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 교리 원문/원리원본/002: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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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 색인: [[통일교 교리 원문/원리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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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부분: 가나안의 조상이 되어 하나님의 원수가 되리라는 것을 말함이다.
* 시작 부분: 그러면 결론적으로 표시하면 하나님 하나에서 사람 이성(남성+여성)으로 분립시켜서 장성케하여 사랑 이상을 주어 행복케 하는 동시에 사람으로 하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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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
== 원문 ==
가나안의 조상이 되어 하나님의 원수가 되리라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면 <ruby>결론적<rt>結論的</rt></ruby>으로 <ruby>표시<rt>表示</rt></ruby>하면 하나님 하나에서 사람 <ruby>이성<rt>二性</rt></ruby>(<ruby>남성<rt>男性</rt></ruby>+<ruby>여성<rt>女性</rt></ruby>)으로 <ruby>분립<rt>分立</rt></ruby>시켜서 <ruby>장성<rt>長成</rt></ruby>케하여 사랑 <ruby>이상<rt>理想</rt></ruby>을 주어 <ruby>행복<rt>幸福</rt></ruby>케 하는 <ruby>동시<rt>同時</rt></ruby>에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들의 <ruby>양성<rt>兩性</rt></ruby>이 <ruby>일체<rt>一體</rt></ruby>가 되어서 사랑하는 그 <ruby>자체<rt>自體</rt></ruby>들을 볼 적에 얼마나 아름답고 <ruby>귀<rt>貴</rt></ruby>하게 보는가를 사람에게 알게 하기 <ruby>위<rt>爲</rt></ruby>하여서 <ruby>번식<rt>繁殖</rt></ruby>을 주어 사랑할 수 있는 <ruby>존재<rt>存在</rt></ruby>들로 되게 함이 <ruby>번식체<rt>繁殖體</rt></ruby> <ruby>자식<rt>子息</rt></ruby>을 위한 <ruby>부모<rt>父母</rt></ruby>들의 사랑이다.
그리하여 또 다시 하나님과 사탄은 대립을 보게 되어 자손을 번식하니 다시 자손들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행동으로 흘러나가게 되었고, 노아 전과 같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탄의 뜻 번식에 협력하여 나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금 사람을 뜻 중에 품으려하는 자들을 빼앗긴 셈이었다. 그러므로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이 사탄한테 속하지 않게 하기 위한 대안이 요구되는 바이다.
 
때 마침,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곳으로 흘러나가는 행동뿐이었다. 그것은 사탄이 즐거워하는 행동결과이니 이것을 그냥 두어 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언어가 하나이니, 전부가 의사가 통하여 곳으로 동작하는데, 전체적으로 움직이게 되니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하늘 편의 뜻 성사하기 위하여 도움되는 언어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바벨탑을 쌓아 사탄 뜻 협력하는 행동의 기인을 가져오니 하나님은 언어를 상반되게 함은 뜻을 반하여 행동 협조물이 언어로써 한 방향으로 전인류가 흘러들어 나갔으니 언어를 혼잡케 하여서 사탄 뜻 돕는 길을 막고자 함이 인간 언어를 혼잡시킨 근본의의였다. 그런고로 만약 뜻 중에서 인간이 이런 탑을 쌓았으면, 뜻 성사로 나갔으면, 언어를 혼잡케 할 리 만무한 일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ruby>이상<rt>理想</rt></ruby> 사랑하면 이와 같이 <ruby>귀<rt>貴</rt></ruby>하게 보여지는 <ruby>자체<rt>自體</rt></ruby>가 <ruby>인간<rt>人間</rt></ruby>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ruby>인간<rt>人間</rt></ruby>은 <ruby>육신<rt>肉身</rt></ruby>이 있고 <ruby>영인<rt>靈人</rt></ruby>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에게 <ruby>육신<rt>肉身</rt></ruby>의 <ruby>부모<rt>父母</rt></ruby>와 <ruby>영<rt>靈</rt></ruby>의 <ruby>부모<rt>父母</rt></ruby>가 딴 <ruby>존재<rt>存在</rt></ruby>들과 다르게 <ruby>소유<rt>所有</rt></ruby>함이 <ruby>특유점<rt>特有點</rt></ruby>이다. 이 <ruby>점<rt>點</rt></ruby>이 <ruby>유<rt>有</rt></ruby>함으로 <ruby>영원<rt>永遠</rt></ruby>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세상에 뜻 성사시기가 오면 언어는 하나의 목적으로 하늘적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뜻을 성사 협조하여서 통일된 언어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 시작은 중심존재 재림주가 오면 그로부터 하나님의 언어와 창조적 주관 허락이거든 세계주관세계는 근본적으로 복귀되어야 한다.
 
사탄 뜻 돕는 바벨은 분기하는 공작이었으나, 하늘 대하는 뜻의 탑은 합체하여 하나되게 하는 공작이다. 하늘 뜻 중심하고 복귀된 사람들이 뜻의 탑을 높이 쌓는 것을 보고자 함이 하나님의 뜻이다. , 우리 이상의 터다.
그러면 <ruby>영원이상세계<rt>永遠理想世界</rt></ruby>는 <ruby>영<rt>靈</rt></ruby>의 <ruby>부모<rt>父母</rt></ruby>를 모시고 <ruby>각자<rt>各自</rt></ruby>가 사랑 <ruby>이상점<rt>理想點</rt></ruby>을 <ruby>매일<rt>每日</rt></ruby> <ruby>생<rt>生</rt></ruby>에 <ruby>취<rt>醉</rt></ruby>한 <ruby>생활<rt>生活</rt></ruby>이 우리 <ruby>인생<rt>人生</rt></ruby>의 <ruby>이상<rt>理想</rt></ruby>이며 <ruby>창조주<rt>創造主</rt></ruby>의 <ruby>이상<rt>理想</rt></ruby>이며 <ruby>영<rt>靈</rt></ruby>의 아버지 어머니의 <ruby>이상<rt>理想</rt></ruby>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ruby>육신<rt>肉身</rt></ruby> <ruby>부모<rt>父母</rt></ruby>가 있는 <ruby>동시<rt>同時</rt></ruby>에 <ruby>영<rt>靈</rt></ruby>의 <ruby>부모<rt>父母</rt></ruby>가 있는 것을 찾아 모셔야만 우리 <ruby>근본점<rt>根本點</rt></ruby>을 찾아 사는 <ruby>자<rt>者</rt></ruby>가 된다.
이렇게도 하나님은 사탄 대하여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언어 혼잡케 하신 것이야. 인간에게 복된 일이 아니냐! 이와 같이 안타깝게 사람의 죄를 누가 감당하랴! 이렇게 하였으나, 사람은 여전하게 뜻을 멀리하여 뜻을 세워서 받들면서 거기에 성심을 다하는 자를, 보기가 심히도 드물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뜻에 품으려던 노아의 자손들을 또 다시 사탄한테 빼앗겼으니 이것을
 
그러므로 오늘 <ruby>세계<rt>世界</rt></ruby>에 이 <ruby>근본원리<rt>根本原理</rt></ruby>를 밝히지 못한 것을 <ruby>천명<rt>天命</rt></ruby>을 <ruby>통<rt>通</rt></ruby>하여 밝히고자 하는 바이다. 먼저 <ruby>선언<rt>宣言</rt></ruby>하는 바는 <ruby>영<rt>靈</rt></ruby>을 <ruby>통<rt>通</rt></ruby>하여 가르침을 받는 <ruby>자<rt>者</rt></ruby>는 이 <ruby>원리<rt>原理</rt></ruby>와 <ruby>본론<rt>本論</rt></ruby>에 대하여 <ruby>사실<rt>事實</rt></ruby>의 <ruby>근거점<rt>根據点</rt></ruby>을 알기 위하여 <ruby>문의<rt>問議</rt></ruby>하면 그 <ruby>결정적<rt>決定的</rt></ruby> <ruby>자체<rt>自體</rt></ruby>를 알려 주리라.
 
=== <ruby>제<rt>第</rt></ruby>5 <ruby>장<rt>章</rt></ruby> 하나님의 <ruby>이상<rt>理想</rt></ruby> <ruby>중심<rt>中心</rt></ruby>은 모시는 <ruby>종교<rt>宗敎</rt></ruby>로 ===
 
하나님께서 <ruby>세계<rt>世界</rt></ruby>를 <ruby>주관<rt>主管</rt></ruby>한다면 그 <ruby>주관<rt>主管</rt></ruby>은 <ruby>필연적<rt>必然的</rt></ruby>으로 <ruby>자기<rt>自己</rt></ruby>를 높이는 <ruby>중심구조<rt>中心構造</rt></ruby>를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나타날 것은 우리가 <ruby>상상적<rt>想像的</rt></ruby>으로 <ruby>추측<rt>推測</rt></ruby>하여 알 수 있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그러므로 <ruby>세계<rt>世界</rt></ruby>도 <ruby>종교이상형태<rt>宗敎理想形態</rt></ruby>을 가진 <ruby>국제구조<rt>國際構造</rt></ruby>가 <ruby>필연적<rt>必然的</rt></ruby>으로 나타나야 된다.
 
그렇다면 우리 <ruby>이상<rt>理想</rt></ruby>은 <ruby>즉<rt>卽</rt></ruby> 하나님의 <ruby>이상<rt>理想</rt></ruby>이 <ruby>세계적<rt>世界的</rt></ruby>으로 <ruby>실현<rt>實現</rt></ruby>될적에야 <ruby>인생<rt>人生</rt></ruby>은 <ruby>행복<rt>幸福</rt></ruby>으로 살 수 있으며 길이 길이 <ruby>행복<rt>幸福</rt></ruby>이 <ruby>시작<rt>始作</rt></ruby>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바라는 <ruby>종교<rt>宗敎</rt></ruby>는 <ruby>세계<rt>世界</rt></ruby>의 <ruby>중심<rt>中心</rt></ruby>으로 움직임을 <ruby>부인<rt>否認</rt></ruby> 못한다.
 
그러하면 <ruby>현금세계<rt>現今世界</rt></ruby>를 볼 적에 <ruby>세계적<rt>世界的</rt></ruby> <ruby>중심<rt>中心</rt></ruby>을 이루고 나아가는 하나님을 모시는 <ruby>종교<rt>宗敎</rt></ruby>는 무슨 <ruby>종교<rt>宗敎</rt></ruby>인가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 <ruby>종교<rt>宗敎</rt></ruby>는 <ruby>기독교<rt>基督敎</rt></ruby>를 잡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그 <ruby>기독교<rt>基督敎</rt></ruby>의 <ruby>중심진리<rt>中心眞理</rt></ruby>와 하나님의 <ruby>이상<rt>理想</rt></ruby>과는 <ruby>동일<rt>同一</rt></ruby>하며 그 <ruby>이상<rt>理想</rt></ruby>과 <ruby>세계<rt>世界</rt></ruby>와는 <ruby>동일<rt>同一</rt></ruby>한 <ruby>노정<rt>路程</rt></ruby>을 떠나서 나아갈 수 없는 바이다. 이것이 없다면 <ruby>종교<rt>宗敎</rt></ruby>로 모시는 <ruby>신<rt>神</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에 <ruby>대<rt>對</rt></ruby>하여서도 다시금 <ruby>의심<rt>疑心</rt></ruby>치 않을 수 없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그러므로 <ruby>현세계<rt>現世界</rt></ruby>는 하나님을 <ruby>중심<rt>中心</rt></ruby>한 <ruby>국가<rt>國家</rt></ruby>들이 <ruby>연합<rt>聯合</rt></ruby>한 <ruby>국제기구<rt>國際機構</rt></ruby>와 <ruby>반대<rt>反對</rt></ruby>인, <ruby>신<rt>神</rt></ruby>이 없다는 <ruby>국가구조<rt>國家構造</rt></ruby>인 <ruby>공산주의<rt>共産主義</rt></ruby> <ruby>국가체계<rt>國家體系</rt></ruby>가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다면 <ruby>조물주<rt>造物主</rt></ruby>의 뜻이 완성을 보지 않을 수 없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ruby>반대<rt>反對</rt></ruby>하여 나아가는 그 <ruby>존재<rt>存在</rt></ruby>들은 <ruby>악신<rt>惡神</rt></ruby>의 <ruby>주관국가<rt>主管國家</rt></ruby>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서로 <ruby>소유<rt>所有</rt></ruby>하고자 하는 <ruby>신적<rt>神的</rt></ruby> 싸움 <ruby>즉<rt>卽</rt></ruby> 하나님과 <ruby>악신<rt>惡神</rt></ruby> 사탄과의 사람을 찾고자 함의 하나님의 뜻을 <ruby>반<rt>反</rt></ruby>하여 사람을 빼앗기지 않고자 하는 사탄의 <ruby>반상<rt>反峠</rt></ruby>이 <ruby>즉<rt>卽</rt></ruby> <ruby>현대<rt>現代</rt></ruby> <ruby>조류<rt>潮流</rt></ruby>의 <ruby>진상<rt>眞狀</rt></ruby>이다.
 
그러므로 <ruby>진리<rt>眞理</rt></ruby>는 하나이니 하나님은 <ruby>기필<rt>旣必</rt></ruby>코 <ruby>천주<rt>天宙</rt></ruby>로 하여금 그 뜻을 <ruby>성사<rt>成事</rt></ruby>함의 <ruby>목적<rt>目的</rt></ruby>이 <ruby>달성<rt>達成</rt></ruby>되는 데까지는 <ruby>전쟁<rt>戰爭</rt></ruby>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ruby>선악<rt>善惡</rt></ruby>의 <ruby>분기<rt>分岐</rt></ruby>가 먼저 <ruby>문제<rt>問題</rt></ruby>로 우리가 <ruby>고심<rt>苦心</rt></ruby>하여도 <ruby>해결<rt>解決</rt></ruby>할 수 없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며 어찌하여 <ruby>지금<rt>至今</rt></ruby> <ruby>세계<rt>世界</rt></ruby>까지 하나님이 <ruby>섭리<rt>攝理</rt></ruby>하시는 <ruby>근본문제<rt>根本問題</rt></ruby> <ruby>등등<rt>等等</rt></ruby>을 찾아보아서 누구나 <ruby>전인류<rt>全人類</rt></ruby>는 하나님의 <ruby>근본<rt>根本</rt></ruby>뜻과 그 <ruby>이상<rt>理想</rt></ruby>을 <ruby>전력<rt>全力</rt></ruby> 다하여 <ruby>협조<rt>協助</rt></ruby>하는 <ruby>방향<rt>方向</rt></ruby>으로 나아가야 할 <ruby>책임적<rt>責任的</rt></ruby> <ruby>의무<rt>義務</rt></ruby>의 <ruby>근본<rt>根本</rt></ruby> <ruby>등등<rt>等等</rt></ruby>을 밝히기로 하여보자.
 
그러므로 하나님이 <ruby>기독교<rt>基督敎</rt></ruby>를 세워 <ruby>인류<rt>人類</rt></ruby>를 <ruby>대<rt>對</rt></ruby>한 <ruby>섭리노정<rt>攝理路程</rt></ruby>과 <ruby>기독교<rt>基督敎</rt></ruby>의 <ruby>지금<rt>至今</rt></ruby>까지 감추어진 <ruby>진리<rt>眞理</rt></ruby>의 <ruby>근본문제<rt>根本問題</rt></ruby> <ruby>등등<rt>等等</rt></ruby>이 <ruby>명백<rt>明白</rt></ruby>히 나타나야만 된다 이 <ruby>사실<rt>事實</rt></ruby>이 나타나면 <ruby>말세<rt>末世</rt></ruby>인 <ruby>동시<rt>同時</rt></ruby>에 <ruby>우주적<rt>宇宙的</rt></ruby> <ruby>심판시기<rt>審判時期</rt></ruby>는 <ruby>초래<rt>招來</rt></ruby>하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의 <ruby>근거<rt>根據</rt></ruby> <ruby>등등<rt>等等</rt></ruby>을 알아야 한다. 끝날이 되면 <ruby>성경<rt>聖經</rt></ruby>도 완성하여야만 될터인데 <ruby>성경<rt>聖經</rt></ruby>의 <ruby>근본문제<rt>根本問題</rt></ruby>가 <ruby>명백<rt>明白</rt></ruby>히 되지 않는다면 <ruby>말세<rt>末世</rt></ruby>라고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ruby>재림<rt>再臨</rt></ruby>이라는 <ruby>명사<rt>名詞</rt></ruby>조차 <ruby>성사<rt>成事</rt></ruby>치 못한다. <ruby>재림<rt>再臨</rt></ruby>되기 <ruby>전<rt>前</rt></ruby>에 <ruby>성경중심<rt>聖經中心</rt></ruby> <ruby>근본<rt>根本</rt></ruby>을 <ruby>해결<rt>解決</rt></ruby>하여만 되는 것이 <ruby>현기독교<rt>現基督敎</rt></ruby> <ruby>신자<rt>信者</rt></ruby>의 <ruby>중대<rt>重大</rt></ruby>한 <ruby>문제<rt>問題</rt></ruby>이면서 <ruby>세계<rt>世界</rt></ruby> <ruby>신학계<rt>神學界</rt></ruby>의 <ruby>중대과업<rt>重大課業</rt></ruby>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ruby>전세계<rt>全世界</rt></ruby>의 <ruby>신자<rt>信者</rt></ruby>들에 <ruby>대<rt>對</rt></ruby>하여서 이 <ruby>근본문제<rt>根本問題</rt></ruby>를 밝혀서 <ruby>선포<rt>宣布</rt></ruby>치 않을 수 없는 바이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로 <ruby>자기<rt>自己</rt></ruby>를 찾아 나오는 <ruby>신앙생활노정<rt>信仰生活路程</rt></ruby>에 <ruby>반대<rt>反對</rt></ruby>된다고 <ruby>반대<rt>反對</rt></ruby>하지말지어다. 먼저 <ruby>직접<rt>直接</rt></ruby> 하나님의 <ruby>교시<rt>敎示</rt></ruby>를 받는 <ruby>신자<rt>信者</rt></ruby>들은 밝힘을 받아 이를 <ruby>지지<rt>支持</rt></ruby>하여 뜻 <ruby>완성<rt>完成</rt></ruby>에 <ruby>협조<rt>協助</rt></ruby>하여야할 <ruby>중대의무<rt>重大義務</rt></ruby>를 알아야 한다. 누가 먼저 <ruby>본시적<rt>本視的</rt></ruby>으로 알고 모시는 <ruby>자<rt>者</rt></ruby>는 저 나라에서 큰 <ruby>영광<rt>榮光</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일 것이며 <ruby>세상<rt>世上</rt></ruby>에서도 그 <ruby>존시<rt>尊侍</rt></ruby>하지 않을 수 없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이 <ruby>근본<rt>根本</rt></ruby>을 알고 나면 우리는 <ruby>여하<rt>如何</rt></ruby>하게 <ruby>행동<rt>行動</rt></ruby>하여야하는가가 <ruby>중대<rt>重大</rt></ruby> <ruby>책임감<rt>責任感</rt></ruby>이다. 이리하여서 우리는 뜻 <ruby>실현<rt>實現</rt></ruby>하는데 <ruby>협조<rt>協助</rt></ruby>할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도 잘알면서 <ruby>급속<rt>急速</rt></ruby>한 <ruby>시일<rt>時日</rt></ruby>로 <ruby>실현<rt>實現</rt></ruby>을 <ruby>피<rt>避</rt></ruby>하면 하나님 앞에 <ruby>범행<rt>犯行</rt></ruby>이라 아니할수 없다. 모르면 <ruby>용서<rt>容恕</rt></ruby>받지만 알면 <ruby>책임사명<rt>責任使命</rt></ruby>에 대하여 <ruby>각자<rt>各自</rt></ruby>는 <ruby>전부<rt>全部</rt></ruby>를 <ruby>봉헌<rt>奉獻</rt></ruby>하여 기쁨으로 나아가야만 된다. 그러야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ruby>고<rt>故</rt></ruby>로 <ruby>신앙생활<rt>信仰生活</rt></ruby>이라고 하는 것은 그 <ruby>목적<rt>目的</rt></ruby>은 우리 <ruby>인생<rt>人生</rt></ruby>이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는데서 <ruby>완성<rt>完成</rt></ruby>된다.(5.22 <ruby>기<rt>己</rt></ruby>?<ruby>년<rt>年</rt></ruby> <ruby>기념일<rt>記念日</rt></ruby> <ruby>기<rt>記</rt></ruby>)(51. 10. 1 <ruby>정서<rt>淨書</rt></ruby> <ruby>소자<rt>紹子</rt></ruby>)
 
== <ruby>제<rt>第</rt></ruby> 2 <ruby>편<rt>編</rt></ruby> <ruby>창조원리<rt>創造原理</rt></ruby>와 <ruby>타락섭리<rt>墮落攝理</rt></ruby> ==
 
=== <ruby>제<rt>第</rt></ruby> 1 <ruby>장<rt>章</rt></ruby> <ruby>창조원리<rt>創造原理</rt></ruby>와 <ruby>타락원리<rt>墮落原理</rt></ruby>는 사랑에서 <ruby>시작<rt>始作</rt></ruby> ===
 
하나님은 사람을 <ruby>창조<rt>創造</rt></ruby>하심도 <ruby>자기자신<rt>自己自身</rt></ruby>이 <ruby>지극<rt>至極</rt></ruby>한 사랑의 <ruby>이상<rt>理想</rt></ruby>을 <ruby>실현<rt>實現</rt></ruby>하고자 함이었다. <ruby>즉<rt>卽</rt></ruby> 하나님은 <ruby>중화성<rt>中和性</rt></ruby>으로 계시는 <ruby>본형상<rt>本形像</rt></ruby>를 <ruby>분성화<rt>分性化</rt></ruby> 하신 것이 사람 <ruby>창조<rt>創造</rt></ruby>며 <ruby>만물창조<rt>萬物創造</rt></ruby>의 <ruby>표징<rt>表徵</rt></ruby>이다. 하나님은 <ruby>분성<rt>分性</rt></ruby>을 보게 될 때에 <ruby>지극<rt>至極</rt></ruby>한 사랑을 <ruby>현실화<rt>現實化</rt></ruby> 시키고자 함이었다. 그러므로 <ruby>만물전부<rt>萬物全部</rt></ruby>는 하나님의 <ruby>이상<rt>理想</rt></ruby>을 더욱 <ruby>미화<rt>美和</rt></ruby>하기 위하여서 <ruby>만물<rt>萬物</rt></ruby>을 지으셨다. <ruby>만물체<rt>萬物體</rt></ruby>에서 사랑<ruby>성<rt>性</rt></ruby>을 볼수 있게 되니 그 <ruby>본성<rt>本性</rt></ruby>인 사랑 <ruby>이상<rt>理想</rt></ruby>을 <ruby>표징<rt>表徵</rt></ruby>시켜 <ruby>내부<rt>內部</rt></ruby>로는 <ruby>외부<rt>外部</rt></ruby>부터 <ruby>표징<rt>表徵</rt></ruby> <ruby>체계<rt>體系</rt></ruby>로 <ruby>전<rt>傳</rt></ruby>하여주는 <ruby>자극<rt>刺戟</rt></ruby>을 <ruby>가<rt>加</rt></ruby>하여 <ruby>내부자극<rt>內部刺戟</rt></ruby>을 <ruby>조장<rt>助長</rt></ruby>시켜서 <ruby>내부적<rt>內部的</rt></ruby>으로 더 높은 사랑 <ruby>즉<rt>卽</rt></ruby> 어떤 <ruby>만물<rt>萬物</rt></ruby>에서도 볼 수 없는 <ruby>최고<rt>最高</rt></ruby>의 사랑을 할수 있도록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다시말하면 사람의 사랑은 어느 <ruby>만물성<rt>萬物性</rt></ruby>에서도 찾을 수 없는 사랑성을 갖고 있게 지으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이 사랑<ruby>성<rt>性</rt></ruby>을 <ruby>원만<rt>圓滿</rt></ruby>히 가져야할 <ruby>목적<rt>目的</rt></ruby>이었는데 그 <ruby>목적<rt>目的</rt></ruby>의 <ruby>원만화<rt>圓滿化</rt></ruby>를 이루지 못한 것이 <ruby>타락성<rt>墮落性</rt></ruby>의 <ruby>출발<rt>出發</rt></ruby>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 나타나고 사람의 사랑을 <ruby>만물<rt>萬物</rt></ruby>에게 <ruby>표징<rt>表徵</rt></ruby>되어 <ruby>미적세계<rt>美的世界</rt></ruby>를 이루어 온 <ruby>천주<rt>天宙</rt></ruby>는 <ruby>화동<rt>和動</rt></ruby>하여 <ruby>일체적<rt>一體的</rt></ruby> <ruby>희락<rt>喜樂</rt></ruby>을 보이고저 함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ruby>천주<rt>天宙</rt></ruby> <ruby>이상<rt>理想</rt></ruby>의 <ruby>극국<rt>極局</rt></ruby>의 <ruby>중심<rt>中心</rt></ruby>이며 <ruby>희락<rt>喜樂</rt></ruby>과 <ruby>행복<rt>幸福</rt></ruby>과 <ruby>만족<rt>滿足</rt></ruby>과 <ruby>주륜<rt>主侖</rt></ruby>과 <ruby>근본<rt>根本</rt></ruby>이니 사랑을 사람과 <ruby>만물<rt>萬物</rt></ruby>과 하늘 <ruby>천사<rt>天使</rt></ruby>들이 즐겨 <ruby>사모<rt>思慕</rt></ruby>하면서 더욱 많이 받고자 함이 <ruby>직접적<rt>直接的</rt></ruby> <ruby>요구<rt>要求</rt></ruby>였었다.
 
그러면 <ruby>인간세계<rt>人間世界</rt></ruby>에는 <ruby>선악<rt>善惡</rt></ruby>이 없어야 할 것이었는데 <ruby>선악<rt>善惡</rt></ruby>의 <ruby>시작<rt>始作</rt></ruby>도 사랑을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되었었다. <ruby>즉<rt>卽</rt></ruby> <ruby>선<rt>線</rt></ruby>은 하나님의 사랑 <ruby>권내<rt>圈內</rt></ruby>며, <ruby>악<rt>惡</rt></ruby>은 하나님의 사랑 <ruby>권외<rt>圈外</rt></ruby>다. <ruby>본래<rt>本來</rt></ruby> <ruby>선<rt>善</rt></ruby>의 <ruby>세계<rt>世界</rt></ruby>뿐이만이 <ruby>목적<rt>目的</rt></ruby>이었는데 <ruby>악<rt>惡</rt></ruby>의 <ruby>세계<rt>世界</rt></ruby>의 <ruby>출현<rt>出現</rt></ruby>이 <ruby>즉<rt>卽</rt></ruby> <ruby>타락<rt>墮落</rt></ruby>이 <ruby>거래<rt>拒來</rt></ruby>한 <ruby>선물<rt>膳物</rt></ruby>이다. 그러므로 <ruby>천당<rt>天堂</rt></ruby> <ruby>지옥<rt>地獄</rt></ruby>이 있는 것이 아니고 <ruby>천당<rt>天堂</rt></ruby>은 <ruby>선<rt>善</rt></ruby>의 <ruby>세계<rt>世界</rt></ruby> 즉 하나님의 사랑 <ruby>권내<rt>圈內</rt></ruby>요, <ruby>지옥<rt>地獄</rt></ruby>은 <ruby>악<rt>惡</rt></ruby>의 <ruby>세계<rt>世界</rt></ruby> 하나님의 사랑 <ruby>권외<rt>圈外</rt></ruby>의 <ruby>세계<rt>世界</rt></ruby>니 <ruby>즉<rt>卽</rt></ruby> <ruby>사망세계<rt>死亡世界</rt></ruby>라고도 한다. 그것은 생명의 <ruby>근본<rt>根本</rt></ruby> 하나님 사랑을 떠난 <ruby>세계<rt>世界</rt></ruby>이므로 그렇게 부른다.
 
그러면 <ruby>인간<rt>人間</rt></ruby>의 <ruby>타락근본<rt>墮落根本</rt></ruby>과 <ruby>악<rt>惡</rt></ruby>의 <ruby>기원점<rt>起源點</rt></ruby>은 <ruby>성경<rt>聖經</rt></ruby>을 비추어 또는 <ruby>악<rt>惡</rt></ruby>에 대한 하나님의 <ruby>태도<rt>態度</rt></ruby> <ruby>등<rt>等</rt></ruby>을 밝히기로 하자. 하나님이 <ruby>천지만물<rt>天地萬物</rt></ruby>을 <ruby>창조<rt>創造</rt></ruby>하실때에 <ruby>선<rt>善</rt></ruby>을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지으셨다. <ruby>선<rt>善</rt></ruby>은 하나님이 <ruby>거<rt>居</rt></ruby>할 수 있는 <ruby>존<rt>存</rt></ruby>
 
<ruby>재<rt>在</rt></ruby>요 <ruby>선<rt>善</rt></ruby>에는 하나님이 <ruby>영원<rt>永遠</rt></ruby>하심과 같이 <ruby>영원성<rt>永遠性</rt></ruby>이 있는 <ruby>동시<rt>同時</rt></ruby>에 사랑 <ruby>이상성<rt>理想性</rt></ruby>을 <ruby>완성<rt>完成</rt></ruby>한 <ruby>근본존재<rt>根本存在</rt></ruby>다.
 
<ruby>창세기<rt>創世記</rt></ruby>를 살펴 볼 적에 모세가 <ruby>기록<rt>記錄</rt></ruby>할 때 알려주신 <ruby>창조설<rt>創造說</rt></ruby>을 그 <ruby>본의<rt>本意</rt></ruby>대로 <ruby>발표<rt>發表</rt></ruby>키 위한 것이 아니고 <ruby>즉<rt>卽</rt></ruby> <ruby>문자<rt>文字</rt></ruby> 그대로가 아니고 <ruby>영적<rt>靈的</rt></ruby>으로 <ruby>미래<rt>未來</rt></ruby>에 <ruby>대<rt>對</rt></ruby>한 <ruby>비밀<rt>秘密</rt></ruby>을 두고 <ruby>교시<rt>敎示</rt></ruby>한 바이었다. 그 <ruby>당시<rt>當時</rt></ruby>에는 <ruby>근본<rt>根本</rt></ruby>을 밝혀서 <ruby>발표<rt>發表</rt></ruby>할 수 없었든 것은 그 <ruby>당시<rt>當時</rt></ruby> <ruby>인간<rt>人間</rt></ruby>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ruby>사실<rt>事實</rt></ruby>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ruby>창세기<rt>創世記</rt></ruby> <ruby>창조설<rt>創造說</rt></ruby> 가운데에서 보여주는 <ruby>타락<rt>墮落</rt></ruby> <ruby>근본자체<rt>根本自體</rt></ruby>인 <ruby>선악과<rt>善惡果</rt></ruby>를 <ruby>근본<rt>根本</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케함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었다. 그로 <ruby>인<rt>因</rt></ruby>하여 <ruby>타락<rt>墮落</rt></ruby>이 <ruby>시작<rt>始作</rt></ruby>된다는 <ruby>논리<rt>論理</rt></ruby>는 너무나 다 잘아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그 <ruby>외<rt>外</rt></ruby>에 뱀蛇의 <ruby>존재<rt>存在</rt></ruby>와 해와의 <ruby>유인<rt>誘引</rt></ruby>이 그 <ruby>근본<rt>根本</rt></ruby> <ruby>중심<rt>中心</rt></ruby>들이다.
 
그러면 이 <ruby>사실<rt>事實</rt></ruby>의 <ruby>사실<rt>事實</rt></ruby>은 <ruby>사실<rt>事實</rt></ruby>이나 그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에 있어서는 큰 <ruby>문제<rt>問題</rt></ruby>로 되어 <ruby>인간세상<rt>人間世上</rt></ruby>의 <ruby>중대<rt>重大</rt></ruby>한 <ruby>난관<rt>難關</rt></ruby>의 <ruby>화제<rt>話題</rt></ruby>거리였다. 사람은 묻기를 하나님은 <ruby>능력<rt>能力</rt></ruby>이시며 알지 못함이 없으시며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시다는데 왜 <ruby>타락<rt>墮落</rt></ruby>되게 하며 또 <ruby>타락적<rt>墮落的</rt></ruby> <ruby>요소<rt>要素</rt></ruby>를 <ruby>배치<rt>配置</rt></ruby>케 하였는가? <ruby>등등<rt>等等</rt></ruby>을 살펴 볼 적에 하나님은 사랑이니 무엇이니 한들 <ruby>근본적<rt>根本的</rt></ruby>으로 <ruby>악<rt>惡</rt></ruby>이 <ruby>시작<rt>始作</rt></ruby>을 하게끔 지어 놓고는 무엇이 <ruby>선<rt>善</rt></ruby>하라 <ruby>선<rt>善</rt></ruby>하라 하고 <ruby>인간<rt>人間</rt></ruby> <ruby>대<rt>對</rt></ruby>하여 한다고 누구나 <ruby>문제<rt>問題</rt></ruby>의 <ruby>초점<rt>焦點</rt></ruby>으로 말하고 있다. <ruby>악<rt>惡</rt></ruby>의 <ruby>주인공<rt>主人公</rt></ruby>은 사탄인 <ruby>동시<rt>同時</rt></ruby>에 <ruby>역적<rt>逆賊</rt></ruby>된 <ruby>천사<rt>天使</rt></ruby>이며 그 <ruby>존재<rt>存在</rt></ruby>에 있어서는 누시엘 <ruby>천사장<rt>天使長</rt></ruby>의 <ruby>일명<rt>一名</rt></ruby>의 <ruby>시작<rt>始作</rt></ruby>이 있음을 다들 아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그렇다면 사탄이 <ruby>근본<rt>根本</rt></ruby> <ruby>역적<rt>逆賊</rt></ruby>될 있게 하나님이 지으셨는가. 그 <ruby>천사장<rt>天使長</rt></ruby>은 왜 <ruby>주관<rt>主管</rt></ruby>못하였는가 <ruby>중대문제<rt>重大問題</rt></ruby>이다. <ruby>창세기<rt>創世記</rt></ruby> 3<ruby>장<rt>章</rt></ruby>을 잘 보면 1<ruby>절<rt>節</rt></ruby>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ruby>야수<rt>野獸</rt></ruby> <ruby>중<rt>中</rt></ruby>에 뱀蛇이 가장 <ruby>간교<rt>奸巧</rt></ruby>한지라, 뱀이 <ruby>여인<rt>女人</rt></ruby>에게 일러 가로되 하나님이 동산의 <ruby>과실<rt>果實</rt></ruby>을 따 먹지말라고 하시드냐”고 물은 것이 뱀이 <ruby>타락<rt>墮落</rt></ruby>케 하는 <ruby>시작<rt>始作</rt></ruby>이었는데, 잘 보면 뱀에게 이 사탄이 들어가서 <ruby>운운<rt>云云</rt></ruby>한 <ruby>구절<rt>句節</rt></ruby>이 없나니, 그래서 뱀이자 <ruby>즉<rt>卽</rt></ruby> 사탄임을 알수 있다. 사탄의 <ruby>존재<rt>存在</rt></ruby>가 <ruby>즉<rt>卽</rt></ruby> 뱀으로 <ruby>표시<rt>表示</rt></ruby>됨을 알아야 한다. <ruby>즉<rt>卽</rt></ruby> 뱀은 사탄이며
 
사탄은 <ruby>즉<rt>卽</rt></ruby> 누시엘이다. 뱀이라는 <ruby>명사<rt>名詞</rt></ruby>를 빌려서 <ruby>유인<rt>誘引</rt></ruby> <ruby>대상<rt>對像</rt></ruby>의 <ruby>표시격<rt>表示格</rt></ruby>에 <ruby>흡사<rt>恰似</rt></ruby>함으로 이런 <ruby>표시적<rt>表示的</rt></ruby>으로 <ruby>사용<rt>使用</rt></ruby><ruby>명사<rt>名詞</rt></ruby>인 것이지 그 <ruby>자체<rt>自體</rt></ruby>가 뱀蛇이 아니다.
 
<ruby>현<rt>現</rt></ruby> <ruby>신자<rt>信者</rt></ruby>들은 <ruby>기<rt>其</rt></ruby> <ruby>자체<rt>自體</rt></ruby>가 뱀으로부터 <ruby>유인<rt>誘引</rt></ruby>받게 된 줄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벌써 <ruby>인간<rt>人間</rt></ruby>에게는 <ruby>타락<rt>墮落</rt></ruby>시킬 <ruby>권한<rt>權限</rt></ruby>없는 존재로서 사탄은 <ruby>유인<rt>誘引</rt></ruby> <ruby>노정<rt>路程</rt></ruby>을 <ruby>성사<rt>成事</rt></ruby>코저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벌써부터 <ruby>만물<rt>萬物</rt></ruby>에 <ruby>대<rt>對</rt></ruby>한 <ruby>주관<rt>主管</rt></ruby>을 <ruby>부여<rt>附與</rt></ruby>받고 지었기 때문에 사탄도 이것을 알 터인데 <ruby>주관<rt>主管</rt></ruby>받을 뱀 가지고 <ruby>유인공작<rt>誘引工作</rt></ruby>을 하리라고는 <ruby>생각<rt>生覺</rt></ruby>되지도 않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설마 <ruby>유인<rt>誘引</rt></ruby>하려면 더 <ruby>고귀<rt>高貴</rt></ruby>한 <ruby>격<rt>格</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로만이 <ruby>필요<rt>必要</rt></ruby>함을 우리는 <ruby>상식적<rt>常識的</rt></ruby> <ruby>판단<rt>判斷</rt></ruby>으로도 <ruby>명백<rt>明白</rt></ruby>한 <ruby>사실<rt>事實</rt></ruby>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ruby>근본진리노정<rt>根本眞理路程</rt></ruby>을 밝히지 아니 하였기에 <ruby>지금<rt>至今</rt></ruby>까지 <ruby>확실<rt>確實</rt></ruby>한 <ruby>근거<rt>根據</rt></ruby>를 잡기 못하고 나오고 있다.
 
그러나 <ruby>지금<rt>至今</rt></ruby>은 때가 다 되었으니 <ruby>세상<rt>世上</rt></ruby>에서 <ruby>성사<rt>成事</rt></ruby>하여야 할 <ruby>시기<rt>時期</rt></ruby>도 왔으니 <ruby>필연<rt>必然</rt></ruby>코 <ruby>역사적<rt>歷史的</rt></ruby>으로 <ruby>미분명<rt>未分明</rt></ruby>한 <ruby>차<rt>此</rt></ruby> <ruby>창조근본<rt>創造根本</rt></ruby>과 <ruby>타락근본<rt>墮落根本</rt></ruby>의 <ruby>출발점<rt>出發點</rt></ruby>을 밝혀야만 하나님의 뜻이 <ruby>성사<rt>成事</rt></ruby>될 <ruby>시기<rt>時期</rt></ruby>를 알려주는 것이니 반드시 <ruby>근본<rt>根本</rt></ruby>을 <ruby>표시<rt>表示</rt></ruby>하여야만 한다. 이것이 <ruby>지금<rt>至今</rt></ruby>까지 <ruby>세상<rt>世上</rt></ruby>을 찾고자하는 하나님은 사람의 <ruby>근본<rt>根本</rt></ruby>으로부터 <ruby>섭리<rt>攝理</rt></ruby>의 <ruby>근본문제<rt>根本問題</rt></ruby>의 뿌리(<ruby>근<rt>根</rt></ruby>)가 되는 것이므로, <ruby>지금<rt>至今</rt></ruby> <ruby>세상<rt>世上</rt></ruby>에는 뿌리를 <ruby>요<rt>要</rt></ruby>하는 <ruby>말세기<rt>末世期</rt></ruby>라고도 부르는 <ruby>시기<rt>時期</rt></ruby>에 <ruby>당도<rt>當到</rt></ruby>하였기 때문에 이 <ruby>사실<rt>事實</rt></ruby>을 새로 온 <ruby>천주<rt>天宙</rt></ruby>에 <ruby>발표<rt>發表</rt></ruby>하는 바이다.
 
<ruby>본래<rt>本來</rt></ruby> 하나님은 <ruby>무형세계<rt>無形世界</rt></ruby>에 계셔서 <ruby>천사<rt>天使</rt></ruby> <ruby>등<rt>等</rt></ruby>을 지으시고 다시금 <ruby>유형만물실체세계<rt>有形萬物實體世界</rt></ruby>를 하늘 <ruby>무형세계<rt>無形世界</rt></ruby>의 그림자 <ruby>모양<rt>模樣</rt></ruby>으로 지으시기 <ruby>시작<rt>始作</rt></ruby>하였다. <ruby>만물유형실체세계<rt>萬物有形實體世界</rt></ruby>를 지으시기 <ruby>전<rt>前</rt></ruby>에 <ruby>천사<rt>天使</rt></ruby>를 지으심은, 하나님의 <ruby>유형실체이상<rt>有形實體理想</rt></ruby> <ruby>세계<rt>世界</rt></ruby> <ruby>창조<rt>創造</rt></ruby>함을 돕게하는 <ruby>동시<rt>同時</rt></ruby>에 여러 가지로 <ruby>문의<rt>問議</rt></ruby>와 <ruby>의논<rt>議論</rt></ruby>의 <ruby>상대<rt>相對</rt></ruby>로 하여 왔든 것이었다. <ruby>천사<rt>天使</rt></ruby> <ruby>등<rt>等</rt></ruby> <ruby>중<rt>中</rt></ruby>에는 <ruby>천사장<rt>天使長</rt></ruby>이 있었다. <ruby>천사장<rt>天使長</rt></ruby>이 <ruby>즉<rt>卽</rt></ruby> <ruby>역적<rt>逆賊</rt></ruby> <ruby>궤도<rt>軌道</rt></ruby>를 밟게 된 누시엘이었다. <ruby>천사<rt>天使</rt></ruby> <ruby>등<rt>等</rt></ruby>을 지으심은 <ruby>유형실체세계<rt>有形實體世界</rt></ruby>를 지어 하나님의 <ruby>이상<rt>理想</rt></ruby> <ruby>전개<rt>展開</rt></ruby>할 <ruby>세계<rt>世界</rt></ruby>를 도와주면서 <ruby>협조적<rt>協調的</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로 지으셨고 그리하여 이 <ruby>실체<rt>實體</rt></ruby>
 
<ruby>세계<rt>世界</rt></ruby>와의 <ruby>이상<rt>理想</rt></ruby>의 <ruby>시작<rt>始作</rt></ruby>을 보게 될 때에 <ruby>역시<rt>亦是</rt></ruby> <ruby>천사세계<rt>天使世界</rt></ruby>도 <ruby>이상<rt>理想</rt></ruby>을 <ruby>부여<rt>附與</rt></ruby>받을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ruby>창조<rt>創造</rt></ruby>하심의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는 <ruby>천사<rt>天使</rt></ruby>도 알지 못하였든 것이었다.
 
