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 교리 원문/원리강론/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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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강론 원문 004/008.

원문

창조원리(創造原理)에서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인간이 그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만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시려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뜻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관여할 수 없으나, 그 '뜻성사'에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책임분담이 가담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해와를 중심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사실상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않는 것으로, 그들에게 맡겨진 책임분담을 그들 자신이 완수함으로써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창세기 2장 17절). 따라서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는 데 있어서도, 그 사명을 담당한 중심인물이 그 책임분담을 수행함으로써만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도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을 완성하시기 위하여는, 유대인들이 그를 절대로 믿고 따라야 할 것이었는데, 그들이 불신으로 돌아감으로써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뜻 성사'는 부득이 재림 때에로 미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뜻 성사'에 대하여 어느 정도로 예정하시는 것일까 ? 이미 위에서 논급한 바와 같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뜻'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그 뜻의 성사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실 95%의 책임분담에, 그를 중심인물이 담당해야 할 5%의 책임분담이 가담되어서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예정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 5퍼센트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분담에 비하여 극히 작은 것임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 자신에 있어서는 100퍼센트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한 예를 들면, 아담 해와를 중심한 '뜻 성사'는, 그들이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않는 것으로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 되어지도록 예정하셨던 것이다.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도, 노아가 방주(方舟)를 제작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정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도 타락인간(墮落人間)이 그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것으로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비로소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요한복음 3정 16절). 그러나 인간들은 이 작은 책임분담마저 감당치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연장케 하였었다. 한편 또 야고보서 5장 15절에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마가복음 5장 34절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하신 말씀이 있으며, 마태복음 7장 8절에서는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다. 이러한 聖句들은 모두 인간자신의 책임분담 수해에 의하여서만,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정되었다는 사실을 증시(證示)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의 인간이 담당했던 책임분담은, 하나님이 그의 책임분담으로 담당하신 수고와 은사에 비하여 얼마나 미소(微小)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동시에, 다른 한편 섭리적 중심인물들이 그들의 책임분담을 감당치 못함으로써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연장시켜 왔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 경미(輕微)한 책임분담이 인간 자신에 있어서는 얼마나 힘에 겨울만큼 큰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제3절 인간에 대한 예정

아담과 해와는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 선의 인간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가 인간조상이 되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타락인간도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어떠한 인물이 된다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을 어느 정도로 예정하시는 것인가? 어떤 인물을 중심한 하나님의 '뜻 성사'에 있어서는 그 자신이니 언제나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을 해야만 된다는 필수적인 요건이 따라 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인물을 어떠한 사명자(使命者)로 예정하시는데 있어서도 그 예정을 위한 95퍼센트의 하나님의 책임분담에 대하여 5%의 인간 책임분담 수행이 합하여서, 그 인물을 중심한 뜻이 100퍼센트 완성됨으로써만 그러한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예정하신다. 그러므로 그 인물이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의 인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모세를 택하실 때에, 그가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선민(選民)을 가나안 복지(福地) 까지 인도할 수 있는 영도자(領導者)가 되도록 예정하셨다(출애급기 3장 10절). 그러나 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반석(磐石)을 두 번 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될 때에 그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도중에서 죽고 말았다(민수기 20장 7~12절, 20장 24절, 27장 14절). 한편 하나님이 가룟유다를 택하실 때에도, 그가 충성으로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함으로써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에 그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도리어 반역자(反逆者)가 되고 말았다. 또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세우실 때에도,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모시어 맡겨진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영광의 선민(善民)이 될 수 있도록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줌으로써 이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그 백성은 쇠퇴해 갔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예정에 있어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중심인물(中心人物)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은 타락된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세계에로 완전히 복귀하시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기의 차이는 있으나, 타락인간은 누구나 다 빠짐없이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베드로후서 3장 9절).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가 그러했듯이, 그의 재창조역사(再創造役事)인 구원섭리도 일시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전체적인 것으로 넓혀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구원섭리를 위한 예정에 있어서도, 먼저 그 중심인물을 예정하시고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부르심을 받는 중심인물은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 ? 그는 먼저 복귀섭리를 담당한 선민의 하나로서 태어나야 하며, 다음으로 같은 선민 중에서도 선(善)의 공적이 많은 선조의 후손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똑같은 선의 공적이 많은 선조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그 개체가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천품(天稟)을 타고나야만 하는 것이며, 또 같은 천품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이를 위한 후천적인 조건이 모두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후천적인 조건마저 똑같이 갖춘 인물들 중에서도 보다 하늘이 필요로 하는 때와 장소에 맞추어진 개체를 먼저 택하시는 것이다.

제4절 예정설을 세워주는 성구 해명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豫定)에 관한 여러 가지의 문제점을 해명하였다. 그러나 다음으로 풀어야 할 문제는, 본장의 서언(序言)에서 열거한 성구들과 같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성구를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로마서 8장 29절 내지 30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은 미리 아신 사람을 미리 정하사, 미리 정하신 이를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이를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를 또한 영화롭데 하신다고 한 말씀을 해명해 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시므로, 어떤 사람이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는 조건을(본장 제3절)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와 같이 미리 알고 계시는 인물을 예정하시고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시는 하나님의 책임분담(責任分擔) 만으로는, 그가 의롭다 함을 얻어 영화를 누리는 데까지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부름 받는 입장에서 자기의 책임을 완수할 때 비로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의롭다 함을 얻은 후에야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영화(榮華)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화도 인간이 책임분담을 다함으로써만 누릴 수 있도록 예정되는 것이다. 다만 성구에는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에 대한 말씀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에서만 이루어지는 것 같이 보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로마서 9장 15절 내지 16절에는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기록이 있다. 위에서 해명한 바와같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어떠한 인물이 가장 적합한가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미리 아시고 택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물이 택하시어 긍휼(矜恤)히 여기시거나 혹은 그를 불쌍히 보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기 때문에, 인간이 원함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이 아니요, 또 인간의 노력으로 달음박질을 해서 되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 성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권능과 은총을 강조하시기 위하여 주신 말씀인 것이다. 한편 로마서 9장 21절에는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슬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성(創造性)을 닮게 하심으로써, 피조세계(被造世界)의 주인으로 세우시어, 가장 사랑하시기 위한 조건으로서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을 세우셨다는 것은 이미 논술한 바 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조건을 스스로 범하여 타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타락인간(墮落人間)은 마치 쓰레기와 같이 버림을 받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설혹 하나님이 이러한 인간을 어떻게 취급한다 하더라도 결코 불평해서는 아니된다는 뜻을 교시(敎示)하기 위하여 이 성구를 주신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 9장 10절 내지 13절에는, 하나님이 태중(胎中)에서부터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시어, 장자(長子) 에서가 차자(次子) 야곱을 섬기리라고 한 말씀이 있다. 에서와 야곱은 복중(腹中)에 있어서 아직 선악간(善惡間)에 아무런 행동의 결과도 나타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 것인가? 이것은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의 프로를 맞추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후편 제1장의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에서 설명하겠지만, 에서와 야곱을 쌍태(雙胎)로 세우셨던 것은, 그들을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자리에 갈라 세워 놓고, 아벨의 자리에 있는 야곱이 가인의 자리에 있는 에서를 굴복시킴으로써, 일찍이 아담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이루지 못하였던 장자기업(長子企業) 복귀의 ‘뜻’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에서는 가인의 자리이므로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요, 야곱은 아벨의 자리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와같이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실제로 미워하시거나 사랑하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 수행여부에 따라서 좌우될 문제였다. 실상에서는 야곱에게 순종굴복하였기 때문에,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처지에서 야곱과 같은 사랑의 축복(祝福)을 받는 자리로 옮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처지에 세워졌던 야곱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가 자기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였더라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책임분담과 인간의 책임분담이, 과연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모든 '뜻 성사'를 하나님의 전담행사(專擔行事)로서만 보아왔기 때문에, 칼빈(Calvin, Jean)과 같이 완고(頑固)한 예정설(豫定說)을 주장하는 사람이 나오게 되었고, 또 그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을 두고 그대로 인정되어 오기도 했던 것이다.

제7장 기 독 론

구원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타락인간들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예수와 성신(聖神)과의 관계, 예수와 성신과 타락인간과의 관계, 중생(重生)과 삼위일체(三位一體) 등 기독론(基督論)에 관한 제문제(諸問題)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이 문제에 관한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문제에 대한 미해결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교리와 신앙생활에 적지 않은 혼란을 일으켜 왔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의 가치가 어떠한가를 알아야 하므로, 이에 관하여 먼저 논한 다음에 위의 여러 문제들을 다루기로 하자.

제1절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의 가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 즉 완성한 아담의 가치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논하여 보기로 하자. 첫째, 하나님과 완성한 인간과의 이성성상적(二性性相的)인 관계로서 논하여보자.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서 마음과 몸으로 창조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완성한 인간 사이에도 이성성상적인 관계가 있으므로, 이 관계는 인간의 마음과 몸과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무형(無形)의 마음을 닮게 하여 그의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창조된 것이 몸임 것과 같이, 무형의 하나님을 닮게 하여 그의 실체대상으로 창조된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완성한 인간에 있어서의 마음과 몸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하나가 될 때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완성한 인간이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이루어서 일체가 되면,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완전히 체휼하는 생활을 하게 되므로, 그 관계는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이 항상 계실 수 있는 성전(聖殿)이 되어(고린도전서 3장 16절) 신성(神性)을 가지게 된다(전편 제1장 3절 Ⅱ).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인간은 하늘 아버지의 온전함과 같이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마태복음 5장 48절).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적인 가치를 가지게 된다. 둘째, 인간 창조의 목적을 중심하고 그 가치를 논하여 보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시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딴 사람이 가질 수 없는 특성을 각각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수가 아무리 많이 번식된다 하더라도, 개성이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게 마련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내재(內在)하고 있는 어떤 개성체(個性體)의 주체적인 이성성상(二性性相)에 대한 자극적인 기쁨을 상대적으로 일으켜 드릴 수 있는 실체대상은, 그 이성성상의 실체로서 전개된 그 한 개체 밖에는 없는 것이다(전편 제1장 제3절 Ⅱ).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 우주간(宇宙間)에 있어서 유일무이(有一無二)한 존재인 것이다. 석가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원리로 보아서 타당한 것이다. 세째, 인간과 피조세계(被造世界)와의 관계로 본 그 가치를 살펴보자. 우리는 창조원리에 의한 인간과 피조세계와의 관계를 앎으로써 완성한 인간의 가치를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영인체(靈人體)로는 무형세계(無形世界)를, 육신으로는 유형세계(有形世界)를 각각 주관하도록 창조되어 있다.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전 피조세계의 주관자가 되는 것이다(창세기 1장 28절).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육신과 영인체가 있어서 유형 무형 두 세계를 주관할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세계는 인간을 매개체로 하여 서로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실체대상의 세계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여, 인간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을 실체로 전개한 것이 피조세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영인체는 무형세계를 총합한 실체상(實體相)이요, 그 육신은 유형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 된다.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천주(天宙)를 총합한 실체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하는 이유는 실제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천주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예수님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신 것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천주 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여기에 하나의 완전한 기계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 기계의 모든 부속품들이 이 세상에 단 하나씩밖에 없는 것이어서 더 이상 구할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다고 하면, 그 하나 하나의 부속품은 아무리 보잘 것 없이 작은 것이라도 전체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완성한 인간의 개체는 유일무이(有一無二)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미미(微微)한 것 같다 하더라도 실상 전천주적(全天宙的)인 가치와 대등하다고도 볼 수 있다.

