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 교리 원문/원리강론/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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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강론 원문 006/008.

원문

야곱이 가는 곳마다 돌단을 쌓았던 것과 같이, 야곱의 열 두 아들의 후손인 열두 지파(支派)의 대표들도 열 두 돌을 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祈禱)의 제단을 쌓아 앞으로 성전(聖殿)을 건축할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니,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열 두 제자(弟子)가 힘을 합하여 예수님을 성전으로 받들어 모셔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후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되지 못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장 19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과연 12제자는 하나 되지 못하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으므로, 성전된 예수님이 십자가(十字架)로써 헐렸다가 3일 만에 부활(復活)하시어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모은 후에야 그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들어 영적인 성전으로 모시게 되었고, 또 재림(再臨)하신 후에야 실체성전(實體聖殿)으로 모실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埃及)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하여 제2차노정을 출발할 때, 그 해 정월(正月) 14일 유월절(逾越節)을 지나고 진군하였던 것과 같이(출애굽기 12장 17~18절), 길갈에 진을 쳤던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도 그 해 정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키고 굳게 닫힌 여리고의 성벽을 향해 진군을 하였다. 땅의 소산(所産)을 먹기 시작하자 40년간이나 내려주시던 만나도 그쳤으므로 그때부터는 인간의 땀으로 된 곡식으로 생활해야만 되었으며, 사탄 도성의 최후의 관문을 뚫는데 있어서도 인간으로서 할 책임을 다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4만의 병사가 선두에 서고, 그 뒤를 따라 일곱 제사장(祭司長)이 일곱 나팔을 불면서 행진하고, 또 그 뒤에는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이 멘 법궤(여호수아 3장 3절)가 따랐으며, 최후선에는 이스라엘 전군이 연달아 진군하였던 것이다(여호수아 6장 8~9절).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이스라엘은 이러한 행군으로 하루에 한 번씩 6일이나 성(城)을 돌았어도 그 성엔 아무런 변동도 없었다. 그들은 인내(忍耐)와 복종(服從)으로 사탄의 침범을 당한 6일의 창조기간(創造期間)을 탕감복귀해야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순종으로 6일을 찾아 세운 후, 제7일에 일곱 나팔을 부는 7명의 제사장(祭司長)이 성벽을 일곱 번 돌면서 7회의 나팔소리를 끝내고 여호수아가 백성을 향하여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고 호령하자, 백성들이 이에 응하여 일제히 큰 소리로 외치니 그 성이 곧 무너졌었다(여호수아 6장). 이러한 노정은 장차 예수님의 권능(權能)과 그의 성도(聖徒)들에 의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가로막혀 잇는 사탄의 장벽이 무너질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성벽은 다시 쌓아서는 아니 될 것이었으므로, 여호수아는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 계자를 잃으리라(여호수아 6장 26절)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적을 공격하게 된 여호수아는 벧호론 싸움에서의 19왕과 메롬격전에서의 12왕을 합하여 모두 31왕을 멸하였으니(여호수아 12장 9~24절), 이것도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이방(異邦)의 왕들을 전부 굴복시키시고 그 백성들을 포섭하여 통일된 지상천국을 건설하실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다.

(3) 메시아를 위한 기대

이스라엘 민족은 정탐(偵探) 40일의 사탄분립 기간을 세우지 못하여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 실패하고, 이 기간을 재탕감(再蕩減)하기 위하여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여 광야에서 40년을 유리(流離)하고 다시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왔다. 이때의 모세는 제3차 노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였고, 이스라엘 민족은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에 따르는 모세의 반석 2타(磐石二打)로 말미암아 이 두 기대는 모두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를 중심하고 애급(埃及)에서 떠난 외적 이스라엘은 모두 광야에서 섬멸(殲滅)되었으나,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은 모세가 세웠던 제2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와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서, 정탐 40일의 사탄분립기간을 믿음과 충성으로 찾아 세웠기 때문에 '성막을 위한 기대'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를 중심한 외적 이스라엘은 모두 광야에서 쓰러지고 말았으나, 성막을 받드는 광야생활 가운데서 출생한 내적 이스라엘은, 모세를 대신한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충성을 다하여 법궤를 모시고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무찌르고 소망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되어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서 이 노정의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조성됨으로써, 아브라함 때에 이루어졌던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는 그의 제물 실수로 인하여 400년 애급고역(埃及苦役)의 탕감노정(蕩減路程)을 지나서야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러나 이미 후편 제1장 제3절 Ⅲ에서 상론(詳論)한 바와 같이, 그 때는 이미 타락인간들이 사탄을 중심하고 애급왕국(埃及王國) 등의 굳건한 왕국을 건설하여, 하늘편의 복귀섭리(復歸攝理)에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는 세워졌을 지라도 그 터전 위에 사탄에 대결할 수 잇는 하늘편의 왕국이 건설되기까지는 메시아가 강림(降臨)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으로 들어간 내적 이스라엘도 또다시 불신으로 흘러, 이 섭리는 다시 연장을 거듭하여 예수님 때까지 밀려 나왔던 것이다.

Ⅲ. 모세 노정이 보여준 교훈

모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구(悠久)한 역사노정에 있어서, 하늘뜻을 받드는 수많은 성도(聖徒)들이 모세에 관한 성서(聖書)의 기록을 읽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모세의 역사에 관한 기록인줄만 알았고,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복귀섭리(復歸攝理)에 관한 어떠한 비밀을 가르쳐주시려 하셨다는 사실을 안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정도로 말씀 하셨을 뿐 모세노정의 근본 의의를 밝히지 않고 돌아가셨던 것이다(요한복음 16장 12절).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가 어떻게 복귀섭리를 위한 공식적인, 또는 전형적(典型的)인 노정을 걸었는가 하는 것을 밝혔다. 이것이 장차 예수님께서 걸으실 길을 그대로 예시(豫示)하신 것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본장 제3절을 대조함으로써 더욱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를 중심한 섭리 하나만을 보아도,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의 절대적인 목적을 지향하여 인류역사를 이끌어 나오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모세 노정은 인간의 책임분담(責任分擔) 수행 여부에 따라서, 그 인간을 중심한 하나님의 예정의 성사 여부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예정도 그 예정을 위하여 세워진 인물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면, 그 인물을 중심하고는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을 예정하시고, 그에게 이것을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애급에서 출발한 이스라엘 민족 중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뿐, 나머지는 모두 광야에서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에 대해서는 간섭치 않으시고 그 결과만을 보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이 그렇게도 놀라운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로써 이스라엘을 이끌어 주셨으나, 모세가 석판을 받는 동안 백성들이 금송아지의 우상(偶像)을 만드는 행동에 대해서나,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치는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 간섭도 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 결과만을 보시고 주관하셨으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자신이 독자적으로 걸어야 할 책이분담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豫定)의 절대성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이 뜻을 예정하시고 이루시려는 것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모세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의 대신으로 여호수아를 세워서라도 한 번 예정하신 뜻은 기필코 이루시고야 마셨던 것이다. 이와같이 하늘이 세우신 아벨적인 인물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가인의 입장에서 충성(忠誠)을 다한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아벨의 사명을 계승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태복음 11장 12절)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 또 한편 큰 사명을 진 사람일수록 그에게 주어지는 시험도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인간 시조(始祖)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배반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인물은 하나님이 돌보지 않으시고 버리시는 시험을 이기고 나서야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이 그를 죽이려 하셨던 시험을 이기고 난 후에야(출애굽기 4장 24절), 이스라엘 민족의 인도자로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사탄이 타락(墮落)을 조건으로 하여 인간을 대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무조건하고 인간에게 은사를 내리실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이 참소(讒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사를 내시려 할 때에는, 그 은사를 전후하여 사탄의 참소를 막기 위한 시험을 반드시 하시는 것이다. 모세노정에서 그 예를 들어보면, 모세에게는 바로궁중 40년의시련을 거친 후에야 제1차 출애급(出埃及)의 은사가 허락되었던 것이고, 또 미디안광야 40년의 시련이 있은 후에야 하나님은 제2차 출애급의 은사를 내리셨던 것이다(출애굽기 4장 2~9절).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는 시험이 있은 후에야(출애굽기 4장 25절) 3대 기적과 10재앙의 이적을 내려 주셨고(출애굽기 7장 10절~12장 36절) 삼일노정의 시련이 있은 후에야(출애굽기 10장 22절)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은사가 있었다(출애굽기 13장 21절). 한편 홍해의 시련을 지난 후에야(출애굽기 14장 21~22절) 만나와 메추리의 은사(출애굽기 16장 13절)가 있었고, 아말렉과의 싸움으로 인한 시련(출애굽기 17장 10절)이 있은 후에야 석판과 성막과 법궤의 은사(출애굽기 31장 18절)가 있었다. 그리고 40년간 광야에서 표류한 시련(민수기 14장 33절)이 있은 후에 반석 샘물의 은사(민수기 20장 8절)가 있었고, 불뱀의 시련을 거친 후에야(민수기 21장 6절) 구리뱀의 은사(민수기 21장 9절)가 있었던 것이다. 모세노정은 위와 같이 여러 가지의 교훈(敎訓)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던 것이다.

제3절 예수를 중심한 복귀섭리 369

천사(天使)를 주관해야 할 아담(고린도전서 6장 3절)이 타락됨으로 인하여 도리어 사탄의 주관을 받아서 지옥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후아담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그 자신이 사탄을 굴복시켜 천국을 복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제1절에서 상술(詳述)한 바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사탄이 예수님과 성도들에게 순종굴복할 리가 없으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원리적인 책임을 지시고 야곱과 모세를 세워 장차 예수님이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본보기노정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야곱은 사탄을 굴복시키는 상징적(象徵的)인 노정을 걸었고, 모세는 사탄을 굴복시키는 형상적(形象的)인 노정을 걸었으며, 예수님은 그 실체적(實體的)인 노정을 걸으셔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사탄을 굴보시켜 나아갔던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사탄을 굴복시킴으로써,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을 완수하셔야 했던 것이다. 신명기 18장 18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가 그들의 형제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고 하신 말씀 중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先知者) 하나라고 하신 것은 바로 모세와 같은 노정을 걸으셔야 할 예수님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워 보여주신 본보기노정을 그대로 걷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상세한 것은 이미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서 논하였지만, 모세를 중심한 3차의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과, 예수님을 중심한 3차의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전체적인 윤곽을 비교 대조하면서, 예수님을 중심한 복귀섭리를 노하여 보기로 하자.

