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 교리 원문/통일사상요강/004
통일사상요강 원문 004/012.
- 문헌 색인: 통일교 교리 원문/통일사상요강
- 시작 부분: 소체이다. 그리고 질서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가정은 우주의 축소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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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체이다. 그리고 질서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가정은 우주의 축소체이 다. 그리고 우주는 가정의 확대형이다. 한 은하계 안에는 태양계와 같 은 혹성계가 무수히 있다고 하며, 또 대우주에는 은하계가 또한 무수 히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우주는 무수한 천체가정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주는 원만한 수수작용에 의해서 그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 태양계는 태양을 중심으로 한 아홉 개의 혹성이 태양과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각각 일정한 궤도를 돌면서 원반형을 유지하고 있다. 은하계는 약 2천억 개로 추산되는 항성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며, 이 항성들은 그 중심인 핵항성계와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각각 일정한 궤도를 따라 돌면서 전체가 볼록렌즈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또 우주에는 약 2천억 개의 은하계가 있으며, 각각의 은하계는 역시 우주의 중심과 수수작용 을 하면서 일정한 궤도를 따라 돌므로써 우주 전체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우주의 질서가 가정에도 적용됨으로써, 가정도 본래는 각 격 위 간의 원만한 수수작용에 의해서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뿐만 아 니라 천체 상호간의 원만하고 조화로운 수수작용(천도)에 의해서 우주 의 질서와 평화가 유지되듯이 가정에 있어서도 조화로운 수수작용의 법칙 즉 사랑의 도리에 의해서 가정의 평화가 유지되어야 한다. 이 사 랑의 도리가 바로 윤리이며 천도에 대응하는 가정의 규범이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 때문에 가정은 본래의 질서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가정윤리가 파탄됨으로써 불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따라서 가정의 연장이요, 확대형인 사회에도 끊임없는 혼란이 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222 5. 우주의 법칙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법칙(진리)을 천도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주체 와 대상의 원만한 수수작용을 말한다. 우주의 수수작용의 법칙에는 다 음과 같은 일곱 개의 특징 또는 소법칙小法則이 있다. (1) 상대성(의 법칙) 모든 존재는 그 자체 내부에 주체와 대상이라는 상대적 요소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밖으로 다른 존재와도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이 상대성이다. 이와 같은 상대성을 갖지 않으면 만물 은 존재하거나 발전할 수 없다. (2) 목적성과 중심성(의 법칙)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 요소는 반드시 공동목적을 갖고 있으며(목적 성), 그 목적을 중심으로(중심성) 수수작용을 하고 있다. (3) 질서성과 위치성(의 법칙) 모든 개체에는 각자가 존재하는 위치 즉 격위가 주어져 있으며(질서 성), 그러한 격위(위치성)에 의하여 일정한 질서가 유지된다. 223 (4) 조화성(의 법칙)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은 원화성이며 조화적이어서(조화성), 거기에 는 대립이나 투쟁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항상 그 곳에 작 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5) 개별성과 관계성(의 법칙) 모든 개체는 개성진리체이면서 동시에 연체이다. 따라서 각 개체는 고유한 특성(개별성)을 지니면서 다른 개체와 일정한 관계(수수관계)를 가지고(관계성)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6) 자기동일성과 발전성(의 법칙) 모든 유기체는 일생을 통하여 변치않는 본질 즉 자기동일성을 유지 하면서, 동시에 성장과 더불어 변화하고 발전하는 면 즉 발전성을 가 지고 있다. 우주도 일종의 유기체로서 그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 다. (7) 원환운동성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대상은 주체를 중심으로 하여 돌 224 고 있으며, 시간적 또는 공간적으로 원환운동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우주의 소법칙들은 로고스의 작용에 기인한다. 그런데 이 미 원상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로고스는 법칙이면서도 심정을 터로 한 이성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그 로고스의 배후에는 사랑이 작용한 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주를 로고스로 창조하실 때 심정과 사랑을 동 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문선명 선생은 우주에는 물리적인 힘뿐만 아니라 사랑의 힘도 함께 작용하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우주의 법칙이 개인에게 적용되면 도덕이 되고, 가정에 적용되면 윤리 가 된다. 즉 우주의 법칙과 가정의 윤리법칙은 대응관계에 있다. 따라 서 가정을 확대한 것이 사회이므로 사회에도 천도天道에 대응하는 사회 윤리가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우주의 법칙을 위반하면 개체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예컨대 태양 계의 혹성 중의 하나가 궤도를 이탈하면 그 혹성은 자체의 존재를 유 지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태양계에는 일대 이변이 일어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정이나 사회에 있어서도 사람들이 윤리법칙을 위반하면 파괴와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혼란된 사회를 구하기 위해서는 윤리법칙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한 과제이다. 그런데 종래의 종교나 사상에 근거한 윤리론은 논리적인 설명이 없 기 때문에 분석적이요 이성적인 현대인에게는 설득력이 없으며, 오늘 날은 옛부터 전해 내려온 윤리관이 대중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하고 있다. 통일사상은 윤리법칙이 인간이 자의로 만든 법칙이 아니라 우주 의 법칙(자연법칙)에 대응하는 필연적인 법칙임을 밝히고, 윤리와 도덕 의 실천의 당위성을 가르치고 있다. 윤리와 도덕의 내용에 관해서는 225 가치론이나 윤리론에서 구체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통일사상의 입장에서 우주법칙에 관한 공산주의의 견해 를 검토해 보자. 공산주의의 우주관은 변증법적인 우주관이므로 우주 의 운동, 변화, 발전은 사물에 내재하는 모순 또는 대립물의 투쟁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투쟁, 즉 계급투쟁이 필요하다고 한다. 레닌은 ‘철학노트’에서 “대립물의 통 일(일치, 동일성, 균형)은 조건적, 일시적, 경과적, 상대적이다. 서로 배 제하는 대립물의 투쟁은 발전, 운동이 절대적인 것처럼 절대적이다 .”13) 라고 말하고 “발전은 대립물의 ‘투쟁’에 의해서이다.”14) 라고까지 단언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공산주의는 대립물의 투쟁에 의해서 사물이 발전한다고 했으나 실제로 우주에는 그러한 현상을 발견할 수 없다. 우주는 오늘 날까지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해 온 것이다. 과학자가 우주를 관찰해 볼 때, 별의 폭발과 같은 현상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분적인 파괴현상일 뿐 결코 우주의 전체적인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생물체에 있어서 낡은 세포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포가 출현하는 현상과 같은 것 으로서, 새로운 별의 탄생을 위해서 낡은 별이 소실되는 과정인 것이 다.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므로 동물계에 한해서만은 대립물 의 투쟁이론이 맞지 않느냐 하는 의문이 생길는지 모른다. 예컨대 뱀 은 개구리를 잡아먹고, 고양이는 쥐를 잡아먹는다. 공산주의는 이런 사실을 가지고 인간사회의 투쟁이론을 합리화하려 할는지 모른다. 그 러나 뱀과 개구리나, 고양이와 쥐의 경우는 서로 종이 다른 동물끼리 의 싸움이다. 분류학상으로 볼 때, 생물은 계․문․강․목․과․속․종으로 분류 226 된다. 고양이와 쥐의 경우, 목에 있어서 고양이는 식육류에 속하고, 쥐 는 설치류에 속한다. 고양이와 쥐는 목에서부터 다른 것이다. 뱀과 개 구리의 경우, 강에 있어서 뱀은 파충류에, 개구리는 양서류에 속한다. 뱀과 개구리는 강에서부터 다른 것이다. 즉 한 동물이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경우, 그 두 동물은 분류학상 최 소한 종의 단위가 다르다. 그런데 자연계에 있어서 같은 종에 속하는 동물들끼리는 싸우더라도 죽이는 일은 극히 드물다. 고양이는 쥐를 잡 아먹지만 고양이끼리는 죽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뱀은 개구리를 잡아 먹지만 같은 뱀은 잡아먹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로서 같은 종에 속해 있으면서도 인간들끼리 서로 빼 앗거나 죽이기도 한다. 따라서 자연계에서의 약육강식의 현상을 가지 고 인간사회의 투쟁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사자의 집단사회 내에 새로운 숫雄사자가 들어가면 그 집단의 두목 과의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보스(두목)를 결정하기 위한 싸움이며, 질서의 중심을 세우기 위한 싸움이다. 일단 강약이 결 정되면 약자는 바로 강자 앞에 굴복하고 싸움은 끝난다. 이러한 싸움 은 인간이 인간을 살해하는 따위의 투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와 같이 자연계에는 인간사회의 투쟁을 합리화하는 현상은 전혀 없다. 인간들끼리 서로 빼앗고 죽이는 행위는 인간이 타락한 결과, 그 성 향이 자기중심적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본래의 상태 로 돌아가면, 인간사회에서 투쟁은 볼 수 없게 될 것이며, 인간이 타 락하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만물의 주관주가 되어서 자연계를 사랑으로 주관했을 것이다.15) 공산주의가 말한 것처럼 자연계가 발전하는데 있 어서 모순의 법칙이나 대립물의 투쟁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이 결코 아 227 니며, 도리어 상대물(주체와 대상) 간의 조화로운 수수의 법칙이 작용 하고 있을 뿐이다. 228 제3장 본성론 Theory of the Original Human Nature 본성론本性論이란 인간의 본연의 모습 즉 타락하지 않은 본성적 인간 을 다루는 철학부문이다. 이미 원상론과 존재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은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해 왔다. 특히 오늘날 우리들은 공산주의 소멸후의 새로운 혼란과, 남북문제를 위시하여 인종분쟁, 종교분쟁, 영토분쟁, 부정부패 의 확산,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로 인한 각종 범죄의 만연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대립과 갈등, 투쟁과 전쟁으로 연결되면서 혼 란의 와중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역사의 현실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존재의 문제’와 ‘관계의 문제’로 대별 되게 된다. 인간이 안고 있는 이러한 ‘존재의 문제’와 ‘관계의 문제’들 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한편 역사 속에 왔다간 많은 성현 들이나 사상가들은 ‘현실인간’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막연하게나마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아보곤 했다. 그들이 바로 종교가요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이 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어떻게 해야 본래의 인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가를 추구해 왔던 것이다. 229 기원전 5세기경 인도의 가비라성에서 태어난 석가는 수도와 고행의 생활을 통하여 득도함으로써 인간은 본래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번뇌煩惱에 싸여서 고통에 빠지게 되었 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수도생활을 통하여 본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예수님도 30여 생애동안 인생문제를 깊이 탐구한 결과 인간은 ‘죄 인’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예수자신)을 믿음으로써 거듭나야 한다 고 설파하면서, 유대민족을 향해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쳤 던 것이다. 그는 팔레스타인 각지를 돌면서 가르침을 펴기에 전력을 다했으나 기득권을 쥐고 있던 당시의 정치, 종교계의 벽을 넘지 못하 고 결국 십자가형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폴리스(polis)사회의 말기적인 혼란상을 직시하 다가, 참된 지를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참된 생활이라고 하면서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다. 그리고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것 이 최고의 생활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것은 이성이며 인간의 덕은 폴리스에서의 공동생활에서 실 현된다고 생각하고 인간을 사회적동물(폴리스적 동물)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인간관은 대체적으로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 며 인간의 이성을 충분히 활용하면 인간은 이상적인 모습이 된다는 것 이었다. 중세시대는 기독교가 서구사회의 인간 정신을 지배하던 때였다. 이 기독교의 인간관은 인간을 죄인으로 보았으며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이성은 인 간의 구원과 참된 평화의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230 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다시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사조가 나 타났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성으로써만 올 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 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그리고 칸 트는 인간을 실천이성이 명하는 도덕적 의무의 소리聲를 따라서 사는 인격적 존재로 보고, 인간은 유혹이나 욕망에 사로잡히지 말고 이성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설說하였다. 헤겔도 역시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역사는 이 성이 세계 속에서 자신을 실현해 가는 과정이며, 역사의 발전과 더불 어 이성의 본질인 자유가 실현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헤겔의 논 리에 의하면 근대국가(이성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인간과 세계는 합리 적인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 있어서의 실제의 인간은 인 간다움을 도리어 상실한 상태에 머물러 있고 세계도 그대로 비합리적 인 모습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헤겔의 극단적인 이성주 의에 반기를 든 사람이 키에르케고르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세 계의 발전과 더불어 합리적인 존재가 된다는 설을 반대했으며, 인간은 현실사회에서 참다운 인간성을 잃어버린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주 장했다. 따라서 인간은 대중으로부터 떠나서, 단독자로서 주체적으로 인생을 헤쳐나갈 때 비로소 참다운 인간성이 회복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현실적 인간을, 본성을 잃어버린 인간으로서 파악하고 주체적으 로 인간성을 되찾으려고 하는 사고방식이 그 이후 실존주의 사상으로 서 전개되었다. 이에 관하여는 나중에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또 헤겔의 이성주의에 반대하고 인간을 감성적 존재로서 파악한 사 람이 포이엘바하였다. 포이엘바하에 의하면 인간은 유적본질類的本質인 231 이성․의지․심정(사랑)을 가진 유적존재로서, 이 유적본질을 자기로부터 분리한 후 대상화對象化해서 그것을 하나님으로 숭배하게 되었다고 한 다. 