제2절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과 예수

Ⅰ. 생명나무 복귀로 본 완성한 아담과 예수님

인류 역사는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생명나무(창세기 3장 24절)를, 역사의 종말의 세계에서 복귀하여(요한계시록 22장 14절),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려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창세기 3장 24절)와 종말의 세계에서 복귀되어질 생명나무(요한계시록 22장 14절)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앎으로써, 완성한 아담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타락론(墮落論)에서 이미 상론(詳論)한 바이지만 아담과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이 되었더라면, 그가 바로 창세기 2장 9절의 생명나무가 되어, 그의 후손도 모두 생명나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여 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창세기 3장 24절), 타락인간의 소망은 바로 이 생명나무로 복귀되는데 있었다(잠언 13장 12절, 요한계시록 22장 14절). 그런데 타락된 인간은 그 자신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생명나무로 복귀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반드시 창조이상을 완성한 한 남성이 생명나무로 오셔 가지고, 만민으로 하여금 그에게 접붙임을 받도록 해야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남성으로 오실 분이 바로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 생명나무로 표상(表象)되어 있는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로 상징되어 있는 완성한 아담이나,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 생명나무로 비유된 예수님은,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이라는 견지에서는 서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창조본연(創造本然)의 가치에 있어서도 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Ⅱ. 창조목적의 완성으로 본 인간과 예수님

우리는 이미 본장 제1절에서 완성한 인간의 가치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완성한 인간과 예수님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상술(上述)한 바에 의하여 아는 바와 같이, 완성한 인간은 창조목적(創造目的)을 두고 보면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여서(마태복음 5장 48절), 하나님과 같은 신성(神性)을 가진 가치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지음 받은 인간도 역시 완성되면 영원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 위에 완성한 인간은 유일무이(有一無二)한 존재이며 전피조세계(全被造世界)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가 없이는 천주(天宙)의 존재가치도 온전해 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천주적인 가치의 존재인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가치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예수님이 지니신 가치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은,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이 가지는 가치 이상의 것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오신 분이심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원리(原理)는 이제까지 많은 신도들이 믿어온 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는 신앙에 대하여 이의(異議)를 갖지 않는다. 왜 그러냐 하면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임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 원리가 예수님을 말하여 그는 창조목적을 완성한 하나의 인간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의 가치를 추호도 격하(格下)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창조원리(創造原理)는 완성된 창조본연의 인간의 가치를, 예수님의 가치와 동등한 입장으로 끌어올리는 것뿐이다. 우리는 위에서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이라는 것을 논술하였다. 그러면 이제 이것을 입증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를 찾아보기로 하자. 디모데전서 2장 5절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로마서 5장 19절에는 한 사람(아담)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예수님)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고린도전서 15장 21절에는 사망이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예수님)으로 말미암는도다라고 표명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17장 31절에는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라고 하였다. 누가복음 17장 26절에는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성서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은 인간이시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인류를 중생(重生) 시켜 주실 참 부모로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사람으로 오시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Ⅲ. 예수는 하나님 자신이신가

빌립이 예수님에게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한복음 14장 9 - 10절)라고 대답하셨다. 또 성경의 다른 곳에 세상은 그(예수님)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한복음 1장 10절)라고 한 말씀도 있고, 또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예수님)가 있었느니라(요한복음 8장 58절)고도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성구 등을 근거로 하여서 이제까지의 많은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일체이시기 때문에, 그의 신성(神性)으로 보아 그를 하나님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마음과 몸과의 관계로 비유하여 생각할 수 있다. 몸은 마음을 닮아 난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서 마음과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제2의 마음이라고는 할 수 있을 망정, 몸이 마음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제2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 자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요한복음 14장 9절 내지 10절의 말씀대로, 그를 본 것은 곧 하나님을 본 것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에서 하신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예수님을 말하여 말씀이 육신을 이루신 분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의 실체로서 도성인신(道成人身)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3절을 보면, 만물세계는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나아가 요한복음 1장 10절에는, 이 세상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창조주(創造主)라고도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원리에 의하면, 피조세계(被造世界)는 개성을 완성한 인간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실체로 전개한 것이기 때문에,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피조세계를 총합한 실체상(實體相)이요, 또한 그의 화동(和動)의 중심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 세상은 완성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여 완성되면 그 인간에게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하시어, 그로 하여금 만물세계에 대한 창조주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해 주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요한복음 1장 10절의 기록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은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뿐이요, 그가 곧 창조주 자신임을 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혈통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그는 전인류를 중생(重生) 하여 주실 인간조상으로 오셨기 때문에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처지에서 본다면 아브라함의 선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8장 58절에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도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의미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지상에 있어서도 원죄(原罪)가 없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는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인간이었고, 또 부활 후 영계에 있어서도 제자들과 다름없이 영인체로서 계신다. 다만 제자들은 생명체급(生命體級)의 영인으로서 빛의 반사체(反射體)로 있는 데 비하여, 예수님은 생령체급(生靈體級)의 영인으로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발광체(發光體)로 계시는 것이 다른 점이라 하겠다. 한편 또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영계에서 지상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고 계신다(로마서 8장 34절).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면, 자신에게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는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어, 스스로 하나님이 아니심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마태복음 27장 46절, 요한복음 17장 1절).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이 사탄이 시험을 받고, 또 사탄에 몰려 십자가에 달리는 등의 일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또 예수님이 십자가상(十字架上)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장 46절)라고 하신 말씀을 보더라도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 아님은 분명한 것이다.

제3절 타락인간과 예수

타락한 인간은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자기보다 저급하게 창조된 천사(天使)를 우러러 볼 정도로 천한 자리에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모두 갖추고 계셨기 때문에, 천사를 비롯한 모든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고린도전서 15장 27절), 한편 타락인간에게는 원죄가 있으므로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원죄가 없기 때문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아무런 조건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타락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그의 심정(心情)을 알 수 없다. 혹시 그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극히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완전히 아시고 또 그 심정을 체휼하는 자리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타락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이지만, 참부모 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중생(重生)하여 원죄를 벗고 선의 자녀가 되면, 예수님과 같이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복귀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 인간사회의 부자간(父子間)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서차(序次)가 있을 뿐, 그 본연의 가치에는 추호의 차이도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고(에베소서 1장 22절), 우리는 그의 몸이 되어 지체(肢體)가 된다(고린도전서 12장 27절). 따라서 예수임은 본성전(本聖殿)이요 우리는 그의 분성전(分聖殿)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의 가지이며(요한복음 15장 5절), 한편 돌감람나무인 우리는 참 감람나무 되시는 예수님에게 접붙임으로써, 참 감람나무가 될 수 있는 것이다(로마서 11장 17절),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하셨고(요일 3장 2절) 또 그(예수님)가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은 줄을 안다(요한 1서 3장 2절)고 한 성구도 있다. 그리고 성경은 오직 예수님은 처음 익은 열매요 우리는 다음 익은 열매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고린도전서 15장 23절).

제4절 중생론과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학계에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중의 하나로 논란되어 왔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 그 근본적인 뜻을 모르는 채 그대로 지내왔던 문제 중의 하나가 역시 본항에서 다루려는 중생론(重生論)인 것이다.

Ⅰ. 중생론

1. 중생의 사명으로 본 예수와 성신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유대관원 니고데모에게, 중생(重生)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3장 3절). 중생이라는 말은 거듭난다는 뜻이다.그러면 인간은 왜 중생해야 되는 것인가 ? 우리는 여기에서 타락인간(墮落人間)이 중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를 알아보기로 하자. 아담과 해와가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하여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다면, 그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은 원죄가 없는 선한 자녀가 되어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 인류의 악의 부모가 되었기 때문에, 악한 자녀들을 번식하여 지상지옥(地上地獄)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대로, 타락한 인간들은 원죄가 없는 자녀로서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를 낳아 주는 것은 부모가 아니면 안된다. 그러면 타락한 우리들을 원죄(原罪)가 없는 자녀로 다시 낳아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줄 수 있는 선한 부모는 누구일 것인가? 원죄 있는 악의 부모가 원죄 없는 선의 자녀를 낳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선의 부모가 타락인간들 가운데에 있을 리는 만무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부모는 하늘로부터 강림(降臨)하셔야 하는데, 그렇게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따라서 그는 타락한 자녀들을 원죄가 없는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지상천국을 이룩하시기 위하여 참아버지로 오셨던 분이시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중생)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은 아담으로써 못 이루셨던 참 아버지로 오셨기 대문에 성경은 그를 후아담이라고 하였다(고린도전서 15장 45절), 영존(永存)하신 아버지라 하였으며(이사야9장 6절), 또 하나님은 선지자(先知者) 엘리야를 다시 보내시어 그로 하여금 타락한 인간들의 마음을 부모로 오시는 예수님 앞으로 돌이키게 함으로써, 그들로 자녀가 되게 하시겠다고도 말씀하셨다(말라기 4장 6절).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시리라(마태복음 16장 27절)고 하셨다. 그런데 아버지 혼자서 어떻게 자녀를 낳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타락한 자녀들을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하여는 참 아버지와 함께 참 어머니도 계셔야 하는 것이다. 죄악(罪惡)의 자녀들을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하여 그 참 어머니로 오신 분이 바로 성신(聖神)이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성신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요한복음 3장 5절)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신은 참 어머니로서, 후해와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를 여성신(女性神)으로 계시 받은 사람이 많다. 그리고 성신이 여성신이시기 때문에 성신을 받지 않고서는 예수님 앞에 신부로 설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성신은 여성신이시기 때문에 위로와 감동의 역사(役事)를 하시는 것이며(고린도전서 12장 3절), 또 해와가 지은 죄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기 위하여 죄를 씻는 역사를 하시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남성이시므로 하늘(양)에서, 성신은 여성이시므로 땅(음)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2. 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 본 예수님과 성신

로고스라는 낱말은 헬라어로서, ‘말씀’ 혹은 ‘이법(理法)’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이하를 보면, 로고스는 하나님의 대상(對象)으로서, 하나님과 수수적(授受的)인 관계의 위치를 취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로고스의 주체(主體)이신 하나님이 이성성상(二性性相)으로 계시므로, 그의 대상인 로고스도 역시 이성성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로고스가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지 않다면, 로고스로 창조된 피조물(요한복음 1장 3절)이 또한 이성성상으로 되었을 수가 없다. 이러한 로고스의 이성성상이 하나님의 형상적인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분립된 것이 아담과 해와였던 것이다(전편 제1장 제1절 Ⅰ). 아담이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 즉 '생명나무'가 되고, 해와가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로 표시된 창조이상을 완성한 여성이 되어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더라면, 그 때에 하나님의 3대축복(三大祝福)이 완성되어 지상천국(地上天國)이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되었기 때문에 반대로 지상지옥이 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인간들을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후아담(고린도전서 15장 45절)으로서 '생명나무'의 사명을 가지고(요한계시록 22장 14절) 인류의 참 아버지로 오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또한 여기에 후해와의 사명을 가진 인류의 참 어머니(요한계시록 22장 17절)가 마땅히 계셔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타락인간을 다시 낳아 주실 참 어머니로 오신 분이 성신(聖神)인 것이다.

3. 예수와 성신에 의한 영적 중생

부모의 사랑이 없이는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성신의 감동에 의하여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믿게 되면, 영적 참 아버지이신 예수님과 영적 참 어머니이신 성신과의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 나타나는 영적 참부모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를 믿는 성도들은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주입되어, 새로운 영적 자아로 중생(重生)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영적 중생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영육(靈肉) 아울러 타락되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더 나아가 육적 중생을 함으로써 원죄(原罪)를 청산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육적인 중생에 의한 육적 구원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재림(再臨)하시게 되는 것이다.