Ⅰ.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中心人物)은 세례 요한이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어떠한 처지에서 그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었던가 ?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모세가 석판(石板)을 깨뜨린 것과 또 반석(磐石)을 두 번 친 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그를 중심한 유대민족이 불신(不信)으로 돌아가면, 석판과 반석의 실체인 예수님의 몸도 칠 수 있다는 조건을 사탄에게 허락하는 표시적인 행동이 되었다는 데 대해서는 이미 모세노정에서 논급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조건을 피하시게 되려면, 그의 강림(降臨)을 위한 터전을 닦아 나아가는 선민(選民)들이 장차 오실 메시아의 형상체인 성전(聖殿)을 중심하고 하나가 되어야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은 항상 불신의 길을 걷게 되어, 장차 오실 예수님 앞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을 성립시켜 왔으므로, 이러한 조건을 막기 위하여 선지자(先知者) 엘리야가 와서 발알의 선지자와 아세라의 선지자를 합하여 850명을 멸하는 등(열왕기상 18장 19절), 사탄분립의 역사(役事)를 하고 승천하였던 것이다(열왕기하 2장 11절). 그러나 엘리야의 전체적인 사명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그는 재림해야 했던 것이다(말라기 4장 5절). 이와같이 엘리야가 다하지 못한 사탄 분립의 사명을 맡아 완수하고, 메시아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하여(요한복음 1장 23절) 엘리야로 왔던 선지자가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마태복음 11장 14절, 마태복음 17장 13절). 이스라엘민족은 애급(埃及)에서 400년 동안, 그들을 인도해 주는 선지자도 없이 고역(苦役)을 당하여 오다가, 그들을 민족적으로 가나안 땅에 인도하여 메시아를 맞게 해 줄 수 있는 인물로서 모세 한 분을 만나게 되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말라기 선지(先知) 이후 메시아강림준비시대(降臨準備時代) 400년 간, 그들을 인도해 주는 선지자도 없이 페르샤, 헬라, 애급, 시리아, 로마 등의 이방(異邦)들에게 고역을 당하여 오다가, 마침내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하여 오시는 메시아 앞으로 그들을 인도해 줄 수 있는 인물로서 세례요한을 만났던 것이다. 애급고역(埃及苦役) 400년 간의 '사탄 분립기대' 위에 섰던 모세가 바로궁중에서 충효(忠孝)의 도를 배웠던 것과같이, 메시아강림준비시대 400년간의 사탄분립기대 위에 섰던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石淸)을 먹으면서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 하늘에 대한 충효(忠孝)의 도를 세웠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祭司長)을 비롯한(요한복음 1장 19절) 유대인들은 모두 세례요한이 메시아가 아닌가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누가복음 3장 15절). 세례요한은 이와같이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세웠으므로,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371

2. 실체기대 372

세례요한은 모세와 같은 처지에 세워졌었기 때문에, 유대민족에게 있어 부모와 자녀의 두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부모의 입장에서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였기 때문에 동시에 자녀의 입자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아벨의 입장도 확립할 수 있었다(본장 제2절 Ⅰ.2). 따라서 세례요한은 모세가 바로궁중에서 40년간의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지나고,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하여 믿음의 기대를 세웠던 입장을 세계적으로 찾아 세운 터 위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모세 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 죽이는 것을 보고 그를 믿게 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시려 하였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사탄 국가인 애급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했던 것이지만, 세례요한을 중심한 유대민족은 로마제국을 떠나 다른 땅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권하(政權下)에 있으면서 그들을 굴복시켜 그 제국(帝國)을 하늘 것으로 복귀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세례요한을 중심한 기사 이적(奇事異蹟)을 보여 주시어,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를 믿게 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시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잉태(孕胎)에 관한 천사의 놀라운 예고와 또 그 부친이 이것을 믿지 않았을 때 벙어리가 되었던 기사, 그리고 그가 출생할 때에 보여주신 이적 등으로 말미암아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산중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고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러라(누가복음 1장 65~66절)고 하신 성경의 말씀대로, 이스라엘민족은 세례 요한의 출생시부터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石淸)으로 목숨을 연명하면서 기도의 생활을 한 그의 빛나는 수도(修道)의 생애로 인하여, 제사장들과(요한복음 1장 19절) 일반 유대인들이(누가복음 3장 15절) 그를 메시아로 오인 할 정도로 그의 신망이 높았던 것이다. 모세가 바로궁중 40년의 탕감기간(蕩減期間)을 마치고 애급인(埃及人)을 살해하였을때 이스라엘 민족이 그의 애국심에 감동되어 그를 믿고 따랐더면, 그들은 홍해(紅海)를 건너거나 광야를 돌지 않고, 또 석판(石板)이나 성막(聖幕)이나 법궤(法櫃)도 필요없이 불레셋의 곧은 길을 통하여서 곧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하나님이 기사 이적(奇事異蹟)으로써 믿음의 대상자로 세워 주신 세례 요한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를 복귀함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이 세운 믿음의 기대 위에서, 그를 메시아와 같이 믿고 따르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요한복음 1장 19절, 누가복음 3장 15절), 그들은 구약시대(舊約時代)를 청산하고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새로운 노정을 출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전편 제4장 제2절에서 상술(詳述)한 바와 같이,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하고서도 그를 의심하는 데 이르렀고(마태복음 11장 3절), 또 자기가 엘리아로 왔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부인하여(요한복음 1장 21절),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았을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반하는 처지에 서게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세례 요한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우는데 있어서의 아벨의 위치를 떠나게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타락성을 벗기위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실체기대'를 이루지 못하게 됨에 따라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어, 이것도 모세 때와 같이 2차 내지 3차까지 연장되게 되었던 것이다.

Ⅱ.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1)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사명을 대신하심

세례 요한은 완성한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 복귀한 아담형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그 때까지의 섭리역사상(攝理歷史上)에서,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왔다 간 모든 중심인물들이 다하지 못하였던 사명을 완전히 이루어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기대 위에서 믿고 따르는 유대민족을 인도하여, 전체적인 섭리의 기대와 함께 예수님께 인계해 드린 후, 믿음과 충성으로 그를 따르고 모셔야 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도 모르고 행한 일이었지만, 요단강에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준 것은(마태복음 3장 16절)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쌓아온 모든 것을 예수님 앞에 인계하는 하나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세례 요한은 점점 예수님을 의심하고 배신하는데 이르렀으므로, 세례 요한을 메시아와 같이 믿고 따르던(누가복음 3장 15절) 유대인들은 자연히 예수님을 불신하는 처지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전편 제4장 제2절). 따라서 세례 요한이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위하여 세웠던 믿음의 기대는 사탄의 침범을 당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예수님 자신이 세례 요한의 사명을 대신하여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함으로써,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禁食)을 하시면서 사탄을 분립하신 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대신 입장에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375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로 영광의 주(主)로 오셨으므로, 원칙적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고린도전서 2장 8절). 그러나 그의 앞길을 곧게 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던 세례 요한(요한복음 1장 23절,누가복음 1장 75절)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당했어야 할 고난을 예수님 자신이 당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면서도 세례 요한 대신으로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을 출발하셨던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자기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밝히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것이다(마태복음 16장 20절).

(2) 예수님의 광야 40일 금식기도와 3대시험 375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禁食祈禱)와 3대시험(三大試驗)에 대한 먼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을 알아야겠다.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반석(磐石) 앞에 섰던 모세가 불신(不信)으로 돌아가 그것을 두 번 쳤기 때문에, 예수님을 상징하는 그 반석(고린도전서 10장 4절)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후일 메시아로 오셔서 모세노정을 본보기로 걸어야 할 예수님의 노정에 있어서도, 예수님의 앞길을 곧게 하기 위하여 오게 될 세 례요한이 불신으로 돌아가게 되면 반석되시는 예수님 앞에도 사탄이 침범할 수 있다는 표시적인 행동이 되었다. 따라서 이 행동은 메시아에 앞서 올 세례 요한을 중심한 믿음의 기대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다는 표시적인 행동이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반석을 두 번 친 모세의 행동은, 바로 세례 요한이 불신으로 돌아가게 될 때에 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예수님 자신이 세례 요한의 대신 입장에서 광야로 나아가 40일 금식과 3대 시험(三大試驗)을 치르지 않을 수 없게 한 원인(遠因)이 되었었다. 375 사실상 세례 요한이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전편 제4장 제2절 Ⅲ), 그가 세웠던 '믿음의 기대'에는 사탄이 침범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근인(近因)이 되어 예수님은 몸소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40일 사탄분립의 기대'를 세움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광야에서의 40일 금식과 3대 시험을 겪지 않을 수 없으셨던 것이다. 그러면 사탄이 3대시험을 하게 된 목적은 어디 있는가? 마태복음 4장 1절 내지 10절을 보면, 사탄은 예수님에게 돌을 보이면서 그것으로써 떡이 되게 하라고 하였고, 또 그를 성전(聖殿) 꼭대기에 세우고 자기에게 경배하면 온 세상을 다 주겠다는 등 세가지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서 그 개성의 완성, 자녀의 번식, 그리고 피조세계(被造世界)에 대한 주관 등 세 가지의 축복(祝福)을 하셨다(창세기 1장 28절). 그러므로 인간이 이것을 완성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인 것이다. 그런데 사탄이 인간을 타락시킴으로써 이 세 가지 축복을 이루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그 창조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약속하셨던 이 세 가지의 축복을 복귀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시려고 오셨기 때문에, 사탄은 축복 복귀의 길을 막기 위한 그 세 가지의 시험으로써 창조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377 그러면 예수님은 이 3대 시험(三大試驗)을 어떻게 받으시고 어떻게 이기셨는가? 우리는 먼저 여기에서 사탄이 어떻게 되어 예수님을 시험하는 주체로 설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불신과 모세의 실수로 말미암아, 사탄이 예수님과 성신(聖神)을 상징하는 두 석판(石板)과 반석(磐石)을 취함으로써 그는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의 주체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밝혔다. 그런데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이르러, 사탄을 분립하여 메시아의 갈 길을 곧게 하기 위한 사명자로 왔던 세례 요한(요한복음 1장 23절)이 그 책임을 다 하지 못하게 되자 모세 때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불신(不信)과 불순종(不順從)으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미 모세노정에서 예시(豫示)하신 대로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주체적인 입장에 서게 된 것이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 시험(試驗)의 경위를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예수님이 광야에서 밤낮 40일을 금식(禁食)하시고 난 뒤, 사탄이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태복음 4장 3절)는 시험을 하였다. 그런데 모세가 광야에서 40일 사탄분립기대 위에 섰던 석판(石板)을 깨뜨리고 반석(磐石)을 두 번 쳤던 행동과, 세례요한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그 돌을 사탄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찾기 위하여 예수님도 광야로 나아가 40일을 금식하여 사탄을 분립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사탄은 예수님이 돌을 찾기 위하여 광야에 나오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옛날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광야노정에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불신으로 흘러 돌을 사탄이 가지게 되었던 것과 같이, 이제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광야노정(曠野路程)에 있는 예수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굶주린 가운데 있으니 어서 불신으로 돌아가 그 돌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것으로 떡이나 되게 하여 주린 배를 채우면, 그 돌은 사탄이 영원히 가지겠다 하는 뜻이었다. 378쪽 이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복음 4장 4절)고 하셨다. 원래 사람은 두 가지의 영양소로써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 즉 자연계로부터 섭취하는 영양소로서는 육신(肉身)이 살아가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는 영인체(靈人體)가 살아 가는 것이다. 그런데 타락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요한복음 1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지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써 그 영인체 들이 살아 간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6장 48절을 보면,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고 말씀하시면서 계속하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한복음 6장 53절)고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떡을 먹고 그 육신이 살아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써 온전한 삶이라고는 할 수 없다.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말씀이 육신으로 화하여 모든 사람의 생명의 양식으로 오신 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지 않으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모세가 석판(石板)의 뿌리 되는 반석(磐石)을 두 번 침으로써 그 돌은 사탄의 소유로 돌아갔었다. 이렇게 사탄의 것이 되어진 그 돌은 바로 모세가 잃어버린 그 반석이었고 또 그 석판이었으므로, 그 돌은 결국 사탄의 시험을 받고 있는 예수님 자신을 상징한 것이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장 17절에 돌을 그리스도로 상징하고,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한 것을 보아서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사탄의 첫째 시험에 응한 예수님의 대답은 결국 내가 지금 아무리 굶주린 가운데 있을지라도, 육신(肉身)을 살리는 떡이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이 너로부터 시험을 받고 있는 자리에서 승리하고 나서 온 인류의 영인체(靈人體)를 살려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이 되어야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시험을 받아 이김으로써, 개성을 완성한 메시아의 입장을 찾아 세우는 시험이었던 것이다. 379쪽 이처럼 원리적인 입장에서 뜻을 대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태도에 사탄은 지고 말았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첫번 시험에 승리하여 개성(個性)을 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제1축복(第一祝福) 복귀의 기대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聖殿)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마태복음 4장 5~6절)고 하였다. 그런데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셨고, 또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는 성도(聖徒)들을 일러 하나님의 성전이라고도 하였으며, 고린도전서 12장 27절에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지체(支體)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님은 본성전(本聖殿)이요 성도들은 그 분성전(分聖殿)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공으로 오셨으므로, 사탄도 그 격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웠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한것은, 주인공의 위치에서 떨어져 타락한 인간의 입장으로 돌아가면 자기가 예수님 대신으로 성전 주관자(主管者)의 위치를 점령하겠다는 뜻이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태복음 4장 7절)고 대답하셨다. 380쪽 원래 천사(天使)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의 주관을 받도록 창조된 것이므로 타락한 천사는 마땅히 예수님의 주관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천사가 예수님 대신으로 성전주관자의 입장에 서려 하는 것은 비원리적(非原理的)인 행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비원리적인 행동으로 원리적인 섭리를 하시는 하나님의 몸 되신 예수님을 시험함으로써,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된다. 더구나 예수님은 제1차 시험에 승리하여 개성을 복귀한 실체성전(實體聖殿)으로서 성전의 주인공의 입장을 확립하셨기 때문에, 사탄의 시험을 받을만한 아무런 조건도 없으니. 이제는 예수님 자신을 시험하지 말고 물러가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하여 둘째 시험에 승리함으로써, 본성전이시고 신랑이시며 또한 인류의 참부모로 오신 예수님은, 모든 성도들을 분성전과 신부와 참자녀의 입장으로 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워 하나님의 제2축복(第二祝福) 복귀의 기대를 조성하셨던 것이다. 다음으로 사탄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이끌고 가서 천하만국(天下萬國)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복음 4장 9절)고 시험하였다. 원래 아담이 타락됨으로 인하여 만물세계(萬物世界)에 대한 주인공의 자격을 상실하고 사탄의 주관을 받게 됨에 따라, 사탄이 아담의 대신으로 만물세계의 주관자로 서게 되었다(로마서 8장 20절). 그런데 완성한 아담격으로 오신 예수님은 고린도전서 15장 27절에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피조세계(被造世界)의 주관자이시었다. 따라서 사탄도 이러한 원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산 위로 인도하여 만물의 주인공의 자리에 세워 놓고, 태초에 아담이 사탄에게 굴복한 것과 같이 제2 아담된 예수님도 사탄에게 굴복하라고 시험했던 것이다. 381쪽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태복음 4장 10절)고 대답하셨다. 천사(天使)는 원래 부리는 신(神)으로서(히브리서 1장 14절),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경배(敬拜)하고 섬기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타락한 천사인 사탄도 그에게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 원리요, 따라서 사탄은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의 몸으로 나타난 예수님에게도 굴복하고 경배하며 섬기는 것이 원리라는 것으로 예수님은 대답하셨던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은 이미 두 번의 시험에 승리하여 하나님의 제1, 제2 축복을 복귀할 수 있는 기대(基臺)를 조성하셨으므로 그 기대 위에서 하나님의 제3축복을 복귀하여 만물세계를 주관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니, 이미 승리의 기대 위에 선 만물세계를 걸어 놓고는 더 이상 시험받을 여지가 없다는 뜻으로 원리적인 대답을 하셨다. 이렇듯 예수님은 셋째 시험에도 승리하시어, 피조세계(被造世界)에 대한 주관성을 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제3축복(第三祝福) 복귀의 기대를 조성하셨다.

