할 수 있을 정도의 상당한 연령에 도달해 있었던 이삭이, 만일 번제를 위하여 자기를 죽이려는 부친에게 반항하였다면 하나님이 그 이삭 헌제를 받으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충성과 그에 못지않은 이삭의 충성이 합동하여 이삭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사탄을 분립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헌제를 중심하고 이삭과 아브라함이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으로써, 첫째로 아브라함은 '상징헌제‘실수로 인하여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여 그 실수 이전의 입장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해 가지고 그 입장에서 자기의 섭리적인 사명을 이삭에게 인계할 수 있게 되었고, 둘째로 이삭으로서는 그가 뜻앞에 순종굴복(順從屈伏)함으로써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늘의 사명을 이어받아, 다음에 '상징헌제’를 드리기 위한 믿음을 세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뜻이 이삭에게로 옮겨진 후,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 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를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수양으로 번제(燔祭)를 드렸으니, 이것은 그대로 이삭을 중심하고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세워진 '상징헌제(象徵獻祭)'가 된 것이었다.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갔던 사실로 보아 아브라함이 수양을 번제로 드리는 데 있어서도 이삭이 그를 협조하였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따라서 아브라함이 수양으로 '상징헌제‘를 드렸다 하였지만,뜻으로 보면 그와 한 몸이 되어 그의 사명을 계승한 이삭 자신이 헌제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이와 같이 이삭은 아브라함의 사명을 인계하고 그를 대신한 입장에서 '상징헌제’에 성공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였던 것이다.

Ⅱ. 실체기대

이와 같이 이삭은 아브라함을 대신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中心人物)로서, 수양으로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렸으므로 ‘믿음의 기대’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삭을 중심하고‘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우려면, 여기에서 또 다시 그의 자식 에서와 야곱을 가인광 아벨의 입장에 분립하여 놓고 ‘실체헌제(實體獻祭)’를 함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수하지 않았더라면 이삭과 그의 이복형(異服兄)이 되는 이스마엘이 각각 아벨과 가인의 입장에 서 가지고 가인과 아벨이 이루지 못하였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했던 것이다.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헌제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입장에 이삭을 대신 세우시고 이스마엘과 이삭의 입장에는 각각 에서와 야곱을 대신 세우시어 그들로 하여금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게 하는 섭리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을 중심한 에서와 야곱은 아담을 중심한 가인과 아벨의 입장인 동시에 노아를 중심한 셈과 함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맏아들 에서와 둘째 아들 야곱은 각각 사탄이 침범한 아브라함의 첫째 번‘상징헌제’와 사탄을 분립한 둘째 번 이삭 헌제의 상징이었으며, 또 그들은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서 ‘실체헌제(實體獻祭)’를 해야 될 악(惡)과 선(善)의 표시체들이었다. 에서와 야곱이 태중(胎中)에서부터 싸운 것은(창 25:22~23)이와 같이 그들이 각각 악과 선의 표시체로 분립되었던 가인과 아벨의 입장으로서 상충적인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태중에서부터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신 것도(롬 9:11~13), 그들은 각각 아벨과 가인의 입장에서 저들의 헌제 실패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해야 할 선악의 표시적인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에서와 야곱이‘실체헌제’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는 먼저 야곱이 아벨의 입장을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세워야 하였다. 그런데 야곱은 다음과 같이 ‘실체헌제’를 거친 후에, 아브라함의 ‘상징헌제’실수로 말미암은 400년 간의 탕감노정(蕩減路程)을 걷기 위하여 애급(埃及)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첫째로, 야곱은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개인적으로 복귀하는 싸움에서 승리의 조건을 세워야 하였다. 사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장자의 입장에서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차자(次子)의 입장에서 그 장자의 기업을 빼앗아 나오는 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장자를 미워하고 차자를 사랑하셨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말 1:2~3)그런데 장자의 기업을 복귀해야 할 사명을 띠고 복중에서부터 부름을 받은 야곱은 차자의 입장에서 지혜롭게 떡과 팥죽으로서 에서로부터 그 장자의 기업을 빼앗았던 것이다(창 25:34). 야곱은 장자의 기업을 중히 여기어 그것을 복귀하려는 입장에 섰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삭으로 하여금 그를 축복하게 하셨고(창 27:27), 이에 반하여 에서는 그것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릴 정도로 경홀(輕忽)히 여겼기 때문에 그를 축복하시지 않았다. 둘째로, 야곱은 사탄세계인 하란으로 들어가 21년 간을 고역(苦役)하면서 가정과 재물을 중심하고 장자의 기업을 복귀하는 싸움에서 승리해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셋째로, 야곱은 하란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돌어올 때, 얍복강에서 천사(天使)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실체로써 천사에 대한 주관성(主管性)을 복귀하였던 것이다. 야곱은 이와 같이 하여 드디어 아벨의 입장을 탕감복귀함으로써 ‘실체헌제(實體獻祭)’를 위한 중심인물이 되었었다. 이로써 에서와 야곱은 하나님이 아벨의 헌제를 받으셨을 때의 가인과 아벨의 입장을 확립하였기 때문에, 그들이‘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려면 에서는 야곱을 사랑하고, 그를 중보(仲保)로 세우며, 그의 주관을 받는 입장에서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축복을 받은 야곱으로부터 선(善)을 이어받음으로써 선을 번식하는 입장에 서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 에서는 야곱이 하란에서 21년 간의 고역(苦役)을 마치고 하늘편 처자(妻子)와 재물을 취하여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그대로 그를 사랑하고 환영하였기 때문에(창 33:4)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담가정의 가인과 아벨, 또 노아가정의 셈과 함이 ‘실체헌제(實體獻祭)’에 실패하였던 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할 수 있게 되었었다. 이와 같이 에서와 야곱이 ‘실체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일찍이 아담가정으로부터 ‘실체헌제(實體獻祭)’를 탕감복귀하여 나온 종적인 역사노정을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노정 중 이삭가정에서 비로소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에서를 태중(胎中)에서부터 미워하였다고 로마서 9장 11절 내지 13절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와 같이 그는 야곱에게 굴복하여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였기 때문에 복귀한 가인의 입장에 설 수 있게 되어 드디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따라서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다만 그가 복귀섭리(復歸攝理)의 탕감조건(蕩減條件)을 맞추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사탄편인 가인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미움을 받을 수 있었던 그 입장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Ⅲ. 메시아를 위한 기대

아담가정에서부터 세우려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복귀섭리의 중심인물들이 그들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3시대에 걸쳐 연장되어 아브라함에까지 이르렀었다. 그러나 이 뜻을 완성해야 할 아브라함이 또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수함으로 인하여 이 뜻은 다시 이삭에게로 연장되었었다. 그런데 이삭가정을 중심하고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이루어짐으로써 이때에 비로소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메시아는 응당 이때에 강림(降臨)하셔야 될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중심하고 볼 때, 메시아를 맞기 위한 이 기대의 사회적인 배경은 어떠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타락인간(墮落人間)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하는 것은 이미 사탄을 중심하고 이루어진 세계를 메시아를 위한 왕국으로 복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아담가정이나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있어서는 그 가정을 침범할 수 있는 다른 가정이 없었기 때문에,‘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만 이루어지면 그 기대(基臺) 위에 메시아는 오시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 때에는 이미 타락인간들이 사탄을 중심한 민족을 형성하여 아브라함가정에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에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기대 위에 바로 메시아가 강림하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이 기대가 사탄세계와 대결할 수 있는 민족적인 판도 위에 세워진 후에야 비로소 메시아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하지 않고 ‘실체헌제(實體獻祭)’에 성공하여 그때에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기대를 중심하고 그 후손이 가나안 땅에서 번성하여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고서는 메시아를 맞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상징헌제’에 실수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벌로서,‘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조성한 이삭의 후손들은 고향을 떠나 이방(異邦)에 들어가서 400년 간을 고역(苦役)하면서 민족적인 기대를 세워 가지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 온 후에야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실수로 말미암아 그 후손에게 남아진 탕감노정(蕩減路程)은 누구로부터 시작되어야 하였던가? 그것은 이삭이 아니고 야곱으로부터였다. 왜냐하면 위에서 이미 상론(詳論)한 바와 같이, 모든 탕감노정을 중심적으로 걸어야 할 인물은 ‘실체헌제(實體獻祭)’ 중심인 아벨형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담가정에서는 아벨, 노아가정에서는 함, 아브라함가정에서는 이삭, 그리고 이삭가정에서는 야곱이 각각 그 가정의 탕감노정을 중심적으로 걸어야 했던 것이다. 특히 야곱은 ‘메시아를 위한 기대’위에 선 아벨형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다음에 메시아가 걸으셔야 할 사탄분립의 전형노정(典型路程)을 먼저 본보기로 걸어야 했던 것이다(후편 제2장 제1절) 그리하여 야곱가정은 이삭가정을 중심하고 세워진 ‘메시아를 위한 기대’위에서, 아브라함이 지은 죄를 담담하고 400년 간의 탕감조건을 걸음으로써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어야 했기 때문에, 이삭가정과 같은 입장에서 이 탕감노정을 출발하게 되어 있었다. 즉 이삭가정에 있어서 아벨의 입장인 야곱이 모든 탕감노정을 걸었던 것과 같이, 야곱가정에 있어서는 야곱의 하늘편 처(妻) 라헬의 소생인 요셉이 먼저 애급(埃及)으로 들어가 그 탕감노정을 걸음으로써 아벨의 입장을 확립해야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의 형들에 위하여 애급으로 팔려 가서 30세에 애급의 총리대신(總理大臣)이 된 후에 그가 어렸을 때 하늘에서 몽시(夢示)로써 예시해 주셨던 대로(창37:5~11), 먼저 야곱의 사탄편 처 레아의 소생인 이복형(異服兄)들이 그에게 가서 굴복함으로써 자녀들이 먼저 입애급노정(入埃及路程)을 걷게 되었고, 다음으로는 그의 부모가 같은 노정으로 인도되었었다. 그리하여 야곱가정은 장차 메시아를 민족으로 맞기 위한 탕감노정을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삭을 중심한 섭리는 또 야곱을 중심한 섭리노정(攝理路程)으로 연장되었다. 그러나 마치 아브라함과 이삭이 개체는 다르지만 뜻으로 볼 때 한 몸이었던 것과 같이. 야곱은 이삭가정을 중심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운 ‘실체기대(實體基臺)’의 중심인물로서 아브라함이 지은 죄를 담당하고, 장차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세워 가지고 이삭의 뜻을 민족적으로 이루어야 할 탕감노정을 출발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서로 개체는 다르나 뜻으로 보면 모두 한 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곱의 성공은 곧 이삭의 성공이요, 이삭의 성공은 곧 아브라함의 성공이 되기 때문에 ,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삭과 야곱에로 연장되었으나 뜻을 중심하고 보면 연장되지 않고 그 당대에 이루어진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고 한 말씀은 바로 이러한 섭리노정에 입각해 볼 때, 그들은 3대이면서도 뜻으로 보면 하나의 ‘뜻’을 공동으로 이룩한 선조들로서 1대와 같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실상 하난님은 야곱가정으로 하여금 사탄세계인 애급(埃及)에 들어가 400년 고역의 길을 걷게 하시면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말씀대로 선민(選民)을 세워 가지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한 후‘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세우시게 하심으로써, 이 기대 위에 메시아를 보내시어 복귀섭리를 완수하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가정을 중심하고 세워진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결과적으로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하기 위한 탕감노정(蕩減路程)의 출발기대(出發基臺)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2천년 기간은 결과적으로 다음 시대에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세우기 위한 출발기대를 조성하는 기간이 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인한 탕감노정을 담당한 야곱은 하늘 뜻을 위한 지혜로써 에서로부터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빼앗는 개인적인 싸움에서 성공하였고, 사탄세계인 하란으로 들어가 그의 외숙부(外叔父) 라반으로부터 장자의 기업을 가정적으로 빼았는 21년 간의 싸움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가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또 천사(天使)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인간조상이 타락된 이후 타락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천사에 대한 주관성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음으로써 선민(選民) 형성의 기틀을 잡았던 것이다. 야곱은 이러한 노정을 걸어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비로소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으므로, 그는 사탄을 굴복시키는 전형노정(典型路程)을 성공적으로 걷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전형노정을 따라서 모세도 걸었고 예수님도 걸으셨으며 이스라엘 민족도 또한 걸어야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사는 사탄을 민족적으로 굴복시켜 온 그 전형노정의 사료(史料)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사가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의 중심사료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Ⅳ.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가 우리에게 보여 준 교훈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첫째로 우리에게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豫定)이 어떠하신가를 보여 주셨다. 복귀섭리는 하나님의 뜻만으로써는 이루어질 수 없고,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이 합해져서만 비로소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려 하셨으나, 그가 자기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 어떠하신가를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예정하셨으나, 아브라함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명은 이삭을 거쳐 야곱에로 옮겨졌던 것이다. 셋째로 복귀섭리느 인간이 그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할 때에 그 뜻은 필연적으로 연장되고, 동시에 그것을 복귀하려면 보다 큰 것으로서의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서는 동물을 제물(祭物)로 바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뜻이, 그의 실수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서야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넷째로눈 제물을 쪼개는 것으로써, 우리들도 각자를 제물로서 쪼개어 선과 악으로 분립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신앙생활은 자신을 제물의 입장에 세워 놓고 선과 악으로 쪼개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축(牲畜)의 제물로 바치는 생활이다.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중심하고 자신을 쪼개지 않을 때에는 거기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는 것이다.