Ⅱ. 삼위일체론

창조원리에 의하면,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에 의하여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을 이룬 사위기대(四位基臺)의 터전이 없이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는, 예수님과 성신도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으로부터 실체로 분립된 대상으로 서 가지고 서로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合成一體化)함으로써, 하나님을 중심한 4위기대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에 예수님과 성신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일체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삼위일체(三位一體)이다. 원래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신 목적은, 그들을 인류의 참부모로 세워 합성일체화시켜 가지고, 하나님을 중심한 4위기대를 이루시어 삼위일체가 되게 하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타락되지 않고 완성되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참부모로서의 삼위일체를 이루어서 선의 자녀를 번식하였다면 그의 후손들도 역시 하나님을 중심한 선의 부부를 이루어, 각각 삼위일체가 되었을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3대축복(三大祝福) 완성에 의한 지상천국은 그 때에 이미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여 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사탄을 중심한 삼위일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도 역시 사탄을 중심한 삼위일체를 형성하여 타락한 인간사회를 이루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과 성신(聖神)을 후아담과 후해와로 세워, 인류의 참부모가 되게 하심으로써, 타락 인간을 중생(重生)케 하여 가지고, 그들도 역시 하나님을 중심한 삼위일체가 되게 하셔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님과 성신은 하나님을 중심한 영적인 삼위일체를 이룸으로써, 영적 참부모의 사명만을 하시었다. 따라서 예수님과 성신은 영적 중생의 사명만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성도들도 역시 영적인 삼위일체로만 복귀되어, 아직도 영적 자녀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을 중심한 실체적인 삼위일체를 이루시어 영육(靈肉) 아우른 참부모가 되심으로써, 타락인간을 영 육 아울러 중생케 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원죄를 청산하고 하나님을 중심한 실체적인 삼위일체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시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타락인간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창조본연의 4위기대를 조성하면,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3대 축복(三大祝福)을 이룬 지상천국이 복귀되는 것이다.

후편 서 론 복귀섭리(復歸攝理)는 타락된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케 하기 위하여, 그들을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 복귀하여 나아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것이다. 전편에서 이미 논증한 바와 같이, 인간은 장성기(長成期) 완성급(完成級)에서 타락하여 사탄 주관하(主管下)에 머물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을 복귀시키기 위하여는, 먼저 사탄을 분립하는 섭리를 하셔야 하는 것이다. 이미 기독론(基督論)에서 상론(詳論)한 바와 같이, 타락인간이 사탄을 분립하고 타락이전 본연(本然)의 인간으로 복귀하려면 원죄(原罪)를 벗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원죄는 인간이 그 참 부모로 오시는 메시아에 의하여 중생(重生)되지 않으면 벗을 수 없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사탄 분립의 노정을 통하여서, 아담과 해와가 성장하였던 기준, 즉 장성기의 완성급까지 복귀한 형을 갖춘 터 위에서 메시아를 맞아 중생함으로써, 아담과 해와의 타락 이전의 입장으로 복귀된 후에 메시아를 따라 더욱 성장하여서, 창조목적을 완성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귀섭리는 창조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려는 재창조(再創造)의 섭리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원리(原理)에 의하여 섭리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복귀원리(復歸原理)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복귀섭리가 어떻게 하여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Ⅰ. 탕감복귀원리

1. 탕감복귀

탕감복귀원리(蕩減復歸原理)에 관한 문제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인간이 그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어떠한 입장에 서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원래 인간 시조(始祖)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되어서 하나님과 심정(心情)의 일체를 이루었더라면, 그들은 하나님만을 대하고 사는 입장에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서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었기 때문에 사탄도 대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타락직후 아직 원죄만이 있었을 뿐 다른 어떠한 선행(善行)도 악행(惡行)도 하지 않았던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도 대할 수 있고 사탄도 대할 수 있는 중간 위치에 처하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해와의 후손들도 역시 이와 같이 중간 위치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타락사회에 있어서 예수는 믿지 않았어도 양심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면, 그는 이렇듯 중간 위치에 있는 것이므로 사탄이 그를 지옥(地獄)으로 끌어갈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양심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예수를 믿지 않는 한 하나님도 그를 낙원(樂園)으로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인(靈人)은 영계(靈界)에 가서도 낙원도 지옥도 아닌 중간 영계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같이 중간 위치에 있는 타락인간(墮落人間)을 하나님은 어떻게 사탄으로부터 분립하시는가? 사탄은 원래 혈통적인 인연을 가지고서 타락한 인간을 대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 자신이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을 세우지 않는 한 하나님은 무조건 그를 하늘 편으로 복귀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한편 사탄도 역시 인간의 창조주(創造主)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타락인간 자신에게 다시 그가 침범할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 한 이러한 인간을 무조건 취해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인간은 그 자신이 선한 조건을 세울 때에는 하나님 편으로, 악한 조건을 세울 때에는 사탄 편으로 분립되는 것이다. 아담가정이 이러한 중간 위치에 있었을 때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제물(祭物)을 바치도록 하셨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제물을 뜻맞게 바치는 것으로써 복귀섭리(復歸攝理)를 하실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있도록 하시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도리어 사탄이 그들에게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타락인간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셨던 것도,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늘 편에 서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 그대로 사탄 편에 머물게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예수님이 구주(救主)이신 동시에 심판주(審判主)가 되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탕감복귀(蕩減復歸)'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무엇이든지 그 본연의 위치와 상태 등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 그것들을 본래의 위치와 상태에로 복귀하려면 반드시 거기에 필요한 어떠한 조건을 세워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세우는 것을 '탕감(蕩減)'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상실된 명예나 직위나 건강 등을 원상대로 회복하려면, 반드시 거기에 필요한 노력이나 재력 등의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또 서로 사랑하던 두 사람이 어찌되어서 미워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하자. 여기에서 이들이 다시 서로 사랑하던 원상태에로 복귀하려면, 그들은 반드시 서로 사과(謝過)를 하는 등의 어떠한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와 같이 타락으로 인하여서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위치와 상태를 떠나게 된 인간도 다시 그 위치와 상태에로 복귀하려면, 반드시 거기에 필요한 어떠한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타락인간(墮落人間)이 이러한 조건을 세워서 창조본연의 위치와 상태에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라고 함, '탕감복귀'를 위해서 세우는 조건을 '탕감조건(蕩減條件)'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처럼 탕감조건을 세워서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해 나아가는 섭리를 탕감복귀섭리(蕩減復歸攝理)라고 말한다. 그러면 탕감조건은 어느 정도로 세워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들 수가 있다. 첫째는 동일(同一)한 것으로서의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본연의 위치와 상태에서 상실되었던 것과 동일한 가치의 조건을 세워서 원상(原狀)으로 복귀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보상(報償)이나 상환(償還)과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21장 23절 내지 25절에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을 지니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러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는 보다 작은 것으로써 탕감조건을 세우는 경우다. 이것은 본연의 위치와 상태에서 상실되었던 것보다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을 세워 원상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어떤 채무자가 빛을 많이 졌을 때, 그 채권자의 호의로 그중 일부 소액(少額)만을 반제(返濟) 함으로써 부채(負債)의 전액(全額)을 청산한 것으로 매듭을 짓는 수가 있다. 이러한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칙에 의하여, 우리는 십자가의 대속(代贖)을 '믿는다'는 극히 작은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예수님과 똑같은 죽음을 거쳐 다시 살았다는 구원(救援)의 큰 혜택을 받게 된다. 한편 또 우리는 몇 방울의 물을 머리에 떨어뜨려 세례(洗禮)를 받았다는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예수님과 성신(聖神)에 의하여 중생(重生)된 입장을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성만찬(聖晩餐)에서 한 조각의 떡과 한 잔의 포도주를 취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성체(聖體)를 먹었다는 커다란 가치의 혜택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는 보다 큰 것으로써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는 경우다. 이것은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을 세우는 데 실패하였을 때 보다 더 큰 가치의 탕감조건을 다시 세워서 원상(原狀)으로 복귀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비둘기와 양과 소를 바치는 헌제(獻祭)에서 실수하였기 때문에 그와 탕감조건은 가중되어서 독자(獨子) 이삭을 제물로 바치게 되었던 것이다. 또 모세 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40일의 정탐기간(偵探期間)을 뜻맞게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탕감조건이 가중되어, 그들은 날을 해로 계수(計數) 한 40년을 광야에서 표류(漂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민수기 15장 34절). 그러면 어찌하여 탕감조건을 다시 세울 때에는 더 큰 조건을 세워야 하는가 ? 그것은 어떠한 섭리적 중심인물(中心人物)이 탕감조건을 다시 세울 때에는, 그가 세워야 할 본래의 탕감조건과 함께 그 앞선 인물들의 실수로 인한 탕감조건까지도 첨가하여 세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어떠한 방법으로 세우느냐 하는 문제다. 무엇이든지 본래의 위치와 상태로부터 떠난 입장에서 원상(原狀)으로 복귀하려면, 그것들로부터 떠나게 된 경로와 반대의 경로를 취하는 탕감조건을 세워야만 한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선민(選民)들이 예수님을 미워하여 그를 십자가에 내줌으로써 벌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 입장으로부터 다시 구원을 받아 선민의 입장으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앞서와는 반대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누가복음 14장 27절). 기독교가 순교(殉敎)의 종교가 된 원인은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편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을 서럽게 해 드렸으므로,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는 그와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실천함으로써 창조본성(創造本性)의 인간으로 복귀하여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첫아담이 하나님을 버림으로 말미암아서 그 후손들이 사탄의 품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후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이 인류를 사탄의 품속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복귀시키려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입장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받들어 모시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라신 예수님을 버리셨던 것은 이러한 곡절에 기인하였던 것이다(마태복음 27장 46절{{ . 마태복음 27장 46절 : 제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러한 각도에서 보면, 한 국가의 형법도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어서 그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원상대로 유지하게 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는 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탕감조건은 누가 세워야 하는가? 이미 창조원리(創造原理)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은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여 완성되어 가지고 천사(天使)까지도 주관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 시조는 그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여 도리어 사탄의 주관을 받아야 할 입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인간이 사탄의 주관을 벗어나 사탄을 주관할 수 있는 입장으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으로써 그에 필요한 탕감조건을 인간 자신에 세우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2. 메시아를 위한 기대

메시아는 인류의 참부모로 오셔야 한다. 그가 인류의 참부모로 오셔야 하는 이유는, 타락한 부모로부터 태어난 인류를 거듭나게 하여 그 원죄를 속(贖)해 주셔야 하기 때문이다(전편 제7장 제4절 Ⅰ.1). 그러므로 타락인간이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완성한 터 위에서 메시아를 맞아 원죄를 벗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그러면 타락인간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려면 어떠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는가? 이것을 알기 위하여는, 원래 아담이 어떠한 경로에 의하여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던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탕감조건은 본연의 위치와 상태를 상실하게된 것과 반대의 경로에 의하여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담이 창조목적을 완성하기 위하여서는 두 가지의 조건을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첫째는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는 것이었는데, 물론 아담이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는 인물이 되어야 했었고, 그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기 위한 조건으로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담은 이 믿음의 조건을 세우는 것으로서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수행하기 위한 성장기간(成長期間)을 거쳐야만 했었다. 그런데 이 성장기간은 수(數)로써 된 것이므로 결국 이 기간은 수를 완성하는 기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아담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기 위하여 세워야 했던 두번째의 조건은 그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그의 성장기간을 다 거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세웠더라면, 그는 그 기대 위에서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실체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창조본성(創造本性)을 완성한 말씀의 완성실체(完成實體)가 되었을 것이다(요한복음 1장 14절) 아담이 이와같은 완성실체가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제1축복이었던 개성완성자(個性完成者)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위와같은 경로에 의하여서 창조목적을 완성하였을 것이므로, 타락인간도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기 위하여는 그 경로에 의하여 아래와 같이 '믿음의 기대'를 세운 터전 위에서 '실체기대'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1) 믿음의 기대