(3) 40일 금식과 3대 시험으로 사탄을 분립한 결과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인간이 정(正) 분(分) 합(合) 3단계의 과정을 거치어 4위기대(四位基臺)를 이루어야만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 4위기대를 이루어 나오는 과정에서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창조목적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제까지의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도 역시 3단계까지 연장되어 내려오면서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세워가지고, 상실되었던 모든 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코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면서도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3단계의 시험에 승리하여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세우셨다. 이것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역사노정에서, 3단계로 연장하시면서 '40일 사탄부립의 기대'로써 찾으시려 했던, 다음과 같은 모든 조건들을 일시에 탕감복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역사노정에서, 3단계로 연장하시면서 '40일 사탄 분립의 기대'로써 찾으시려 했던, 다음과 같은 모든 조건들을 일시에 탕감복귀하셨던 것이다. 즉 첫째로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셨으므로, 그 때까지의 섭리노정(攝理路程)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하여 찾아 세우려던 모든 것을 탕감복귀하셨던 것이다. 즉 가인 아벨의 헌제,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의 헌제, 모세의 성막, 솔로몬의 성전 등을 탕감복귀하셨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아담 이후 4천년 간의 종적인 역사노정에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中心人物)들의 실수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모든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횡적으로 일시에 탕감복귀하시었다. 즉 노아의 심판 40일, 모세의 3차의 40년기간과 2차의 40일 금식, 정탐 40일, 이스라엘의 광야노정 40년, 그리고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400년, 애급고역 400년, 그리고 그 후 예수님 때까지에 있어졌던 모든 40수의 기간을 전부 탕감복귀하셨던 것이다. 383쪽 둘째로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메시아의 입장에서게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3대축복(三大祝福)을 이루어 4위기대(四位基臺)를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헌제(獻祭)를 이룬 실체시요, 또한 석판(石板)과 성막(聖幕)과 법궤(法櫃)와 반석(磐石)과 성전(聖殿)의 실체로 설 수있게 되셨던 것이다.

2. 실체기대

예수님은 인류의 참 부모로 오셔서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셨기 때문에, 부모의 자리에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동시에, 자녀의 자리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아벨의 위치도 확립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세가 미디안광야에서 40년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지남으로써,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였던 입장을 세계적으로 탕감복귀한 입장에 서게 되셨던 것이다.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3대 기적(三大奇蹟)과 10재앙(十災殃)으로 그의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그런데 그 후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인하여 무위(無爲)로 돌아간 애급에서의 3대 기적과 10재앙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석판 성막 법궤의 3대 은사와 십계명을 세우는 것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던 것은 이미 모세노정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석판 성막 법궤의 3대 은사와 십계명(十誡命)의 실체이시기 때문에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예수님 자신이 말씀과 기사 이적(奇事異跡)으로써 그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가인의 처지에 있었던 유대민족이, 이 '출발을 위한 섭리'에 의하여, 세례요한의 사명을 가지고 아벨의 자리에 서 있는 예수님을 믿고 모시고 따르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보건'을 세워가지고 '실체기대(實體基臺)'를 복귀하게 됨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었더면 예수님은 이 기대 위에서, 세례요한의 입장으로부터 메시아로 서게 되고, 온 인류는 그에게 접붙임을 받아(로마서 11장 17절) 중생(重生)되어 원죄를 벗고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 이룸으로써,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하여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게 되었을 것이었다. 384쪽

3.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세례요한의 불신(不信)으로 말미암아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섭리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사명을 대신하여 몸소 광야 40일의 고난을 당하시면서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바 3대 시험(삼대시험(三大試驗))에서 예수님에게 져버린 사탄은 예수님 앞을 얼마 동안 떠났다고 하였다(누가복음 4장 13절). 사탄이 얼마 동안 떠났다는 말은, 아주 떠난 것이 아니라 다시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었다. 과연 사탄은 불신으로 돌아간 제사장(祭司長)과 교법사(敎法師) 등을 중심한 유대민족, 특히 예수님을 판 제자 가룟 유다를 통하여 다시 예수님 앞에 대립하고 나섰던 것이다. 385쪽 이와같이 유대민족의 불신으로 인하여,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섭리를 위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룰 수 없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이 섭리를 위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할 수 없게 되어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Ⅲ.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

1. 예수를 중심한 영적 가나안 복귀노정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 관한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상세히 말한 바와 같이,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대상은 메시아의 상징체인 성막(聖幕)이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모두 불신으로 흘러갔을 때에도, 이 성막만은 모세가 금식 40일기간으로 세웠던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 여호수아에 의한 정탐 40일 사탄분립기간으로 조성되었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 계속 그 뜻을 받들어 나온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그대로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유대민족의 신앙의 대상은 성막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이었는데, 그의 제자들마저 불신으로 돌아갔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한복음 3장 14절)라고 하신 말씀대로, 그의 육신을 십자가(十字架)에 내주시어 죽음의 길을 가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유대민족은 영육(靈肉) 아울러 신앙의 대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과 같이 직접 실체노정으로써 출발하지 못하고, 제2 이스라엘인 기독교 신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신앙의 대상으로 세워가지고, 먼저 영적노정으로써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성전(예수님)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장 19절)고 말씀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치 여호수아가 모세의 사명을 계승하여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완성하였던 것과 같이, 예수님은 재림(再臨)하셔서 초림(初臨) 때의 사명을 계승하시어,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영육 아울러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을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처음 오셨을 때와 같이 육신을 쓰시고 다시 오시지 않으면, 처음 오셨을 때에 이루려 하셨던 복귀섭리의 목적을 계승 완수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1) 영적인 믿음의 기대 386쪽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배반함으로 인하여,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40일 금식으로 세웠던 '믿음의 기대'는 사탄에게 내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의하여 그 육신을 사탄에게 내주신 후에는, 영적인 세례요한 사명자의 입장에서, 40일 부활기간(復活期間)으로 사탄분립의 영적기대를 세우심으로써,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영적 노정을 위한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40일의 부활기간(復活期間)을 세우시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안 사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어떻게 세우셨던가? 예수님이 메시아로 나타나실 때까지는 하나님은 유대 선민(選民)들과 함께 계셨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아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배반한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들 선민을 사탄에게 내주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로부터 배척당한 독생자(獨生子) 예수님과 함께, 선민을 버리고 돌아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신 목적은 선민을 비롯한 전인류(全人類)를 구원(救援)하시려는데 있었으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주시고서라도 전 인류를 구원하려 하셨던 것이다. 한편 또 사탄은 자기편에 서게 된 선민을 비롯한 전 인류를 모두 하나님에게 내놓게 되더라도, 메시아인 예수님 한 분을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4천년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제1목적이 메시아 한 분을 세우시려는데 있었으므로, 사탄은 그 메시아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전섭리(全攝理)의 목적을 깨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되어 하나님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사탄편으로 돌아간 유대민족을 비롯한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탕감조건(蕩減條件)으로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주시게 되었던 것이다. 사탄은 자기의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써, 그가 4천년 역사노정을 두고 목적해 왔던 바를 달성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주신 하나님은 그 대가로서 이스라엘을 비롯한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시게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여서 죄악 인간(罪惡人間)들을 구원하실 수 있게 되었는가? 사탄이 이미 그의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여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탕감복귀원칙(蕩減復歸原則)에 의하여 하나님에게도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입장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사탄의 최대 실권행사(實權行事)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최대 실권행사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탄이 그의 최대 실권행사로서 예수님을 죽인 것에 대한 탕감조건으로 하나님도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시어 죽은 예수님을 부활(復活)시키시고, 온 인류로 하여금 그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접붙이어(로마서 11장 24절) 중생(重生)케 하심으로써 구원을 받도록 하신 것이었다. 387쪽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잘 아는 바와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 같이 생활하시던 그러한 예수님은 아니시었다. 그는 이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리에 계셨기 때문에 육안(肉眼)으로는 볼 수 없는 분이었다. 그는 제자들이 문을 닫고 있는 방 안에도 문득 나타나셨는가 하면(요한복음 20장 19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갑자기 나타나시어 오랫동안 동행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지 못하였으며(누가복음 24장 15~16절), 이와같이 나타나셨던 예수님은 또 어디론가 갑자기 사라져버리기도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육신을 제물(祭物)로 십자가에 내주신 후 이렇듯 부활 40일의 사탄분립기간으로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세우심으로써,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하셨다.