제2장 모세와 예수를 중심한 복귀섭리

아모스 3장 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에 관한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원리를 몰랐기 때문에, 성서를 보아도 그 숨은 뜻을 알 길이 없었다. 성서에서는 하나의 선지자(先知者)의 생애에 대한 기록도 그것의 실상은 단순히 그의 역사에만 멎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선지자의 생애를 통하여 타락인간(墮落人間)이 가야 할 길을 보여준 것이다. 여기에서는 특히 하나님이 야곱과 모세를 세워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을 걷게 하시어, 그것으로써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걸으실 섭리노정을 어떻게 미리 보여주셨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겠다.

제1절 사탄 굴복의 본보기 노정

이삭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있어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우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이었던 야곱이 아벨의 입장을 확립하여 가지고,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사탄을 굴복시켜 나아가던 전노정은, 야곱에 의한 그 상징노정(象徵路程)을 형상적(形象的)으로 걸어야 할 모세노정이나, 또 그것을 실체적(實體的)으로 걸어야 할 예수님의 노정에 대한 전형노정(典型路程)이었다. 그리고 이 노정은 이스라엘 민족과 전인류가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탄을 굴복시키면서 걸어가야 할 본보기노정이기도 하다.

Ⅰ. 예수님의 전형노정으로 야곱노정과 모세노정을 세우신 이유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으로서 사탄을 자연굴복(自然屈伏)시키고 주관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조상으로서 메시아의 사명을 맡고 오신 것도, 사탄굴복의 최종적인 노정을 개척하여 모든 성도(聖徒)들로 하여금 그 노정을 따라가게 함으로써, 사탄을 자연굴복케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도 순종굴복(順從屈伏)하지 않았던 사탄이 인간조상으로 오시는 예수님과 성도들에게 순종굴복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원리적인 책임을 지시고 야곱을 세우심으로써, 그를 통하여 사탄을 굴복시키는 상징노정을 본보기로 보여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야곱을 세우시어 사탄을 굴복시키는 본보기노정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모세는 이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그 형상노정(形象路程)을 걸음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야곱노정을 밟아온 모세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그 실체노정(實體路程)을 걸음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었으며, 한편 또 성도들도 그 노정을 따라 걸음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키고 주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세가 자기와 같은 선지자(先知者) 한 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실 것이라고 한 것은(사도행전 3장 22절), 모세와 같은 입장에서 모세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섭리노정을 걸으셔야 할 예수님을 표시한 말이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 19절에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미 모세를 세워서 보여주신 본보기노정을 그대로 걷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다음에 오실 예수님의 모의자(模擬者)가 되는 것이다(사도행전 3장 22절).

Ⅱ. 야곱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노정과 예수노정

야곱노정은 바로 사탄을 굴복시켜 나아간 노정이다. 그리고 사탄을 굴복시키는 노정은 사탄이 침범했던 그 경로를 되돌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야곱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노정과 예수노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① 인간은 원래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이었는데, 천사장(天使長)으로부터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함으로써 타락(墮落)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야곱이 하란에서 처자(妻子)와 제물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復歸)하여 가정적으로 가나안 복귀 완성자가 되기 위하여는, 사탄과 생명을 걸고 싸우는 시련에서 승리해야 했던 것이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天使)와 생명을 걸고 싸워 승리함으로써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은 것은(창세기 32장 25~28절) 바로 이러한 시련을 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천사를 사탄의 입장에 세워서 야곱을 시험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야곱을 불행하게 하시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천사에 대한 주관성(主管性)을 복귀하는 시련을 넘게 함으로써, 아벨의 입장을 확립케 하여 가정복귀 완성자로 세우시기 위함이었다. 천사가 이러한 시련의 주체적인 역활을 함으로써, 천사세계도 하늘편으로 복귀되어 나아가는 것이다.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민족적 가나안 복귀 완성자가 되기 위하여는, 하나님이 그를 죽이려 하는 시련에서 생명을 걸고 이겨내야 되었다(출애굽기 4장 24절). 만일 인간이 이러한 시험을 하나님에게로부터 당하지 않고 사탄에게 당하다가 그 시험에 패하게 되면, 사탄에게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편에서 시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예수님도 인류를 지상천국(地上天國)으로 인도함으로써 세계적 가나안복귀 완성자가 되기 위하여는, 광야 40일 시험에서 생명을 걸고 사탄과 싸워 승리하셔야만 했던 것이다(마태복음 4장 1~11절). ② 인간의 육(肉)과 영(靈)에 사탄이 침범하여 타락성(墮落性)이 생겼으므로, 야곱은 이것을 벗기 위한 조건을 세워야 하였다. 그러므로 야곱은 육과 영을 상징하는 떡과 팥죽을 주고 에서로부터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빼앗는 것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데 있어서의 아벨의 입장을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것이다(창세기 25장 34절). 이 노정을 위하여 모세노정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육(肉)과 영(靈)을 상징하는 만나와 메추리를 내려 먹여,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선민의식(選民意識)을 강하게 함으로써, 모세에게 순종하게 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게 하려 하셨던 것이다(출애굽기 16장 13절). 예수님이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한복음 6장 48~53절)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도 이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타락인간들이 세례요한의 입장에 있는(본장 제3절 Ⅱ.1) 예수님을 신종(信從)함으로써, 영육(靈肉) 아울러 그와 일체가 되어 '타락성을 벗기 위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워가지고 그를 메시아로 모시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③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의 시체까지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다. 그런데 야곱은 축복을 받아 성별(聖別)된 몸이었기 때문에, 그의 시체도 사탄과 싸워 분립했다는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그 시체에 40일간 방부제(防腐劑)를 발랐던 것이다(창세기 50장 3절). 따라서 이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에 있어서도 그의 시체를 놓고 사탄과 싸웠으며(유다서 1장 9절), 또 예수님에 있어서도 그의 시체를 둘러싸고 문제가 일어났었던 것이다(마태복음 28장 12~13절). ④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의 성장기간(成長期間)에 사탄이 침범하였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그 기간을 표시하는 수를 찾아 세우는 섭리를 하시는 것이다(후편 제3장 제2절 Ⅳ). 즉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 사탄분립의 3일기간이 있었고(창세기 31장 22절), 모세가 민족을 이끌고 애급(埃及)으로부터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도, 이러한 3일기간이 있었으며(출애굽기 5장 3절), 또 여호수아도 이 3일기간을 지난 후에야 비로소 요단강을 건넜었다(여호수아 3장 2절). 그리고 예수님의 영적인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도 사탄 분립의 무덤 3일기간이 있었던 것이다(누가복음 18장 33절). 사탄에게 내주었던, 노아로부터 야곱에 이르는 12대의 종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들을, 야곱 1대에서 횡적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야곱에게 12자식이 있었던 것이다(창세기 35장 22절). 그렇기 때문에 모세 때에도 12지파가 있었고(출애굽기 24장 4절), 예수노정에도 12제자가 있었던 것이다(마태복음 10장 1절). 7일 창조기간(創造期間)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는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야곱 때에는 70가족이(창세기 46장 27절), 모세 때에는 70장로가(출애굽기 24장 1절), 예수때에는 70문도가 각각 그 노정의 중심역활을 하였었다(누가복음 10장 1절). ⑤ 지팡이는 불의(不義)를 치고 앞길을 인도하며 강한 의지하는 뜻의 표징물(表徵物)로서, 장차 오실 메시아를 상징하였던 것이다(본장 제2절 Ⅱ. 2. ㄴ). 따라서 야곱이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짚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으로 들어갔다는 것은(창세기 32장 10절), 장차 타락인간이 메시아를 받들어 불의를 치고 또 그의 인도를 받으며 그를 의지함으로써, 죄악세계(罪惡世界)를 넘어 창조이상세계(創造理想世界)로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세도 지팡이를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홍해(紅海)를 건넜으며(출애굽기 14장 16절), 예수님도 자신을 표징하는 철장(鐵杖)을 가지고, 이 고해(苦海)의 세계를 건너 하나님의 창조이상세계에로 전 인류를 인도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것이다(요한계시록 12장 5절, 요한계시록 2장 27절). ⑥ 해와의 범죄가 죄의 뿌리를 이루었고, 그의 자식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그 열매를 맺었다. 이와 같이 모자(母子)로 말미암아 사탄이 침범하여 죄의 열매를 맺었으므로, 탕감복귀(蕩減復歸)의 원칙에 의하여 모자로써 사탄을 분립해야만 된다. 따라서 야곱이 축복을 받고 사탄을 분립하였던 것도, 그 모친(母親)의 적극적인 협조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창세기 27장 43절). 모세도 또한 그 모친의 협조가 없었으면, 그가 사지(死地)에서 헤어나와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자리에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출애굽기 2장 2절). 그리고 예수님 때에도 역시 그를 죽이려던 헤롯왕을 피하여 그를 데리고 애급(埃及)으로 피난한 그 모친의 협조가 있었던 것이다(마태복음 2장 13절). ⑦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뜻을 이루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은 사탄세계에서 하늘세계에로 복귀하는 노정을 걷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므로 야곱은 사탄세계인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하는 노정을 걸었고(창세기 31장 33절), 모세는 사탄세계인 애급에서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복귀하는 노정을 걸었으며(출애굽기 3장 8절), 예수님도 이 노정을 걸으시기 위하여 출생하자마자 애급으로 피난갔다 돌아오셔야 했던 것이다(마태복음 2장 13절). ⑧ 복귀섭리의 최종적인 목적은 사탄을 괴멸(壞滅)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야곱은 우상(偶像)을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고(창세기 35장 4절), 모세는 금송아지로 된 우상을 부수어 그 가루를 물에 뿌려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시게 하였으며(출애굽기 32장 26절), 예수님은 그의 말씀과 권능으로 사탄을 굴복시킴으로써, 이 죄악세계를 진멸(殄滅)하셔야 했던 것이다(전편 제3장 제3절 Ⅱ.2참조).