아담은 하나님이 말씀을 믿지 않고 타락하였기 때문에 '믿음의 기대'를 세우지 못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는 말씀의 완성실체가 되지못하여 창조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인간이 창조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기준을 복귀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인간조상이 세우지 못하였던 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리고 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첫째는 그를 위한 '중심인물(中心人物)'이 있어야 한다. 아담이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인물이 되지 못하고 타락(墮落)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할 수 있는 중심인물을 찾아 나오셨다. 타락한 아담가정에서 가인과 아벨로 하여금 제물(祭物)을 바치게 하셨던 것도 이러한 중심인물을 찾아 세우기 위함이었고, 노아, 아브라함, 이상, 야곱, 모세, 그리고 열왕(列王)들과 세례요한 등을 부르셨던 것도 그들을 이러한 중심인물로 세우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둘째는 그것을 위한 '조건물(條件物)'을 세워야 한다. 아담은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조건으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함으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타락된 인간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대신하는 조건물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타락된 인간은 만물보다 거짓된 입장에 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에(예레미야 17장 9절), 구약 이전시대(舊約以前時代)에 있어서 제물 또는 그 제물을 대신한 방주(方舟) 등의 만물을 조건물로 세워 가지고 '믿음의 기대'를 세우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기대'는 인간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침범을 당한 만물을 복귀하는 기대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시대(舊約時代)에 있어서는 율법(律法)의 말씀, 또는 그 말씀을 대신한 법궤(法櫃)나 성전(聖殿)이나 중심인물 등이 이 기대를 조성하기 위한 조건물이었다. 또 신약시대(新約時代)에 있어서는 복음(福音)의 말씀, 따라서 그 말씀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이 '믿음의 기대' 조성을 위한 조건물이었던 것이다. 인간이 타락된 후에 있어서의 이와같은 조건물(條件物)은, 인간편에서 보면 그것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것이지만, 하나님편에서 볼 때에는 어디까지나 소유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는 그를 위하여 '수리적(數理的)인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세워야 한다. 그러면 이 섭리적인 수에 의한 탕감기간이 왜 있어야 하는가 ? 그리고 어떠한 섭리적인 수의 탕감기간을 세워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편의상 후편 제3장 제2절 Ⅳ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2) 실체기대

타락인간(墮落人間)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기 위하여는, '믿음의 기대'를 복귀한 터전 위에서, 일찍이 인간조상이 이루지 못하였던 '완성실체(完成實體)'를 이루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나 타락인간은 어디까지나 메시아를 통하여 원죄(原罪)를 벗지 않고서는, '완성실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타락인간은 위에서 말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한 터전 위에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움으로써 이루어지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서야 비로소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것이다. 타락인간은 이와 같이 메시아를 맞아 원죄를 벗어 가지고, 인간조상의 타락 전 입장으로 복귀된 후에,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고 메시아와 일체가 되어, 인간조상이 타락됨으로써 걷지 못하고 남아졌던 성장기간(成長期間)을 다 지나서야 '완성실체'가 되는 것이다. 한편 '실체기대'를 세우는 데 있어서도 타락인간이 세워야할 어떠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이 필요하다. 그것이 곧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인 것이다. 인간조상은 타락하여 원죄를 지니게 됨에 따라서, 창조본성(創造本性)을 이루지 못하고 타락성본성(墮落性本性)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인간이 메시아를 맞아서 원죄를 벗고 창조본성을 복귀하기 위한 실체기대를 세우기 위하여는, 먼저 그 '타락성을 벗기위한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이 조건을 어떻게 세우는가 하는 것은 후편 제1장 제1절 Ⅱ에서 논하기로 하자.

Ⅱ. 복귀섭리노정

1. 복귀섭리노정의 시대적 단계

이제 아담이후 오늘에 이르는 전역사노정(全歷史路程)에 있어서의 시대적 단계에 개관(槪觀)해 보기로 하자. 타락인간(墮落人間)으로 하여금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우게 하고, 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게 함으로써,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는 일찍이 아담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그 섭리의 뜻은 좌절되었고, 그 후 10대를 지나 그 뜻은 다시 노아의 가정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40일의 홍수(洪水)로써 악한 세대를 심판하셨던 것은, 노아가정을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세우게 하고 그 기대 위에 메시아를 보내심으로써,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완수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차자(次子)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노아가정과 방주(方舟)를 찾아 세우기 위하여 세웠던 10대와 40일을 사탄에게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들을 다시 하늘편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 즉 400년이 지난 후에, 뜻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옮겨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아브라함이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뜻맞게 세웠더라면, 이 기대(基臺)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이루어 가지고, 그 터 위에서 메시아를 맞이하였을 것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수함으로써 그 뜻은 또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이에 메시아를 맞기 위한 믿음의 조상을 찾아 내려왔던 아담가정으로부터의 2천년기간은, 일단 사탄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노아의 입장과 다른 것은, 비록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는 실수하였지만 이상, 야곱의 3대에 걸쳐 연장하면서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세움으로써, 이 기대를 중심하고 애급(埃及)에서 하나님의 선민(選民)을 번식하여 후일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민족적으로 넓힐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보면,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기간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찾아 세워, 장차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시작할 수있는 그 기대를 조성하는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복귀섭리의 역사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수로 인하여,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2천년기간을 사탄에게 내주었으므로, 이 기간을 다시 하늘 편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이 있어야 할 것이니, 이 기간이 바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의 2천년기간이다.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하지 않았다면, 그 후손들에 의하여 세워졌을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 위에 메시아가 오셨을 것이므로, 그 때에 복귀섭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믿고 모시어서, 그를 하나님 앞에 민족적인 산 제물로서 뜻맞게 세워 드렸더라면, 그 대에도 그들이 세운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 위에서, 오신 바 메시아를 중심하고 복귀섭리는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한 것과 같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함으로써, 그 민족적인 헌제(獻祭)에 실수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 이후 예수님까지의 2천년기간은, 또다시 사탄에게 내준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사탄에게 내준 이 2천년기간을 또다시 하늘편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2천년 기간이 필요하게 된 것이니, 이 기간이 바로 예수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2천년 기간인 것이다. 이 기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한 복귀섭리로써, 기독교 신도들이 '재림주님을 위한 세계적인 기대'를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2. 복귀섭리노정의 시대 구분

(1) 말씀에 의한 섭리로 본 시대 구분

①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기간은, 인간이 아직 복귀섭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못한 시대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다만 타락인간이 헌제에 의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말씀에 의한 섭리를 하실 수 있는 다음 시대를 위한 기대(基臺)를 조성한 시대였기 때문에 이 시대를 '말씀기대섭리시대(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② 또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2천년기간은, 구약(舊約)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의 심령(心靈)과 지능(知能)의 정도가 소생급(蘇生級)까지 성장한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소생 구약시대(蘇生 구약시대(舊約時代))'라고 한다. ③ 한편 예수님으로부터 재림기(再臨期)까지의 2천년기간은, 신약(新約)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장성급(長成級)까지 성장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장성 신약시대(長成新約時代)'라고 한다. ④ 예수님 재림 이후의 복귀섭리완성시대(復歸攝理完成時代)는, 복귀섭리의 완성을 위하여 주시는 성약(成約)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완성급(完成級)까지 성장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완성 성약시대(完成 成約時代)'라고 한다.

(2) 부활섭리로 본 시대 구분

①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기간은, 인간이 헌제(獻祭)로써 장차 부활섭리(復活攝理)로 하실 수 있는 구약시대(舊約時代)를 위한 기대를 조성한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부활기대섭리시대(復活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②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2천년기간은, 부활섭리의 시대적인 혜택과 구약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이 영형체급(靈形體級)까지 부활하는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소생부활섭리시대(蘇生復活攝理時代)'라고 한다. ③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재림기까지의 2천년기간은,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과 신약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이 생명체급(生命體級)까지 부활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장성부활섭리시대(長成復活攝理時代)'라고 한다. ④ 예수님 재림 이후의 복귀섭리완성시대(復歸攝理完成時代)는,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과 성약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이 생령체급(生靈體級)으로 완전 부활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완성부활섭리시대(完成復活攝理時代)'라고 한다.

(3) 믿음의 기간을 탕감복귀하는 섭리로 본 시대 구분

① 아담으로부터 아브라까지의 2천년기간은, 사탄에게 내주었던 이 기간을, 아브라함 한 분으로 찾아 세움으로써, 하늘 것으로 탕감복귀할 수 있는 구약시대를 위한 기대를 조성한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탕감복귀기대섭리시대(蕩減復歸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②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2천년기간은,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로 인하여 사탄에게 내주었던 아담으로부터의 2천년기간을, 이스라엘민족을 중심하고 다시 하늘 것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탕감복귀섭리시대(蕩減復歸攝理時代)'라고 한다. ③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재림기(再臨期)까지의 2천년기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서 사탄에게 내주었던 구약시대의 2천년기간을, 기독교 신도들을 중심하고 하늘 것으로 재탕감복귀(再蕩減復歸)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탕감복귀섭리연장시대(蕩減復歸攝理延長時代)'라고 한다. ④ 예수님 재림 이후의 복귀섭리완성시대(復歸攝理完成時代)는, 사탄에게 내 주었던 복귀섭리의 전 노정을 하늘 것으로 완전히 탕감복귀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탕감복귀섭리완성시대(蕩減復歸攝理完成時代)'라고 하는 것이다.

(4) 메시아를 위한 기대의 범위로 본 시대 구분

①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기간은, 헌제(獻祭)에 의하여 아브라함가정 하나를 찾아 세움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조성한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家庭的)인 기대섭리시대(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②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2천년기간은, 구약(舊約)의 말씀에 의하여 이스라엘민족을 찾아 세움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하는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民族的)인 기대섭리시대(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③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재림기(再臨期)까지의 2천년 기간은, 신약(新約)의 말씀에 의하여 기독교 신도들을 세계적으로 찾아 세움르로써, '메시아를 위한 세계적인 기대'를 조성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메시아를 위한 세계적(世界的)인 기대섭리시대(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④ 예수님 재림 이후의 복귀섭리완성시대(復歸攝理完成時代)는, 성약(成約)의 말씀에 의하여 천주적인 섭리를 하심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천주적인 기대'를 완성해야 할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메시아를 위한 천주적(天宙的)인 기대섭리완성시대(基臺攝理完成時代)'라고 한다.

(5)책임분담으로 본 시대 구분

①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기간은, 다음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책임분담섭리(責任分擔攝理)를 하시기 위한 기대를 조성한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책임분담기대섭리시대(責任分擔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②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2천년기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바 원리적인 책임을 지심으로써, 친히 사탄을 굴복시키는 제1차의 책임을 담당하시고 선지자(先知者)들을 대하시어, 소생적(蘇生的)인 복귀섭리를 해 나오신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하나님의 책임분담섭리시대(責任分擔攝理時代)'라고 한다. ③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재림기(再臨期)까지의 2천년기간은, 타락의 장본인인 아담과 해와의 사명을 대신 완성해야 되었던 예수님과 성신(聖神)이, 사탄을 굴복시키는 제2차의 책임을 지시고 타락인간을 대하시어, 장성적(長成的)인 복귀섭리를 해 나오신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예수와 성신의 책임분담섭리시대(責任分擔攝理時代)'라고 하는 것이다. ④ 예수님 재림 이후의 복귀섭리완성시대(復歸攝理完成時代)는, 인간이 본래 천사까지도 주관하게 되어 있는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입각하여, 지상과 천상에 있는 성도들이 타락한 천사인 사탄을 굴복시키는 제3차의 책임을 지고, 복귀섭리를 완성해야 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성도(聖徒)의 책임분담섭리시대'라고 한다.