<ruby>만물실체세계<rt>萬物實體世界</rt></ruby>가 <ruby>실현<rt>實現</rt></ruby>되면 하나님은 <ruby>물론<rt>勿論</rt></ruby>이고 <ruby>천사<rt>天使</rt></ruby>들까지도 기쁨이 되어 온 <ruby>천주<rt>天宙</rt></ruby>는 하나님의 <ruby>이상<rt>理想</rt></ruby> 기쁨에 <ruby>충만<rt>充滿</rt></ruby>하여 그야말로 <ruby>이상세계<rt>理想世界</rt></ruby>를 <ruby>조성<rt>造成</rt></ruby>코저 함이 <ruby>목적<rt>目的</rt></ruby>이었는데 <ruby>목적<rt>目的</rt></ruby>이 <ruby>미도달시<rt>未到達時</rt></ruby>에 <ruby>타락<rt>墮落</rt></ruby>이라는 <ruby>비공식적<rt>非公式的</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가 <ruby>생기<rt>生起</rt></ruby>게 되었다. 이는 <ruby>즉<rt>卽</rt></ruby> 누시엘의 <ruby>행동<rt>行動</rt></ruby>으로부터 <ruby>시작<rt>始作</rt></ruby>됨이다. 이 <ruby>행동<rt>行動</rt></ruby>이야말로 <ruby>인간<rt>人間</rt></ruby>에게 있어서 <ruby>무한<rt>無限</rt></ruby>의 <ruby>고통<rt>苦痛</rt></ruby>의 <ruby>근본<rt>根本</rt></ruby>이 되어 <ruby>시작<rt>始作</rt></ruby>하였다. 이것이 <ruby>즉<rt>卽</rt></ruby> <ruby>지옥분기<rt>地獄分岐</rt></ruby>의 <ruby>시작점<rt>始作點</rt></ruby>이다. <ruby>즉<rt>卽</rt></ruby> <ruby>죄<rt>罪</rt></ruby>의 <ruby>시작<rt>始作</rt></ruby>이다. 하나님이 <ruby>본래<rt>本來</rt></ruby> <ruby>만물<rt>萬物</rt></ruby>을 지으실 때에 그 <ruby>본의<rt>本意</rt></ruby>는 하나님의 <ruby>본형전개<rt>本形展開</rt></ruby>면서 <ruby>본성전개<rt>本性展開</rt></ruby>와 모든 <ruby>각만물자체<rt>各萬物自體</rt></ruby>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ruby>근본<rt>根本</rt></ruby>을 <ruby>상징<rt>象徵</rt></ruby>하는 <ruby>개성진리체<rt>個性眞理體</rt></ruby>로 되어 <ruby>근본진리체<rt>根本眞理體</rt></ruby>되는 하나님의 <ruby>본성품<rt>本性品</rt></ruby>의 <ruby>표시<rt>表示</rt></ruby>가 <ruby>충분<rt>充分</rt></ruby>히 <ruby>요구<rt>要求</rt></ruby>됨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ruby>유일<rt>唯一</rt></ruby>이며 <ruby>영원<rt>永遠</rt></ruby>이며 <ruby>불변<rt>不變</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ruby>진리<rt>眞理</rt></ruby>의 <ruby>근본<rt>根本</rt></ruby>이며 <ruby>진리<rt>眞理</rt></ruby>의 <ruby>중대삼요소<rt>重大三要素</rt></ruby>란 유일성, <ruby>영원성<rt>永遠性</rt></ruby>, <ruby>불변성<rt>不變性</rt></ruby>을 지음 받은 <ruby>만물<rt>萬物</rt></ruby>로 <ruby>구비<rt>具備</rt></ruby>하여 <ruby>이성적<rt>理性的</rt></ruby> <ruby>생활형태<rt>生活形態</rt></ruby>를 <ruby>보장<rt>保障</rt></ruby>될수 있어야만 된다. 그러므로 <ruby>만물<rt>萬物</rt></ruby>에로 하나님의 <ruby>성품<rt>性品</rt></ruby>이 <ruby>표시<rt>表示</rt></ruby>될수 있는 <ruby>개성진리형태<rt>個性眞理形態</rt></ruby>를 갖추어 지으셨다. 그러므로 이 <ruby>개성진리체<rt>個性眞理體</rt></ruby>로 지으시기 <ruby>위<rt>爲</rt></ruby>하여는 <ruby>소생<rt>蘇生</rt></ruby>으로부터 <ruby>장성<rt>長成</rt></ruby>으로 <ruby>장성<rt>長成</rt></ruby>으로부터 <ruby>완성<rt>完成</rt></ruby>으로 되는 <ruby>계급<rt>階級</rt></ruby>을 두어서 <ruby>조성<rt>造成</rt></ruby>하였다.
 
한 <ruby>존재<rt>存在</rt></ruby>가 <ruby>완성존재<rt>完成存在</rt></ruby>로 되려면 <ruby>소생<rt>蘇生</rt></ruby>이 <ruby>시작<rt>始作</rt></ruby>을 보아 <ruby>장성<rt>長成</rt></ruby>으로 <ruby>장성<rt>長成</rt></ruby>을 다하여 <ruby>완성<rt>完成</rt></ruby>으로서 <ruby>만물<rt>萬物</rt></ruby>을 <ruby>궤도내<rt>軌道內</rt></ruby>를 <ruby>통<rt>通</rt></ruby>하여서 <ruby>창조<rt>創造</rt></ruby>받게 되었다. 다시 <ruby>표시<rt>表示</rt></ruby>하면 ①<ruby>진리<rt>眞理</rt></ruby>에는 <ruby>소생<rt>蘇生</rt></ruby>이 있고 <ruby>장성<rt>長成</rt></ruby>이 있고 <ruby>완성<rt>完成</rt></ruby>있다. 이와 같은 <ruby>시기적<rt>時期的</rt></ruby> <ruby>과정<rt>過程</rt></ruby>을 <ruby>경과<rt>經過</rt></ruby>하여야만이 한 <ruby>진리체<rt>眞理體</rt></ruby>가 <ruby>완성<rt>完成</rt></ruby>된다. ② <ruby>진리<rt>眞理</rt></ruby>에는 <ruby>유일성<rt>唯一性</rt></ruby>, <ruby>영원성<rt>永遠性</rt></ruby>,<ruby>불변성<rt>不變性</rt></ruby>이 있어서만이
 
하나님이 지으신 <ruby>선<rt>善</rt></ruby>에 <ruby>속<rt>屬</rt></ruby>하여 <ruby>이상존재물<rt>理想存在物</rt></ruby>로서 <ruby>취급<rt>取扱</rt></ruby>하게 되어있다.
 
==== <ruby>제<rt>第</rt></ruby> 1 <ruby>절<rt>節</rt></ruby> 어떻게 지으셨나 ====
 
말씀(言)으로 <ruby>만물<rt>萬物</rt></ruby>을 <ruby>창조<rt>創造</rt></ruby>하시었다고 하시었지만 그 말씀言이란 <ruby>명사<rt>名詞</rt></ruby> 그대로가 아니라 말씀이라는 <ruby>명사<rt>名詞</rt></ruby> 가운데는 하나님의 <ruby>이상<rt>理想</rt></ruby>의 한 <ruby>표시체<rt>表示體</rt></ruby>의 <ruby>증거<rt>證據</rt></ruby>로 되어 <ruby>이상<rt>理想</rt></ruby>을 그대로 딴 <ruby>존재물<rt>存在物</rt></ruby>로 <ruby>실현<rt>實現</rt></ruby>시키고자 함에 말씀(言)의 <ruby>중요목적<rt>重要目的</rt></ruby>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1장 2절에 말씀言이란 <ruby>태초<rt>太初</rt></ruby>에 하나님과 같이 계셔서 말씀言으로 <ruby>만물<rt>萬物</rt></ruby>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물건이 말씀言이 없이는 지으신 것이 하나도 없나니라.
 
이 말씀言이란 <ruby>의의<rt>意義</rt></ruby>는 하나님의 <ruby>이상<rt>理想</rt></ruby>인 <ruby>제일존재<rt>第一存在</rt></ruby>의 마음<ruby>적<rt>的</rt></ruby> <ruby>계획<rt>計劃</rt></ruby>을 말씀을 <ruby>통<rt>通</rt></ruby>하여 <ruby>제이존재<rt>第二存在</rt></ruby>의 <ruby>확립<rt>確立</rt></ruby>을 <ruby>요<rt>要</rt></ruby>한 <ruby>중매적<rt>中媒的</rt></ruby> <ruby>분담과정<rt>分擔過程</rt></ruby> <ruby>기간<rt>期間</rt></ruby>이 말씀이 <ruby>점유<rt>占有</rt></ruby>한 <ruby>부분<rt>部分</rt></ruby>이기 때문에 말씀이라고 <ruby>표시<rt>表示</rt></ruby>한다.
 
<ruby>예<rt>例</rt></ruby>를 들면 사람이 말하는 바는 마음의 <ruby>실상<rt>實狀</rt></ruby>이 <ruby>제이실체실상<rt>第二實體實狀</rt></ruby>을 <ruby>완성<rt>完成</rt></ruby>코져 하는 것이 <ruby>중심목적<rt>中心目的</rt></ruby>이다. 말씀으로 지으셨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ruby>근본이상형<rt>根本理想型</rt></ruby>을 그대로 <ruby>만물실체형<rt>萬物實體型</rt></ruby>으로 <ruby>전개<rt>展開</rt></ruby>시켰기에 말씀으로 지으셨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이 <ruby>실현<rt>實現</rt></ruby>되는 곳에 <ruby>이상<rt>理想</rt></ruby><ruby>전개<rt>展開</rt></ruby>되는 것이 <ruby>근본<rt>根本</rt></ruby>말씀의 <ruby>목적<rt>目的</rt></ruby>임으로 이런 <ruby>명사<rt>名詞</rt></ruby>를 <ruby>대용<rt>代用</rt></ruby>하신바를 알 수 있는 바이며 또 <ruby>사실적<rt>事實的</rt></ruby> <ruby>의의<rt>意義</rt></ruby>로 되어있다.
 
말씀으로 <ruby>만물<rt>萬物</rt></ruby>을 지으셨다고 하는 것은 벌써 하나님이 <ruby>직접자기<rt>直接自己</rt></ruby>의 <ruby>체<rt>體</rt></ruby>로 되어있는 <ruby>제이존재성<rt>第二存在性</rt></ruby>을 알려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말씀으로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ruby>근본형태<rt>根本形態</rt></ruby>와 <ruby>성상<rt>性狀</rt></ruby>을 그대로 벌려 놓았다는 <ruby>의의<rt>意義</rt></ruby>가 있단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지으셨다는 것은 <ruby>상대성<rt>相對性</rt></ruby>을 말하면서 <ruby>음양성<rt>陰陽性</rt></ruby>을 말하는 바를 알려주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이 말씀이라는 <ruby>의의<rt>意義</rt></ruby>는 여기에 <ruby>시작<rt>始作</rt></ruby>되는 바이다. 이 말씀에 <ruby>대<rt>對</rt></ruby>한 <ruby>의의<rt>意義</rt></ruby>가 <ruby>지금<rt>只今</rt></ruby>까지는 <ruby>해득<rt>解得</rt></ruby>이 <ruby>난<rt>難</rt></ruby>한 <ruby>문제<rt>問題</rt></ruby>이었지만 <ruby>창조원리<rt>創造原理</rt></ruby>를 살펴볼 적에 아무런 <ruby>난<rt>難</rt></ruby>한 <ruby>문제<rt>問題</rt></ruby>가 아니고 <ruby>사실적<rt>事實的</rt></ruby> <ruby>실체<rt>實體</rt></ruby>로서 <ruby>취급<rt>取扱</rt></ruby>되는 바이다. 이러한 <ruby>의의<rt>意義</rt></ruby>를 두고 <ruby>만물<rt>萬物</rt></ruby>을 지으셨기에 말씀으로 지으셨다고 <ruby>선언<rt>宣言</rt></ruby>하심이다. <ruby>창세기<rt>創世記</rt></ruby> 1장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무엇이 있으라 하시면 그대로 된지라 그대로 된 <ruby>존재<rt>存在</rt></ruby>에 대해서 <ruby>선<rt>善</rt></ruby>하신지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몇째 날이더라 하신 <ruby>구절<rt>句節</rt></ruby>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절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몇째 날이더라 하는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면 저녁부터 아침까지를 하루로 잡고 있는데 그것을 <ruby>세상적<rt>世上的</rt></ruby>으로 살펴보면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으면 날수는 이틀인데 왜 한날로 하였나 하면 여기에 큰 <ruby>의의<rt>意義</rt></ruby>가 있는 것이다.
 
이 <ruby>기간<rt>其間</rt></ruby>은 한 <ruby>개체<rt>個體</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가 <ruby>창조<rt>創造</rt></ruby>될 때에 <ruby>소생<rt>蘇生</rt></ruby>으로부터 <ruby>장성<rt>長成</rt></ruby>으로 <ruby>장성<rt>長成</rt></ruby>으로부터 <ruby>완성<rt>完成</rt></ruby>까지에 도달한 <ruby>개체존재<rt>個體存在</rt></ruby>가 하나님의 뜻에 <ruby>합치<rt>合致</rt></ruby>될때에 <ruby>선<rt>善</rt></ruby>하신지라고 <ruby>명명<rt>命名</rt></ruby>하시었다. 그러기에 그 <ruby>기간<rt>期間</rt></ruby>은 <ruby>시완<rt>是完</rt></ruby>할 수 없는 것이다. 저녁이라 하신바는 한 <ruby>개체물<rt>個體物</rt></ruby>이 <ruby>창조<rt>創造</rt></ruby>하심을 필하시든 때를 두고 말함이다. 즉 한 <ruby>피조물체<rt>被造物體</rt></ruby>를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말함이다. 아침이라 하는 것은 한 밤 시기를 지나서만이 오는 바인데 이 아침이라고 하는 것이 이 <ruby>물체<rt>物體</rt></ruby>가 <ruby>완성<rt>完成</rt></ruby>되어 새출발하는 것을 아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ruby>존재물<rt>存在物</rt></ruby>이라도 저녁서부터 밤 기간을 통과치 않으면 안되었었다. 이 기간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ruby>통과<rt>通過</rt></ruby>하여서만이 하나님께서 <ruby>선<rt>善</rt></ruby>하신지라 하시었다. 그러면 이 밤 기간이란 무엇일까 하면 <ruby>피조물<rt>被造物</rt></ruby>은 한 <ruby>진리체<rt>眞理體</rt></ruby>로서 <ruby>영원<rt>永遠</rt></ruby>하면서 <ruby>불변<rt>不變</rt></ruby>하며 <ruby>불변<rt>不變</rt></ruby>하면서도 또 <ruby>이상형<rt>理想型</rt></ruby>을 <ruby>표시<rt>表示</rt></ruby>할 수 있는 <ruby>존재<rt>存在</rt></ruby>로 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한 <ruby>시험기간<rt>試驗期間</rt></ruby>이 밤 <ruby>기간<rt>期間</rt></ruby>이다고 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한 <ruby>시험기간<rt>試驗期間</rt></ruby>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ruby>결과<rt>結果</rt></ruby>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ruby>존재<rt>存在</rt></ruby>로 보게 되어서 만이 <ruby>선<rt>善</rt></ruby>하신지라고 <ruby>명명<rt>命名</rt></ruby>하심이다. 이 <ruby>선<rt>善</rt></ruby>이라고 하는 말씀중에는 하나님의 지으신 <ruby>물건<rt>物件</rt></ruby>은 <ruby>영원<rt>永遠</rt></ruby>할 수 있어하는 <ruby>완전<rt>完全</rt></ruby> <ruby>대상존재<rt>對象存在</rt></ruby>임을 말하심이다. 이렇게 <ruby>만물<rt>萬物</rt></ruby>을 5<ruby>일간<rt>日間</rt></ruby> 지은 <ruby>물건<rt>物件</rt></ruby>은 무엇이나 저희가 밤과 아침 기간을 하나님의 뜻에 알맞게 <ruby>통과<rt>通過</rt></ruby>치 않으면 <ruby>선<rt>善</rt></ruby>하다고 <ruby>명명<rt>命名</rt></ruby>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ruby>선<rt>善</rt></ruby>하신지라고 <ruby>명명<rt>命名</rt></ruby>받은 바가 <ruby>창조<rt>創造</rt></ruby>하심을 받은
 
<ruby>만물<rt>萬物</rt></ruby>의 한 <ruby>공통적<rt>共通的</rt></ruby> <ruby>노정<rt>路程</rt></ruby>이었다. 그런데 <ruby>제<rt>第</rt></ruby>6<ruby>일<rt>日</rt></ruby>째 지음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ruby>형상<rt>形像</rt></ruby>대로 사람을 <ruby>창조<rt>創造</rt></ruby>하시대 <ruby>일남일녀<rt>一男一女</rt></ruby>를 <ruby>창조<rt>創造</rt></ruby>하시고』라고 <ruby>창세기<rt>創世記</rt></ruby> 1장 27절에 있는 것을 보아도 전에 말한바와 같이 하나님 속에는 <ruby>여성<rt>女性</rt></ruby>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음받은 <ruby>인간<rt>人間</rt></ruby>은 <ruby>만물<rt>萬物</rt></ruby>을 <ruby>주관<rt>主管</rt></ruby>할 수 있는 <ruby>존재<rt>存在</rt></ruby>임으로 <ruby>창조<rt>創造</rt></ruby>함을 받은 모든 <ruby>물건<rt>物件</rt></ruby>이 <ruby>통과<rt>通過</rt></ruby>한 <ruby>공통적<rt>共通的</rt></ruby> <ruby>창조과정<rt>創造過程</rt></ruby>을 다 <ruby>원만<rt>圓滿</rt></ruby>하게 <ruby>통과<rt>通過</rt></ruby>하여만이 <ruby>주관격<rt>主管格</rt></ruby> <ruby>주인공<rt>主人公</rt></ruby>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이니 사람 역시 이 저녁기간되는 지음받음을 <ruby>필<rt>必</rt></ruby>하고는 밤기간과 같은 <ruby>시험기간<rt>試驗期間</rt></ruby>이 있고 그 <ruby>시험기간<rt>試驗期間</rt></ruby>을 <ruby>통과<rt>通過</rt></ruby>한 후 아침 기간부터 <ruby>만물<rt>萬物</rt></ruby> <ruby>주관이상<rt>主管理想</rt></ruby>의 <ruby>근본출발<rt>根本出發</rt></ruby>코저 함이 <ruby>근본목적<rt>根本目的</rt></ruby>으로 되어 있었다.
 
이 사람은 <ruby>만물주관<rt>萬物主管</rt></ruby>을 하라는 <ruby>예약<rt>豫約</rt></ruby>을 받고 난 후 <ruby>실제주관<rt>實際主管</rt></ruby>으로 한 밤기간인 <ruby>시험기간<rt>試驗期間</rt></ruby>이 <ruby>필요<rt>必要</rt></ruby>하게 되었다. <ruby>즉<rt>卽</rt></ruby> 아침<ruby>기간<rt>期間</rt></ruby>에서부터 <ruby>이상기간<rt>理想期間</rt></ruby>이었는데 이 밤 <ruby>기간<rt>期間</rt></ruby>에 사람은 <ruby>타락적<rt>墮落的</rt></ruby> <ruby>유인<rt>誘引</rt></ruby>을 받게 되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 밤 <ruby>기간<rt>期間</rt></ruby>은 어떤 <ruby>기간<rt>期間</rt></ruby>이었는가 하면 <ruby>소년시기<rt>少年時期</rt></ruby>로부터 <ruby>장성<rt>長成</rt></ruby>하여 <ruby>성숙시<rt>成熟時</rt></ruby>까지 인지라. <ruby>성숙시<rt>成熟時</rt></ruby>부터 <ruby>이상<rt>理想</rt></ruby>사랑을 할 수 있는 <ruby>격<rt>格</rt></ruby>을 <ruby>완성<rt>完成</rt></ruby>할 때까지가 그 밤 <ruby>기간<rt>期間</rt></ruby>이 <ruby>요구<rt>要求</rt></ruby>하는 <ruby>기간<rt>期間</rt></ruby>이었다.
 
<ruby>창세기<rt>創世記</rt></ruby> 1장 31절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ruby>심<rt>甚</rt></ruby>히 <ruby>선<rt>善</rt></ruby>하신지라 한 것은 <ruby>만물통합<rt>萬物統合</rt></ruby>하여서 말씀하신 바이지 <ruby>특<rt>特</rt></ruby>히 사람만을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ruby>심<rt>甚</rt></ruby>히 <ruby>선<rt>善</rt></ruby>한지라 함이 아니다. <ruby>즉<rt>卽</rt></ruby> 사람에게 있어서는 밤 <ruby>시기<rt>時期</rt></ruby>를 <ruby>통과<rt>通過</rt></ruby>치 않았을 때에 <ruby>심<rt>甚</rt></ruby>히 선하셨다고 하였기에 그 <ruby>선<rt>善</rt></ruby>이란 것은 <ruby>예약적<rt>豫約的</rt></ruby> 선이지 <ruby>실격적<rt>實格的</rt></ruby> 선이란 <ruby>명명<rt>命名</rt></ruby>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ruby>만물<rt>萬物</rt></ruby>을 <ruby>주관<rt>主管</rt></ruby>하라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ruby>만물<rt>萬物</rt></ruby>의 <ruby>전부<rt>全部</rt></ruby>를 <ruby>주관<rt>主管</rt></ruby>할 수 있는 <ruby>실격부여<rt>實格付與</rt></ruby>를 이루고저 함이 밤 <ruby>기간<rt>期間</rt></ruby>이 <ruby>요구<rt>要求</rt></ruby>하는 <ruby>기간<rt>期間</rt></ruby>이었다.
 
<ruby>만물<rt>萬物</rt></ruby>을 주관하려함의 <ruby>근본목적<rt>根本目的</rt></ruby>은 하나님의 <ruby>이상<rt>理想</rt></ruby>을 <ruby>실현화<rt>實現化</rt></ruby>하는 <ruby>목적<rt>目的</rt></ruby>이었다. 그 <ruby>주관<rt>主管</rt></ruby>할 수 있는 <ruby>존재<rt>存在</rt></ruby> 아담 해와는 <ruby>만물<rt>萬物</rt></ruby>의 <ruby>전부<rt>全部</rt></ruby>를 <ruby>주관<rt>主管</rt></ruby>할 수 있는 <ruby>권한<rt>權限</rt></ruby>과 그의 <ruby>자격격위<rt>資格格位</rt></ruby>는 어디서 받을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 <ruby>목적<rt>目的</rt></ruby>이었는데 이 <ruby>목적<rt>目的</rt></ruby>은 즉 하나님으로부터이었다. 그런고로 <ruby>만물주관완성자<rt>萬物主管完成者</rt></ruby>는 하나
 
님이었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ruby>만물<rt>萬物</rt></ruby>의 <ruby>주관주인격<rt>主管主人格</rt></ruby>으로 주신바의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는 누구를 <ruby>상징<rt>象徵</rt></ruby>시키냐 하면 하나님을 <ruby>상징<rt>象徵</rt></ruby>시키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ruby>근본<rt>根本</rt></ruby> 사람을 <ruby>창조<rt>創造</rt></ruby>하신 <ruby>의의<rt>意義</rt></ruby>는 <ruby>실체만물<rt>實體萬物</rt></ruby> <ruby>주관자<rt>主管者</rt></ruby>로 지음 받은 아담 해와가 <ruby>실체<rt>實體</rt></ruby>를 가지신 하나님의 몸들이었다. 그리하여 <ruby>천주<rt>天宙</rt></ruby>를 친히 하나님 <ruby>자신<rt>自身</rt></ruby>이 <ruby>주관<rt>主管</rt></ruby>코저 함이 <ruby>목적<rt>目的</rt></ruby>으로 <ruby>창조<rt>創造</rt></ruby>함을 받았다. <ruby>만물<rt>萬物</rt></ruby>의 <ruby>주인공<rt>主人公</rt></ruby> 되는 <ruby>실체<rt>實體</rt></ruby>를 쓴 하나님의 <ruby>존재<rt>存在</rt></ruby>가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ruby>타락<rt>墮落</rt></ruby>되고 보니 그에게 달린 <ruby>만물<rt>萬物</rt></ruby>은 <ruby>근본주인<rt>根本主人</rt></ruby>을 잃어버린 <ruby>존재<rt>存在</rt></ruby>로 되었다.
 
==== <ruby>제<rt>第</rt></ruby>2 <ruby>절<rt>節</rt></ruby> 그렇다면 <ruby>타락<rt>墮落</rt></ruby>의 <ruby>시작<rt>始作</rt></ruby>을 알아보자 ====
 
아담, 해와를 <ruby>창조<rt>創造</rt></ruby>하시기 <ruby>전<rt>前</rt></ruby>에는 <ruby>무형세계<rt>無形世界</rt></ruby>의 <ruby>천사<rt>天使</rt></ruby>들은 <ruby>천사장<rt>天使長</rt></ruby>을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받았다. 그때 <ruby>천사장<rt>天使長</rt></ruby> 누시엘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로 <ruby>의논상대<rt>議論相對</rt></ruby>로 되었고 전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의 <ruby>생명<rt>生命</rt></ruby>의 <ruby>근본<rt>根本</rt></ruby>이면서도 모든 행복과 <ruby>요소<rt>要素</rt></ruby>이었다.
 
하나님이 <ruby>무형세계<rt>無形世界</rt></ruby>를 지어놓고 <ruby>천사<rt>天使</rt></ruby>들로 <ruby>협조<rt>協助</rt></ruby>하게 하면서 <ruby>실체만물세계<rt>實體萬物世界</rt></ruby>를 <ruby>창조<rt>創造</rt></ruby>하기 <ruby>시작<rt>始作</rt></ruby>하였다. 하나님이 <ruby>유형실체세계<rt>有形實體世界</rt></ruby>를 지으심은 <ruby>무형실체<rt>無形實體</rt></ruby>의 <ruby>자기<rt>自己</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를 <ruby>유형실체세계<rt>有形實體世界</rt></ruby>를 통하여 <ruby>번식<rt>繁殖</rt></ruby>의 터로 하시고자 하심이 <ruby>목적<rt>目的</rt></ruby>이었는데 그 <ruby>중심이상<rt>中心理想</rt></ruby>은 하나님만이 알고 <ruby>천사장<rt>天使長</rt></ruby>도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ruby>유형실체세계<rt>有形實體世界</rt></ruby>를 <ruby>창조<rt>創造</rt></ruby>하시매 <ruby>자기<rt>自己</rt></ruby> <ruby>이상<rt>理想</rt></ruby>의 <ruby>전개<rt>展開</rt></ruby>와 함께 기뻐하며 동시에 <ruby>천사장<rt>天使長</rt></ruby>도 기뻐하였다.
 
그런데 <ruby>만물<rt>萬物</rt></ruby>의 <ruby>주인공격<rt>主人公格</rt></ruby>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하나님은 아담, 해와에 <ruby>대<rt>對</rt></ruby>하여도 사랑을 하시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서 <ruby>천사장<rt>天使長</rt></ruby>에 대하여는 대하는 일이나, 사랑하는 일이나 멀리 함이 아니었는데 <ruby>천사장<rt>天使長</rt></ruby> 누시엘은 아담 해와가 <ruby>존재<rt>存在</rt></ruby>하지 않으실 때보다 <ruby>자기<rt>自己</rt></ruby> <ruby>자체<rt>自體</rt></ruby>에 있어서는 더욱 <ruby>만족감<rt>滿足感</rt></ruby>을 느껴주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아담, 해와가 받으니 <ruby>자기<rt>自己</rt></ruby>에게 대한 사랑의 <ruby>감소<rt>減少</rt></ruby>되는 <ruby>감<rt>感</rt></ruby>을 느껴서 다시금 이런 <ruby>감<rt>感</rt></ruby>도 느끼지 않는 <ruby>동시<rt>同時</rt></ruby>에 사람에게까지 가는 사랑을 자기가 <ruby>소유<rt>所有</rt></ruby>하려는 마음으로 <ruby>공작<rt>工作</rt></ruby>함이 <ruby>시작<rt>始作</rt></ruby>하였다. 그때 하나님은 해와를 지극히 사랑하시니 그 해와 <ruby>자체<rt>自體</rt></ruby>를 자기 <ruby>소유<rt>所有</rt></ruby>로하고자 하여서 <ruby>천사장<rt>天使長</rt></ruby> 누시엘은 아직 <ruby>성숙<rt>成熟</rt></ruby>치 않
 
은 해와를 대해서 <ruby>유인<rt>誘引</rt></ruby>키 <ruby>시작<rt>始作</rt></ruby>하였다.
 
<ruby>창세기<rt>創世記</rt></ruby> 2<ruby>장<rt>章</rt></ruby> 9<ruby>절<rt>節</rt></ruby>에『<ruby>생명수<rt>生命樹</rt></ruby>와 <ruby>선악과수<rt>善惡果樹</rt></ruby>가 있더라 하시니 무엇인가 하니 <ruby>생명수<rt>生命樹</rt></ruby>는 (<ruby>양<rt>陽</rt></ruby>)아담을 <ruby>중심<rt>中心</rt></ruby>삼고 하나님을 <ruby>표시<rt>表示</rt></ruby>함이고 <ruby>선악과수<rt>善惡果樹</rt></ruby>는 (<ruby>음<rt>陰</rt></ruby>)해와를 <ruby>표시<rt>表示</rt></ruby>함이다.』천사장이 해와를 보니 아름다우매 과연 하나님이 사랑할만한 존재이었다.
 
이 해와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매 그 사랑을 빼앗기 위하여 해와의 사랑의 실체인 <ruby>정조<rt>貞操</rt></ruby>를 <ruby>소유<rt>所有</rt></ruby>할 <ruby>공작<rt>工作</rt></ruby>을 <ruby>시작<rt>始作</rt></ruby>하니 <ruby>천사장<rt>天使長</rt></ruby> 누시엘은 하나님이 <ruby>허락<rt>許諾</rt></ruby>치 않는 <ruby>행동<rt>行動</rt></ruby>을 <ruby>시작<rt>始作</rt></ruby>하매 그 자체의 마음에는 <ruby>공포심<rt>恐怖心</rt></ruby>과 <ruby>원리적<rt>原理的</rt></ruby> 가책이 있었다. <ruby>공포심<rt>恐怖心</rt></ruby>을 가지고 해와의 사랑을 <ruby>소유<rt>所有</rt></ruby>하려 하기 위하여서 해와의 <ruby>정조<rt>貞操</rt></ruby>를 <ruby>유린<rt>蹂躪</rt></ruby>하고 보니 누시엘의 마음에 있는 <ruby>공포심<rt>恐怖心</rt></ruby>과 <ruby>동시<rt>同時</rt></ruby>에 천사장의 <ruby>지혜<rt>智慧</rt></ruby>가 해와와 사랑의 <ruby>일체<rt>一體</rt></ruby>를 이루고 나니 해와는 <ruby>천사장<rt>天使長</rt></ruby>의 <ruby>지혜<rt>智慧</rt></ruby> <ruby>소유자<rt>所有者</rt></ruby>가 되는 <ruby>동시<rt>同時</rt></ruby>에 <ruby>공포<rt>恐怖</rt></ruby>의 마음을 <ruby>자극<rt>刺戟</rt></ruby>받았다.
 
그리고 보니 해와는 <ruby>미성숙기<rt>未成熟期</rt></ruby>에 있었지만 <ruby>자체<rt>自體</rt></ruby>의 <ruby>지혜<rt>智慧</rt></ruby>가 밝아짐을 <ruby>통<rt>通</rt></ruby>하여보니 해와의 자기의 <ruby>남편<rt>男便</rt></ruby>은 아담이라 하는 것을 <ruby>명백<rt>明白</rt></ruby>히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아담이 <ruby>자기<rt>自己</rt></ruby>의 <ruby>남편<rt>男便</rt></ruby>이므로 다시금 <ruby>남편<rt>男便</rt></ruby>대로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해와는 아담한테 사랑을 <ruby>강요<rt>强要</rt></ruby>하게된다. 그 <ruby>강요<rt>强要</rt></ruby>하는 해와의 <ruby>지각<rt>知覺</rt></ruby>을 <ruby>피<rt>避</rt></ruby>치 못하고 그의 <ruby>요구<rt>要求</rt></ruby>에 <ruby>응<rt>應</rt></ruby>하니 벌써 해와의 <ruby>공포심<rt>恐怖心</rt></ruby> 아담에게도 <ruby>생기<rt>生起</rt></ruby>게 되어 하나님의 <ruby>법리탈선<rt>法理脫線</rt></ruby>함을 알게 되니 아담 해와는 나무 아래에 숨게 되는 <ruby>행동<rt>行動</rt></ruby>이 <ruby>시작<rt>始作</rt></ruby>되어 <ruby>무화과<rt>無花果</rt></ruby>나무 잎으로 <ruby>범행<rt>犯行</rt></ruby>한 <ruby>부분<rt>部分</rt></ruby>을 가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하나님과 <ruby>직접<rt>直接</rt></ruby> 사랑의 <ruby>일체<rt>一體</rt></ruby>를 이루어야 할 <ruby>목적<rt>目的</rt></ruby>이 <ruby>근본<rt>根本</rt></ruby>이었는데 <ruby>비원리<rt>非原理</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인 <ruby>천사장<rt>天使長</rt></ruby> 누시엘과 사랑의 <ruby>일체<rt>一體</rt></ruby>를 받아 <ruby>비원리적<rt>非原理的</rt></ruby> <ruby>타락<rt>墮落</rt></ruby> <ruby>시작<rt>始作</rt></ruby>을 보게 됨이다. 그러나 <ruby>타락<rt>墮落</rt></ruby>이란 <ruby>근본<rt>根本</rt></ruby> <ruby>시작<rt>始作</rt></ruby>에 있어서는 하나님한테 더 사랑 받고자 하여 <ruby>행<rt>行</rt></ruby>한 <ruby>행동<rt>行動</rt></ruby>의 <ruby>결과<rt>結果</rt></ruby>가 되었다. 누시엘은 사람에게 가는 사랑까지 <ruby>소유<rt>所有</rt></ruby>코저 함이고, 해와는 <ruby>근본<rt>根本</rt></ruby> 아담의 사랑을 찾아 세우고자 하는 <ruby>행동<rt>行動</rt></ruby>에서 아담을 <ruby>주관<rt>主管</rt></ruby>하고 나니 <ruby>비원리<rt>非原理</rt></ruby> <ruby>출발<rt>出發</rt></ruby>이 <ruby>시작<rt>始作</rt></ruby>됨이다. 이 해와의 <ruby>행동<rt>行動</rt></ruby>으로 <ruby>인<rt>因</rt></ruby>하야 하나님의 <ruby>근본목적<rt>根本目的</rt></ruby>을 <ruby>파<rt>破</rt></ruby>하는 <ruby>행동<rt>行動</rt></ruby>이 <ruby>시작<rt>始作</rt></ruby>되었기에 지금까지 <ruby>인간<rt>人間</rt></ruby> <ruby>세상<rt>世上</rt></ruby>에는 <ruby>여인<rt>女人</rt></ruby>들이 <ruby>파멸<rt>破滅</rt></ruby>과 <ruby>압제<rt>壓制</rt></ruby>와 <ruby>무시<rt>無視</rt></ruby>에서 하나님이 미워하는
 
<ruby>입장<rt>立場</rt></ruby>에 있게되어 <ruby>여자<rt>女子</rt></ruby>들이 <ruby>인류<rt>人類</rt></ruby> <ruby>역사상<rt>歷史上</rt></ruby> <ruby>부자유<rt>不自由</rt></ruby> 한 <ruby>구속<rt>拘束</rt></ruby>에서 나온바도 <ruby>근본<rt>根本</rt></ruby> <ruby>여인<rt>女人</rt></ruby> <ruby>대표<rt>代表</rt></ruby> 해와의 <ruby>실수<rt>失手</rt></ruby>로 <ruby>인<rt>因</rt></ruby>한 <ruby>보응<rt>報應</rt></ruby>이었다.
 
지금 와서야 <ruby>남녀<rt>男女</rt></ruby> <ruby>평등<rt>平等</rt></ruby> <ruby>권한<rt>權限</rt></ruby>이 <ruby>생기<rt>生起</rt></ruby>는 것은 <ruby>역사발전<rt>歷史發展</rt></ruby> <ruby>시작<rt>始作</rt></ruby>과 <ruby>동시<rt>同時</rt></ruby>에 <ruby>시작<rt>始作</rt></ruby>을 보아야 할 것이었는데 이와 같이 <ruby>진행<rt>進行</rt></ruby> 됨은 <ruby>타락<rt>墮落</rt></ruby>이 <ruby>초래<rt>招來</rt></ruby>한 <ruby>선물<rt>膳物</rt></ruby>이었다. 그런고로 <ruby>남녀<rt>男女</rt></ruby> <ruby>평등<rt>平等</rt></ruby> <ruby>권한<rt>權限</rt></ruby>이 <ruby>시작<rt>始作</rt></ruby>됨은 <ruby>인간<rt>人間</rt></ruby>이 <ruby>타락전<rt>墮落前</rt></ruby> <ruby>궤도<rt>軌道</rt></ruby>에 설수 있는 동시에 하나님 <ruby>대<rt>對</rt></ruby>하여 사랑 받을 수 있는 한 해와의 <ruby>완전<rt>完全</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가 <ruby>시작<rt>始作</rt></ruby>을 할 수 있는 때라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ruby>인류역사<rt>人類歷史</rt></ruby>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ruby>복귀역사<rt>復歸歷史</rt></ruby>라는 것을 이 한 <ruby>사실<rt>事實</rt></ruby>을 보아도 <ruby>명백<rt>明白</rt></ruby>한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이러한 <ruby>근본<rt>根本</rt></ruby>이 <ruby>타락<rt>墮落</rt></ruby>의 <ruby>기원점<rt>起源點</rt></ruby>인데 <ruby>만일<rt>萬一</rt></ruby> 사람이 <ruby>선악과<rt>善惡果</rt></ruby>를 손으로 따먹었으면 그 <ruby>부분<rt>部分</rt></ruby>을 가릴 터인데 이 <ruby>부분<rt>部分</rt></ruby>을 가렸음은 이 <ruby>부분<rt>部分</rt></ruby>으로 <ruby>범죄<rt>犯罪</rt></ruby>한 <ruby>자체<rt>自體</rt></ruby>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ruby>자체<rt>自體</rt></ruby>이었다. 본래 지음 받은 몸에 있어서는 <ruby>선<rt>善</rt></ruby>으로 지음 받았는데 어디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아니었는데 이런 부끄러운 부분의 <ruby>구별<rt>區別</rt></ruby>은 <ruby>타락<rt>墮落</rt></ruby> <ruby>본체부<rt>本體部</rt></ruby>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해와의 사랑을 <ruby>중심<rt>中心</rt></ruby>삼고 <ruby>타락<rt>墮落</rt></ruby>이라는 <ruby>출발<rt>出發</rt></ruby>이 <ruby>시작<rt>始作</rt></ruby>되어 <ruby>악<rt>惡</rt></ruby>의 <ruby>기본<rt>基本</rt></ruby>이 되었다. <ruby>선악과<rt>善惡果</rt></ruby>라고 하심은 <ruby>만약<rt>萬若</rt></ruby> 하나님의 뜻대로 <ruby>성숙<rt>成熟</rt></ruby>하여 <ruby>이상격<rt>理想格</rt></ruby> 사랑愛를 주고 받을 <ruby>존재<rt>存在</rt></ruby>로 된 <ruby>후<rt>後</rt></ruby>에 하나님의 <ruby>신<rt>神</rt></ruby>이 아담 마음에 <ruby>임재<rt>臨在</rt></ruby>하여서 사랑 <ruby>성사<rt>成事</rt></ruby>하였으면 하나님의 <ruby>지혜<rt>智慧</rt></ruby>를 받아 <ruby>만물<rt>萬物</rt></ruby> <ruby>주인공<rt>主人公</rt></ruby>으로 <ruby>완비<rt>完備</rt></ruby>되는 <ruby>동시<rt>同時</rt></ruby>에 이것이 <ruby>이상<rt>理想</rt></ruby>이련만, 그와 <ruby>반대<rt>反對</rt></ruby>의 <ruby>행동<rt>行動</rt></ruby>이야 <ruby>탄식<rt>歎息</rt></ruby>치 않을 수 없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그런고로 해와의 사랑 <ruby>자체<rt>自體</rt></ruby>는 하나님의 사랑 <ruby>즉<rt>卽</rt></ruby> 아담 사랑 받았으면 <ruby>지극<rt>至極</rt></ruby>히 <ruby>선<rt>善</rt></ruby>한 <ruby>근본<rt>根本</rt></ruby>을 <ruby>시작<rt>始作</rt></ruby>하는 열매果의 <ruby>행동<rt>行動</rt></ruby>이 <ruby>시작<rt>始作</rt></ruby>하여 <ruby>영원생<rt>永遠生</rt></ruby>이 될것이었는데 그 <ruby>반대<rt>反對</rt></ruby>의 <ruby>행동<rt>行動</rt></ruby>으로 말미암아 <ruby>악<rt>惡</rt></ruby>의 <ruby>근본<rt>根本</rt></ruby>의 열매果의 <ruby>행동<rt>行動</rt></ruby>이 해와의 사랑에 달려서 <ruby>시작<rt>始作</rt></ruby><ruby>자체<rt>自體</rt></ruby>이니 <ruby>선악과<rt>善惡果</rt></ruby>로 <ruby>표시<rt>表示</rt></ruby>한 바이다.
 