(2) 영적인 실체기대

예수님은 영적(靈的)인 세례요한 사명자의 처지에서, 영적인 부활 '40일 사탄분립기대'를 조성하심으로써 영적 참 부모의입장에서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동시에, 또 영적인 자녀의 입장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세계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영적인 아벨의 위치도 확립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광야 표류(曠野漂流)40년의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지남으로써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였던 것과 같이,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조성할 수 있게 되었다. 모세 때에는 '성막을 위한 기대'를 세우게 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그러나 부활(復活)하신 예수님은 갈릴리에 흩어졌던 제자들을 거두어 모으시고, 자신이 석판과 성막과 법궤의 영적인 실체가 되어, 제자들에게 기사(奇事)와 이적(異蹟)의 권능을 주심으로써(마태복음 28장 16~18절)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여기에서 가인의 입장에 선 성도(聖徒)들은, 이 '출발을 위한 섭리'에 의하여 영적인 세례요한 사명자로서 영적인 아벨의 입장에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모시고 따라 '타락성을 벗기 위한 영적인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영적인 실체기대를 복귀하게 된 것이다.

(3) 메시아를 위한 영적인 기대 390

예수님이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가신 후에 남은 열한 제자는 모두 힘없이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그들을 다시 한 곳으로 거두어 모으시고, 영적 가나안 복귀의 새로운 섭리를 시작하셨던 것이다. 제자들은 가룟유다 대신으로 맛디아를 택하여 12제자의 수를 채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숨을 바쳐 믿고 모시고 따름으로써, '영적인 실체기대'를 조성함에 따라 '메시아를 위한 영적인 기대'를 복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 기대 위에서, 영적인 세례요한 사명자의 입장으로부터 영적인 메시아의 입장을 확립하고 성신(聖神)을 복귀함으로써, 영적인 참 부모가 되어 중생(重生)의 역사를 하시게 되었다. 즉 사도행전 2장 1절 내지 4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오순절(五旬節)에 성신이 강림하신 후,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적인 참아버지로서, 영적 참어머니 되신 성신과 합하여 역사하심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접붙이게 하시어 영적 중생의 역사를 하시기 때문에, 영적 구원섭리만을 이루시게 되었다(전편 제4장 제1절 Ⅳ).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권내에는 사탄의 영적 참소조건(讒訴條件)이 청산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영적인 면에 있어서의 사탄의 불가침권(不可侵權)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타락인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와 하나가 되어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그의 몸은 여전히 사탄의 침범을 당한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에, 육적 구원은 의연(依然)히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그와 함께 영적으로 사탄 불가침권내에 있게 됨으로써, 사탄의 영적인 참소조건을 면하고 영적 구원만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영적 가나안 복귀

기독교 신도들은 '메시아를 위한 영적인 기대' 위에서 영적인 메시아로 서게 된 예수님을 믿고 모심으로써, 영적 가나안 복귀만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적 가나안 복귀의 혜택권내에 있는 성도들의 육신은 십자가(十字架)에 의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예수님의 육신과 같은 처지에 서게 됨으로써,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나 다름 없이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원죄(原罪)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로마서 7장 25절), 성도들도 도한 예수 재림을 위한 사탄 재분립(再分立)의 노정을 걷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전편 제4장 제1절 Ⅳ). 모세를 중심하고 섭리하셨던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성막이상(聖幕理想)은,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적 실체성전(實體聖殿)을 중심하고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지성소(至聖所)와 성소(聖所)는 그것들이 상징한 바 예수님과 성신(聖神), 예수님의 영인체와 육신이 영적 실체로 이루어졌고, 속죄소(贖罪所)의 이상(理想)은 예수님과 성신의 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짐으로써, 거기에 하나님이 나타나시어 말씀하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는 그 속죄소에서, 인간시조가 타락된 후에 그 앞을 가로막았던 그룹을 좌우로 갈라 세우고, 법궤 안으로 들어가 생명나무 되신 예수님을 맞이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로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히브리서 9장 4~5절). 이와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의 재림은 모세노정을 통하여 보더라도 그것이 기정적(旣定的)인 섭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2. 재림주님을 중심한 실체적 가나안 복귀노정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이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과 같이 실체노정(實體路程)으로 출발하지 못하고 영적노정으로 출발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는 이미 위에서 논술한 바이다. '메시아를 위한 영적인 기대' 위에서, 영적 메시아로 계시는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출발한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영적 섭리는, 2천년의 유구한 역사노정(歷史路程)을 지나서, 오늘날 세계쩍으로 그 영적 판도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치 모세의 영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여호수아가 대신하여 실체노정으로 걸어서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완수하였던 것과같이, 예수님은 지금까지의 영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재림(再臨)하셔서 실체노정으로 걸으시어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완수하심으로써, 지상천국을 이루셔야 하는 것이다. 392 이와같이 재림주님은 초림(初臨) 때에 실체로서 이루시려던 지상천국을 그대로 이루셔야 하기 때문에, 실체인간으로 지상에서 탄생하셔야 되는 것이다(후편 제6장 제2절 Ⅱ 참조). 그러나 재림주님은 초림 때의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을 탕감복귀하셔야 하기 때문에, 마치 그의 초림 때에 유대임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영적 복귀섭리의 고난(苦難)의 노정을 걸으셨던 것과 같이, 재림때에 있어서도 만일 제2 이스라엘인 기독교 신도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그 영적인 고난의 노정을 다시 실체로써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러나 그(예수님)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 버린 바 되어야 할찌니라(누가복음 17장 25절)고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초림 때에, 그를 위하여 소명(召命)되었던 제1 이스라엘 선민을 버리시고 기독교 신도들을 제2 이스라엘 선민으로 세워가지고 새로이 영적인 섭리노정을 이루어 나올 수밖에 없으셨던 것과같이, 재림 때에도 기독교 신도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그들을 버리시고 새로이 제3 이스라엘을 세우시어 실체적인 섭리노정을 이루어 나아가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에도 처음 오셨을 때와 같이, 그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한, 세례 요한의 사명(요한복음 1장 23절)을 가지고 올 선구자(先驅者)들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면, 재림주님 자신이 또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섭리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실체적으로 만드셔야 하기 때문에, 고난의 길을 걷지 않으실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재림주님은 아무리 고난의 길을 걸으신다 하여도, 초림(初臨) 때와 같이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류의 참부모님을 세우시어(전편 제7장 제4절 Ⅰ.1)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시려는 섭리는, 아담에서 예수님을 거치어 재림주님에 이르기까지 세번째인 재림 때에는 당연히 그 섭리를 이루시게 되어 있으며, 더구나 후편 제4장 제7절에 논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 이후 2,000년의 영적 복귀섭리는, 그를 위한 사회 조성을 위하여 민주주의시대(民主主義時代)를 이루어 놓았기 때문이다. 393쪽 예수님은 그 초림때에는 유대교의 반역자(反逆者)로 몰려서 돌아가셨지만, 그가 재림하시는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설혹 그가 이단자(異端者)로 몰리우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하여 죽음의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주님이 아무리 고난의 길을 걸으신다 할지라도, 그가 세우시는 실체적인 '믿음의 기대' 위에 그를 절대로 믿고 따라 모시는 성도들이 모여서,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실체노정(實體路程)을 위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함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실체적인 기대'를 이루게 될 것만은 확실하다.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모세 때에는 반석(磐石)을 중심하고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게 되어 있었고, 여호수아 때에는 반석보다 더 내적인 그 샘물을 중심하고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초림 때에는 기사이적(奇事異跡)으로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지만, 재림 때에는 그의 내적인 '말씀'을 중심하고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전편 제3장 제3절 Ⅱ에서 논한 바와 같이, '말씀'으로 창조된 인간이(요한복음 1장 3절) 타락으로 인하여 '말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은 이 목적을 다시 이루시기 위하여 '말씀'의 외적인 조건을 세우시어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이루어 나오시다가, 섭리역사의 종말에 이르러는 '말씀'의 실체되신 예수님(요한복음 1장 14절)을 다시 보내시어 '말씀'을 중심하고 구원섭리를 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심정의 인연을 중심하고 보면, 하나님은 영적인 부모로서 인간을 실체의 자녀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최초로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의 형상적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창조된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제1 실체대상으로서 인류의 부모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부부를 이루고 자녀를 번식하여, 부모의 심정과 부부의 심정과 자녀의 심정으로 결뉴(結紐) 가정을 이루게 되어 있었던 것이니, 그것이 바로 삼대상목적(三代象目的)을 이룬 사위기대(四位基臺)인 것이다(전편 제1장 제2절 Ⅲ 참조). 394쪽 이와같이 하나님은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은 직계(直系)의 자녀들로써 지상천국을 이루시려 하셨다. 그러나 이미 타락론(墮落論)에서 자세히 말한 바와 같이, 인간시조가 천사장(天使長)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음으로 인하여, 온 인류는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아서 모두 마귀의 자식이 되고 말았다(마태복음 3장 7절, 마태복음 23장 32절, 요한복음 8장 44절). 그리하여 인간시조는 하나님과 혈통관계가 끊어진 입장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이것이 바로 타락이다(전편 제2장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은, 이와 같이 하나님과 혈통관계가 끊어진 타락인간을 복귀시켜 가지고, 하나님 직계의 혈통적 자녀로 세우시려는데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비밀을 성서(聖書)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위에서 논한바와 같이, 타락되어 살육행위(殺戮行爲)를 자행했던 아담가정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 때에 이르러, 그의 둘째 아들로서 아벨의 입장이었던 함은 그의 실수로 인하여 비록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노아가 충성을 다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종들의 종'(창세기 9장 25절)의 입장에 서게 됨으로써 하나님과 간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 전 시대(舊約前時代)에 있어서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였다. 395쪽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이르러, 그는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선민(選民)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들은 비로소 하나나미의 종의 입장으로 복귀하게 되었던 것이니(레위기 25장 55절), 이것이 바로 구약시대(舊約時代)에 있어서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였다. 예수님이 오신 후,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세우신 그의 '믿음의 기대' 위에 섰던 제자들은, 비로소 구약시대의 종된 입장에서 양자(養子)의 입장으로 복귀되었었다. 그들이 하늘의 직계의 혈통적 자녀가 되기 위하여는, 예수님에게 절대로 순종하여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룸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여, 그 기대 위에 선 예수님에게 영육(靈肉) 아울러 접붙임을 받아서(로마서 11장 17절) 그와 일체를 이루어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혈통적 직계의 원죄(原罪) 없는 독생자(獨生子)로 오셔서, 타락한 온 인류를 그에게 접붙이어 한몸이 되게 하심으로서, 타락한 온 인류를 그에게 접붙이어 일체가 되게 하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원죄를 벗고 하나님 직계의 혈통적 자녀로 복귀케 하시기 위하여 오셨던 것이다. 예수님과 성신(聖神)이 인류의 참 부모로서, 이와 같이 타락인간을 접붙이어 원죄를 벗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창조본연(創造本然)의 혈통적인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을 우리는 중생(重生)이라고 한다(전편 제7장 제4절 참조). 그러므로 예쑤님은 돌 감람나무 된 타락인간으로 하여금 접붙이게 하시기 위하여 참 감람나무의 중심으로 오셨던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제자들마저 불신으로 돌아갔으므로,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메시아의 자리에 서 보지도 못하고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부활(復活)하신 예수님이 영적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부활 40일 사탄분립기간으로써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세우신 후, 회개하고 돌아온 제자들의 신앙(信仰)과 충절(忠節)로 말미암아 영적인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세워짐으로써, 비로소 '메시아를 위한 영적인 기대'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영적인 기대 위에 영적인 메시아로 서신 예수님에게 영적인 접붙임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성도(聖徒)들은 영적인 자녀로서만 설 수 있게 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예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영적 복귀섭리에 의한 하나님과 타락인간과의 관계인 것이다. 396쪽 그러므로 예수님 이후의 영적 부활섭리는 마치 하나님이 영계(靈界)를 먼저 창조하셨던 것과 같이 그러한 형의 영적세계를 먼저 복귀하여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타락인간은 아직 영적으로만 하나님의 대상으로 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잘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육적으로 내려오는 원죄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탄의 혈통을 벗어나지 못한 점에서는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성도들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전편 제4장 제1절 Ⅳ). 이와 같이 기독교 신도들은 하나님 앞에 혈통이 다른 자녀이기 때문에 양자(養子)가 되는 것이다. 일찍이 바울이, 성령(聖靈)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도 탄식하여 양자 되기를 기다린다고 한 이유는 실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로마서 8장 23절). 그러므로 예수님은 온 인류를 하나님의 혈통적 직계의 자녀로 복귀케 하시기 위하여 재림(再臨)하셔야 한다. 따라서 그는 초림(初臨) 때와 같이 육신을 쓰시고 지상에서 탄생하셔서 초림 때의 노정을 다시 걸으심으로써 그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재림 예수님은 '말씀'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에 의하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실체적으로 조성하시어, 그 기대 위에서 온 인류를 영육(靈肉) 아울러 접붙이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원죄를 벗고 하나님의 혈통적 직계의 자녀로 복귀케 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초림 때에,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의 중심인물이었던 야곱의 입장을 탕감복귀하시기 위하여, 세 제자를 중심한 12제자를 세우심으로써 가정적인 기대를 세우셨고, 다시 70문도를 세우심으로써 그 기대를 종족적인 기대에로 넓히려 하셨던 것과 같이, 그는 재림하셔서도 그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실체적으로 가정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 세계적 천주적인 것으로 복귀하시어, 그 기대 위에 천국을 이루는데까지 나아가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장차 예수님이 탄생하시어 천국 건설의 목적을 빨리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제1차 이스라엘 선민을 세우심으로써 그 터전을 예비하셨었으나, 그들이 배반함으로 인하여 기독교 신도들을 제2 이스라엘로 세우셨던 것과 같이, 만일 재림(再臨) 예수님의 천국건설 이상을 위하여 제2 이스라엘로 세워진 기독교 신도들이 또 그를 배반하면, 하나님은 부득이 그 제2 이스라엘 선민을 버리시고, 새로이 제3 이스라엘 선민을 택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末世)에 처한 기독교 신도들은 예수님 초림(初臨) 당시의 유대민족들과 같이, 가장 행복된 환경 가운데 있으면서도 한편 가장 불행하게 될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Ⅳ. 예수님의 노정이 보여준 교훈