여기에서 인간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그는 보았던 것이 다. 따라서 그는 인간이 인간의 본성(유적본질)을 되찾는 길은 대상화 한 하나님을 부정할 때, 즉 종교를 부정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하 였다. 그리고 헤겔의 ‘자유의 실현’의 사상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진정 한 해방을 주장한 사람이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 당시의 초기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의 노동자의 생활은 비 참하였다. 그들은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당했으며 게다가 최저의 생활 을 유지하기도 힘들 정도의 임금밖에 받지 못했다. 노동자들 사이에는 질병과 범죄가 만연하게 되었고 그들의 인간성은 박탈당하고 있었다. 한편 자본가는 풍족한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착취 하고 억압함으로써 그들도 본래의 인간성을 상실하고 말았다고 마르크 스는 생각하였다. 인간 해방을 부르짖던 마르크스가 처음에는 인간에 의한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포이엘바하의 인간주의에서 출발하였으나, 얼마 안가서 인간은 유적존재일 뿐만 아니라, 생산활동을 하는 사회 적, 물질적, 역사적존재이며, 인간의 본질은 노동의 자유라고 파악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 노동자는 노동생산물을 모두 자본가에 게 빼앗겼으며, 노동 그 자체가 자기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자본가의 뜻에 따라서 좌우되고 있었다. 여기에 노동자의 인간성 상실이 있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던 것이다. 노동자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사회를 타 도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가도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유물론의 입장에서, 232 인간의 의식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사회의 토대인 생산관계라고 주장 하고, 자본주의의 경제체제를 폭력적으로 변혁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라 혁명을 일으켜 서 세운 공산주의 국가는 자유의 억압과 인간성의 유린이 심한 독재주 의사회가 되었고, 인간은 더욱 더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것은 마르크스가 인간소외의 원인의 파악에 있어서, 그리고 인간소외 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 큰 오류를 범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소외는 지난날의 공산주의사회의 문제였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도, 개인주의와 물질중심주의가 만연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는 이기적인 사고방 식이 만연되어서 더욱 더 인간성이 상실되어가고 있다. 한편 인간학이 모든 학문과 사상의 근본이라고 생각한 막스 셀러는 ‘인간과 역사’ 속에서 제시한 인간관 중에서 인간은 사고하는 인간 (homo sapiens), 도구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공작인(homo faber)으로 표현하였다. 그 외에 인간은 경제인(homo economicus), 종교인(homo religious), 자유인(homo liberalis), 국가인(homo nationalis)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한 표현도 인생의 참된 의미를 나타내지 는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생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인류역 사 개시 이래 수많은 종교가나 철학자들에 의해서 그 해석이 시도되었 으나 모두가 실패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인생을 바르게 살려다가 인 생의 의미를 몰라서 허무한 인생을 비관하고 자살한 사람도 허다하다. 한국의 윤심덕, 일본의 후지무라 미사오藤村操夫 등이 그 예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미해결된 인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233 생애를 바쳐 걸어오신 분이 계신다. 그 분이 바로 문선명 선생이시다. 그 분은 통일원리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이 비록 본래의 모습을 잃 어버리고 하찮은 존재처럼 되어 버렸지만 본래의 인간은 모두 ‘하나님 의 참자녀’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다. 그런데 인간시조의 타락 에 의해서, 하나님과는 무관無關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본래의 모 습을 되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본장本章에서는 인간의 타락의 문제나 인간성 회복의 방법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고(그것에 관해서는 ‘원리강 논’의 ‘타락론’과 ‘복귀원리’의 항목을 참조) 다만 본래의 인간은 어떠 한 모습인가 하는 것만을 논하고자 한다. 인간의 본래의 모습은 신상 을 닮은 신상적존재神相的存在이며 신성을 닮은 신성적존재神性的存在이다. 그리고 또 원상의 격위성을 닮은 격위적존재格位的存在이다. 다음에 이에 관하여 상론詳論하고자 한다. 一. 신상적 존재 원상이 성상․형상, 양성․음성의 보편상과 개별상을 지니고 있듯이, 이 러한 원상을 닮은 본연의 인간도 예외없이 성상․형상, 양성․음성의 보 편상과 개별상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존재를 신상적 존재라고 한다. 먼저 성상과 형상을 닮았다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성상과 형상의 통일체 234 인간이 하나님의 성상과 형상을 닮았다는 것은 인간이 마음과 몸의 이중체二重體, 즉 성상․형상의 통일체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성상과 형상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로 인간은 우주를 총합總合한 실체상實體相이다. 즉 인간은 성상과 형상에 있어서 각각 동 물, 식물, 광물의 성상과 형상의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다. 둘째로 인 간은 영인체와 육신의 이중적존재二重的存在이다. 셋째로 인간은 마음과 몸이 통일을 이루고 있는 심신통일체心身統一體이다. 그리고 넷째로 인간 은 이중의 마음, 즉 생심과 육심의 이중심二重心의 통일체로서 이중심적 존재二重心的 存在이다. 여기서 인간이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는 관점에서 볼 때, 넷째의 생 심과 육심의 ‘이중심적 존재’라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그리하여 본항本 項 에서 다루는 ‘성상과 형상의 통일체’는 바로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통 일체’와 같은 뜻이 된다. 여기서 생심과 육심이 모두 마음(성상)인데도 불구하고, 생심과 육심의 관계를 성상과 형상의 관계로 표시하는 것 은, 생심은 영인체(성상)의 마음이요, 육심은 육신(형상)의 마음이어서, 생심과 육심의 관계는 영인체와 육신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음에 생심과 육심의 기능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생심 의 기능은 진선미와 사랑의 생활, 즉 가치생활을 추구한다. 여기서의 사랑은 생명의 원천인 동시에 진․선․미의 기반이 되고 있다. 따라서 사 랑을 중심으로 한 진선미의 생활이 가치의 생활이다. 인간의 가치생활 에는 인간 자신이 가치를 추구하면서 기뻐하는 면도 있으나 가치를 실 현하여 타인을 기쁘게 하는 것이 보다 더 본질적인 면이다. 따라서 가 치생활이란 ‘위하여 사는’ 사랑의 생활, 즉 가정을 위하고, 민족을 위 235 하고, 국가를 위하고, 인류를 위해서 사는 사랑의 생활이다. 그리고 궁 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한편 의식주나 성의 생활, 말하 자면 물질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 육심의 기능이다. 물질생활은 개 인을 중심으로 한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심과 육심은 본래,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다. 여기서 생 심이 주체요 육심이 대상이다. 영인체가 주체요, 육신이 대상이기 때 문이다. 그리하여 육심이 생심을 따르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생심 과 육심이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지만, 생심이 주체, 육심이 대상의 관계에 있을 때의 인간의 마음이 본심이다. 육심이 생 심을 따른다는 것은,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생활을 제1차적인 것 으로 하고, 물질을 추구하는 생활을 제2차적인 것으로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가치의 생활이 목적이고 의식주의 생활은 그 목적실현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육심이 생심을 따르고 생심이 제 기 능을 잘 하면 영인체와 육신은 서로 공명한다. 이 상태가 인격을 완성 한 상태이며 곧 본연의 인간의 모습이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생심과 육심의 본래의 관계를 유지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대상이 되어야 할 육심이 주체의 입장에 서게 되었고, 주체가 되어야 할 생심이 대상의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주의 생활이 목적이 되었고, 가치의 생활은 그 의식주를 위한 수단처럼 되어서 2차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즉 사람을 사랑한다 거나 진선미를 추구하는 행위는 부富를 얻는다든가, 지위를 얻는다는 목적 때문에 행하는 행위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 일상적인 인간의 생 활에 있어서 가치의 생활이 전연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가치생활을 자기중심의 물질생활을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236 육심이 주체, 생심이 대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심과 육심의 본래의 관계가 역전되어 버린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거꾸로 된 관계를 본래의 관계로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인간이 수도생활을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이다. 그 때문에 오늘날까 지, 모든 종교는 먼저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라고 가르쳤던 것이 다. 예컨대 공자孔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강조했고,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으며,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도 하였다. 그 리고 자기와의 싸움에 이기기 위하여 사람들은 금식禁食, 철야徹夜 등의 수도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육심을 생심에 굴복시켜 서 진선미眞善美의 생활을 앞세우고, 의식주衣食住의 생활을 뒤세운 채 살 아가는 것이 생심과 육심의 통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육 심이 생심을 누르고 자기중심적인 의식주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여기 에서 인간의 모든 고통과 불행이 오게된 것이다. 그리하여 본심(마음)이란, 요컨대 생심과 육심이 수수작용을 해서 합 성일체화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상내의 내적사위기대를 닮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본심의 선차적先次的인 기능은 생심에 의한 사랑의 생활이며 진선미의 가치를 추구하는 생활이다. 따라서 인간은 바로 애 적인간愛的人間(homo amans)인 것이다. 이런 가치의 생활이 바로 진실 의 생활이며, 윤리적․도덕적 생활이며 예술적 생활이다. 그리고 본심의 후차적後次的인 기능은 육심에 의한 의식주의 생활, 즉 물질적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다. 237 (2) 양성과 음성의 조화체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은 성상과 형상의 속성이지만 이 본성론에서 말하 는 양성과 음성은 각각 양적실체陽的實體, 음적실체陰的實體로서의 부부夫婦 를 말한다. 부부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가정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가 하는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한 문제가 되어 왔다. 동물 도, 식물도, 광물도, 모두 양음의 결합에 의해서 존재하고 번식한다. 만물이 이러하기 때문에 인간의 양음의 결합 즉 부부의 결합도 단순한 남녀의 육체적 결합으로만 보기 쉽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는 것은, 부 부를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면 오늘날 선진제국先進諸國에서처럼 남녀가 결혼했더라도 쉽게 갈라지곤 함 으로써 결혼의 신성성神聖性이나 영원성은 상실되기 쉽게 된다. 이것은 본래의 부부의 모습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는 왜 존재하며, 결혼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지금까지 참된 해답이 없었다. 그 때문에 일생을 독신 생활로 일관一貫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통 일사상은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다. 첫째로, 본연의 부부는 각각 하나님의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중의 일성一性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부부의 결합은 양성․음성을 지닌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의미한다. 부부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횡적으로 서 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종적인 사랑이 거기에 임臨하게 되어서 여기에 사랑의 상승작용에 의한 생명의 창조가 이루어지게 된다. 둘째로, 본 238 연의 부부의 결합은 하나님의 창조과정의 최후의 단계이기 때문에 그 것은 바로 우주 창조의 완료를 의미한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 다면 아담 해와의 완성과 더불어 우주의 창조는 완료되었을 것이다. 우주 창조의 최종적인 목표는 만물의 주관주인 인간의 출현이기 때문 이다. 이와 같이 부부의 완성은 우주 창조의 완료를 의미한다. 그러나 부부(아담․해와)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주 창조는 완료되지 않았 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하나님은 창조(재창조)의 섭리를 계속해 오신 것이다. 재창조란 타락한 인간으로 하여금, 개체를 완성시키고 더 나 아가서 부부로서 완성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주관주로 창조 되었으나 남자만으로 혹은 여자만으로는 주관주가 될 수 없다. 부부로 서 완성할 때 비로소 인간은 만물의 주관주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우주창조가 완료되는 것이다. 셋째로, 본연의 부부는 각각 인류의 절반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따 라서 부부의 결합은 인류의 통일을 의미한다. 즉 부부에 있어서 남편 은 전인류全人類의 남성을 대표하고, 아내는 전인류의 여성을 대표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의 총인구는 약 50억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각각 25 억을 대표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그 남편이고 그 아내이다. 넷째로, 본연의 부부는 각각 가정의 절반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따 라서 부부의 결합은 가정의 완성을 의미한다. 가정에서 남편은 모든 남성을 대표하고 아내는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측면에서 볼 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 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가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과 우주 창 조의 완성을 의미하며 인류의 통일과 가정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처럼 부부의 결합은 실로 신성하고도 존귀한 결합인 것이다.1) 239 그런데 부부의 조화는 가정적사위기대의 형성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가정적사위기대의 형성이란, 창조 때에 인간에게 허락한 제2축 복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동사위기대同四位基臺는 하나님을 중심하 고 인격적으로 완성한 남편과 아내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사랑과 미 를 주고 받음으로써 형성된다. 