<ruby>과<rt>果</rt></ruby>(열매)라는 말은 씨라는 뜻이다. <ruby>선<rt>善</rt></ruby>의 씨도 해와와 사랑 <ruby>일체<rt>一體</rt></ruby>로부터인데 <ruby>악<rt>惡</rt></ruby>의 씨로 되고 보니 해와의 <ruby>행동<rt>行動</rt></ruby>을 누가 <ruby>탄식<rt>歎息</rt></ruby>치 않으랴. 그런고로 <ruby>여인<rt>女人</rt></ruby>이 <ruby>지금<rt>只今</rt></ruby>까지 <ruby>구속<rt>拘束</rt></ruby>받고 있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은 그 <ruby>원인<rt>原因</rt></ruby>으로 <ruby>시작<rt>始作</rt></ruby>된다. 이 <ruby>구속<rt>拘束</rt></ruby>이 <ruby>해방<rt>解放</rt></ruby>되어 <ruby>평등시기<rt>平等時期</rt></ruby>가 오면 <ruby>재림시<rt>再臨時</rt></ruby>가 가까워온 줄도 알 수 있는 <ruby>원인<rt>原因</rt></ruby>이다.


다시금 빼앗는 역사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사탄의 사랑하는 상대자 우상 장사商하는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을 다시금 사탄품으로부터 빼앗아서 자기 뜻의 자손을 빼앗긴 것을 다시 갚는 양으로 , 반대노선으로 찾아 세우기 위하여서, 사탄 단체 쪽인 우상장사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을 택하신 근본의의가 있다. 그 이유는 사탄이 제일 싫어하는 바인 동시에 통분한 존재였고 하나님 편에 있어서는 지극히 귀히 보는 존재이었다. 왜냐하면, 사탄품에 있다가 빠져나온 대표자요, 뭇사람의 본이 될 행동이면서, 다시는 사탄한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미 나왔으니 들어갈 수 없는 입장을 취하게 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택하여 하나님이 뜻하시려는 딴 지역으로 인도함이 즉,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것이 고향산천인 갈대아우르를 떠나라는 근본목적이었다.
그런고로 <ruby>기독교<rt>基督敎</rt></ruby>에서 “<ruby>삼위일체<rt>三位一體</rt></ruby>”라고 하는 <ruby>명사<rt>名詞</rt></ruby>가 무엇이냐하면 <ruby><rt>卽</rt></ruby> 하나님 아담 해와가 <ruby>완전<rt>完全</rt></ruby>하게 <ruby>일체<rt>一體</rt></ruby>가 되어야 할 <ruby>중심의의<rt>中心意義</rt></ruby>를 두고 말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과 사람과는 <ruby>부자지관계<rt>父子之關係</rt></ruby>로 되어있다. 하늘 <ruby>중심<rt>中心</rt></ruby>한 <ruby>삼위일체<rt>三位一體</rt></ruby>가 <ruby>악<rt>惡</rt></ruby>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ruby>삼위일체<rt>三位一體</rt></ruby>가 되고 마니 <ruby>악세계<rt>惡世界</rt></ruby>인 사탄 <ruby>세계<rt>世界</rt></ruby>에도 <ruby>삼위일체<rt>三位一體</rt></ruby>가 있는 바이다. 그리하여 사탄은 우리 사람의 <ruby>부격<rt>父格</rt></ruby>으로 <ruby>대입<rt>代入</rt></ruby>받아 <ruby>불순<rt>不順</rt></ruby>, <ruby>불신<rt>不信</rt></ruby>, <ruby>불시<rt>不侍</rt></ruby>의 한 <ruby>본체<rt>本體</rt></ruby>로 <ruby>역사<rt>役事</rt></ruby>한 셈이다.
그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니 하늘 대해서는 기쁨의 존재며, 사탄 대해서는 슬픔의 존재로서, 한 분기노선을 세울 수 있는 중심존재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에 선 아브라함 뒤에는 원수 사탄이 미련을 갖고 따라들게 되었다.


=== 제 2 절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섭리하신 근본의의 ===
<ruby>신약<rt>新約</rt></ruby>에 보면 예수도 <ruby>불순<rt>不順</rt></ruby>, <ruby>불신<rt>不信</rt></ruby>, <ruby>불시자<rt>不侍者</rt></ruby>를 <ruby>대<rt>對</rt></ruby>하여 요한복음 8장44절에 <ruby>책망<rt>責望</rt></ruby>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너희들의 아버지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들은 너희 아버지의 <ruby>욕심<rt>慾心</rt></ruby>을 <ruby>행<rt>行</rt></ruby>하고자 하느니라” 하시었다. 이 말씀은 <ruby>타락근본<rt>墮落根本</rt></ruby>의 <ruby>주인격<rt>主人格</rt></ruby>의 <ruby>본체<rt>本體</rt></ruby>는 사탄이라하는 것을 밝히 말한 것이다. 그러기에 뱀이란 사탄이를 <ruby>표시<rt>表示</rt></ruby>한바를 밝히는 것이며 또 해와를 <ruby>대<rt>對</rt></ruby>하여 <ruby>정조<rt>貞操</rt></ruby>를 빼앗어 거짓 아버지 <ruby>격<rt>格</rt></ruby>으로 되었다는 것을 밝히 말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ruby>원수<rt>怨讐</rt></ruby> 품에 안겨 있는 것을 알고 다시금 <ruby>본<rt>本</rt></ruby> 아버지를 찾아 모시게 하려는 <ruby>노정<rt>路程</rt></ruby>이 구원노정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자기 고향산천과 정든 향토와 정든 부모에 대한 정리라든가 친척에 대한 정리라든가 아브라함에는 큰 고통의 상대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노정은 이 모든 것이 문제있는 곳에는 시작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정은 하늘 정을 성사하고자 하는데는 반대되어 직접행동 여하를 가름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것을 문제로하지 않고 갈대아 우르를 출발하는 그 행동은 과연, 인간으로써 찬양하여야 할 문제인 동시에 사탄에게 대한 복수적인 하나님 뜻을 성사하는 터의 행동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자기의 기본 뜻을 아브라함으로부터 본격적 출발을 보고자 함이었다. 사탄은 아브라함을 빼앗기고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회귀 공작을 시작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뜻 성사를 파괴하고자 함이었다.
아담 해와가 <ruby>범죄<rt>犯罪</rt></ruby>하고 보니 <ruby>본래<rt>本來</rt></ruby> 아담 해와에게 <ruby>주입<rt>注入</rt></ruby>하여준 하나님의 <ruby>근본자체<rt>根本自體</rt></ruby>인 터 <ruby>즉<rt>卽</rt></ruby> <ruby>생심<rt>生心</rt></ruby>을 중심하고 <ruby>장성<rt>長成</rt></ruby>하여 하나님이 <ruby>임재<rt>臨在</rt></ruby>할 수 있는 터, <ruby>자체<rt>自體</rt></ruby> <ruby><rt>卽</rt></ruby> 아담의 <ruby>영인체<rt>靈人體</rt></ruby>는 <ruby>악<rt>惡</rt></ruby>을 <ruby>범<rt>犯</rt></ruby>한 <ruby>자체<rt>自體</rt></ruby>의 몸에 있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거두심이었다. 그런고로 <ruby>범죄<rt>犯罪</rt></ruby>하기 <ruby><rt>前</rt></ruby>에 <ruby>영인체<rt>靈人體</rt></ruby> <ruby>자체<rt>自體</rt></ruby>가 하나님 <ruby>우편<rt>右便</rt></ruby>에 계셨다가 <ruby>제이<rt>第二</rt></ruby> 아담 <ruby>격<rt>格</rt></ruby>으로 모내심을 받은 그 분이 <ruby><rt>卽</rt></ruby> <ruby>독생자<rt>獨生子</rt></ruby> 예수였다. <ruby>독생자<rt>獨生子</rt></ruby>라는 <ruby>명사<rt>名詞</rt></ruby>도 여기에 <ruby>명백<rt>明白</rt></ruby>하게 되는 바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대하여 축복하려할 때 아브라함 자체에 대한 축복보다도 뜻 중심하고 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근본의의이다. 아브라함의 복의 기관될 축복을 하여주며, 그로 하여금 대족속을 이루리라고 축복하여 주마하신 뜻을 받들어서 고향산천을 출발하는 아브라함 자체에는 하늘의 공작시작을 받게되는 하나님 대신 뜻 성사의 기본행동의 시작은 완성되었다.
아브라함을 빼앗아낸 하나님은 자기가 하고자하는 전목적을 두고 축복과 약속에 대한 새로운 결정적 언약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결정적 언약을 세우게 된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족속에게 잡혀간 롯을 다시금 찾아와 승리한 후에 시작이었다.
이와 같이 한바는 하나님이 미워하는 민족과 대립케 함은 하나님 자신이 뜻을 세울 수 있는 확고한 기초를 세우는 동시에 벌써 하나님이 미워하는 나라와 원수적 입장에서 하나님 편 쪽에 섰기에 결정적 언약 성사를 시작함이 있었다. 이 언약이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민족건설의 시작이며 이를 확대시켜서 국가건설에로 그리하여 세계복귀의 근본의의를 두고하신 언약의 전부의 시작이 , 아브라함의 전 언약중에 포함되어진 근본 사실을 알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비몽사몽간에 말씀하시기를 두려워懼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盾이다. 네가 받을 보상이 크다.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가 없다하니, 아브라함에 대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의 친자식으로 인하여 후사가 되게 하리라 하시며 데리고 외로 나아가 가라대, 하늘天을 우러러仰 보라 하시며 별들衆星을 헤아릴計數 수 없는 바와 같이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되리라 하시매 아브라함이 이를 믿으니 의로 여기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목적을 완성키 위하여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였다 하시면서 이 땅을 너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하리라 하시었다.
그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말씀하시기를 제가 이땅을 얻어 터전基業삼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있가 하니 네가 나를 위하여 3년된 암소牝牛 한마리一와 3년된 산양 한마리一와 3년된 모양 한마리一와 산비둘기 한마리一와 집비둘기한마리一를 바치獻라 하니, 아브라함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에 쪼개어 우,좌에 놓고 그 비둘기는 쪼개지 아니하여 제단위에다 놓고 제사를 드리니 그 제물위에는 독수리가 날라서 앉게 되었다. 그런고로 여호와,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너의 정녕히 알라. 너의 자손이 객이 되어 4백년 동안 고역하리라 하신 노함을 보게 되었다.
이 제물은 무슨 제물이었는가 하면 그 후손에 대한 전부의 제물의 표시물이었다. 즉 기제물이 하나님의 뜻이 되는 백성을 찾고자 하는 목적이며 전인류를 찾아야 할 하나님의 근본목적을 표시한 대신적 제물이었다. 이 제물위에 독수리가 내렸다 하는 바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벌써 사탄의 침입을 증거하는 사실이다. 즉, 아브라함 하나를 중심하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고 할 때에 사탄은 뜻을 파하기 위하여 아브라함 한 자신의 결과적 행동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제물을 ,
전 하나님의 목적을 두고 예약적 제물임에 틀림없다. 이 제물 실패하면 다시금 사탄에게 침입노정을 양보하는 행동인데 아브라함이 전 뜻을 합의있게 헌제치 못함은 하나님의 계획의 뜻은 벌써 미성사 한 것을 표시하는 중대한 것이 이 제물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 자신은 이 중대한 제물을 드리는 자신으로서 제물을 전부 쪼개지 못 함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제물을 쪼개는 것은 사탄편 사람과 하늘편 사람이 있다는 전인류의 표시였다. 그런데 비둘기를 쪼개지 않는 바는 하나님의 소유된 자손과 사탄 소유된 사람과를 갈라서 섭리코저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의의였는데 쪼개지 않는 것이 있으니 하나님 자손될 약속과 언약의 성립을 보는 제물에 완성한 성립을 보지 못하고 마는 사실이니, 다시금 그 자손까지 사탄이 침입할 수 있는 터를 지은 것이 시작을 보이게 되어 사탄은 자기편쪽 표시로 갈려지지 않는 제물 비둘기를 취하려하여 제단 위에 내린 바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뜻한 전 목적은 사탄이가 다시금 차지하는 뜻으로서 제물헌제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3대 제물은 무슨 표시냐하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진리 목적 중심은 소생에서 장성으로, 장성에서 완성으로써 한 제물을 통하여 표시한 바이었다. 즉, 비둘기를 드리게 하심은 하나님의 뜻 소생을 표시함이고, 양을 드리라하심은 장성을 표시함이고, 소牛를 드리라고 하심은 완성을 표시하는 중대제물이었다. 만일 이 제물이 뜻에 합의하게 헌제하였으면은 애급 4백년 고역이라는 것의 생활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없었을 것이었는데 4백년 고역이라는 것은 이 헌제물의 중대한 실패를 알리는告 바의 사실이다. (4백년 년대의의는 나중에 논하려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예약 제물에 실패를 보니 그것은 자손을 사탄에게 빼앗기는 표시로 되었다. 그런고로 아브라함 자손 중에도 사탄이 침입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근본목적은 다시금 미성사적 원인으로 기인되니 하나님은 다시금 아브라함 자손에게 사탄 침입의 길을 막으려니 대신 제물은 사탄한테 빼앗겼었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사탄의 뜻 성사를 본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는데 즉, 사탄한테 제물드린 것과 같이 되어버렸다. 즉 아브라함도 자기 소유의 근거점이 되어 전 목적 미성사를 가져오게 되니, 다시금 하나님은 약속제물은 빼앗겼지만 아직 실체 자손되는 것은 빼앗기지 않으려니 하나님은 부득기 한 입장을 취하여 아브라함을 따르려는 자손에 대한 사탄의 침입을 막으려하매 하나님은 그


자손의 시작인 한 자체가 사탄과 하나님과의 직접문제 요구물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취하여야 하겠고 사탄은 벌써 이삭에 대하여서 취할 수 있는 예약제물, 대신제물을 자기가 소유한 것이기에 사탄 역시, 제물 대신되는 실체인 이삭도 요구물이었다.
<ruby>죄<rt>罪</rt></ruby>를 짓기 <ruby>전<rt>前</rt></ruby> 아담의 <ruby>영<rt>靈</rt></ruby>이 예수의 <ruby>영<rt>靈</rt></ruby>에 <ruby>주입<rt>注入</rt></ruby>받아 오심이 <ruby>근본목적<rt>根本目的</rt></ruby>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는 <ruby>죄<rt>罪</rt></ruby>를 짓기 <ruby>전<rt>前</rt></ruby> 아담의 <ruby>완전<rt>完全</rt></ruby> <ruby>성숙<rt>成熟</rt></ruby><ruby>존재<rt>存在</rt></ruby>로 나타나서 <ruby>복음<rt>福音</rt></ruby>을 <ruby>시작<rt>始作</rt></ruby>하심은 무슨 <ruby>목적<rt>目的</rt></ruby>이냐하면 잃어버린 <ruby>자녀<rt>子女</rt></ruby>들을 다시금 찾아서 <ruby>타락전<rt>墮落前</rt></ruby> 하나님의 자녀로 찾아 옮겨 놓고자 함이 <ruby>근본목적<rt>根本目的</rt></ruby>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다시금 순종을 세워 하나님 편으로 전자손을 돌리려니 아브라함에 대하여 실체 자식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문제를 제기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즉 아브라함으로 모리야 산상에서 이삭을 드리라는 근본의의는 여기 있는 바이다. 그때 뜻 중심하고 순종하면 사탄은 떨어지고 하나님 편으로 속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대신제물 잃어버린 것을 실체로서 찾는 양으로 헌제의 명령에 순종하게 되었다. 이때 아브라함은 이런 원리적 문제는 알지 못하였다.
이와같은 입장에 아브라함의 순종은 용이한 문제가 아니었으나 예약제물 헌제시 실패가 전자손에게 4백년 동안의 고역의 뜻을 알고나니 이번 실패면은 말할 수 없이 큰 어려운難 문제가 생기리라는 것을 아는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게 되어 뜻대로 번제로서 자식을 드리는 확고한 입장에서 사탄은 목적 상대인 이삭에게서 물러가게 되는 바의 시작을 볼 수 있었다.
그런고로 이 사실의 근본 뜻을 현하 신자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나 성경에 아브라함의 실패한 구절을 알게하는 구절이 있다. 즉 창세기 22장 12절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 할 때에 그 아이에게 손手를 대어 해하지 말라. 네가 네 독자를 나에게 바치獻기를 아끼惜지 아니하니 이제야 네가 너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줄 아知노라 하심이다. 이 성경구절 중에 이제야 하는 그 구절이 즉 전번 실패를 경고하는 동시에 뜻 계승성사를 고함이었다. 이리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뜻 노정을 찾아나가는 그 도중에는 예약시대제물로 실수한 허물로 받은 아브라함 자손에게는 4백년동안 원수 앞에 고역하여만 본노정에 들어설 것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 애급 4백년 고역은 필연적 과정이었다. 진리를 찾으려니 진리에는 소생이 있고 장성이 있고 완성이 있는 바이니 하나님도 이 찾고자 하는 뜻을 진리노정이니 이와같은 의미에서 3대제물이 요구되었다. 이 제물적 사명의 소생부분은 즉 구약시대의 표징이니 소생하면 장성 완성으로 하려하던 것이 인간이 절대 순종치 못함으로 분립을 자아내는 것으로 전개할 것이 표징되어 있다. 한 제단위에 3제물은 한번에 뜻 성사하여야 할것이 근본뜻이었다.
여기에 소생역사는 하나님 책임분담 시작 기초를 잡는 것이고 장성은 예수 오셔서 근본복귀의 복수의 예로 해와를 찾아야만 되는 것이고 완성은 예수를 중심하고 전인류와 합하여 또 하나님과 합하여서 전근본창조목적 달성을 보고자 함이 표시로된 제물에 의의다. 제물중에 비둘기는 소생을 표시함이니 구약시기를 말함이고 양은 장성이니 신약시기를 표시함이고 소牛는 완성이니 재림을 말함이다. 장성과 완성과는 함께 하려는 뜻은 사람들이 불순종과 불신으로 인하여 예수를 죽이니 재림이라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소牛는 완성의 표시었는데 왜 암소牝牛였든가. 즉 완성할려면 해와 한 존재가 문제되는 중심점이니 암소牝牛는 해와를 표시하는 뜻이다.
이 해와가 즉 완성할 수 있는 목적상대이었다. 간단한 제물내용을 소개하였지만 다시금 본론으로 들어가면 사탄은 이삭의 실체에서 뜻을 세우지 못하고 다시금 기 자손에 대하여 대립적 태도는 물론이며 실체자손에 침입의 길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이삭의 한 존재가 예약대신제물에 침입을 보였기에 그 이삭에게도 불순종의 터는 벌써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잘못하면 생길 것을 사탄은 바라보게 되었다. 그것은 제물을 자기것으로 하였든 사실이 있음으로 사탄은 여전하게 그 후손에게 대하여 대립성을 갖고 대하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삭에게 자식을 낳으니 쌍태인지라 즉 에서와 야곱이었다. 이 쌍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아브라함의 실패로 인하여 제물에 원치 않는 존재의 침입이 있었든 것이므로 이 실체자식 이삭이 문제되어 또다시 찾았으나 이삭의 자식한테 대하여는 사탄 역시 찾고자하는 한 터를 양보하였든 실수가 있었으니 그 자식되는 쌍태는 원수적 표시의 소유자와 하나님적 표시의 소유자가 한 태중에 있음을 표시함이었다. 그래서 에서와 야곱은 복중에서부터 싸우심은 이와같은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존재이니 복중부터 싸운 것이다. 자식낳으니 에서와 야곱이러라. 에서는 원수 사탄의 대표요, 야곱은 하나님 편적 대표이었다. 즉 에서는 아브라함의 먼저 제물의 실패의 씨요, 다음 야곱은 잃어버린 이삭을 실체로써 찾아서 제물까지 찾아 세우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제2차적 존재인 야곱을 통하여서 뜻을 세우고자 함은 근본이 그와같이 되었기에 빼앗아서 성사하는 양이니 하나님은 에서의 축복을 야곱에게로 돌리는 근본의의는 여기에 있有다.
그때에 제물 실패


있으면 이삭 자식에 하나님이 미워하는 에서와 같은 존재는 없었다고 할 존재가 생기게 된 것은 다시금 사탄을 분립하여야 하늘 편과 사탄편을 완전분립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탄이 다시는 아브라함의 자손한테 미련을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므로 이와 같이 표시적 사실로서 야곱이 에서의 장자의 직분을 빼앗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예수와서 원수의 피를 받은 전인류를 빼앗아 넘길 것을 예고하는 사실이니 그런고로 이 한 사실이 근본을 밝혀주는 것인 동시에 뜻 성사의 한 표징으로 가는 바가 되어야 하는 바는 아브라함의 언약은 전목적의 표시인 약속이었기에 이런 의미의 한 분기 존재가 이삭이므로 기 자손 에서와 야곱이 사이에 되어진 사실이었다. 이러한 결과의 영향을 받고 났기에 맏 자식은 하나님 앞에 사랑 받지 못한 사실의 원인이나 창세기 전면에서 보여주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오늘 <ruby>인간<rt>人間</rt></ruby>은 원수의 몸에서 <ruby>구속<rt>拘束</rt></ruby>받고 참<ruby>부모<rt>父母</rt></ruby>를 잃어버리고 사니 <ruby>양심적<rt>良心的</rt></ruby> <ruby>고통<rt>苦痛</rt></ruby>은 이 <ruby>사실<rt>事實</rt></ruby>을 알려주는 <ruby>간접적<rt>間接的</rt></ruby> <ruby>자극<rt>刺戟</rt></ruby>
예를 찾으면 이삭, 야곱, 요셉 에브라엘, 아벨 등등의 사실은 이와 같은 사탄 피를 받고 났기에 맏 자식은 미움의 상대이었다. 여기서 뜻 성사의 출발의 후손은 야곱을 중심하고 택한 백성 12 형제는 12지파으로 시작의 출발은 야곱부터 시작케한 것은 근본의의로 보아 알 수 있는 바이다. 이삭은 하나님과 사탄이 바라는 존재입장이 아담과 같은 두 상대입장이었기에 근본출발 못했다. 즉 이삭부터 애급 출발이 아니고 야곱부터 되는 바는 이상 해설 중 원리로서 명백한 사실이다. 이리하여 택한 하늘 백성이 되어야 할 근본은 애급으로 옮겨지게 되는 바는 뜻 성사의 첫 출발이다. 지금부터 하나님과 사탄과의 분립되어 복귀의 출발은 시작된다. 이것이 즉, 하나님적 분담책임성사의 출발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이것이 근본이 되어 즉 표본이 되어서 장성과 완성적 사명분담 책임자의 본이 되어야 하는 제1차 하늘적으로 하나님 직접 사명코저하는 기초는 시작함인 동시에 제물표시소생과정의 발로였다. 그런고로 애급에서부터 가나안 복귀까지는 예수 오셔서 할 기본표시공작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한 목적을 한 완성으로 볼 수 있는 한 터의 공작이니 애급서부터 솔로몬 왕까지 제2차 완성하여야 할 존재가 나타나서 성사할 한 예고적 표시로 되어있다. 즉 예수 오셔서 애급서부터 가나안 복지로가는 양으로 우리 인간이상 복귀지로 찾아들어가는 한 사명적 기초표시로 전개시키고자 함의 의의


를 알아야 한다.
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의 품으로 옮겨 놓아 하나님을 <ruby>근본<rt>根本</rt></ruby>아버지로 <ruby>직계혈통관계<rt>直系血統關係</rt></ruby>를 맺지 않으면 안될 <ruby>중대<rt>重大</rt></ruby> <ruby>책임<rt>責任</rt></ruby>남아 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셔서 <ruby>성사<rt>成事</rt></ruby>를 <ruby>완성<rt>完成</rt></ruby>치 못하였기에 <ruby>재림<rt>再臨</rt></ruby>의 <ruby>요구<rt>要求</rt></ruby>가 되게 되었다.
애급서부터 가나안 복귀노정은 예수의 노정을 표시한바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근본 뜻이다. 그리하여 타락시킨 인간 대하여 하나님이 자기자신 책임분담 대하여 시작하는 것이 즉 모세의 세우심이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신하고 바로는 사탄을 대신하고 나오게 되었다. 모세가 택함을 받은 원인은 원수가 이스라엘 백성을 극도로 학대하는 동시에 강제로라도 전멸시키고자 하는 행동으로 나가게 되어 고역 중 원수의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과 싸우는 것을 보고 애급인을 죽이는 모세는 본래 애급 궁중에서 장성하였으나 애급 사람을 원수시하는 바는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표시하지 않는 지조는 과연 하나님이 택하시는 귀여운 행사였다. 애급 궁중에서 자라 났으나 애급 사람이 아니고 하늘의 백성의 변함없는 그 자체이었다. 이 자체는 애급 원수의 모든 제일 미워하는 자체인 동시에 사랑받고 자라는 존재였다. 이 자체가 애급 궁중에서 나왔으니 애급과는 다시 결탁 안하는 존재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고로 그 위에 애급 사람 대하여 증오심을 갖고 있는 확고한 존재이니 하나님이 택한바가 원인이 있는 바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서 애급 왕 바로를 대하여 공작을 하게 하기 위한 시작을 명령하게 되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되는 모세는 자기자신이 애급 백성앞에 믿信게 할 수 있는 증거를 요구하니 지팡이杖으로 뱀蛇이 되게 하는 첫 이적을 보게 하신지라. 그리하여 조상에 나타나現신 하나님을 알게 하여 뜻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함이었다.
그 다음에는 손手을 품에 넣으라 하심에 손手을 품에 넣으니 나병이 된지라. 그 다음에 다시금 품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매 낳은지라. 그 다음에는 듣지 않거든 강수를 가져다가 부으라 그리하면 피가 되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시었다.
그 다음에는 모세는 말言을 요구하였다. 이와같은 사살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려 할적에 이런 이적을 보여주었나하면 하나님이 장래하시고자 하는 사실의 터가 되는 행사이니 그 표시되는 모든 뜻은 전부 예수 오셔서 할 목적성사의 한 상징이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 되어야 할 원리적 목적이 있는 바이다. 또 지팡이杖라는 것은 대신 의지자를 표시함이었다. 즉 나를 대신보호할 것을 말함이고 전 앞길을 잡아준다는 뜻이며 또 합당치 않은 것을 치어 뜻대로 성사하게 하는 뜻이 있는 바이었다. 이것은 즉 예수가 우리의 전생명에 대하여 보호가 될 것을 말함이었다. 뱀蛇를 보여 주심은 뱀으로 유인한 표시적 존재로 해와 역사한 것을 보여 주었으니 예수와서 뱀과 같은 역사로 사탄 중에서 빼앗을 역사하여야 할 하늘 사적 표시를 예고하기 위하여서 착수할 것을 의미하심이었다. 사탄이 네가 뱀蛇갖고 했으니 나도 뱀蛇갖고 예수로 역사한다는 것이 근본장도 뱀蛇되게 한 의미가 있는 바이다. 모세 뱀蛇 예수는 사탄 뱀을 잡아먹어 승리할 것이 예고적 표시였다.
모세 손手을 품에 넣은 것은 첫 번은 사탄의 유인받아 사탄 품에 안긴 해와의 행동은 인간을 죽이는 역사였으니 다시금
손手를 품에 넣으심은 예수 오셔서 해와를 품는 사실은 나병과 같은 사중에서 소생하여 산다는 표시로 손手의 병病이 낳은 것을 보여줌이었다. 즉 제1차 품은 것은 사망이나 제2차 품으심은 생명이라는 영생의 시작을 예증한다.
강수로 피된다는 바는 물水은 세상을 표시함인데 예수와서 사망중에 처한 존재들이 예수 오셔서 피로되는 생명 주입을 시작한다는 것을 표시한 바이었다. 말言의 요구는 상대 목적 성사할 수 있는 중요 책임개성체니 말言을 요구하심은 창조물 전부를 말씀으로 지은 것이 잃어버린 것을 예수와서 말言 상대의 이상적 실체를 다시금 성사한다는 뜻을 표시한 바이었다.  즉 말言은 창조목적 물실체를 말하심이다.
아담 해와를 찾는다는 것과 전인류와 만물을 찾는다는 의미가 있음이다. 그 때 모세가 요구하는 전부를 허락하시고 애급級으로 가라하심에 모세는 자기의 처자를 데리고 하나님의 지팡이杖를 들고 애급級으로 들어가 바로에게 청하기를 이스라엘은 나의 장자라하라.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하라. 그래도 바로 보내지 않으면 장자를 죽이라 하는 명령을 받고 들어가는 도중 한 숙소에서 여호와 모세에게 현하여 모세를 죽이고자 할 때에 모세의 처는 아들 양피를 벗겨던져서 죽음死을 면케하면서 처가 말하길曰 당신은 피흘리는 남편이로다 한지라 그것은 할례를 한 연고여라. 여기에 야곱 모가 야곱과 합하여서 살리는 행례를 성사한 것이었다. 그 근본의의는 무슨 뜻인가하면 모세는 즉 할례를 성사못하면 죽死는 것이고 성사하면 산生다는 중대의미가 있는 바이다.
예수 오시면 무슨 목적이나 하면 할례 근본목적완성하는 실체인데 그것은 그 모친과 합하여서 만이 성립되는 근본의의있다는 것을 보여줌이었는데 처자가 합하는 일이 없으면 뜻 성사 못하고 예수는 죽음死은 십자가의 죽음死있다는 예고적 사실을 표시함이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장자로 성사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가 모세가 살아야生만 될 것이었는데 모세 한 생명은 전이스라엘의 대신생명이고 전 이스라엘의 대신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모세에게 있어서 할례 없으면 모세는 물론이고 전이스라엘 백성도 전부 사망하는 표시적 행례였다.
그런고로 모세 처자가 할례가 있었기에 살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생사의 중요문제를 우좌하는 근본문제성사의 책임을 표시한 바다. 이 입장에서 모세 처자 합함의 큰 승리적 조건의 성립을 봄이었다. 이 뜻을 세우지 못하였으면 모두 실패할 수 있는 곤란難한 문제이었다. 그런고로 이 한 모세의 처자의 한 할례가 전 택한 백성에게 대한
장자의 명분을 완성하게 하는 근본자체가 즉 할례였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오셔서 모친과 합력하여 할례성사의 뜻을 성사하여야 할 것이었으나 예수 이 뜻을 못 성사한 실패적 근본이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모친 뜻 받들지 못하였기에 예수는 모친에게 대하여 갈릴리 가나에서 이적을 볼 적에 여인이여하신 말씀의 근본의의가 있음이라. 그에 모친 대하여서 여인이여 너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한 말씀 등등의 시작은 예수는 뜻 성사의 제일 시작의 실패를 가져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십자가 상 죽음死의 시작의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다. 즉 모세가 하나님 앞에 뜻 성사할 수 없는 자기 삶生을 가지지 못한 것과 한가지 사실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하시는 노정의 숨어 있는 원리목적을 누가 알 수 있으랴.
여기에 할례에 대하여 말하기로 하다. 귀
본래 성경에 할례라는 명사가 생기게 된 것은 타락되었기에 기인되는 사실인데 본래 해와가 사탄 피를 받고 아담까지 타락되었기 때문에 할례의 중심문제가 요구되는 바이다. 그런고로 아담이 주관하여야 할 해와를 주관하였다면 타락조차 방지하였을 터인데 해와한테 주관받고나니 타락됨이었다. 즉 아담 양부를 통하여 전타락을 성사되었으니 귀임은 아담 남자에게 있는 것이었다. 이 남자되는 아담이 주관받고나니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존재로 되며 타락의 시작의 성립을 보게한 실체는 즉 남자의 양부였다.
그런고로 어두움의 피를 받아들인 그 자체이니 어두움의 피를 다시금 빼는 사실을 표징함이 목적이었다. 그런고로 아브라함 자손은 할례하여야만 즉 어두움의 피를 먼저 받아서 죽死게되었으니 그 자체로서 살려면 그 자체로서 사망의 피를 빼야만이 하나님께 속할 수 있는 시작을 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할례는 아브라함의 영원한 규례로 세움이었다. 그리고 할례있으므로 주관성을 다시금 복귀하는 남자의 자격을 부여함이다.
할례에는 미움의 할례가 있고(신10/16) 육신할례가 있고(창17/10) 만물할례가 있다(레19/23). 이것은 사람의 타락으로 인하여 온 천주가 더렵혀 짐을 말한다.
할례는 (1) 사망의 피를 빼는 표


==== (2) 주관성을 다시 찾는 표 ====
그런고로 우리는 <ruby>악<rt>惡</rt></ruby>의 피血을 받았으니 <ruby>양자<rt>養子</rt></ruby>의 <ruby>관계<rt>關係</rt></ruby>로서 <ruby>근본혈<rt>根本血</rt></ruby>을 받아서 <ruby>소생<rt>蘇生</rt></ruby>되어 <ruby>창조이상<rt>創造理想</rt></ruby>인 <ruby>부모<rt>父母</rt></ruby>를 <ruby>복귀<rt>復歸</rt></ruby>함이 우리 <ruby>인간<rt>人間</rt></ruby>의 <ruby>전목적<rt>全目的</rt></ruby>이다. <ruby>탄식<rt>歎息</rt></ruby>할바는 <ruby>양자<rt>養子</rt></ruby>와 같은 <ruby>존재<rt>存在</rt></ruby>로된 우리들이 <ruby>생각<rt>生覺</rt></ruby>하면 <ruby>고통지사<rt>苦痛之事</rt></ruby>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ruby>악<rt>惡</rt></ruby>으로 <ruby>인<rt>因</rt></ruby>하여 <ruby>시작<rt>始作</rt></ruby>되니 이런 <ruby>명사<rt>名詞</rt></ruby>가 <ruby>생기<rt>生起</rt></ruby>였구나. 우리 <ruby>근본<rt>根本</rt></ruby> 아버지는 <ruby>영원<rt>永遠</rt></ruby>의 아버지이며 사랑하여 찾아주신 아버지시다. 이 아버지를 아버지로 알고 모시며 또 어머님을 모시는 그 <ruby>시기<rt>時期</rt></ruby> <ruby>즉<rt>卽</rt></ruby> <ruby>지상<rt>地上</rt></ruby>의 <ruby>재창조이상<rt>再創造理想</rt></ruby>이 <ruby>시작<rt>始作</rt></ruby>되는 <ruby>시기<rt>時期</rt></ruby>이다. 이 <ruby>시기<rt>時期</rt></ruby>를 알아서 아버지 어머니를 다시 찾는 그 기쁨이 온 <ruby>천주<rt>天宙</rt></ruby>를 찾고자 함의 <ruby>근본목적<rt>根本目的</rt></ruby>이다. 이 <ruby>목적<rt>目的</rt></ruby>은 <ruby>재림시<rt>再臨時</rt></ruby>부터 <ruby>시작<rt>始作</rt></ruby>된다.


==== (3) 근본 뜻의 자녀의 길을 찾는 약속의 표 ====
==== <ruby>제<rt>第</rt></ruby>3 <ruby>절<rt>節</rt></ruby> 왜 <ruby>타락<rt>墮落</rt></ruby>케 하였는가 ====


이상과 같은 중대의미를 갖는 것이 즉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근본의미하는 것을 인간은 지금까지 미지의 것이다. 또 몰라야 하는 것이 원리였었다. 그런고로 모세의 이 행례는 전이스라엘에게 짊어진 전목적성사를 표시함을 다시금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모세 행동여
하나님이 <ruby>본래<rt>本來</rt></ruby> 사람을 지으심은 <ruby>개성실체<rt>個性實體</rt></ruby>가 <ruby>완성<rt>完成</rt></ruby>하여서 <ruby>영원<rt>永遠</rt></ruby>할 수 있는 <ruby>이상존재<rt>理想存在</rt></ruby>를 <ruby>보존<rt>保存</rt></ruby>할 수 있도록 지으셨는데 그 <ruby>시기<rt>時期</rt></ruby>까지가 사람에게 있어서는 <ruby>성숙시기<rt>成熟時期</rt></ruby>까지가 <ruby>표준장성<rt>標準長成</rt></ruby>하여 <ruby>영원<rt>永遠</rt></ruby>하신 <ruby>존재<rt>存在</rt></ruby>의 터를 <ruby>확보<rt>確保</rt></ruby>함으로써 하나님의 <ruby>실체<rt>實體</rt></ruby> 사랑을 주고자 함이 <ruby>목적<rt>目的</rt></ruby>이다. 그 <ruby>기간<rt>期間</rt></ruby>까지 <ruby>장성<rt>長成</rt></ruby>을 <ruby>통<rt>通</rt></ruby>하여 <ruby>완성<rt>完成</rt></ruby>까지 <ruby>도달<rt>到達</rt></ruby>케 하심은 <ruby>직접<rt>直接</rt></ruby> 하나님이 <ruby>주관<rt>主管</rt></ruby>으로 하심이 아니고 그저 <ruby>피창조물원리<rt>被創造物原理</rt></ruby>를 <ruby>통<rt>通</rt></ruby>하여서 <ruby>완성<rt>完成</rt></ruby> <ruby>성숙단계<rt>成熟段階</rt></ruby>까지 <ruby>도달<rt>到達</rt></ruby>케 하시도록 지으시었기에 하나님은 <ruby>원리<rt>原理</rt></ruby> <ruby>주관격<rt>主管格</rt></ruby>으로 계시어 그 <ruby>결과<rt>結果</rt></ruby>를 보아가면서 하나님은 기뻐하시었으며 빨리 <ruby>이상<rt>理想</rt></ruby> <ruby>감필<rt>減筆</rt></ruby>함을 <ruby>지극<rt>至極</rt></ruby>히 <ruby>요구<rt>要求</rt></ruby>하였다. 그리하고 하나님의 사람 <ruby>대<rt>對</rt></ruby><ruby>이상<rt>理想</rt></ruby>은 <ruby><rt>卽</rt></ruby> 하나님의 <ruby>이상<rt>理想</rt></ruby>은 <ruby>자유이상<rt>自由理想</rt></ruby>을 <ruby>표준<rt>標準</rt></ruby>하시고자함을 지으셨으며 그 <ruby>이상<rt>理想</rt></ruby>에는 조금도 <ruby>손실<rt>損失</rt></ruby>없도록 지으셨다.
하는 예수 오셔서 사명적행로의 전형 표시로 그의 모든 일은 표징된 바라는 것이 원리로 보아 알 있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의 사명분담책임의 과정은 예수의 기초되겠으니 같은 뜻의 목표표시으로 만사는 드러내어 나아가는 것이 근본의의였다.
모세에게 아론을 주어서 이스라엘의 속죄적 행례의 대표자로 세우심은 모세를 협조하여 한 목적 뜻을 성사코저하는 시종이었다. 즉 백성의 대신속죄책임 역할을 하심은 해와 자체로 될 성신과 함께 예수의 뜻을 시종하여 인간 대하여 직접 속죄귀임을 할 것을 표징함이었다. 모세에게 한 대신 협조자가 없다 하여서 아론을 준바는 아니지만 말씀의 대신을 요구하게 될 때에 아론을 세우심은 아론은 말씀 대신자임을 표시하니 말씀의 최고 문제자는 해와의 한 존재였다. 즉 말씀 성사는 해와를 완전하게 찾는 목적으로 기인되니 즉 아론을 세워 대신속죄하심은 예수, 해와가 합하여서 인간 속죄의 직접 문제를 하여야 할 자기 자신의 사명분담역할이었다. 즉 해와는 죄를 지었으니 해와로서 대신 씻는 역할을 해야 할 책임분담이 되었으니 아론은 모세의 상대격자로서 백성을 대하여 모세의 뜻 즉 하나님의 뜻을 성사하게 협조한 바는 예수 오셔서 말씀 상대찾아 뜻 성사를 잡을 것을 표징하는 의의이다. 모세의 이상과 같은 제조건의 성립을 보니 바로를 대하여 직접대면을 취하여 나서게 되었다. 그때 바로는 모세의 요구에 대하여서 순종치 않는 반면에 도리어 모세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증오심을 갖게 끔 하나님은 바로를 강폭케 할 것을 말하면서 바로 앞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어 광야에 나아가 3일쯤 여호와께 제사하기를 청하라 하시었다.
여기 3일노정 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전생명이 놓이느냐 안 놓이느냐 하는 문제는 3일노정이라는 문제를 걸어 놓고 시작하게 되는 기본요구조건이었다. 이 3일간이 허여 안되면 이스라엘 전부적 목적은 시작할 수 없는 문제를 말하는 바였다. 3일노정이라는 것이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성사하게하는 공작의 기본되는 요구조건이었다. 그런고로 예수 오셔서 사탄 대하여 3일기간에 대한 과정에 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이 과정을 성사하려면 모세에게 속한 구비조건 같은 제조건구비를 보아야 할 것이었는데 이 구비조건은 광야시험 통하여 그러는 사탄에게 승리함으로 성립되었으나 그의 대신역자 아론과 같은 해와의 존재의 구비성사를 보지 못하여서 3일노정 시작 노정을 자유롭게 넘어서지 못한 원인으로 십자가 3일간의 기본적 근본은 시작이었다. 이때 예수 앞에 어머님과 합하여 뜻 성사를 중심하고 해와 한 존재와 인간들이 하늘 편쪽으로 순종하였으면 예수의
십자가 노정은 다른 방향으로 효과적 노정을 보아 사탄 대하여 적극대상의 성립을 시작하였을 것인데 그 대상을 어떻게 해서라도 성사할 책임이 예수의 책임이니 죽어서 3일 기간을 거치는 사명적 책임분담을 완성하야 할 의미가 있음이었다.