첫째로 여기에서도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豫定)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뜻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시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자신이 그의 사명을 대신하시면서까지 기필코 그 뜻을 이루시려 하셨고, 또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지상천국(地上天國)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예수님은 재림하셔서까지 이 뜻을 절대적으로 이루려 하시는 것이다. 398 다음으로는 택함 받은 어느 개인이나 민족을 중심한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즉 하나님은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어떤 인물이나 어떤 민족을 세우셨을지라도, 그들이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하지 못하게 되면, 반드시 새로운 사명자를 세우시어 그 일을 잇게 하셨던 것이다. 즉 예수님은 그의 수제자(首弟子)로 세례 요한을 택하셨었으나, 그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신으로 베드로를 택하셨고, 또 가룟유다를 12제자의 하나로 택하셨던 것이었으나, 그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의 대신으로 맛디아를 택하셨던 것이다(사도행전 1장 25절). 한편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유대민족을 택하셨었으나, 그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자, 그 사명을 이방인(異邦人)들에게로 옮기셨던 것이다(사도행전 13장 46절, 마태복음 21장 33~43절). 이처럼 아무리 뜻 성사를 위하여 택함을 받은 존재라 할지라도, 그를 중심한 뜻의 성사는 결코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에 대해서는 간섭치 않으시고, 그 결과만을 보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세례 요한이나 가룟 유다가 불신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은 그것을 모르시지 않았을 것이며, 또 그것을 못하게 하실 수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의 신앙에 대하여는 일체 간섭치 않으시고 그 결과만을 보고 주관하셨던 것이다. 399 다음으로 큰 사명을 맡은 인물일수록, 그에게 오는 시련도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아담이 하나님을 불신으로 버렸기 때문에, 후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이 그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는, 아담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입장에서, 오히려 믿음을 세워 그의 타락 전 입장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셔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까지도 받으셔야 했었고 또 십자가상(十字架上)에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일까지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27장 46절).

제3장 섭리역사의 각 시대와 그 연수의 형성

제1절 섭리적 동시성의 시대

동시성(同時性)의 시대(時代)란 무엇인가? 인류역사의 과정을 살펴보면 비록 그 정도와 범위의 차이는 있지만, 지나간 어느 시대에 있었던 것과 흡사한 모양의 역사적 과정이 뒷시대에 반복되고 있는 사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사가(史家)들은 이러한 역사적 현상을 보고 역사노정(歷史路程)은 어떠한 동형(同型)의 나선상(螺線上)을 돌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어떤 시대가 그 전시대(前時代)의 역사노정과 비슷한 모습으로 되풀이되는 경우, 그러한 시대들을 말하여 '섭리적 동시성의 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시성의 시대를 일러 섭리적 동시성의 시대라고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욱 자세히 설명하겠거니와, 이 현상이 본래 하나님의 탕감복귀섭리(蕩減復歸攝理)에 기인(基因)하고 있기 때문이다. 400 그러면 섭리적 동시성의 시대는 어찌하여 생기게 되는가? 우리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어 나오는 과정에서 되어진 모든 사실들이 역사를 형성해 나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는 섭리노정을 걸어가던 어떠한 중심인물(中心人物)이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할 때에는, 그 인물을 중심한 섭리의 한 시대는 끝나고 만다. 그러나 그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豫定)은 절대적이기 때문에(전편 제6장), 하나님은 다른 인물을 그의 대신으로 세워,'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새 시대를 다시 세워 나아가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 새 시대는 그 전시대의 역사노정을 탕감복귀하는 시대가 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똑같은 노정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되어 섭리적인 동시성의 시대는 형성되는 것이다.401쪽 그런데 복귀섭리(復歸攝理)를 담당한 인물들은 그 전 시대의 종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들을 횡적으로 일시에 탕감복귀해야 되므로, 복귀섭리가 연장되어 종적인 탕감조건이 부가되어 갈수록 횡적으로 세워야 할 탕감조건도 점차 더 늘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동시성의 시대도 점차로 그 내용과 범위를 달리하게 된다. 동시성의 시대의 형태가 완전한 상사형(相似形)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편 성장기간(成長期間)의 3단계를 그 형으로써 분류해 본다면 소생(蘇生)은 상징형(象徵型), 장성(長成)은 형상형(形象型), 그리고 완성(完成)은 실체형(實體型)으로 나누어지게 되므로,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에서 이러한 형들을 동시성으로 반복해 온 시대들도 역시 그러한 형의 역사를 재현시켜 나왔던 것이다. 즉 복귀섭리역사의 전기간을 형으로 본 동시성의 관점에서 갈라 본다면,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는 상징적 동시성의 시대요,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는 형상적 동시성의 시대이며, 복귀섭리연장시대(復歸攝理延長時代)는 실체적 동시성의 시대인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동시성의 시대를 형성하는 요인(要因)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겠다. 이처럼 동시성의 시대가 반복되는 이유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탕감복귀하려는 섭리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시성의 시대를 형성하는 요인으로, 첫째는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세가지의 조건을 들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이 기대를 위한 중심인물(中心人物)과 조건물(條件物)과 수리적(數理的)인 기간(期間) 등이다. 그리고 그 둘째는 '실체기대(實體基臺)'를 복귀하기 위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다. 이러한 요인들로써 이루어지는 섭리적 동시성의 시대에는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성격의 것이 있다. 402쪽 그 첫째는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수리적 탕감기간(蕩減期間)인 대수(代數)나 혹은 연수(年數)를 요인으로 하여 섭리적 동시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는 그 섭리를 담당한 중심인물들이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그 뜻이 연장됨에 따라 상실되었던 '믿음의 기대'를 끝내 되풀이하여 탕감복귀해 나오신 섭리역사(攝理歷史)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수리적인 '믿음의 기간'을 탕감복귀하는 섭리도 되풀이하게 돔으로써, 결국 섭리적 동시성의 시대는 어떠한 연수나 혹은 대수의 반복에 의하여 같은 모양을 거듭 형성해 나온 것이었다. 본장의 목적은 바로 이에 관한 문제를 다루려는데 있다,. 둘째로는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과 그 조건물, 그리고 '실체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 등의 섭리적인 사실을 요인으로 하여 동시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은 결국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려는 데 있으므로, 그 섭리가 연장됨에 따라 이 기대를 복귀하려는 섭리도 되풀이된다. 그런데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먼저 '상징헌제(象徵獻祭)'로써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고 다음에 '실체헌제(實體獻祭)'로써 '실체기대(實體基臺)'를 복귀해야만 비로소 그것이 세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복귀섭리의 역사는 '상징헌제'와 '실체헌제'를 복귀하려는 섭리를 되풀이하여 왔기 때문에, 섭리적 동시성의 시대는 결국 이 두 헌제를 복귀하려 했던 섭리역사의 냉용을 중심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에 관한 문제는 다음 장에서 상론(詳論)하기로 하자.

제2절 복귀기대섭리시대의 대수와 그 수의 형성

Ⅰ.복귀섭리는 왜 연장되며 또 어떻게 연장되는가

우리는 위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어 가지고 메시아를 맞음으로써, 복귀섭리의 목적을 완성하려는 섭리가 아담으로부터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으로 연장되어 예수님 때까지 이르렀고, 또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예수님도 이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복귀섭리는 다시 그의 재림기(再臨期)까지 연장되어 나온다는 사실을 논술하였다. 그러면 복귀섭리는 왜 연장되는가? 이것은 예정론(豫定論)에 의하여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예정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은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것이므로 한 번 세우신 뜻은 반드시 이루셔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인물을 중심한 그 뜻 성사(成事)의 여부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어서,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분담(責任分擔)에 그 인물의 책임분담이 합해져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 뜻 성사의 사명을 띤 인물이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시대를 달리하여 다른 사람을 그 대신으로 세워서라도 반드시 그 뜻을 이루시는 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되어 복귀섭리는 연장되어 나아간다. 다음으로 우리는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어떻게 연장되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하나님은 3수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그를 닮은 모든 피조물은 그 존재양상(存在樣相)이나 그 운동이나 또는 그 성장과정 등 모두가 3수 과정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조성하여 원형운동(圓形運動)을 함으로써 창조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도, 정(正)-분(分)-합(合)의 3단계의 작용에 의하여 삼대상목적(三代象目的)을 이룸으로써 3점을 통과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목적을 복귀해 나아가는 섭리는 말씀에 의한 재창조(再創造)의 섭리이기 때문에, 이 복귀섭리가 연장됨에 있어서도 창조원리에 의하여 3단계까지 연장될 수 있는 것이다. 404쪽 아담가정에서 가인 아벨의 실체헌제(實體獻祭)가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 뜻은 노아를 거쳐 아브라함에까지 3차로 연장되었었고,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서 실수하자 그 뜻은 노아를 거쳐 아브라함에까지 3차로 연장되었었고,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서 실수하자 그 뜻은 이삭을 거쳐 야곱에까지 연장되었으며, 또 모세나 예수님을 중심한 가나안 복귀노정도 각각 3차로 연장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성전 건축(聖殿健築)의 이상(理想)은 사울왕의 잘못으로 인하여 다윗왕 솔로몬 왕에까지 연장되었고, 또 첫 아담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은 후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쳐 그의 재림기(再臨期)까지 3차로 연장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의 격언에 '초부득삼(初不得三)'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바로 이러한 원리를 현실생활 속에서 찾아낸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Ⅱ.종적인 탕감조건과 횡적인 탕감복귀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뜻을 담당한 중심인물(中心人物)은, 자기가 세워질 때까지의 섭리노정(攝理路程)에 있어서 자기와 동일한 사명을 담당했던 인물들이 세우려 했던 모든 탕감조건(蕩減條件)들을 자기를 중심하고 일시에 탕감복귀(蕩減復歸)하지 않으면 그들의 사명을 계승 완수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물이 또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에는 , 그가 세우려 했던 탕감조건들은 모두 그 다음에 그의 대신 사명자로 오는 인물이 세워야 할 탕감조건으로 넘겨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귀섭리노정에서 그 섭리를 담당했던 인물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으로 가중되어 내려온 조건들을 종적(縱的)인 탕감조건이라 하고, 이러한 모든 조건들을 어떤 특정한 사명자를 중심하고 일시에 탕감복귀하는 것을 횡적(橫的)인 탕감복귀라고 한다. 405쪽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는 아담가정과 노아가정이 세우려 했던 모든 종적인 탕감조건들을 일시에 횡적으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었다.그러므로 아브라함이 3제물(三祭物)을 한 제단에 놓고 일시에 헌제(獻祭)한 것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의 3단계로 연장되어 내려온 종적인 탕감조건들을 아브라함의 헌제를 중심하고 일시에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3제물은 일찍이 아담과 노아가 세우려다 못 세운 여러 조건들과 또 아브라함이 중심이 되어 세우려 하였던 모든 조건들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야곱은 노아로부터 그 자신에 이르는 12대(代)의 종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일시에 횡적으로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세워야 했기 때문에, 12자식(子息)을 세워 12지파(支派)에로 번식시켜 나아갔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역시 4천년 섭리역사노정(攝理歷史路程)에서 복귀섭리를 담당했던 수많은 선지자(先知者)들이 남겨 놓은 종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들을, 그 자신을 중심하고 일시에 횡적으로 탕감복귀하셔야 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12제자(弟子)와 70문도(門徒)를 세우신 것은, 12자식과 70가족을 중심하고 섭리하셨던 야곱의 노정과, 12지파(支派)와 70장로(長老)를 중심하고 섭리하셨던 모세노정 등의 종적인 탕감조건들을 예수님을 중심하고 일시에 횡적으로 탕감복귀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또 예수님이 40일 금식기도(禁食祈禱)를 하신 것은,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데 필요했던 '40일 사탄 분립'의 모든 종적인 탕감조건들을, 예수님을 중심하고 일시에 횡적으로 탕감복귀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복귀섭리(復歸攝理)를 담당한 인물은 단순히 그 한 개체로서만이 아니고 그에 앞서 같은 사명을 가지고 왔다 간 모든 선지선열(先知先烈)들의 재현체(再現體)이며, 또한 그들의 역사적인 결실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Ⅲ. 종으로 된 횡적인 탕감복귀