제2절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

Ⅰ.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의 개관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에서 이미 세워진 '메시아를 위한 기대'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탕감복귀하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해야 된다는 원칙은 그에게 있어서도 다름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섭리를 담당한 중심인물(中心人物)들이 달라졌으므로, 그 인물들 자신도 또한 그러한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않고는 복귀섭리의 뜻을 계승할 수 없었으며, 또 그 섭리의 범위가 가정적인 것에서 민족적인 것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에 있어서는 다음의 기록이 보이는 바와같이, 이 기대의 조성을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의 내용이 전의 것에 비하여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1. 믿음의 기대

(1)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말미암은, 그 후손의 애급고역(埃及苦役) 400년기간이 끝난 다음,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지(福地)로 복귀하는 노정에 있어서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은 모세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가 이 '믿음의 기대'를 어떻게 세웠는가 하는 것을 알기 전에, 복귀섭리로 본 모세의 위치를 상고(詳考)하여 모세 이전의 섭리노정(攝理路程)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려던 다른 인물들, 즉 아담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에 비하여, 모세의 다른점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그것은 첫째로, 모세는 하나님 대신의 신(神)으로 세워졌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기 4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선지자 아론 앞에서 신과 같이 되리라고 하셨고, 또 출애굽기 7장 1절에는 그를 바로에게 있어 신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다. 둘째로, 모세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의자(模擬者)였었다. 위에서 논한 바와같이, 하나님은 모세를 아론과 바로 앞에 신이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육신을 쓴 신은 예수님밖에 없으므로, 하나님이 모세를 신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은 곧 모세를 출애급노정(出埃及路程)에 있어서 예수님의 모의자로 세우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는 예수님의 모의자로서 예수님이 걸으실 노정을 그대로 앞서 걸음으로써, 마치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가실 길을 곧게 해야 했던 것과같이(요한복음 1장 23절) 모세도 예수님이 가실 길을 미리 개척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모세는 이 노정(路程)을 어떻게 걸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모세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였던 야곱의 후손으로서,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의 섭리역사를 담당한 중심인물일 뿐 아니라, 다음에 예수님이 오셔서 걸으셔야 할 야곱의 전형노정(典型路程)을 형상적으로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모세는 야곱가정의 입애급노정(入埃及路程)에서 요셉이 세운 터전 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요셉은 또 하나의 예수님의 모의자였다. 요셉은 야곱의 하늘편 처(妻)로 세워진 라헬이 낳은 아들로서, 야곱의 사탄편 처로 세워진 레아의 소생(所生)들의 동생이었다. 그러므로 요셉은 아벨의 입장으로서, 가인의 입장에 있었던 그의 형들이 죽이려 했던 가운데서 겨우 죽음을 모면하고, 상인에게 팔린 바 되어 먼저 애급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30세에 애급의 총리대신(總理大臣)이 된 후에, 그가 어렸을 때 하늘에서 몽시(夢示)로써 교시한 대로(창세기 37장 5~11절) 그의 형들과 그의 부모가 애급으로 찾아와 굴복한 섭리노정의 터전위에서, 이스라엘의 사탄분립을 위한 애급고역노정(埃及苦役路程)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요셉의 이러한 노정은 장차 예수님이 사탄세계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통하여 30세에 만왕의 왕으로 군림한 후에, 전 인류는 말할 것도 없고 그이 선조까지도 굴복시켜 가지고, 그들을 사탄세계로부터 분립하여 하늘편으로 복귀시킬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처럼 요셉의 전 생애는 바로 예수님의 모의자(模擬者)로서의 걸음이었던 것이다. 한편 또 모세의 생장(生長)과 서거(逝去)도 예수님의 그 본보기노정이었다. 모세는 출생시부터 바로왕의 손에 죽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그 모친이 그를 숨겨서 키운 후에야 바로 궁중에 들어가 원수들 가운데서 안전하게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출생하자 헤롯왕의 손에 죽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계셨었으므로, 그의 모친이 그를 데리고 애급에 들어가 숨겨 키운 후에야, 헤롯왕의 통치권내로 다시 돌아와 원수들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성장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모세가 죽은 후 그 시체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신명기 34장 6절), 예수님의 시체의 그러한 것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모세의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은, 바로 그대로가 아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바와같이,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걸으실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전형(典型)이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가 예수님의 모의자(模擬者)였다는 사실은 신명기 18장 18절 내지 19절에 하나님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예수님)를 세우실 것을 예언하시면서,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벌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도 역시 하나님이 모세를 시켜, 장차 예수님이 행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

모세는 위에서 논한 바와같이, 모세 이전의 섭리노정(攝理路程)에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여 온 다른 중심인물들과는 다른 입장에 서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아벨이나 노아나 아브라함과 같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고 '40일 사탄분립기대'만을 세우면,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할 수 있었다. 그 이유를 더 들어 보면, 첫째, 모세는 아벨 노아 이삭등 3차에 걸친 '상징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상징헌제'에 의한 섭리를 모두 완료한 기대 위에 섰었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시조가 타락하여,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게 됨으로 말미암아, 타락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말씀 대신의 조건물로 세운 것이 제물이었다. 그런데 모세 때에 이르러서는, 제물을 조건물로 세워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던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는 지나가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대할 수 있는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로 들어왔기 때문에, '믿음의 기대'를 위한 '상징헌제'는 필요없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 아담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연장되어감에 따라, 사탄이 침범하여 연장되었던 그 섭리적인 기간을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노아가 방주(方舟)로써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하여는 '40일 사탄분립기대'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400년기간을 탕감복귀하여 40일 사탄분립기대 위에 선 후에야,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상징헌제'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400년간 고역하게 되었던 것도, '40일 사탄분립기대'를 탕감복귀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인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던 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되어 복귀섭리시대에 있어서는 '40일 사탄분립기대' 위에서 제물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고 서기만 하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2. 실체기대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에 있어서는 '가정적인 실체기대'를 세우는 섭리를 하셨었다. 그러나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에 들어와서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세우는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모세는 하나님 대신이었으므로(출애굽기 4장 16절, 출애굽기 7장 1절) 예수님의 입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하여는 부모의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모세는 예수님에 앞서서 그의 길을 개척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선지자(先知者)로서 자녀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세워야 할 중심인물로서 아벨의 입장에도 설 수 있어야 하였다. 아벨은 아담 대신 부모의 입장에서 헌제(獻祭)를 하였기 때문에, 그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아담이 세워야 할 '믿음의 기대'와 함께 '실체헌제(實體獻祭)'를 위한 아벨 자신의 입장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과 동일한 원리에 의하여 이때에 있어서 모세도 부모와 자녀의 두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도 역시 부모의 입장에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게 되면, 그와 동시에 자녀의 입장에서 '실체헌제'를 하기 위한 아벨의 위치도 확립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모세가 아벨의 위치를 확립한 후, 이스라엘민족이 가인의 입장에서 모세를 통하여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면 거기에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3. 메시아를 위한 기대

모세가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고,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민족이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하면, 그것이 바로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그 기대 위에서, 오시는 메시아로 말미암아 중생(重生)되어 원죄를 벗고, 하나님과 심정적인 일체를 이룸으로써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하면 '완성실체'가 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Ⅱ.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

모세가 사탄세계인 애급(埃及)에서 이스라엘 선민을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로써 인도하여, 홍해(紅海)를 건너고 광야를 돌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노정은, 장차 예수님이 이 죄악세계(罪惡世界)에서 제2 이스라엘인 기독교 신도들을 이적과 기사로 인도하여, 이 죄악세계의 고해(苦海)를 건너고 생명의 물이 마른 사막을 돌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창조본연의 에덴으로 복귀케 될 그 노정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이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3차로 연장된 것과 같이, 예수님을 중심한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도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3차로 연장되었던 것이다.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여기에서는 모세노정과 예수노정과의 세밀한 대조설명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것은 본절과 다음 절을 대조함으로써 소상히 밝혀질 것이다.