그런데 이 때의 부부의 결합은 원상내 의 주체와 대상의 조화를 닮게 된다. 즉 원상의 자동적사위기대를 닮 는 것이다. 그리고 부부의 자녀 번식은 하나님의 인간창조를 닮고 있 다. 이것은 원상의 발전적사위기대를 닮는 것이다. 이때 부부는 각각 본심대로 살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 본심대로 산다는 것은 원상의 내적사위기대를 닮는 것이요, 서로 조 화를 이룬다는 것은 원상의 외적사위기대를 닮는 것이다. 부부가 각각 원상의 모습을 완전히 닮아서 인격자로 성숙한 다음, 창조목적을 중심 하고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곳에 임재하게 된다. 가정은 부부의 횡적사랑과 하나님의 종적사랑이 맞닿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완성된 가정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더 나아가서 국가, 세계를 이 地上에 세우 게 되면 그것이 곧 지상천국이요,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세계가 되는 것이다. 원상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완성한 세계란 본 연의 질서를 통하여 실현되는 사랑의 세계를 말한다. 여기서 질서와 사랑에 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인간은 우주의 축소체이지만 가정도 우주의 축소체이다. 이때 인간은 구성요소로 본 우주의 축소체이며 가 정은 질서로 본 우주의 축소체인 것이다. 가정이 질서로 본 우주의 축 소체라는 말은 우주의 종적질서縱的秩序와 횡적질서橫的秩序를 닮아서 가정 240 에도 축소된 형태로서의 종적질서와 횡적질서가 있게 됨을 뜻한다. 가 정에 있어서의 종적질서란 조부모→부모→자녀→손자로 이어지는 질서 를 말하며 횡적질서는 부부간 및 부모중심의 형제자매간의 질서를 말 한다. 사랑은 이러한 질서를 통해서 실현된다. 그리하여 사랑에는 종 적 사랑과 횡적 사랑이 있게 된다. 종적 사랑이란 부모의 자녀에 대한 내리사랑下向愛과 자녀의 부모에 대한 올리사랑上向愛이며 횡적사랑이란 부부간의 사랑, 자녀상호간의 사랑 등의 가로사랑水平愛이다. 이러한 사랑의 기본형을 토대로 하여 종적 가치와 횡적 가치의 기본 이 되는 가정윤리가 성립된다. 종적 가치란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 인 자애慈愛요, 자녀의 부모에 대한 사랑인 효성孝誠이다. 횡적 가치란 부부간의 사랑인 화애和愛요, 자녀 상호간의 사랑인 우애友愛이다. 이리 하여 윤리는 가정을 기반으로 한 가족구성원 상호간에 지켜야 할 행위 의 규범이 되는 것이다(이에 관해서는 윤리론에서 상세히 논할 것임). 이러한 가정윤리를 사회, 기업, 학교 등으로 확대시킨 것이 사회윤리 요, 기업윤리요, 학교윤리이며 이웃애隣人愛, 민족애民族愛, 원수에 대한 사 랑, 자연보호운동 등도 모두 가정적 윤리를 터로 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본성으로 본 인간관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애적인간愛的人間(homo amans)이라 하겠다. 그 런데 타락에 의해서 인간은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완성을 보지 못하였 으며 따라서 미완성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해와는 본연의 부부가 될 수 없었다. 즉 부부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가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부부는 하나님마저 상실해 버렸다. 그리하여 우주 창 조의 미완료未完了 상태가 그대로 오늘에까지 지속되어온 것이다. 오늘 날 가정문제나 사회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은 부부의 모습 241 이 모두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그 때문에 가 정과 사회가 어지러워졌고 국가와 세계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 서 부부가 화애和愛로써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것이 바 로 세계의 통일과 직결되는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의 전제조건이 된다. 따 라서 부부의 화애和愛의 문제는 사회문제와 세계문제를 해결하는 열쇠 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3) 개성체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에 있어서 먼저 완성된 인간의 모습을 구상하 시고, 그것을 표준으로 삼아 실체대상으로 전개한 것이 피조세계이다. 따라서 피조만물은 원인자되시는 하나님의 원상을 상징적으로 닮은 개 성체個性體요, 인간은 원상을 형상적으로 닮은 개성체이다. 개성체란 원 상의 개별상을 닮은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라는 의미로서 인간은 우선 하 나님의 보편상과 개별상을 함께 닮은 개성진리체이다. 그런데 그 개성진리체를 다룸에 있어서 개별상에 중점을 두고 다룰 때의 개성진리체를 개성체個性體라고 한다. 개성체로서의 인간의 개별상 은 동물이나 식물과는 달리 매개인每個人마다 그 개별성이 현저顯著하며, 그 얼굴이나 성격 등이 사람마다 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즉 동물이나 식물에 있어서는 종류별種類別의 개별상이지만 인간에 있어서는 개인별個 人別 의 개별상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특히 인간에게 개인마다 독특한 개별상을 준 것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면서 특유의 자극적인 기쁨을 얻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특유의 개성을 가지고 하나님 께 최고의 기쁨을 돌려드리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존재로서 이러한 개 242 별상도 인간의 본성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상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인간의 특성으로 나타난 다. 첫째의 특성이 용모상의 특징이다. 세계에 50억의 인간이 있지만 같은 용모나 체격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둘째의 특성은 행동 상의 특징이다. 인간의 행동양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행동은 마음의 직접적인 표현이므로, 용모를 형상적인 특성이라고 한다면, 행동은 성 상적인 특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의 특성은 창작상創作上의 특징이다. 예술의 창작 뿐만 아니라, 창조성을 발휘하는 모든 활동은 모두 창작의 개념에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성을 발휘하면서 하 루를 살았다면 그 1일의 생활의 발자취는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창작 또한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뿐만 아니라 인간 일생의 발자취도 하나의 작품(생의 작품)이다. 따 라서 하나님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기뻐하시고, 행동 을 보고 기뻐하시고, 또 그 작품을 보고 기뻐하시게 되어 있었다. 하 나님이 개개의 인간을 보고 기뻐하신다는 것은 개개의 인간이 용모나 행동이나 창작으로써 하나님께 고유한 미를 돌려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성미個性美이다. 따라서 개성미란 용모상의 개성미요, 행동상의 개성미요, 창작상의 개성미이다.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 특성에 있어서 어떤 자식이라도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자식은 부모의 표현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 지로 하나님이 인간을 대할 때, 그 인간의 용모나 행동에서 그리고 창 작생활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개 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 즉 신래성神來性의 것이기 때문에 존귀하다. 인간이 인간의 개성을 귀히 여기고 상호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243 이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오늘날까지 인간의 개성은 무시되고 인권이 유린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독재사회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때까지의 공산주의사회가 그 현저한 예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개 성을 유물론에 근거하여 환경의 산물로 보기 때문에 이를 경시輕視한다. 우리는 인도주의人道主義(humanism)가 인간의 개성을 존중시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왜 인간의 개성이 존중시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철 학적 해답이 인도주의에는 없기 때문에 철학을 가진 공산주의의 비판 을 견뎌내지 못하곤 하였다. 이에 대해서 통일사상은 인간의 개성은 우연적인 것도 환경의 산물도 아니며, 하나님의 개별상에서 유내된 것 이기 때문에 즉 신래성神來性이기 때문에 존귀하다고 하는 확고한 신학 적, 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二. 신성적존재 인간은 또 하나님의 신성神性도 닮고 있다. 하나님의 신성에는 전지, 전능, 심정(사랑), 무소부재無所不在, 생명, 진․선․미, 정의, 로고스, 창조성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에서 중요한 것 3가지만을 다루고자 한 다. 이 세 가지는 현실문제 해결에 특히 중요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심정, 로고스, 창조성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 가지의 신성을 닮 고 있다는 측면에서 인간을 바라볼 때 인간은 심정적 존재요, 로고스 적 존재요, 창조적 존재이다. 이에 관해서 다음에 상세히 설명하고자 244 한다. (1) 심정적존재 여기의 심정은 원상론原相論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랑을 통해서 기쁘 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衝動”이다. 심정은 “사랑의 원천이며 사랑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정적인 충동”이기도 한 것으로서 원상原相 의 핵심核心을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성상性相의 핵심이 되고 있다. 뿐 만 아니라 심정은 하나님에 있어서 인격의 핵심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48)’고 하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인격, 즉 하나님의 심정을 닮으 라는 가르침이다. 인간에 있어서도 심정은 인격의 핵심이 되게 되어 있었다. 인간에 있어서 인격의 완성은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體恤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함으로써 인격을 완성한 인간이 바로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심정을 계속적으로 체휼하면 드디어 하나님 의 심정을 완전히 상속받게 된다. 그러한 인간은 사람이나 만물을 사 랑하고 싶어 한다. 사랑하지 않으면 도리어 마음이 괴롭기 때문이다. 타락인간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어렵게 느끼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된 자리에 이르게 되면 생활 그 자체가 사랑의 생활이 되 는 것이다. 사랑이 있으면, 가진 자는 갖지 못한 자에게 베풀면서 살 게 된다.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빈부貧富 의 차差나 착취 등은 자연히 소멸하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효과는 사 랑의 평준화적용平準化作用에 기인한다. 이와 같이 인간이 심정적 존재라 245 는 말은 인간이 사랑의 생활을 하는 존재임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은 애적인간愛的人間(homo amans)이 되는 것이다. 심정은 인격의 핵심이 되기 때문에, 인간이 심정적존재라는 말은 인 격적 존재임을 또한 뜻한다. 그것은 심정을 중심으로 하여 생심과 육 심이 원만한 수수작용을 하게 됨을 뜻하며 또한 심정을 중심으로 지․ 정․의의 기능이 균형적均衡的으로 발달하게 됨을 의미한다. 타락한 인간에 있어서는 생심의 기능이 약해서 생심이 육심에 주관 당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이성(지적능력)이 대단히 발달해 있으면서 도 정적으로 미숙하거나 선을 행하려고 하는 의지력이 부족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받아서 심정적존재가 되면 지․정․의는 균형적으로 발달하고, 또 生心이 주체의 입장에서 육 심을 주관하면서 육심과 함께 원만한 수수작용을 행하게 된다. 심정은 또 성상의 핵심으로서 지․정․의의 기능을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정․의는 각각 진․선․미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기능 이기도 하다. 즉 지知는 인식하는 능력으로서 ‘진眞’의 가치를 추구하며, 정情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끼는 능력으로서 ‘미美’의 가치를 추구하며, 의意는 결의하는 능력으로서 ‘선善’의 가치를 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 추구는 모두 심정을 동기로 하고 이루어지고 있다. 지적활동知的活 動 에 의해서 진리를 추구할 때 그 성과는 과학, 철학 등의 학문으로 나 타나며, 정적활동情的活動에 의해 미를 추구할 때 그 성과는 예술로 나타 나며, 의적활동意的活動에 의해 선을 추구할 때, 그 성과는 도덕·윤리道德․倫 理 등으로 나타난다. 정치, 경제, 법률, 언론, 스포츠 등도 모두 지․정․의의 활동의 성과인 것이다. 따라서 심정은 지․정․의를 중심한 전체 문화활동의 원동력原動力 246 이 되고 있으며, 특히 예술활동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정․의의 활동의 성과의 총화總和가 바로 문화이며, 본연의 세계 에 있어서는 심정적 인간(사랑의 인간)이 문화활동의 주역이 된다. 이 내용을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3-1과 같다. 이와 같이 심정은 본래 문화활동文化活動의 원동력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룩했어야할 문화는 본래 심정문화心情文化였다. 이것이 참다운 문화이 며 하나님이 아담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했던 아담문화이다. 그러나 아 담․해와의 타락으로 심정문화는 실현되지 않았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 지 이기심을 기반으로 한 문화, 즉 지적활동, 정적활동, 의적활동이 통 일을 이루지 못한 문화, 따라서 분열된 문화가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그림 3-1. 심정 중심의 지 정 의와 가치와 문화의 관계 예컨대 경제활동에 있어서 인간은 오늘날까지 돈버는 것만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아 왔다. 그러나 본연의 세계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가난한 생활을 하는데, 자기만이 유복裕福한 생활을 하게 되면 마음에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 때문에 돈을 많이 모으면 이웃이나 사회에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즉 기업활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 하게 되는 것이다. 경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사람들은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여기에 심정문화, 사 247 랑의 문화가 세워지게 된다. 이때 지적활동, 정적활동, 의적활동은 사 랑을 중심하고 통일되게 된다. 이것이 통일문화統一文化이다. 따라서 사 랑의 문화는 바로 통일문화이다. 오늘날까지 인류는 참다운 문화, 항구적恒久的인 문화를 실현하려고 수없이 시도했으나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여러 문화가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한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참다운 문화, 항구적인 문화가 어떠한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 다. 중국에 있어서 공산주의식 문화운동인 ‘문화대혁명’도 그 일례一例 였다. 유물변증법을 근거로 하여 노동을 기반으로 한 문화가 참된 문 화인 줄 알고 일으킨 문화혁명이었으나, 그 결과는 인간성의 억압과 근대화의 지연遲延과 경제의 파탄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참다운 문화란 심정을 중심으로 한 문화 즉 심정문화로서, 문선생文先生님이 주창하고 계시는 신문화혁명新文化革命은 바로 심정문화의 건설운동인 것이다. 여기서 문화와 문명의 개념에 관해서 살펴보자. 지․정․의의 활동에 대한 성과의 총화를 과학과 기술 등의 물질적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을 문명이라 하고, 특히 종교, 예술 등의 정신적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을 문화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활동의 성과를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으로 명확히 구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문화 와 문명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통일사상에 있어서도 일반의 예에 따라서 문화와 문명을 동일한 뜻으로 사용할 때가 많다. (2) 로고스적 존재 로고스라는 말은 원상론에서 밝힌 대로 원상내原相內에 있어서 창조목 248 적을 중심으로 한 내적수수작용의 산물, 즉 신생체新生體를 의미한다. 