다음으로는 종(縱)으로 된 횡적(橫的)인 탕감복귀(蕩減復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이미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에서 상술(詳述)한 바이지만, 아브라함 때는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섭리에 있어서 제3차에 해당하는 때였다. 따라서 그 때에는 기필코 그 뜻을 이루어야 할 원리적(原理的)인 조건하(條件下)에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아담가정과 노아가정의 실수로 말미암아 중첩(重疊)되어 왔던 모든 종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들을, 일시에 횡적으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407쪽 그러나 아브라함은 '상징헌제(象徵獻祭)'에서 실수하였기 때문에, 그 사명을 다음으로 연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이미 실패한 아브라함을 실패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세우시고, 또 그로부터 종적으로 연장되는 복귀섭리도 연장되지 않고 횡적으로 탕감복귀한 것과 같은 자리에 세우셔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섭리를 하시기 위하여 이미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에서 상론한 바와 같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각각 그 개체는 서로 다르지만 뜻을 중심하고 보면 완전한 일체로서 탕감조건을 세우도록 섭리하였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뜻으로 보면 완전히 일체가 되었었기 때문에, 야곱의 성공은 곧 이삭의 성공이었고, 또 그것은 곧 아브라함의 성공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보면 그것은 연장되지 않고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횡적으로 탕감복귀한 것과 같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삭,야곱은 뜻을 중심한 면에서는 아브라함 한 사람과 같이 보아야 하며, 따라서 그 뜻은 아브라함 1대(一代)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은 입장이었던 것이다. 출애굽기 3장 6절에 하나님을 일러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이러한 견지에서 그들 3대(三代)는 일체라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그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패로 말미암아 그 자신을 중심하고 횡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지 못하게 되었을 때, 종적으로 이삭과 야곱의 3대로 연장해 가면서 세운 종적인 탕감조건들을 결국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1대에서 횡적으로 탕감복귀한 것과 같은 입장에 세우셨기 때문에, 이것을 종(縱)으로 된 횡적 탕감복귀(橫的 蕩減復歸)라고 하는 것이다. 408쪽

Ⅳ.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수리적인 탕감기간

우리는 이미 후편 서론(緖論)에서, 믿음을 세우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려면, 그를 위한 수리적인 탕감기간(蕩減期間)을 복귀해야 된다는 것을 논술한 바 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수리적(數理的)으로도 존재하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을 중심한 피조세계(被造世界)는, 무형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수리적인 전개에 의한 실체대상(實體對象)인 것이다. 그리고 피조물(被造物)의 평면적인 원리를 찾아 나아가는 과학의 발달이 수리적인 연구에 의하여서만 가능한 것도 여기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창조된 인간시조는 수리적인 성장기간(成長期間)을 거친 후에야 '믿음의 기대'를 세워 가지고 수리적인 완성실체(完成實體)가 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피조세계(被造世界)가 사탄의 주관권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이것을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것을 상징하는 어떠한 조건물(條件物)을 세워놓고, 사탄의 침범을 당한 수를 복귀하는 수리적(數理的)인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세움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그러면 원래 타락 전 인간 시조(始祖)는 어떠한 수에 의한 '믿음의 기대'를 세워서 어떠한 수리적인 완성실체가 되었어야 했던가?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무릇 모든 존재물 가운데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조성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미완성기에 있었던 아담과 해와도 사위기대 조성에 의하여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사위기대는 그 각 위(位)가 각각 성장기간의 3단계를 거치어 도합 12수의 수리적인 성장기간을 완성함으로써, 12대상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이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기간이었던 성장기간은 바로 12수 완성기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로, 미완성기에 있었던 인간시조는 12수에 의한 '믿음의 기대'를 세워 가지고, 12대상 목적을 완성함으로써 12수 완성실체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됨으로 인하여 이것이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기 때문에, 복귀섭리역사노정(復歸攝理歷史路程)에 있어서 이것을 탕감복귀하는 중심인물은 12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을 세움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12수 완성실체의 복귀를 위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할 수 없게 되었다. 409쪽 예를 들면 노아가 방주(方舟)를 짓는 기간 120년, 모세를 중심한 가나안복귀섭리기간 120년, 아브라함이 소명(召命)된 후 야곱이 에서에게서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울 때까지의 120년, 또 이 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구약시대(舊約時代)에 있어서의 통일왕국시대(統一王國時代) 120년과, 신약시대(新約時代)에 있어서의 기독왕국시대(基督王國時代) 120년 등은 모두 이 12수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기간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타락 전 미완성기의 아담과 해와는 성장기간의 3단계를 거쳐 제4단계인 하나님의 직접주관권 내(직접주관권내(直接主管圈內))에 들어감으로서 비로소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완성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믿음의 기대'를 세워 나아가던 성장기간은 4수 완성기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둘째로 미완성기에 있었던 인간시조는 4수에 의한 '믿음의 기대'를 세워가지고 4위기대를 완성함으로써 4수 완성실체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됨으로 인하여 이것 또한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기 때문에, 복귀섭리역사노정(復歸攝理歷史路程)에 있어서 이것을 탕감복귀하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은, 4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을 세움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4수 완성실체의 복귀를 위한 '실체기대'를 조성할 수 없게 되었다. 410쪽 이미 후편 제1장 제2절 Ⅰ의 2에서 상세히 논술한 바, 노아의 방주를 중심한 심판 40일을 비롯한 모세의 금식 40일, 가나안 정탐기간(偵探期間) 40일을 비롯한 모세의 금식(禁食) 40일과 부활(復活) 40일 등은 모두 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4수 복귀의 탕감기간(蕩減期間)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성장기간(成長期間)은 21수 완성기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셋째로, 미완성기에 있었던 인간시조는 21수에 의한 '믿음의 기대'를 세워가지고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함으로써 21수 완성실체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됨으로 인하여 이것 또한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기 때문에, 복귀섭리역사노정(復歸攝理歷史路程)에 있어서 이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중심인물은 21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을 세움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21수 완성실체의 복귀를 위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성장기간(成長期間)이 21수 완성기간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21수의 뜻을 알려면 먼저 3수와 4수와 7수에 대한 원리적인 뜻을 알아야 한다.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중화적 주체(中和的 主體)이신 하나님은 3수적인 존재이시다. 그리고 피조물(被造物)의 완성은 곧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조성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개체가 완성되려면 하나님을 중심하고 마음과 몸이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루어 사위기대를 조성해야 하고, 부부로서 완성되려면 하나님을 중심하고 남성과 여성이 삼위일체를 이루어 사위기대를 조성해야 하며, 또 피조세계(被造世界)가 완성되려면 하나님을 중심하고 인간과 만물세계가 삼위일체를 이루어 사위기대를 조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피조물이 이와같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일체를 이루어 사위기대를 조성하기 위하여는 성장기의 3기간을 거쳐서 삼대상목적(三代象目的)을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써 3수를 하늘수 또는 완성수라고 부른다. 411쪽 이렇듯 어떠한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하여 삼위일체를 이룰 때에, 그 개성체는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조성하여 동서남북의 4방성을 갖춘 피조물(被造物)로서의 위치를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4수를 땅수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피조물이 3단계의 성장과정을 거쳐서 사위기대를 조성하여 시간성과 공간성을 가진 존재로서 완성되면, 하늘수와 땅수를 합한 7수 완성의 실체가 된다. 천지창조(天地創造)의 전 기간이 7일이 된 원인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창조의 전 기간을 한 기간으로 볼 때에는 7수 완성기간이 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완성되는 한 기간을 7수 완성기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장기간(成長期間)을 형성하는 3기간을 각각 소생단계(蘇生段階)가 완성되는 한 기간, 장성단계(長成段階)가 완성되는 한 기간, 완성단계(完成段階)가 완성되는 한 기간으로 본다면, 그 기간들도 역시 각각 7수 완성기간이 되므로 전성장기간(全成長期間)은 21수의 완성기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믿음의 기대'를 위한 중심인물(中心人物)들이 세웠던 21수 탕감기간(蕩減期間)의 예를 들면, 노아 홍수(洪水)의 기간에 하나님이 3단계의 섭리를 예시(豫示)하시기 위하여 노아로 하여금 3차에 걸쳐 비둘기를 내보내게 하셨는데, 그 간격을 각각 7일간으로 하심으로써, 뜻으로 본 그 전 기간은 21일간이 되었던 것이다(창세기 7장 4절, 창세기 8장 10절, 창세기 8장 12절). 그리고 야곱이 가정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세우기 위하여 하란으로 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섭리의 기간을 세울 때에도 역시 7년씩 3차에 걸친 21년을 요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야곱의 이러한 21년을 탕감복귀하는 기간으로서 구약시대(舊約時代)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바벨론 포로(捕虜) 및 귀환기간(歸環期間) 210년이 있었고, 신약시대(新約時代)에는 교황 포로 및 귀환기간 210년이 있었던 것이다. 성장기간(成長期間)은 또한 40수 완성기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넷째로 타락전 미완성기에 있었던 인간시조는 40수에 의한 '믿음의 기대'를 세워 가지고,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함으로써 40수 완성실체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됨으로 인하여 이것이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기 때문에, 복귀섭리역사노정(復歸攝理歷史路程)에 있어서 이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중심인물은 40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세움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40수 완성실체의 복귀를 위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할 수 없게 되었다. 413 그러면 어찌하여 성장기간(成長期間)이 40수 완성기간이 되는가를 알아보자. 이것을 알기 위하여는 먼저 10수에 대한 의의를 알아야 한다. 성장기간 3단계의 각 기간이 다시 각각 3단계로 구분되면 모두 9단계가 된다. 9수의 원리적 근거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무형(無形)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수리적 전개에 의하여 그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분립된 피조물은, 성장기간의 9단계를 지나서 제 10단계인 하나님의 직접주관권(直接主管圈)으로 돌아가 그와 일체를 이룰 때 비로소 창조목적을 완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10수를 귀일수(歸一數)라고 한다. 하나님이 아담 이후 10대만에 노아를 찾아 세우셨던 것은, 아담을 중심하고 이루시려다가 못 이루신 뜻을 노아를 중심하고 복귀하여, 하나님에게로 재귀일(再歸一)하게 하시기 위한 10수 복귀의 탕감기간을 세우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413쪽 그런데 아담과 해와를 중심한 사위기대(四位基臺)는, 그 각위는 각각 성장기간의 10단계를 거치어 도합 40수의 수리적인 성장기간을 완성함으로써 40수 완성실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장기간은 40수 완성기간이기도 한 것이다. 414쪽 이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역사노정에서 이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세워졌던 40수 탕감기간의 예를 들어보면, 노아 때에 방주(方舟)가 아라랏산에 머문 후, 비둘기를 내보낼 때까지의 40일 기간, 모세의 바로궁중 40년, 미디안광야 40년, 민족적 가나안 복귀의 광야(曠野) 40년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탕감복귀섭리노정(蕩減復歸攝理路程)에 있어서의 40수는 두 가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는 타락인간(墮落人間)이 4수를 탕감복귀할 때, 귀일수(歸一數)인 10수가 승(乘)해져서 된 40수이고, 또 하나는 바로 위에서 논술한 바 타락전 아담이 세워야 했던 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40수이다. 그런데 민족적 가나안 복귀의 광야 40년은, 모세의 바로궁중 40년과 미디안광야 40년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기간인 동시에, 정탐(偵探) 40일, 따라서 모세의 금식(禁食) 40일을 탕감복귀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40년 기간은 위에서 논한 바 서로 성격을 달리한 두 40수를 동시에 탕감복귀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복귀섭리역사노정(復歸攝理歷史路程)에 있어서의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중심인물이 모든 종적인 탕감조건들을 동시에 횡적으로 탕감복귀하는 데서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 40수를 탕감복귀하는 섭리가 연장될 때에는 그것이 10단계 원칙에 의한 탕감기간(蕩減期間)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40수는 10배수 배가원칙(培加原則)에 따라 400수 또는 4000수로 연장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를 들면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400년, 애급 고역(埃及苦役) 400년,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4000년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제 위에서 논술한 바에 의하여,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중심인물(中心人物)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어떠한 수리적(數理的)인 탕감기간(蕩減期間)들을 세워야 하는가를 종합해 보기로 하자. 원래 인간시조(始祖)가 타락하지 않고 12수, 4수, 21수, 40수 등에 의한 '믿음의 기대'를 세워서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함으로써 이러한 수들의 완성실체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됨으로 인하여 이 모든 것들이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기 때문에, 복귀섭리역사노정(復歸攝理歷史路程)에 있어서 이것들을 탕감복귀하는 중심인물들은 12수, 4수, 21수, 40수 등을 복귀하는 수리적인 탕감기간을 세우지 않으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여 이러한 수들의 완성실체 복귀를 위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울 수 없게 되었다. 415