=== 제 3 절 모세에게 대한 하나님의 역사의 노정이 왜 예수의 노정 전모되는 이유 ===
그러므로 그 <ruby>자유이상<rt>自由理想</rt></ruby>을 찾아 <ruby>성사<rt>成事</rt></ruby>할 수 있는 <ruby>표준궤도<rt>標準軌道</rt></ruby>는 <ruby>선<rt>善</rt></ruby>을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하나님의 뜻을 <ruby>성사<rt>成事</rt></ruby>할 수 있는 존재의 터, <ruby>생심<rt>生心</rt></ruby>이 사람 <ruby>자신<rt>自身</rt></ruby>에게 있어서 <ruby>부여<rt>賦與</rt></ruby>받은 <ruby>근본체<rt>根本體</rt></ruby> 터로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ruby>완성기<rt>完成期</rt></ruby>까지에 <ruby>도달<rt>到達</rt></ruby>할 때까지도 하나님이 이러구 저러구(여러 모양으로) <ruby>자유이상완성<rt>自由理想完成</rt></ruby>을 간섭하지 않아도 뜻이 <ruby>합당<rt>合當</rt></ruby>할 수 있도록 <ruby>양심<rt>良心</rt></ruby>과 <ruby>생심<rt>生心</rt></ruby>


위에서도 간단히 표시하였지만 하나님이 본래 지은 것이 있기에 근본 책임존재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람이 타락한 후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었다(창세기 6장6절) 하심은 여기에 기인되는 바이다. 기 외에도 성경에는 하나님이 후회하시었다는 말씀도 있는 적을 볼 적에(사2/18) 하나님도 후회와 한탄하는 원인은 자기의 몸으로 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 잃어버린 것은 자기 몸을 잃은 것과 한가지였다.
은 그 <ruby>중심<rt>中心</rt></ruby> 뜻(<ruby>선<rt>善</rt></ruby>)을 <ruby>직향<rt>直向</rt></ruby>하여 나아가도록 <ruby>지향<rt>志向</rt></ruby>하여 가게끔 <ruby>원리<rt>原理</rt></ruby>지으셨기에 간섭 <ruby>주관<rt>主管</rt></ruby>하지 않았다. 그것은 <ruby>제일존재<rt>第一存在</rt></ruby>의 <ruby>완성<rt>完成</rt></ruby>을 <ruby>무시<rt>無視</rt></ruby>하는 것인 <ruby>동시<rt>同時</rt></ruby>에 <ruby>원리<rt>原理</rt></ruby>를 어기는 것이 됨으로 <ruby>원리완성<rt>原理完成</rt></ruby>하여 <ruby>성사<rt>成事</rt></ruby>코자함이 <ruby>근본<rt>根本</rt></ruby>으로 됨이었다.
그런고로 사람들이 제1차 심판으로 인하야 전멸 당한 후 하나님은 다시금 한탄하셔서 다시는 심판하지 않을 것을 선포하심과 동시에 심판받게 된 최종국점은 자기가 지었든 인간이었는데 타락되었음으로 심판이 생기였으나 타락하게 한 사탄도 본래 하나님 자신이 지으신 존재로부터 시작기인이나 전부의 책임은 하나님 자신이니 사람을 다시금 찾아서 근본을 다시금 성사코저 한 목적을 두고 심판한 것이지만 다시금 찾으려 할 때에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이 목적의 길을 닦기 위하여서 노아 이후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세를 통하여서 역사를 시작하였다. 즉 사람의 타락의 제1간접적 원인은 하나님이고 그 다음에는 아담이고 그 다음에는 해와이라는 본래 타락시킨 직접적 원인과는 반대로 하나님은 보게 되었다. 그래서 찾는 역사의 제일책임자는 하나님이 본이 되며 중심이 되어서 아담 해와가 찾을 수 있는 길을 닦고자 함이었다. 그래서만 아담 해와가 나아갈 직접 본으로 표시를 정하는 동시에 사탄 대한 승리노정이 되어야 되니 이 본대로 하여서 아담 해와의 승리할 수 있다는 길을 정하는 것과 같은 기초를 세워 놓으려 하는 것이 즉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시키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아담 대신 오는 예수는 하나님이 교시하여 준 승리의 본노정양으로 사탄 대하여 제1차 승리의 노정을 본삼아 나아가지 않으면 아니 될 의무가 있음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이 먼저 하신 일事을 본삼고 하신다는 말씀을 요한복음 5장 19절-20절에 기내용적 사실을 발표하였었다. 즉 아들子이 아버지父의 행하신 일事을 본見외에는 그일其事로 스스로自爲할 수 없나니 아버지父께서 행하시는 것을 아들도 또 그와 같이 행하시나니라. 아버지父께서 아들子을
사랑하사 그 하시는 것을 계시하시고 또 그 보다 더 큰일을 보이示시고 이등으로 기이히 여기게 하심이라 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는 하나님을 본받아 제2차 승리의 노정의 시작을 제1차 승리노정과 같은 노정을 취하여야 할 근본의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 (때에 )와서는 전사명역할은 하나님 책임분담 노정에서 보여진 사탄한테 더럽힌 바를 다 성사하여야만 시작의 출발을 보는 바를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책임분담을 모세를 세워 원수 품에서 뽑아내는 것과 같이 예수(때에 ) 와서 전인류를 찾아 사탄한테 뺏어야 할 사명적 기대를 상징사킨 사실의 근본원리를 알아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이 하신 길을 따라서 해야한다. 그래야 같은 목적하나를 합하게 할 수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이 분담하여 책임성사는 비공식노정을 아는 인간 우리는 절통치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예수와 성신분담역사도 사람 때문이었다. 이 모든 원리적 근본을 아는 우리는 전 정력을 뭐 아끼랴. 이와같은 기본원리를 알지 못한 타락인 세계에 처하였든 자아들을 알게 될 때에 그 원리의 전부가 사탄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인간이 되었으니 사탄 대하여 총공격하여 급속한 시일을 두고 복귀하여야 할 것을 알았도다. 이제야 참살길의 시작을 알았고 인생의 뿌리를 알았고 또 하나님이 누구라는 것을 알았으니 우리는 무엇으로 보답을 하랴. 문제가 이제 나타난 시봉이 최고문제로 되는 바는 두말할 바 없는 사실이다. 잃어버렸든 아버지는 6천년전이고 잃어버린 자식찾는 것도 6천년간에 쉬지 못하고 나를 찾으려시든 그의 존재 는 누구였는가. 즉 아버지 어머님의 존재이다. 이 기쁘고 고마운 소식을 널리 전할 자 세상에 어디있는가. 찾으시는 그 모습을 아는 자 몇 명이었는가.  지금까지 아버지 대하여 침 뱉었고  아들이로되 자식이 아버지를 모른다는 원통함을 길이 참으신 그 앞의 심정을 누가 동정할 효자가 세계에 어디 있는가. 이 길을 닦기 위하여 세상에 효자지도와 충신지도와 사제지도를 미리 전파하여 그 기반삼고저 함이었는데 지금 그 자체들이 없는 한탄지사를 또 몰라주는 인간이 되어지려는가 아는 자는 직접 대하여서 효자로 멀리 대하여만 뜻을 세울 수 있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대하여서 이상과 같이 삼강이라는 유교적 중심체로서 하나님을 모侍셨든가. 그 원리를 알지 못하므로 그리함이었다. 그와 같은 관계를 교시 못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슬펐으랴. 그것은 창조원리를 전부 완전히 찾아 첫
이상을 성사하려니 숨은 원리적 간격을 두고 타락하였기에 교시못함은 전번 말한바와 같다.  이와 같이 알아야 할 백성이 알지 못하고 왕으로 알아야 할 주인공을 알지 못하며 선생師이라면 이상없는 자로 시봉할바로 알지 못하는 원수편 대립하여 섰든 그 자체를 대하여서 하나님은 얼마나 안타까운 심정이었으랴. 무지한 백성을 찾아서 자녀삼으려니 모세를 세워서 바로를 직접 대립하심이었다. 지금부터 모세는 그 사명의 첫 출발을 원수 사탄의 대변인 바로에게로 발을 옮기게됨이 크나큰 역사의 희망의 초점이었다. 모세가 바로 앞에 나타나서 거듭나는 이적으로 바로를 굴복하게하는 역사를 시작하였다. 바로에 대하여 10여차에 대한 이적을 통하여서 바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다는 고백과 함께 완전굴복을 표준하고 역사하심이었다. 하나님이 바로를 굴복케 하심은 무슨 목적이었는가 하면


==== (1) 바로(사탄)다시는 택한 백성에게 생각조차 못하게 하고자 하심이고 ====
만일 하나님이 그 <ruby>자체<rt>自體</rt></ruby>를 <ruby>직접<rt>直接</rt></ruby> <ruby>주관<rt>主管</rt></ruby>하여 사랑하지 않았든가 하면 하나님은 <ruby>원리<rt>原理</rt></ruby>를 <ruby>미완성<rt>未完成</rt></ruby>하여 <ruby>개성자체<rt>個性自體</rt></ruby>를 <ruby>미완성<rt>未完成</rt></ruby>한 것을 사랑하여 <ruby>일체적<rt>一體的</rt></ruby> <ruby>이상<rt>理想</rt></ruby>을 <ruby>성사<rt>成事</rt></ruby>하였으면 <ruby>미완성체<rt>未完成體</rt></ruby>의 <ruby>불완전적<rt>不完全的</rt></ruby> <ruby>사실<rt>事實</rt></ruby>이 됨으로 그 <ruby>근본<rt>根本</rt></ruby> 원리기준까지를 기다리심이 <ruby>중심<rt>中心</rt></ruby>의 <ruby>의의<rt>意義</rt></ruby>이었다. 만일 <ruby>미완성시<rt>未完成時</rt></ruby>에 사랑 받으면 사랑 받는 그 자체는 사랑만을 <ruby>요구<rt>要求</rt></ruby>하여 <ruby>근본개성원리완성<rt>根本個性原理完成</rt></ruby>을 할 수 없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또 <ruby>원리규정<rt>原理規定</rt></ruby>을 <ruby>반<rt>反</rt></ruby>하는 것이므로 그 <ruby>자체<rt>自體</rt></ruby>나 사랑하는 <ruby>자체<rt>自體</rt></ruby>즉 <ruby>이상<rt>理想</rt></ruby> 사랑을 <ruby>성사<rt>成事</rt></ruby>할 수 없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을 <ruby>지극<rt>至極</rt></ruby>한 사랑 <ruby>이상형체<rt>理想形體</rt></ruby>를 <ruby>완성<rt>完成</rt></ruby>코저 함이었든 것이다.


==== (2) 바로(사탄)는 힘이 없으니 하나님의 요구대로 자복하는 동시에 순종하여야 것을 자각케 하기 위하여 ====
사람이 <ruby>완전<rt>完全</rt></ruby>한 하나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ruby>존재<rt>存在</rt></ruby>로 <ruby>성숙<rt>成熟</rt></ruby>하였으면 <ruby>원리적<rt>原理的</rt></ruby>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ruby>완전<rt>完全</rt></ruby> <ruby>미<rt>美</rt></ruby>로서 보여질 수 있는 <ruby>동시<rt>同時</rt></ruby>에 그 <ruby>자체<rt>自體</rt></ruby>들의 <ruby>사모<rt>思慕</rt></ruby>함이 <ruby>직접<rt>直接</rt></ruby> 하나님의 <ruby>자체<rt>自體</rt></ruby>에로서 <ruby>통<rt>通</rt></ruby>수 있는 <ruby>작용<rt>作用</rt></ruby>의 <ruby>시작<rt>始作</rt></ruby>을 볼 수 있게 지으셨다.


==== (3) 원수의 모든 것을 선하게 하기 위하여 ====
하나님은 사랑으로 계셔서 사람이 갖고 있는 사랑이 완성되면 <ruby>자연적<rt>自然的</rt></ruby> <ruby>원리<rt>原理</rt></ruby>로 사랑할 수 있는 <ruby>자극<rt>刺戟</rt></ruby>을 알아서 사랑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ruby>즉<rt>卽</rt></ruby> 하늘 사랑은 <ruby>양<rt>陽</rt></ruby>이면서, <ruby>완전음적<rt>完全陰的</rt></ruby> 사랑 <ruby>대상본체<rt>對像本體</rt></ruby>요 사람이 <ruby>사모<rt>思慕</rt></ruby>하는 사랑 마음心의 <ruby>기동<rt>起動</rt></ruby>의 <ruby>목적<rt>目的</rt></ruby>은 <ruby>기<rt>基</rt></ruby> <ruby>상대존재<rt>相對存在</rt></ruby>이었다. 그러므로 그때까지는 하나님은 <ruby>원리주관격<rt>原理主管格</rt></ruby>으로 계셨다. 그 <ruby>시기<rt>時期</rt></ruby>에 사람들의 <ruby>타락<rt>墮落</rt></ruby>이 <ruby>시작<rt>始作</rt></ruby>되었다. 사람도 <ruby>자유궤도<rt>自由軌道</rt></ruby>로 <ruby>천사장<rt>天使長</rt></ruby>도 <ruby>자유이상궤도<rt>自由理想軌道</rt></ruby> <ruby>세계<rt>世界</rt></ruby>의 <ruby>원리<rt>原理</rt></ruby>로 <ruby>활동<rt>活動</rt></ruby>하면서 살 수 있는 <ruby>자유존재<rt>自由存在</rt></ruby>들이었다. 그 <ruby>자유<rt>自由</rt></ruby> <ruby>이상<rt>理想</rt></ruby> <ruby>중심<rt>中心</rt></ruby>한 <ruby>자유성사세계<rt>自由成事世界</rt></ruby>를 <ruby>조성<rt>造成</rt></ruby>하여서 <ruby>기<rt>基</rt></ruby> <ruby>창조<rt>創造</rt></ruby> <ruby>전자유이상<rt>全自由理想</rt></ruby>을 <ruby>완성<rt>完成</rt></ruby>하기 <ruby>위<rt>爲</rt></ruby>하여서 <ruby>개성완성<rt>個性完成</rt></ruby>과 <ruby>자유체<rt>自由體</rt></ruby> <ruby>이상세계<rt>理想世界</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들이 하나님의 <ruby>근본<rt>根本</rt></ruby> <ruby>이상<rt>理想</rt></ruby>이었다. 그러면 <ruby>자유이상<rt>自由理想</rt></ruby>을 <ruby>완성<rt>完成</rt></ruby>하여야만이 <ruby>목적<rt>目的</rt></ruby>이 된다.


==== (4) 하나님을 반하는 자는 망한다는 것을 자각케 하기 위하여 ====
그러므로 <ruby>자유이상<rt>自由理想</rt></ruby>을 <ruby>기대<rt>基臺</rt></ruby>로 하고 <ruby>기<rt>基</rt></ruby> 위에다 사랑 <ruby>이상<rt>理想</rt></ruby> <ruby>원리<rt>原理</rt></ruby> <ruby>창조체<rt>創造體</rt></ruby>들이 <ruby>영원존재<rt>永遠存在</rt></ruby>하여 하나님의 <ruby>근본<rt>根本</rt></ruby>사랑 <ruby>이상<rt>理想</rt></ruby>을 <ruby>표현화<rt>表現化</rt></ruby>하고자 함이 <ruby>목적<rt>目的</rt></ruby>이었다. 그렇기에 <ruby>인간세계<rt>人間世界</rt></ruby>에서 <ruby>자유<rt>自由</rt></ruby>찾기 위하여 야단하는 그 <ruby>원인<rt>原因</rt></ruby>은 <ruby>타락<rt>墮落</rt></ruby>한 <ruby>연고<rt>緣故</rt></ruby>이다.


==== (5) 장자의 근본 피血받은 자를 쳐서 원수의 피血을 멸하기 위하여 ====
이 <ruby>자유<rt>自由</rt></ruby>를 찾으면 <ruby>이상자유<rt>理想自由</rt></ruby>를, <ruby>자유이상<rt>自由理想</rt></ruby> 갖고 찾으면 사랑으로써 <ruby>이상<rt>理想</rt></ruby>사랑으로 <ruby>역사<rt>歷史</rt></ruby>는 <ruby>필연적<rt>必然的</rt></ruby> <ruby>궤도<rt>軌道</rt></ruby>를 밟게 될 것이다. 그것은 <ruby>원리<rt>原理</rt></ruby>를 보아서도 <ruby>이론적<rt>理論的</rt></ruby>이 가져다주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것이 원수 바로(사탄)는 자각하여 자연굴복을 표준함이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무엇을 찾게 하기 위하여 바로를 강퍅케 하였냐하면
<ruby>자유<rt>自由</rt></ruby>와 사랑 <ruby>이상<rt>理想</rt></ruby>이 한 <ruby>기대<rt>基臺</rt></ruby>로 하여 <ruby>개성완성<rt>個性完成</rt></ruby>을 <ruby>요<rt>要</rt></ruby>하는 곳으로 <ruby>인류역사<rt>人類歷史</rt></ruby>가 흘러 나가는 것의 <ruby>시작<rt>始作</rt></ruby>을 보는 이것은 <ruby>복귀<rt>復歸</rt></ruby>로 되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 (1) 바로(사탄)은 원수로 증오심을 품게 하기 위하여 ====
사람들은 하나님은 왜 <ruby>타락<rt>墮落</rt></ruby>시켰는가 하고 말한다. 사람들이 <ruby>자유무대<rt>自由舞臺</rt></ruby>의 <ruby>세계<rt>世界</rt></ruby>에서 <ruby>자유생활<rt>自由生活</rt></ruby>하면서 <ruby>완성점<rt>完成點</rt></ruby> <ruby>도달시<rt>到達時</rt></ruby>까지는 <ruby>원리주관<rt>原理主管</rt></ruby>이니, 그 <ruby>자체<rt>自體</rt></ruby>들의 <ruby>행동<rt>行動</rt></ruby>을 <ruby>직접<rt>直接</rt></ruby> 간섭치 않고 <ruby>양심<rt>良心</rt></ruby>과 <ruby>생심<rt>生心</rt></ruby>을 <ruby>통<rt>通</rt></ruby>하여 <ruby>본노선확보<rt>本路線確保</rt></ruby>를 <ruby>요<rt>要</rt></ruby>하게 하였기에 사람으로서도 하나님을 <ruby>직접<rt>直接</rt></ruby> 부를 수 없는 <ruby>원리적<rt>原理的</rt></ruby> <ruby>거리<rt>距離</rt></ruby>를 갖고 있었다. 그런고로 부를 수 있는 <ruby>정도<rt>程度</rt></ruby>는 <ruby>완성<rt>完成</rt></ruby> 사랑을 <ruby>성사<rt>成事</rt></ruby>하여야만이 <ruby>생각<rt>生覺</rt></ruby>하여도 하나님을 알게 되며 <ruby>응<rt>應</rt></ruby>하게 되게 되었다.


==== (2) 바로편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
그런데 그때까지는 <ruby>직접적<rt>直接的</rt></ruby>으로 알리려는 사람 <ruby>자체행동<rt>自體行動</rt></ruby>이 나타나지 않고 그 <ruby>행동<rt>行動</rt></ruby>의 <ruby>결과<rt>結果</rt></ruby>만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고로 사탄의 <ruby>행동<rt>行動</rt></ruby>에 <ruby>동<rt>動</rt></ruby>하는 <ruby>기시<rt>基時</rt></ruby>에는 사람이 <ruby>양심적<rt>良心的</rt></ruby>으로나 <ruby>생심적<rt>生心的</rt></ruby>으로나 <ruby>합<rt>合</rt></ruby>하여 <ruby>행동<rt>行動</rt></ruby>하여서 하나님이 <ruby>직접<rt>直接</rt></ruby> <ruby>자극<rt>刺戟</rt></ruby>할 수 있는 <ruby>행동<rt>行動</rt></ruby>으로는 아직까지 <ruby>미도달<rt>未到達</rt></ruby>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ruby>행동결과<rt>行動結果</rt></ruby>를 보아 <ruby>기<rt>基</rt></ruby> <ruby>타락<rt>墮落</rt></ruby>된 <ruby>사실<rt>事實</rt></ruby>을 아시게 되신 것이었다. 이렇게 지으심은 <ruby>완전<rt>完全</rt></ruby>한 사랑을 하기 <ruby>위<rt>爲</rt></ruby>하여 <ruby>간접적<rt>間接的</rt></ruby> <ruby>거리성<rt>距離性</rt></ruby>을 두신 것은 <ruby>극<rt>極</rt></ruby>에 계시는 하나님이 사람도 <ruby>유형체<rt>有形體</rt></ruby>의 <ruby>축<rt>軸</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로 서 있어 서로 <ruby>합체<rt>合體</rt></ruby>할 수 있는 <ruby>전기원리<rt>電氣原理</rt></ruby>와 한가지로 지극히 큰 사랑을 <ruby>시작<rt>始作</rt></ruby>코저 함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라고 한다면 사람 사랑 (-)는 <ruby>직접<rt>直接</rt></ruby> <ruby>대<rt>對</rt></ruby>할 수 있는 것으로 <ruby>존재<rt>存在</rt></ruby> <ruby>완성<rt>完成</rt></ruby>이 <ruby>미완성<rt>未完成</rt></ruby>한 <ruby>기<rt>期</rt></ruby>이니 <ruby>타락행동<rt>墮落行動</rt></ruby>들은 (-)에 작용함이었다하여도, <ruby>직접적<rt>直接的</rt></ruby> <ruby>감응<rt>感應</rt></ruby>되지 못한 것과 같이 지으신 것이다.


==== (3) 우리편에는 절대능력 하나님이 같이함을 알게하기 위하여 ====
그런고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ruby>자체<rt>自體</rt></ruby>로서는 <ruby>극<rt>極</rt></ruby>에서 <ruby>축<rt>軸</rt></ruby>의 <ruby>고내<rt>固內</rt></ruby>를 <ruby>통<rt>通</rt></ruby>하는 사랑을 하시고자 하여서 지었기에 <ruby>만물자체<rt>萬物自體</rt></ruby>들의 사랑까지 <ruby>인간<rt>人間</rt></ruby>을 <ruby>통<rt>通</rt></ruby>하여야만이 <ruby>연결<rt>連結</rt></ruby>되게 되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 (4) 애급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미련을 전소하게하기 위하여 ====
이 사랑의 <ruby>미성사<rt>未成事</rt></ruby>가 <ruby>타락<rt>墮落</rt></ruby>이면서 <ruby>선<rt>善</rt></ruby>에 <ruby>존재<rt>存在</rt></ruby> <ruby>외<rt>外</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인


==== (5) 애급 사람 대하여 한사람이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정을 통하는 자가 없게하기 위하여 ====
<ruby>비원리존재<rt>非原理存在</rt></ruby>가 <ruby>법리무대<rt>法理舞臺</rt></ruby>로 <ruby>출현<rt>出現</rt></ruby>하여지게 되니 <ruby>선<rt>善</rt></ruby>과 <ruby>악<rt>惡</rt></ruby>의 <ruby>분기점<rt>分岐點</rt></ruby>을 <ruby>성사<rt>成事</rt></ruby>하고 말았다. 그러나 <ruby>원리적<rt>原理的</rt></ruby>으로 사람이 <ruby>중심<rt>中心</rt></ruby>이니 이 사람의 <ruby>번식발전<rt>繁殖發展</rt></ruby>과 함께 <ruby>역사<rt>歷史</rt></ruby>는 <ruby>시작<rt>始作</rt></ruby>되었다. 그러나 <ruby>발전<rt>發展</rt></ruby>하는 <ruby>세계<rt>世界</rt></ruby>의 <ruby>역사<rt>歷史</rt></ruby>의 <ruby>궤도<rt>軌道</rt></ruby>는 <ruby>자연계<rt>自然界</rt></ruby>의 <ruby>원리적<rt>原理的</rt></ruby> 움직임 위에 그냥 <ruby>시작<rt>始作</rt></ruby>되었다. 그러므로 <ruby>세계<rt>世界</rt></ruby>는 <ruby>악<rt>惡</rt></ruby>에 <ruby>속<rt>屬</rt></ruby>하는 <ruby>주관본의<rt>主管本意</rt></ruby> 아닌 <ruby>비공식<rt>非公式</rt></ruby> <ruby>주관궤도<rt>主管軌道</rt></ruby>로 <ruby>무목적<rt>無目的</rt></ruby> <ruby>세계<rt>世界</rt></ruby>로 달리는 <ruby>예<rt>例</rt></ruby>로 시작되니 그 <ruby>세계<rt>世界</rt></ruby>의 <ruby>생존<rt>生存</rt></ruby>한 사람은 어찌 <ruby>안락<rt>安樂</rt></ruby>과 <ruby>평안<rt>平安</rt></ruby>이 있으랴? 이렇게 됨바는 사탄의 <ruby>공작<rt>工作</rt></ruby>이라고 <ruby>지금<rt>至今</rt></ruby> 알게 될 것이다.


==== (6) 하나님이 미워하는 정도만큼 이스라엘 백성을 올려놓게 하기 위하여 ====
그런고로 우리를 <ruby>타목적처<rt>他目的處</rt></ruby>로서 끌어온 <ruby>기<rt>基</rt></ruby> <ruby>중심<rt>中心</rt></ruby>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ruby>인생<rt>人生</rt></ruby>은 <ruby>무한<rt>無限</rt></ruby> <ruby>고통<rt>苦痛</rt></ruby>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됨은 <ruby>창조본의<rt>創造本意</rt></ruby> 아니매 하나님은 <ruby>본의<rt>本意</rt></ruby>대로 다시금 찾아 <ruby>창조본의<rt>創造本意</rt></ruby> <ruby>이상체<rt>理想體</rt></ruby>하로 <ruby>회귀<rt>恢歸</rt></ruby>하고자 함이 역사를 <ruby>통<rt>通</rt></ruby>하여 하나님의 <ruby>섭리<rt>攝理</rt></ruby>의 한 <ruby>노정<rt>路程</rt></ruby>이다.


==== (7) 하나님의 뜻에 일관된 행동을 배양하기 위하여 ====
그런고로 사람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ruby>선신<rt>善神</rt></ruby>과 <ruby>악신<rt>惡神</rt></ruby>이 <ruby>대립<rt>對立</rt></ruby>을 <ruby>시작<rt>始作</rt></ruby>한 <ruby>결과<rt>結果</rt></ruby>는 <ruby>역사<rt>歷史</rt></ruby> <ruby>발전사<rt>發展史</rt></ruby>를 <ruby>지배<rt>支配</rt></ruby>하게 되었다. <ruby>즉<rt>卽</rt></ruby> 사탄은 <ruby>원수<rt>怨讐</rt></ruby> <ruby>부모격<rt>父母格</rt></ruby>으로 사람을 <ruby>주관<rt>主管</rt></ruby>하고자 함이고 하나님은 <ruby>근본<rt>根本</rt></ruby> <ruby>자녀<rt>子女</rt></ruby>를 찾고자 함이 <ruby>목적<rt>目的</rt></ruby>이다. 이것을 안 우리는 어찌 아버지 어머니 앞에 <ruby>회개<rt>悔改</rt></ruby>치 않으랴. 이것이 이 <ruby>기독교<rt>基督敎</rt></ruby>의 <ruby>회개<rt>悔改</rt></ruby>의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다.


==== (8) 어떤 난관이라도 하나님은 타개하여 주실 줄 알게하기 위하여 ====
그러므로 <ruby>근본회개<rt>根本悔改</rt></ruby>하지 않을 내(우리) <ruby>존재<rt>存在</rt></ruby>가 <ruby>지금<rt>至今</rt></ruby> <ruby>회개<rt>悔改</rt></ruby>하는 것은 참 <ruby>부모<rt>父母</rt></ruby>를 몰라보고 박대함의 <ruby>심중<rt>心中</rt></ruby>으로 <ruby>통분<rt>痛憤</rt></ruby>한 <ruby>사실<rt>事實</rt></ruby>을 알게하는 <ruby>결합<rt>結合</rt></ruby>의 <ruby>정경<rt>情境</rt></ruby>이다. 이 <ruby>시간<rt>時間</rt></ruby>의 기쁨이야 무엇으로 살수 있을 건가. 그러고 보니 <ruby>근본만사<rt>根本萬事</rt></ruby>는 <ruby>평안<rt>平安</rt></ruby>으로 <ruby>원리<rt>原理</rt></ruby>로 <ruby>시작<rt>始作</rt></ruby>되며 <ruby>양심적<rt>良心的</rt></ruby> <ruby>해방<rt>解放</rt></ruby>의 시작이요, 참 기쁨의 <ruby>시작<rt>始作</rt></ruby>이다. 새 <ruby>복음<rt>福音</rt></ruby> <ruby>중심<rt>中心</rt></ruby>이다. 이같이 세상은 <ruby>악<rt>惡</rt></ruby>이 먼저 <ruby>시작<rt>始作</rt></ruby>하였기에 그 뒤를 이어 <ruby>선완성<rt>善完成</rt></ruby>을 이루고저 함이 <ruby>목적<rt>目的</rt></ruby>하는 하나님의 뜻이요 또 하지 않으면 아니될 <ruby>의무<rt>義務</rt></ruby>이니 <ruby>기필<rt>旣必</rt></ruby>코 <ruby>성사<rt>成事</rt></ruby> <ruby>시<rt>時</rt></ruby>까지 하늘은 <ruby>승리<rt>勝利</rt></ruby>하고야 만다.


==== (9) 하나님을 대립하여 반대하는 자는 누구나 영원한 원수로 알게하기 위하여 ====
그러므로 <ruby>세상<rt>世上</rt></ruby>은 <ruby>지금<rt>至今</rt></ruby> <ruby>악<rt>惡</rt></ruby>이 <ruby>주관<rt>主管</rt></ruby>하는 <ruby>시기<rt>時期</rt></ruby>이니 <ruby>악자승<rt>惡者勝</rt></ruby> <ruby>세계<rt>世界</rt></ruby>에는 <ruby>선자<rt>善者</rt></ruby>들이 많이 밟히고 있다. 세상에는 거짓것이 먼저 왔다가는 것이 <ruby>세상<rt>世上</rt></ruby>이 보여주는 <ruby>지금<rt>至今</rt></ruby> <ruby>현사회<rt>現社會</rt></ruby>의 <ruby>실상<rt>實狀</rt></ruby>이다. 그 후로 <ruby>선<rt>善</rt></ruby>이 <ruby>시작<rt>始作</rt></ruby>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ruby>원리<rt>原理</rt></ruby>로 지음받은 온 <ruby>천주<rt>天宙</rt></ruby>는 이 뜻 <ruby>성사<rt>成事</rt></ruby>에 <ruby>노력<rt>努力</rt></ruby>하고 있는 것을 <ruby>현기독인<rt>現基督人</rt></ruby>이 알지 못하는 것이 <ruby>통분지사<rt>痛憤之事</rt></ruby>이다.


==== (10) 전정의 승리적 요소를 배양하기 위하여 ====
<ruby>악<rt>惡</rt></ruby>이 <ruby>시작<rt>始作</rt></ruby>하였으니 그도 <ruby>원리노정<rt>原理路程</rt></ruby>을 밟아 <ruby>결실<rt>結實</rt></ruby>하여야만 된다. 그런고로 <ruby>악<rt>惡</rt></ruby>의 <ruby>완성시기<rt>完成時期</rt></ruby>가 <ruby>즉<rt>卽</rt></ruby> <ruby>기독교<rt>基督敎</rt></ruby>의 <ruby>말세시기<rt>末世時期</rt></ruby>인 <ruby>재림시<rt>再臨時</rt></ruby>이다. <ruby>세상<rt>世上</rt></ruby>이 절대로 없어지는 바가 아니고 <ruby>세상<rt>世上</rt></ruby>에서 <ruby>지상천국<rt>地上天國</rt></ruby>을 <ruby>완성<rt>完成</rt></ruby>하여만이 <ruby>근본목적<rt>根本目的</rt></ruby>이다.


==== (11) 뜻을 바라 조급하지 않게하여 영원한 순종을 세우고자 하여 ====
그런고로 오시는 <ruby>주<rt>主</rt></ruby>도 <ruby>완성주<rt>完成主</rt></ruby>로 사람 몸을 쓰시고 오신다. 그것은 <ruby>원리<rt>原理</rt></ruby>보아도 알 수 있는 바이다. <ruby>즉<rt>卽</rt></ruby> <ruby>육신완성<rt>肉身完成</rt></ruby>을 못하였기에 <ruby>근본<rt>根本</rt></ruby>을 찾아 맞추는 <ruby>시기<rt>時期</rt></ruby>가 <ruby>말세<rt>末世</rt></ruby>며 <ruby>심판시기<rt>審判時期</rt></ruby>이다. <ruby>즉<rt>卽</rt></ruby> <ruby>근본<rt>根本</rt></ruby> 사람, 아담 해와를 찾아야 되며 <ruby>선<rt>善</rt></ruby>을 찾아 터로 세워야 되는 <ruby>시기<rt>時期</rt></ruby>가 <ruby>말세<rt>末世</rt></ruby>다. 그러니 <ruby>악<rt>惡</rt></ruby>은 <ruby>자기본체<rt>自己本體</rt></ruby>의 <ruby>노정<rt>路程</rt></ruby>으로 <ruby>향<rt>向</rt></ruby>하기 <ruby>시작<rt>始作</rt></ruby>하는 때時가 <ruby>즉<rt>卽</rt></ruby> <ruby>말세<rt>末世</rt></ruby>다. <ruby>이상<rt>以上</rt></ruby>의 <ruby>원리<rt>原理</rt></ruby>를 살펴 볼 적에 하나님은 <ruby>원리<rt>原理</rt></ruby>를 통하여 <ruby>만사<rt>萬事</rt></ruby>를 <ruby>성사<rt>成事</rt></ruby>하고자 함이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이다.


이상과 같은 의의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오래 연대시켜서 하나님의 바라는 조건이 구비할 때를 보기 위하여 바로(사탄)강퍅케 하심이었다. 이리하여 극도의 하나님을 대신한 모세와 사탄 대신한 바로와는 대립전을 전개함이었다. 그리하여서 최후 승리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은 희망과 소망과 행복의 곳 가나안 복지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작은 오늘 신앙생활 출발 노정한 표시적 노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탄까지 <ruby>강제굴복<rt>强制屈服</rt></ruby><ruby>요<rt>要</rt></ruby>하는 것이 아니고 <ruby>자연굴복<rt>自然屈伏</rt></ruby>을 <ruby>요<rt>要</rt></ruby>하며 6<ruby>천년<rt>千年</rt></ruby> <ruby>역사<rt>歷史</rt></ruby>를 나오심은 <ruby>전원리창조세계<rt>全原理創造世界</rt></ruby>를 <ruby>완전<rt>完全</rt></ruby>히 찾고자 함이니 그래야만 <ruby>원리창조세계<rt>原理創造世界</rt></ruby> <ruby>창조<rt>創造</rt></ruby> <ruby>이상체<rt>理想體</rt></ruby>를 <ruby>시작<rt>始作</rt></ruby>할 수 있으니 사탄까지 <ruby>자유행동<rt>自由行動</rt></ruby>케 하심을 잘알아야 한다.
장자를 치심은 하나님과 사탄과의 대상전 전개에 실패하는 종국에는 애급에 있는 장자에 대한 재앙을 내리심이었다. 이것은 무슨 의미냐하면 사탄의 어두움의 피血을 받은 백성대표의 장자들은 더욱이 그의 직접적 먼저 받은 피血의 종자니 하나님이 미워하심의 백성중 먼저 난 자로 무엇이나 치게 되었다. 즉 사탄의 소유물 중심이었다. 이스라엘에게도 장자에는 양의 피血로 대속하게 한바는 이 재앙을 피하게 하였음이라.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는 뱀피血을 받았던 백성을 치는 자체로 오는 동시에 예수편에 속하는 자도 대신피血로 즉 예수의 생명을 받아 살 수 있는 언약의 표시였다.
모세 앞에 굴복한 바로는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게 됨에 애급에 있는 재물을 취하여 가지고 오게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중심하고 출발함과 동시에 하나님과 직접생활하는 한 노중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아주 내보내게 된 것을  안 바로는 분하여 병거를 몰아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애급 병거가 오는 것을 소동하는지라.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히고 뒤에는 추병거가 있으니 할 수 없이 죽는구나하고 전민족을 소동하는지라. 그때 모세는 여호와께 알리니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손에 든 지팡이杖로 홍해를 치라 하심에 치打신지라. 홍해가 갈라져 육지와 같이 건너는지라. 이것은 우리 과거신앙노정에 있어 사탄 주관하에서 예수 품으로 들어올 적에 사탄은 바로와 같이 우리 뒤를 추병하는 것을 표징하는 바라. 예수를 의하고 나아가면 즉 지팡이杖로치면 홍해를 가른 것과 같이 우리로 예수는 지팡이杖의 대신으로 우리의 홍해같은 과거 세상에 고해를 갈라서 홍해를 건너는 것과 한가지로 살 수 있다는 표시였던 사실이 있는 바이다.
<ruby>성경역사<rt>聖經歷史</rt></ruby>를 <ruby>통<rt>通</rt></ruby>하여서 사탄이 하나님께 대하여 말한 것이든가 참소함이든가 예수의 시험이라든가 <ruby>등등<rt>等等</rt></ruby>을 보아도 그 <ruby>자유허락<rt>自由許諾</rt></ruby> <ruby>이상무대<rt>理想舞臺</rt></ruby>를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로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바로를 강퍅하게 하심도 <ruby>완전굴복<rt>完全屈服</rt></ruby>과 <ruby>자유굴복<rt>自由屈服</rt></ruby>을 <ruby>요<rt>要</rt></ruby>하신 까닭이다.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을 <ruby>결과적<rt>結果的</rt></ruby> <ruby>행동<rt>行動</rt></ruby> <ruby>여하<rt>如何</rt></ruby>를 갖고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신 <ruby>사실<rt>事實</rt></ruby>은 <ruby>인간<rt>人間</rt></ruby><ruby>근본<rt>根本</rt></ruby> <ruby>자유행동<rt>自由行動</rt></ruby> <ruby>결과<rt>結果</rt></ruby>를 <ruby>주관<rt>主管</rt></ruby>함을 알려주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에 메추리와 만나와 생수를 주어서 고통에서 구원하심은 예수 오셔서 우리 생명소생요소를 무조건으로 줄 것을 보여 줌이었다. 신광야로부터 호렙산 반석 샘물生水까지의 노정은 우리에게 무조건으로 만나와 메추리와 샘물生水까지의 노정을 우리에게 무조건으로 만나와 메추리와 샘물生水를 줌이었다. 생명요소를 받고 나아가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는 아말렉 족속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때 모세는 아말렉을 대하여서 여호수아에게 싸우라고 명하시고 산정에 올라가 하나님의 지팡이杖을 들고 서니라. 모세가 손手에 지팡이杖을 들면 여호수아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패하는지라. 그래서 아론과 훌은 돌石을 취하여 모세를 앉히고 아론과 훌은 우좌손을 종일들어 아말렉을 천하에서 제거하려니 이는 시사를 기념하기 위하여서 책에 기록하여 여호수아의 귀耳에 읽었더라. 모세가 제단을 쌓築고 그이름其名을 여호와 닛시(아의 기)라 하야 가로되 여호와의 보좌에 손手을 놓게置한 것이 있으有니 여호아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戰리라 한지라. 이 사실은 무슨 의미인가하니 무조건보호받은 이스라엘 민족에 승리 자격자로 세우고자하니 아말렉의 여전을 보게함이었다.
이 사실은 즉 예수와서 우리 인간에게 무조건으로 사랑을 세어주시라. 예수의 생명받아 산 자에게는 원수 사탄의 한 대립을 주어 그 자체가 다시는 원수와 합하지 않게 하고자 함이 목적이었다. 그런고로 언제나 신앙노정이 평탄한바가 아니고 혼자 살수 있는 보호 시기가 있으면 원수 대하여 승리하여만이 될 의무가 있는 바이다.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는 모세의 손을 들어주는 입장과 같은 조건을 보장하여만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원인으로 되어있다. 즉 모세는 손手을 든 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 하나님이 품으시는 표시요 아론과 훌은 품길수 있도록 협조함이요, 여호수아는 신앙자 중심 대표자를 표시하면서 우리 자체들을 표시함이었다. 이와 같은 뜻이 성립되어만 원수 아말렉을 문제없이
승리조건이 성립하는 바를 표시함이었다. 그런고로 이 모든 것을 후일 제2 차 책임분담 사명감당자로 오는 예수와 우리가 합하여만 승리한다는 조건들의 요소를 보여줌이었다. 모세와 지팡이杖은 하나님의 대신을 표시함이고 돌石은 하나님의 보좌를 표시하심이다. 아론과 훌은 예수와 해와를 표시함이고 여호수아는 믿는 신앙자를 표시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후일에 예수를 모시侍고 성신을 우좌에 두고 하나님을 받드는 자라야만 승리한다는 표시적 의의가 있음이다. 그리고 사탄은 즉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戰리라 하심은 돌石을 쌓아 모세를 앉히신 연고니라 이것은 아론과 훌이 한것이지만 하늘과 땅을 나눠 세워야할 입장에서 어렵다고 자기자의행사가 사탄이 하늘 성사시까지 대적할 수 있는 길을 지어주었으니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심이라 하시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사탄 대하여 서 있음으로 뜻에 속한 입장을 확고히 잡지못하면 끝까지 싸움戰을 하여서라도 승리하여야 할 것을 예고함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는 아말렉과 같은 원수 대하여 싸워 승리하여야할 책임이 있는 바이다. 성도를 사탄과 함께 싸우시게 하는 이유는 사람까지 전부가 사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자되어야만이 근본이니 이런 싸움이 있게하는 바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직접지도를 받으면서 낮이면 구름기둥 밤이면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아 시내 광야에 이르至심이었다. 즉 이것은 직접품에 보호하여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내 광야산전에 머무른留지라. 그때 모세는 산상에서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하며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선히 듣고 나의 규례를 지키면 축복받아 세계에 없는 제사장국과 성한 백성이 된다는 말씀을 선포하신지라. 말씀은 예수 오셔서 대제사장이 되어 전세계를 통치할 후일의 약속을 세우심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하는 바의 이상목적이다. 이와 같이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더욱 하나님에게 합할수록 사탄은 이스라엘 뒤를 따르면서 광야까지 따라나와 불신 불순종의 자체를 대하려고 시도는 여전히 계속하였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백성 뒤에 사탄은 뒤를 따르게 되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금 불신 불순종이면 사망에 처하는 것을 절절히 뼈에 새기지 못하였다. 때마침 시내 산상에 70 장로를 데리고 모세는 40일40야를 지내면서 십계명 말씀 석비를 받게 된지라. 그때에 6일간은 여호와의 영광의 구름雲이 시내 산을 덮더니 7일에도 여호와 구름 가운데雲中에서 모세에 나타남顯에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이 이스라엘의 목전에 화염과같이 비치심에 모세는 그 구름속雲裏으로 들어入가 40일40밤夜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ruby>전우주이상<rt>全宇宙理想</rt></ruby>과 <ruby>천주이상<rt>天宙理想</rt></ruby>을 <ruby>완성<rt>完成</rt></ruby>하고자 하여서 <ruby>지금<rt>至今</rt></ruby>까지 <ruby>고심<rt>苦心</rt></ruby>하시는 <ruby>자체<rt>自體</rt></ruby>를 우리는 어떻게 <ruby>대<rt>對</rt></ruby>하여야 하는가? 하나님의 <ruby>심정<rt>心情</rt></ruby>을 아는 우리들에 있어서는 <ruby>극심<rt>極心</rt></ruby>을 다하야 <ruby>근본<rt>根本</rt></ruby> <ruby>창조이상<rt>創造理想</rt></ruby>을 <ruby>완성<rt>完成</rt></ruby>하여야 할 <ruby>책임<rt>責任</rt></ruby>을 <ruby>각자<rt>各自</rt></ruby>가 다하여야 할 것이다.
이 기간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대한 기간인 동시에 백성에게 가장 지루한 기간이었다. 이 십계명 받음과 동시에 성전건설 시작을 보게된바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실체의 사실이었다. 성전구조를 살펴보면 지성소가 있고 성소가 있음이었다.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고 그 위에 두 그룹이 있고 그 사이間에 속죄소가 있고 또 그 앞에 성소가 있는지라 성소와 지성소는 구별되어 있게 되었다. 즉 성전은 예수님의 한몸의 건설의 터를 표시함이었다. 성전으로되는 예수속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표시함이었다. 그런고로 지성소는 하늘 세계를 표시함이고 성소는 지상세계를 상징시키는 뜻이 있는 것이었다. 예수 한 자체에게는 하늘과 땅 완성이 한 존재로 있어야 한다는 표시를 말함이었다. 지성소를 살펴보면 법궤가 있고 위에는 두그룹이 있고 그 사이其間에 속죄소가 있음은 무슨뜻이냐 하면 본래인간이 타락함에 말씀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말言의 이상실체인 하나님 몸인 아담과 해와를 잃어버림이었다.
아담 해와 타락한 후 그룹들을 두어서 하나님 세계와 상격(?)하였든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예수 오시면 하늘 생명수를 찾아 생명과를 받을 수 있으니 하나님이 그룹 사이間에 나타顯나시어 직접법궤를 덮으심을 말하심이니 하나님이 그룹의 간격을 통하게하는 것을 표시하여 이와같은 구조를 보게한바다. 속죄소에 나타나심은 속죄한곳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표시함이다. 이것은 즉 자신의 한몸인 예수와 성신을 통하여 죄를 속하신 후에 각사람의 마음까지 하나님이 계시고저 함이 목적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는 이 기본터를 닦는 존재로 올 것을 말함이고 그 성소같은 그에 접하여 안기게 되면 그도 역시 하나님을 모실수 있는 이상을 재건설코저함이 근본목적이었다. 그때 예수 오신 후부터도 지성소와 성소 구분이 없게 된 것은 성전 쓸데 없는 바는 예수의 한몸을 상징하였든 기본자체가 표현하니 성전은 무필요로되니 구약시대의 이상은