(6)섭리적 동시성으로 본 시대 구분

①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기간은,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는 탕감조건들을 상징적으로 세워 나온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상징적(象徵的) 동시성(同時性)의 시대'라고 한다. ②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2천년기간은,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는 탕감조건들을 형상적으로 세워 나온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형상적(形象的) 동시성(同時性)의 시대'라고 한다. ③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재림기까지의 2천년기간은,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는 탕감보건을 실체적으로 세워 나온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실체적(實體的) 동시성(同時性)의 시대'라고 한다.

Ⅲ. 복귀섭리 역사와 '나'

'나'라는 개성체(個性體)는 어디까지나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의 소산(所産)이다. 따라서 '나'는 이 역사가 요구하는 목적을 이루어야 할 '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역사의 뜻 가운데서야 하며, 그러기 위하여는 복귀섭리역사가 오랜 기간을 두고 종적으로 요구하여 나오고 있는 탕감조건(蕩減條件)들을, '나' 자신을 중심하고 횡적으로 찾아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나'는 복귀섭리역사가 바라는 결실체로서 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까지의 역사노정에서, 복귀섭리의 목적을 위하여 부름 받았던 선지선열(先知先烈)들이 이루지 못한 시대적인 사명들을 이제 '나'를 중심하고 일대의 횡적으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복귀섭리의 목적을 완수한 개체가 되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인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는, 선지선열들을 대하시던 하나님의 심정과, 그들을 부르셨던 하나님의 근본 뜻, 그리고 그들에게 맡겨졌던 섭리적인 사명들이 과연 어떠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상세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타락인간(墮落人間)은 그 자신으로서 이러한 입장에 설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완성자로 오시는 재림주님을 통하여 그 모든 것들을 알고, 또 그를 믿고 모시어 그와 하나가 됨으로써, 그와 함께 복귀섭리역사의 종적인 탕감조건들을 횡적으로 찾아 세운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뜻' 을 이루기 위하여 왔다 간 모든 선인(先人)들이 걸었던 길은, 오늘날의 우리들이 다시 되풀이하여서 걸어야 할 길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타락인간은 복귀섭리의 내용을 모르고서는, 결코 생명의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복귀원리(復歸原理)를 자세히 알아야 하는 이유는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제1장 복귀기대섭리시대

제1절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타락(墮落)은 비록 인간 자신의 잘못으로 되어진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 타락인간을 구원(救援)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데 대하여는, 이미 전편 제3장 제2절 Ⅰ에서 논한 바 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 타락인간을 복귀(復歸)하시려는 섭리는 일찍이 아담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미 서론(緖論)에서 논한 바와같이 아담은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대할 수 있는 중간 위치(中間位置)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같이 중간위치에 처해 있었던 타락인간(墮落人間)을 하늘편으로 분립(分立)하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기 위하여는, 타락인간 자신이 어떠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워야만 했었다. 그러므로 아담가정이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實體基臺)' 를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우고, 그로써 이루어지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Ⅰ. 믿음의 기대

첫째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한 어떠한 조건물이 있어야 한다. 원래 아담은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조건으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는 자리에 떨어진 타락한 아담이 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가 믿음으로써 말씀 대신의 어떠한 조건물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세워야만 했던 것이다. 아담가정에서 세워야 했던 이 말씀 대신의 조건물은 제물(祭物)이었다. 둘째는, '믿음의 기대' 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 기대를 복귀할 수 있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이 있어야 한다. 아담가정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했던 중심인물은 물론 아담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마땅히 제물을 바쳐야 하였던 것이고, 그가 이 제물을 합당하게 바치는가 바치지 못하는가에 따라 '믿음의 기대' 의 조성 여부가 결정될 것이었다. 그러나 성서(聖書)의 기록을 보면, 아담이 제물을 바치지 못하고 가인과 아벨로부터 제물을 바쳤던 것이니,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가?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 한 주인을 대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주인을 대하는 처지에 있는 존재를 상대로 하여 창조원리적인 섭리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제물을 대하신다면, 사탄도 또한 아담과 혈연관계(血緣關係)가 있음을 조건삼아, 이것들을 대하려고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아담은 하나님과 사탄의 두 주인을 대하는 비원리적인 처지에 서게 된다. 하나님은 이와같은 비원리적(非原理的)인 섭리를 하실 수 없으므로, 선 악 두 성품의 모체가 된 아담을, 선성품적(善性稟的)인 존재와 악성품적(惡性稟的)인 존재의 둘로 갈라 세우는 섭리를 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아담의 두 아들을 각각 선악(善惡)의 표시체로 분립시킨 후에,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탄을 각각 대할 수 있는, 즉 한 주인 상대의 원리적인 입장에 세워 놓고 제각기 제물(祭物)을 바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가인과 아벨은 다 같이 아담의 자식인데, 누구를 선의 표시체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우고, 또 누구를 악의 표시체로서 사탄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야 할 것인가? 가인과 아벨은 다 함께 해와의 타락의 열매였다. 따라서 타락의 모체(母體)인 해와의 타락경로에 의하여서 그것이 결정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해와의 타락은 두 가지의 불륜(不倫)한 사랑의 행동으로 인하여 성립되었었다. 즉 첫째번은 천사장(天使長)과의 사랑으로 인한 영적 타락(靈的 墮落)이었으며, 둘째 번은 아담의 사랑으로 인한 육적 타락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똑같은 타락행위(墮落行爲)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둘 가운데서 어느 것이 보다 원리적이며 보다 용서받을 수 있는 행위인가를 가려 본다면, 첫째 번의 사랑에 의한 타락행위보다는 둘째 번의 사랑에 의한 타락행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번 째의 타락행위가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지려고 한, 즉 때 아닌 때에 때의 것을 바라는 과분한 욕망이 동기가 되어(창세기 3장 5절) 비원리적 상대인 천사장과 관계를 맺었던 것임에 비하여, 둘째 번의 타락행위는 첫째 번의 행위가 분륜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편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던 심정이 동기가 되어, 아직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원리적 상대인 아담과 관계를 맺었던 것이기 때문이다(전편 제2장 제2절 Ⅱ). 그런데 가인과 아벨은 모두 해와의 불륜한 사랑의 열매인 것이다. 따라서 해와를 중심하고 맺어진 두 형의 불륜한 사랑의 행위들을 조건으로 가름하여 가인과 아벨을 각각 상이(相異)한 두 표시적 입장에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가인은 사랑의 첫 열매이므로, 그 첫번 째 것이었던 천사장(天使長)과의 사랑으로 인한 타락행동을 표징(表徵)하는 악의 표시체로서, 사탄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졌고, 아벨을 사랑의 둘째 열매이므로, 그 두번 째 것이었던 아담과의 사랑으로 인한 타락행동을 나타내는 선의 표시체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졌던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리의 세계를 사탄이 먼저 차지하였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앞서 사탄이 먼저 비원리적인 입장에서 그 원리형(原理型)의 세계를 이루어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이 맏이를 세워서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계승시키려고 하셨던 원리적인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사탄도 둘째 것에보다도 맏것에 대한 미련이 더욱 컸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사탄은 그 때 이미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차지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보다 미련이 컸던 장자 가인을 먼저 취하려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탄이 미련을 갖고 대하는 가인보다도 아벨을 대하셨던 것이다. 이에 대한 실례를 우리는 성서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사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창세기 4장 7절)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보면, 가인은 사탄의 상대적인 입장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급시(出埃及時)에 애급의 민족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생축(牲畜)까지도 맏것은 모조리 쳤던 것이니(출애급기 12장 29절) 그것들은 모두 가인의 입장으로서, 사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는, 차자 아벨의 입장이었던 레위의 손(孫)만이 법궤(法櫃)를 메고 갔었다(신명기 31장 25절). 그리고 창세기 25장 23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직도 출생전 복중의 태아(胎兒)들이었던 장자(長子) 에서를 미워하고 차자(次子)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장.차자라는 명분만으로써 그들은 이미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야곱이 그의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동시에 축복할 때에, 차자 에브라임을 우선적으로 축복하기 위하여 손을 엇바꾸어서 축복하였던 것도(창세기 48장 14절) 역시 에브라임이 아벨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서, 하나님과 사탄을 각각 한 주인으로서 대할 수 있는 위치에 아벨과 가인을 세워 놓고, 제물을 바치게 하셨던 것이다(창세기 4장 3~5절).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祭物)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으니 그 이유는 어디 있었던가 ? 아벨은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제물을 바쳤기 때문에(히브리서 11장 4절),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셨다(창세기 4장 4절). 그리하여 아담가정이 세워야 할 믿음의 기대는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비록 타락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조건만 성립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납(容納)하신다는 것을 교시(敎示)하시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던 것은, 가인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다만 가인은 사탄이 취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 세워졌었으므로, 하나님이 그 제물을 취하실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을 가인 자신이 세우지 않는 한, 하나님은 그것을 취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써, 사탄의 상대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편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그 자신이 어떠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면 가인은 어떠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였던가? 그것은 바로 '타락성을 벗기위한 탕감조건'이었는데, 이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자세히 밝히기로 하겠다.