Ⅴ. 대수를 중심한 동시성의 시대

하나님은 아담으로부터 10대 1600년만에 노아를 택하시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중심인물로 세우셨다. 우리는 여기에서 1600년과 10대는 어떠한 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으로서의 의의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야 하겠다. 우리는 바로 위에서 10수는 귀일수(歸一數)라는 것과 성장기간(成長期間)은 이 10수 완성기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논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시조는 이 10수 완성기간을 그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 수행에 의하여 통과함으로써 10수 완성실체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들이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기 때문에, 이것들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한 중심인물을 찾아 세워 가지고, 하나님에게 재귀일(再歸一) 시키는 10수 완성실체의 복귀섭리(復歸攝理)를 하기 위하여는, 그 중심인물로 하여금 10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을 세우게 하시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10수 복귀의 탕감기간을 세우게 하시기 위하여, 아담으로부터 10대만에 노아를 부르시어 복귀섭리의 중심인물로 세우셨던 것이다. 우리는 또 인간시조가 40수 완성의 성장기간을 다 거쳐야만 40수 완성실체가 될 수 있었다는 것도 바로 위에서 논술하였다. 그런데 타락인간은 탕감복귀를 위한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조성하여, 아담이 타락하지 않고 세워야 했던 40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을 세우지 않으면, 40수 완성실체의 복귀를 위한 중심인물로 세워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위기대의 각 위가 40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160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이 되어야 하고 이것을 귀일수로서의 10대에 걸쳐서 세워야 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1600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아담으로부터 10대 1600년 만에 노아를 택하셨던 것은 타락인간이 바로 이러한 1600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가 실패로 돌아간 후, 10대 400년만에 다시 아브라함을 택하시어 복귀섭리의 중심인물(中心人物)로 세우셨다. 따라서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시대는 아담으로 부터 노아까지의 시대를 대수(代數)를 중심하고 탕감복귀하는 동시성의 시대였다. 416 이 시대가 어찌하여 400년이 되었는가 하는 것은 이미 후편 제1장 제3절의 1에서 논술하였다.하나님이 노아로 하여금 40일 심판기간(審判期間)을 세우게 하셨던 것은, 10대와 1600년에 의한 수리적인 탕감복귀의 전목적(全目的)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함의 실수로 인하여 이 40일 심판기간이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복귀섭리를 담당한 중심인물로 하여금 또 이것을 복귀하는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세우게 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 이후, 각 대(代)마다 160수 복귀를 위한 탕감기간을 세우는 섭리를 하시어 이것이 노아 때까지 10대를 계속하여 내려오게 되었던 것과 같이, 그와 동시성의 시대인 노아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10대도 각 대를 심판 40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으로써 세워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1대의 탕감기간을 40일로써 세울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偵探) 40일의 실수를 광야 표류(曠野漂流) 40년기간으로써 탕감복귀하였던 것과 같은(민수기 14장 34절) 탕감법칙(蕩減法則)에 의하여 심판 40일의 실수를 40년기간으로써 탕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40년으로써 1대의 탕감기간으로 세우게 하셨던 것이다. 이와같이 1대 40년 탕감기간으로써 세우게 하시는 섭리가 10대에 걸치게 되었기 때문에, 그 전탕감기간(全蕩減期間)은 400년을 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Ⅵ. 종으로된 횡적 탕감복귀시대 417

위에서 이미 밝혀진 바와같이 복귀섭리(復歸攝理)를 담당한 중심인물은 종적인 탕감조건을 모두 횡적으로 탕감복귀해야 되기 때문에, 섭리역사가 연장될수록 복귀섭리를 담당하는 후대(後代)의 인물이 세워야 할 횡적인 탕감조건은 점점 가중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에 있어서는 복귀섭리를 처음으로 시작하던 때였으므로 종적인 탕감조건은 아직 생기지 않았었다.따라서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에 있어서는 가인과 아벨이 '상징헌제(象徵獻祭)' 하는 것과 같이 가인이 아벨에게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서 '실체헌제(實體獻祭)'를 하는 것으로써 단순하게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수리적인 탕감기간도, 그들이 상징과 실체의 두 헌제를 하는 기간으로써 탕감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아담 이후의 믿음을 세우는 중심인물들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바로 위에서 논한 바 12, 4, 21, 40 등의 각 수를 복귀하는 수리적인 탕감기간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은, 아담가정의 헌제(獻祭) 실패로 말미암아 복귀섭리(復歸攝理)의 기간이 연장됨으로써, 그 수리적인 탕감기간들이 종적인 탕감조건으로 남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아는 그 탕감조건(蕩減條件)을 횡적으로 탕감복귀해야 될 입장이기 때문에, 그는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수리적인 탕감기간들로서 방주(方舟) 짓는 기간 120년, 홍수심판(洪水審判) 40일, 비둘기를 3차 내보내기 위하여 세웠던 7일씩 3차를 합한 21일기간(창세기 7장 4절, 창세기 8장 10절, 창세기 8장 12절),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문 후 비둘기를 내보낼 때까지의 40일기간 등을 찾아 세워야 했던 것이다(창세기 8장 6절).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노아가 찾아 세웠던 이러한 수리적인 탕감기간들은 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어, 그것들은 다시 종적(縱的)인 탕감조건으로 남아지게 되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기간들을 다시 '상징헌제'로써 한꺼번에 횡적(橫的)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역시 '상징헌제'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그 기간들을 탕감복귀하지 못하였었다. 그러므로 이 기간들을 다시 종으로 된 횡적 탕감기간으로써 복귀하기 위하여 뜻 성사를 이삭과 야곱에로 연장시켜 가면서 12, 4, 21, 40의 각 수에 해당하는 탕감기간들을 다시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있어서, 그가 하란에서 떠난 후 야곱이 떡과 팥죽으로써 에서로부터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빼앗을 때까지의 120년, 그리고 그 때로부터 야곱이 이삭에게 장자권의 축복을 받고 하란으로 가는 도중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창세기 28장 10~14절)까지의 40년, 또 그때로부터 하란에서에 고역(苦役)을 마치고 처자(妻子)와 재물(財物)을 취해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21년(창세기 31장 41절),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팔려간 요셉을 찾아서 애급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40년 등은 모두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종으로 된 횡적 탕감기간들이었다. 이와 같이 되어 종으로 된 횡적 탕감복귀 기간의 연수(年數)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제3절 복귀섭리시대를 형성하는 각 시대와 그 연수 419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는 상징적 동시성(象徵的 同時性)의 시대인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를 형상적(形象的)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다. 이제 이 시대를 형성한 각 시대와 그 연수(年數)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Ⅰ. 애급고역시대 400년

노아는 심판(審判) 40일의 '사탄 분립시대'위에서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였던 것인데 함의 실수로 그것이 무너지자, 하나님을 다시 아브라함을 그와 같은 입장에 세우시기 위하여 400년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한 기대 위에서 그로 하여금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하도록 명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로 말미암아 그 기대는 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되어 하나님은 사탄에게 내준 그 400년의 기대를 다시 찾아세우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사탄을 재분립(再分立)하는 애급고역 400년을 치르게 하셨던 것이니(창세기 15장 13절), 이 시대를 애급고역시대(埃及苦役時代)라고 한다(후편 제1장 제3절 Ⅰ). 이 시대는 상징적(象徵的)인 동시성(同時性)의 시대 중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600년을 형상적(形象的)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였다.

Ⅱ. 사사시대 400년 421

열왕기상 6장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급 땅에서 나온지 사백팔십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사년 시월 곧 2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고 하신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 사울왕의 재위 40년과 다윗왕의 재위 40년을 지난 후, 솔로몬왕 4년이 바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급(埃及)땅에서 나온지 480년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이후, 사울왕이 즉위할 때까지는 약 400년 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간을 사사시대(士師時代)라고 한다.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노아로부터의 400년 '사탄분립기대' 위에 세워졌던 아브라함의 입장을 민족적으로 복귀하기 위하여 애급고역(埃及苦役) 400년의 '사탄분립기대'위에 섰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세 대신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가나안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이 기대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었다. 이와같이 되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사탄에게 잃어버린 이 애급고역 400년 기대를 재탕감복귀(再蕩減復歸)하기 위한 사탄 재분립기간(再分立期間)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기간으로 다시 세워진 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뒤로부터 사울왕이 즉위할 때까지의 사사시대 400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는 상징적인 동시성의 시대 중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400년을 형상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였다.