완성함을 결론할수 있음을 표시함이었다. 그때 예수는 자기가 성전이라는 것을 명백하게한 의의는 여기에 있음有이라. 예수 오셔서 그룹으로 막었던 하늘 세계와 통로를 지었고 생명과의 이상목적 달성의 시작은 전우주를 통하여 성사코자하는 중대목적의의를 두고 성전건설을 하게하였다 하심은 누구나 다 잘 알아야 한다.
=== <ruby>제<rt>第</rt></ruby> 2 <ruby>장<rt>章</rt></ruby> 하나님은 나를 알므로 알 있음 ===
그런고로 아말렉을 승리한 후에 이 성전건설시작이라 하심은 예수를 믿는 신자들은 원수를 승리할 있는 자격자가 되면 우리 신자도 성전 건설할수 있다는 의의를 고함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전인류에게 대하여 고대하는 최고목적이니 이 얼마나 귀한 소망의 존재였을가. 즉 누구나 하나님을 직접 대할수 있는 한몸 될수 있는 기본원리를 세우고자함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은 인간과 부자지간인 근본을 찾는 뜻의 성립이 시작이다. 이와 같이 귀중한 성전의 시작을 보려고 모세는 산상에 40일 40밤夜을 지내는 중에 백성들은 아론을 충동시켜서 금송아지 우상을 지어 섬기는지라. 여기에 벌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탄 공작의 기초를 지어준 행동으로 나아가 그 우상을 자기들의 신으로 섬기는 것을 목견한 모세는 대노하여 손手에 든 두二석판을 던져 깬破지라. 그런고로 여기에 모세는 비법적 행동을 시작하였다. 석판들은 말씀言을 기록한 것이었으나 이것은 아담 해와의 실체들을 표시함이라. 즉 석비를 깨는 행동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대하고 있는 사탄 대하여서는 기뻐하는 행동이다. 즉 결과에 있어서는 사탄의 시킴 받은 행동에 지나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러니 여기가 하나님께 있어 크나큰 중대지사가 표현을 보는 사실이다. 즉 다시금 오실 존재에 대한 한 파괴를 의미하는 바를 표시하는 행동의 결과였다.
이 두二석판이 무엇이냐하면 자기의 몸을 표시한바요 전이스라엘 보다도 귀한 자체인것이었기에 여호와 대노하여 전백성과 아론 이하 전부를 도말하시고 모세로 하여금 이보다 강하고 담대한 나라로 되게 하시겠다고 하심에 모세는 다시금 40일 40밤夜를 금식하여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는 것을 돌리켜서 속함을 받고 석판 둘二을 만들게한 석판에다 다시금 여호와로부터 말씀言을 기록받으니 전과 같이 모세에게 광채가 발하는지라.
그런고로 다시금 뜻 계승할바를 알게함이었다. 그러나 사탄은 이스라엘 민족뒤를 다시금 이와같은 원인을 통하여 침입의 길을 엿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반대하여 애급에서 나온 것을


한탄하여 먹을것이 없음으로 애급에서 나온 것을 말하니 모세는 회막간에 도착하여 엎드리伏니 여호와의 영광이 그 위上에 나타나顯 가로되 지팡이杖로 아론과 더불어 회막을 묶고 그 목전에서 반석을 쳐서 물水를 내어서 회중과 목축에게 먹이게 하라하메 여호와의 명대로 모세는 그其 목전에서 지팡이杖를 들며 말하되 패역한 백성들아 내말我言을 들으라. 우리가 물은 이此 반석에서 물水을 내게하여 너희가 마시飮게 하려고 한다하면서 모세는 지팡이杖로 반석을 2차나 쳐서 물水이 더 많이 나오는지라. 이것이 가데스에서 한것이었는데 그 때에 여호와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謂시기를 너희가 나我를 믿信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나我를 거룩聖하게하지 아니함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我가 너희에게 베푸신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를 향하여 다투爭매 여호와 자기의 거룩함을 나타내顯심으로 이 물此水을 무리바라 하심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ruby>근본<rt>根本</rt></ruby>에 <ruby>대<rt>對</rt></ruby>하여 까지 알아보려고 하고 있다. <ruby>과연<rt>果然</rt></ruby> <ruby>기<rt>其</rt></ruby> <ruby>자체<rt>自體</rt></ruby>가 <ruby>명백<rt>明白</rt></ruby>하여서 <ruby>천주<rt>天宙</rt></ruby>의 <ruby>전부<rt>全部</rt></ruby>를 <ruby>원만<rt>圓滿</rt></ruby>하게 <ruby>이해<rt>理解</rt></ruby>하고자 함에서 <ruby>시작<rt>始作</rt></ruby>이라고는 할 수 있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은 <ruby>자명<rt>自明</rt></ruby>하다. 사람은 하나님에서 <ruby>시작<rt>始作</rt></ruby>하였으며 <ruby>만물<rt>萬物</rt></ruby>도 <ruby>역시<rt>亦是</rt></ruby> 하나님부터라고 <ruby>시정<rt>是定</rt></ruby>할 있지만 <ruby>근본<rt>根本</rt></ruby>되는 하나님은 <ruby>여하<rt>如何</rt></ruby>하게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들지 못하는 행동이 즉 므리바 물水로 인함이었다. 이로 인하여 모세와 아론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근본의의였는가 하면 반석한번 친打것은 허락된바지만 두 번친打것은 허락하지 않은 일인 동시에 또 허락할수 없는 범죄였다. 반석한번 치打라는 것을 허락하는 바는 너희가 순종하고 믿信지 못함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몸되는 실체에 사탄으로 침해받아 하나님의 몸을 깨뜨리破는 행동의 시작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반석을 말함은 무엇을 말함인가 하면 즉 하나님의 몸의 표시다. 고린도전서 10장4절에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 하심을 보아도 반석은 하나님의 몸인 동시에 그리스도를 말함이었다. 그런데 한번 친打 바를 용서한 바는 아담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깨뜨린破 것을 표증하는 바였기에 하나님 자신의 대신 몸의 표시인 반석을 치打라고 하심이었는데 의외에 두 번을 친打 것은 한번은 의외의 것의 행동인 동시에 사탄이 다시금 하나님의 몸을 치는 표시적 행동을 함이었다. 한번더 치게打한 것은 모세가 치셨지만 사탄이 친打것과 같은 행동의 결과로 되어졌다.
이 표시적 실사의 실패는 다시금 석판과 함께 깨뜨림破을 받은 행동과 같은 바이었다. 석판 둘은 다시 찾을 수 있는 예수와 해와의 표시이므로 다시금 찾아서 세울 있으나 반석은 석판의 뿌리根가 되는 하나님의 근본되는 바를 표시하는 바의 몸이었다. 그런고로 실체 몸과 근본 몸을 범하는 범행이야 사탄에게 있어서는 다시금 승리할 수 있는 행동의 기초를 불순과 불신한 결과로 잡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하나님 앞에 범한 모세와 이스라엘의 죄는 사탄의 터가 되는 시작인 동시에 다시 보내시어 제2 차 책임분담 사명자로 오는 예수까지에 대한 미완성의 한 표시적 근본실체를


범하는 행동이 되게 되었다.
<ruby>시작<rt>始作</rt></ruby>하였으며 <ruby><rt>前</rt></ruby>에는 무엇이 있었는가?라고 묻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하나님의 <ruby>존재<rt>存在</rt></ruby>의 <ruby>근본<rt>根本</rt></ruby>보다도 실제문제는 <ruby>제일<rt>第一</rt></ruby> 가까운데 있는 <ruby>자기<rt>自己</rt></ruby>가 <ruby>문제<rt>問題</rt></ruby>이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과 불신은 예수까지 다시금 칠打수 있다는 근본원리가 시작됨이라. 이 무서운 행동이라 아니할 수 있으랴. 이 행동은 즉 하나님만 앞에서 한 바가 아니고 사탄 앞에서 하였기에 이와같은 사탄의 기쁨의 한 승리권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탄은 더욱 이스라엘 백성 대하여 침입의 기대를 잡고 침입할 수 있는 행동이 시작됨으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뱀蛇을 놓遺아 물리게 하게 한 것은 다시금 타락시킨 본체의 침입한다는 것을 표시하여 준 바이었다.
이 뱀蛇에 물린바를 무사하게 되려면 불뱀火蛇을 지은 것이 기등상에 있는 것을 봐야만 나음을 받으리라고 한 것을 표시하여 준바였다. 그런고로 모세가 반석 두 번 친 것이 즉 하늘사적 예수의 자체가 침범당하여 죽死게 하는 행동의 기인을 허할수 있는 원인이 됨이러라 하는 표시였다. 이것은 즉 불순과 불신의 결과의 선물이니 이것을 방비하려면 무엇보다도 실체인 예수 앞에서 순종과 믿信는 것 외에 요구되는 근본이 없게 되었다. 그런고로 불순종 자손들은 뱀 사탄한테 편한바되어 광야에서 전멸하게 한지라. 그런고로 가나안 땅은 믿음信과 순종한 자만이 기업받을 곳이라는 것을 표시함은 우리 이상국가로 불순종자와 불신자와 공포자는 못가는 곳이라는 것을 상징함이라.
젖乳과 꿀이 흐른다고 하는 바는 가나안 복지는 우리 본이상 하늘 나라라는 곳을 표시하여 준바이다. 모세가 죽死는 것은 불순으로 인한 실수로다. 이와 같이 예수도 그其 결과를 보리라 한바를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기업받게 될 때에 가나안 민족을 물리치는 역사를 시작하여서만 기업지를 찾게됨이다. 모세가 실수로 인하여 여호수아가 뜻을 세움이었다. 이것은 반석 두 번친 연고니라. 여호수아는 예수의 한 표시적 존재도 되면서 모세의 뜻 성사자도 된다. 하나님의 뜻 성사적으로 보면 모세부터 예수까지 임에 여호수아는 예수로 상징한바고 모세한 뜻 중심하고보면 제2 모세 뜻 성사자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수 오셔서 승리하여야할 기초인 하나님적 책임분담노정이니 예수 세상에 와서도 즉 하늘나라 건설중에서 원수와 싸워 기업작정이 남어 있음을 표시함이었다. 사사들을 세워서 역사하여 기업을 완전성사할 수 있도록 협조하심이었다. 사사후에 왕을 세우심 왕으로 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에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수 오시기 전에 벌써 예수 오시면 직접왕으로 설수 있는 기초공작이 있다함을 예고함이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한 후에 사울왕을 세우심은 누구를 표시함였나하면 제1차 아담격자의 왕위격을
표시함으로 실패도 그 원인을 표시한바다. 다윗 왕을 세워 하나님의 권세를 드러내고 그 아들子 솔로몬은 영광의 왕으로 성전 완성왕이라는 것을 표시한바는 예수 오셔서 뜻 성사하여 권세로서 영광으로서 본뜻 성전완성이상이 전개될 것을 표징한바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는 이 목적을 완성하여야 할 사명적 과업을 받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믿지 않고 순종치 아니함으로 예수 자신의 죽死게 함을 보여 하늘적으로는 영광이요 땅적으로는 권세로 성사할 전근본이상을 미성사하고 갔기에 다시금 오시겠다고 하심이었다.
그런고로 이와같은 하나님적 제1차 책임분담 승리노정에서 사탄한테 침범을 받았기에 행동의 침범은 예수로 하여금 제2차 성사책임사명 분담을 미성사케하여 다시금 실체성사로서 오지 않으면 안될 중대과업인 영광왕으로 나타날 수 있는 터를 예수는 권세왕격으로 사탄 대하여 승리하여 전인류를 근본자녀대로 백성대로 복귀하여야 할 책임이 남아 있기에 재림하신다는 근본목적이 있음이었다. 재림이라는 것은 하늘 슬픔의 한 사실이고 사탄이 기뻐하는 행동의 발로의 결과이었다.
그리하여 예수오셔서 영적으로 이 무대를 세계무대로서 확대하여 영으로 전인류를 찾아서 근본터까지 즉 타락 사람 부분까지 영적으로 끌어 올려야할 책임적 사명을 성신과 합하여 성사하여 다시 몸으로 성사의 터를 세우심이었다. 이런고로 영먼저 성사하고 육신성사코저하여 남아지는 바가 목적이다. 그런고로 예수는 육신몸을 쓰고 재림하여야 된다는 바를 알아야 한다. 사탄 대하여 권세로 찾아 영광을 누려야만 근본목적이 완성하는 바이다. 이것을 전세계적으로 한 주관하에 성사하려고 하는 바가 하나님의 뜻이며 또 근본 창조이상이었다.
그런고로 세계에서 예수를 중심한 국가들이 권세로 사탄 대하여 승리하게 되면 영광왕 재림주가 나타남이 멀지 않음을 표시한다. 예수가 사탄 대하여  전세계적 대승리의 한 분수령 전쟁이 즉 심판 시기이다. 그其 후 재림주는 사람을 갖고 영광왕 격으로 나타난다. 그런고로 예수 와서 미성사 부분을 완전히 달성하여야만 예수의 요구와 목적이 완성할 것이다. 이 구약에 결과인 3대왕 즉 사울왕과 다윗왕, 솔로몬왕들은 전부 하나님의 섭리적 전부를 표시한바의 왕들이다. 사울왕은 타락케 하여 하나님 반하는 아담의 표시가 되고, 다윗왕은 예수를 표시함이 되고 솔로몬은 재림주를 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직접적으로 책임분담의 한 노정은 제1단계를 보게 되었다. 그런고로 최고목적인 하나님이 재림할 수 있는 성전조성한 근본완성의의는 한 성사를 보았으나 전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되는 것이 지금
이후의 한 사람 대한 요구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성전에서 요구하는 즉 하나님이 요구하는 전규례가 이스라엘 전백성 생명의 기본이면서 전재산의 기본이며 국가성사의 기본이며 이상완성의 기본이었다. 이것은 즉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가 성전을 높이면서 뜻 성사를 기초잡아야 할 중대의무가 남아 있음이었다.
여기에 성전성사하여서 예수와서 한 기대를 성사할 수 있다는 표시적 성사는 보았으나 백성으로 하여금 성전 뜻 즉 하나님의 말씀言이 전수행의 시작이 완성부터 예수와서 뜻 성사할수 있는 성전될수 있는 제2사명적 준비의 터를 각자가 닦는 것이 구약역사가 바라는 소망이었는데 전 백성은 어려우나 너무나 하나님과 합함에 계속하여 나아갔어야 할 의무를 분담하시었다.
그리하여야만 예수 와서 전하는 바의 복음에 순응함으로 예수의 몸될 수 있는 성전에서부터 우리는 한 분성전 건설이상을 조성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承 수 있는 터를 성사하여야 할 사명단계가 즉, 솔로몬 왕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짊어진 근 중대목적이었다. 그런 반면 사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묘한 수단을 하여서라도 하나님이 직접 취하여 나오는 그 뜻 성사의 길을 분열하고자 하여서 여러 모양으로 불순과 불신의 씨를 찾아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침입의 마수를 뻗치려는 시도에 강경히 대상하여서 하나님 편에 더 깊이 서서 나아가야 할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왕으로부터 백성은 음란의 신의 근본인 원수를 섬기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백성을 또 쳐打서 각심케 하여 오면서 가진 수단을 다하여서 이 백성을 보호하여 왔는바였다.
그러나 그 심정을 알고 안타까하는 자는 점점 그 뿌리조차 보기 어렵難게 성전을 더럽힌 행동이 몇번이었든고 하나님은 성전을 세워서 뜻 성사기초의 표시는 완성한 목적기본을 잡아서 약속은 시작하였으니 그만 둘 수 없는 책임감 그 외 사탄은 기세당당하여 하늘뜻을 파괴하는 그것을 볼적마다 공드렸던 이스라엘 백성을 파기할 수 없는 사실이다. 파기하면 전부가 사망의 괴로움苦에 삼켜질 것이며 하나님 역시 불안할 근본의의를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 아무리하여도 그 뜻을 성사하여야 할 바가 하나님의 과업이니 선지들을 세워서 그 뜻을 백성들이 연화할 수 있도록 성전 뜻 유지를 계속하여 왔든바이다. 그런고로 그 뜻 근본목적은 예수 한 존재가 중심이었다.
그 다음은 예수께 합하여 한몸되어 제2차 예수 존재와 같은 번식이상목적시작의 전부가 이스라엘 백성행동 여하로 기반을 잡을 수 있는 바이니 얼마나 아버지 뜻에 안타까운 심정이랴.
그런고로 성전지키면서 하늘 뜻을 받들 수 있는 주위공작을 계속하면서 기본되는 자체인 메시아를 보내여서 뜻 성사할 최고목적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고하여서 그 뜻을 받들 수 있는 그 노정을 지켜나가게끔 하여서 선지자를 통하여서 메시아 보내실 것을 예언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자극하시었다. 그러나 그 뜻을 바라면서 십수백년 동안을 계속하면서 권고하여 왔든 바이었다. 그러나 그 뜻을 이스라엘 백성이 적극협조못하여서 이와 같이 뜻 성사의 시일을 연장 시켜왔든바이었다.
메시아 약속을 받고 바라는 백성은 조급하게 바랐으나 하나님의 뜻 중심하고 실천에 대하여서는 망각하고 자기의 요구들만 바라는 그 자체는 타락의 피血를 받은 패역의 백성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면서 메시아 오기 전에 대한 기간도 알려주어 그의 바라는 희망성을 높여주어왔다. 메시아 오기 전에 먼저 그의 전목적을 받들 수 있는 준비공작사명자로 오는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약속하여 그 시기적 한도를 보여주었든 바이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백성은 전부가 메시아 강림이 전 바라든 소망으로 그를 생활내로서 뜻을 찾아 나오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중심하고 메시아 소망이 한 목적으로 바라오면서 희망을 높이하여 자연적으로 자기들의 준비를 계속하여왔든 바였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합하여서 기초공작과 함께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주어 그들의 소망을 성사하여주는 동시에 자기의 목적실행의 한 기쁨과 기대였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메시아 보내주면 전 이스라엘 백성은 생명대신 귀하게 알면서 그의 전 주위에 대한 단속을 지어 성전이상을 실현하고자 함이었는데 그 뜻을 아는 자 몇명이였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한 소망을 갖고 제1차 하나님적 책임시기는 끝 맞추어 제2차 책임사명분담의 행로를 잡아주고 섭리계속하여서 자기몸으로 지었든 아담 해와의 사명적 분담성사노정으로 옮기기 위하여 오신바가 즉 예수였다.
예수는 제2 아담이다. 성경에는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보아도 로마서 5장 14절을 보아도 예수는 제2아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 조상 아담 해와가 타락시켰으니 원리대로 자기들의 범한 책임사명을 다 찾아 복귀하여야만 근본뜻을 성사할 수 있는 창조이상이 됨이었다.


== 제3 장 제2차 하늘 뜻 성사책임사명자로 오신 예수의 책임분담 섭리기간에 대한 근본의의 ==
<ruby>현실<rt>現實</rt></ruby> <ruby>자기<rt>自己</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의 <ruby>근본<rt>根本</rt></ruby>을 안 <ruby>후<rt>後</rt></ruby>에야 다음 <ruby>문제<rt>問題</rt></ruby> 하나님으로 옮겨져야 할 <ruby>사실<rt>事實</rt></ruby>인데 <ruby>자기<rt>自己</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의 <ruby>근본<rt>根本</rt></ruby>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ruby>존재<rt>存在</rt></ruby>의 <ruby>여하<rt>如何</rt></ruby>를 말한댓자 <ruby>기<rt>其</rt></ruby> <ruby>자체<rt>自體</rt></ruby>는 <ruby>예<rt>例</rt></ruby>를 들면 <ruby>공식<rt>公式</rt></ruby>의 <ruby>근본단위<rt>根本單位</rt></ruby>로 될 <ruby>자체<rt>自體</rt></ruby>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 제1 절 지상섭리 노정에 대한 근본의의 ===
그러면 <ruby>단위수<rt>單位數</rt></ruby>로 있는 <ruby>자체<rt>自體</rt></ruby>의 <ruby>문제<rt>問題</rt></ruby>를 <ruby>확정<rt>確定</rt></ruby>하여야만이 <ruby>기<rt>其</rt></ruby> <ruby>공식<rt>公式</rt></ruby>의 <ruby>제일보<rt>第一步</rt></ruby> <ruby>응용<rt>應用</rt></ruby>의 <ruby>시작<rt>始作</rt></ruby>을 <ruby>계속<rt>繼續</rt></ruby>하여 <ruby>광대<rt>廣大</rt></ruby>한 <ruby>기본공식<rt>基本公式</rt></ruby>과 <ruby>연결<rt>連結</rt></ruby>도 지을 수 있으면서 <ruby>기<rt>其</rt></ruby> <ruby>자체<rt>自體</rt></ruby>의 <ruby>공식<rt>公式</rt></ruby>도 <ruby>물론<rt>勿論</rt></ruby> <ruby>명백<rt>明白</rt></ruby>하여지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먼저 한 <ruby>단위체<rt>單位體</rt></ruby>의 <ruby>공식<rt>公式</rt></ruby> <ruby>근본<rt>根本</rt></ruby>과 같은 <ruby>입장<rt>立場</rt></ruby>에 서 있는 <ruby>자아<rt>自我</rt></ruby>의 한 <ruby>존재<rt>存在</rt></ruby>만 <ruby>확정<rt>確定</rt></ruby>하면 <ruby>기타<rt>其他</rt></ruby>의 <ruby>존재결정<rt>存在決定</rt></ruby>은 <ruby>여실<rt>如實</rt></ruby>한 <ruby>결과<rt>結果</rt></ruby>로서도 <ruby>추측<rt>推測</rt></ruby>하여 그로 미쳐지는 <ruby>근본자체<rt>根本自體</rt></ruby>를 <ruby>파악<rt>把握</rt></ruby>할 수 있다. 그런고로 사람들은 <ruby>자기<rt>自己</rt></ruby>들이 <ruby>유<rt>有</rt></ruby>나 <ruby>무<rt>無</rt></ruby>나 하는 것을 먼저 <ruby>의심<rt>疑心</rt></ruby>하여야 할 <ruby>사실<rt>事實</rt></ruby>이 <ruby>근본<rt>根本</rt></ruby>으로 되어야 한다.


구약시대의 전목적 종결은 예수 한분에 기인하며 그의 완성적 사명도 예수 한 존재가 중심이었다. 성전을 세우기 위한 행의의 노정은 구약시대의 한 중심노정이었고 그 노정탈선은 불의라는 사망의 시작이라 한 것은 잘아는 바다.  예수 한 존재의 가치는 즉 전 이스라엘 성전 + 이스라엘 백성보다도 귀한 한 존재였다. 즉 4천년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섭리한 결실의 자체가 예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 전천주목적은 예수로부터 다시금 찾는 가치의 존재니 이 모든 것보다도 예수는 하나님 앞에 귀한 존재였다. 예수 완전히 살아서 천주살고 하나님 완전히 살며 예수뜻 성사하여야 하나님 뜻 성사라는 한 중심점의 존재가 지상 예수였다.
그리하면 <ruby>자기<rt>自己</rt></ruby>가 있다면 무엇 보아서 알 있는가. <ruby>양심<rt>良心</rt></ruby>보아서인가 그렇지 않으면 <ruby>감각<rt>感覺</rt></ruby>을 보아서인가 그렇지 않으면 <ruby>체형<rt>體型</rt></ruby>을 보아서인가 하는 데에서 <ruby>문제<rt>問題</rt></ruby>는 <ruby>시작<rt>始作</rt></ruby>되는데 <ruby>양심<rt>良心</rt></ruby>과 <ruby>감각<rt>感覺</rt></ruby>과 <ruby>체형<rt>體型</rt></ruby><ruby>유<rt>有</rt></ruby>라고 하면 무엇을 <ruby>표준<rt>標準</rt></ruby>잡고 말하는가를 다시금 <ruby>음미<rt>吟味</rt></ruby>하지 않을 없다.
하늘 성사로 예수 하나로부터 시작이라는 원인은 더 말하지 않아도 잘 알줄 안다. 이 천주의 중심점 예수의 한 존재가 지상에 오는 바는 땅地 아니면 뜻 성사 못하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의 중심지가 즉 지상이었다. 지상에서 사람 조상 아담 해와는 타락하였으니 땅 중심하고 복귀하여 그냥 하나님의 만세 전 이상 즉 창조이상을 원리대로 성사할 있는 조건성사를 보는 바이었다. 그런고로 땅 없으면 하늘은 미완성하여만 하늘 뜻 원만성사하고자 함이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의 뜻이니 모두가 동일한 기점상을 분리할 수 없는 이유는 한몸된다는 기본인과로 되어 있기에 이와같은 귀한 한 존재가 예수인데 예수를 보내기 전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마 하심은 예수한테 사탄으로부터 피해를 받지 않게하기 위하여서 엘리야를 보내어 이 근본자체 오신 다음에 전이스라엘 백성의 대환영 받게하여 전 백성은 예수한분 만으로 무한한 영광이며 그들의 자랑으로 믿信고 모셔侍야할 사명적 책임들을 다할 있는 구비조건을 지어 놓기위하여서 엘리야를 보내주마 하신바가 그 목적이 있는 바이었다.
이스라엘 백성 대하여서는 직접인도하여 뜻 시봉으로 배양하였지만 세계적으로는 하나님은 전인류에게 모실수 있는 공작도 역사적 성인들을 통하여서 동서양에 섭리를 하여 합성화 하려고 하는


뜻 성사 예비 공작도 시작케 하심이다. 그其 사명적 대표 인물들이 즉 공자며 석가였다. 또 철인 소크라테스 등등의 양심적 도를 중심한 선을 표준하고 교시케함도 그 근본의의였음을 알아야 한다. 어느 종교든지 근본을 선한 신을 표준케 함은 즉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목적을 근본하고 있다는 바를 명시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 근본 뜻 성사하면 그 자체인 가르침들도 근본상에서 총합을 보여야 되는바도 원리로 되었다. 그런고로 예수 한 존재의 이상중에 뜻 중심이니 전 하나님의 이상을 완성할 근본체이니 예수의 뜻 성사시는 전 천주는 한 중심에서 기동되어야 한다. 종교도 경제도 과학도 합하여 한 기본상에 기동될 바이다.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시어 찾아 맞추고자 함의 근본의의가 있다. 이와같은 크나큰 사명적 중심 존재의 강생과 함께 온 천주는 큰 복음의 소식을 보았다.
사람이 <ruby>유<rt>有</rt></ruby>라고 하는 것과 <ruby>무<rt>無</rt></ruby>라고 하는 것은 <ruby>최초<rt>最初</rt></ruby>의 <ruby>분기점<rt>分岐點</rt></ruby>을 무엇으로 잡고 있는가가 <ruby>생각<rt>生覺</rt></ruby>할 <ruby>중요문제<rt>重要問題</rt></ruby>이다. <ruby>유<rt>有</rt></ruby>하다면 <ruby>상대<rt>相對</rt></ruby>인 <ruby>무<rt>無</rt></ruby>하다는 것을 <ruby>연상<rt>聯想</rt></ruby>시키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인데 사람들이 <ruby>유<rt>有</rt></ruby>하다는 그 <ruby>자체<rt>自體</rt></ruby>는 무엇을 <ruby>표준<rt>標準</rt></ruby>하고 <ruby>시작<rt>始作</rt></ruby>케 되며 그 <ruby>시작<rt>始作</rt></ruby>은 어느 <ruby>한도<rt>限度</rt></ruby>까지 <ruby>확대<rt>擴大</rt></ruby>하고자 하는가. 또 그와 <ruby>반면<rt>反面</rt></ruby>에 <ruby>무<rt>無</rt></ruby>하다는 것도 어느 <ruby>한도<rt>限度</rt></ruby>의 <ruby>무<rt>無</rt></ruby>를 <ruby>규정<rt>規定</rt></ruby>하고자 하는가가 <ruby>문제<rt>問題</rt></ruby>이다. <ruby>무<rt>無</rt></ruby>하다면 <ruby>실체<rt>實體</rt></ruby> <ruby>무<rt>無</rt></ruby>한 <ruby>존재<rt>存在</rt></ruby>는 <ruby>시작점<rt>始作點</rt></ruby>을 잡아 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고로 사람 <ruby>자체<rt>自體</rt></ruby>들이 <ruby>무<rt>無</rt></ruby>하거니 <ruby>유<rt>有</rt></ruby>하거니 하는 것은 어느 <ruby>존재<rt>存在</rt></ruby>를 벌써 <ruby>유<rt>有</rt></ruby>에 <ruby>처<rt>處</rt></ruby>케하든가. <ruby>무<rt>無</rt></ruby>에 <ruby>처<rt>處</rt></ruby>케 하든가의 <ruby>실재<rt>實在</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를 <ruby>규정<rt>規定</rt></ruby>지은 위에서 말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내가 있다고 하는데는 <ruby>무<rt>無</rt></ruby><ruby>실체<rt>實體</rt></ruby>에 <ruby>대<rt>對</rt></ruby>하여서 <ruby>성립<rt>成立</rt></ruby>되는 <ruby>명사<rt>名詞</rt></ruby>이다.
하늘은 물론 예수의 뜻 성사를 바라는 바 그 땅은 예수의 앞에 지도받고자 함이 요구였다. 예수 한분이 모든 생명의 근본이며 해방의 주인공이었다. 그것은 즉 사탄 세계인 비공식세계에서 원리세계 예수의 세계에로 건설목적의 완성의 요구가 예수의 할 책임인 동시에 우리는 그에게 순종 신종 시종하여서 영광을 돌리는 것이 땅의 백성이 짊어진 책임사명이었다. 이 책임의 요구를 성립하려니 엘리야 와서 할 사명전부는 전백성 합하여서 엘리야와 합심일체가 되어서 뜻 원만성사고자함이 목적이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백성은 잘알고 있는 승천한 존재였다. 그런고로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하였으니 틀림없이 올 줄알았다. 승천한 엘리야 언제나 오실까하고 바라는 데는 하늘 향하여서 바라보는 것이 중심으로 되었다. 즉 하늘로 올라갔으니 하늘로써 나려올 줄 만 바라본 바는 사실이었다. 승천한 엘리야로 그 당시 제일 귀하게 바라는 상대로 된 바는 메시아 때문이었다.
메시아를 모실수 있게 하여주는 바도 엘리야니 엘리야를 바라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 요구이었다. 그런데 엘리야는 하늘로 내려오니라고 바라는 자는 지금까지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함은 유대교적 신자 등이다. 메시아로 왔든 것은 사실이매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역사를 통하여 확고한 것으로 되었으나 그 당시에 있어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할 수 없는 존재로 취급되었든 바는 성경보아 잘 알 수 있는 바이다. 즉 바리새 교인과 서기관들은 예수 대하여 몇 번씩이나 묻기를


그대가 메시아면 엘리야는 왜 오지 않았는가? 엘리야는 어디에 왔는가? 하면서 예수 대하여 반문한바는 자기들이 역사적으로 바라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은 사실을 고백하는 것을 성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바이다. 과연 당시에는 참말 믿고 순종할 수 없는 바이었다. 메시아라는 그 존재는 그대들이 잘 아는 요셉의 아들子로서 집에 묻혀 목수업으로서 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존재이며 그 내용내막까지 잘 아는 그 자체이며 생활체형으로 보아도 우리들과 다름없는 그 자체인데 어디 그 존재가 자기들이 바라는 이상한 중심존재라고는 생각하는 점에 하도 먼 거리의 존재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게 보였다. 우리가 바라든 그 존재는 천수백년간 약속의 존재요 희망의 존재든 자체가 예수라하니 이스라엘 백성은 무슨 영문인지 큰 환난의 존재로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ruby>무<rt>無</rt></ruby>는 어디에 한 <ruby>가부존재<rt>可否存在</rt></ruby>의 <ruby>근본결정<rt>根本決定</rt></ruby>을 지어주는 <ruby>중심존재<rt>中心存在</rt></ruby>는 무엇인가가 <ruby>요구<rt>要求</rt></ruby>되는 바인데 이 <ruby>존재<rt>存在</rt></ruby>는 <ruby>자기<rt>自己</rt></ruby>를 <ruby>전제조건<rt>前提條件</rt></ruby>으로 <ruby>규정<rt>規定</rt></ruby>한 <ruby>기반<rt>基盤</rt></ruby>위에
그들이 메시아를 바람은 전부 뜻 중심하고 바라는 것 보다도 먼저는 자기를 중심하고 바란 것은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베들레헴에서 날줄로 알았다. 그러면 자기들의 메시아 오면 조각의 식물이나 거처할 방이나 의복이나 그 중 한가지라도 준비해놓고 베들레헴을 향하여 먼저 무슨 색다른 소식이나 있는가 하여서 고대한 자 만일 있다면 메시아 탄생도 알았으리라. 그런 존재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볼때에 그들의 메시아 고대는 벌써 전부가 자기 중심이었고 자기들이 메시아의 힘을 빌려서 좀더 좋은 것을 바랐든 것이 사실이라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각자 각자는 자기들이 이상에 부합하는 이상의 존재로 바랐다는 그其 입장에 있을 때 예수란 자가 출현하여 너희들의 이상의 존재라는 선언은 하도 너무한 동시에 분개할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연 예수는 육신쓰고 나니 자기들과 동일양식으로 살아왔고 또 지금도 변함없이 동일한 양이니 과연 그 자체에 대하여 의심하는 바 당연지사였다.
이와같은 예수를 대하여서 더 의심케 된바는 엘리야가 전제문제의 존재였다. 자기들이 엘리야라고 하는 그 자가 왔다면 예수니 메시아니 여하튼 문제는 해결인데 엘리야도 오지 않고 메시아 왔다니 그 어찌 신임할 수 있으랴! 지금 우리는 바꾸어 생각할 필요를 느끼면서 석일에 이스라엘 백성을 욕하여 되는 문제다. 그러면 지금은 예수 즉 메시아가 만민의 구주요 이스라엘이 희망한 중심존재라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인식과정으로 나왔으니 예수는 메시아며 뜻하신 예언의 실체라는 것을 알며 그 전에 올 엘리야도 왔었다는 바를 세상 교인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즉 엘리야는 왔는데 세례요한이라는 것을 역사로서
인정하여주는 성경을 보아 아는 사실이다. 또 예수는 엘리야가 왔으나 임의로 대접하였다고 하면서 복음서에 세례요한을 지적하여 말한 바를 보아서 아는 간접적 앎知이었다. 과연 그 당시의 입장을 바꾸어 가지고 생각하면 지금은 과연 메시아로 믿고信 모시고侍 순종을 할 자 몇 명이나 될까? 지금 현교인들이 바리새 교인신앙 만치도 못한 자 많은 이때에 생각할 문제이면서 염려할 중대문제이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고 어찌하여 세례요한이 엘리야가 되는가 그 근거는 무슨 뜻이며 하나님이 섭리하는바는 무슨 의의를 두고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하고는 세례요한이를 보내였는가 하는 문제의 근본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근본의의를 밝히지 못하는 현실세계가 하늘이 섭리하는 뜻의 시봉을 완성할 것인가. 지금은 말세라고 하는 때이니 성경 중에 미지였든 사실이 명백히 되어야만 성경목적을 끝내고 재림주를 영접할 수 있는 결정적 관문을 삼을 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런 중대시 되는 미지의 근본을 밝히기로 하자.


=== 제2 절 세례요한이 엘리야되는 근본의의 ===
서 <ruby>시작<rt>始作</rt></ruby>하였기에 <ruby>유무<rt>有無</rt></ruby>의 <ruby>결정적<rt>決定的</rt></ruby> <ruby>판결<rt>判決</rt></ruby>을 내리는 <ruby>행례<rt>行例</rt></ruby>가 <ruby>지금<rt>只今</rt></ruby> 사람들이 말하는 <ruby>범례<rt>凡例</rt></ruby>의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그러므로 이 <ruby>사실<rt>事實</rt></ruby>은 <ruby>자기<rt>自己</rt></ruby>를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있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을 <ruby>생각<rt>生覺</rt></ruby>치 않고 <ruby>타<rt>他</rt></ruby> <ruby>자체<rt>自體</rt></ruby>에로부터의 <ruby>시작점<rt>始作點</rt></ruby>을 보고서 하는데에서 여러 가지 <ruby>존재<rt>存在</rt></ruby>의 <ruby>확정<rt>確定</rt></ruby>을 알 수 없게 하는 것이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ruby>자기<rt>自己</rt></ruby>가 한 <ruby>무한유<rt>無限有</rt></ruby>와 <ruby>무한무<rt>無限無</rt></ruby>와의 <ruby>중간존재<rt>中間存在</rt></ruby>이며 한 <ruby>공식단위체형<rt>公式單位體型</rt></ruby>이라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을 <ruby>명백<rt>明白</rt></ruby>히 하는 것이 <ruby>금일<rt>今日</rt></ruby> 사람들이 짊어진 <ruby>과업<rt>課業</rt></ruby>이다.