여 기의 창조목적은 심정(혹은 사랑)을 터로 하고 있기 때문에 로고스도 심정이 그 터가 되고 있다. 우주는 이러한 로고스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로고스에 따라 운행하고 있으며, 이 로고스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다. 인간도 로고스에 의해 창 조되었고 로고스에 따라서 살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로고스적 존재이다. 로고스란 이미 언급한 대로 원상原相의 성상에 있어서 목적을 중심하 고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이 수수작용을 하여 생긴 신생체新生 體 로서, 내적성상 속의 이성과 내적형상 속의 법칙이 특히 중요한 구실 을 하고 있기 때문에 로고스는 이성과 법칙의 통일체統一體, 즉 이법理法 이 된다. 따라서 인간이 로고스적 존재라 함은 인간이 이법적존재理法的 存在 임을 뜻한다. 여기서 이성과 법칙의 특성은 각각 자유성自由性과 필연 성必然性이므로 로고스적 존재라는 말은 자유성과 필연성을 통일적으로 갖고 있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이성적 존재이면서 또한 법칙(규범)에 따라 살아가는 규범적 존재이다. 오늘날, 인간은 자유성을 갖고 있으므로 법칙(규범)에 따르는 것을 일종의 속박으로 알고 거부하는 사고방식이 만연되어 있다. 그러나 참 다운 자유는 법칙을 따르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지키 는 데에 있다. 법칙을 무시한 자유는 방종이어서 파멸을 가져올 수밖 에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차는 궤도위에 있으므로 빨리 달리거나 늦게 달리거나 할 수도 있고, 또 전진하거나 후진할 수도 있다. 그러 나 궤도를 벗어나면 기차는 전혀 달릴 수 없게 된다. 즉 기차는 궤도 위에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며, 궤도를 떠나면 기차 249 자체도 파괴되고, 인간이나 가옥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규범에 따라 살 때에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70이 되니 마음이 원하는 대로 行 하더라도 법도를 넘는 일이 없었다.”2) 라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70 세가 되어서 드디어 자유의지와 법칙이 통일된 완전한 로고스적 존재 가 될 수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인간은 로고스적 존재이므로 법칙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 본래의 모 습이다. 인간이 지켜야 할 법칙이란 우주에 작용하고 있는 법칙, 즉 수수작용의 법칙을 말한다. 그런데 원상에서 로고스가 형성될 때, 그 동기는 심정이다. 따라서 우주의 법칙은 사랑(심정)이 그 동기가 되었 고 사랑의 실현이 그 목적이 되었던 것이다. 존재론에서 말한 바와 같 이 가정은 우주의 질서체계의 축소체이다. 즉 우주에 종적․횡적인 질서 가 있는 것과 같이, 가정에 있어서도 종적․횡적인 질서가 있다. 종적질서와 횡적질서에 대응하는 가치관이 종적규범(종적가치관)과 횡적규범(횡적가치관)이다. 가정에서의 종적가치관이란 부모와 자녀간 에 있어서의 규범이며, 횡적가치관이란 형제자매의 관계 및 부부의 관 계에서의 규범이다. 또 인간에게는 개인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관 즉 개인적 규범도 있다.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인격을 완성하거나 유지하 기 위한 규범이다(이들 종적규범, 횡적규범, 개인적규범에 대해서는 가 치론과 윤리론에서 상세히 설명하고자 함). 가정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규범은 사회나 국가에 그대로 확대적용 된다. 결국 가정의 규범은 사회나 국가가 지켜야 할 규범의 근본이 되 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로고스적 존재가 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사회도 국가도 혼란상태에 놓여지게 되었다. 인간 250 이 로고스적 존재로서의 본성을 회복할 때, 비로소 가정도 국가도 본 래의 질서를 갖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3) 창조적존재 하나님은 그의 창조의 능력 즉 창조성으로써 우주를 창조했으며 그 창조성을 인간에게도 부여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은 부여받은 이 창조 성을 발휘하여 오늘날까지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여기 의 창조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하나님의 창조성은 심정을 기 반으로 한 창조의 능력이다. 이미 원상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주 창 조에 있어서 원상내부原相內部에는 다음과 같은 2단계의 수수작용이 행 하여졌는 바, 그 첫째는 내적수수작용이요 둘째는 외적수수작용이었 다. 내적수수작용은 심정에 의해 세워진 목적을 중심하고 내적성상과 내 적형상 사이에 벌어진 수수작용으로서 이 수수작용에 의해서 로고스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외적수수작용은 동일한 목적을 중심하고, 동 로고 스와 형상(본형상) 사이에 벌어진 수수작용으로서 이 수수작용에 의해 서 피조물이 생성되었던 것이다. 이 2단계의 수수작용은 바로 2단계의 발전적사위기대의 형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이란 결국 이 2단계의 발전적사위기대 형성의 능력, 즉 내적발전적사위기대 및 외적발전적사위기대 형성의 능력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어떤 것을 만들 때 먼저 목적을 세우고 설계를 하거나 구상을 한다. 즉 내적수수작용을 한다. 그리고 그 구상에 따라 물건을 만들게 된다. 즉 외적수수작용을 행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251 창조성을 주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심정을 터로 한 사랑으로써 만물 을 주관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주관이란 물적대상物的對象(자연만물, 재화 등)과 인적대상人的對象을 다루거나 다스리는 것을 뜻하며, 특히 만물 주 관은 물질을 다루는 것, 즉 물질의 취급, 관리, 처리, 보존 등을 의미 한다. 산업활동(1차산업, 2차산업, 3차산업), 정치, 경제, 과학, 예술 등 물질을 취급하는 일체一切의 활동이 모두 이러한 만물주관에 포함된 다. 하나님의 사랑을 갖고 이러한 주관활동을 하는 것이 본연의 주관 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완전히 계승繼承했더라면 이들 활동은 모두 하나님의 심정이나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영위될 수 있었을 것이 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라(창1:28), 즉 주관하라 고 하셨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물을 주관하려면 만물 을 주관할 수 있는 주관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 님은 대주관주大主管主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주관하실 수 있는 자격으로 서 창조성을 갖추고 계신 것과 같이, 인간도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주관주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성을 지니지 않으 면 안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성을 지니도록 하 기 위해서 성장기간을 두시고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인격적으로 완 성되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성장과정을 통하여 완성됨으로써만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받아 가지고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3) 그런데 주관은 본래 자기가 만든 것(자기 것)만을 주관하게 되어 있 지, 타인이 만든 것(타인 것)을 함부로 주관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인간 은 만물 창조가 끝난 뒤에 지음받았기 때문에 만물을 주관할 수는 없 252 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그리 고 자식은 자라서 부모의 권한을 상속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해와로 하여금 주관권을 상속받을 수 있는 조건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서 책임분담을 다하면서 성장하도록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 조건 이란, 인간도 우주의 창조위업創造偉業에 가담한 것과 동일한 가치의 조 건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바로 인간(아담․해와)이 자기의 책임분담 하에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만물을 총합總合한 실체상實體相이며, 소우주이기 때문에 인간 한 사람의 가치는 우주의 가치에 맞먹는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책 임분담으로 자기를 완성시킨다면 그 노력은 우주를 완성시킨 것(창조 한 것)과 동일한 가치의 노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담․해와에게 책임분담을 다하게 하신 이유였다. 즉 하나님은 아담․해 와도 하나님의 창조위업에 가담했다는 조건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서 책임분담에 의해서 완성토록 하셨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아 담․해와에게 성장기간 동안에는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원리강론’ 1987, p. 85: 성적性的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계명誡命을 주신 이후,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일체 간섭하지 않으셨다. 만일 간섭하게 되면 인간 책임분담責任分擔을 하나님 스스로 무시하는 입장이 되며, 미완성한 아담․해와로 하여금 만물을 주관하게 하는 모순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담 해와는 그 계명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만물을 주관하는 자격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계승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자기 중심적인 이성에 의한 창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개인레벨의 창조일 경우에는 자기이익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고, 가정레벨의 창조 253 일 경우에는 자기가정의 이익만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국가레벨의 경 우에는 자기 국가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창 조활동은 거의 자기중심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또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사고방식을 지속해 왔다. 그 결과 자연 파괴나 공해, 살륙병기殺戮兵器의 개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야기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심정을 중심으 로 한 본래의 창조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정이 창조성의 기 반이 된다는 것은 사랑을 동기로 하여 창조가 이루어져야 함을 뜻하며 올바른 가치관에 따라 창조활동이 행하여져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과 학자는 과학자이기 전에 먼저 가치적인 인간, 즉 인격자가 되지 않으 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윤리가 자연과학의 기반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이후, 과학자들은 객관적인 사실만을 탐구하면서 일체의 가치관을 배제해 왔다.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혼란상태가 오게 되었 다. ‘국제과학통일회의’가 개최될 때마다 문 선생님이 과학자들에게 가 치관을 다루도록 강조한 것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참다운 창조성을 회 복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즉 ‘자연을 사랑하고 인간의 가치를 재검토 하고, 인간 상호간의 사랑 그리고 사랑의 근본인 하나님을 찾음’4)으로 써 참된 창조성을 지닐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三. 격위적존재 한편 인간은 원상原相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성을 닮아서 주체격위와 254 대상격위를 지니게 되어 있다. 인간은 먼저 부모 앞에 대상으로서 출 생하며, 성장한 다음에는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낳고, 그 자식에 대하 여 주체의 위치에 서게 된다. 또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하위의 대상의 직급에서 출발하여 점차 상위의 주체의 직급으로 올라간다. 따 라서 인간은 먼저 대상격위에 머물러 있다가 점차로 주체격위로 옮아 가게 된다. (1) 대상격위와 주체 대상격위對象格位는 주체의 주관을 받는 입장(격위)인 동시에 주체에게 기쁨을 돌려주는 데에 그 존재의 의의가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기쁨 의 대상으로 지음받았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서 대상격위에 있는 인 간생활의 제1차적인 의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에 있다. 이 와 같이 인간은 먼저 하나님에 대하여 대상의 위치에 세워져 있기 때 문에 하나님의 여러 대신代身 위치에 대해서도 대상격위에 서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대신 위치란 예컨대 다음과 같다. 즉 백성에 대한 대통령이나 국왕, 자식에 대한 부모, 제자에 대한 스승, 부하에 대한 상관, 그리고 개인에 대한 전체 등이 그것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대상인 것처럼, 국민(백성)은 대통령이나 국왕의 대상 이요, 자식은 부모의 대상이며, 제자는 스승의 대상이요, 부하는 상관 의 대상이며, 개인은 전체의 대상인 것이다. 인간은 여러 주체들과 연관을 맺으면서 살아가게 되는데 대상격위에 있는 인간은 주체의 주관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대상으로서 주체에 대한 일정한 심적태도心的態度가 요구된다. 이것이 대상의식이다. 먼저 255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대상의식은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 즉 시봉심侍奉 心 혹은 충성심이며, 국가에 대한 국민의 대상의식도 충성심이다. 자식 의 부모에 대한 대상의식은 효성심이며,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대상의 식은 존경심 혹은 복종심이다. 또 상관에 대한 부하의 대상의식은 복 종심이며, 전체全體에 대한 개인의 대상의식은 봉사심奉仕心이다. 여기에 서 각각의 주체에 대한 대상들의 공통적인 대상의식은 온유와 겸손, 그리고 위하고자 하는 마음(위타심爲他心)인 것이다. 그런데 타락세계에 있어서는 역사상, 많은 독재자가 나타나서 대중 들의 대상의식을 이용하여 마치 참다운 주체인 것 같이 행동함으로써 국민의 존경이나 지지支持를 받아 왔다. 예컨대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차우세스쿠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거짓 주체들이 비록 일시적으로 대중들로부터 환영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대중 의 지지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 실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봉侍奉하고, 충성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대상의식을 의식적으로나 무의 식적으로나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대상의식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고자 하는 마음까지를 유발하게 된 다. 종교인들의 순교정신이 바로 그 예이다. 위대한 지도자의 추종자 중에 때때로 그 지도자를 위해서라면 생명까지 기꺼이 바치는 예가 가 끔 있음을 보는데, 이러한 예들은 참주체(하나님 대신입장)에 대한 대 상의식이 극한적으로 발로發露된 예이다. 그런데 일반대중은 누가 참주 체인가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독재자와 같은 거짓주체를 참주체主體로 착각하고 그를 맹목적으로 따름으로써 인류사회에 해악을 256 끼치는 일에 도움을 주는 결과를 낳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이리 하여 참된 주체를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필요 한 일이다. 대상의식은 윤리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오늘날 대상의식이 거의 마 비됨으로써 주체의 권위가 무시를 당하고 여기에 주체 대상의 질서가 사라져서 그로 말미암아 사회가 혼란상태에 빠지게 되어 윤리부재의 상태가 되고만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윤리의 확립을 위해서는 확고한 대상의식을 앞세우게 하는 의식의 개혁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2) 주체격위와 대상 주체격위는 대상을 주관하는 위치이다. 