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 교리 원문/원리원본/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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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 기여)님의 2026년 7월 7일 (화) 17:29 판 (교리 원문 전문 위키 페이지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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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원본 원문 002/005.

원문

가나안의 조상이 되어 하나님의 원수가 되리라는 것을 말함이다. 그리하여 또 다시 하나님과 사탄은 대립을 보게 되어 자손을 번식하니 또 다시 그 자손들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행동으로 흘러나가게 되었고, 노아 전과 같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탄의 뜻 번식에 협력하여 나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금 사람을 뜻 중에 품으려하는 자들을 빼앗긴 셈이었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이 사탄한테 속하지 않게 하기 위한 대안이 요구되는 바이다. 때 마침,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곳으로 흘러나가는 행동뿐이었다. 그것은 사탄이 즐거워하는 행동결과이니 이것을 그냥 두어 둘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언어가 하나이니, 전부가 의사가 통하여 한 곳으로 동작하는데, 전체적으로 움직이게 되니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하늘 편의 뜻 성사하기 위하여 도움되는 언어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바벨탑을 쌓아 사탄 뜻 협력하는 행동의 기인을 가져오니 하나님은 언어를 상반되게 함은 뜻을 반하여 행동 협조물이 언어로써 한 방향으로 전인류가 흘러들어 나갔으니 언어를 혼잡케 하여서 그 사탄 뜻 돕는 길을 막고자 함이 인간 언어를 혼잡시킨 근본의의였다. 그런고로 만약 뜻 중에서 인간이 이런 탑을 쌓았으면, 또 이 뜻 성사로 나갔으면, 언어를 혼잡케 할 리 만무한 일이다. 그런고로 세상에 뜻 성사시기가 오면 언어는 하나의 목적으로 하늘적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 뜻을 성사 협조하여서 통일된 언어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 시작은 중심존재 즉 재림주가 오면 그로부터 하나님의 언어와 창조적 주관 허락이거든 세계주관세계는 근본적으로 복귀되어야 한다. 사탄 뜻 돕는 바벨은 분기하는 공작이었으나, 하늘 대하는 뜻의 탑은 합체하여 하나되게 하는 공작이다. 하늘 뜻 중심하고 복귀된 사람들이 뜻의 탑을 높이 쌓는 것을 보고자 함이 하나님의 뜻이다. 또 , 우리 이상의 터다. 이렇게도 하나님은 사탄 대하여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언어 혼잡케 하신 것이야. 인간에게 복된 일이 아니냐! 이와 같이 안타깝게 한 사람의 죄를 누가 감당하랴! 이렇게 하였으나, 사람은 여전하게 뜻을 멀리하여 뜻을 세워서 받들면서 거기에 성심을 다하는 자를, 보기가 심히도 드물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뜻에 품으려던 노아의 자손들을 또 다시 사탄한테 빼앗겼으니 이것을

다시금 빼앗는 역사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사탄의 사랑하는 상대자 우상 장사商하는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을 다시금 사탄품으로부터 빼앗아서 자기 뜻의 자손을 빼앗긴 것을 다시 갚는 양으로 즉, 반대노선으로 찾아 세우기 위하여서, 사탄 단체 쪽인 우상장사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을 택하신 근본의의가 있다. 그 이유는 사탄이 제일 싫어하는 바인 동시에 통분한 존재였고 하나님 편에 있어서는 지극히 귀히 보는 존재이었다. 왜냐하면, 사탄품에 있다가 빠져나온 대표자요, 뭇사람의 본이 될 행동이면서, 다시는 사탄한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미 나왔으니 들어갈 수 없는 입장을 취하게 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택하여 하나님이 뜻하시려는 딴 지역으로 인도함이 즉,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것이 고향산천인 갈대아우르를 떠나라는 근본목적이었다. 그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니 하늘 대해서는 기쁨의 존재며, 사탄 대해서는 슬픔의 존재로서, 한 분기노선을 세울 수 있는 중심존재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에 선 아브라함 뒤에는 원수 사탄이 미련을 갖고 따라들게 되었다.