Ⅱ. 실체기대

아담가정에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세워지기 위하여는, 가인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이 그의 헌제(獻祭)를 기뻐 받으실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은 어떻게 세워야 하였던가? 인간 시조(始祖)는 천사장(天使長)으로 말미암아 타락되어, 그로부터 타락성(墮落性)을 이어 받게 되었으므로, 타락인간이 그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탕감복귀원리(蕩減復歸原理)에 의하여, 아래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같이 그 타락성본성(墮落性本性)을 가지게 되었던 것과 반대의 경로를 취하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천사장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있던 아담을 사랑하지 못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은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타락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아담의 입장에 있는 아벨을 사랑하여서 하나님의 입장과 같은 입장을 취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사장(天使長)이 하나님에게 더 가까웠던 아담을 중보(仲保)로 세워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아담의 위치를 취하려다가 타락되었기 때문에, '자기 위치를 떠나는 타락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아담의 입장에 있는 아벨을 중보로 세워,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자기 위치를 지켜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천사장은 자기를 주관해야 할 인간, 즉 해와와 아담을 역주관(逆主管)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주관성을 전도(顚倒)하는 타락성'이 생겼다. 따라서 인간이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아담의 입장에 있는 아벨에게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그의 주관을 받는 입장에 섬으로써 주관성의 법도(法度)를 바로 세워야 했던 것이다.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는 선한 뜻을 하나님은 아담에게 전하고, 아담은 또 해와에게 전하고, 해와는 다시 천사장에게 전하여 선을 번식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천사장은 따먹어도 좋다는 불의(不義)의 뜻을 해와에게 전했고, 또 해와는 그것을 아담에게 전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죄를 번식하는 타락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자기보다도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서 있는 아벨의 상대적인 입장을 취하여, 아벨로부터 선의 뜻을 전해 받음으로써, 선을 번식하는 입장을 조성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인, 아벨의 헌제(獻祭)와 상통되는 몇 가지의 실례(實例)를 들어 보기로 하자. 우리의 개체를 두고 생각해 볼 때 선을 지향하는 마음(로마서 7장 22절)은 아벨의 입장이요, 죄의 법을 섬기는 몸(로마서 7장 25절)은 가인의 입장인 것이다. 따라서 몸은 마음의 명령에 순종굴복(順從屈伏)해야만 우리 개체는 선화(善化)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몸이 마음의 명령에 반역(反逆)하여, 마치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같은 입장을 반복하기 때문에 개체는 악화(惡化) 되는 것이다. 따라서 도(道)의 생활은 마치 아벨에게 가인이 순응해야 했듯이, 하늘 뜻을 지향하는 마음의 명령에 몸을 순응케 하는 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타락(墮落)되어 만물보다도 거짓된(예레미야 17장 9절) 입장에 떨어졌으므로, 만믈을 아벨의 입장에 세워 놓고 그것을 통하여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헌제(獻祭)였다. 인간이 항상 좋은 지도자나 친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보다 하늘편에 가까운 아벨형의 존재를 찾아 그와 하나됨으로써, 하늘 앞에 가까이 서고자 하는 천심(天心)에서 일어나는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온유겸손(溫柔謙遜)이 기독교 신앙의 강령이 된 것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자기도 모르게 아벨형의 인물을 만나, 그를 통하여 하늘 앞에 설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게 하기 위함이다. 개인에서부터 가정, 사회, 민족,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거기에는 반드시 가인과 아벨의 두 형의 존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같은 모든 것을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입장으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가인형의 존재가 아벨형의 존재에게 순종 굴복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전 인류가 그에게 순중굴복해야 할 아벨적인 존재로서 이 세상에 오셨던 분이었다. 따라서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는 것이다(요한복음 14장 6절). 만일 아담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에게 순종굴복함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더면, 그들은 이미 조성된 믿음의 기대 위에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워, 이 두 기대로써 이루어지는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음으로써, 창조본연의 사위기대(四位基臺)를 복귀하였을 것이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천사장(天使長)이 인간을 타락케 하였던 타락성본성(墮落性本性)을 반복하게 되어, 아담가정이 세워야 했던(실체기대)는 세워지지 않았다. 따라서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Ⅲ. 아담가정에 있어서의 메시아를 위한 기대와 그의 상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한 터 위에서 '실체기대'를 세움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헌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믿음의 기대'는 '상징헌제(象徵獻祭)'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복귀되고, '실체기대'는 '실체헌제(實體獻祭)'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상징헌제' 및 '실체헌제'의 의의와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인 3대축복(三大祝福)은, 아담과 해와가 각각 개성을 완성하여 부부를 이루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자녀를 번식하여 가정을 이루어야 하며, 더 나아가 그들이 만물을 주관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그 3대 축복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와 반대의 경로를 따라, 먼저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과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워주는 '상징헌제'를 드림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 한다. 다음으로는 자녀를 복귀하고 그 위에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동시에 세워주는 '실체헌제'를 드림으로써 실체기대를 세워 가지고,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해야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징헌제'의 의의와 그 목적을 두 가지로 잘라서 생각할 수 있다. 269 이미 타락론(墮落論)에서 논술한 바와같이, 사탄이 타락인간(墮落人間)을 주관하게 됨을 인하여, 그는 인간이 주관해야할 만물세계(萬物世界)까지도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서의 만물이 탄식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원인은 여기에 있다(로마서 8장 22절). 그러므로 만물로써 '상징헌제(象徵獻祭)'를 드리는 첫째 목적은, 하나님의 상징적 실체상인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서 만물보다도 거짓된 자리에 떨어졌으므로(예레미아 17장 9절),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는, 창조원리적(創造原理的)인 질서에 준하여 자기보다도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있는 존재인 만물을 통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따라서 '상징헌제'를 드리는 둘째의 목적은, 실체인간을 하나님 앞에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려는데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상징헌제(象徵獻祭)'는 어디까지나 내적인 헌제이므로, 만물과 인간의 창조의 순서가 그러했듯이, 외적인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린 기대(基臺) 위에서만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과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운 후에, 이 기대 위에서 다시 인간을 실체적으로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으로서, '실체헌제'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 ‘실체헌제(實體獻祭)'는 실체인간을 복귀하기 위하여, '타락성을 벗기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인적인 존재가 아벨적인 존재를 실체로 헌제하여 자녀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게 되면, 그것이 바로 아래에 밝혀져 있는 바와같이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으로도 세워지게 되기 때문에, '실체헌제'는 뜻맞는 헌제가 되는 것이다. 아담가정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기 위하여는, 아담 자신이 먼저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하여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같이 아담부터 헌제를 하지 못하였던 것은, 아담이 헌제를 하면, 그 제물은 하나님과 사탄의 두 주인이 대하게 되어 비원리적인 입장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여기에는 심정적인 면에서의 이유가 또 한 가지 있다. 타락한 아담은 사실상 하나님에게 천추만대(千秋萬代)에 이르는 슬픔을 안기어 드린 죄악의 장본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직접 대하시어 복귀섭리(復歸攝理)를 하실 수 있는 심정적인 대상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 대신으로 그의 차자(次子) 아벨을 세워서, '상징헌제'를 드리게 하셨다. 이렇게 하여 먼저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과 또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운 기대 위에서, 가인과 아벨이 '실체헌제(實體獻祭)'로써 자녀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더면, 부모된 아담은 그 실체기대 위에 서게 되어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그 때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으로써 '실체헌제'를 하기 위하여서는, 그 헌제의 중심인물(中心人物)이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벨의 상징헌제에는, 아담대신으로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것과, 또 아벨을 실체헌제의 중심인물로 결정하기 위한 것의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은 가인이 세워야 했는데, 이것이 어찌하여 아담가정 전체가 세우는 결과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조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것이었고, 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인이 아벨에게 순종 굴복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가인과 아벨이 다 함께 자녀로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운 입장에 서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또 가인과 아벨은 선악(善惡)의 모체인 아담을 분립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사탄을 분립하였더라면, 그 부모된 아담은 사탄을 분립한 그 입장에서, 먼저 실체기대(實體基臺) 위에 서게 되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은, 상징헌제(象徵獻祭)와 실체헌제(實體獻祭)로써 세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벨이 뜻맞는 헌제를 함으로써, 아담을 중심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조건과 '실체헌제'를 드리기 위한 중심인물로서의 아벨의 입장은 세워졌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서, 그들은 천사장(天使長)이 해와를 타락시킨 것과 같은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게 됨으로써 '실체헌제'에 실패하여, 실체기대를 세우지 못하게 됨에 따라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Ⅳ. 아담가정이 보여준 교훈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실패는 결과적으로, 첫째 뜻 성사(成事)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어떠하셨던가 하는 것을 보여주셨다. 원래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반드시 하나님의 책임분담과 인간의 책임분담이 합하여서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통하여 헌제(獻祭)하는 것은, 그들의 책임분담에 해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헌제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실 수는 없었던 것이다. 둘째, 가인이 아벨을 죽였으나, 그 후 하나님이 아벨 대신 셋을 세워 새로운 섭리를 하신 것으로써,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인 것이고, 인간에 대한 그의 예정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책임분담에 대하여 아벨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그가 '실체헌제(實體獻祭)'의 중심인물이 되도록 예정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벨이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한 입장에 서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대신 셋을 세우시어,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되어 있는 '뜻'을 이루어 나아가셨던 것이다. 세째, 가인과 아벨의 헌제로써, 타락인간은 항상 아벨적인 존재를 찾아 그에게 순종 굴복해야만, 하늘이 요구하는 '뜻'을 자기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이루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한편 아담가정을 중심하고 이루려 하셨던 것과 동일한 섭리(攝理)는, 인간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그 후 계속 반복되어 내려왔다. 따라서 이 노정은 오늘날의 우리 자신들도 걸어야 할 탕감노정(蕩減路程)으로서 그대로 남아져 있기 때문에,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오늘 우리들에게까지도 전형적(典型的)인 산 교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제2절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변할 수 없는 것으로서,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아벨이 하늘을 대하여 충성했던 그 심정(心情)의 터전 위에서, 그의 대신으로 셋을 세우셨다(창세기 4장 25절). 그리하여 그 후손에서 노아의 가정을 택하시사, 아담가정의 대신으로 세우시어 새로운 복귀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창세기 6장 13절에 모든 혈육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홍수심판(洪水審判)을 하신 것을 보면, 그 때도 말세였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홍수심판 후 노아가정을 터로하여 메시아를 보내심으로써, 창조목적을 완성하려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아가정도 먼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고, 다음으로 그 기대 위에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아담가정이 복귀하지 못하였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Ⅰ. 믿음의 기대

1.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中心人物)은 노아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으로 이루시려다 못 이루신 뜻을 대신 이루시기 위하여 아담으로부터 1600년을 지나 10대만에 노아를 부르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찍이 아담에게 축복하셨던 것(창세기 1장 28절)과 마찬가지로 노아에 대해서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하셨던 것이다(창세기 9장 7절). 이러한 의미에서 노아는 제2 인간조상이 된다. 노아는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悖壞)하여 강포(强暴)가 땅에 충만한 때에 부름을 받아(창세기 6장 11절), 120년간이나 갖은 조롱과 비소를 받아가며, 하나님의 명령에만 절대 순종하여, 평지도 아닌 산 꼭대기에 방주(方舟)를 지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이것을 조건 삼아 노아가정을 중심하고 홍수심판(洪水審判)을 감행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아는 제1 믿음의 조상인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는 노아가 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아래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같이, 그의 아들 함의 범죄로 인하여 노아의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사명은 아브라함에게로 옮겨졌던 것이다. 아담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설명한 바와같은 이유로 말미암아 자기가 직접 헌제를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이미 아벨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하늘을 대하여 충성(忠誠)했던 그 심정(心情)의 터 위에서 부름을 받았고, 그는 또 혈통적으로 보더라도 아벨 대신 택함을 받은 셋(창세기 4장 25절)의 후손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그의 위인(爲人)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義人)이었기 때문에(창세기 6장 9절), 그는 방주를 지어 그것으로써 직접 하나님에게 상징헌제를 드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2.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