1.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간을 애급에서 고역(苦役)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초래된 민족적인 탕감기간(蕩減期間)은 끝나게 되었었다. 여기에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영도(領導)하여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인물이 되기 위하여, 민족적 탕감기간인 400년을 다시 개인적으로 탕감함으로써, 40일 사탄분립의 기대를 세워야 했던 것이다. 모세는 이 목적과 함께, 타락전 아담이 믿음의 기대를 위하여 세워야 했던 40수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후편 제3장 제2절 Ⅳ) 사탄세계의 중심인 바로궁중에 들어가 40년을 지나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남 모르게 그의 유모(乳母)로 세워진 어머니로부터 선민의식(選民意識)에 불타는 교육을 받으면서 바로궁중생활 40년을 마친 후, 선민의 혈통에 대한 지조(志操)와 충절(忠節)을 변치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불어 고난을 받기를 잠시 바로궁중에서 죄악의 낙(樂)을 누리는 것보다 기뻐하여, 그 가운데서부터 뛰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히브리서 11장 24~25절). 이와같이 모세는 바로궁중생활 40년으로써 '40일 사탄분립기대'를 세워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였던 것이다.

(2) 실체기대

모세는 믿음의 기대를 세움으로써, 동시에 위에서 이미 논한 바와같이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아벨의 위치도 확립하게 되었었다. 이제 가인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민족이, 그들의 부모의 입장인 동시에 자녀로서의 아벨의 입장에 있었던 모세에게, 믿음으로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그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이어받음으로써 선(善)을 번식하게 되었더라면, 그 때에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가지고,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와같이 모세를 따라 애급을 출발하여 가나안 복지로 돌아가는 기간은, 바로 그들이 이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우기 위한 기간이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이는 것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모세는 자기의 동포가 애급인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불타는 동포애(同胞愛)를 이기지 못하여 그 애급인을 쳐 죽였던 것이나(출애굽기 2장 12절), 실상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참경(慘景)을 보시고(출애굽기 3장 7절) 울분을 느끼신 그 심정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모세를 중심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모세를 따라서 사막을 횡단하는 가나안 복귀노정을 성공적으로 출발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사실을 결정짓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모세가 이와 같이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인 것은, 첫째로 천사장(天使長)이 인간시조를 타락시켰고 또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사탄이 장자(長子)의 입장에서 인류 죄악사(罪惡史)를 이루어 나오고 있으므로, 하늘편에서 장자의 입장에 있는 사탄편을 쳐서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모세로 하여금 바로 궁중에 대한 미련을 끊고, 다시는 그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입장에 서게 하시기 위함이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의 애국심을 보여줌으로써 그를 믿게 하시기 위함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하나님이 애급인의 장자와 그 가축의 맏것을 전부 쳐버렸던 이유도 이러한 데 있었다. 모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같은 심정으로 모세의 애국심에 감동되어, 그를 더 존경하고 더 믿고 모시며 따랐더라면, 그들은 모세를 중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홍해(紅海)를 건너거나 시내광야를 도는 일이 없이 바로 블레셋으로 가는 곧은 길을 통하여 가나안복지로 들어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 노정은 야곱의 하란 21년노정을 탕감하는 21일 노정이 되었을 것이었다. 출애굽기 13장 17절에는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급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보아서 하나님은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블레셋 땅의 곧은 길로 통하게 하려 하셨던 것인데, 이스라엘민족이 모세를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이 노정은 출발조차도 해보지 못하고 말았고,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때는 제1차 때와 같이 그들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 가나안 복귀의 도중에서 애급으로 되돌아갈까 염려하여 홍해(紅海)를 건너고 광야를 돌아서 가도록 인도하셨던 것임을 알 수 있다.

(3)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가인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벨의 입장에 있는 모세에게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더라면,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이는 것을 보고 도리어 그를 오해하고 나쁘게 발설하였으므로, 바로는 이 소문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2장 15절). 이에 모세는 할 수 없이 바로의 눈을 피하여 이스라엘민족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게 되었으므로 그 실체기대는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며, 따라서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복귀노정은 2차 내지 3차까지 연장되게 되었던 것이다.

2.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不信)으로 말미암아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모세가 그의 '믿음의 기대'를 위하여 세웠던 바로궁중 40년기간은,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모세가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출발하기 위하여는 사탄 침범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바로 궁중생활 40년기간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기간을 다시 찾아 세워,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모세가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광야로 들어가 다시 40년기간을 보내게 되었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40년기간에는 이스라엘 민족도 모세를 불신한 죄로 더욱 더 비참한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 40년으로 '40일 사탄분립기대'를 새로이 세웠기 때문에,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애급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급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급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애굽기 3장 7~10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2) 실체기대