제 2 절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섭리하신 근본의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자기 고향산천과 정든 향토와 정든 부모에 대한 정리라든가 친척에 대한 정리라든가 아브라함에는 큰 고통의 상대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노정은 이 모든 것이 문제있는 곳에는 시작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정은 하늘 정을 성사하고자 하는데는 반대되어 직접행동 여하를 가름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것을 문제로하지 않고 갈대아 우르를 출발하는 그 행동은 과연, 인간으로써 찬양하여야 할 문제인 동시에 사탄에게 대한 복수적인 하나님 뜻을 성사하는 터의 행동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자기의 기본 뜻을 아브라함으로부터 본격적 출발을 보고자 함이었다. 사탄은 아브라함을 빼앗기고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회귀 공작을 시작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뜻 성사를 파괴하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대하여 축복하려할 때 아브라함 자체에 대한 축복보다도 뜻 중심하고 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근본의의이다. 아브라함의 복의 기관될 축복을 하여주며, 그로 하여금 대족속을 이루리라고 축복하여 주마하신 뜻을 받들어서 고향산천을 출발하는 아브라함 자체에는 하늘의 공작시작을 받게되는 하나님 대신 뜻 성사의 기본행동의 시작은 완성되었다. 아브라함을 빼앗아낸 하나님은 자기가 하고자하는 전목적을 두고 축복과 약속에 대한 새로운 결정적 언약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결정적 언약을 세우게 된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족속에게 잡혀간 롯을 다시금 찾아와 승리한 후에 시작이었다. 이와 같이 한바는 하나님이 미워하는 민족과 대립케 함은 하나님 자신이 뜻을 세울 수 있는 확고한 기초를 세우는 동시에 벌써 하나님이 미워하는 나라와 원수적 입장에서 하나님 편 쪽에 섰기에 결정적 언약 성사를 시작함이 있었다. 이 언약이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민족건설의 시작이며 이를 확대시켜서 국가건설에로 그리하여 세계복귀의 근본의의를 두고하신 언약의 전부의 시작이 즉, 아브라함의 전 언약중에 포함되어진 근본 사실을 알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비몽사몽간에 말씀하시기를 두려워懼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盾이다. 네가 받을 보상이 크다.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가 없다하니, 아브라함에 대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의 친자식으로 인하여 후사가 되게 하리라 하시며 데리고 외로 나아가 가라대, 하늘天을 우러러仰 보라 하시며 별들衆星을 헤아릴計數 수 없는 바와 같이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되리라 하시매 아브라함이 이를 믿으니 의로 여기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목적을 완성키 위하여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였다 하시면서 이 땅을 너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하리라 하시었다. 그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말씀하시기를 제가 이땅을 얻어 터전基業삼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있가 하니 네가 나를 위하여 3년된 암소牝牛 한마리一와 3년된 산양 한마리一와 3년된 모양 한마리一와 산비둘기 한마리一와 집비둘기한마리一를 바치獻라 하니, 아브라함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에 쪼개어 우,좌에 놓고 그 비둘기는 쪼개지 아니하여 제단위에다 놓고 제사를 드리니 그 제물위에는 독수리가 날라서 앉게 되었다. 그런고로 여호와,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너의 정녕히 알라. 너의 자손이 객이 되어 4백년 동안 고역하리라 하신 노함을 보게 되었다. 이 제물은 무슨 제물이었는가 하면 그 후손에 대한 전부의 제물의 표시물이었다. 즉 기제물이 전 하나님의 뜻이 되는 백성을 찾고자 하는 목적이며 전인류를 찾아야 할 하나님의 근본목적을 표시한 대신적 제물이었다. 이 제물위에 독수리가 내렸다 하는 바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벌써 사탄의 침입을 증거하는 사실이다. 즉, 아브라함 하나를 중심하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고 할 때에 사탄은 뜻을 파하기 위하여 아브라함 한 자신의 결과적 행동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제물을 즉, 전 하나님의 목적을 두고 예약적 제물임에 틀림없다. 이 제물 실패하면 다시금 사탄에게 침입노정을 양보하는 행동인데 아브라함이 전 뜻을 합의있게 헌제치 못함은 하나님의 계획의 뜻은 벌써 미성사 한 것을 표시하는 중대한 것이 이 제물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 자신은 이 중대한 제물을 드리는 자신으로서 제물을 전부 쪼개지 못 함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제물을 쪼개는 것은 사탄편 사람과 하늘편 사람이 있다는 전인류의 표시였다. 그런데 비둘기를 쪼개지 않는 바는 하나님의 소유된 자손과 사탄 소유된 사람과를 갈라서 섭리코저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의의였는데 쪼개지 않는 것이 있으니 하나님 자손될 약속과 언약의 성립을 보는 제물에 완성한 성립을 보지 못하고 마는 사실이니, 다시금 그 자손까지 사탄이 침입할 수 있는 터를 지은 것이 시작을 보이게 되어 사탄은 자기편쪽 표시로 갈려지지 않는 제물 비둘기를 취하려하여 제단 위에 내린 바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뜻한 전 목적은 사탄이가 다시금 차지하는 뜻으로서 제물헌제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3대 제물은 무슨 표시냐하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진리 목적 중심은 소생에서 장성으로, 장성에서 완성으로써 한 제물을 통하여 표시한 바이었다. 즉, 비둘기를 드리게 하심은 하나님의 뜻 소생을 표시함이고, 양을 드리라하심은 장성을 표시함이고, 소牛를 드리라고 하심은 완성을 표시하는 중대제물이었다. 만일 이 제물이 뜻에 합의하게 헌제하였으면은 애급 4백년 고역이라는 것의 생활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없었을 것이었는데 4백년 고역이라는 것은 이 헌제물의 중대한 실패를 알리는告 바의 사실이다. (4백년 년대의의는 나중에 논하려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예약 제물에 실패를 보니 그것은 자손을 사탄에게 빼앗기는 표시로 되었다. 그런고로 아브라함 자손 중에도 사탄이 침입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근본목적은 다시금 미성사적 원인으로 기인되니 하나님은 다시금 아브라함 자손에게 사탄 침입의 길을 막으려니 대신 제물은 사탄한테 빼앗겼었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사탄의 뜻 성사를 본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는데 즉, 사탄한테 제물드린 것과 같이 되어버렸다. 즉 아브라함도 자기 소유의 근거점이 되어 전 목적 미성사를 가져오게 되니, 다시금 하나님은 약속제물은 빼앗겼지만 아직 실체 자손되는 것은 빼앗기지 않으려니 하나님은 부득기 한 입장을 취하여 아브라함을 따르려는 자손에 대한 사탄의 침입을 막으려하매 하나님은 그