노아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條件物)들은 방주(方舟)였다. 그러면 그 방주의 의의는 무엇이었던가? 노아가 아담대신 제2 인간조상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내주었던 천주(天宙)를 탕감복귀하기 위한 조건을 세워야 한다. 따라서 신천주(新天宙)를 상징하는 어떠한 조건물을 제물로서 하나님 앞에 뜻 맞게 바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건물로 세웠던 것이 바로 방주였다. 방주는 3층으로 지었는데, 그 이유는 3단계의 성장기간들 통해서 창조된 천주를 상징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방주에 들어간 노아의 식구가 여덟이었던 것은, 노아가 아담 대신의 입장이었으므로, 일찍이 사탄에게 내주었던 아담가정의 여덟 식구를 탕감복귀하기 위함이었다. 방주가 천주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안에 주인으로 들어간 노아는 하나님을 상징하였고, 그의 식구들은 전인류(全人類)를 상징하였으며, 그 안에 들어간 동물들은 만물세계 전체를 상징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방주가 완성된 후에 하나님께서 40일간의 홍수심판(洪水審判)을 하셨는데, 이 심판의 목적은 무엇이었던가?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한 주인을 대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음란(淫亂)에 빠져서 이미 사탄을 대하고 있는 인류를 하나님이 또 하나의 주인의 입장에서 대하시어 비원리적인 섭리를 하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대하시어 섭리하실 수 있는 대상을 세우시기 위하여 사탄의 상대가 되어 있는 전 인류를 멸하시는 홍수심판의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심판기간(審判期間)을 40일로 정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후편 제3장 제2절 Ⅳ에서 논술하는 바, 10수는 귀일수(歸一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담 이후 10대 만에 노아를 찾아 세우셨던 목적은, 아담을 중심하고 이루지 못하였던 뜻을 노아를 중심하고 탕감복귀하여, 하나님에게로 재귀일(再歸一)시키기 위한 10수 복귀의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세우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위기대(四位基臺)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4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으로써 각 대(代)를 세우시는 섭리를, 노아에게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서 계속하여 오셨던 것이다.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기간은 40수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기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인간들의 음란으로 말미암아, 이 40수 탕감기간이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 방주(方舟)를 중심하고 4위기대를 완성하는 섭리를 다시 하시기 위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이 40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으로 40일 심판기간을 세워 가지고,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되어 40수는 그 후의 탕감복귀섭리노정(蕩減復歸攝理路程)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사탄 분립수로 필요하게 되었다. 그 예를 들면 노아심판(審判) 40일을 비롯하여,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의 400년, 이스라엘 민족의 애급 고역(埃及苦役) 400년, 모세의 두 차례에 걸친 금식기도(禁食祈禱) 40일, 가나안 정탐기간(偵探期間) 40일,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표류(曠野漂流) 40년,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의 재위기간(在位期間) 각 40년, 엘리야 금식 40일, 니느웨멸망에 관한 요나의 예언(豫言) 40일, 예수님의 금식기도 40일과 부활기간(復活期間) 40일 등은 모두 사탄을 분립하는 탕감기간이었던 것이다. 한편 성경을 보면 그 심판이 끝날 때에, 노아가 방주(方舟)에서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섭리를 어떻게 예시(豫示)하셨던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아모스 3장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 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방주를 하나님이 뜻 앞에 합당한 것으로 세움으로써, 천주(天宙)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는 심판 40일기간은, 천지창조(天地創造)의 이상(理想)이 실현될 때까지의 혼돈기간(창세기 1장 2절)에 해당되는 기간이었다. 따라서 40일이 끝날 때에 방주를 중심하고 나타내 보이셨던 행사는,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완료한 이후의 전역사노정(全歷史路程)을 상징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까마귀를 방주에서 내보내어, 물이 마를 때까지 왕래하게 하신 것은(창세기 8장 6~7절) 무엇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던가? 이것은 마치 인간창조 직후에 천사장(天使長)이 해와의 사랑을 노렸었고, 도 가인과 아벨이 헌제(獻祭)를 할 때에도 사탄이 그들에게 침범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과 같이(창세기 4장 7절), 홍수심판(洪水審判)이 끝날 무렵에도 사탄은 노아가정에 무슨 침범할 조건이 없는가 하고 엿보고 있었다는 것을, 까마귀가 어디에 앉을 곳이 없는가 하고 물 위를 찾아 헤매는 모양으로써 표시하신 것이었다. 다음으로 노아가 비둘기를 방주(方舟) 밖으로 세 번 내보낸 것은 무엇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었던가? 성서에는 물이 준 것을 알아보기 위하여 비둘기를 내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목적이었다면 비둘기를 내보내지 않고 창문으로 직접 내다보아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설혹 그 문들이 모두 봉해져 있었다 하더라도 비둘기가 나갈 수 있는 구멍으로 내다 보아서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둘기를 내보냈던 목적은 물이 준 것을 알려고 했던 것보다 더욱 중요한 데 있었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 숨겨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겠다. 하나님이 노아를 통하여 홍수심판(洪水審判)이 있을것을 선포하신지 7일 후에(창세기 7장 10절) 홍수가 시작되어, 40일 심판기간이 지난 후에 첫번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런데 이 비둘기는 물 위를 왕래하다가 발 붙일 곳이 없어서 다시 방주로 돌아가니, 노아가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창세기 8장 9절). 이 첫번 비둘기는 첫 아담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창세전(創世前)부터 하나님 안에 있었던 그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이, 아담이라는 완성실체(完成實體)로 실현되기를 원하시어 그를 지상에 창조하셨던 것인데, 그가 타락(墮落)되었기 때문에 그를 중심하고는 지상에 그 창조이상을 실현할 수 없게 되어, 하나님은 할 수 없이 그의 뜻 성사를 후일로 미루시고 그 이상(理想)을 일시 지상으로부터 거두어 들이셨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다음에 7일을 지나 노아는 다시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역시 물이 다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지상에 내려앉지를 못하고, 다음에는 앉을 수 있다는 표시로서 다만 감람나무 잎사귀를 입에 물고, 다시 방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창세기 8장 10~11절). 둘째 번으로 내보낸 이 비둘기는 창조이상(創造理想)의 '완성실체'로서 다시 오실 제2 아담된 예수님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이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실 것이지만, 만일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는 지상에 머무실 수가 없게 되어 그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실 것이기 때문에, 부득이 그는 재림(再臨)하셔야 할 것을 약속하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예시하신 것이었다. 물론 이 예시는, 만일 그 때에 땅에 물이 말라서 비둘기가 내려 앉아 먹을 것을 찾을 수 있었더면 그 비둘기는 결코 방주(方舟)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인데, 물이 채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로 다시 돌아갔던 것과 같이, 장차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잘 믿고 모시면, 그는 결코 죽지 않고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실 것이지만, 만일 그들이 불신으로 흐르지 않고 지상천국을 이루실 것이지만, 만일 그들이 불신으로 흐르게 되면, 예수님은 부득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재림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런 후 또다시 7일이 지나서 노아는 세번째로 비둘기를 내 보냈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물이 말랐었기 때문에, 다시는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창세기 8장 12절). 이 셋째 번의 비둘기는 제3 아담으로 오실 재림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반드시 지상에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실현할 수 있게되어 다시는 그 이상이 지상에서 거두어지는 일이 없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제3차의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노아는 비로소 방주에서 땅으로 내려와 신천지(新天地)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제3 아담으로 인하여 창조이상이 지상에서 이루어질때, 비로소 요한계시록 21장 1절 이하의 말씀대로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하나님의 장막(帳幕)이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될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이 비둘기를 세 번 내보낸 실례(實例)로써, 예정론(豫定論)에서 밝혀진 바와같이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는 그 섭리의 대상인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면, 반드시 연장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아담의 불신으로 인하여 그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후아담으로 오셔야 할 것과 만일 유대인들도 불신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부득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어 제3 아담으로 재림(再臨)하셔야 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기록되어있는 7일이라고 하는 기간은, 천지(天地)를 창조하실 때에 7일이라는 기간이 있었던 것과 같이, 그것을 다시 찾아 세우는 데에도 섭리적인 어떠한 기간이 지난 후가 아니면 아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노아가정은 심판 40일로써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인 방주(方舟)를 뜻맞게 찾아 세워 그 기대(基臺)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할 수 있었던 것이다.

Ⅱ. 실체기대

노아는 방주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제물로 바쳐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성공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였다. 이로써 노아는 만물(萬物)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는 동시에,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웠던 것이다. 다음엔 이 기대 위에서 노아의 아들 셈과 함이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서 '실체헌제(實體獻祭)'에 성공하면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노아가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성공한 후에, 이 가정의 '실체헌제(實體獻祭)'가 뜻맞는 것으로 바쳐지기 위하여서는, 먼저 '실체헌제'의 중심이 되어야 할 차자 함이, 아담가정의 '실체헌제'의 중심이었던 차자(次子) 아벨의 입장을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었다. 아담때에는 아벨 자신이 아담의 대신으로 '상징헌제'를 하였기 때문에, 아벨이 그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는 동시에 '상징헌제'의 중심으로도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 때는 함이 아니고 노아 자신이 '상징헌제'를 하였기 대문에, 함이 '상징헌제'에 성공한 아벨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는, '상징헌제'에 성공한 노아와 심정으로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함으로 하여금 노아와 심정으로 일체적인 입장에 서게 하시기 위하여 어떠한 섭리(攝理)를 하셨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창세기 9장 20절 내지 26절에 씌어 있는 기록을 보면, 함은 그의 부친 노아가 장막(帳幕) 안에서 나체(裸體)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부끄럽게 여겼을 뿐 아니라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그 형제 셈과 야벳을 선동(煽動)하였다. 이 때에 그들도 함의 선동에 뇌동(雷同)되어 그의 부친의 알몸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이키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그 부친의 몸에 옷을 덮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죄가 되어 노아는 함을 저주하여 이르기를 그 형제의 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러한 섭리를 하셨으며, 또 나체를 부끄러워한 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었는가? 이러한 내용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어떻게 되면 죄가 되는가 하는 문제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사탄도 어떤 대상을 세워 그와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수수(授受)의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 존재 및 활동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든지 그에게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어 사탄의 상대가 됨으로써 사탄이 활동할 수 있게 될 때 거기에 죄가 성립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어찌하여 노아의 나체(裸體)로써 함을 시험하셨던가 하는 것이다. 방주(方舟)는 천주(天宙)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판 40일로써 방주를 뜻 가운데 세운 직후에 되어진 모든 사실들을 천주창조(天宙創造) 이후에 되어지는 모든 사실들을 상징한 것이기 때문에, 심판 40일로써 방주를 뜻 가운데 세운 직후에 되어지는 모든 사실들을 상징한 것이었다 함은 이미 논술한 바와같다. 그러므로 40일심판이 끝난 직후의 노아의 입장은 천지창조 후의 아담의 입장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창조된 아담과 해와가 서로 얼마나 가깝고 허물할 것이 없는 사이였으며, 또한 얼마나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없었던가 하는 것은, 창세기 2장 25절에 그들이 서로 알몸으로 있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墮落)한 후에 스스로 하체(下體)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나무잎으로 가렸었고, 또 하나님이 보실 것을 두려워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었다(창세기 3장 7절). 그러므로 그드이 하체를 부끄러워했던 행위는, 하체로 범죄하여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었다는 정념(情念)의 표시요, 하체를 가리고 숨었었던 행동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범죄의식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40일심판으로 사탄을 분립(分立)한 입장에 있었던 노아는 천지창조 직후의 아담의 입장에 섰어야 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나체(裸體)로 있어도 그 가족들이 그것을 보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또 숨으려 하지도 않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것으로써, 일찍이 죄를 짓기전 어디도 가린 데 없이 들어낸 나체 그대로의 인간을 보시면서 기뻐하셨던 그 심정을 탕감복귀하려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큰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노아로 하여금 나체로 누워 있게 하셨었다. 따라서 함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과 같은 심정(心情)으로 아무 부끄러움 없이 노아를 대했어야, 노아와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뜻 가운데서 죄 짓기 전 부끄러움을 몰랐던 아담가정의 입장으로 복귀하는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아들들은 이와 반대로 그 부친의 나체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 이를 가렸으므로, 이로써 그들은 타락 후의 아담가정과 같이,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은 부끄러운 몸들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증(自證)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미 까마귀로써 보여주신 것과 같이, 노아가정에 침범할 수 있는 무슨 조건이 없는가 하고 엿보고 있었던 사탄은 자기의 혈연적인 후손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나선 노아의 아들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가정에 다시 침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함이 그 부친의 알몸을 부끄러워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그 행동은 범죄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함은 '실체헌제'를 하기 위한 아벨의 입장을 탕감복귀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룰 수 없었으므로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도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 나체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죄가 되는가 ? 노아는 아담의 대신으로서 아담으로 인하여 사탄이 침범한 모든 조건들을 없애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가정은 나체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가리지도 않는다는 감성과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써,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기 전 아담가정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체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가리지도 않는 것으로 세워야 할 탕감조건은, 아담가정 대신으로 세워졌던 노아가정만이 세워야 할 조건이었던 것이다.