모세는 미디안 광야 40년으로써, '40일 사탄분립기대'를 다시 만들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동시에, 다시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아벨의 위치도 확립하였다. 따라서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경우와 같이, 가인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벨의 입장에 있는 모세를 절대로 믿고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므로 여기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할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려 하였을 때에,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였던 것과 같은 목적으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때에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3대 기적(삼대기적(三大奇蹟))과 10재앙(십재앙(十災殃))의 권능을 주시어 애급인을 치게 하심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모세가 사탄편을 쳐야 하는 이유는 위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첫째 사탄편이 침범한 장자의 입장을 탕감복귀하고, 둘째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급에 대한 미련을 끊게 하고, 셋째 모세는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던 것이다(출애굽기 4장 1~9절). 그리고 모세가 애급인을 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인한 애급고역(埃及苦役) 400년 탕감기간을 다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30년이나 더 고역을 당함으로써(출애굽기 12장 41절), 그들의 탄식이 하나님에게 상달되어 하나님의 긍휼을 자아내게 되었었다는 사실이다(출애굽기 2장 24~25절). 3대기적은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에 있어서 무엇을 예시하셨던가? 첫째 기적은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보여주신대로(출애굽기 4장 3~9절) 모세의 명령에 의하여 아론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던 지팡이를 바로 앞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되었다. 이것을 본 바로도 그의 술객(術客)들을 불러 지팡이를 던지게 하자 그것들도 역시 뱀이 되었다. 그러나 아론의 지팡이가 변하여서 된 뱀이 그들의 것을 모두 삼켜버렸다(출애굽기 7장 10 ~12절). 그러면 이 기적(奇蹟)은 무엇을 예시한 것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구주(救主)로 오셔서 사탄세계를 멸하실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하나님 대신 신(神)으로 세워진 모세(출애굽기 7장 1절) 앞에서 기적을 나타냈던 그 지팡이는, 장차 하나님 앞에서 이렇듯 기적을 나타내실, 권능적인 면에서의 예수님을 상징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또 지팡이는 대신 의지자며 대신 보호자로서 불의(不義)를 쳐서 바른 길잡이의 사명을 하는 것이어서,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전 인류 앞에 이러한 사명을 가지고 오실 것을 보여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사명적인 면에서의 예수님을 상징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상징하는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또한 뱀의 역할도 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한복음 3장 14절)라고, 자기를 뱀으로 비유하셨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로우라고도 하셨다(마태복음 10장 16절). 이것은 원래 인간조상이 악한 뱀에게 꼬임을 당하여 타락되었으니, 이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선한 지혜의 뱀으로 오셔서, 악한 인간들을 꼬여 선으로 인도해야 되기 때문에, 제자들도 선한 뱀으로 오신 예수님의 지혜를 본받아 악인(惡人)들을 선도(善導)해야 된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다. 한편 또 모세의 뱀이 술객의 뱀을 삼켰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늘 뱀으로 오셔서 사탄 뱀을 삼켜 멸하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둘째 기적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모세가 첫번 손을 품었을 때 그 손이 문둥병에 걸렸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그 손을 다시 품었을 때, 그 병든 손이 깨끗이 나아버렸던 것이다(출애굽기 4장 6~7절). 이 기적은 장차 예수님이 후아담으로 오셔서, 후해와의 신성(神性)이신 성신(전편 제7장 제4절 Ⅰ)과 더불어 속죄(贖罪)의 역사(役事)를 하시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다. 첫번 손을 품음으로써, 고칠 수 없는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은, 처음에 천사장(天使長)이 해와를 품음으로써 인간이 죽음의 입장으로 타락해버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손을 다시 품어서 문둥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것은 인류의 부성신(父聖神) 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의 모성신(母聖神) 되신 성신(전편 제7장 제4절 Ⅰ)을 복귀하여,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마태복음 23장 37절) 전 인류를 다시 품어 중생(重生)시킴으로써, 완전복귀한다는 것을 표시하신 것이었다. 셋째 기적은 강물을 육지에 부어서 피가 되게 한 것이었다(출애굽기 4장 9절). 이것은 무기물(물)과 같은 생명 없는 존재가 유기물(피)과 같은 생명 있는 존재로 복귀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물은 타락되어 생명을 잃은 세상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요한계시록 17장 15절) 이 기적은 장차 예수와 성신이 오셔서 생명을 잃어버린 타락인간들을 생명 있는 자녀로 복귀시킨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위와 같은 3권능을 나타내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 앞에 장차 예수님과 성신이 인류의 참부모로 오셔서, 전 인류를 자녀로서 복귀하고, 사탄에게 빼앗겼던 창조본연(創造本然)의 4위기대(四位基臺)를 복귀할 수 있는 상징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다음으로 모세가 하나님에게 자기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 형 아론(출애굽기 4장 14절)과 아론의 누이가 되는 여선지(女先知) 미리암(출애굽기 15장 20절)을 주셨다. 이것은 장차 말씀의 실체이신 예수님과 성신(요한복음 1장 14절)이 오셔서, 타락으로 인하여 말씀을 잃어버린 인간을 말씀의 실체로 복귀하실 것을 형상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론과 미리암이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입장인 모세의 뜻을 받들고, 그의 대신으로 영도(領導)의 사명을 했던 것은, 장차 예수님과 성신(聖神)이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대신 속죄(贖罪) 사명을 하실 것을 형상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바로 앞으로 나아가는 도중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모세를 죽이려 하셨다. 그 때에 모세는 그의 처(妻) 십보라가 그의 아들을 할례(割禮)함으로써 죽음을 모면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4장 24~26절). 모세는 할례로써 그 시험을 이겼기 때문에 그의 가족이 살아났었고, 따라서 이스라엘이 애급(埃及)에서 나올 수 잇게 되었으니, 이것도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할례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면 할례는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인간조상은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음에 따라 양부(陽部)를 통하여 사망의 피를 받았었다. 그러므로 타락된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 탕감조건(蕩減條件)으로 양부를 쳐서 피를 냄으로써, 그 사망의 피를 뽑았다는 표시의 조건으로 할례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할례의 근본 의의는 첫째로 사망의 피를 뽑는 표요, 둘째로는 남자의 주관성(主管性)을 다시 찾는 표이며, 셋째로는 본성(本性)의 자녀의 입장을 다시 찾는 약속의 표인 것이다. 그런데 할례의 종류에는 마음할례(신명기 10장 16절), 육신할례(창세기 17장 10절), 만물할례(레위기 19장 23절) 등 세 종류가 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10재앙(十災殃)의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구출하셨으니(출애굽기 7장 10~12장 36절), 이것도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로써 하나님의 선민(選民)을 구원하실 것을 보여 주신 것이었다. 야곱이 하란에서 21년간의 고역(苦役)을 할 때에, 라반이 응당 야곱에게 주어야 할 품삯을 주지 않고 열 번이나 그를 속였었다(창세기 31장 7절). 그렇기 때문에 야곱노정을 걷는 모세노정에 있어서도,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한도에 넘는 고역을 시켰을 뿐 아니라, 열 번이나 그들을 놓아 준다고 하면서 매번 속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탕감으로 10재앙을 내려 바로를 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면 이 재앙(災殃)들은 또 무엇을 예시(豫示)하였는가를 알아보자. 애급 편에는 3일간의 어둠이 있었고 이스라엘에게는 3일간의 광명이 있었으니,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사탄편은 흑암이요, 하늘편은 광명으로 분기(分岐)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애급(埃及)의 장자(長子)와 육축(育畜)의 맏것을 모조리 쳤으나 이스라엘은 양(羊)의 피로써 이것을 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탄편에 있어서의 장자는 가인의 입장이었으므로 이것을 쳐서 아벨의 입장인 차자(次子)로 하여금 장자의 입장을 복귀케 하기 위함이었다. 이 재앙도 역시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당초에 장자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섭리노정(攝理路程)을 먼저 출발한 사탄편은 망하고, 차자의 입장인 하늘 편은 예수님의 피의 대속(代贖)으로 인하여 구원(救援)을 받는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는 또 애급에서 많은 재물을 취해 가지고 왔는데(출애굽기 12장 35~36절), 이것도 장차 있을 예수님의 만물복귀(萬物復歸) 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재앙의 이적을 내리실 때마다 바로의 마음을 강퍅(剛愎)하게 하셨으니(출애굽기 10장 27절), 그이유는 첫째, 바로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어,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고(출애굽기 10장 1~2절), 둘째로는 바로로 하여금 있는 힘을 다하여서 이스라엘 민족을 붙잡다가 할 수 없이 단념하게 하심으로써, 자기의 무력함을 깨닫고 이스라엘이 애급을 떠난 후에도 그들에 대한 미련을 가지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로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하여 애급에 대한 미련을 끊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 죽이는 것으로써 그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세를 도리어 불신하였기 때문에, 이 노정은 출발도 해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은 그 '출발을 위한 섭리'로서 보여주신 3대 기적(삼대기적(三大奇蹟))과 10재앙(十災殃)을 보고, 모세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진정한 이스라엘의 영도자(領導者)라는 것을 믿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 위에서 아벨의 입장을 확립한 모세를 믿고 따르는 입장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드디어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일시적으로 이와같이 모세에게 순종굴복(順從屈伏)하였다고 해서 그것으로 곧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섭리노정(攝理路程)에 사탄이 침범하여, 오랜 섭리의 기간을 사탄에게 내주었던 것이므로, 모세에 대하여 가인의 입장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기간'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이 광야노정의 전 기간을 두고 순종과 굴복으로 모세를 믿고 따라가지 않고서는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에게 순종하여 광야노정을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제2차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 있어서는 그 1차 때보다도 더 큰 은사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으므로, 제2차 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이 세워야 할 탕감조건(蕩減條件)은 더 가중되었던 것이다. 즉 제1차 노정에 있어서는 그들이 모세를 믿고 따르기만 하였더면, 블레셋의 곧은 길로 인도되어 야곱의 하란노정 기간수인 21일간이면 가나안 복지(福地)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그런데 제2차 노정에 있어서는 출애굽기 13장 17절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같이, 만일 그들이 블레셋 땅의 곧은 길로 인도되면 전쟁을 보고 두려워함으로써, 제1차 노정 때와 같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 애급땅으로 되돌아갈까 염려하시어, 하나님은 그들을 이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홍해(紅海)를 건너고 시내광야를 돌아 21개월 걸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노정을 취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되어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21개월 광야노정(曠野路程)을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미 위에서 논술한 바와같이, 이 노정이 어떻게 장차 오실 예수님을 중심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본보기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모세에게 굴복한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거기에서 희생(犧牲)을 드릴 것을 허락했을 때에, 모세는 그리함은 불가하나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급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급사람이 보는 데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대로 하려 하나이다(출애굽기 8장 26~27절)라는 말로써 바로을 속여 자유허여(自由許與)의 3일 간을 얻어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나왔다. 이 3일기간은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헌제를 위하여 사탄분립에 요(要)한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 후 이것은 섭리노정(攝理路程)을 출발할때마다 사탄 분립에 필요한 탕감기간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곱이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려 할 때에도, 라반을 속이고 하란을 떠나 사탄을 분립한 3일기간이 있었다(창세기 31장 19~22절). 이와 마찬가지로 모세에게도 그가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기 위하여서는, 바로를 속이고 자유행동을 취하여 사탄을 분립하여 3일기간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후일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사탄분립을 위한 3일기간이 있은 후에야 영적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출발을 하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도 되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장정(壯丁) 60만명이 라암셋을 출발한 것은 정월 15일이었다(출애굽기 12장 6~37절, 민수기 33장 3절). 이스라엘 민족이 3일기간을 뜻맞게 세워 숙곳에 이른 후에는, 하늘이 은사를 내리시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셨다(출애굽기 13장 21절). 모세노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한 낮(양)의 구름기둥은,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으로 인도할 예수님을 표시하고, 밤(음)의 불기둥은 여성신(女性神)으로서 그들을 인도할 성신(聖神)을 상징했던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지팡이로 홍해(紅海)를 가름으로써 이것을 육지와 같이 건넜으나 그들의 뒤를 추격해 오던 애급의 병거는 다 수장(水葬)되어 버리고 말았었다(출애굽기 14장 21~28절). 이미 위에서 논한 바와같이 바로 앞에 선 모세는 하나님을 상징하였고(출애굽기 7장 1절), 모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실 예수님을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이 기적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 사탄은 예수님을 따라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걷는 신앙자들의 뒤를 추격할 것이지만, 지팡이의 사명자로 오시는 예수님이 철장(鐵杖)으로(요한계시록 2장 27절, 시편 2장 9절) 그들 앞에 가로놓인 이 고해(苦海)의 세상을 치면, 이 고해도 평탄한 길로 갈라질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의 갈 길은 열리고 추격하는 사탄은 멸망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전편 말세론(末世論)에서 이미 밝힌 바와같이, 철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7장 15절에는 이 죄악세상을 '물'로 비유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을 고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통념(通念)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를 건너서 애급(埃及)을 떠난 후 제2월 15일에 신광야에 이르렀다(출애굽기 16장 1절). 이때부터 하나님은 그들이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만나와 메추리를 내려 먹이셨으니(출애굽기 16장 35절), 이것은 장차 예수님의 살(만나)과 피(메추리)를 모든 인간에게 주실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6장 48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신광야에서 떠나 르비듬에 장막(帳幕)을 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시어 호렙산의 반석(磐石)을 쳐서 물을 내어 그들에게 먹이셨다(출애굽기 17장 6절).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였으니, 이 행사는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생명수(生命水) 샘물로(요한복음 4장 14절) 모든 사람을 살리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가 다음에 시내산에서 받게 되는 두 석판(石板)도 예수와 성신(聖神)을 상징하지만, 반석(磐石)은 석판의 뿌리가 되므로 이것은 또한 하나님도 상징한다. 모세가 석판의 뿌리가 되는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먹여 살린 터전이 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모세가 석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법궤(法櫃)와 성막(聖幕)을 지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르비듬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패하였다. 그러므로 아론과 훌은 돌을 쌓아 모세를 그 위에 앉히고, 그의 손을 내려지지 않도록 좌우에서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앞에서 싸운 여호수아는 아말렉왕과 그 백성을 쳐서 승리하였다(출애굽기 17장 10~13절). 이것도 장차 예수께서 오실 때에 되어질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으니, 여호수아는 예수를 믿는 신앙자를, 아말렉은 사탄세계를, 그리고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고 서 있는 것과 그 앞에서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쳐서 멸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예수님과 성신의 3위신(三位神)을 모신 신앙자들은 그 앞에 오는 모든 사탄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3) 성막을 중심한 복귀섭리