하나님이  근본 뜻을 성사하시려 때에 그 뜻 성사에 제일 요점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외 사탄 존재가 있有는 것인데 이 존재가 하나님의 근본 뜻을 파괴하였고 지금까지 적으로 나와 뜻을 성사하지 못하게 하는 존재가 있기에 큰 중대한 문제가 된다. 만일 사탄이 없다면 뜻 성사는 문제되는 것이 아닌데 사탄이 있어서 인간을 대하여 자기의 소유권외로 보내지 않으려고 극성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대하여서  역사를 하여 나옴으로 하나님의 뜻의 성사는 역사로 연장을 거듭하게 하여 온 바이다. 이 사탄을 전폭적으로 굴복시켜서 뜻을 미성사케 하는 공작이 없도록 사탄 전멸을 기약하는 바가 요구되는 바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근본 뜻은 뜻을 방해하려는 사탄을 뜻의 노정에 없게 하고자 함에 근본 뜻 중심이었다. 그런고로 이 근본 뜻을 성사하려고 메시아를 보내기 전에 하나님이 바라는 뜻을 반대하는 사탄을 굴복시켜 다시는 예수의 뜻(메시아의 뜻) 성사 노정에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공작이 먼저 문제였다.
그러므로 <ruby>유<rt>有</rt></ruby>하고 하는 것은 <ruby>자체<rt>自體</rt></ruby>가 <ruby>양심<rt>良心</rt></ruby>으로나 <ruby>감각<rt>感覺</rt></ruby>으로나 <ruby>체형상<rt>體型上</rt></ruby>으로나 <ruby>실정<rt>實定</rt></ruby>수 있는 <ruby>사실<rt>事實</rt></ruby>들을 <ruby>부정<rt>不定</rt></ruby> 못함으로 <ruby>유<rt>有</rt></ruby>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ruby>유자체<rt>有自體</rt></ruby>인 <ruby>자아<rt>自我</rt></ruby>는 <ruby>지금<rt>至今</rt></ruby> <ruby>무<rt>無</rt></ruby>의 <ruby>시작<rt>始作</rt></ruby>을 결정짓는 <ruby>기본행동<rt>基本行動</rt></ruby>으로 <ruby>시작<rt>始作</rt></ruby>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고로 <ruby>무<rt>無</rt></ruby>를 <ruby>결정<rt>決定</rt></ruby>한다면 그 <ruby>결정<rt>決定</rt></ruby>한 <ruby>자체<rt>自體</rt></ruby>가 <ruby>무<rt>無</rt></ruby>의 <ruby>최대치<rt>最大値</rt></ruby>를 <ruby>가결<rt>可決</rt></ruby>하였는가 <ruby>무<rt>無</rt></ruby>에 대한 <ruby>정도<rt>程度</rt></ruby>는 <ruby>여유<rt>如有</rt></ruby>인가가 <ruby>의문<rt>疑問</rt></ruby>되니 그 <ruby>무<rt>無</rt></ruby>라고 하는 그 <ruby>점<rt>點</rt></ruby>은 <ruby>유<rt>有</rt></ruby>와는 어떤 <ruby>거리<rt>距離</rt></ruby>를 갖고 있는지 <ruby>대단<rt>大端</rt></ruby>한 <ruby>중요문제<rt>重要問題</rt></ruby>다. <ruby><rt>卽</rt></ruby> <ruby>무<rt>無</rt></ruby>라고 하는데는 우리가 보고 보이지 않는 <ruby>정도<rt>程度</rt></ruby>인지 또 <ruby>감각<rt>感覺</rt></ruby>할 수 없는 <ruby>정도<rt>程度</rt></ruby>인지 <ruby>체형<rt>體型</rt></ruby>을 <ruby>구성<rt>構成</rt></ruby>할 수 없는 <ruby>정도<rt>程度</rt></ruby>인지 <ruby>입장<rt>立場</rt></ruby><ruby>명백<rt>明白</rt></ruby><ruby>점<rt>點</rt></ruby>은 <ruby>여하<rt>如何</rt></ruby>한가 하면 <ruby>물론<rt>勿論</rt></ruby> <ruby>실재<rt>實在</rt></ruby> <ruby>감각내<rt>感覺內</rt></ruby>에 <ruby>속<rt>屬</rt></ruby>하는 데서만이 <ruby>유무<rt>有無</rt></ruby>의 <ruby>출발점<rt>出發點</rt></ruby>잡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책임자로 보내마 하신 존재가 , 엘리야였다. 엘리야는 잘 알다시피 하나님 앞에 혼자서 사탄 전부하고 싸운 최승세자이었다. 엘리야가 요구하는 당시의 최고 목적은 사탄 전멸의 목적이었다. 다시는 사탄이 하나님의 뜻을 막는 곳 없
게끔 바라든 바가 엘리야가 바라든 목적이었다. 그 목적이 즉, 하나님이 바라는 뜻 성사 노정을 두고 바라보는 목적과 같은 목적이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바알신(사탄) 800여를 멸한 자이며 뜻 성사 노정을 완성 할 수 있게 하는 사탄 대한 중요존재였다. 엘리야의 목적은 완성하였는가 하면 당시 사탄 대한 목적은 미완성하였다. 왜냐하면 다시금 사탄이 침입을 보아서 예수앞에까지 침범할 우려성이 있음으로 다시금 사탄에 대립하여 엘리야가 바라는 근본목적을  완성시켜서 예수 앞에 사탄 자체의 종적이 없게하기 위한 대표자를 보내어 엘리야의 바라든 사탄 전멸공작성사할 것을 바람에서 엘리야를 새로 세례요한으로 표시한바며 세례요한이 엘리야되는 바의 목적이 있는 바이다. 즉 엘리야의 목적이 세례요한으로 완성할 사명적 역할을 가지고 있었든 바이었다.
하나님의 뜻 중심하고 말 할적에 엘리야의 목적의 성사는 세례요한으로 종결짓게 되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와서 사명달성하면 하나님 뜻은 완전성사하므로 사탄을 하나님 뜻 노정상에서 없애고자 함에서 예언하신 엘리야가 세례요한이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뜻은 하나인데 뜻 성사하는데는 갑(엘리야)과 을(요한)완성하였다.
그런고로 뜻은 하나이고 사람은 둘이다. 뜻 하나 중심하고 말할때 갑=이라는 한 몸으로 완성한 것과 같은 근본의의를 두고 예언하심이 있기에 엘리야=세례요한 이라고 하심이 근본목적이 완성되는 바이다.
하나님의 뜻 = 갑\을


이런 뜻으로 말씀 하심을 알지 못하는 백성은 큰 범행의 행로를 취하면서 자연스러운 뜻의 행함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제 엘리야 대신으로 보냄을 받은 세례요한의 사명은 무슨 목적이 남아 있나 하면 하나님의 목적 뜻 성사가 완성 하여야할 토대를 조성하여 메시아 즉 예수 자체한테 피해 없게끔 하여야 할  역사적 책임이 부담되어 있다.
그러면 사람이 <ruby>유<rt>有</rt></ruby>라든가 하는 것은 <ruby>실체<rt>實體</rt></ruby>로서만이 <ruby>문제<rt>問題</rt></ruby>하지말고 <ruby>무<rt>無</rt></ruby>하다고 하는데에 있어서 그 <ruby>무<rt>無</rt></ruby>는 우리가 <ruby>무<rt>無</rt></ruby>라고 하는 <ruby>최대치<rt>最大値</rt></ruby>가 아니고 <ruby>유<rt>有</rt></ruby>와 <ruby>연관<rt>聯關</rt></ruby>을 가질 수 있는 <ruby>존재<rt>存在</rt></ruby>의 <ruby>계속체<rt>繼續體</rt></ruby>로서 우리 <ruby>감각내<rt>感覺內</rt></ruby>로 <ruby>감촉<rt>感觸</rt></ruby>수 없는 <ruby>범위<rt>範圍</rt></ruby> <ruby>외<rt>外</rt></ruby>에 있는 <ruby>존재<rt>存在</rt></ruby>라는 것을 말하여 주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그러므로 <ruby>무<rt>無</rt></ruby>라고 하는 것은 더 적은 <ruby>무<rt>無</rt></ruby>에로 나 갈 수 있는 <ruby>중간존재<rt>中間存在</rt></ruby>임을 알려준다. 나를 <ruby>유<rt>有</rt></ruby>로하는 <ruby>자체<rt>自體</rt></ruby>를 <ruby>수<rt>數</rt></ruby>로 <ruby>표시<rt>表示</rt></ruby>하면 ① 이라고 할 수 있다면 <ruby>무<rt>無</rt></ruby>하다는 것은 <ruby>영<rt>零</rt></ruby>(0)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하나 ① <ruby>수자<rt>數字</rt></ruby>를 보아서 <ruby>영<rt>零</rt></ruby>이 있다고 <ruby>지금<rt>至今</rt></ruby> <ruby>수학세계<rt>數學世界</rt></ruby>에서는 보고 있지만 <ruby>영<rt>零</rt></ruby>이라는 <ruby>존재<rt>存在</rt></ruby>가 <ruby>수자상<rt>數字上</rt></ruby>으로는 <ruby>표시<rt>表示</rt></ruby>되나 <ruby>실제<rt>實際</rt></ruby>에 있어서는 <ruby>영<rt>零</rt></ruby><ruby>무<rt>無</rt></ruby>가 아니고 <ruby>무<rt>無</rt></ruby>를 <ruby>상징<rt>象徵</rt></ruby>하기 위한 <ruby>추상<rt>推想</rt></ruby>적 <ruby>존재<rt>存在</rt></ruby>와 같은 것이라고 <ruby>지금<rt>至今</rt></ruby>은 말할 있다. <ruby>즉<rt>卽</rt></ruby> <ruby>무<rt>無</rt></ruby>에는 <ruby>무한무<rt>無限無</rt></ruby>를 <ruby>한정<rt>限定</rt></ruby> 못하니 <ruby>무<rt>無</rt></ruby>의 <ruby>중심<rt>中心</rt></ruby>이야 <ruby>영<rt>零</rt></ruby>가지고는 <ruby>표시<rt>表示</rt></ruby>도 못한다. 그런고로 <ruby>영<rt>零</rt></ruby>을 잡아보면 <ruby>영<rt>零</rt></ruby>이라는 것은 <ruby>수자상<rt>數字上</rt></ruby> <ruby>이론상<rt>理論上</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라고는 <ruby>인정<rt>認定</rt></ruby>수 있으나 <ruby>수자상<rt>數字上</rt></ruby>으로는 <ruby>영<rt>零</rt></ruby>이라고 하는 <ruby>영점<rt>零點</rt></ruby>이 있는 <ruby>위치<rt>位置</rt></ruby>에서 <ruby>일반적<rt>一般的</rt></ruby>으로
세례요한의 하여야 할 사명은 엘리야의 심정과 재능으로 예수앞에서 아버지로 아들을 사랑 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자식으로 그其의 아버지께 효도하게 하여 줄 역사적 사명성을 말라기 4장 5절, 6절에 기록함을 보아서 알 수 있는 바이다. (누가복음1/16-17)
그런고로 예수는 즉 누구나 다 전인류의 조상인 동시에  전인류는 예수의 자식이라는 창조원리로 되어있는 목적 찾아서 맞출수 있는 길을 닦아야할 책임이 요한의 사명이었다. 밖으로는 사탄을 방비하고 내적으로는 백성으로하여금 자식된 도리를 알려주어
아버지를 모시어 사랑 받을수 있도록 그其 시대에 대한  책임을 겸유한 중대입장에 요한은 서 있었다. 그런고로 세례요한의 전 목적은 메시아의 도를 준비하는 자로써 즉 메시아 한 분만이 그의 생명의 대신이며 희망과 소망의 전부의 존재였을 것이었다.
또 자기  자신이 알고 있어야 사실이었다. 그리하여야 세례요한의 광야생활이라는 전 목적은 여기에 완성을 가져오는 바이었다. 예수보담 6개월 전에 사가랴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 자체는 하늘이 무한한 기대로서 보낸 자이면서 사탄이 제일 미워하는 존재였다. 그其 시대를 대표하여 뜻을 세우기 위한 30여년생애 모두가 예수(메시아) 한 존재가 목적인데 그 메시아를 모시는 그 한날의 기쁨의 영광이 그대의 목적이었다. 세례요한의 뜻을 전 이스라엘  백성앞에 세례를 시행하게되었다. 세례는 예수의 그 근본 뜻을 성사할수 있는 한 터의 자격을 부여하여 주는 약속의 표시의 예였다.(요한 복음 1장 31절~34절)
세례요한이 예식을 시행 함은 자기 뜻을 성사하기 위함이 아니고 예수의 뜻을 계승키 위하여서 하심이라는 바는 다 잘아는 사실이다. 당시 세례요한을 이스라엘 백성은 하늘이 보내신 한 선지자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례요한한테 이스라엘 백성은 세례식이나마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은 하늘로써 보내심을 받은 자로 알고 있던 까닭이므로 신법(요한복음 1장 15절) 그其 세례를 받음이었다.
세례요한은 증거하기를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다음 오시는 메시아는 불火과 성신으로 세례를 준다고 하시며  대중앞에 선포하심은 자기자신의 사명과 메시아의 사명은 격별하게 상이있음을 고백하는 바이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전목적 실체 메시아의 한 존재가 소망성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에 예수는 갈리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至 요한한테 세례를 받고자 할때에 세례요한은 사양하야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나한테 나오시나이까하니 예수 말씀하시기를 허락하라. 우리들이 의를 행하는 것이 합당하리라 하신데 세례요한이 허락하여 세례를 시행함을 받고 물水에서 올라오시니 하늘天이 열리開고 하나님의 신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그其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天로써 소리聲있어 말씀言하시대 이此는 나我의 사랑하는 아들愛子요 나我의 (기뻐하는 자라) 하시더라.
비둘기 모양으로 성신이 내린 근본의의는 이와같은 하늘의 뜻의 존재라는 것은 세례요한 스스로가 알게 되었다. 그其때 누구나 전부가 사실을 듣고 보았든가 전부는 알지 못하였지만
세례요한만은 잘 알고 있었다.  이렇듯이 한 목적을 책임진 세례요한한테 알려 전이스라엘 백성한테 전하여서 하늘뜻을 성사하게 하고자 하심이 뜻이었다. 이와 같이 하늘로부터 예수는 메시아라는 것과 하늘로 보내신 특별한 자라는 것은 알려주었으나 세례요한한테 예수는 메시아라고까지는 지적하여 교시하여 주지 않았다. 지혜롭게 행동을 취하여야 하는 한 단계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에 세례요한은 자기가 바라든 메시아를 만났음은 그 이상 무슨 딴 목적이 어디에 있으며 다시금 무엇할 사명적 다른외부분을 요구할 무엇이 없었든 것이 사실인 동시에 기뻐서 대중을 대하여 적극 예수는 보내시마 하신 메시아라고 선포하여서 대중이 예수앞에 집결하게하는 동시에 자기도 역시 예수 앞에 있어서 모든 대표적 태도로 나서게 되었든가.  그 자체의 태도 여하로 인하여 대중에게 큰 영향을 전하는 중대입장에 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예수 대하여 적극적으로 예수 자신은 우리가 바라는 목적의 존재 메시아라고 대중앞에 선포 못함은 사실이었다. 그저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때만 알 뿐이고 세례요한은 그냥 그대로 자기가 처음 시작한 세례나 주면서 다니는 행동을 계속하게 되니 예수를 대하여서도 대중은 메시아라고 보는 것 보다도 세례요한의 행한 행례의 도움자로써 아는 자라고 생각하는 자는 있는 정도였다. 세례요한의 목적은 그저 세례나 주고 다니는 것이 역사적으로 부여받은 전사명이었든가. 너무나 가치없는 행동이였었다.  모든全이스라엘 백성대하여 생명 계승의 한 중계존재가 그냥 멋대로 사방을 자유로히 다니면서 세례만 준다는 행례에는 우리는 한심한 태도로 주목하지 않을 없는 사실이었다.
세례요한 자신은 역시 예수 앞에 서서 나타난 엘리야의 대신 존재라는 것을 잘알았는가 하면 의심할 문제이다. 요한 복음 1장 21절에 요한이 엘리야도 아니라 하심 보아도 자기 자체가 사명적 입장을 명백히 알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알았으면 왜 대중앞에 자기를 선포하여서 이스라엘 백성의 의문점을 없이하여야 책임도 준비 못하였든 바이었다. 세례요한 자신이 엘리야란 것을 알았으면 대중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여야 할 존재


로서 어디에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서 싸워서 그 기대를 세웠든가 자기 자신도 확고한 엘리야의 대신자라는 것은 자각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렇게 세례요한은 자신사명에 대하여 적극적 준비 공작을 하여서 그 목적 본체로 오신 예수 앞에 모두全를 시종의 중심 존재로 서서 예수의 모든全 사명의 협조자로서 또 제일 큰 사랑받을 수 있는 예수의 한 제자로서 시봉하는 외에 큰 다른 무슨 목적이 있었으랴.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와 분립하여 행하신데는 세례요한이 하늘 앞에 중대한 책임 미완성을 가져오는 기본적 대신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알려지고 있는 <ruby>영<rt>零</rt></ruby>과는 <ruby>판이<rt>判異</rt></ruby>한 <ruby>자체<rt>自體</rt></ruby>이다. 그런고로 <ruby>영<rt>零</rt></ruby>이라고 <ruby>현사회<rt>現社會</rt></ruby>에서 쓰고 있는 것은 <ruby>유<rt>有</rt></ruby>의 <ruby>소형체<rt>小形體</rt></ruby>의 것이며 <ruby>소<rt>小</rt></ruby>로써 <ruby>무한대<rt>無限大</rt></ruby>하여지는 <ruby>존재<rt>存在</rt></ruby>의 <ruby>중간자체<rt>中間自體</rt></ruby>임을 <ruby>부정<rt>否定</rt></ruby> 못한다. <ruby>유<rt>有</rt></ruby>와 <ruby>무<rt>無</rt></ruby>의 <ruby>한계선<rt>限界線</rt></ruby>은 즉 하나이다. 그런고로 이러한 나를 잘 알려면 <ruby>무한유<rt>無限有</rt></ruby>의 <ruby>시작<rt>始作</rt></ruby>이면서 <ruby>무한무<rt>無限無</rt></ruby>의 <ruby>시작<rt>始作</rt></ruby>의 <ruby>기초<rt>基礎</rt></ruby>를 알아야 <ruby>중대<rt>重大</rt></ruby>한 <ruby>문제<rt>問題</rt></ruby>가 <ruby>생기<rt>生起</rt></ruby>는 바이다. 하나와 <ruby>영<rt>零</rt></ruby>이 <ruby>동일점<rt>同一點</rt></ruby>이라고 보니 <ruby>무한유<rt>無限有</rt></ruby>와 <ruby>무한무<rt>無限無</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의 <ruby>제일<rt>第一</rt></ruby> <ruby>중심<rt>中心</rt></ruby> <ruby>거점<rt>據點</rt></ruby>이 <ruby>즉<rt>卽</rt></ruby> 하나와 <ruby>영선<rt>零線</rt></ruby>의 <ruby>경계점<rt>境界點</rt></ruby>이다. 그러므로 나 하나는 <ruby>무한유<rt>無限有</rt></ruby>의 <ruby>시작<rt>始作</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며 <ruby>극소유<rt>極小有</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를 알고 있는 바이면서 또 <ruby>무한무<rt>無限無</rt></ruby>의 <ruby>최대<rt>最大</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라는 <ruby>기<rt>其</rt></ruby> <ruby>입장<rt>立場</rt></ruby>을 <ruby>취<rt>取</rt></ruby>하고 있는 <ruby>자체<rt>自體</rt></ruby>가 <ruby>즉<rt>卽</rt></ruby> ① 하나인 것이라는 존재다.
성경을 보면 세례요한은 전폭적으로 메시아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지 못함을 알려주고 있다. 옥중에 있어서 제자들을 보내며 묻기를 그대가 오실바의 메시아니까 하는 질의, 또 다른 사람을 기다리오리까 하는 것을 보면 세례요한 자신도 메시아에 대한 해결을 못하였든 바를 알려 준다. 이와 같이 뜻 시봉자가 되어야 그 존재조차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알려주지 못하니 예수 자신에 있어서의 전기대와 소망은 여하한 정도이였을까? 과연 통한치 않을 길이 없을까. 누가 그 심정을 알 자 있었으랴. 여기에  세례요한이 예수 앞에 하늘 앞에 큰 범행의 시작이 있다는 것을 아는자가 현기독교계에 없는바를 나도 통분하는 바이다.
그저 세례요한은 귀하고 하나님 앞에 없어서는 아니될 존재 대우하는 것은 용서 할 수 없는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는것이다. 그런고로 자기 책임 다하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행하는 세례요한은 아버지 앞에 귀함의 존재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때문에 온 자가 그其 본사명 중심지를 떠나서 행하는 그其 자체는 물론이며 그其의 시종자까지 하늘로서 선하게 대할 수 없는 존재로써 그 말로에까지 하나님은 귀히 보지 않음은 사실이다.  이와 같은 중대지사 여하가 예수 앞에 크나큰 광야생활이라는  고통의 노정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광야에 나아갈 때에 고독한 심중을 헤아려 동정하는 자 세상에 몇사람이었든가?
여기에 人間을 상대하여 예수의 사명범위는 한 어두운길暗路에 봉착하였음을 누가 아는가 아는 자 아버지와 예수뿐이었다. 그 광야의 적막감은 예수 앞에 큰 낙망과 동시에 다시금 재출발의 한 노정을 결심케 하는 노정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광야까지 예수를 시봉하여 따른 자 한 사람도 없다. 그때  먼저 예수를 메시아로 모시는 자 있다면 이는 하늘에서 내리는 큰 상을 받을


존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생각하면 동방박사는 어디에 갔는고, 목자는 어디에 있는고. 모친은 어디에 갔는고. 세례요한은 어디에 갔는고. 모두 자기 뜻 중심하고 행동하는 그其 자체들은 예수 앞에 기쁨을 변하여 탄식하게 하는 한 존재 등에 불과하였으며 더욱 슬픔을 격동시켜주는 기대에 틀림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심정을 품고 광야생활에 있어서는 제1차 낙심을 다시 복귀하기 위한 목적인 동시에 적극적 원수 사탄 대하여 최종 결판시기였다. 사탄이 벌써 하늘 뜻 성사할 터를 침입하여서 뜻 순종 노정을 받들지 못하는 세례요한의 기대는 보았으니 그 다음엔 그 중심 자체인 예수까지 와서 시험의 시도는 원리적 한 행동이었다. 그러니 광야생활 중 사탄의 자유행동에 대비한 예수에 시험이었다함을 알아야 한다.
하나와 <ruby>영<rt>零</rt></ruby>은 <ruby>경계<rt>境界</rt></ruby>를 <ruby>정<rt>定</rt></ruby>치 못함.


=== 제3 절 세례요한 인간성 표준으로 예수를 대함 ===
<ruby>수자상<rt>數字上</rt></ruby>으로는 <ruby>영<rt>零</rt></ruby>과 ①하나와의 <ruby>상이<rt>相異</rt></ruby> <ruby>위치<rt>位置</rt></ruby>를 갖고 있지만 <ruby>실제<rt>實際</rt></ruby>에 있어서는 <ruby>동일점<rt>同一點</rt></ruby>을 <ruby>이탈<rt>離脫</rt></ruby> 못하는 <ruby>공통<rt>共通</rt></ruby> <ruby>노선상<rt>路線上</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다. 그러므로 <ruby>실제상<rt>實際上</rt></ruby>으로는 1=<ruby>영<rt>零</rt></ruby>이라고 할 수 있는 <ruby>존재<rt>存在</rt></ruby>들이다.


세례요한의 행동이 어찌 용서받겠는가 생각하면 몸에 솜서리 치는 한 행동이 아니었는가. 세례요한 역시 예수를 대하여서 뜻 중심하고서 대하지 못함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세례요한도 사람인지라 메시아라는 자체는 좀더 고귀한 위치에서 자기에게 보여졌을 것이 없는데 별다름 없는 존재의 용모이면서 자기들이 바라는 바와 같이 뜻의 성사의 노정을 취하여 나가지 못하는 존재로써 어찌 메시아의 자격이란 너무나 거리가 멀었었다. 요한 역시 그 시대적으로 대하든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한 관점으로 서게 됨이 큰 실수의 시작이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은 두 말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1= <ruby>영<rt>零</rt></ruby>
그 세례요한은 예수 앞에 메시아라면 전 시종하기 위하여서 자기를 중심하고 그其 외 제자들까지도 함께 데려와서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할 입장이었는데 그것이 과연 인간성에서 나온 파괴행동이었다. 자기 제자들과 함께 예수 제자가 되어 어제昨日의 선생의 입장을 변하여 예수 앞에 제자 양으로 서니 제자였든 자들과 동급적 입장에서 그其 입장이 과연 인간세계에서는 어려운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 등은 인간의 전부가 자기 중심하고 하늘을 대하고자 하는 대신 사탄 공작이라고 보여주는 결과를 초래하여 사탄과 합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셈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와 같이 논하는 것은 무근거한 원리위에서 논함이 아니다. 성경에서 세례요한이 일대 실수의 행동을 폭로한 구절을 찾아서 해설하여 보자. 지금까지 신학계
에는 난해 문제의 구절일 것이다. 즉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그 내용적 사실이 여실하게 드러나 있다. 즉 예수께서 12제자에게 명하심을 필하시고 거기에서 이사 교주하시며 영포하시라고 각성에 가往시더라. 그때 왜 요한이 옥에 있어 그리스도의 행함을 듣聞고 그 제자들을 유야 예수께 단야 왈 당신이 오來실이니까. 선생임이 오니까 우리들我等이 다른사람他人을 기다待리이까 예수 대답하여 왈 너희들爾等이 왕하야 듣聞고 보見는 것으로 요한에게 고하대 귀머거리가 들으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나자가 깨끗潔하며 눈먼 자가 보며 빈자가 복음을 전한다하라. 그런지 나我로 인하여 범죄하지 아니한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고 저들被等이 흩어짐離에 군중衆들에게 요한을 가르켜指하야 말씀言하시매 너희들爾等은 무엇何을 볼視려고 들野에 갔去더냐. 바람風에 움직動이는 갈대냐 또 너희들爾等이 무엇何을 볼視려고 갔去더냐. 미복을 입衣은 사람人이냐 아름다운 옷 입美服衣은 사람을 대궐에 있나이다. 너희들爾等이 어찌 갔去더냐. 선지자를 보見려더냐. 옳是도다. 내我가 너희들爾等에게 말하노니 이사람此人은 선지자보다 크勝니라. 이사람此人을 가리켜指 기록하였으며 볼見지어다. 내我가 나我의 사자를 너희들爾等 앞前에 전遺하노니 저被가 너희길爾路은 너희앞爾前에 예비하리라 하였나이다. 내我가 진실로 너희들爾等에게 논하노니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는 세례요한보다 웅대한 자가 일어起남이 없으無나 그러然나 천국에서는 지극 어린아이小子라도 그被보다 크大니라. 세례요한이 올來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용역함으로 얻得나니 용력한 자는 빼앗奪느니라. 모든諸 선지자와 율법에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 도달至하였으니 만일 너희들爾等이 그것을 수긍할진대 오來리라한 엘리야가 그사람此人이니라. 귀耳가 있有어 듣는자聽者는 들을聽지어다. 차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데 아이兒孩가 시장에 앉座아 동류를 불러 왈 우리들我等이 너희를爾等을 향하야 나팔을 불吹어도 너희들爾等이 춤추舞지 않고 우리들我等이 슬픈 울음소리를哀音 내어도 너희들爾等이 울지 않았다함과 같으니 요한이 와서來 먹食지도 않고 마시飮지도 아니함에 그들被等이 말語하기를 사귀가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來 먹食고 마시飮에 또 말語하기를 먹食기를 탐貪하고 술酒을 즐기嗜는 사람人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라하니 다만 지혜는 그 행사로 의를 나타내顯느니라고 이상과 같은 말씀言을 선언하였다. 이 내용전부는 세례요한 대하여 놓고 한 말이었다. 그러면 요한 제자와서 물을때에 본대로 말하라. 내가 누구라고 말하지 않으나 너희는 스스로 자각하여라 하면서 여러 이적 기사로써 표시하였다.
그러면 예수는 왜 이런 대답을 하였는가. 그저 묻는 그대로 대답하여 옳도다. 내가 오리來라고 한 자로라 하면 그만 해결을 짓는 일인데 이와 같이 예를 들어 말한 바는 인간으로 하여금 깨달을수 있도록 교시하였으니 그것 보아서 알라는 큰 의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귀하고 높은 예수를 찾으면 그야말로 그에 더 성공은 없는 것인데 누구나 전부가 가르쳐주고 전부 끌어다 주면 그 귀한 자체를 찾지 못한 자 어디에 있을까 밝히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으면 자기들이 지혜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세워야만 그 뜻 성사는 물론 하늘의 협조하여 주었지만 자기 노력으로 찾아야만 타락하지 않고 이루었다하는 결과를 보기 위하여 그 찾는 상급에 대한 영광받을 자격이 결정되는 바이므로 최종점까지는 교시하여 주지 않는 바이다. 예를 들면 100까지를 찾아야 하는데 95가량만 알려주고 5는 알려주지 않는 것이 한 뜻의 노정의 표시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100까지 중 100까지 전부를 교시하면 그 상급은 하늘에 있는 성도들 앞에서라도 그 영광누릴 자격완성자라 할 수 없기에 95까지만 가르쳐주고 5는 자기 지혜를 통하여 찾아 100까지를 채우시기를 바라서 교시하는 바가 지금 역사 노정에서 많이 보여지는 사실이다. 이 5이란 그것 찾아 성사하는 그 사실은 100의 성사한 영광을 누리고 기본권한을 결정하는 사실이니 이와같은 예로서 세례요한 대하여서 대답한바도 사실이다. 또 세례요한한테도 하늘로써도 이와 같이 교시하였다. 지혜로 찾아서 의로 정함을 주시고자하여서 예수는 메시아라고 확정지어 교시치 않은 바이다. 이런 것이 지극한 하나님이 사랑 하시어 하시는 섭리인 동시에 누구에나 허락한 예수니 지혜있는 자만 합하여만 원수의 지혜를 파할 수 있는 기본동력이라는 근본의 힘力의 터가 되기에 이와 같이 하나님은 섭리하신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특히 어떤 목적을 교시하였다가 다시금 시험하여 그 목적 대한 의심을 발하게 교시하여 주는 때도 있다. 그것은 지혜로서 그 근본을 확득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만 하나님 자신이 직접간섭하지 않아도 사탄 원수 대하여 승리할 자격자로 세우려니 이런 시험도 있는바는 영교시로 받는 자들의 체험하는 사실적 근본의의로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즉 사탄이 대하여 반대역사할 수 있는 것이기에 또 그리하여 완성격자 되면 전부를 하나님의 간섭을 하지 않고 자유성사를 표준하기에 이와같은 자리를 바라서 우리에게 대취하기 위하여 섭리하심은 알아야 한다. 지혜로서 뜻 찾아 완성하는 자는 저 하늘 권에서도 말할수 없는 귀한 존재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존재의 자격은 지혜를 찾음으로만 존경의 가치를 볼 수 있는 근본의 행동이 즉 지혜로 뜻 성사를


완성하는 태도이다. 그리고 빈자에게 복음을 전한다 하심은 큰 의미가 있다. 즉 여기는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메시아를 고대하기를 자기들이 더 좋아지기 위하여서 고대하였기에 지금 이와 같이 나 자신은 너희들이 바라는 목적상대로 되지 못하여 빈자와 같은 자 밖에 상대할 수 없는 모양에 있다함을 고하는 동시에 너희들은 마음으로 부한 것이었기에 나 대할 수 없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시하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사탄이 주관세상에서 선은 밝혀 빈자급에 많은 것을 말하는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악의 주관세상이니 악한사람惡者은 잘살富고 착한사람善者은 가난貧하니 이런 원리적 언사로 되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1= <ruby>절대치수<rt>絶對値數</rt></ruby>의 <ruby>기본수<rt>基本數</rt></ruby>이며 <ruby>유<rt>有</rt></ruby>의 <ruby>기본존재<rt>基本存在</rt></ruby>다.
그 다음 마태복음 11장 6절에는 말씀하시기를 누구誰든지 나我로 인하여 범죄하지 아니한 자는 복이 있有도다 하심의 구절을 보게 된다. 이 구절이야 예수님의 숨은 심정을 표시한 말씀이었다. 즉 이 말씀에는 벌써 세례요한은 나에게 범죄하였다는 결론적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범죄하지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하였으니 벌써 복된 입장에서 이탈한 존재하는 것을 암시한 바이었다. 과연 예수 앞에 세례요한 한 자체는 크나큰 타격의 존재였다. 예수의 전목적의 대부분에 일대난사를 초래케 한 큰 범죄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없는 사실이다.
그 다음은 너희들爾等은 무엇 보려 광야에 나갔出더냐. 그 목적이 무엇이든지 그 들野에 나아감은 전목적은 예수 한 자체를 보기 위하여 행동한바가 아니냐. 또 들野에서 요한 자체가 증거한바가 아니었든가. 그런데 그때 벌써 알아야 할 시기를 놓치고 지금와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암시하면서 책망하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 증거한 세례요한은 과연 선지자 중에서는 제일큰 자라고 하면서 말씀하시었다.
들野에서 본 세례요한은 과연 선지자 중에도 큰 자라고 하나 할 책임을 담당하지 못하였다는 의미로 말씀하시는 말씀이 내我가 진실로 너희爾等에게 이르論노니 여인으로 난 사람 중에는 세례요한보다 웅대한 자가 일어남起이 없도無다.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至極者라도 그被보다 크大니라 하심에 결론적 판결을 내리웠다. 이 말씀이 지금 신학계에서 미해결점이나 그 근본의의는 예수 대한 세례요한의 범죄행위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라는 것을 밝히 이제는 알아야 한다. 즉 근본의의는 무슨 뜻인고 하니 여인으로 난 사람 중에 세례요한보다 웅대자가 일어起남이 없無다함은 이 말씀에 대한 근본의의를 알아야 한다.
지난날昔日의 선지자도 여인을 통하여 태어生고 지금 세례요한도 여인女人을 통하여 태어生난 자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왜 세례요한이 제일로 큰 존재라고 하였는가 하면 선지자라면 하나님의 뜻을 예언하셔서 뜻을 알려주는 대변인임에 틀
림없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역시 하나님 뜻을 알리는 대변인이라는 것은 같은 뜻의 존재이나 그 자체들이 증거 입장을 취하여 보면 지난날昔日 선지자 전부는 증거하되 예언적 증거로서 예수를 증거하였으나 세례요한은 증거하되 직접적으로 증거하였으니 증거적 입장을 중심하고 말할 때 세례요한의 이상가는 자 없음은 사실이다.
그런고로 증거적 입장을 두고 세례요한에 대하여 말할 때 과연 세례요한은 여인으로난 사람중에는 제일큰 존재라는 근본의의가 확실하다는 것을 명백 히 알아야 한다. 그 다음은 그러然나 천국에서는 지극자라도 그被보다 크大니라 하심은 무슨 의의냐 하면 근본의의가 이러하다.
천국에 간 자도 여인으로 난 자들이다. 그렇다면 여인이 난 사람 중에는 세례요한이 제일 크大다고 하였는데 왜 천국에서도 커야 할터인데 제일 작은 자가 세례요한이가 되는가 하는 것이 의심아니될 수 없는 수수께끼의 한 관문이다. 이 근본의의도 세례요한의 범죄적 행위를 책망한 중대구절이란 그 뜻은 이러하다. 지금 세례요한은 예수를 메시아로 증거하여 놓고는 자기는 자기 멋대로 행하였으니 예수에 대하여서 적극 존재가 되어 행하여야 할 입장을 떠나서 행동하였으니 큰 범죄라 아니할 수 없다. 예수를 메시아로서 시봉하여야 할 중심 존재가 시봉하지 못하고 도리어 뜻 파하는 행동을 하였으니 그 자체에서는 과연 하늘에서 작은 자天微者의 행동력이 아니라 할수 없다. 세례요한이 적극시봉하였으면 그는 두말할 것 없이 하늘에서는 지극히 큰 존재가 될터인데 시봉치 못하니 하늘天에서 작은자微者보다도 못한 존재로 되었다하는 의미였다. 즉 천에 있는 성도나 또 천사나 어떤 존재라도 예수 대하여서는 메시아란 근본존재라는 것을 알고 극심으로 시봉하고 있는데 시봉할 중심존재가 시봉하지 못하니 시봉에 있어서는 최고작은자最微者가 되었다하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이 말씀은 시봉을 중심하고 말씀하여서 세례요한에게 대한 범죄행위를 꾸짖策음이라는 중대한 근본의의를 알아야 한다. 그 다음은 세례요한 올來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용역함으로써 득하나니 용역하는 자는 빼앗奪느니라 하심의 말씀도 역시 세례요한 대한 범죄지사를 지적함의 말씀이었다.
요한 올來때부터 지금까지라는 말씀은 무슨 뜻의 말씀인가 하면 먼저는 세례요한 자체가 뜻을 받들어서 시봉하였다면 예수님의 수제자는 세례요한이 될바는 정한 하늘의 목적이었는데 용력하지 못하였기에 즉 시봉하지 못하였기에 요한부터 지금까지라는 중에 요한이 선유권리를 주었든 큰 위치를


지시한바였는데 그 위치를 지키지 못하니 그 지정되었는 위치는 용력하는 다른 제자에게로 옮겨지었다는 것을 지적함이었다.
<ruby>영<rt>零</rt></ruby>= <ruby>무한무<rt>無限無</rt></ruby>의 <ruby>절대치수<rt>絶對値數</rt></ruby>면서 <ruby>유<rt>有</rt></ruby>의 <ruby>무한소수<rt>無限小數</rt></ruby>의 <ruby>중간존재<rt>中間存在</rt></ruby>다.
그런고로 천국은 용력하는 자는 빼앗奪느니라 하심이었다. 예지 예정은 근본을 두고 하신 말이란 뜻이 근본이다. 그런고로 용력하는 다른 제자들한테 그 자리位를 빼앗奪으심이라는 근본의의를 명백하게 표시한바를 보아도 여기에 세례요한이 범행한 자체이면서 예수 앞에 큰 하늘적 반역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존재 대하여서 오늘날까지 존시하였다는 과거 신앙자의 무지의 서러움을 무엇으로 방지할까. 과연 통분한 사실이다. 이 사실의 행동으로 인하여 예수의 십자가의 어려움難의 시작을 재촉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밝히 알아야 한다.
그 다음은 세례요한은 엘리야라고 말하고 그는 세상이 먹고식구 마시飮지 않으니 사귀가 들렸다하고 나도 먹고 마시食口飮니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하니 다만 지혜는 행사로 의를 나타내顯느니라 하시었는데 이 말씀 중에는 세상이 함부로 하늘뜻을 모르不知면서 자기 멋대로 정하여 평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뜻을 갖고 온 자를 대하여 조금도 응하는 자 없다함을 비유하여 아이兒孩가 시장에서 앉座아 동료同類를 불러吹 말하되曰 우리我等가 너희爾等를 향하여 나팔을 불어도 너희爾等가 춤추舞지 않고 우리가我等이 애곡哀音하여도 너희들이 가슴胸을 치拍지 않는다는 것으로 세상을 비유하여서 현재 뜻 중심한 자기의 목적요구에 조금도 응치 않음을 지적하심이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만이 하나님의 뜻을 행의로 나타顯낸다하심의 경고를 볼 수 있다는 바를 지금 교인들이 아는가. 이와 같이 초림예수 앞에 전개되었든 진상이 지금 재림을 바라는 세계신자들과 바리새 교인들과 비하여 볼때에 뜻에 속한 존재가 지금 신도 중에 몇 명이나 있겠는가! 이와 같이 근본원리들은 말세가 되니 뜻 성사시기가 오리니 명백하게 되어야만이 재림은 오는 바가 아니겠는가. 이 근본의 뜻 알고 시봉자는 하늘에서 제일큰 자라는 것이 끝날도 부여하는 사실이다. 이와같은 환경을 본 예수 앞에는 광야라는 서러움의 노정을 전개시킨 근본원리라고 위에 논한바를 이해할 줄 안다. 이런 근본을 밝히지 않으면 적극반대할 자들은 현교계 신앙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뜻과 근본을 알적에 큰 두려운 문제라 아니할 수없다.
이상 논한바 근본문제는 세례요한 자체는 하늘적으로 예정적 존재였으나 그 사명을 시봉 못하게 될 때에 하늘은 뜻 시봉의 가치를 알고 시봉하는 자가 하늘적 예정적 목적을 계승하여 완성하는 바로 하나님은 뜻의 섭리를 돌리어 역사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예지 예정적이라는 것은 뜻을 중심하고 말씀한 바이지
뜻 대하는 사람을 대하여서 말씀한바아니다. 이것 보아도 현실 신앙계의 예정론 등은 그 문제외 위치것으로 된다.


=== 제4 절 복귀섭리 표시로 된 예수 조상의 혈통 ===
그런고로 <ruby>문제<rt>問題</rt></ruby>되는 바는 나 한 <ruby>자체<rt>自體</rt></ruby>가 <ruby>중대<rt>重大</rt></ruby> <ruby>문제<rt>問題</rt></ruby>인데 나는 <ruby>지금<rt>至今</rt></ruby> 어디서부터 <ruby>시작<rt>始作</rt></ruby>하여 잡은 <ruby>존재<rt>存在</rt></ruby>라고 하고 싶은가? 그것은 <ruby>각자<rt>各自</rt></ruby>의 <ruby>자유<rt>自由</rt></ruby>로 맡기기로 하자. <ruby>즉<rt>卽</rt></ruby> ①에서 <ruby>시작<rt>始作</rt></ruby>하였으면 그 하나가 갖고 있는 <ruby>존재<rt>存在</rt></ruby>의 <ruby>가치가<rt>價値價</rt></ruby>를 <ruby>전부<rt>全部</rt></ruby> <ruby>인식<rt>認識</rt></ruby>하여만이 되지 않겠는가가 <ruby>선결문제<rt>先決問題</rt></ruby>다. <ruby>즉<rt>卽</rt></ruby> <ruby>무한대<rt>無限大</rt></ruby>와 <ruby>무한소<rt>無限小</rt></ruby>의 <ruby>문제<rt>問題</rt></ruby>보다도 <ruby>기<rt>其</rt></ruby> <ruby>중간자체<rt>中間自體</rt></ruby>인 하나의 <ruby>존재<rt>存在</rt></ruby>의 <ruby>규정<rt>規定</rt></ruby>이 큰 <ruby>난관봉착<rt>難關逢着</rt></ruby>이라 아니할 수 없는바다.