Ⅲ. 노아가정이 보여준 교훈

노아가 120년간이나 걸려서 산꼭대기에다 배를 지었던 것은 누구나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극심한 비난과 조소를 받은 그 일로 말미암아서 노아가정이 구원(救援)을 받았다는 사실은 함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과거의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함은 설혹 노아가 알몸으로 누어 있는 것이 못마땅하게 생각되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을 좋게만 볼 수 있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함은 자기를 중심하고 하늘 앞에 선 노아를 비판하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표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담으로부터 1600년이나 지나 40일 홍수심판(洪水審判)을 행사하심으로써 찾아 세우셨던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천국가는 길은 겸허(謙虛)와 순종(順從)과 인내(忍耐)를 요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또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뜻 성사(成事)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분담(責任分擔) 수행여부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셨다. 노아가정은 하나님이 1600년이나 걸려 찾아오셨고, 또 노아가 방주(方舟)를 짓기까지 120년이나 이끌어 오셨으며, 뿐만 아니라 40일의 홍수(洪水)로써 전 인류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세우신 가정이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함의 작은 실수로 말미암아서 사탄이 침범하게 되었을때, 하나님은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대상이었던 그 가정 전부를 아낌없이 쓸어버리시어,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豫定)이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노아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려고 오랜 기간을 두고 애써 찾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정이 일단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를 아낌 없이 버리시고 그 대신 아브라함을 택하셨던 사실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제3절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285

함의 타락행위(墮落行爲)로 말미암아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시려는 '뜻' 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것이므로, 노아가 하늘을 대하여 충성했던 그 심정(心情)의 터전 위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그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를 다시 하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노아 가정이 이루려다 못 이루었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여, 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이하여야만 하였다. 따라서 아브라함도 먼저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고, 그 기대 위에서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Ⅰ. 믿음의 기대

1.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中心人物)은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노아를 중심하고 이루려 하셨던 ‘뜻’을 계승하여 이루기 위한 중심인물로 세워졌던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노아의 노정을 위하여 세워졌다가 함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내 주게 되었던 모든 조건들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한 입장에 서지 않으면, 노아를 중심한 ‘뜻’을 이어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노아가 첫째로 사탄에게 내주었던 조건은,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0대와 심판 40일기간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10대와 함께, 그 10대가 각각 심판 40수를 탕감복귀한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1대를 40일기간으로써는 탕감복귀할 수 없었기 때문에, 후일 모세노정에 있어서 정탐(偵探) 40일의 실수를 광야 표류 40년기간으로써 탕감복귀한 것과 같이(민수기 14장 34절), 여기에서도 각 대(代)가 심판 40일의 실수를 40년기간으로써 탕감복귀하는 통산년수(通算年數)를 세우게 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노아로부터 10대에 걸친 400년 탕감기간을 경과한 후에야 비로소 노아 대신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셨다. 이와같이,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1600년 간에 10대를 복귀하였던 시대에서 400년 간에 10대를 복귀하는 시대로 넘어왔기 때문에 노아 이후 인간의 수명(壽命)은 갑자기 짧아지게 되었다. 노아가 둘째로 사탄에게 내주었던 조건은 믿음의 조상의 입장과 아벨 대신이었던 함의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과 함의 입장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지 않고는 노아의 입장에 설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노아 대신 믿음의 조상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는 , 노아가 믿음과 충성으로 방주(方舟)를 지었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도 믿음과 충성으로‘상징헌제(象徵獻祭)’를 드려야만 했었다. 한편 또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아벨의 대신이었던 함(그들은 모두 둘째 아들로서 실체헌제의 중심이었다)을 사탄에게 내주셨으므로, 탕감복귀원칙에 의하여 하나님도 그 대신으로 사탄이 가장 사랑하는 입장에 있는 존재를 빼앗아 오셔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분에 하나님은 우상(偶像)장사인 데라로부터 그 아들 아브라함을 이끌어 내셨던 것이다(수 24:2-3). 287 아브라함은 노아의 대신이요. 따라서 아담의 대신이기 때문에 복귀(復歸)한 아담형의 인물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과 노아에게 축복(祝福)하셨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에게도 자녀를 번식하여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라고 축복하셨던 것이다(창12:2). 아브라함은 이러한 축복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하란에서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아내 사라와 조카 롯 그리고 거기에서 취한 모든 재물과 삶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갔었다(창12:4-5).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노정으로써, 장차 야곱과 모세가 사탄세계인 하란과 애급(埃及)에서 각각 그 처자(妻子)를 데리고 재물을 취하여, 그 어려운 환경을 박차고 떠나 가나안으로 복귀해야 할 전형노정(典型路程)으로 삼게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노정은 또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사탄세계의 모든 인간과 만물세계를 하나님의 세계에로 복귀해야 할 전형노정을 예시(豫示)한 것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후편 제2장 제1절 Ⅱ 참조).

2.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

(1)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비둘기와 양과 암소로써 제사(祭祀)를 드릴것을 명하셨던 것이니, 이것들은 바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條件物)들이었던 것이다(창 15:9). 따라서 마치 노아가 ‘상징헌제(象徵獻祭)’로서 방주(方舟)를 지어 바치려하였을 때 그 헌제를 위한 믿음을 세웠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도 이 ‘상징헌제’를 하기 위하여는 그것을 위한 믿음을 세워야만 했었다. 성서에는 노아가 어떠한 방법으로 그 믿음을 세웠는가 하는 것은 명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창세기 6장 9절에 노아가 당세의 의인(義人)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방주(方舟)를 지으라시는 명령을 받기에 합당한 의인이 되기까지에는 필시 어떠한 믿음을 세웠음에 틀림없다. 기실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와 같이 믿음에서 믿음을 세워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다(롬 1:17). 그러면 아브라함은 ‘상징헌제’를 하기 위하여 어떠한 믿음을 세웠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아브라함은 제2 인간 조상 노아의 입장을 복귀해야 했었다. 따라서 그는 또 아담의 입장에도 서야 했기 때문에, 그는 ‘상징헌제’를 하기전에 아담가정의 입장을 복귀하는 상징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을 먼저 세워야 하였던 것이다. 창세기 12장 10절 이하의 성구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기근(饑饉)으로 인하여 애급(埃及)으로 내려갔던 일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애급 왕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고자 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그와 부부관계(夫婦關係)하고 하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하여 미리 짠 바 계책대로 자기의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아브라함은 그의 처(妻) 사라를 남매(男妹)의 입장에서 바로의 아내로 빼앗겼다가 하나님이 바로를 징계하시어 다시 그 아내를 찾아오는 동시에, 데리고 갔던 조카 롯과 함께 많은 재물을 취해가지고 나왔었다. 아브라함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서, 아담가정의 입장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상징적인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이러한 섭리노정(攝理路程)을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289 아담과 해와가 미완성기(未完成期)에서 아직 남매와 같은 입장에 있었을 때에 천사장(天使長)이 해와를 빼앗아 감으로 인하여, 그의 자녀들과 만물세계까지 사탄의 주관하에 속하게 되었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조건을 세우려면,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남매와 같은 입장에서 처 사라를 사탄의 실체인 바로에게 빼았기었다가 그의 처의 입장에서 다시 그녀를 찾아옴과 동시에, 전인류(全人類)를 상징하는 롯과 만물세계를 상징하는 재물을 찾아오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창 14:16). 아브라함의 이러한 노정은 후일에 예수님이 오셔서 걸어야 할 전형노정(典型路程)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이 탕감조건을 세운 후에야 비로소 비둘기와 양과 암소로써 ‘상징헌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하여는, 원래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려 하셨던 노아와 그 가정의 입장을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담과 그 가정의 입장에도 서야했었기 때문에, 아담가정에서 가인 아벨의 헌제를 중심하고 복귀하려 했던 모든 것을 탕감복귀할 수 있는 상징적인 조건물(條件物)을 바쳐야 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또 노아가정이 방주를 중심하고 복귀하려 했던 모든 것을 탕감복귀할수 있는 상징적인 조건물을 하나님 앞에 합당한 제물로 바쳐야 했었다. 이러한 상징적인 조건물로 바친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상징제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상징제물로 바쳤던 비둘기와 양과 암소는 과연 무엇을 상징하였던가? 이 세 가지의 상징제물(象徵祭物)은 3단계의 성장과정을 통하여 완성되는 천주(天宙)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즉 그중의 비둘기는 소생(蘇生)을 상징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섭리(舊約攝理) 완성자, 곧 소생섭리(蘇生攝理) 완성자로 오셨었다. 즉 예수님은 비둘기로 표시된 소생섭리 완성자로 오셨기 때문에, 그에 대한 표징(表徵)으로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신(神)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 위에 임하셨던 것이다(마3:16). 한편 또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를 복귀하려고 오신 분으로서 먼저 사탄이 침범했던 그 비둘기를 복귀한 입장에 서야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비둘기로써 그가 소생 구약섭리 완성자로 오셨음을 보여 주셨던 것이다. 290 다음으로 양(羊)은 장성(長成)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제물(祭物) 실수를 복귀하려고 오신 분으로서, 비둘기로서 표시된 모든 것을 복귀한 구약섭리의 기대(基臺) 위에서 양으로서 표시된 모든 것을 복귀해야 할 장성 신약섭리(長成新約攝理)의 출발자이기도 하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 의하여 비둘기로 표시된 소생섭리의 완성자라는 증거를 받으신 후, 어느 날 세례 요한은 또 예수님이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이 장성 사명 출발자이심을 증거하였던 것이다. 291 다음으로 암소는 완성(完成)을 상징하였다. 사사기 14장 18절을 보면, 삼손이 수수께끼의 문제를 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로 하여금 삼손을 꼬여 그 내용을 탐지해 내게 함으로써 그것을 푼 일이 있었는데, 그때 삼손은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삼손은 아내를 암소로 비유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전인류의 신랑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가 재림(再臨)하실때까지의 성도(聖徒)들은 오시는 신랑 앞에 신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부 된 성도들이 다시 오시는 신랑 된 예수님과 어린양잔치를 치른 후에는 신부가 아니고 아내가 되어 남편 된 예수님과 더불어 천국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재림 이후의 완성 성약시대(完成 成約時代)는 아내의 시대요, 따라서 암소의 시대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암소는 곧 완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많은 영통인(靈通人)들이 이때가 소의 시대라고 계시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3제물은 또 무엇을 탕감복귀하는 것인가? 아브라함은 그의 ‘상징헌제(象徵獻祭)’로써, 일찍이 아담과 노아의 각 가정을 중심한 섭리에서 그들이 ‘상징헌제’로써 탕감복귀하여다가 사탄에게 내주었던 모든 것을 재탕감복귀(再蕩減復歸)하는 동시에, 또 그들이 ‘실체헌제(實體獻祭)’로써 탕감복귀하려다가 실패하여 사탄에게 내주었던 모든 것을 재탕감복귀할 수 있는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였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상징헌제’는 아담으로부터 노아 아브라함, 이렇게 3대에 걸친 종적인 섭리의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그 3제물로써 일시에 횡적으로 복귀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소생(蘇生)·장성(長成)·완성(完成)의 3단계를 상징하는 비둘기와 양과 암소를 한 제단에 벌여 놓고 헌제한 것은, 마치 아담의 당대에서 3단계의 성장기간(成長期間)을 완성하려 했던 것과 같이 아담의 입장인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소생 아담, 장성 노아, 완성 아브라함의 , 뜻으로 본 3대에 걸쳐서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려던 종적인 섭리를 일시에 횡적으로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헌제는 사탄이 침범하였던 3수로 표시된 모든 조건들을 일시에 탕감복귀 함으로써, 전복귀섭리(全復歸攝理)를 단번에 이루시려는 뜻을 상징적으로 표시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어떻게 드렸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겠다. 292 창세기 15장 10절 내지 13절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다른 제물은 모두 둘로 쪼개서 제단의 좌우에 놓았으나 비둘기만은 쪼개지 않고 그대로 놓았기 때문에, 솔개가 그 고기 위에 내려왔으므로 아브라함이 이것을 쫓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 날 해질 때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창15:13)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쪼개야 할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위에 솔개가 내렸었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 들어가서 400년 간을 고역(苦役)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