우리는 먼저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받게 된 경위를 알아야겠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말렉과 싸워서 승리한 후 제3월 초에 시내광야에 이르렀다(출애굽기 19장 1절). 여기에서 모세는 장로(長老) 70인을 거느리고 시내산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뵈었다(출애굽기 24장 9~10절). 하나님은 특별히 모세를 시내산정(山頂)으로 부르시사, 석판에 기록한 십계명(十誡命)을 받기 위하여 40주야의 금식(禁食)을 하라고 명하시었다(출애굽기 24장 18절). 모세는 시내산에서 금식을 하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법궤와 성막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출애굽기 25장 31장). 그리고 40일간의 금식이 끝났을 때 모세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석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것이다(출애굽기 31장 18절). 모세가 이 석판(石板)을 가지고 시내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 앞으로 나아갔을 때, 그들은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어 가지고,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埃及)에서 인도한 신(神)이라고 섬기고 있었다(출애굽기 32장 4절). 이것을 본 모세는 대로(大怒)하여 손에 들었던 석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출애굽기 32장 19절).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처음것과 같은 석판을 깎아 만들어 오면 거기에 다시 십계명의 말씀을 써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애굽기 34장 1절). 이 말씀을 받은 모세가 다시 40주야를 금식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석판에 다시 십계명을 기록하여 주셨다(출애굽기 34장 28절). 모세가 이 석판을 가지고 다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나타났을 때 비로소 그들은 모세를 받들게 되어 법궤를 만들고 성막을 건축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35장 ~ 40장). ㄱ. 석판 성막 법궤 등의 의의와 그 목적 차트 석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세가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을 받았다는 것은, 타락으로 인하여 제물로만 하나님을 대해 오던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는 지나가고, 타락인간이 말씀을 복귀하여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에로 들어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후편 서론(緖論)에서 밝힌 바와같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던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었더라면, 그들은 말씀의 완성실체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됨으로 인하여 말씀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 이제 모세가 40일 사탄분립기간으로써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石板)을 찾았다는 것은, 사탄세계로부터 잃어버렸던 아담과 해와를 상징적인 말씀의 실체로 복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은 복귀한 아담과 해와의 상징체로서 장차 말씀의 실체로 오실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했던 것이다. 성경에 예수님을 흰 돌로 상징하였고(요한계시록 2장 17절) 또 반석은 곧 그리스도(고린도전서 10장 4절)라고 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석판은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하기 때문에, 결국 이것들은 또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것이되기도 한다. 339 다음으로, 성막(聖幕)의 의의는 무엇이었던가?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성전(聖殿)을 자기의 몸으로 비유하셨다(요한복음 2장 21절). 그리고 또 예수님을 믿는 성도(聖徒)들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셨던 것이다(고린도전서 3장 16절). 그러므로 성전은 예수님의 형상적인 표시체인 것이다.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제1차 가나안복귀에 성공하였더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곧 성전을 짓고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하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제1차 노정은 출발조차도 해 보지 못하였고, 제2차노정에서는 홍해(紅海)를 건너 광야에서 떠돌아다니게 되었으므로 성전은 건축하지 못하고 그 대신 성막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막은 예수님의 상징적인 표시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하실 때에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애굽기 25장 8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성막은 지성소(至聖所)와 성소(聖所)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지성소는 대제사장(大祭司長)만이 1년에 한 번씩 들어가 헌제(獻祭)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어서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시는 곳이므로, 이것은 예수님의 영인체(靈人體)를 상징한 것이었고, 성소는 보통 제사 때에 들어가는 곳으로서, 이것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지성소는 무형실체세계(無形實體世界)를, 성소는 유형실체세계(有形實體世界)를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이 위로부터 둘로 갈라졌다는 것은(마태복음 27장 51절),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영적 구원섭리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영인체와 육신 또는 하늘과 땅이 서로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법궤는 무엇이었던가? 법궤는 지성소에 안치하는 언약궤(言約櫃)로서, 그 속에는 예수님과 성신, 따라서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두 석판(石板)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또 거기에는 광야노정(曠野路程)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의 생명의 양식이었고, 또한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만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표상(表象)하는 금항아리에 담긴 것이 들어 있었으며, 또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던 아론의 싹난 지팡이(히브리서 9장 4절)가 거기에 들어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법궤는 크게는 천주(天宙)의, 작게는 성막(聖幕)의 축소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법궤 위에는 속죄소(贖罪所)가 덮였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금으로 두 그룹을 쳐서 만들어 속죄소의 좌우에 덮으면, 두 그룹 사이에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시어, 이스라엘족속에게 전할 모든 말씀을 주시겠다고 하셨다(출애굽기 25장 26~22절). 이것은 장차 두 석판으로 표시된 예수님과 성신이 오시어 역사하시게 됨으로써 속죄(贖罪)가 성립되면, 그 속죄소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동시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생명나무에로 나아가는 길을 막았던(창세기 3장 24절)이 좌우로 갈라져서 누구든지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석판(石板)과 성막(聖幕)과 법궤(法櫃)를 주신 목적은 어디 있는가? 이스라엘민족은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초래된 400년 탕감기간을 마치자 3대 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민족(埃及民族)을 치고, 추격해 오던 애급의 수 많은 군사와 병거를 수장(水葬)하고서 홍해(紅海)를 건너 광야길로 나섰다. 하나님의 뜻으로 보아서도 그러하지만, 이처럼 원수를 맺고 떠난 애급이었기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입장에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가나안 복귀는 기필코 이루어져야 하는 노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출발을 위한 섭리'를 그처럼 기사(奇事)와 이적(異蹟)으로 하셨고, 또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여,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환경 가운데로 몰아넣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은 모두 불신으로 흘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최후에는 모세마저 불신의 행동을 취할지도 모르는 터이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비록 사람은 변하여도 변할 수 없는 그 어떠한 신앙의 대상을 세워놓으시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즉 언제나 단 한사람만이라도 이것을 절대로 신봉(信奉)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신앙의 대상을 마치 바톤과 같이 이어받게 하면서 섭리(攝理)의 뜻을 이루어 나아가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신앙의 대상을 무엇으로 세워야 할 것이었던가 ? 석판이 들어있는 법궤를 안치함으로써 메시아를 상징하였던 성막(聖幕)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민족이 성막을 지었다는 것은, 벌써 메시아가 상징적으로 강림(降臨)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이 성막을 메시아와 같이 충성으로 받들어 가나안 복지(福地)로 복귀하면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그 때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모두 불신으로 돌아가더라도 모세 한 사람만이라도 남아서 그 성막을 지키면, 그 민족은 다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워가지고 성막을 모시는 모세를 중심한 그 기대 위에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설혹 모세마저 불신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민족 중의 어느 한 사람이라도 모세를 대신하여 끝까지 성막을 지킨다면, 또 그를 중심하고 불신으로 돌아간 나머지 전민족을 복귀하는 섭리를 하실 수 있는 것이었다. 342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면 모세의 가정은 성막 대신이요, 모세는 석판과 법궤 대신이며, 또 모세의 가법(家法)은 천법(天法) 대신이 되었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석판이나 법궤나 성막이 필요 없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성전(聖殿)을 지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석판과 성막과 법궤는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감에 따라 그들을 구원(救援)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것이었다. 성막은 예수님과 성신(聖神)의 상징적인 표시체로서 성전을 지을 때까지 필요한 것이었고, 성전은 예수님과 성신의 형상적 표시체로서 실체성전(實體聖殿)이신 메시아가 강림하실 때까지 필요했던 것이다. ㄴ. 성막을 위한 기대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상징적 메시아인 성막을 맞기 위하여서도 '성막을 위한 기대'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대를 세우기 위하여는,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와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워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하여서 이 두 기대를 세울 수 있었던가? 모세가 성막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금식기도(禁食祈禱)로서 '40일 사탄분립기간'을 뜻맞게 세우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는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서 성막이상(聖幕理想)을 세워 나아가는 모세에게 믿음으로써 순종굴복(順從屈伏)하면, 성막을 위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지고, 따라서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성막이라 함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성판과 법궤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다. a. 제1차 성막을 위한 기대 인간은 6일만에 창조된 말씀의 실체이다(요한복음 1장 3절). 따라서 이와같이 창조되었다가 타락된 인간을 복귀하시기 위한 재창조(再創造)의 말씀을 주시려는 섭리를 하시기 위하여는, 사탄의 침범을 당한 창조기간(創造期間)의 6수를 성별(聖別)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6일 동안 여호수아의 영광의 구름으로 시내산을 덮으심으로써 성별하신 후, 제7일내에 그 구름 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셨다(출애굽기 24장 16절). 모세는 이때부터 40주야를 금식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24장 18절). 그것은 이미 위에서 상세히 논한 바와같이 이스라엘민족이 홍해를 건너 후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상징적 메시아인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우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 있어서의 '타락성을 벗기위한 탕감조건'은, 저들이 일시적으로 모세를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성전(聖殿)을 짓고 메시아를 맞을 때까지 계속하여 그러한 입장에 서 있어야만, 그것이 성립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논한 바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막(聖幕)을 세우기 위하여, '타락성을 벗기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는 데 있어서도,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가 '40일 사탄분립기간'을 지나서 성막을 세울 때까지, 그를 믿고 모시고 순종해야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가 금식기도(禁食祈禱)를 하는 기간에, 모두 불신으로 돌아가서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인도해 낸 신(神)이라고 섬겼던 것이다(출애굽기 32장 4절).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성막을 위하여 세워야 했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도 이룰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주셨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말씀의 터를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인간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으로 그것을 찾아야 할 이 기간에 있어서만은 하나님도 그들의 행동을 간섭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상(偶像)을 만들어 놓고 춤을 추는 백성들을 보자마자 모세는 대로(大怒)하여 손에 들었던 두 석판(石板)을 산 아래로 던져서 깨뜨렸다(출애굽기 32장 19절). 그리하여 이것은 모세가 '40일 사탄분립기간'으로 세웠던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에 사탄이 침범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두 석판(石板)은 이미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후아담과 후해와로서 복귀될 예수님과 성신(聖神)을 상징한다. 모세가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하는 두 석판을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깨뜨렸다는 것은, 다음에 예수님이 오실 때도 만약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예수님이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가심으로써, 예수님과 성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본래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를 중심하고 행해진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불신은, 모세가 '40일 사탄분립기간'을 세운 후,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에게 순종케 하심으로써 '성막을 위한 기대'를 이루시려던 하나님의 섭리를 좌절시키고 말았다. 따라서 '성막을 위한 기대'를 이루시려는 섭리는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2차 또는 3차까지 연장되어 나아갔던 것이다. b. 제2차 성막을 위한 기대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모두 석판을 중심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불신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르비듬에서 석판의 뿌리 되는 반석(磐石)의 샘물을 마신 터전 위에서 있었기 때문에(출애굽기 17장 6절), 모세가 석판을 깨뜨린 후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석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어 오면 처음 석판에 써주시었던 것과 같은 말씀을 다시 써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애굽기 34장 1절). 그러나 여기에서 '40일 사탄분립기대'를 다시 찾아 세워, 성막(聖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지 않고서는, 석판을 중심한 성막을 복귀할 수 없기 때문에, 모세는 다시 40주야를 금식한 후에 십계명(十誡命)의 말씀을 기록한 제2차 석판과 성막이상(聖幕理想)을 복귀하게 되었던 것이다(출애굽기 34장 28절). 346 한번 깨뜨린 석판을 40주야의 금식기도로써 복귀하였다는 것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도 저를 믿는 성도들이 40일 사탄분립기대로써 그를 맞을 수 있는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면, 그 기대 위에 재림(再臨)하셔서 구원섭리(救援攝理)를 다시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모세가 제2차로 석판을 중심한 성막이상을 복귀하던 '40일 사탄분립기간'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에게 순종굴복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은 모세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성막을 건축하였던 것이니, 때는 제2년 정월(正月) 초하루였던 것이다(출애굽기 40장 17절). 이리하여 이스라엘 선민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를 이룸으로써, 성막을 위한 기대를 이룩한 터전 위에서 성막을 짓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논한 바와같이, 그들이 성막을 짓는 것만으로는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실체기대(實體基臺)'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가나안으로 들어가 성전을 짓고 메시아를 맞을 때까지, 변치않고 이 성막을 자기들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모시고 받들어야 하였던 것이다. 제2년 2월 20일, 이스라엘 민족은 구름기둥의 인도를 따라 성막을 중심하고 시내광야에서 출발하였다(민수기 10장 11~12절). 그러나 그들은 다시 불신으로 흘러 모세를 원망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는 진노하시어 불로써 진(陳) 끝을 사르기도 하셨다(민수기 11장 1절). 이스라엘 민족은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통곡하며, 만나 외에는 생선도 외도 수박도 없다고 모세를 원망하며 애급땅을 그리워하였다(민수기 11장 4~6절).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세우고 나아가야 할 성막을 위한 기대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게 되어, 이 기대를 복귀하려는 섭리는 다시 제3차로의 연장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c. 제3차 성막을 위한 기대 이스라엘 미족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들을 중심한 제2차 성막을 위한 기대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모세의 변함없는 믿음과 충성으로 말미암아, 그 성막은 여전히 모세를 중심한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 서 있었고, 또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르비듬에서 성막의 중심인 석판(石板)의 뿌리되는 반석(磐石)의 샘물을 마신(출애굽기 17장 6절) 터전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터전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40일 사탄분립기대를 세우고, 성막을 위한 기대를 탕감복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위한 조건으로서 주신 것이 40일 정탐기간(偵探期間)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각 지파로부터 족장(族長) 한 사람씩을 모든 12명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어(민수기 13장 1절) 40일 동안을 정탐하게 하셨다(민수기 13장 25절). 그러나 정탐에서 돌아온 12명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신적인 보고를 하였다. 즉 그 땅의 거민(居民)은 강하고 성읍(城邑)이 견고할 뿐 아니라(민수기 13장 28절),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長大)하여 자기들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더라(민수기 13장 32~33절)고 하면서, 이스라엘은 그 성과 그 백성을 공격할 수 없다고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원망하고 통곡하면서 새로이 한 장관을 세워 애급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떠들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 백성들은 이미 그 보호자가 떠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밥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 반면에 자기들은 여호와가 보호자시니 두려워 말고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자고 외쳤던 것이다(민수기 14장 9절).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도리어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하였다(민수기 14장 10절). 이 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시어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민수기 14장 11절)고 하시면서,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여 그 40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민수기 14장 31~34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와같이 제3차 성막을 위한 기대도 복귀할 수 없게 되어, 제2차 21개월 광야노정(曠野路程)은 제3차 40년 광야노정으로 연장되었다.