본래 인간이 성장하여 완성 하면 만물에 대해서 주체의 위치 즉 주체격위에 서게 된다. 즉 만물을 주관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런데 여기의 주체격위는 인간 대 인간 관계에 있어서의 주체의 위치를 말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인간생 활에 있어서 주체의 예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가정에서 부모 는 자녀에 대하여 주체이며, 학교에서 교사는 학생에 대하여 주체이 다. 사회에서 상사上司는 부하部下에 대하여 주체이며, 국가에서 정부는 국민에 대하여 주체이다. 또 전체는 개인에 대하여 주체이다. 그런데 주체가 대상을 주관하는데 있어서도 일정한 심적태도心的態度가 요구된다. 이것이 주체의식이다. 그것은 첫째로, 대상에 대해서 부단한 관심을 갖는 일이다. 그 동안 인간 소외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제기되어 왔는데, 그것은 여러 주체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말단의 대상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데에 기인한 것이다. 257 대상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주체가 그 대상에 대하여 책임 을 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대상은 주체에게 불신 을 품게 되고, 그 주체를 따르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주체는 주관의 대상에 대하여 망각지대忘却地帶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주체는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상관이 부하에게 명령하거나 대상을 지배하는 것이 주체의식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 실은 그렇지 않다. 참주관主管은 대상을 능동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행복과 이상, 기쁨과 생명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주체가 대상 을 사랑할 때 대상은 주체에게 충성하고 복종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 님이 대상인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주체는 대상을 사랑해야 한 다. 셋째로, 주체는 적당한 권위權威를 지녀야 한다. 주체가 사랑을 가지고 부하를 주관(통솔)할 때, 일정한 권위가 없이 동정심만 베푼다면 부하 는 믿음직한 상관上官이라는 이미지가 흐려짐과 동시에 긴장감이 풀어 져서 일하고자 하는 의욕이 저하된다. 따라서 주체는 적당한 권위를 지니면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에는 봄날과 같은 따뜻 한 사랑도 있으나 겨울의 차가움과 같은 엄격한 사랑도 필요한 것이 다. 이와 같은 권위를 갖춘 엄격한 사랑은 대상들의 주체에 대한 신뢰 도信賴度와 소속감을 제고提高시키며, 상관에의 복종심과 일에 대한 의욕 을 앙양시킨다. 여기의 ‘권위를 갖춘 엄격한 사랑’이란 ‘사랑을 내포한 엄격한 명령’을 말한다. 이와 같이 주체에게는 일정한 권위가 필요하나, 과다한 권위의식은 도리어 금물이다. 그런 권위에는 사랑이 깃들 수 없기 때문이다. 권위 258 가 지나치게 강하게 작용하면 부하는 위축되어 창조성을 발휘하기가 어렵게 된다. 상사가 부하를 꾸짖어도 부하가 감사함을 느끼면서 그 질책叱責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권위가 참권위이며, 바로 사랑을 내 포한 권위인 것이다. 하나님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권 위의 하나님이시다. 예컨대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비둘기와 양과 암소 의 헌제에 실패하였을 때, 그의 자식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 하셨다. 아브라함이 그 명령에 순종하여 이삭을 헌제로 바치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아노라”5)고 하셨다. 이것은 ‘이때까지 너는 내가 두려운 권위의 하나님인 것을 모 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네 아들을 제물로 바치도록 한 것이다’라는 뜻이 내포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 간이 자신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해서, 안이하게 생각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시며 도리어 두렵게 여기는 것을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권위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물에 대한 인간의 주체격위主體格位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랑은 심정을 터로 하고 이루어지기 때문 에 인간이 완성해서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받으면, 심정을 터로 한 하 나님의 창조성을 발휘하여 만물을 주관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사랑 (참사랑)을 가지고 만물을 주관하게 된다. 그 때, 인간은 참된 의미에 서 만물에 대한 주체격위에 서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마르크스주의 는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계획경제를 실시하게 되면, “인간은 자연에 대한 참다운 의식적인 주인이 된다”6)고 하였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는 인간이 계획경제를 실시함으로써 만물주관의 주체격위에 서게 된다 259 고 보고 있음을 뜻한다. 사랑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제의 개혁(계획경 제의 실시)에 의해서 인간이 만물주관의 격위에 서게 된다는 뜻이다. 과거 수 십년 동안 소련이나 중국 등에서 경제정책이 실패하고, 생산 성의 정체停滯 등으로 경제가 파탄된 것은 공산주의가 만물주관에 완전 히 실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물질주의적 인 간관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물질적인 인간은 만물에 대해서 참 다운 주체격위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3) 연체의식과 민주주의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실제로는 주체격위와 대상격위에 함께 서있다. 이것은 인간이 연체聯體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주체격위와 대상격위를 겸비한 존재, 즉 이중격위를 가진 존재이다. 이것을 연체격위聯體格位라고 한다. 연체격위는 이중목적, 즉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을 지닌다. 예컨대 어느 직장에 있어서 한 부서部署의 장(예: 과장, 부장)은 부하에 대하여 주체격위에 있으나 동시에 상사上司에 대 하여 대상격위에 처해 있다. 그 회사에 있어서 최고의 주체입장에 있 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대상격위에 있으므로 인간은 누구나 엄격히 말해서 모두 연체격위에 있는 것이다. 연체격위에 있어 서 취해야할 마음의 자세는 대상의식과 주체의식을 겸비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연체의식聯體意識이라고 한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인간은 먼저 대상격위에 있다가 다음에 주체격 위에도 서게 된다. 따라서 연체의식에 있어서는 대상의식이 우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주체의식은 대상의식의 기반위에 세워지는 것이 260 본연의 모습이다. 그런데 타락인간에 있어서 인간이 주체의 위치에 설 때, 대체로 주체의식을 우선하게 된다. 그 전형적인 예가 독재자들이 다. 독재자들은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자기의 뜻대로 하려고 한다. 그러나 본연의 사회에서의 지도자는 비록 최고의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항상 하나님 앞에 대상의 위치에 있음을 의식하고 겸 손성謙遜性을 잃지 않는다. 다음에 민주주의에 있어서의 연체의식에 대해서 살펴보자. 민주주의 의 기본원리는 다수결주의와 권리평등의 사상으로서 이 권리평등의 사 상은 로크(J. Locke, 1632~1704)의 ‘자연권自然權의 평등’ 사상에 근거 하고 있다. 홉스(T. Hobbes, 1588~1679)에 있어서는 인간의 자연상 태는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었으나 로크는 자연상태에 있어 서 자연법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에 있다 고 言明하면서, 자연상태에 있어서의 인간은 자연의 권리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평등한 권리- 를 가진다고 하였다.7) 이 자연권 사상의 토대가 되는 것은 고대(그리스시대)로부터의 자연법 사상이었다. 이 자 연법 사상에 근거한 권리평등의 사상이 근대민주주의 원칙의 성립의 동기가 되었다. 여기의 권리평등이란 개인 개인의 권리의 평등을 뜻함 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자연법에 근거한 권리평등의 사상을 정확히 말한다면 기 독교의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의 사상에서 온 것이다. 즉 존 로크의 자연권(권리평등權利平等)사상은 ‘인간의 평등한 자연권은 하나님으로부 터 부여받은 것이며,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의 평등권사상이 근대민주주의 성립의 참된 근거였다. 따 라서 평등사상은 ‘하나님 앞에 대상으로서의 인간의 평등’을 뜻하는 261 것으로서 본래 평등사상은 대상의식의 사상이며, 따라서 질서의식의 사상이었다. 즉 민주주의는 본래 대상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출발했던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발달함에 따라서 하나님의 모습은 점점 대중의 관심권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개인의 권리주장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 써 대상의식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러 개인은 본래대로의 대상의식이나 연체의식을 가질 수 없게 되었으며, 주로 주 체의식만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주체의식 만을 지닌 인간의 관계, 즉 주체와 주체의 관계로 변질되었으며 이 때 문에 오늘날과 같은 질서부재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주체와 주체의 관계는 본질상 상극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민주주의는 그 성립된 이후 상당한 기간 동안에는 비교 적 건전한 발전을 계속하였다. 그것은 기독교 정신에 의해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대상의식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후, 과학의 발달과 유물사상의 확산의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는 세속화되어 갔으며, 따라서 인류의 정신지도의 능력 또한 사라져 갔던 것이다. 게 다가 사회는 급속히 산업사회로 화하였고 가치관은 다원화多元化되어 갔 다. 이러한 사회환경의 변천과 함께 민주주의의 권리평등의 사상은 하나 님 앞에서의 대상의 평등에서 법 앞에서의 주체의 권리평등사상으로 변질되어 갔으며, 그 결과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민주주의의 모순 즉 주체와 주체의 상극적相剋的인 요인이 드디어 표면화되면서 여러 가지의 사회적 혼란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주체와 주체의 상호관계는 서로 상극의 관계이다. ‘+’전기와 ‘+’전기가 서로 배척하 262 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주체)의 권리평등의 사상은 기독교의 사랑과 같은 조절 기능이 없는 한 필연적으로 상충현상을 빚어내기 마련이다. 오늘날 세 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 충돌, 전쟁, 상호증오 등을 비롯하여 갖가지의 불화현상은 모두 이 주체와 주체간의 상극작용의 표현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민주주의의 ‘권리평등’ 사상은 시초부터 상극요 인을 안고 출발하였으며, 따라서 때가 이르면 그 상극작용은 반드시 표면화될 숙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 때가 당도하자 잠재해 왔던 상극작용이 표면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전 체 민주주의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강도, 방화, 테러, 파괴, 마 약중독, 부정부패, 성도덕의 퇴폐, 이혼율의 증대, 가정의 붕괴, 에이즈 (AIDS)의 확산, 성범죄의 만연 등도 실은 모두 이 민주주의의 상극적 요인을 바탕으로 하고 일어나고 있는 가치관의 붕괴현상의 결과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사회의 가치관의 붕괴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인간 의 머리에 다시 본래의 대상의식을 부활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인류의 참된 주체인 하나님을 다시 맞아들여야 하며 민주주의가 출발할 때의 본래의 정신 즉 인간이 하나님 앞에 평 등하다는 사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현대인들이 하나 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실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믿게 되면 자기의 상위자上位者를 존경하게 되고, 또 상위자는 하위자를 사랑으로 지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국민을 사랑하게 되고, 국민은 정부에게 충성을 다하게 된다. 이리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렸던 민주주의가 하나님을 중심한 민 263 주주의가 될 때,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병폐는 근본적으로 해결되게 된 다. 통일사상은 하나님을 중심한 민주주의를 “천부天父 중심의 형제주의 兄弟主義 ” 라고도 한다. 이것을 간단히 천부주의天父主義 또는 형제주의兄弟主 義 라고도 부른다. 부모없는 형제가 있을 수 없고 형제를 떠난 부모 또 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전인류는 참부모인 하나님의 참사랑을 중심하고 사랑의 형제자매가 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만물에 대한 인간의 주관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하나님 은 인간에게 3대축복의 하나로서 만물주관을 명하셨다. 그리하여 인간 이 타락하지 않고 완성했더라면 만물의 주관격위에 설 수 있었을 것이 다. 만물주관이란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이 만물을 단순히 지배하 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산업(제1차, 2차, 3차산업)활동을 위 시한 모든 경제활동과 제조활동, 기술활동이 모두 이 주관에 속한다. 그러면 이러한 만물주관에 대한 인간의 심적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은 만물에 대해서 사랑의 마음을 지니는 것이다. 만물에 대한 사 랑이란, 온정을 가지고 만물을 소중히 다루면서 위해 주는 것이다. 즉 사랑을 터로 하고 만물을 다루고 다스리는 것이다. 이러한 주관은 천 도天道에 따르는 주관이기 때문에 만물도 기뻐한다. 4. 결 론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은 본래 신상적존재神相的存在요, 신성 적존재神性的存在요, 격위적존재格位的存在이다. 이것이 고래古來로부터의 철학 적인 물음,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통일사상의 대 264 답인 것이다. 결론으로서 이상의 인간 본성에 관한 이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신상神相을 닮은 성상과 형상의 통일체統一體이다. (2) 인간은 신상神相을 닮은 양성과 음성의 조화체調和體이다. (3) 인간은 신상神相을 닮은 개성체個性體이다. (4) 인간은 신성神性을 닮은 심정적존재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인격적 존재, 즉 애적인간愛的人間(homo amans)이다. (5) 인간은 신성神性을 닮은 로고스적 존재요, 천도天道에 따라 사는 규 범적존재規範的存在이다. (6) 인간은 신성을 닮은 창조적존재創造的存在요, 심정을 중심으로 한 만 물의 주관주이다. (7) 인간은 이중목적과 연체의식을 지닌 격위적존재格位的存在이다. 위와 같이 엄청난 내용을 가진 귀하고 성스러운 존재가 인간의 본래 의 모습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본질적인 인간의 본성을 든다면, 그것 은 ‘심정적존재’이다. 오늘날까지 대표적인 인간관으로서는 이성을 인 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지성인知性人(homo sapiens)이나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을 인간의 본성으로 하는 공작인工作人(homo faber)등이 있 었다. 전자前者에 속하는 인간관이 그리스철학이나 근대 합리주의 철학 이며 후자後者에 속하는 인간관이 마르크스주의나 프래그머티즘이다. 이 에 대하여 통일사상은 인간의 본질이 심정 또는 사랑이라는 뜻의 애적 인간愛的人間(homo amans)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265 5. 