인간은 해와의 실수와 아담의 실수는 전인류로 하여금 사망에 지도받아 하나님과는 먼 거리에서 반대방으로 나아가는 것을 다시 찾고자 하시어서 역사를 통한 섭리노정에 전폭적 뜻 표시로 전하여 왔음을 이상 논한바에 의하여 잘 알줄 안다.
이 하나되는 <ruby>자아<rt>自我</rt></ruby>를 알면 <ruby>무한대<rt>無限大</rt></ruby>에 <ruby>대<rt>對</rt></ruby>한 <ruby>위치<rt>位置</rt></ruby>부터 <ruby>무한소<rt>無限小</rt></ruby>의 위치가 갖고있는 <ruby>중간존재<rt>中間存在</rt></ruby>에 <ruby>대<rt>對</rt></ruby><ruby>전부<rt>全部</rt></ruby>를 알아야만 <ruby>자기<rt>自己</rt></ruby>에 대한 <ruby>확실<rt>確實</rt></ruby>한 <ruby>규정<rt>規定</rt></ruby>을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ruby>존재<rt>存在</rt></ruby>를 <ruby>전부<rt>全部</rt></ruby> 밝혀서만이 <ruby><rt>其</rt></ruby>보다 더 <ruby>존재<rt>存在</rt></ruby>에 대한 <ruby>근거<rt>根據</rt></ruby>를 <ruby>해결<rt>解決</rt></ruby><ruby>자격<rt>資格</rt></ruby>있음을 수 있다. 그런고로 사람들은 <ruby>자기<rt>自己</rt></ruby>가 있다고 하여 놓고 <ruby>무<rt>無</rt></ruby><ruby>사실<rt>事實</rt></ruby>이니 <ruby>무<rt>無</rt></ruby>하다느니 하는바는 <ruby><rt>卽</rt></ruby> <ruby>수세계<rt>數世界</rt></ruby>에 있어서 <ruby>영<rt>零</rt></ruby>이라하여 <ruby>절대무<rt>絶對無</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를 <ruby>결정<rt>決定</rt></ruby>듯이 하고 있는 바와 <ruby>동일<rt>同一</rt></ruby><ruby>생각<rt>生覺</rt></ruby>으로 되어 있는 바와 한가지라. 없다할진댄 <ruby>무한소<rt>無限小</rt></ruby>에 까지 <ruby>도착<rt>倒着</rt></ruby><ruby>기<rt>其</rt></ruby> <ruby>세계<rt>世界</rt></ruby>가 <ruby>자기<rt>自己</rt></ruby>
그런데 특히 예수의 직계의 혈통을 가진 역사적 조상들의 전부를 살펴볼 적에 우리가 근본원리를 알지 못할때에는 의심되는 혈통을 가진바를 누구나 다 절감하여왔는 사실이 되어 왔다. 예수의 조상의 혈통은 전부를 섭리하시는 하나님 뜻을 중심하고 조상의 하나님을 대하여 왔든 바이다. 역대의 조상의 전표시적 중심되는 일은 후일 예수의 역사적 사실을 전부 완성할 수 있는 원리대로 표시하면서 예수까지 인도하여 경유하심이었다는 바를 알아야 한다. 즉 예수와서 타락한 전인류를 근본대로 회복하여야 하는 존재가 되려니 그 역사에 대하여서 근본 하나님의 뜻에 대한 표시적 계통을 취하여 왔든 바이다.
예수 조상에 보면 세상 사람보기에는 불결한 혈통을 갖고 있다고 것이다. 혈대는 순수한 혈계가 아니고 여러 여인들 대표적 존재들이 나타나고 있다. 즉 다마, 라합, 룻, 밧세바 등의 여성들이다. 이와같은 혈계를 가진바는 본래 인생조상 아담 해와들이 더럽힌 자의 행례로서 하나님의 직계를 떠나서 사탄과 합하여 사망의 혈계를 받은바를 다시금 복귀하여 근본에 옮겨 놓고자하니 사탄한테 빼앗긴 사실적 예와 같은 반대행동으로 하나님께 속하게 하여서 사탄의 근본 더럽힌 원리를 찾아 세우고자 함이 중대요소이다. 그런고로 이런 더럽힌 여성들과 같은 자들이 행동의 뜻 성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근본, 순종, 시봉, 신종할 수 있는 그때야만이 뜻 성사된다는 원리성사를 시작할 수 있는 바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런고로 예수와서 복귀하여야 할 근본 뜻들을 전적으로 표시적 순, 신, 시종의 나타나는 곳에서만이 뜻이 시작한다는 표시로서 역사의 조상의 행동의 성립의 표시가 합의를 보아 예수의 근본되는 조상 자격자로서 부여하신 바이었다. 야곱은 에서를 두고 장자의
업을 빼앗아서 하나님의 기업을 성사할 표시적 사실의 성립을 보았으나 이제는 다음 번째도 선 자가 먼저 자에로써 본 계대를 성사할 시작은 즉 유다부터였다. 유다에게 있어서는 뜻 성사적 사실의 표시와 동시에 뜻 실천 성사출발을 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런고로 유다 지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 성사할 것을 미리 말하였든 바이나 뜻 성사의 첫 계대자로서 베레스와 세라를 보여 주심이었다. 이 유다부터 하나님은 뜻의 기본 시작을 보는 것이었기에 다말에게 한 쌍태를 주어 베레스와 세라 역시 야곱과 같이 복중에서 싸워서 그 뜻의 기본 확립에 한 표시를 성사함이라는 의의가 있는 바이었다.
그러면 다말이 한 행동으로부터 알아보자. 다말은 本來 하나님 뜻으로 허락한 계대를 계승하여야할 입장이었는데 그 남편 죽고 혈대를 계대하여야 자기 존재에 대하여 많은 고심한 존재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 하려는 혈대를 계승하기 위하여 누구보다도 많은 고통과 함께 그其 혈대의 가치성을 안 여성이었다. 그리하여 자신 뜻을 성사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계승하기 위하여 부끄러움도 사망도 제이차적 문제시하고 목적달성의 행동으로 나간 바이었다.
그때 이런 행동이라면 용서없는 죽음의 길이 다말 앞에 시작되는 바도 알고 있지만 그런 문제를 문제시 보다는 차후의 문제로 하고 아무리 하여도 유대의 자손을 통하여서 계대를 못할 것을 아는 다말은 부득이 자기의 시부를 통하여서 계대를 잇지 않으면 안될 바를 각오하고 그其 노중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때 마침 시부가 양모를 깎으剪려 딤나에 온다는 말을 듣고 과부의 의복을 입고 너울을 쓰蒙고 딤나 노측에 앉坐으매 유다는 창녀로 여겨 자부인줄 모르고 나我와 상관함이 어찜이뇨하니 허락하여 동침하니라. 그리하여 잉태된 것이 베레스와 세라였었다.
이런 비원리인 행사가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즉 다말은 비원리로 계대를 잇는 존재가 되었다. 이 다말의 행동은 즉 무엇을 표시하는 바냐 하면 해와가 사탄한테 정조을 빼앗겨서 비원리적 계대를 세운자가 되었으니 타락을 시작케 하였는데 그와 반대로 다말은 뜻 성사하기 위한 하늘 편쪽에서 계대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근본 뜻인 한 해와가 잃었든 존재로 후일에 나타나서 다말과 같이 행동하는 것과 동일한 사실이 뜻 노중에 있음을 표시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타락된 세상에 한 여성이 하나님의 근본뜻 성사할 수 있는 한 여성이 다말과 같이 비원리적과 같은 양으로 사탄 세상 상대를 대하지 않고 하늘 상대자로 계대하여야 한다는 한 사실의 내포되어 있는
표시적 존재 즉 다말이었다. 그런고로 다말과 같이 사탄 세상 여인이 하늘 남편 맞았어야할 근본한 해와가 나타나서 신부단장하여 세상 보기에 비원리양으로 생명을 아끼지 않고 뜻 계승을 찾아 준비하는 여성이 있어야 후일의 목적이니 이 다말은 그 실체를 표징하는 한 존재로 됨에 이런 다말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혈통적 계대 잇는 제일 조상이 됨이다. 예수와서 이와 같은 한 해와를 찾아 하나님의 뜻을 성사할 암시적 숨은 표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말과 같이 해와는 아버지품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이 다말 모양으로 세상에서 하늘로 옮겨지는 한 행로가 있다함도 표시함이다. 유다는 하나님의 대상적으로 표시된 바고 다말은 다시 찾아져야할 한 해와를 표시함이니 그 표시가 즉 예수의 뜻 중심이니 예수의 조상의 계대로 원리상으로 허여되는 뜻으로 되는 바이다. 남편되어야 할 존재를 두어두고 시부의 품으로 들어가야 하나님이 사탄한테 다시 빼앗는 양식을 실성하여서 근본복귀를 성사할 있겠으니 이런 표시로 됨이 사실이다.
이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의 쌍태는 본래 하나되어야 할 존재가 둘이 되었다는 것을 표시함이다. 사탄에게 속한 자와 하나님께 속한 자가 있다함의 표시이다. 타락이 없었으면 그냥 처음 태어난 자가 장자가 될터인데 서로 장자되겠다고 싸운 것은 타락의 피血를 받은 자가 되었기에 서로 뜻을 계승받은 자가 되기 위하여서 싸웠음을 알아야 한다.
야곱 때時에는 나온 동생으로부터 빼앗을 것을 표징하여 그 기업을 빼앗고는 기업성사자 베레스와 세라는 하나님의 기업계대에 들어왔었으니 먼저 태어난 자가 뜻 계승자가 되는 바는 사실이니 베레스와 세라는 싸워서 먼저 나오려는 세라를 물리치고 베레스가 난 것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예수와서 원수의 세상에서 원수 물리치고 장자의 기업성사 할 것을 표시함이었다. 즉 같은 세상에서 장자되려고 하는 자를 물리치고 근본자리에서부터 장자를 성립시켜 기업성사할바를 알아야 한다. 이와같은 원인으로 인하여 다말은 하나님의 뜻에 성사자의 어머니母가 되었음이다. 그 아들 베레스가 장자됨이었다.
이 전부는 예수와서 직접 싸워서 승리하여 기업성사함을 역사적 거리를 두고 표시한바이다. 라합 역시 그러하고 룻 역시 그러하다. 이 여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서 지금 현실의 입장을 떠나는 존재들로서 되었기에 그런 비원리행례양과 같은 허락으로 뜻의 성사를 계승한다는 하나님의 근
본뜻을 암시하는 표시적 존재들이었다.
밧세바를 살펴보자. 인간세상에는 용납할 수 없는 비행에서 생긴生起 한 존재가 즉 밧세바의 표시적 은사를 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탄이 해와를 빼앗을 때에 남편되는 하나님을 두고 빼앗은 것이었다. 이런 것을 다시금 빼앗아서 찾았어야 할 원리로서 남편있는 여성이 밧세바였다. 다윗 왕께 있어서는 한 충신인 우리야를 다윗왕은 전장 제일선에 보내어 죽이게 하여서 그의 부인을 빼앗은 존재 즉 다윗왕에게 동침한 솔로몬의 모친이 밧세바였다. 이런 밧세바가 어찌 예수의 조상되었는가. 또 지극한 영광의 왕 솔로몬의 모친이 되었는가 하는 것의 근본의의는 다윗왕은 하나님을 표시함이고 우리야는 천사장 누시엘을 표시함이고 솔로몬은 친히 찾고자 하는 영광주 예수의 중심을 표시한바이었다. 예수와서 하나님과 함께 하여야할 사명은 사탄의 처와 같은 해와를 우리야의 처 밧세바를 다윗왕이 취한바와같이 세상에서 성사하여야 할 사명있다는 근본 뜻 중심하였기에 이와같은 예수의 뜻 성사의 표시였다. 우리야를 죽인것과 같이 사탄이 이런 입장에 처하게하기 위한 뜻을 표시한 존재였기에 하나님은 사랑하여서 그 아들子을 영광의 왕 솔로몬으로 삼은것과 같이 이와 같이 찾는 이유로 뜻 성사하여 예수가 영광 누리게 하고자 함의 근본의의를 둔 뜻이 있기에 이와 같은 비공식적 존재들이 예수의 조상들의 어머니母들로 서게 된 바를 표징시키는 하나님의 중심의의였다. 이와 같이하여 예수와서 하여야할 사명적 내용을 표시하게하는 역사적 조상이었음을 알적에 과연 이 근본문제가 전부 해결의 중심의 시작이니 이런 표시로서 섭리하셨다. 예수는 세상에 탄생할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동정녀마리아로부터 탄생케하심이었다. 이도 역시 하나님이 사탄한테 동정녀 해와를 빼앗겨서 타락시켰으니 하나님도 정혼한 요셉을 상대로도 빼앗아서 제2차 아담 예수로 탄생하게 하심이었다. 이때 대상적으로는 요셉과 마리아는 근본 아담 해와가 타락때에 미성혼의 사실적 입장에서 사탄한테 빼앗겼으니 그와같은 원리로서 빼앗는 양으로 하나님의 동정녀한테 수태케함의 근본의의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 친히 영으로 빼앗았으니 예수는 육으로 또 그 근본의의를 복귀하여야 할 의의를 갖고 있음인데 마리아가 불순응 함으로 뜻 미성사로서 예수 앞에 난점의 시작을 보게 되었다. 그런고로 예수 육신으로 해와 한 자체를 찾으려고 하니 새 노정을 취치 않을 수 없는 입장의 노정이 삼년 공생애의 노정이었다. 그런고로 예수 앞에 보여지는 마리아
는 중대한 하나님의 뜻 중심하고는 원수적 존재로 되었다. 그런고로 예수 모친보고 여인이여 너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뇨 한 것은 하나님 뜻 성사케 못한 존재니 이런 말씀言의 한 상대의 존재였다. 인간적으로 알지 못하는 이와같은 근본원리를 세우려는 예수 앞과 하나님 앞에서는 사탄이 제일 무서워하는 근본역사인 이 터가 파괴하는 일이니 사탄은 예수 앞에 언제나 대립하여 나아감을 다시금 인식치 않으면 안될 사실이다. 이와같은 세상없는 한 노정의 시작이 있다함을 완성하여야할 그때(하나님)심정에는 말할수 없는 큰 생명대신하여서라도 성사치 않으면 아니될 과업이 남아지게 되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여 하늘 뜻 성사못하는 그 입장인 요셉의 가정과 마리아와 예수와는 상관없는 생활의 시작으로 나서게 되는 첫 시작이 광야생활이다. 이때 제자들로 완성하여야할 세례요한 일파 등도 예수 앞에는 하등도움 못되는 존재들이었다.


=== 제5 절 예수 삼년 공생애의 노정은 뜻 성사의 터를 찾기 위함 ===
<ruby>결정<rt>決定</rt></ruby> <ruby>범위<rt>範圍</rt></ruby> <ruby>내<rt>內</rt></ruby>에 들어서게 될 때에는 <ruby>무<rt>無</rt></ruby>에 <ruby>대<rt>對</rt></ruby>한 <ruby>결론<rt>結論</rt></ruby>은 <ruby>가<rt>價</rt></ruby>할것인데 그것 조차 <ruby>생각<rt>生覺</rt></ruby>도 못하고서 그저 <ruby>무<rt>無</rt></ruby>라면 <ruby>자기<rt>自己</rt></ruby>가 <ruby>무<rt>無</rt></ruby>라고 하는 바가 그냥 <ruby>무<rt>無</rt></ruby>로서 <ruby>만사<rt>萬事</rt></ruby>를 <ruby>해결<rt>解決</rt></ruby>하여주는 <ruby>중심<rt>中心</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로 되는가. 그것은 <ruby>지극<rt>至極</rt></ruby>히 어리석은 <ruby>행동<rt>行動</rt></ruby>이다. <ruby>유<rt>有</rt></ruby>라할진대 <ruby>기<rt>其</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의 <ruby>가치<rt>價値</rt></ruby>는 <ruby>절대유<rt>絶對有</rt></ruby>까지 <ruby>계속<rt>繼續</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하고 있는 바를 알 수 있다.


삼십년이란 장기간에 걸쳐서 하나님의 뜻을 품고 예수는 꾸준히 요셉의 집에서 목수업으로 생계를 취하여 나오든 그 심중에는 다만 뜻 성사의 마음을 단몇 시何時라도 잊어 본적이 없는 입장이었다. 삼십년간 여러 가지로 하나님 뜻을 가지고 시련를 거듭하여 오면서 뜻 성사할 수 있는 성취자가 되도록 내적완성을 위한 준비시대였다. 그 중에 내적으로 마리아 모친과 협조을 보지 못한 예수는 출가하여서 새 뜻을 성사하기 위한 제2차 뜻을 세워 찾고자 함에서 나서게 되었다.
그런고로 <ruby>유<rt>有</rt></ruby>로 하는 <ruby>자기<rt>自己</rt></ruby>와 <ruby>무<rt>無</rt></ruby>의 <ruby>중심<rt>中心</rt></ruby> <ruby>입장<rt>立場</rt></ruby>의 <ruby>자기<rt>自己</rt></ruby>에 대하여서 알려고 할적에 <ruby>제일<rt>第一</rt></ruby> <ruby>문제<rt>問題</rt></ruby>의 <ruby>중심점<rt>中心點</rt></ruby>이다. <ruby><rt>卽</rt></ruby> <ruby>유<rt>有</rt></ruby>로 내가 있어야 되며, <ruby>무<rt>無</rt></ruby>로 내가 있어야 된다. <ruby>문제<rt>問題</rt></ruby>의 <ruby>결정적<rt>決定的</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는 <ruby><rt>卽</rt></ruby> <ruby>자기<rt>自己</rt></ruby>이다. 이 <ruby>자기<rt>自己</rt></ruby>가 <ruby>지금<rt>至今</rt></ruby> <ruby>해결<rt>解決</rt></ruby>의 수수께기가 되는 <ruby>근본문제<rt>根本問題</rt></ruby>다. 그런고로 먼저 <ruby>천주<rt>天宙</rt></ruby>의 <ruby>기본단위<rt>基本單位</rt></ruby>라고도 있는 <ruby>자기<rt>自己</rt></ruby>를 <ruby>해득<rt>解得</rt></ruby>하여라. 그렇게 하므로써 딴 <ruby>존재<rt>存在</rt></ruby>가 <ruby>문제<rt>問題</rt></ruby>로 되는 바이다. <ruby>자기<rt>自己</rt></ruby>를 <ruby>명백<rt>明白</rt></ruby>하게 <ruby>해결<rt>解決</rt></ruby>하면 <ruby>기<rt>其</rt></ruby> <ruby>이상<rt>以上</rt></ruby>에 대한 <ruby>연관적<rt>聯關的</rt></ruby> <ruby>사실<rt>事實</rt></ruby>에 <ruby>대<rt>對</rt></ruby>하여서는 <ruby>인식<rt>認識</rt></ruby>할 수 있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ruby>문제<rt>問題</rt></ruby>는 <ruby>자기<rt>自己</rt></ruby> 하나 알고보면 하나님의 <ruby>존재<rt>存在</rt></ruby> <ruby>유무<rt>有無</rt></ruby>에 대한 <ruby>문제<rt>問題</rt></ruby>는 크게 논할 <ruby>문제<rt>問題</rt></ruby>도 아니다. 그런고로 알아야 한다는 하나님에 <ruby>대<rt>對</rt></ruby><ruby>근거<rt>根據</rt></ruby>의 <ruby>여하<rt>如何</rt></ruby>는 먼저 <ruby>피조체<rt>被造體</rt></ruby>인 <ruby>자기<rt>自己</rt></ruby>의 <ruby>근거<rt>根據</rt></ruby>에 대한 <ruby>실감성<rt>實感性</rt></ruby>을 먼저 알고 나아가면서 <ruby>탐구<rt>探究</rt></ruby>하면 <ruby>제일존재<rt>第一存在</rt></ruby>의 <ruby>확실성<rt>確實性</rt></ruby>은 <ruby>자연적<rt>自然的</rt></ruby> <ruby>의식존재<rt>意識存在</rt></ruby>로 계시는 것이다. 그것의 <ruby>명백<rt>明白</rt></ruby><ruby>체험<rt>體驗</rt></ruby>을 <ruby>실행<rt>實行</rt></ruby>하여 찾아보면 <ruby>기<rt>其</rt></ruby> <ruby>자체<rt>自體</rt></ruby>를 알 수 있다.
예수 한 존재가 그 시대에도 귀한 존재라는 것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요단강변 선포가 있은 후에 요한은 뜻과 사명을 다하지 못하여서 외부로 성사하려는 예수의 뜻 성사의 노정에 한 서리를 퍼부었다.
내부로는 요셉 가정이고 외부로는 세례요한이 하도 험난한 행로를  독단히 가려하니 원수 사탄 대한 싸움의 보조로써 광야40일 금식기간은 시작을 봄이다. 광야에 나아가서 40일 금식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예수 앞에 부여한 길 보다도 하나님이 근본 잃어버렸든 여러 가지의 조건들을 사탄과 결판判結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즉 예수는 제1차 하나님 책임분담 과정에 있어서 사탄한테 잃어버렸든 제조건을 찾아 성사할 역사적 복귀책임이 있는 동시에 자기로서 감당하여야 할 제2차 책임분담사명노정을 잡고 나서고자 하니 구약 시기에 보여주신 제1차 하나님의 책임분담노정을 본받아 성사하여야 할 시작이 있어야겠으니 먼저 사탄한테 역사적으로 표시적 약속의 물건에 침입을 본 근본사탄이
전적으로 예수 앞에 다시금 그 실체자로서 침범을 방지하여야 할 근본을 찾아 세우고자 하는 기간이 이 기간이었다.
예수는 제2 아담 하나님 몸으로 온 자였다. 출애급 시대에 광야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言에 두석판二石板을 깬破 사실과 반석 두 번친 사실들은 즉 예수 몸을 쳐 하나님 몸까지 칠 사실적 의의를 잊었기에 한번은 허락으로 한바이나 2차식이라는 것은 큰 문제 즉 사탄이 행한바의 간접적 결과점을 보게 되니 사탄이 하나님의 몸을 쳐 그 근본자체에 침입한다는 표시적 자체가 이미 침입을 보았으니 사탄은 벌써 예수 자체한테 이런 침입의 근본으로 인하여 다시금 사람들이 불순, 불신, 불시에 나가는 것을 바라든 차인데 내외로 예수는 실패보니 불순과 불신과 불시를 보니 벌써 사탄은 지난날昔日의 자기가 소유할 수 있는 표시로부터 그 근본 실체물까지 침입하여 굴복케 하고자 하는 의도의 실현상이 사탄의 시험이었다. 그래서 사탄은 실체 예수를 시험시키는 것은 실체를 굴복시켜 하나님 뜻 깨破하고자하는 일대 중요의의가 있었다. 그런고로 사탄은 예수를 시험에 대립하여 서게 되는 이유가 있는 바이었다.
이때 사탄이 시험주인격으로 설수 있었다는 바는 벌써 표정물 두이석판과 반석을 취할 수 있다는 그 이유로서부터였다. 그리하여 사탄은 실체 예수앞에 침입하려고 가진 근본을 잡으려하나 예수는 전체가 하나님 뜻을 완전히 성사할 수 있는 자체격 구비를 보니 사탄은 그 목적을 미달성하심이었다. 끝까지 뜻을 세울수 있는 터라 예수 앞에 보였다면 큰 사실이었겠는데 시험하여보아도 그 자체를 여하히 할수 없기에 사탄은 떠나가고 천사는 시종들었다는 기본의의를 알아야 한다. 사탄은 시험할적에 근본목적은 예수가 시험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면 그것은 예수 앞에 중요한 전목적을 갖고 하여만이 예수를 유인시킬것이 사실이니 예수 자체와 분립못할 그 목적체식을 갖고 시험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사탄은 승리하면 예수의 전목적을 파괴라는 그 근본목적을 갖고 시험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가 온바는 구약을 완성하여야할 존재다. 즉 하나님적 사명책임노정을 실체로 완성하여야 할 책임자가 즉 예수였다. 그런고로 그 책임 다 하려면 네가 모세의 실패한 부분을 찾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사탄은 아니 이 중요점을 가지고 시험한 첫 것 즉 돌石로 시험하심이었다. 40일 고로 인하여 받은것도 찾아 세워야 사명이 있으니 역시 40일 금식이 요구되었다 이 잃어버린 돌石을 찾으려니 굶주리고 있는
중에 사탄 와서 이 돌石로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떡이 되게하여 먹으라 하심이었다. 이것은 석판을 파하게되는 제일원인은 먹는 것을 기인하였으니 너도 그리 굶주리지 말고 먹으라하심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먹는 것 때문에 실패하였으니 너도 먹으라마 하심이었다. 그 근본실패케 하든 자리로 돌아가라하는 사실실패한 그 표시적 요구로 시험하였다. 그때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口으로 나오는 말씀言으로 산다하심이었다. 이는 즉 전부가 말씀言을 찾아서만이 산다는 것이었다. 이 말씀이란 뜻이 근본체를 찾아야 산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바이다. 즉 돌石과 반석인 동시에 그 근본실체인 예수 자체를 말함이었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로써 산다는 것으로 승리하였었다. 예수=하나님의 말씀의 전표시완성자이었다.
그런고로 예수 있는 곳에 하나님은 뜻 성사하니 너는 어서 물러가라는 근본목적으로 승리함이었다. 이러므로 잃어버린 그 실체인 터는 세워 놓았다. 이 반석과 돌石되는 터는 예수 하나로써 한 기반지었으나 이 다음은 뜻 실천성사는 남아있는 바이다. 그런고로 예수는 누구신고하니 성전 대신자이면서 성전의 주인공이라는 근본의의를 갖고 시험키 시작하였다. 이것은 즉 예수의 전목적체였다. 그런고로 사탄은 사실의 요구중요목적을 다시금 표시하여 시험키 시작하였다. 예수를 성전꼭대기頂에다 세우시고 왈 네爾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子이어든 뛰어내리라. 대개 기록하였으되 하나님께서 너爾를 위하여 사자들에게 분부하여 손手으로 떠받쳐서 발足이 돌石에 부딪히지 않게하시리라 하여 시험하시었다. 그러나 뛰어내리라하심은 그 성전 주인격에서 한 평민과 같이 되어라 하시어 그렇게 되면 사탄이 자기가 성전주관자가 되겠으니까 너는 원리대로 되는 존재인이니 그 원리적 존재는 즉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의 몸이 나이다. 그러니 나밖에 성전 주인공은 없으니 너는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 즉 그 주인공은 언제나 주인공이니 너는 물러가라하시는 그 근본의의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이리하여 성전 완성적 표시존재 예수는 그 표시적 실체존재로써 설수 있는 한 승리를 보았으니 너는 방해하지 말라는 근본 뜻 성사하는 과정에 사탄을 대방할수 있는 기초를 세워 대중 성전 번식의 시작은 할 수 있다는 터를 성사하시었다.
다음은 예수를 높은至高한 산에 올라上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示여 왈 만일 나我에게 엎드伏려 절拜하면 이 모든 것을 주與시리라
하시었다. 예수 대답하여 왈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하였으되 주, 너爾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유독 그를 섬기事라하여서 일대승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 근본의의는 예수 자신은 과연 하나님 뜻 중에서 천하만국에 지극히 높은至高은 존재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은 높은산至高山에 올上라 보임이 즉 예수는 하나님 뜻 중에서 제일 귀하고 천하만국에 제일높高은 자라는 것을 알며 그 영광 전부도 차지할 존재인것도 알고 있음으로 이런 것이 예수에게 제일귀한 목적이니 이런 예수의 전목적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엎드려절伏拜하면 이 모든 것을 주與리라하셨다. 이에 사탄아 물러가退라 하심은 이것은 원리적으로 나에게 속하여 있는 것이요 또 내것이면서 하나님 뜻에서 완성되어 하나님이 존경받으셔야 하는 바가 원리인데 네게 엎드려 절伏拜하라는 그 말은 사탄 본성폭로니 너는 물러가라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비원리가 말씀에도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惟獨 그를 섬기事라하셨다. 내가 섬길바는 하나님 한 자체밖에 없고 너도 근본은 그분한테 경배할 자 아닌가 하여서 대승리하여 사탄을 패하게 하였다. 이 승리로 인하여 예수는 승리의 출발이라는 뜻을 품고 나서게 되었다. 이와 같이 사탄과 예수와는 원리적 사실을 두고 싸웠으나 결과는 원리적으로 승리하는것이라는 승리점을 세워가지고 나서게 되었다.
사탄은 떨어졌으니 사람이 예수께 절대하면 사탄 시험한바와 같이 구약 완성자면서 성전완성주인자면서 세계대주재이라는 확고한 기본궤도를 잡고 나서게 되었다. 그 후에는 12제자와 70 문도를 택함이다. 40일 기간은 노아 홍수심판시도 40일주야로 죽이게 것도 즉 아담 때문이고 모세가 40일 주야를 고생함도 아담때문이니 제2 아담으로 오는 예수는 40일 고난의 기간에 잃어버린 전부를 완성하여야 할 대신책임이 있으니 40일 금식기간이었다. 그리하여 고난의 기간이라는 것을 없애기 위한 목적이 있기에 40일을 고생하는 것이었다. 모세가 40일 금식한바도 말씀言을 찾으려 하였으니 말씀 성사한 예수는 고통을 없애기 위한 금식이 40일 금식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로 인하여서 고생없이 말씀言 완전성사한다는 것이었다.
여기 부언하려는 바는 예수 요단강에서 세례받고 올라올적에 성신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위上에 임하심은 무슨뜻인가 하니 예수 존재는 아브라함의 약속받은 전부를 완성하는 중심자체였다. 즉 아브라함의 예약제물을 사탄한테 침입받았던 사실은 사탄이 따를 수 있는 터가 되


[[분류:통일교 교리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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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결론적結論的으로 표시表示하면 하나님 하나에서 사람 이성二性(남성男性+여성女性)으로 분립分立시켜서 장성長成케하여 사랑 이상理想을 주어 행복幸福케 하는 동시同時에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들의 양성兩性일체一體가 되어서 사랑하는 그 자체自體들을 볼 적에 얼마나 아름답고 하게 보는가를 사람에게 알게 하기 하여서 번식繁殖을 주어 사랑할 수 있는 존재存在들로 되게 함이 번식체繁殖體 자식子息을 위한 부모父母들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상理想 사랑하면 이와 같이 하게 보여지는 자체自體인간人間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人間육신肉身이 있고 영인靈人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에게 육신肉身부모父母부모父母가 딴 존재存在들과 다르게 소유所有함이 특유점特有點이다. 이 함으로 영원永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영원이상세계永遠理想世界부모父母를 모시고 각자各自가 사랑 이상점理想點매일每日 생활生活이 우리 인생人生이상理想이며 창조주創造主이상理想이며 의 아버지 어머니의 이상理想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신肉身 부모父母가 있는 동시同時부모父母가 있는 것을 찾아 모셔야만 우리 근본점根本點을 찾아 사는 가 된다.

그러므로 오늘 세계世界에 이 근본원리根本原理를 밝히지 못한 것을 천명天命하여 밝히고자 하는 바이다. 먼저 선언宣言하는 바는 하여 가르침을 받는 는 이 원리原理본론本論에 대하여 사실事實근거점根據点을 알기 위하여 문의問議하면 그 결정적決定的 자체自體를 알려 주리라.

5 하나님의 이상理想 중심中心은 모시는 종교宗敎

하나님께서 세계世界주관主管한다면 그 주관主管필연적必然的으로 자기自己를 높이는 중심구조中心構造중심中心하고 나타날 것은 우리가 상상적想像的으로 추측推測하여 알 수 있는 사실事實이다. 그러므로 세계世界종교이상형태宗敎理想形態을 가진 국제구조國際構造필연적必然的으로 나타나야 된다.

그렇다면 우리 이상理想 하나님의 이상理想세계적世界的으로 실현實現될적에야 인생人生행복幸福으로 살 수 있으며 길이 길이 행복幸福시작始作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바라는 종교宗敎세계世界중심中心으로 움직임을 부인否認 못한다.

그러하면 현금세계現今世界를 볼 적에 세계적世界的 중심中心을 이루고 나아가는 하나님을 모시는 종교宗敎는 무슨 종교宗敎인가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 종교宗敎기독교基督敎를 잡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그 기독교基督敎중심진리中心眞理와 하나님의 이상理想과는 동일同一하며 그 이상理想세계世界와는 동일同一노정路程을 떠나서 나아갈 수 없는 바이다. 이것이 없다면 종교宗敎로 모시는 존재存在하여서도 다시금 의심疑心치 않을 수 없는 사실事實이다.

그러므로 현세계現世界는 하나님을 중심中心국가國家들이 연합聯合국제기구國際機構반대反對인, 이 없다는 국가구조國家構造공산주의共産主義 국가체계國家體系가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다면 조물주造物主의 뜻이 완성을 보지 않을 수 없는 사실事實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반대反對하여 나아가는 그 존재存在들은 악신惡神주관국가主管國家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서로 소유所有하고자 하는 신적神的 싸움 하나님과 악신惡神 사탄과의 사람을 찾고자 함의 하나님의 뜻을 하여 사람을 빼앗기지 않고자 하는 사탄의 반상反峠 현대現代 조류潮流진상眞狀이다.

그러므로 진리眞理는 하나이니 하나님은 기필旣必천주天宙로 하여금 그 뜻을 성사成事함의 목적目的달성達成되는 데까지는 전쟁戰爭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선악善惡분기分岐가 먼저 문제問題로 우리가 고심苦心하여도 해결解決할 수 없는 사실事實이며 어찌하여 지금至今 세계世界까지 하나님이 섭리攝理하시는 근본문제根本問題 등등等等을 찾아보아서 누구나 전인류全人類는 하나님의 근본根本뜻과 그 이상理想전력全力 다하여 협조協助하는 방향方向으로 나아가야 할 책임적責任的 의무義務근본根本 등등等等을 밝히기로 하여보자.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독교基督敎를 세워 인류人類섭리노정攝理路程기독교基督敎지금至今까지 감추어진 진리眞理근본문제根本問題 등등等等명백明白히 나타나야만 된다 이 사실事實이 나타나면 말세末世동시同時우주적宇宙的 심판시기審判時期초래招來하는 사실事實근거根據 등등等等을 알아야 한다. 끝날이 되면 성경聖經도 완성하여야만 될터인데 성경聖經근본문제根本問題명백明白히 되지 않는다면 말세末世라고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재림再臨이라는 명사名詞조차 성사成事치 못한다. 재림再臨되기 성경중심聖經中心 근본根本해결解決하여만 되는 것이 현기독교現基督敎 신자信者중대重大문제問題이면서 세계世界 신학계神學界중대과업重大課業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전세계全世界신자信者들에 하여서 이 근본문제根本問題를 밝혀서 선포宣布치 않을 수 없는 바이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로 자기自己를 찾아 나오는 신앙생활노정信仰生活路程반대反對된다고 반대反對하지말지어다. 먼저 직접直接 하나님의 교시敎示를 받는 신자信者들은 밝힘을 받아 이를 지지支持하여 뜻 완성完成협조協助하여야할 중대의무重大義務를 알아야 한다. 누가 먼저 본시적本視的으로 알고 모시는 는 저 나라에서 큰 영광榮光존재存在일 것이며 세상世上에서도 그 존시尊侍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事實이다. 이 근본根本을 알고 나면 우리는 여하如何하게 행동行動하여야하는가가 중대重大 책임감責任感이다. 이리하여서 우리는 뜻 실현實現하는데 협조協助근본의의根本意義도 잘알면서 급속急速시일時日실현實現하면 하나님 앞에 범행犯行이라 아니할수 없다. 모르면 용서容恕받지만 알면 책임사명責任使命에 대하여 각자各自전부全部봉헌奉獻하여 기쁨으로 나아가야만 된다. 그러야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신앙생활信仰生活이라고 하는 것은 그 목적目的은 우리 인생人生이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는데서 완성完成된다.(5.22 ? 기념일記念日 )(51. 10. 1 정서淨書 소자紹子)

2 창조원리創造原理타락섭리墮落攝理

1 창조원리創造原理타락원리墮落原理는 사랑에서 시작始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創造하심도 자기자신自己自身지극至極한 사랑의 이상理想실현實現하고자 함이었다. 하나님은 중화성中和性으로 계시는 본형상本形像분성화分性化 하신 것이 사람 창조創造만물창조萬物創造표징表徵이다. 하나님은 분성分性을 보게 될 때에 지극至極한 사랑을 현실화現實化 시키고자 함이었다. 그러므로 만물전부萬物全部는 하나님의 이상理想을 더욱 미화美和하기 위하여서 만물萬物을 지으셨다. 만물체萬物體에서 사랑을 볼수 있게 되니 그 본성本性인 사랑 이상理想표징表徵시켜 내부內部로는 외부外部부터 표징表徵 체계體系하여주는 자극刺戟하여 내부자극內部刺戟조장助長시켜서 내부적內部的으로 더 높은 사랑 어떤 만물萬物에서도 볼 수 없는 최고最高의 사랑을 할수 있도록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다시말하면 사람의 사랑은 어느 만물성萬物性에서도 찾을 수 없는 사랑성을 갖고 있게 지으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이 사랑원만圓滿히 가져야할 목적目的이었는데 그 목적目的원만화圓滿化를 이루지 못한 것이 타락성墮落性출발出發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 나타나고 사람의 사랑을 만물萬物에게 표징表徵되어 미적세계美的世界를 이루어 온 천주天宙화동和動하여 일체적一體的 희락喜樂을 보이고저 함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천주天宙 이상理想극국極局중심中心이며 또 희락喜樂행복幸福만족滿足주륜主侖근본根本이니 그 사랑을 사람과 만물萬物과 하늘 천사天使들이 즐겨 사모思慕하면서 더욱 많이 받고자 함이 직접적直接的 요구要求였었다.

그러면 인간세계人間世界에는 선악善惡이 없어야 할 것이었는데 선악善惡시작始作도 사랑을 중심中心하고 되었었다. 은 하나님의 사랑 권내圈內며, 은 하나님의 사랑 권외圈外다. 본래本來 세계世界뿐이만이 목적目的이었는데 세계世界출현出現 타락墮落거래拒來선물膳物이다. 그러므로 천당天堂 지옥地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천당天堂세계世界 즉 하나님의 사랑 권내圈內요, 지옥地獄세계世界 하나님의 사랑 권외圈外세계世界 사망세계死亡世界라고도 한다. 그것은 생명의 근본根本 하나님 사랑을 떠난 세계世界이므로 그렇게 부른다.

그러면 인간人間타락근본墮落根本기원점起源點성경聖經을 비추어 또는 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態度 을 밝히기로 하자. 하나님이 천지만물天地萬物창조創造하실때에 중심中心하고 지으셨다. 은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에는 하나님이 영원永遠하심과 같이 영원성永遠性이 있는 동시同時에 사랑 이상성理想性완성完成근본존재根本存在다.

창세기創世記를 살펴 볼 적에 모세가 기록記錄할 때 알려주신 창조설創造說을 그 본의本意대로 발표發表키 위한 것이 아니고 문자文字 그대로가 아니고 영적靈的으로 미래未來비밀秘密을 두고 교시敎示한 바이었다. 그 당시當時에는 근본根本을 밝혀서 발표發表할 수 없었든 것은 그 당시當時 인간人間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사실事實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창세기創世記 창조설創造說 가운데에서 보여주는 타락墮落 근본자체根本自體선악과善惡果근본根本 존재存在케함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었다. 그로 하여 타락墮落시작始作된다는 논리論理는 너무나 다 잘아는 사실事實이다. 그 에 뱀蛇의 존재存在와 해와의 유인誘引이 그 근본根本 중심中心들이다.

그러면 이 사실事實사실事實사실事實이나 그 근본의의根本意義에 있어서는 큰 문제問題로 되어 인간세상人間世上중대重大난관難關화제話題거리였다. 사람은 묻기를 하나님은 능력能力이시며 알지 못함이 없으시며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시다는데 왜 타락墮落되게 하며 또 타락적墮落的 요소要素배치配置케 하였는가? 등등等等을 살펴 볼 적에 하나님은 사랑이니 무엇이니 한들 근본적根本的으로 시작始作을 하게끔 지어 놓고는 무엇이 하라 하라 하고 인간人間 하여 한다고 누구나 문제問題초점焦點으로 말하고 있다. 주인공主人公은 사탄인 동시同時역적逆賊천사天使이며 그 존재存在에 있어서는 누시엘 천사장天使長일명一名시작始作이 있음을 다들 아는 사실事實이다.

그렇다면 사탄이 근본根本 역적逆賊될 수 있게 하나님이 지으셨는가. 그 천사장天使長은 왜 주관主管못하였는가 중대문제重大問題이다. 창세기創世記 3을 잘 보면 1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야수野獸 에 뱀蛇이 가장 간교奸巧한지라, 뱀이 여인女人에게 일러 가로되 하나님이 동산의 과실果實을 따 먹지말라고 하시드냐”고 물은 것이 뱀이 타락墮落케 하는 시작始作이었는데, 잘 보면 뱀에게 이 사탄이 들어가서 운운云云구절句節이 없나니, 그래서 뱀이자 사탄임을 알수 있다. 사탄의 존재存在 뱀으로 표시表示됨을 알아야 한다. 뱀은 사탄이며

사탄은 누시엘이다. 뱀이라는 명사名詞를 빌려서 유인誘引 대상對像표시격表示格흡사恰似함으로 이런 표시적表示的으로 사용使用명사名詞인 것이지 그 자체自體가 뱀蛇이 아니다.

신자信者들은 자체自體가 뱀으로부터 유인誘引받게 된 줄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벌써 인간人間에게는 타락墮落시킬 권한權限없는 존재로서 사탄은 유인誘引 노정路程성사成事코저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벌써부터 만물萬物주관主管부여附與받고 지었기 때문에 사탄도 이것을 알 터인데 주관主管받을 뱀 가지고 유인공작誘引工作을 하리라고는 생각生覺되지도 않는 사실事實이다. 설마 유인誘引하려면 더 고귀高貴존재存在로만이 필요必要함을 우리는 상식적常識的 판단判斷으로도 명백明白사실事實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근본진리노정根本眞理路程을 밝히지 아니 하였기에 지금至今까지 확실確實근거根據를 잡기 못하고 나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至今은 때가 다 되었으니 세상世上에서 성사成事하여야 할 시기時期도 왔으니 필연必然역사적歷史的으로 미분명未分明 창조근본創造根本타락근본墮落根本출발점出發點을 밝혀야만 하나님의 뜻이 성사成事시기時期를 알려주는 것이니 반드시 근본根本표시表示하여야만 한다. 이것이 지금至今까지 세상世上을 찾고자하는 하나님은 사람의 근본根本으로부터 섭리攝理근본문제根本問題의 뿌리()가 되는 것이므로, 지금至今 세상世上에는 뿌리를 하는 말세기末世期라고도 부르는 시기時期당도當到하였기 때문에 이 사실事實을 새로 온 천주天宙발표發表하는 바이다.

본래本來 하나님은 무형세계無形世界에 계셔서 천사天使 을 지으시고 다시금 유형만물실체세계有形萬物實體世界를 하늘 무형세계無形世界의 그림자 모양模樣으로 지으시기 시작始作하였다. 만물유형실체세계萬物有形實體世界를 지으시기 천사天使를 지으심은, 하나님의 유형실체이상有形實體理想 세계世界 창조創造함을 돕게하는 동시同時에 여러 가지로 문의問議의논議論상대相對로 하여 왔든 것이었다. 천사天使 에는 천사장天使長이 있었다. 그 천사장天使長 역적逆賊 궤도軌道를 밟게 된 누시엘이었다. 천사天使 을 지으심은 유형실체세계有形實體世界를 지어 하나님의 이상理想 전개展開세계世界를 도와주면서 협조적協調的 존재存在로 지으셨고 그리하여 이 실체實體

세계世界와의 이상理想시작始作을 보게 될 때에 역시亦是 천사세계天使世界이상理想부여附與받을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創造하심의 근본의의根本意義천사天使도 알지 못하였든 것이었다.