(4)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성막을 위한 기대'가 3차나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타락성(墮落性)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은 세울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제2차로 세우려던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하지 못하게 되어,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로 연장되었던 것이다.

3.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이 실패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이 노정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세웠던 미디안 광야 40년 기간은 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偵探) 40일 기간을 믿음과 순종으로 찾아 세우지 못함으로써, '날'을 '해'로 환산하여 광야를 떠돌아 다니다가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오는 40년 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2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여 제3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 광야 40년 기간을 오직 믿음과 충성으로 성막(聖幕)을 모시고 표류하다가 가데스바네아로 다시 돌아온 모세는,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울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이 노정의 민족적인 '실체헌제(實體獻祭)'를 위한 아벨의 입장도 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실체기대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 40일 노정을 믿음과 순종으로 찾아 세우지 못하고 불신과 반역(反逆)으로써 실패하였으므로 '성막을 위한 기대'는 여전히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제2차 노정을 위한 실체기대(實體基臺)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성막을 충성으로 받들고 모셨던 모세의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는 여전히 남아져 있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표류(광야표류(曠野漂流))의 40년기간을, 변치않는 신앙으로 성막을 받들고 있는 모세에게 순종굴복함으로써 정탐 40일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는 기대를 세우면, 그 때에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가 조성되는 동시에 성막을 위한 기대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대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믿음과 순종으로, 성막을 중심한 모세를 받들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그때에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 있어서의 '실체기대'는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광야 40년 표류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3차 노정에 있어서의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기간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는 '성막을 위한 기대'를 세워가지고 제2차 노정에 그들이 모세를 받들고 성막을 건축하던 입장으로 돌아감으로써, 제3차노정의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기 위한 기간이었다. ㄱ)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 석판(石板)과 성막(聖幕)과 법궤(法櫃)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받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위에서 밝힌 바 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제2차 민족적 가나안복귀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 '출발을 위한 섭리'로서 나타내셨던 3대 기적(삼대기적(三大奇蹟))을 불신하는 입장에 섰었기 때문에, 그들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40일 시련기간을 거치게 하신 후에, 석판과 성막과 법궤의 3대 은사(三大恩賜)를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또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하려 하였을 때, 라반이 야곱을 열번이나 속였던 것을(창세기 31장 7절)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10재앙(십재앙(十災殃))을 내리셨던 것인데, 이스라엘이 또 이것을 분신하는 입장에 섰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십계명(十誡命)의 말씀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심으로써 3대 은사와 십계명을 지키게 되면, 그들은 제2차노정에서 3대 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埃及)을 출발하던 입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민족이 믿음과 순종으로 모세를 따라 광야 40년의 탕감기간을 마치고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온 후, 모세와 함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시고 받을었더면, 그들은 제2차노정에서 3대 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을 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의 목적을 이루었던 입장에 다시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석판은 법궤의 축소체요 법궤는 성막의 축소체이므로 결국 석판은 성막의 축소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법궤나 성막은 석판이나 그의 뿌리 되는 반석(磐石)으로써 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에 의하여 가데스바네아를 출발하는 것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믿음과 충성으로 성막을 받들고 모세를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그 때에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짐으로써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어떻게 이루려 하셨던가 ? 광야 40년기간을 뜻앞에 세우지 못하고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을(민수기 20장 4~5절)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회중(會衆) 앞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하여가지고 그들에게 마시게 하셨다(민수기 20장 8절). 만일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한 번 쳐서 샘물을 내어 먹임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권능을 새로이 깨달아 그를 중심하고 하나가 되었더면, 그들은 모세와 함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서,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모세를 믿고 순종하여 그를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갔더면,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게 됨으로써, 제3차 노정의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물이 없다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는 백성을 보자, 격분하여 치밀어 오르는 혈기(血氣)를 누르지 못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수기 20장 12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모세는 이와 같이 한 번 쳐야 할 반석(磐石)을 두 번 침으로써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기대'도 이루지 못하게 되어, 드디어 약속받은 가나안 복지(福地)를 눈 앞에 바라보면서 끝내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다(민수기 20장 24절, 민수기 27장 12~14절). 우리는 이제 반석을 한 번 쳐야 하는 이유와, 두 번 친 것이 어떻게 되어 죄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겠다. 요한계시록 2장 17절에서는 예수님을 흰 돌로 상징하였고, 한편 또 고린도전서 10장 4절을 보면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런데 타락론(墮落論)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생명나무로 오신 분이시므로(요한계시록 22장 14절), 반석은 곧 생명나무이기도 하다. 한편 창세기 2장 9절의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 있어서의 장래(將來)할 완성한 아담을 상징한 것으로서, 이 생명나무도 또한 반석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반석은 그 완성한 아담을 상징하기도 하다. 그런데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장차 반석이 될 그 아담을 쳐서 타락시켰다. 따라서 아담은 생명나무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창세기 3장 24절), 그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생명수(生命水) 샘물을 영원히 그 자손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반석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모세가 지팡이로 치기 이전, 샘물을 내지 못하던 반석(磐石)은 바로 타락된 아담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탄이 장차 생명수를 낼 수 있는 반석으로 성장하고 있던 아담을 한 번 쳐서 타락시킴으로써, 그를 '샘물을 내지 못하는 반석'으로서의 아담이 되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샘물을 내게 함으로써, '샘물을 낼 수 있는 반석'으로서의 아담을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한 번 쳐서 생물을 내게 된 반석은 바로 생명나무로 오셔서 타락한 인간에게 생명수 샘물을 주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니 나의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장 14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반석을 한번 치는 것은 타락된 제1아담을 완성한 제2아담 예수님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허락된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가 하늘편에서 한 번 쳐서 샘물을 내게 된 반석을 또 한 번 친 행동은 장차 복귀한 반석으로 오셔서 만민에게 생명수 샘물을 먹여 주실 예수님을 칠 수 있다는 표시적인 행동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것을 목격한 모세가 혈기(血氣)로써 반석을 두 번 친 행동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반석의 실체되시는 예수님 앞에 사탄이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조건을 성립시킨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죄가 되었던 것이다. 모세가 석판(石板)을 한번 깨뜨린 것은 복귀할 수 있었으나, 반석을 두번 친 실수는 복귀할 수 없었으니 그 이유는 어디 있었던 것인가? 복귀섭리(復歸攝理)로 보아 석판과 반석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십계명(十誡命)이 기록된 석판은 모세의 율법(律法)의 중심이요, 따라서 구약성서(舊約聖書)의 중심이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이 석판이상(石板理想)을 믿음으로써 그 시대의 구원권내(救援圈內)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석판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한 외적인 표시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반석(磐石)은 곧 그리스도라고 하신 말씀대로, 반석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동시에 석판(石板)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석판의 실체이신 예수님의 뿌리 곧 하나님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판은 외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반석은 내적인 것이다. 또 석판은 몸으로 비유한다면 반석은 마음에 해당하며, 석판은 성소(聖所)라고 한다면 반석은 지성소(至聖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석판을 땅이라고 한다면 반석은 하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석은 석판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내적인 표시체인 것이다. 이와같이 석판은 예수님에 대한 외적인 표시체였으므로,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상징하는 모세 앞에(출애굽기 4장 16절, 출애굽기 7장 1절), 예수님의 외적인 표시체로 세워졌던 아론을 상징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에(출애굽기 32장 4절), 아론이 깨어짐에 따라서 석판도 깨어지게 되었었다. 그러나 아론이 르비듬에서 반석 샘물을 마신 터전 위에서(출애굽기 17장 6절) 회개함으로써 소생(蘇生)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론을 상징하는 석판도 반석 샘물의 내적인 터전 위에서 다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움으로써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판의 뿌리가 되는 반석은 그리스도와 그의 뿌리되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친 행동은 만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모세가 반석 2타(磐石二打)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던가?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던 것은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혈기(血氣)를 참지 못한 결과였기 때문에(시편 106편 32~33절), 이 행동은 결국 사탄의 입장에서 행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반석으로 이루시려던 '출발을 위한 섭리'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외적인 행동은 사탄의 행동으로 돌아갔으나, 내적인 실제에 있어서는 그 반석에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을 먹여 살렸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급(埃及)에서 나온 외적인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이 예정하신 가나안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모세도 120세를 1기로 소망의 땅을 눈 앞에 바라보면서 죽고 말았다(신명기 34장 4~5절). 그러나 여호수아가 모세의 대신으로(민수기 27장 18~20절), 반석 샘물을 마시고 성막을 받드는 광야노정 가운데서 출생한 내적인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민수기 32장 11~12절).