통일사상에서 본 실존주의 인간관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추구한 대표적인 철학자들이 실존주의자들이 다. 실존주의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현실사회 속에서 본래의 모습을 잃 어버리고 절망하거나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인간이 어떻게 해야 그러한 절망이나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는가를 생 애를 바쳐서 찾았던 것이다. 여기서 5명의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 들의 주장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통일사상의 인간관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본성론의 이해를 보다 깊게 할 수가 있다고 보 기 때문이다. (1) 키에르케고르 1) 키에르케고르의 인간관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1813~1855)는 인간이란 무엇인 가라고 자문自問하고 “인간은 정신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이다.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자신에 관한 하나의 관계이 다.”8)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관계를 조정措定한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자기 이외의 제3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것을 곧 신 神 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본래적인 자기란 신 앞에 서있는 자기이다. 그런데 본래 신과 관계를 맺고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이 신으로 부터 떠나버렸다. 그 경위는 ‘불안의 개념’이라는 책 속에서 성서 창세 266 기의 이야기를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처음에 아담은 평화와 안식의 상태에 있었으나 동시에 불안(Angst)한 상태에 있었다. 신이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안 된다’고 알려주었을 때, 아담 속에 자유의 가능성이 자각되었으며 이 자유의 가능성이 아담을 불안에 빠뜨렸다. 그리고 아담이 자유의 심연深淵을 들 여다 봄으로써 현기증(Schwindel)을 느껴 자기에게 집착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원죄가 성립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자기자신에 대한 관계 속에 분열이 일어나 절망 (Verzweifelung)에 떨어져 버렸다. 그런데 인간은 이 절망을 위로부터 자기를 내리 누르는 어떤 무엇인 것처럼 착각하고, 자기 자신의 힘으 로 그 절망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으로는 결코 절망이 제거되지 않는다. 신앙에 의해서 신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만 본래의 자기의 관계를 되찾을 수가 있고, 절망에서 피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공중公衆은 일체一切이며, 무이다. 모든 세력 중에서 가장 위험 한 것, 그리고 가장 무의미한 것이다.”9)라고 하면서 대중의 무책임성 과 양심이 없음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인간이 참다운 인간성을 실현하 기 위해서는 비인간적인 대중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단독자로서 단지 홀로 신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본 래적인 자기에로 돌아가는 단계를 실존의 3단계라고 하여 다음과 같 이 설명하였다. 첫째의 단계는 ‘미적 실존의 단계’이다. 이 단계의 인간은 단지 직접 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감성적인 욕구에 따라 기지機智를 가지고 살려고 하며, 이 단계의 인간들에게 있어서 인생의 목적은 향락이다. 이것은 267 에로스적 사랑을 추구하는 심미가審美家, 유혹자의 입장이다. 그러나 향 락의 순간은 계속해서 반복되기 어려우며, 결국은 권태와 불안에 사로 잡히게 된다. 여기서 인간은 좌절하고 절망한다. 그러나 결단에 의해 다음의 단계로 옮아간다. 둘째의 단계는 ‘윤리적 실존의 단계’이다. 이 단계의 인간은 양심을 선악의 판단기준으로 삼고 살려고 한다. 즉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선량한 시민으로서 살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전적 으로 양심에 따라 살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다시 좌절하고 절망한 다. 그리고 새로운 결단에 의해 다음의 단계로 넘어간다. 셋째의 단계는 ‘종교적 실존의 단계’이다. 신앙을 가지고 신 앞에 홀 로 서는 단계이며, 이 단계에서 비로소 인간은 참다운 실존이 된다. 이 단계에 이르려면 비약이 필요하다. 그것은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역설逆說(Paradox)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예컨대 인륜에 반하는 신의 명령에 복종하여 자식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신앙이 나, 영원한 신이 유한한 시간속에서 수육受肉하여 인간(예수)이 되어 나 타났다고 하는 비합리적인 사실을 믿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을 수 없 는 것을 믿는 것을 그는 역설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약을 통하여 비로소 신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인륜에 반하는 신의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복종하여 자식 이삭을 제물로서 바치려고 한 행위를 키에르케고르는 종교적인 생의 전형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을 중심으로 한 실존, 즉 본래의 자기가 된 인간이 “자 기를 사랑하는 것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신을 매개로 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때, 그와 같은 “사랑 268 의 행위”에 의해서 참된 사회가 성립될 수가 있다고 그는 보았던 것이 다. 2) 통일사상에서 본 키에르케고르의 인간관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신에서 떠남으로써 “자기자신에 관한 관계” 에 분열이 생겨서 불안과 절망에 빠졌다고 하였는데, “자기자신에 관 한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그는 밝히지 않고 있다. 통일사 상에서 보면 이것은 마음과 몸 또는 생심과 육심의 관계라고 가상假想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이 가상을 전제로 하고 그의 ‘자기 자 신에 관한 관계’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그러면 이런 전제에서 볼 때, ‘자기 자신에 관한 관계에 분열이 생겼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신을 떠남으로써 마음과 몸이 분열된 것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본래적인 자기에 있어서는 신을 중심으 로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 타락으로 마음과 몸 이 갈라졌음을 뜻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고, 인간의 생심과 육심이 주 체와 대상의 관계를 회복하여 원만한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가능하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단독자로서 신 앞에 서게 될 때, 절대자(신) 에 대하여 절대적인 관계에 선다고 하였다. 이 단독자는 통일사상에서 의 인간본성의 ‘개성체’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자가 왜 절대적인가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인간의 ‘개 성체’가 절대적인 것은 인간이 절대자인 하나님의 개별상을 닮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키에르케고르의 ‘관계성’과 ‘단독성’은 통일사상의 269 마음과 몸의 ‘통일적관계’와 ‘개성체’의 개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이러한 이해는 인간본성 전체에 대한 이 해는 아니다. 인간 본성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은 ‘심정적존재’이다. 또 인간이 단독자로서 즉 개성체個性體로서 신 앞에 선다고 보는 것은 불완 전한 인간파악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부부로서 신 앞에 설 때 비로소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 된다. 인간은 양성과 음성의 조화체이기 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또 로고스적 존재이며 창조적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주체성과 대상성을 함께 구비한 격위적 존재이기도 하다. 단독자로서 홀로 신 앞에 선다는 그의 인간관은 진지한 것이기는 하지 만 그의 ‘인간’은 고독하고 쓸쓸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왜 신으로부터 떠나게 되었을까. 그 원인이 명백해지지 않는 한 본래의 자기 즉 신의 지음을 받은 대로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담이 자유의 가능성에서 오는 불안 때 문에 죄에 떨어졌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통일원리에 의하면 자유나 불안이 타락의 원인은 아니다. 인간 시조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말 씀을 지키지 않고 천사장의 유혹에 의하여 사랑의 방향성을 잘못 잡았 던 것이다. 즉 그들은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에 의해서 타락한 것이다.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탈선하려고 할 때 그들의 본심의 자유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데 대한 불안감을 일으켰으며, 이 불안감은 오히려 그들이 탈선하지 않도록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은 이 불안감을 누르고 그들로 하여금 타락선을 넘게 하였다. 이 타락의 결과로 인류는 신으로부터 떠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계명을 어긴 데에 대한 죄책감과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의 단절로 인하여 불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타락의 문제가 270 올바르게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의 불안과 절망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신의 사랑에 관한 개념도 막연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정을 가지고 대상을 무한히 위해 주고자 하는 정적 충동인 심정으로 서, 그 하나님의 사랑이 지상에 나타날 때에는 방향성을 갖추고 나타 난다. 즉 먼저 가정을 기반으로 하여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 의 사랑, 형제의 사랑과 같은 ‘분성적分性的인 사랑’으로 나타난다. 이것 이 다시 여러 방향으로 확대되어서 인류애, 민족애, 인인애隣人愛, 동물 에의 사랑, 자연에의 사랑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의 사랑에는 구체적인 내용과 방향성이 있으며, 막연한 사랑을 신의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허위와 싸워서 신에게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쳤다. 이것은 사회의 박해와 조소를 참으면서 신을 뵈려고 한 그 자신의 발걸음을 반영한 것이며, 진실한 신앙인의 모습을 갖도록 당시의 종교인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려는 충고이기도 한 것으로서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 다. 그는 27세때 레기네 오르센과 약혼하였으나 결혼으로 그녀를 불행 에 빠뜨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또 연애보다도 차원이 높은 이 상적 사랑을 실현해 보고자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게 되었지만 통일사상으로 볼 때 그는 무의 식중에 인격을 완성한 터 위에서, 신을 중심한 참다운 남녀의 사랑을 실현할 것을 원했다고 볼 수 있다. 본래의 인간상을 찾아 나아가는 키 에르케고르의 방향성은 기본적으로 통일사상의 입장과 일치한다고 볼 271 수 있다. (2) 니 체 1) 니체의 인간관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신 앞에 설 때 본래적자기가 된다고 하였으 나 니체(Nietsche, Friedrich Wilhelm, 1844~1900)는 그와 반대로 신에 대한 신앙에서 해방될 때, 인간은 비로소 본래적 자기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니체는 당시 유럽사회에서의 인간의 수평화, 왜소화矮小化를 개탄慨歎하 고, 그 원인이 기독교의 인간관에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는 생(생명)을 부정하고 금욕주의를 주장하면서 인간의 가치를 피안에 두었다. 또 만 인은 신 앞에 평등하다고 말했다. 그 결과 인간의 활발한 생명력을 소 실시키고 강한 인간을 끌어내리어 인간을 평균화하였다고 보았던 것이 다. 그리하여 그는 ‘신은 죽었다’(Gott ist tot)라고 선언하면서 기독교를 공격했다. 기독교의 도덕은 신이나 영혼이라는 개념으로 생과 육체를 억압하고, 생의 현실을 부정적으로 봄으로써 강한 인간에의 길을 막았 으며, 약자나 고생하는 자를 후원하고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도덕을 그는 노예도덕奴隷道德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기독 교적인 사랑의 생활, 정신적인 생활을 물리치고 본능에 의한 생활, 생 명이 욕구하는 대로의 생활을 전면적으로 긍정하였다. 생명이란 성장하려고 하는 힘이며, 발전하려는 힘이다. 그는 “대체 272 로 살아 있는 자를 발견하는 곳에서 나는 권력에의 의지도 발견하였 다. 그리고 복종하며 봉사하는 자의 의지 속에서도 나는 주인이 되려 고 하는 의지를 발견하였다”10) 라고 하였으며, 인간의 모든 행위의 근 저根底에는 보다 강대해지고자 하는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 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독교의 노예도덕을 대신하여 권력의 크기를 가치기준으로 하는 군주도덕(영웅도덕)을 수립했다. 그는 선과 악의 기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이란 무엇인가?-권력의 감정을, 권력에의 의지를, 권력자체를 인간에 게 높이는 모든 것이다. 악이란 무엇인가?-나약으로부터 유래하는 모든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권력이 성장한다는 것, 저항을 이겨낸다는 것의 감 정,…… 약자나 잘못된 것 등은 철저하게 몰락해야 한다. 이것이 즉 우 리들의 인간애의 제1명제이다. 그리고 그들의 철저한 몰락을 도와주어 야 한다. 어떠한 배덕背德보다도 유해한 것은 무엇인가? 모든 잘못된 것 과 모든 약자에 대하여 아주 불쌍히 여기는 것, 이것이 기독교이다.11) 그의 군주도덕에의 한 이상적 인간상은 ‘초인超人’(Übermensch)이다. 초인이란 인간의 가능성을 극한에까지 실현한 존재로서 권력의지의 체 현자體現者이다. 초인의 가능성은 모든 생의 고통을 견디고 생을 절대적 으로 긍정하는데 있다. 생을 절대적으로 긍정한다는 것은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고 있다.”12) 라는 영겁회귀永劫回歸의 사상, 즉 세계는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이 영원 히 반복한다는 사상을 견뎌내는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운명도 이를 273 인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움으로 보는 것”, “운명을 사랑하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하면서 “운명애運命 愛 ”(amor fati)를 주장하였다. 2) 통일사상에서 본 니체의 인간관 기독교의 극단적인 내세주의에 의하여, 인간은 현실의 생활을 존중 할 수가 없게 되어서 약체화하였다고 니체는 생각하였으나, 인간의 본 성을 회복하려고 고뇌한 그의 진지한 노력은 그 나름대로 높이 평가되 어야 마땅하다 할 것이다. 니체의 주장은 기독교에 대한 하나의 참소 요, 경고였다. 즉 기독교가 그 본래의 정신에서 이탈하고 있다고 니체 는 생각하였다. 니체가 본 기독교의 하나님은 높은 곳에 앉아서 좋은 일을 한 사람에게는 사후死後의 부활을 약속하고, 나쁜 일을 한 사람에 게는 벌을 준다는 심판의 신이고, 피안적彼岸的인 신이었다. 그러나 니체 가 비난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 그 자체가 아니고 예수의 가르침을 피 안주의로 변화시킨 바울이었다.13) 통일사상에서 보면, 하나님은 현세를 부정하고 높은 곳에만 계시는 피안적인 신만은 아니다. 신의 창조목적은 사후의 세계에 있어서의 천 국이 아니라 지상천국의 실현이었다. 그리고 지상에 천국이 실현되었 을 때, 지상에서 천국생활을 체험한 사람들이 사후에 천상천국에 들어 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명도 본래는 지상천국의 실현이었 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울이 피안주의로 변질시켰다고 하는 니체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태민족의 불신앙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구원은 영적인 구원이 되었고 현세에 274 있어서의 인간은 항상 악의 주체인 사탄의 침입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을 비난한 나머지 기독교 그 자체를 부정하고 신의 죽음까지 선언한 것은 잘못이었다. 