Ⅲ. 통일왕국시대 120년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가 있게 되었으므로 이 섭리노정(攝理路程)을 출발한 아브라함은 아담의 입장이었고, 모세는 노아의 입장이었으며, 사울왕은 아브라함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복귀기대섭리시대의 종결자(終結者)인 동시에 복귀섭리시대의 출발자(出發者)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세운 후에, 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세워야 했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 때는 하나님이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이루려 하시기 제3차로서, 그때에는 그것을 반드시 이루셔야 했던 것과 같이,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이루시려 던 섭리도 역시 사울왕 때가 그 제3차로서 그 때에는 반드시 그것을 이루셔야 했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노아 때에 세워졌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수리적(數理的)인 탕감기간(蕩減期間)인 120년, 40일, 21일, 40일 등을 '상징헌제(象徵獻祭)'를 중심하고 횡적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려다가 실수하여 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이것들을 종으로 된 횡적 탕감기간으로 복귀하기 위하여 120년, 40년, 21년, 40년으로 다시 찾아 세웠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입장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한 사울왕도 역시 아브라함때와 같이, 모세때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수리적인 탕감기간인 120년(모세의 40년씩 3차의 생애), 40일(금식기간), 21일(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기간), 40년(민족적 가나안 복귀의 광야기간) 등을 성전을 지음으로써 그를 중심하고 횡적으로 탕감복귀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울왕도 역시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사무엘상 15장 11~23절) 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브라함 때와 같이 이것들을 종으로 된 횡적 탕감기간으로 복귀하기 위하여, 통일왕국시대(統一王國時代) 120년, 남북왕조분립시대(南北王朝分立時代) 400년, 이스라엘민족 포로(捕虜) 및 귀환시대(歸還時代) 210년, 메시아 강림준비시대(降臨準備時代) 400년을 찾아 세워가지고, 마침내 메시아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왕국시대는 모세가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하여 3차에 걸쳐서 '믿음의 기대'를 세웠던 120년을 탕감복귀하는 기간이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고역(埃及苦役) 400년의 '사탄분립기대' 위에 선 후에, 모세는 바로궁중 40년으로 '믿음의 기대'를 세워가지고, 이스라엘선민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성전(聖殿)을 건축하려 하였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 노정은 모세의 미디안광야 40년, 광야 표류기간(曠野 漂流期間) 40년으로 연장되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민족이 사사시대(士師時代) 400년으로써 애급고역(埃及苦役) 400년을 탕감복귀한 기대 위에선 후, 사울이 유대민족의 첫 왕으로 즉위하여, 그의 재위 40년으로 모세의 바로 궁중생활 40년을 탕감복귀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세워가지고 성전을 건축해야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울왕이 불신으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사무엘상 15장 11~23절), 모세 때와 같이 성전 건축의 뜻은 다윗왕 40년, 솔로몬왕 40년으로 연장되어 통일왕국시대(統一王國時代) 120년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는 상징적 동시성의 시대 중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후 야곱이 에서에게서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빼앗을 때까지의 120년을 형상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였다. 따라서 마치 아브라함의 뜻이 이삭을 거쳐 야곱 때에 이루어 졌던 것과 같이, 사울왕의 성전이상(聖殿理想)도 다윗왕을 거쳐 솔로몬왕 때에야 이루어졌던 것이다.

Ⅳ. 남북왕조 분립시대 400년 423

사울왕은 그의 40년 재위기간(在位期間)에 성전 건축의 이상(理想)을 이룸으로써 말씀(석판) 복귀를 위한 모세의 금식 40일기간을 횡적으로 탕감복귀하려 하였었다. 그러나 그가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 기간을 다시 종으로 된 횡적 탕감기간(橫的 蕩減期間)으로 복귀해야 하였던 것이니, 그것이 바로 통일왕국시대가 북조(北朝) 이스라엘과 남조(南朝) 유대로 분립된 후 유대민족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갈 때까지의 400년 남북왕조분립시대(南北王朝分立時代)였던 것이다. 423 이 시대는 상징적 동시성(象徵的 同時性)의 시대 중 야곱이 에서로부터 떡과 팥죽으로 장자권을 빼앗는 조건을 세운 후, 다시 이삭의 축복(祝福)을 받아가지고(창세기 28장 13절) 하란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40년간을 형상적(形象的)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시대였다.

Ⅴ. 유대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 210년 424

북조 이스라엘이 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앗시리아에 포로(捕虜)되어 간 후 남조 유대도 역시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바빌로니아왕 느부갓네살에게 포로되어 갔다. 이때부터 그들은 바빌론에서 70년간 포로되어 있다가 바빌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한 후 페르시아왕 고레스의 조서(詔書)에 의하여 마침내 해방되었다. 유대민족은 그 후 오랜 기간을 두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는데, 느헤미야가 남은 유대인들을 영솔(領率)하고 환국(還國)하여 성벽을 재건한 후 그들은 선지자 말라기를 중심하고 그의 예언에 의하여(말라기 4장 5절)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기로 들어갔다. 이때가 그들이 바빌론에 포로된 때로부터 210년이요, 해방되기 시작하고서부터 약 140년 된 때였다. 이 시대를 통틀어 유대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라고 한다. 사울왕은 성전이상(聖殿理想)을 이룸으로써, 모세가 제1차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가지고 가나안 복귀를 하려 했던 21일기간을 횡적으로 탕감복귀하려 하였다. 그런데 사울왕은 그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에 실패하였으므로, 다시 이 기간을 종으로 된 횡적 탕감기간(橫的 蕩減期間)으로 복귀하기 위하여 찾아 세운 것이 유대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의 210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는 상징적 동시성의 시대 중 야곱이 이삭으로부터 장자기업(長子基業)에 대한 축복을 받은 후, 그를 죽이려 했던 에서를 피하여 하란으로 가서 사탄편 인물인 라반의 요구에 의하여 레아를 맞이하기 위한 7년 간과 라헬을 맞이하기 위해 7년간, 그리고 재물을 취해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온 해까지의 7년간을 합한 21년간(창세기 31장 41절)을 형상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였던 것이다.

Ⅵ. 메시아 강림준비시대 400년 425

유대민족이 바빌론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귀향한 후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고 선지자 말라기의 예언에 의하여 메시아를 맞이할 민족으로 선 때부터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까지의 400년간을 메시아 강림준비시대(降臨準備時代)라고 한다. 사울왕은 그의 성전이상(聖殿理想)을 이룸으로써,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제3차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서 소비한 광야 40년기간을 횡적으로 탕감복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울왕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실패로 돌아갔으므로, 다시 이 기간을 종으로 된 횡적인 탕감기간으로 복귀하기 위하여 찾아 세운 것이 메시아강림준비시대의 400년 기간이었다. 그리고 이 시대는 상징적 동시성(象徵的 同時性)의 시대 중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한 후 팔려간 요셉을 찾아 애급(埃及)으로 들어가기까지의 40년간을 형상적(形象的)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시대였던 것이다.

제4절 복귀섭리연장시대를 형성하는 각 시대와 그의 연수 426

복귀섭리연장시대(復歸攝理延長時代)는 형상적 동시성(形象的 同時性)의 시대인 복귀섭리시대를 실체적(實體的)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있어서는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를 형성하는 각 시대와 그의 연수(年數)를 그대로 탕감복귀하게 되는 것이다.

Ⅰ. 로마제국 박해시대 400년 426

예수님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뜻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었다. 그러므로 마치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수함으로 인하여 이루지 못하게 되었던 '믿음의 기대'를 민족적인 것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애급고역(埃及苦役) 400년의 사탄분립기간이 있었던 것처럼,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산 제물로 바치는 헌제(獻祭)에 실수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지 못하게 되었던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기독교 신도들의 앞에도 애급고역시대(埃及苦役時代)와 같은 시대가 오게 되었던 것이니, 이 시대가 바로 로마제국 박해시대 400년이었던 것이다. 로마제국의 흑심한 박해가 끝나고 콘스탄티누스대제가 기독교(基督敎)를 공인한 것이 서기 313년이었고,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國敎)로 정한 것이 서기 392년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형상적 동시성의 시대 중 이스라엘 민족의 애급고역시대 400년을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시대였던 것이다.

Ⅱ. 교구장제 기독교시대 400년

형상적 동시성의 시대인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 중에 사사(士師)를 중심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영도하여 나아가던 사사시대(士師時代) 400년이 있었기 때문에, 실체적 동시성의 시대인 복귀섭리연장시대(復歸攝理延長時代) 중에도 이 사사시대 400년을 탕감복귀하는 시대가 있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된 후 서기 800년 카알대제가 즉위할 때까지 사사에 해당하는 교구장(敎區長)에 의하여 영도되었던 교구장제기독교회시대(敎區長制基督敎會時代) 400년기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형상적 동시성의 시대 중 사사시대 400년을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였다.

Ⅲ. 기독왕국시대 120년 427

복귀섭리시대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사울왕을 중심하고 처음으로 왕국을 세운 후, 다윗왕을 거쳐 솔로몬 왕에 이르기까지 120년간 통일왕국시대(統一王國時代)를 이루었었다. 따라서 이 시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서기 800년 카알대제가 즉위한 뒤로부터 나중에 그의 왕통(王統)이 끊어지고 선거왕제(選擧王制)가 되어 919년 헨리 1세가 독일 왕위에 오를 때까지, 120년간에 걸쳐 기독왕국시대(基督王國時代)가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형상적 동시성(形象的 同時性)의 시대 중 통일왕국시대 120년을 실체적(實體的)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였다.

Ⅳ. 동서왕조 분립시대 400년 428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에 있어서의 통일왕국시대에 성전이 뜻 가운데 서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이 왕국이 남조와 북조로 분열되어 400년간의 남북왕조분립시대(南北王朝分立時代)가 왔었다. 그러므로 복귀섭리연장시대(復歸攝理延長時代)에 있어서도 이 시대를 탕감복귀하는 시대가 있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기독왕국시대가 지나간 이후 서기 1309년에 교황청(敎皇廳)이 남불(南佛)의 아비뇽에 옮겨질 때까지의 동서왕조분립시대(東西王朝分立時代) 400년이었던 것이다. 기독왕국이 처음에 분열되었을 때는 동·서 프랑크와 이탈리아의 세 왕조로 분립되었었으나, 이태리는 신성(神聖) 로마제국을 이은 동프랑크의 지배 밑에 있었으므로 사실상 동서(東西)로 양분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형상적 동시성의 시대 중 남북왕조분립시대 400년을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였다.

Ⅴ.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210년

남북왕조분립시대에 있어서, 북조(北朝) 이스라엘은 우상숭배(偶像崇拜)로 인하여 앗시리아에게 망하고 남조(南朝) 유대마저 불신으로 돌아가 성전이상(聖殿理想)을 재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사탄세계인 바빌론으로 포로되어 갔다가 귀환하여 다시 성전이상을 세울 때까지 210년간이 걸렸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동서왕조분립시대(東西王朝分立時代)에 있어서, 불신으로 돌아간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서기 1309년에 로마로부터 남불 아비뇽에 교황청(敎皇廳)을 옮긴 후, 교황들이 포로와 같은 생활을 하다가 다시 로마로 돌아와 가지고 그 후 1517년 종교개혁(宗敎改革)이 일어날 때까지 약 210년간에 걸친 교황 포로(敎皇捕虜) 및 귀환시대(歸還時代)가 있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형상적 동시성의 시대 중 유대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 210년을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였다.

Ⅵ.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 400년

바빌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민족이 예언자 말라기를 중심하고 정교(政敎)의 쇄신을 일으키고, 그의 예언에 의하여(말라기 4장 5절)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을 때부터 메시아 강림준비시대(降臨準備時代) 400년을 지나고 나서야 예수님을 맞았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탕감복귀 하기 위하여, 복귀섭리연장시대(復歸攝理延長時代)에 있어서도 남불(南佛)의 아비뇽에 유수(幽囚)되어 있었던 교황이 로마로 귀환한 후, 서기 1517년 루터를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이 일어난 때로부터 400년을 지남으로써 비로소 재림주(再臨主)를 맞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이 새대가 바로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再降臨準備時代)인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는 형상적 동시성의 시대 중 메시아 강림준비시대 400년을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