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행동이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 반석에서는 샘물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려면 어떻게 되어 거기에서 샘물이 나올 수 있었던가?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모세는 일찌기 르비듬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시게 함으로써 반석 샘물의 터전을 마련한 바 있었던 것이다(출애굽기 17장 6절). 그리고 이 터전 위에서 세워진 석판(石板)과 성막(聖幕)과 법궤(法櫃)는, 다른 모든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40일 금식기도(禁食祈禱)로써 세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서 그것을 굳게 지켜온 모세는 한 사람의 믿음에 의하여,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까지 계승되어 왔었다. 그 뒤에 모세마저 불신의 입장으로 돌아갔지만 하늘을 대한 그의 심정은 변하지 않았고 또 여호수아가 그의 정탐(偵探) 40일로써 세운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 변치 않는 신앙으로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르비듬에서 세웠던 반석(磐石) 샘물의 터전도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그대로 남아졌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의 외적인 불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제2차 반석이 외적으로는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나, 그의 내적인 불변의 심정과 여호수아의 믿음과 충성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내적으로는 샘물을 내어 마시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은 결과적으로 사탄의 입장에서 친 것이 되어 그 돌은 사탄이 소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돌의 실체로 오셨던 얘수님은, 그의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자, 일찍이 저들이 광야(曠野)에서 잃어버렸던 이 돌을 몸소 찾으시려고 광야로 가셨었기 때문에, 사탄으로부터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을 제일 먼저 받으셨던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외적으로는 혈기(血氣)를 내어 반석을 두 번 쳤기 때문에,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광야에서 죽었으나, 내적으로는 그의 불변의 심정으로 인하여 반석의 샘물을 내어 먹였기 때문에, 영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장차 반석의 실체 되시는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게 되면, 예수님도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받아 십자가에 달리시게 됨으로써, 영육(靈肉) 아우른 세계적 가나안 복귀는 완수하지 못하시고, 부활(復活)하심으로써 영적으로만 그것을 완수 하게 되시리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가 반석(磐石)을 두 번 친 후, 하나님은 불신(不信)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에게 불뱀을 보내어 그들을 물어 죽이게 하셨다(민수기 21장 6절). 그러나 이스라엘이 회개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여,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만은 구원을 받도록 하셨다(민수기 21장 9절). 이 불뱀은 해와를 타락시킨 옛 뱀 곧 사탄을 상징하였고(요한계시록 12장 9절), 장대 끝에 매단 구리뱀은 장차 하늘 뱀으로 오실 예수님을 상징했던 것이다(요한복음 3장 14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갔을 때는 그들을 사탄 뱀에게 내주셨다가, 그들이 회개하고 신앙을 돌이킬 때에는 다시 구리뱀으로 살려 주셨던 것과같이, 후일 예수님 때에 있어서도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그들을 사탄에게 내주시지 않을 수 없게 되리라는 것과 그 때에 예수님은 인류를 살리시기 위하여 부득이 하늘 뱀으로서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시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과, 또 불신을 회개하고 그의 십자가로 인한 구속(救贖)을 믿는 자들은, 누구나 구원해 주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한복음 3장 14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사실은 실상 예수님을 중심한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십자가로 인한 영적인 노정으로 출발하게 한 먼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민수기 20장 12절). 이에 모세는 하나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여 달라고 간곡한 애원(哀願)의 기도를 올렸으나(신명기 3장 25절), 종내 그 목적의 땅을 눈 앞에 바라보면서 죽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그가 죽은 뒤에 그 시체를 장사(葬事)하였으나, 그가 묻힌 곳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신명기 34장 6절).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그는 십자가에 달리시게 될 것이고, 또 할수만 있으면 죽음의 잔을 면하고 세계 가나안 복귀를 이루게하여 달라고 애원의 기도를 하실 것이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될 것과, 한편 그의 시체도 장사한 뒤에 간 곳을 아는 사람이 없게 될 것 등을 예시(豫示)하신 것이다. ㄴ) 여호수아를 중심한 실체기대 모세가 반석(磐石)을 두 번 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이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로써 가나안으로 복귀하려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민수기 20장 1~13절)사탄이 외적으로는 침범했지만, 르비듬 반석 샘물의 터전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는 그대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에게 먹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위에서도 밝혀 온 바와같이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대한 또 하나의 노정을 보여주셨다. 즉 이스라엘 민족 중, 사탄 세계인 애급(埃及)에서 출생하여 광야노정에서 불신으로 돌아갔던 외적인 이스라엘에 속하는 사람들은, 정탐(偵探) 40일을 믿음으로 세웠던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쓰러지고, 반석샘물을 마시고 성막(聖幕)을 받드는 광야생활 가운데서 출생한 내적 이스라엘만이, 모세 대신의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다(민수기 32장 11~12절).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가나안땅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시면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잔손의 온 회중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민수기 27장 18~20절)고 하셨다. 여호수아는 정탐(偵探) 40일기간에 불신으로 돌아갔던 온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모세가 세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위에 굳게 서서 변함 없는 믿음과 충절(忠節)로써 '성막을 위한 기대'를 조성하고 끝까지 그것을 받들었던 오직 두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와같이 비록 모세는 불신으로 돌아갔으나, 석판(石板)과 성막(聖幕)과 법궤(法櫃)는 여전히 여호수아가 세운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모세의 대신으로 세우시고, 그 내적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에게 복종하여 그와 함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서게 하심으로써, 반석 샘물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시고, 이 섭리에 의하여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써 거기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가지고, 제3차 노정의 여호수아를 중심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여호수아)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가나안으로) 건너가서 네(모세)가 볼 땅을 그들로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신명기 3장 28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후수아에게도 모세와 함께 있떤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여호수아 1장 5~6절)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생활 40년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찾아 세웠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시어 이스라엘 민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고 명령하셨던 것과 같이(출애굽기 3장 8~10절), 하나님은 광야에서 표류(漂流)하는 40년을 오직 믿음과 충성으로 찾아 세운 여후수아를 모세 대신으로 부르시어,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여호수아 1장 2절)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가 백성의 유사(有司)들을 불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러한 뜻을 전하였을 때(여호수아 1장 10절),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당신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무릇 당신의 시키시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 그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여호수아 1장 16~18절)라고 대답하면서, 그들은 죽기를 맹세하고 여호수아를 따라갈 것을 결의하였다. 이와같이 모세의 사명을 대신하고 나선 여호수아는 초림(初臨)때의 사명을 계승 완성하러 재림(再臨)하실 예수님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모세노정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여호수아의 노정은, 예수님의 영적 복귀의 노정을 영육(靈肉) 아울러 탕감복귀해야 할 그의 재림노정(再臨路程)에 대한 표시적인 노정이 되는 것이다. 모세가 제2차 노정에서 가나안 땅에 정탐(偵探)으로 보냈던 열 두 사람이 있었다(민수기 13장 1~2절). 그들 중 오직 충성으로 그 사명을 완수한 두 사람의 심정의 터전 위에서, 여호수아는 다시 두 사람의 정탐을 여리고성으로 보냈다(여호수아 2장 1절). 그리하여 여리고 성의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두 정탐인은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여호수아 2장 24절)라고 믿음으로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광야에서 출생한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모두 그 정탐인(偵探人)의 말을 믿었으므로, 이것으로써 과거에 40일 정탐을 뜻맞게 세우지 못한 선조들의 죄를 탕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내적 이스라엘이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선 여호수아에게 순종할 것을 죽음으로써 맹세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여호수아와 함께 그 기대(基臺) 위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그들은 반석 샘물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로써, 제2차 노정에서 3대 기적(삼대기적(三大奇蹟))과 10재앙(十災殃)으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었던, 모세를 중심한 그들의 선조들과 같은 입장을 복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이 홍해(紅海)를 거너기 전에 3일노정을 찾아 세웠던 것과같이,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도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3일 조정을 찾아 세웠던 것이다(여호수아 3장 2절). 361 한편 제2차 노정에 있어서 3일노정을 지난 이스라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홍해까지 인도하였던 것과같이,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에 있어서도 그들이 3일노정을 마친 후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표상된 예수님과 성신(聖神)의 상징적 실체인 법궤가 그들을 요단강까지 인도하였던 것이다(여호수아 3장 3절, 여호수아 3장 8절). 그리고 모세를 인도하던 지팡이에 의해서 홍해가 갈라졌듯이, 여호수아를 인도하던 법궤가 요단강의 물 위에 서자 언덕에 넘치던 요단의 흐름이 갈라져서(여호수아 3장 16절), 따라온 이스라엘은 육지와 같이 강을 건너게 되었다(여호수아 3장 17절). 지팡이는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한 하나의 표시체였고, 두 석판과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는 법궤는 예수님과 성신의 상징적인 실체였었다. 그러므로 법궤 앞에서 요단강의 물이 갈라지고이스라엘이 평탄하게 가나안 땅으로 복귀하였다는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과 성신 앞에 몰로 표시된 이 죄악세상(요한계시록 17장 15절)이 선 악으로 분립되어 심판을 받은 후, 모든 성도들이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완성하게 될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때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백성의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 두 사람을 택하고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에서 돌 열 둘을 취하고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 밤 너희의 유숙할 그곳에 두라(여호수아 4장 2~3절)고 하셨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정월(正月) 10일에 요단강에서 올라와서, 여리고의 동편 지경(地境)인 길갈에 진을 치고 요단강에서 가져온 열 두 돌을 거기에 세웠었다(여호수아 4장 20절).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예시(豫示)한 것인가? 이미 논한 바와 같이 돌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상징한다. 따라서 12지파를 대표한 열두 사람이 법궤로 인하여 물이 갈라진 요단강 가운데서 열 두 돌을 받들었다고 하는 것은, 장차 12지파의 대표형으로 부름을 받을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이 죄악세상이 선악(善惡)으로 갈라질 때, 그 곳에서 예수님을 받들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들이 열 두 돌을 받들었다가 가나안땅의 안정된 진(陳)에 한데 모아 놓았을 때, 여호수아는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여호수아 4장 24절)고 말하였다. 이것은 장차 돌로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는 열두 제자가, 한마음 한뜻으로 한 곳에서 하나로 뭉쳐야만,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를 완성하여 하나님의 전능(全能)하심을 영원히 찬양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