다음은 모든 생명을 지닌 존재에는 권력의지가 있다는 니체의 주장 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창세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인 간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라”하는 축복을 주셨다. 즉 신은 인간에게 주관성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지배욕(주관욕) 그 자체는 신으로부터 주어진 인간의 본성의 하나이다. 이 지배(주관)의 위치는 통일사상에서 볼 때, 인간의 본성의 하나인 ‘주체격위’에 해당한다. 그런데 ‘주체격 위’의 항목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본래의 주관主管은 사랑에 의한 주관이 지 힘에 의한 주관은 아닌 것이다. 즉 주관성을 발휘하는 전제조건으 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여 인격을 완성하고 가정생활에 있어서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기대위에 서 참다운 주관성이 발휘되는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그와 같은 기반 을 무시하고 단지 “권력의지”만을 전면에 내세웠으니 거기에 니체의 또 하나의 잘못이 있다 하겠다. 니체는 기독교의 도덕이 강자를 부정하는 약자의 도덕이라고 하였으 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 참다운 주관성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참사랑을 가르쳤으며, 또 가르쳐야만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육신의 본능적 욕망을 통하여 작용하는 악의 힘과 싸우 지 않으면 안 된다. 육신의 본능적 욕망 그 자체가 악은 아니지만 타 락인간은 육신을 주관해야 할 영인체의 심령기준이 미완성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인간이 육신의 본능적 욕망에 따라 살면 악(사탄) 의 힘에 지배되고 만다. 영인체의 심령기준이 높아져서 육신을 주관하 275 게 될 때, 즉 생심이 육심을 주관하게 될 때 비로소 육신의 움직임은 선하게 된다. 그런데 니체는 정신, 사랑, 이성을 무시하고 육체, 본능, 생명을 중 시하라고 외쳤다. 이것은 인간의 영인체를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인간 에게서 영인체를 무시할 경우 무엇이 남을 것인가. 동물적인 육신만이 남는다. 즉 니체는 인간을 동물의 격위에까지 격하시킨 결과를 초래했 다. 따라서 인간에 대해서 강대해지라고 하는 것은 맹수가 되라고 하 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은 신이 창조하려고 한 참다운 인간의 모 습이 아니다. 인간을 본래의 모습으로 인도하고자 한 그의 노력은 높 이 평가해야 할 일이지만 그 방법이 전혀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 간은 ‘성상과 형상의 통일체’로서 성상이 주체요 형상이 대상인데도 불구하고, 니체는 인간의 형상적인 면만을 중시하고 성상적인 면을 무 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기독교人들이, 예수님이 지상천국을 실 현코자 오셨던 사실을 망각하고 지상의 생활을 자칫 경시하려는 경향 에 대해서 경고를 발한 점은 높이 평가되어도 좋을 것이다. (3) 야스퍼스 1) 야스퍼스의 인간관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에 있어서의 실존이란 개체로 서의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깨달은 자아를 말한다. 그는 “실존이란 결 코 객관客觀이 될 수 없는 것이고, 내가 그것에 근거하여 생각하고, 또 행동하는 근원이며…… 실존이란 자기 자신에 관련되고, 그렇게 함으 276 로써 초월자에 관계하는 것(그 무엇)이다”14) 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사고방식이다. 그는 초월자(Transzendenz) 또는 포괄자包括者(Das Umgreifende)를 아직 만나지 아니한 실존 즉 본래적 존재를 찾아 나아가는 과정에 있 는 실존을 “가능적 실존”(mogliche Existenz)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 로 인간은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가능적 실존’이며, 그러 한 상황에 대처해 가면서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나 야스 퍼스는 죽음(Tod), 고뇌(Leiden), 투쟁(Kampf), 부채負債(Schuld) 등 ‘우리들이 넘을 수도 없고 변경할 수도 없는 상황이 존재한다.’15)라고 지적하고 이것을 ‘한계상황限界狀況’(Grenzsituation)이라고 하였다. 인간 은 영원히 사는 것을 원하지만 누구나 죽음을 면할 수는 없다. 죽음은 자기의 존재의 부정이다. 또 인간에게는 육체적인 고통, 질병, 노쇠, 기아 등의 고뇌가 있다. 또 인간이 살아있는 한 투쟁은 피할 수 없으 며, 자기라는 존재가 타자를 배척한다고 하는 빚(부채)을 지면서 살아 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계상황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 을 자각함으로써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 이 좌절을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결정된다. 한계상황을 도피하지 않고 좌절을 직시直視하며 묵묵히 그리고 성실히 그것을 수용할 때, ‘세계존재를 넘어서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그 무 엇)이 느껴지게 된다’16) 는 것이다. 즉 그 때까지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되던 자연의 배후에, 역사의 배 후에, 철학의 배후에, 예술의 배후에 초월자 즉 신이 있어서 우리들을 포옹하고,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음을 홀연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 때 초월자는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암호로써 277 나타난다. 초월자는 자연이나 역사, 철학이나 예술 등을 통하여 암호 로 나타나서 인간에게 말을 건네 오는 것이다. 그리고 한계상황 속에 서 좌절을 체험한 자가 그 암호를 풀 수가 있다. 이것을 ‘암호해독暗號解 讀 ’(Chiffredeutung)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하여 인간은 암호를 해독함 으로써 다만 혼자서 초월자를 향하여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이 “참된 자기의 실존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을 만난 다음부터 인간은 타인과의 사귐(교제)을 통 하여 사랑을 실천한다. 서로 대등한 입장에 서서 각자의 자립성을 인 정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본래 인간의 삶이며, 타인과의 교제를 통하여 실존이 완성되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 다. “일체의 목적의 의미에 최종적인 근거를 주는 철학의 목적, 즉 존 재를 내적으로 각지覺知하고 사랑을 개명開明하며 평안을 완성한다는 목 적은 사귐에 있어서만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다.”17) “실존의 사귐은 긴 장의 관계이며 사랑의 싸움이다.”18) 2) 통일사상에서 본 야스퍼스의 인간관 야스퍼스는, 인간은 보통 초월자를 발견하지 못한 가능적 실존이지 만 한계상황을 통과함으로써 초월자에 관계되는 실존, 즉 본래의 자기 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왜 인간은 보통, 가능적 실존으로서 초월자로 부터 떨어지게 되었는가? 또 왜 인간은 한계상황을 통과할 때에 초월 자를 만나게 되는가? 야스퍼스는 이에 대해서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 나 그것이 명백히 밝혀지지 않는 한, 본래의 자기는 무엇인가, 또 어 떻게 해야 본래의 자기를 회복하는가 하는 것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278 없는 것이다. 통일원리에 의하면 인간은 창조목적을 완성하도록 지음받았다. 창조 목적의 완성이란 3대축복의 완성, 즉 인격의 완성, 가정의 완성, 주관 성의 완성을 뜻한다. 그런데 인간시조인 아담과 해와는 성장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인격이 미완성한 채 타락했으며 비원리 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부부가 되어 가지고 죄의 자녀를 번식하게 되었 다. 그 결과 전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비원리적인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사 랑을 중심하고 창조목적을 완성하는 것이, 본래적인 자기를 회복하는 길이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이 창조목적을 실현할 때 나타나게 되어 있다. 야스퍼스는 키에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에 관계하면서 초월자 에 관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실존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통일사상으 로 볼 때 3대축복중의 제1축복인 인격완성만을 다룬 입장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통일사상이 말하는 인간본성의 “성상과 형상의 통일체” 에 해당한다. 야스퍼스는 타인과의 사귐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하지 않 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나, 이 사랑 역시 키에르케고르의 경우와 마찬 가지로 막연하다. ‘참된 사랑’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온정을 가지고 대상을 한 없이 위해 주고자 하는 정적인 충동으로서, 이 사랑이 가정을 통하여 네 대상을 향하는 사랑(부모에 대한 자녀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자녀 상호간의 사랑)으로서 분성적으로 나타난다. 이 네 대상에의 사랑을 기본으로 할 때 타인과의 교제에 있어서의 사 랑이 원만해지게 된다. 야스퍼스는 실존의 사귐은 긴장의 관계이고 사 279 랑의 싸움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사랑의 본질은 기쁨이다. 따라서 본래의 사랑은 긴장이나 싸움으로 표현될 성질의 것 이 결코 아니다. 다음의 문제는 왜 “한계상황을 통과함으로써 인간이 초월자를 만날 수 있게 되는가”라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인간이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좌절을 직시하고 성실히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을 만난다고 했 다. 그러나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좌절을 성실하게 받아들인 사람 중에 는, 니체와 같이 신으로부터 더욱 멀어진 사람도 있고, 키에르케고르 처럼 신에게 더욱 가까워진 사람도 있다. 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이유가 야스퍼스의 철학에서는 명백하지 않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버렸으며 악의 주체인 사탄의 주관 하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무조건 하나님 에게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속죄의 조건 -탕감조건蕩減條件 - 을 세우고서만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야스 퍼스의 한계상황에서의 절망과 좌절은 탕감조건에 해당하는 것이며 그 조건을 뜻맞게 세움으로써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한계상황에 있어서 고통을 견디어 내면서도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마 태 7:7)’라고 한 것같이 자기중심을 버리고 절대적인 주체(하나님)를 찾으려고 하는 대상의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중심적인 주체의 식만을 가지고 있거나, 원념怨念이나 복수심을 품고 있는 한, 아무리 한 계상황을 통과해도 신을 만날 수는 없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좌절의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인간은 초월자를 만난다고 하였으나, 암호해독으로 알려진 신은 상징적인 신에 불과하며, 따라서 280 그것만으로는 신의 참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신의 창조목적과 인간타 락의 사실을 알고,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3대축복의 실현을 위 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심 정을 체휼할 수가 있고 참다운 실존(본연의 자아)이 될 수 있는 것이 다. (4) 하이데거 1) 하이데거의 인간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99~1976)는 인간을 ‘현존재現存 在 ’(Dasein)라고 규정했으나 근대 철학이 말한 ‘인간’처럼 세계를 향해 서있는 자아로 보지는 않았다. 그것(현존재)은 ‘현재 거기에 있는’ 개 개의 인간의 존재(Sein)를 의미한다. 현존재는 세계 속에 있으면서 다 른 존재자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관심을 가지고 자기의 주변을 살피 고 타인에게 마음을 쓰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 의 이와 같은 근본적인 존재방식을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라 고 하였다. 세계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주사위처럼 세상 속에 던져져 있는 것을 뜻한다. 인 간은 이 지상에 태어나려고 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주사위처럼 이 세상에 던져져 있음을 깨닫게 됨을 뜻한다. 이러한 상태를 피투성被投性(Geworfenheit) 또는 사실성事實性(Faktizit- at)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보통 일상생활에 있어서, 주위의 의견이나 사정에 자신을 맞 281 추어 가는 동안에 자기의 주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것이 본래의 자 기를 상실한 이른바 ‘속인俗人’(Das Man)의 입장이다.19) ‘속인’은 일상 생활에서 잡담으로 소일하거나 호기심에 사로잡혀서 애매함속에 안주 하고 있다. 이것을 현존재의 퇴락頹落(Verfallen)이라고 한다. 이유도 없이 세계 속에 던져져 있는 현존재는 불안(Angst)속에 있으 나 그 불안의 유래를 더듬어 보면 결국 죽음에의 불안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불안 속에서 막연히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은 어차피 “죽음에의 존재”(Sein zum Tode)임을 적극적으로 인정하 고 진지하게 미래를 향하여 결의하고 살아갈 때, 본래의 자기를 지향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미래를 향하여 자기자신을 던지게 된다. 즉 자신의 미래를 기획企劃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투 기投企(Entwurf)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존재의 성질을 실존성 (Existenz)이라고 한다. 이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자기를 던지는 것일까. 그것이 양심의 소리이다. 양심의 소리(Ruf)란 퇴락한 자기에서 본래의 자기로 돌아갈 것을 바라는 내적인 호소이다. 하이데거는 양심의 소리에 대하여 다음 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소리는 틀림없이 세계 속에서, 나와 함께 있는 타인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양심의 소리는 나의 속에서 그 러면서도, 나를 넘은 곳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다.”20) 하이데거는 또 인간의 현존재의 존재의 의미를 시간성(Zeitlichkeit) 에서 파악하기도 한다. 현존재의 존재방식은 던진다는 면(앞으로 기획 한다는 면)에서 보면 “자기에 앞서 있음”(미래에 있음)이며 던져져 있 다는 면(과거에 이미 던짐을 받았다는 면)에서 보면 “이미 속에 있음 (세계 속에 던져져 있음)”이며 관심을 가지고 환경을 살피며 타인에게 282 마음을 쓰고 있다는 면에서 보면 존재자의 “옆에 있음”이다. 이들 세 가지 계기를 시간성에 비추어 보면 각각 미래(Zukunft), 기존旣存(과 거:Gewesenheit), 현재(Gegenwart)에 해당한다. 인간은 세계에서 떠난, 고립된 자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 를 인수하면서 현재의 퇴락에서 자기를 구제하기 위하여, 미래의 가능 성을 향하여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시간성에서 본 인간관이다. 2) 통일사상에서 본 하이데거의 인간관 하이데거는, 인간은 세계내존재이며, 본래의 자기를 상실한 “속인” 이며 그 특성은 불안이라 하였다. 그러나 왜 인간은 본래의 자기를 상 실하였는가, 또 본래의 자기는 어떤 것인가를 그는 명백히 밝히지 않 고 있다. 본래의 자기를 향하여 자신을 던진다고 하나 그 목표로 삼아 야 할 인간상이 불분명하면, 똑 바로 본래의 자기로 향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가 없다. 