만물실체세계萬物實體世界실현實現되면 하나님은 물론勿論이고 천사天使들까지도 기쁨이 되어 온 천주天宙는 하나님의 이상理想 기쁨에 충만充滿하여 그야말로 이상세계理想世界조성造成코저 함이 목적目的이었는데 목적目的미도달시未到達時타락墮落이라는 비공식적非公式的 존재存在생기生起게 되었다. 이는 누시엘의 행동行動으로부터 시작始作됨이다. 이 행동行動이야말로 인간人間에게 있어서 무한無限고통苦痛근본根本이 되어 시작始作하였다. 이것이 지옥분기地獄分岐시작점始作點이다. 시작始作이다. 하나님이 본래本來 만물萬物을 지으실 때에 그 본의本意는 하나님의 본형전개本形展開면서 본성전개本性展開와 모든 각만물자체各萬物自體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근본根本상징象徵하는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로 되어 근본진리체根本眞理體되는 하나님의 본성품本性品표시表示충분充分요구要求됨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유일唯一이며 영원永遠이며 불변不變존재存在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진리眞理근본根本이며 진리眞理중대삼요소重大三要素란 유일성, 영원성永遠性, 불변성不變性을 지음 받은 만물萬物구비具備하여 이성적理性的 생활형태生活形態보장保障될수 있어야만 된다. 그러므로 만물萬物에로 하나님의 성품性品표시表示될수 있는 개성진리형태個性眞理形態를 갖추어 지으셨다. 그러므로 이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로 지으시기 하여는 소생蘇生으로부터 장성長成으로 장성長成으로부터 완성完成으로 되는 계급階級을 두어서 조성造成하였다.

존재存在완성존재完成存在로 되려면 소생蘇生시작始作을 보아 장성長成으로 장성長成을 다하여 완성完成으로서 만물萬物궤도내軌道內하여서 창조創造받게 되었다. 다시 표시表示하면 ①진리眞理에는 소생蘇生이 있고 장성長成이 있고 완성完成이 있다. 이와 같은 시기적時期的 과정過程경과經過하여야만이 한 진리체眞理體완성完成된다. ② 진리眞理에는 유일성唯一性, 영원성永遠性,불변성不變性이 있어서만이

하나님이 지으신 하여 이상존재물理想存在物로서 취급取扱하게 되어있다.

1 어떻게 지으셨나

말씀(言)으로 만물萬物창조創造하시었다고 하시었지만 그 말씀言이란 명사名詞 그대로가 아니라 말씀이라는 명사名詞 가운데는 하나님의 이상理想의 한 표시체表示體증거證據로 되어 이상理想을 그대로 딴 존재물存在物실현實現시키고자 함에 말씀(言)의 중요목적重要目的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1장 2절에 말씀言이란 태초太初에 하나님과 같이 계셔서 말씀言으로 만물萬物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물건이 말씀言이 없이는 지으신 것이 하나도 없나니라.

이 말씀言이란 의의意義는 하나님의 이상理想제일존재第一存在의 마음 계획計劃을 말씀을 하여 제이존재第二存在확립確立중매적中媒的 분담과정分擔過程 기간期間이 말씀이 점유占有부분部分이기 때문에 말씀이라고 표시表示한다.

를 들면 사람이 말하는 바는 마음의 실상實狀제이실체실상第二實體實狀완성完成코져 하는 것이 중심목적中心目的이다. 말씀으로 지으셨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근본이상형根本理想型을 그대로 만물실체형萬物實體型으로 전개展開시켰기에 말씀으로 지으셨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이 실현實現되는 곳에 이상理想전개展開되는 것이 근본根本말씀의 목적目的임으로 이런 명사名詞대용代用하신바를 알 수 있는 바이며 또 사실적事實的 의의意義로 되어있다.

말씀으로 만물萬物을 지으셨다고 하는 것은 벌써 하나님이 직접자기直接自己로 되어있는 제이존재성第二存在性을 알려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말씀으로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근본형태根本形態성상性狀을 그대로 벌려 놓았다는 의의意義가 있단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지으셨다는 것은 상대성相對性을 말하면서 음양성陰陽性을 말하는 바를 알려주는 사실事實이다.

이 말씀이라는 의의意義는 여기에 시작始作되는 바이다. 이 말씀에 의의意義지금只今까지는 해득解得문제問題이었지만 창조원리創造原理를 살펴볼 적에 아무런 문제問題가 아니고 사실적事實的 실체實體로서 취급取扱되는 바이다. 이러한 의의意義를 두고 만물萬物을 지으셨기에 말씀으로 지으셨다고 선언宣言하심이다. 창세기創世記 1장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무엇이 있으라 하시면 그대로 된지라 그대로 된 존재存在에 대해서 하신지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몇째 날이더라 하신 구절句節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절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몇째 날이더라 하는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면 저녁부터 아침까지를 하루로 잡고 있는데 그것을 세상적世上的으로 살펴보면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으면 날수는 이틀인데 왜 한날로 하였나 하면 여기에 큰 의의意義가 있는 것이다.

기간其間은 한 개체個體존재存在창조創造될 때에 소생蘇生으로부터 장성長成으로 장성長成으로부터 완성完成까지에 도달한 개체존재個體存在가 하나님의 뜻에 합치合致될때에 하신지라고 명명命名하시었다. 그러기에 그 기간期間시완是完할 수 없는 것이다. 저녁이라 하신바는 한 개체물個體物창조創造하심을 필하시든 때를 두고 말함이다. 즉 한 피조물체被造物體중심中心하고 말함이다. 아침이라 하는 것은 한 밤 시기를 지나서만이 오는 바인데 이 아침이라고 하는 것이 이 물체物體완성完成되어 새출발하는 것을 아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존재물存在物이라도 저녁서부터 밤 기간을 통과치 않으면 안되었었다. 이 기간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통과通過하여서만이 하나님께서 하신지라 하시었다. 그러면 이 밤 기간이란 무엇일까 하면 피조물被造物은 한 진리체眞理體로서 영원永遠하면서 불변不變하며 불변不變하면서도 또 이상형理想型표시表示할 수 있는 존재存在로 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한 시험기간試驗期間이 즉 밤 기간期間이다고 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한 시험기간試驗期間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결과結果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존재存在로 보게 되어서 만이 하신지라고 명명命名하심이다. 이 이라고 하는 말씀중에는 하나님의 지으신 물건物件영원永遠할 수 있어하는 완전完全 대상존재對象存在임을 말하심이다. 이렇게 만물萬物을 5일간日間 지은 물건物件은 무엇이나 저희가 밤과 아침 기간을 하나님의 뜻에 알맞게 통과通過치 않으면 하다고 명명命名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신지라고 명명命名받은 바가 창조創造하심을 받은

만물萬物의 한 공통적共通的 노정路程이었다. 그런데 6째 지음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形像대로 사람을 창조創造하시대 일남일녀一男一女창조創造하시고』라고 창세기創世記 1장 27절에 있는 것을 보아도 전에 말한바와 같이 하나님 속에는 여성女性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음받은 인간人間만물萬物주관主管할 수 있는 존재存在임으로 창조創造함을 받은 모든 물건物件통과通過공통적共通的 창조과정創造過程을 다 원만圓滿하게 통과通過하여만이 주관격主管格 주인공主人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이니 사람 역시 이 저녁기간되는 지음받음을 하고는 밤기간과 같은 시험기간試驗期間이 있고 그 시험기간試驗期間통과通過한 후 아침 기간부터 만물萬物 주관이상主管理想근본출발根本出發코저 함이 근본목적根本目的으로 되어 있었다.

이 사람은 만물주관萬物主管을 하라는 예약豫約을 받고 난 후 실제주관實際主管으로 한 밤기간인 시험기간試驗期間필요必要하게 되었다. 아침기간期間에서부터 이상기간理想期間이었는데 이 밤 기간期間에 사람은 타락적墮落的 유인誘引을 받게 되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 밤 기간期間은 어떤 기간期間이었는가 하면 소년시기少年時期로부터 장성長成하여 성숙시成熟時까지 인지라. 성숙시成熟時부터 이상理想사랑을 할 수 있는 완성完成할 때까지가 그 밤 기간期間요구要求하는 기간期間이었다.

창세기創世記 1장 31절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하신지라 한 것은 만물통합萬物統合하여서 말씀하신 바이지 히 사람만을 중심中心하고 한지라 함이 아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밤 시기時期통과通過치 않았을 때에 히 선하셨다고 하였기에 그 이란 것은 예약적豫約的 선이지 실격적實格的 선이란 명명命名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만물萬物주관主管하라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만물萬物전부全部주관主管할 수 있는 실격부여實格付與를 이루고저 함이 밤 기간期間요구要求하는 기간期間이었다.

만물萬物을 주관하려함의 근본목적根本目的은 하나님의 이상理想실현화實現化하는 목적目的이었다. 그 주관主管할 수 있는 존재存在 아담 해와는 만물萬物전부全部주관主管할 수 있는 권한權限과 그의 자격격위資格格位는 어디서 받을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 목적目的이었는데 이 목적目的은 즉 하나님으로부터이었다. 그런고로 만물주관완성자萬物主管完成者는 하나

님이었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만물萬物주관주인격主管主人格으로 주신바의 근본의의根本意義는 누구를 상징象徵시키냐 하면 하나님을 상징象徵시키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근본根本 사람을 창조創造하신 의의意義실체만물實體萬物 주관자主管者로 지음 받은 아담 해와가 실체實體를 가지신 하나님의 몸들이었다. 그리하여 천주天宙를 친히 하나님 자신自身주관主管코저 함이 목적目的으로 창조創造함을 받았다. 만물萬物주인공主人公 되는 실체實體를 쓴 하나님의 존재存在가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타락墮落되고 보니 그에게 달린 만물萬物근본주인根本主人을 잃어버린 존재存在로 되었다.

2 그렇다면 타락墮落시작始作을 알아보자

아담, 해와를 창조創造하시기 에는 무형세계無形世界천사天使들은 천사장天使長중심中心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받았다. 그때 천사장天使長 누시엘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로 의논상대議論相對로 되었고 전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의 생명生命근본根本이면서도 모든 행복과 요소要素이었다.

하나님이 무형세계無形世界를 지어놓고 천사天使들로 협조協助하게 하면서 실체만물세계實體萬物世界창조創造하기 시작始作하였다. 하나님이 유형실체세계有形實體世界를 지으심은 무형실체無形實體자기自己존재存在유형실체세계有形實體世界를 통하여 번식繁殖의 터로 하시고자 하심이 목적目的이었는데 그 중심이상中心理想은 하나님만이 알고 천사장天使長도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유형실체세계有形實體世界창조創造하시매 자기自己 이상理想전개展開와 함께 기뻐하며 동시에 천사장天使長도 기뻐하였다.

그런데 만물萬物주인공격主人公格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하나님은 아담, 해와에 하여도 사랑을 하시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서 천사장天使長에 대하여는 대하는 일이나, 사랑하는 일이나 멀리 함이 아니었는데 천사장天使長 누시엘은 아담 해와가 존재存在하지 않으실 때보다 자기自己 자체自體에 있어서는 더욱 만족감滿足感을 느껴주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아담, 해와가 받으니 자기自己에게 대한 사랑의 감소減少되는 을 느껴서 다시금 이런 도 느끼지 않는 동시同時에 사람에게까지 가는 사랑을 자기가 소유所有하려는 마음으로 공작工作함이 시작始作하였다. 그때 하나님은 해와를 지극히 사랑하시니 그 해와 자체自體를 자기 소유所有로하고자 하여서 천사장天使長 누시엘은 아직 성숙成熟치 않

은 해와를 대해서 유인誘引시작始作하였다.

창세기創世記 2 9에『생명수生命樹선악과수善惡果樹가 있더라 하시니 무엇인가 하니 생명수生命樹는 ()아담을 중심中心삼고 하나님을 표시表示함이고 선악과수善惡果樹는 ()해와를 표시表示함이다.』천사장이 해와를 보니 아름다우매 과연 하나님이 사랑할만한 존재이었다.

이 해와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매 그 사랑을 빼앗기 위하여 해와의 사랑의 실체인 정조貞操소유所有공작工作시작始作하니 천사장天使長 누시엘은 하나님이 허락許諾치 않는 행동行動시작始作하매 그 자체의 마음에는 공포심恐怖心원리적原理的 가책이 있었다. 공포심恐怖心을 가지고 해와의 사랑을 소유所有하려 하기 위하여서 해와의 정조貞操유린蹂躪하고 보니 누시엘의 마음에 있는 공포심恐怖心동시同時에 천사장의 지혜智慧가 해와와 사랑의 일체一體를 이루고 나니 해와는 천사장天使長지혜智慧 소유자所有者가 되는 동시同時공포恐怖의 마음을 자극刺戟받았다.

그리고 보니 해와는 미성숙기未成熟期에 있었지만 자체自體지혜智慧가 밝아짐을 하여보니 해와의 자기의 남편男便은 아담이라 하는 것을 명백明白히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아담이 자기自己남편男便이므로 다시금 남편男便대로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해와는 아담한테 사랑을 강요强要하게된다. 그 강요强要하는 해와의 지각知覺치 못하고 그의 요구要求하니 벌써 해와의 공포심恐怖心 아담에게도 생기生起게 되어 하나님의 법리탈선法理脫線함을 알게 되니 아담 해와는 나무 아래에 숨게 되는 행동行動시작始作되어 무화과無花果나무 잎으로 범행犯行부분部分을 가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하나님과 직접直接 사랑의 일체一體를 이루어야 할 목적目的근본根本이었는데 비원리非原理 존재存在천사장天使長 누시엘과 사랑의 일체一體를 받아 비원리적非原理的 타락墮落 시작始作을 보게 됨이다. 그러나 타락墮落이란 근본根本 시작始作에 있어서는 하나님한테 더 사랑 받고자 하여 행동行動결과結果가 되었다. 누시엘은 사람에게 가는 사랑까지 소유所有코저 함이고, 해와는 근본根本 아담의 사랑을 찾아 세우고자 하는 행동行動에서 아담을 주관主管하고 나니 비원리非原理 출발出發시작始作됨이다. 이 해와의 행동行動으로 하야 하나님의 근본목적根本目的하는 행동行動시작始作되었기에 지금까지 인간人間 세상世上에는 여인女人들이 파멸破滅압제壓制무시無視에서 하나님이 미워하는

입장立場에 있게되어 여자女子들이 인류人類 역사상歷史上 부자유不自由구속拘束에서 나온바도 근본根本 여인女人 대표代表 해와의 실수失手보응報應이었다.

지금 와서야 남녀男女 평등平等 권한權限생기生起는 것은 역사발전歷史發展 시작始作동시同時시작始作을 보아야 할 것이었는데 이와 같이 진행進行 됨은 타락墮落초래招來선물膳物이었다. 그런고로 남녀男女 평등平等 권한權限시작始作됨은 인간人間타락전墮落前 궤도軌道에 설수 있는 동시에 하나님 하여 사랑 받을 수 있는 한 해와의 완전完全 존재存在시작始作을 할 수 있는 때라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인류역사人類歷史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복귀역사復歸歷史라는 것을 이 한 사실事實을 보아도 명백明白사실事實이다.

이러한 근본根本타락墮落기원점起源點인데 만일萬一 사람이 선악과善惡果를 손으로 따먹었으면 그 부분部分을 가릴 터인데 이 부분部分을 가렸음은 이 부분部分으로 범죄犯罪자체自體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자체自體이었다. 본래 지음 받은 몸에 있어서는 으로 지음 받았는데 어디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아니었는데 이런 부끄러운 부분의 구별區別타락墮落 본체부本體部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해와의 사랑을 중심中心삼고 타락墮落이라는 출발出發시작始作되어 기본基本이 되었다. 선악과善惡果라고 하심은 만약萬若 하나님의 뜻대로 성숙成熟하여 이상격理想格 사랑愛를 주고 받을 존재存在로 된 에 하나님의 이 아담 마음에 임재臨在하여서 사랑 성사成事하였으면 하나님의 지혜智慧를 받아 만물萬物 주인공主人公으로 완비完備되는 동시同時에 이것이 이상理想이련만, 그와 반대反對행동行動이야 탄식歎息치 않을 수 없는 사실事實이다. 그런고로 해와의 사랑 자체自體는 하나님의 사랑 아담 사랑 받았으면 지극至極근본根本시작始作하는 열매果의 행동行動시작始作하여 영원생永遠生이 될것이었는데 그 반대反對행동行動으로 말미암아 근본根本의 열매果의 행동行動이 해와의 사랑에 달려서 시작始作자체自體이니 선악과善惡果표시表示한 바이다.

(열매)라는 말은 씨라는 뜻이다. 의 씨도 해와와 사랑 일체一體로부터인데 의 씨로 되고 보니 해와의 행동行動을 누가 탄식歎息치 않으랴. 그런고로 여인女人지금只今까지 구속拘束받고 있는 사실事實은 그 원인原因으로 시작始作된다. 이 구속拘束해방解放되어 평등시기平等時期가 오면 재림시再臨時가 가까워온 줄도 알 수 있는 원인原因이다.

그런고로 기독교基督敎에서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하는 명사名詞가 무엇이냐하면 하나님 아담 해와가 완전完全하게 일체一體가 되어야 할 중심의의中心意義를 두고 말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과 사람과는 부자지관계父子之關係로 되어있다. 하늘 중심中心삼위일체三位一體 중심中心하고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되고 마니 악세계惡世界인 사탄 세계世界에도 삼위일체三位一體가 있는 바이다. 그리하여 사탄은 우리 사람의 부격父格으로 대입代入받아 불순不順, 불신不信, 불시不侍의 한 본체本體역사役事한 셈이다.

신약新約에 보면 예수도 불순不順, 불신不信, 불시자不侍者하여 요한복음 8장44절에 책망責望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너희들의 아버지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들은 너희 아버지의 욕심慾心하고자 하느니라” 하시었다. 이 말씀은 타락근본墮落根本주인격主人格본체本體는 사탄이라하는 것을 밝히 말한 것이다. 그러기에 뱀이란 사탄이를 표시表示한바를 밝히는 것이며 또 해와를 하여 정조貞操를 빼앗어 거짓 아버지 으로 되었다는 것을 밝히 말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원수怨讐 품에 안겨 있는 것을 알고 다시금 아버지를 찾아 모시게 하려는 노정路程이 구원노정이다.

아담 해와가 범죄犯罪하고 보니 본래本來 아담 해와에게 주입注入하여준 하나님의 근본자체根本自體인 터 생심生心을 중심하고 장성長成하여 하나님이 임재臨在할 수 있는 터, 자체自體 아담의 영인체靈人體자체自體의 몸에 있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거두심이었다. 그런고로 범죄犯罪하기 영인체靈人體 자체自體가 하나님 우편右便에 계셨다가 제이第二 아담 으로 모내심을 받은 그 분이 독생자獨生子 예수였다. 독생자獨生子라는 명사名詞도 여기에 명백明白하게 되는 바이다.

를 짓기 아담의 이 예수의 주입注入받아 오심이 근본목적根本目的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는 를 짓기 아담의 완전完全 성숙成熟존재存在로 나타나서 복음福音시작始作하심은 무슨 목적目的이냐하면 잃어버린 자녀子女들을 다시금 찾아서 타락전墮落前 하나님의 자녀로 찾아 옮겨 놓고자 함이 근본목적根本目的이다.

그런고로 오늘 인간人間은 원수의 몸에서 구속拘束받고 참부모父母를 잃어버리고 사니 그 양심적良心的 고통苦痛은 이 사실事實을 알려주는 간접적間接的 자극刺戟

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의 품으로 옮겨 놓아 하나님을 근본根本아버지로 직계혈통관계直系血統關係를 맺지 않으면 안될 중대重大 책임責任이 남아 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셔서 성사成事완성完成치 못하였기에 재림再臨요구要求가 되게 되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의 피血을 받았으니 양자養子관계關係로서 근본혈根本血을 받아서 소생蘇生되어 창조이상創造理想부모父母복귀復歸함이 우리 인간人間전목적全目的이다. 탄식歎息할바는 양자養子와 같은 존재存在로된 우리들이 생각生覺하면 고통지사苦痛之事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으로 하여 시작始作되니 이런 명사名詞생기生起였구나. 우리 근본根本 아버지는 영원永遠의 아버지이며 사랑하여 찾아주신 아버지시다. 이 아버지를 아버지로 알고 모시며 또 어머님을 모시는 그 시기時期 지상地上재창조이상再創造理想시작始作되는 시기時期이다. 이 시기時期를 알아서 아버지 어머니를 다시 찾는 그 기쁨이 온 천주天宙를 찾고자 함의 근본목적根本目的이다. 이 목적目的재림시再臨時부터 시작始作된다.

3 타락墮落케 하였는가

하나님이 본래本來 사람을 지으심은 개성실체個性實體완성完成하여서 영원永遠할 수 있는 한 이상존재理想存在보존保存할 수 있도록 지으셨는데 그 시기時期까지가 사람에게 있어서는 성숙시기成熟時期까지가 표준장성標準長成하여 영원永遠하신 존재存在의 터를 확보確保함으로써 하나님의 실체實體 사랑을 주고자 함이 목적目的이다. 그 기간期間까지 장성長成하여 완성完成까지 도달到達케 하심은 직접直接 하나님이 주관主管으로 하심이 아니고 그저 피창조물원리被創造物原理하여서 완성完成 성숙단계成熟段階까지 도달到達케 하시도록 지으시었기에 하나님은 원리原理 주관격主管格으로 계시어 그 결과結果를 보아가면서 하나님은 기뻐하시었으며 빨리 이상理想 감필減筆함을 지극至極요구要求하였다. 그리하고 하나님의 사람 이상理想 하나님의 이상理想자유이상自由理想표준標準하시고자함을 지으셨으며 그 이상理想에는 조금도 손실損失이 없도록 지으셨다.

그러므로 그 자유이상自由理想을 찾아 성사成事할 수 있는 표준궤도標準軌道중심中心하고 하나님의 뜻을 성사成事할 수 있는 존재의 터, 생심生心이 사람 자신自身에게 있어서 부여賦與받은 근본체根本體 터로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완성기完成期까지에 도달到達할 때까지도 하나님이 이러구 저러구(여러 모양으로) 자유이상완성自由理想完成을 간섭하지 않아도 뜻이 합당合當할 수 있도록 양심良心생심生心

은 그 중심中心 뜻()을 직향直向하여 나아가도록 지향志向하여 가게끔 원리原理지으셨기에 간섭 주관主管하지 않았다. 그것은 제일존재第一存在완성完成무시無視하는 것인 동시同時원리原理를 어기는 것이 됨으로 원리완성原理完成하여 뜻 성사成事코자함이 근본根本으로 됨이었다.

만일 하나님이 그 자체自體직접直接 주관主管하여 사랑하지 않았든가 하면 하나님은 원리原理미완성未完成하여 개성자체個性自體미완성未完成한 것을 사랑하여 일체적一體的 이상理想성사成事하였으면 미완성체未完成體불완전적不完全的 사실事實이 됨으로 그 근본根本 원리기준까지를 기다리심이 중심中心의의意義이었다. 만일 미완성시未完成時에 사랑 받으면 사랑 받는 그 자체는 사랑만을 요구要求하여 근본개성원리완성根本個性原理完成을 할 수 없는 사실事實이다. 또 원리규정原理規定하는 것이므로 그 자체自體나 사랑하는 자체自體가 즉 이상理想 사랑을 성사成事할 수 없는 사실事實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을 지극至極한 사랑 이상형체理想形體완성完成코저 함이었든 것이다.

사람이 완전完全한 하나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存在성숙成熟하였으면 원리적原理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완전完全 로서 보여질 수 있는 동시同時에 그 자체自體들의 사모思慕함이 직접直接 하나님의 자체自體에로서 할 수 있는 작용作用시작始作을 볼 수 있게 지으셨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계셔서 사람이 갖고 있는 사랑이 완성되면 자연적自然的 원리原理로 사랑할 수 있는 자극刺戟을 알아서 사랑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하늘 사랑은 이면서, 완전음적完全陰的 사랑 대상본체對像本體요 사람이 사모思慕하는 사랑 마음心의 기동起動목적目的 상대존재相對存在이었다. 그러므로 그때까지는 하나님은 원리주관격原理主管格으로 계셨다. 그 시기時期에 사람들의 타락墮落시작始作되었다. 사람도 자유궤도自由軌道천사장天使長자유이상궤도自由理想軌道 세계世界원리原理활동活動하면서 살 수 있는 자유존재自由存在들이었다. 그 자유自由 이상理想 중심中心자유성사세계自由成事世界조성造成하여서 창조創造 전자유이상全自由理想완성完成하기 하여서 개성완성個性完成자유체自由體 이상세계理想世界 존재存在들이 하나님의 근본根本 이상理想이었다. 그러면 자유이상自由理想완성完成하여야만이 목적目的이 된다.

그러므로 자유이상自由理想기대基臺로 하고 위에다 사랑 이상理想 원리原理 창조체創造體들이 영원존재永遠存在하여 하나님의 근본根本사랑 이상理想표현화表現化하고자 함이 목적目的이었다. 그렇기에 인간세계人間世界에서 자유自由찾기 위하여 야단하는 그 원인原因타락墮落연고緣故이다.

자유自由를 찾으면 이상자유理想自由를, 자유이상自由理想 갖고 찾으면 사랑으로써 이상理想사랑으로 역사歷史필연적必然的 궤도軌道를 밟게 될 것이다. 그것은 원리原理를 보아서도 이론적理論的이 가져다주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자유自由와 사랑 이상理想이 한 기대基臺로 하여 개성완성個性完成하는 곳으로 인류역사人類歷史가 흘러 나가는 것의 시작始作을 보는 이것은 복귀復歸로 되는 사실事實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왜 타락墮落시켰는가 하고 말한다. 사람들이 자유무대自由舞臺세계世界에서 자유생활自由生活하면서 완성점完成點 도달시到達時까지는 원리주관原理主管이니, 그 자체自體들의 행동行動직접直接 간섭치 않고 양심良心생심生心하여 본노선확보本路線確保하게 하였기에 사람으로서도 하나님을 직접直接 부를 수 없는 원리적原理的 거리距離를 갖고 있었다. 그런고로 부를 수 있는 정도程度완성完成 사랑을 성사成事하여야만이 생각生覺하여도 하나님을 알게 되며 하게 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직접적直接的으로 알리려는 사람 자체행동自體行動이 나타나지 않고 그 행동行動결과結果만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고로 사탄의 행동行動하는 기시基時에는 사람이 양심적良心的으로나 생심적生心的으로나 하여 행동行動하여서 하나님이 직접直接 자극刺戟할 수 있는 행동行動으로는 아직까지 미도달未到達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행동결과行動結果를 보아 타락墮落사실事實을 아시게 되신 것이었다. 이렇게 지으심은 완전完全한 사랑을 하기 하여 간접적間接的 거리성距離性을 두신 것은 에 계시는 하나님이 사람도 유형체有形體존재存在로 서 있어 서로 합체合體할 수 있는 전기원리電氣原理와 한가지로 지극히 큰 사랑을 시작始作코저 함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라고 한다면 사람 사랑 (-)는 직접直接 할 수 있는 것으로 존재存在 완성完成미완성未完成이니 타락행동墮落行動들은 (-)에 작용함이었다하여도, 직접적直接的 감응感應되지 못한 것과 같이 지으신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자체自體로서는 에서 고내固內하는 사랑을 하시고자 하여서 지었기에 만물자체萬物自體들의 사랑까지 인간人間하여야만이 연결連結되게 되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사랑의 미성사未成事타락墮落이면서 존재存在 존재存在

비원리존재非原理存在법리무대法理舞臺출현出現하여지게 되니 분기점分岐點성사成事하고 말았다. 그러나 원리적原理的으로 사람이 중심中心이니 이 사람의 번식발전繁殖發展과 함께 역사歷史시작始作되었다. 그러나 발전發展하는 세계世界역사歷史궤도軌道자연계自然界원리적原理的 움직임 위에 그냥 시작始作되었다. 그러므로 세계世界하는 주관본의主管本意 아닌 비공식非公式 주관궤도主管軌道무목적無目的 세계世界로 달리는 로 시작되니 그 세계世界생존生存한 사람은 어찌 안락安樂평안平安이 있으랴? 이렇게 됨바는 사탄의 공작工作이라고 지금至今 알게 될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를 타목적처他目的處로서 끌어온 중심中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인생人生무한無限 고통苦痛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됨은 창조본의創造本意 아니매 하나님은 본의本意대로 다시금 찾아 창조본의創造本意 이상체理想體하로 회귀恢歸하고자 함이 역사를 하여 하나님의 섭리攝理의 한 노정路程이다.

그런고로 사람 중심中心하고 선신善神악신惡神대립對立시작始作결과結果역사歷史 발전사發展史지배支配하게 되었다. 사탄은 원수怨讐 부모격父母格으로 사람을 주관主管하고자 함이고 하나님은 근본根本 자녀子女를 찾고자 함이 목적目的이다. 이것을 안 우리는 어찌 아버지 어머니 앞에 회개悔改치 않으랴. 이것이 이 기독교基督敎회개悔改근본의의根本意義다.

그러므로 근본회개根本悔改하지 않을 내(우리) 존재存在지금至今 회개悔改하는 것은 참 부모父母를 몰라보고 박대함의 심중心中으로 통분痛憤사실事實을 알게하는 결합結合정경情境이다. 이 시간時間의 기쁨이야 무엇으로 살수 있을 건가. 그러고 보니 근본만사根本萬事평안平安으로 원리原理시작始作되며 양심적良心的 해방解放의 시작이요, 참 기쁨의 시작始作이다. 새 복음福音 중심中心이다. 이같이 세상은 이 먼저 시작始作하였기에 그 뒤를 이어 선완성善完成을 이루고저 함이 목적目的하는 하나님의 뜻이요 또 하지 않으면 아니될 의무義務이니 기필旣必성사成事 까지 하늘은 승리勝利하고야 만다.

그러므로 세상世上지금至今 주관主管하는 시기時期이니 악자승惡者勝 세계世界에는 선자善者들이 많이 밟히고 있다. 세상에는 거짓것이 먼저 왔다가는 것이 세상世上이 보여주는 지금至今 현사회現社會실상實狀이다. 그 후로 시작始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리原理로 지음받은 온 천주天宙는 이 뜻 성사成事노력努力하고 있는 것을 현기독인現基督人이 알지 못하는 것이 통분지사痛憤之事이다.

시작始作하였으니 그도 원리노정原理路程을 밟아 결실結實하여야만 된다. 그런고로 완성시기完成時期 기독교基督敎말세시기末世時期재림시再臨時이다. 세상世上이 절대로 없어지는 바가 아니고 세상世上에서 지상천국地上天國완성完成하여만이 근본목적根本目的이다.

그런고로 오시는 완성주完成主로 사람 몸을 쓰시고 오신다. 그것은 원리原理보아도 알 수 있는 바이다. 육신완성肉身完成을 못하였기에 근본根本을 찾아 맞추는 시기時期말세末世심판시기審判時期이다. 근본根本 사람, 아담 해와를 찾아야 되며 을 찾아 터로 세워야 되는 시기時期말세末世다. 그러니 자기본체自己本體노정路程으로 하기 시작始作하는 때時가 말세末世다. 이상以上원리原理를 살펴 볼 적에 하나님은 원리原理를 통하여 만사萬事성사成事하고자 함이 근본의의根本意義이다.

그러므로 사탄까지 강제굴복强制屈服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굴복自然屈伏하며 6천년千年 역사歷史를 나오심은 전원리창조세계全原理創造世界완전完全히 찾고자 함이니 그래야만 원리창조세계原理創造世界 창조創造 이상체理想體시작始作할 수 있으니 사탄까지 자유행동自由行動케 하심을 잘알아야 한다.

성경역사聖經歷史하여서 사탄이 하나님께 대하여 말한 것이든가 참소함이든가 예수의 시험이라든가 등등等等을 보아도 그 자유허락自由許諾 이상무대理想舞臺근본의의根本意義로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바로를 강퍅하게 하심도 완전굴복完全屈服자유굴복自由屈服하신 까닭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百姓을 그 결과적結果的 행동行動 여하如何를 갖고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신 사실事實인간人間근본根本 자유행동自由行動 결과結果주관主管함을 알려주는 사실事實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우주이상全宇宙理想천주이상天宙理想완성完成하고자 하여서 지금至今까지 고심苦心하시는 그 자체自體를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아는 우리들에 있어서는 극심極心을 다하야 근본根本 창조이상創造理想완성完成하여야 할 책임責任각자各自가 다하여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은 나를 알므로 알 수 있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근본根本하여 까지 알아보려고 하고 있다. 과연果然 자체自體명백明白하여서 천주天宙전부全部원만圓滿하게 이해理解하고자 함에서 시작始作이라고는 할 수 있는 사실事實자명自明하다. 사람은 하나님에서 시작始作하였으며 만물萬物역시亦是 하나님부터라고 시정是定할 수 있지만 근본根本되는 하나님은 여하如何하게

시작始作하였으며 그 에는 무엇이 있었는가?라고 묻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存在근본根本보다도 실제문제는 제일第一 가까운데 있는 자기自己문제問題이다.

현실現實 자기自己존재存在근본根本을 안 에야 다음 문제問題 하나님으로 옮겨져야 할 사실事實인데 자기自己존재存在근본根本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존재存在여하如何를 말한댓자 자체自體를 들면 공식公式근본단위根本單位로 될 자체自體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면 단위수單位數로 있는 자체自體문제問題확정確定하여야만이 공식公式제일보第一步 응용應用시작始作계속繼續하여 광대廣大기본공식基本公式연결連結도 지을 수 있으면서 자체自體공식公式물론勿論 명백明白하여지는 사실事實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먼저 한 단위체單位體공식公式 근본根本과 같은 입장立場에 서 있는 자아自我의 한 존재存在확정確定하면 기타其他존재결정存在決定여실如實결과結果로서도 추측推測하여 그로 미쳐지는 근본자체根本自體파악把握할 수 있다. 그런고로 사람들은 자기自己들이 나 하는 것을 먼저 의심疑心하여야 할 사실事實근본根本으로 되어야 한다.

그리하면 자기自己가 있다면 무엇 보아서 알 수 있는가. 양심良心보아서인가 그렇지 않으면 감각感覺을 보아서인가 그렇지 않으면 체형體型을 보아서인가 하는 데에서 문제問題시작始作되는데 양심良心감각感覺체형體型라고 하면 무엇을 표준標準잡고 말하는가를 다시금 음미吟味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라고 하는 것과 라고 하는 것은 최초最初분기점分岐點을 무엇으로 잡고 있는가가 생각生覺중요문제重要問題이다. 하다면 상대相對하다는 것을 연상聯想시키는 사실事實인데 사람들이 하다는 그 자체自體는 무엇을 표준標準하고 시작始作케 되며 그 시작始作은 어느 한도限度까지 확대擴大하고자 하는가. 또 그와 반면反面하다는 것도 어느 한도限度규정規定하고자 하는가가 문제問題이다. 하다면 실체實體 존재存在시작점始作點을 잡아 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고로 사람 자체自體들이 하거니 하거니 하는 것은 어느 한 존재存在를 벌써 케하든가. 케 하든가의 실재實在 존재存在규정規定지은 위에서 말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내가 있다고 하는데는 실체實體하여서 성립成立되는 명사名詞이다.

그렇다면 는 어디에 한 가부존재可否存在근본결정根本決定을 지어주는 한 중심존재中心存在는 무엇인가가 요구要求되는 바인데 이 존재存在자기自己전제조건前提條件으로 규정規定기반基盤위에

시작始作하였기에 유무有無결정적決定的 판결判決을 내리는 행례行例지금只今 사람들이 말하는 범례凡例사실事實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事實자기自己중심中心하고 있는 사실事實생각生覺치 않고 자체自體에로부터의 시작점始作點을 보고서 하는데에서 여러 가지 존재存在확정確定을 알 수 없게 하는 것이 사실事實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자기自己가 한 무한유無限有무한무無限無와의 중간존재中間存在이며 한 공식단위체형公式單位體型이라는 사실事實명백明白히 하는 것이 금일今日 사람들이 짊어진 과업課業이다.

그러므로 하고 하는 것은 자체自體양심良心으로나 감각感覺으로나 체형상體型上으로나 실정實定할 수 있는 사실事實들을 부정不定 못함으로 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자체有自體자아自我지금至今 시작始作을 결정짓는 기본행동基本行動으로 시작始作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고로 결정決定한다면 그 결정決定자체自體최대치最大値가결可決하였는가 에 대한 정도程度여유如有인가가 의문疑問되니 그 라고 하는 그 와는 어떤 거리距離를 갖고 있는지 대단大端중요문제重要問題다. 라고 하는데는 우리가 보고 보이지 않는 정도程度인지 또 감각感覺할 수 없는 정도程度인지 체형體型구성構成할 수 없는 정도程度인지 그 입장立場명백明白여하如何한가 하면 물론勿論실재實在 감각내感覺內하는 데서만이 유무有無출발점出發點을 잡고 있다.

그러면 사람이 라든가 하는 것은 실체實體로서만이 문제問題하지말고 하다고 하는데에 있어서 그 는 우리가 라고 하는 최대치最大値가 아니고 연관聯關을 가질 수 있는 존재存在계속체繼續體로서 우리 감각내感覺內감촉感觸할 수 없는 범위範圍 에 있는 존재存在라는 것을 말하여 주는 사실事實이다. 그러므로 이 라고 하는 것은 더 적은 에로 나 갈 수 있는 중간존재中間存在임을 알려준다. 나를 로하는 자체自體표시表示하면 ① 이라고 할 수 있다면 하다는 것은 (0)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하나 ① 수자數字를 보아서 이 있다고 지금至今 수학세계數學世界에서는 보고 있지만 이 이라는 존재存在수자상數字上으로는 표시表示되나 실제實際에 있어서는 가 아니고 상징象徵하기 위한 추상推想존재存在와 같은 것이라고 지금至今은 말할 수 있다. 에는 무한무無限無한정限定 못하니 그 중심中心이야 가지고는 표시表示도 못한다. 그런고로 을 잡아보면 이라는 것은 수자상數字上 이론상理論上 존재存在라고는 인정認定할 수 있으나 수자상數字上으로는 이라고 하는 영점零點이 있는 위치位置에서 일반적一般的으로

알려지고 있는 과는 판이判異자체自體이다. 그런고로 이라고 현사회現社會에서 쓰고 있는 것은 소형체小形體의 것이며 더 로써 무한대無限大하여지는 존재存在중간자체中間自體임을 부정否定 못한다. 한계선限界線은 즉 하나이다. 그런고로 이러한 나를 잘 알려면 무한유無限有시작始作이면서 무한무無限無시작始作기초基礎를 알아야 할 중대重大문제問題생기生起는 바이다. 하나와 동일점同一點이라고 보니 무한유無限有무한무無限無존재存在제일第一 중심中心 거점據點 하나와 영선零線경계점境界點이다. 그러므로 나 하나는 무한유無限有시작始作존재存在극소유極小有존재存在를 알고 있는 바이면서 또 무한무無限無최대最大 존재存在라는 입장立場하고 있는 자체自體 ① 하나인 것이라는 존재다.

하나와 경계境界치 못함.

수자상數字上으로는 과 ①하나와의 상이相異 위치位置를 갖고 있지만 실제實際에 있어서는 동일점同一點이탈離脫 못하는 공통共通 노선상路線上존재存在다. 그러므로 실제상實際上으로는 1=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存在들이다.

1=

1= 절대치수絶對値數기본수基本數이며 기본존재基本存在다.

= 무한무無限無절대치수絶對値數면서 무한소수無限小數중간존재中間存在다.

그런고로 문제問題되는 바는 나 한 자체自體중대重大 문제問題인데 나는 지금至今 어디서부터 시작始作하여 잡은 존재存在라고 하고 싶은가? 그것은 각자各自자유自由로 맡기기로 하자. ①에서 시작始作하였으면 그 하나가 갖고 있는 존재存在가치가價値價전부全部 인식認識하여만이 되지 않겠는가가 선결문제先決問題다. 무한대無限大무한소無限小문제問題보다도 중간자체中間自體인 하나의 존재存在규정規定이 큰 난관봉착難關逢着이라 아니할 수 없는바다.

이 하나되는 자아自我를 알면 무한대無限大위치位置부터 무한소無限小의 위치가 갖고있는 중간존재中間存在전부全部를 알아야만 자기自己에 대한 확실確實규정規定을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그 존재存在전부全部 밝혀서만이 보다 더 큰 존재存在에 대한 근거根據해결解決자격資格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사람들은 자기自己가 있다고 하여 놓고 사실事實이니 하다느니 하는바는 수세계數世界에 있어서 이라하여 절대무絶對無존재存在결정決定한 듯이 하고 있는 바와 동일同一생각生覺으로 되어 있는 바와 한가지라. 없다할진댄 무한소無限小에 까지 도착倒着 세계世界자기自己

결정決定 범위範圍 에 들어서게 될 때에는 결론結論할것인데 그것 조차 생각生覺도 못하고서 그저 라면 자기自己라고 하는 바가 그냥 로서 만사萬事해결解決하여주는 중심中心 존재存在로 되는가. 그것은 지극至極히 어리석은 행동行動이다. 라할진대 존재存在가치價値절대유絶對有까지 계속繼續 존재存在하고 있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로 하는 자기自己중심中心 입장立場자기自己에 대하여서 알려고 할적에 제일第一문제問題중심점中心點이다. 로 내가 있어야 되며, 로 내가 있어야 된다. 문제問題결정적決定的 존재存在 자기自己이다. 이 자기自己지금至今 해결解決의 수수께기가 되는 근본문제根本問題다. 그런고로 먼저 천주天宙기본단위基本單位라고도 할 수 있는 자기自己해득解得하여라. 그렇게 하므로써 딴 존재存在문제問題로 되는 바이다. 자기自己명백明白하게 해결解決하면 이상以上에 대한 연관적聯關的 사실事實하여서는 인식認識할 수 있는 사실事實이다. 문제問題자기自己 하나 알고보면 하나님의 존재存在 유무有無에 대한 문제問題는 크게 논할 문제問題도 아니다. 그런고로 알아야 한다는 하나님에 근거根據여하如何는 먼저 피조체被造體자기自己근거根據에 대한 실감성實感性을 먼저 알고 나아가면서 탐구探究하면 제일존재第一存在확실성確實性자연적自然的 의식존재意識存在로 계시는 것이다. 그것의 명백明白체험體驗실행實行하여 찾아보면 자체自體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