그는 양심의 소리가 인간에게 본래의 자기로 돌아 오도록 인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라고는 말 할 수 없다. 인간이 양심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며, 이 상식적인 것을 철학적으로 표현한데 불과하기 때문 이다. 신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결국 니체와 같이 본능적인 생 명에 따라 사느냐, 하이데거와 같이 양심에 따라 사느냐의 어느 한 쪽 을 택할 수밖에 없다. 통일사상에서 볼 때, 양심에 따라 사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인 간은 본심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양심은 각자가 선이라고 생각 283 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양심의 기준이 다르다. 따라서 양심에 따라 살 때 그것이 본래의 자기를 지향하고 있는지 아 닌지를 아무도 확언確言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는 본심에 따라 살 때, 인간은 비로소 본래의 자기를 향하여 가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막연히 미래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미 래를 향하여 결의할 때, 불안에서부터 구제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본 래의 자기모습이 명백하지 않은데 어떻게 불안에서 구제될 수가 있을 것인가. 통일사상에서 보면 불안의 원인은 신의 사랑에서 떠난 데에 있다. 따라서 인간은 신께로 되돌아가서 신의 심정을 체휼하여 심정적 존재가 될 때, 비로소 불안에서 해방되고 평안과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죽음도 결의된 죽음으로서 받아들일 때, 죽음에의 불안 을 초월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을 해결했다 고는 할 수 없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인간은 영인체와 육신의 통일체, 즉 성상과 형상의 통일체이며, 육신을 토대로 하여 영인체가 성숙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지상의 육신생활을 통하여 창조목적을 완성 면 성숙된 영인체는 육신의 사후, 영계에서 영원히 산다. 인간은 “죽 음에의 존재”가 아니고 “영생의 존재”이다. 따라서 육신의 죽음은 곤 충의 탈피에 해당하는 현상에 불과하다. 죽음의 불안은 죽음의 의의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며, 또 자기의 미완성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 적으로 느끼는 데서 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또 인간(현존재)이 시간성을 가진다고 하였다. 즉 인간은 과거를 인수받고 현재의 퇴락에서 떠나 미래를 향하여 투기하지 않으 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명백하지 않다. 통일원리에 의하면, 인간은 아담․해와의 타락 이후 혈통적으로 원죄를 계승하였을 뿐만 아 284 니라 조상이 범한 유전죄나, 인류나 민족이 공통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는 연대죄를 짊어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죄를 청산하기 위한 조건(탕감조건)을 세우면서 본래의 자기와 본래의 세계 를 복귀하는 과업을 사명으로서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이 과업은 인간 일대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자자손손 바톤을 계승하면서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과거의 조상들이 다하지 못하고 남겨놓은 탕감조건을 인수해서 현재의 내가 그것을 청산하고 또 미래의 자손에게 복귀의 터전을 물려주는 것이다. 이것이 통일사상 에서 바라본, 인간이 시간성을 가진다는 것에 대한 참된 의미이다. (5) 사르트르 1) 사르트르의 인간관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는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일이라도 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신의 실존에 대한 부정에 서부터 출발했다. 하이데거는 신이 없는 실존을 주장했지만 사르트르 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신을 부정하는 실존을 말하였다. 그는 이 사실 을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로써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 고 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은…… 인간은 우선 존재하고 세계 속에서 만나고, 세계 내에 별안간 모습을 나타내고 그 후에 정의되는 것을 뜻하 는 것이다. 실존주의자가 생각하는 인간이 정의 불가능한 것은, 인간이 285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후에 이르러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며 인간은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의 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본성을 생각하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21) 도구는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그 제작자에 의해서 그 용도나 목적, 즉 본질이 결정된다. 따라서 본질이 존재에 선행한다. 마찬가지로 만 일 하나님이 존재하고, 하나님의 관념에 따라 인간이 만들어졌다고 한 다면, 인간에 있어서도 본질이 존재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르트르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은 처음부터 결정 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본질에서가 아니라 무에서 출현한 것이다. 다음에 그는 ‘실존은 주체성이다’라고 하였다. 인간은 무에서 출현한 우연적 존재이며 누구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스 스로 자신의 존재방식을 계획하고, 자신을 선택한다. 이것이 그가 말 하는 주체성의 의미이다. 즉 공산당원이 되거나 기독교도가 되거나 결 혼을 하거나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이와 같은 실존의 근본적 성격을 ‘불안’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을 선택하나 그것은 동시에 “각인各人은 자신을 선 택함으로써 전인류를 선택한다”22)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자기를 선택 한다는 것은 전인류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것을 뜻하며 여기에 우리 들의 불안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안은 행동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 고 오히려 행동의 조건 그 자체이며, 행동 그 자체의 일부라고 한다. 인간은 또 “자유”로운 존재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인간은 무엇 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으며, 어떠한 일도 허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286 그러나 자유롭다는 것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일체의 책임이 자기에 게 있음을 뜻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인간에 있어서 무 거운 짐이며, “인간은 자유로워지도록 저주받고 있는 것”23)이다. 즉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 다. 인간은 자유이다.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이다. 만일 한편에 있어서 하나님 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가치 나 명령을 눈앞에서 발견할 수가 없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우리들의 배 후에도, 또 전방에도, 명백한 가치의 영역에 정당화를 위한 이유도, 핑 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들은 핑계도 없어 고독하다. 그것을 나는 인간이 자유의 형에 처해져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24) 인간이 주체성이라고 하면 인간은 그 주체성을 발휘하지 않을 수 없 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주관받아야 할 대상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런 데 존재에는 ‘즉자존재卽自存在’(etre-en-soi)와 ‘대자존재對自存在’(etre- pour-soi)가 있다. ‘즉자존재’는 그 자체로서 있는 만물이며, ‘대자존 재’는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이 주체성을 발 휘함에 있어서 즉자존재(만물)를 대상으로 할 때에는 문제가 없지만, 대자존재(인간)를 대상으로 할 때에는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주체성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타인도 또한 주체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고 있을 때, 그 인간존재를 ‘대타존재對他存 在’ (etre-pour-autrui) 즉 타자他者를 대하고 있는 존재라고 한다. 대타 존재의 근본적구조(상호관계)는 시선視線을 보내는 자가 되거나 287 시선을 받는 자가 되거나 혹은 타자他者가 나의 대상이거나 내 가 타자의 대상이거나 하는 관계이다.25) 즉 인간관계는 끊임없는 상 극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존재는 타인을 초월하거나 혹은 타인에 의해 초월되 거나 하는 이 딜레마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하려 해도 소용이 없다. 의 식개체意識個體의 상호간의 관계의 본질은 공동존재共同存在(Mitsein)가 아 니고, 상극相剋(conflict)이다.”26) 2) 통일사상에서 본 사르트르의 인간관 사르트르는 인간에 있어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하고, 인 간은 자신을 만든다고 하였다. 하이데거도 마찬가지로 인간은 미래를 향하여 투기投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나 그의 경우에 있어서의 양심의 소리는 막연하지만 인간을 본래의 자기에게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경우에 있어서 본래의 자기라는 것은 완전히 부정 되어 버린다. 이것은 신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버린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만일 사르트르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에 있어서 선악 의 기준은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어떠한 행위를 하더라도 자기의 책 임으로 결단했다면 그것만으로 합리화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사회는 윤리부재倫理不在의 사회가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르트르는 또 인간은 주체성主體性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상은 인간은 주체성인 동시에 대상성對象性이다라는 것, 즉 인간의 본성은 주체격위主體格位인 동시에 대상격위對象格位라는 것을 주장한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주체성이란 자유로이 자기를 선택 288 한다는 것을 말하며 또 타자를 대상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통 일사상이 말하는 주체성은 사랑으로써 대상을 주관하는 능력을 말한 다. 참다운 주체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먼저 대상성을 확립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먼저 대상격위에 서있으면서 대상의식을 지 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대상격위의 단계를 거쳐서 성장 또는 승진하여 드디어 주체 격위에 서서 주체성을 발휘하게 된다. 또한 사르트르에 의하면 人間 상호간의 관계는 주체성과 주체성의 상극의 관계 혹은 자유와 자유의 상극의 관계이다. 이것은 홉스의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통 하는 사상으로서 분명히 잘못된 주체관이며 잘못된 자유관이다. 이러 한 주체관이나 자유관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민주주의사회의 혼란을 해 결할 수 없다. 인간은 주체성과 대상성의 양면을 갖추어야 하며, 동시 에 그 양면의 기능이 원만한 수수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때에 비로소 평화의 세계가 실현되는 것이다. 또한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통 일사상에서 보면 자유란 저주받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원리原理를 떠나 서는 있을 수 없으며, 원리는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규범인 것이다. 따라서 참된 자유는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자유인 동시에 규범 안에서 의 자유이다. 규범을 떠난 자유는 실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放縱이다. 289 제4장 가 치 론 Axiology 오늘의 시대는 대혼란大混亂의 시대요, 대상실大喪失의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 전쟁과 분쟁은 그칠 줄 모르며 테러, 파괴, 방화, 납치, 살인, 마약중독, 알콜중독, 성도덕의 퇴폐頹廢, 가정의 붕괴, 부정부패, 착취, 억압, 모략, 사기, 중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악덕현상惡德現象들이 세 계를 뒤덮고 있다. 이와 같은 대혼란의 와중에서 인류의 귀중한 정신 적 유산들은 거의 상실되어 가고 있다. 인격의 존엄성의 상실, 전통의 상실, 생명의 존귀성의 상실, 인간 상호간의 신뢰성의 상실, 부모 및 교사의 권위상실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혼란과 상실이 오게 된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전통적인 가치관價値觀의 붕괴 때문이다. 즉 진․선․미에 대한 전통적인 관 념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선에 대한 관념이 사라지 면서 윤리․도덕관이 급속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가치 관의 붕괴의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을 배 제排除하고 종교를 경시輕視해 왔기 때문이다. 전통적 가치관의 대부분은 종교적 기반 위에서 성립된 것인데, 이 기반이 무너지니 가치관은 필 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290 둘째로, 유물론이나 무신론 특히 공산주의 이론의 침투에 의한 가치 관의 파괴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을 두 계급으로 구분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립을 선동煽動하고 불신감을 증대시키면서 철저한 적개 심을 불러일으키곤 하였다. 공산주의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봉건적封建的 이라든가 체제유지를 위한 도구라고 비판하면서 가치관의 붕괴를 기도 企圖 해 왔다. 셋째로, 종교 상호간의 대립이나 사상 상호간의 상충 때문이다. 이 러한 대립이나 상충이 가치관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가치관은 종교 나 사상의 기반 위에서 세워지기 때문에, 종교나 사상에 대립과 상충 이 있게 되면, 사람들은 가치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게 되며, 따라서 일정한 가치관을 반드시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고방식이 팽배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넷째로, 중세 이후 전해 내려온 전통적인 종교(유교, 불교, 기독교, 회회교 등)의 덕목德目들이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현대인들을 설득 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 속에는 비과학적 인 내용들이 적지 않으며, 따라서 과학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를 갖 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종교적 가치관은 수용되기 어려 웠던 것이다.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의 원인을 이와 같이 분석할 때, 여기에 필연 적으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 없이는 앞으로 도래到來하게 될 미래의 이상사회를 대비할 수 없 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새로운 가치관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것 은 먼저 기존의 모든 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모든 사상의 가치관을 함께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또 유물론이나 무신론을 극복할 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