자손의 시작인 한 자체가 사탄과 하나님과의 직접문제 요구물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취하여야 하겠고 사탄은 벌써 이삭에 대하여서 취할 수 있는 예약제물, 대신제물을 자기가 소유한 것이기에 사탄 역시, 제물 대신되는 실체인 이삭도 요구물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다시금 순종을 세워 하나님 편으로 전자손을 돌리려니 아브라함에 대하여 실체 자식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문제를 제기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즉 아브라함으로 모리야 산상에서 이삭을 드리라는 근본의의는 여기 있는 바이다. 그때 뜻 중심하고 순종하면 사탄은 떨어지고 하나님 편으로 속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대신제물 잃어버린 것을 실체로서 찾는 양으로 헌제의 명령에 순종하게 되었다. 이때 아브라함은 이런 원리적 문제는 알지 못하였다. 이와같은 입장에 아브라함의 순종은 용이한 문제가 아니었으나 예약제물 헌제시 실패가 전자손에게 4백년 동안의 고역의 뜻을 알고나니 이번 실패면은 말할 수 없이 큰 어려운難 문제가 생기리라는 것을 아는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게 되어 뜻대로 번제로서 자식을 드리는 확고한 입장에서 사탄은 목적 상대인 이삭에게서 물러가게 되는 바의 시작을 볼 수 있었다. 그런고로 이 사실의 근본 뜻을 현하 신자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나 성경에 아브라함의 실패한 구절을 알게하는 구절이 있다. 즉 창세기 22장 12절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 할 때에 그 아이에게 손手를 대어 해하지 말라. 네가 네 독자를 나에게 바치獻기를 아끼惜지 아니하니 이제야 네가 너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줄 아知노라 하심이다. 이 성경구절 중에 이제야 하는 그 구절이 즉 전번 실패를 경고하는 동시에 뜻 계승성사를 고함이었다. 이리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뜻 노정을 찾아나가는 그 도중에는 예약시대제물로 실수한 허물로 받은 아브라함 자손에게는 4백년동안 원수 앞에 고역하여만 본노정에 들어설 것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 애급 4백년 고역은 필연적 과정이었다. 진리를 찾으려니 진리에는 소생이 있고 장성이 있고 완성이 있는 바이니 하나님도 이 찾고자 하는 뜻을 한 진리노정이니 이와같은 의미에서 3대제물이 요구되었다. 이 제물적 사명의 소생부분은 즉 구약시대의 표징이니 소생하면 장성 완성으로 하려하던 것이 인간이 절대 순종치 못함으로 분립을 자아내는 것으로 전개할 것이 표징되어 있다. 한 제단위에 3제물은 한번에 뜻 성사하여야 할것이 근본뜻이었다. 여기에 소생역사는 하나님 책임분담 시작 기초를 잡는 것이고 장성은 예수 오셔서 근본복귀의 복수의 예로 해와를 찾아야만 되는 것이고 완성은 예수를 중심하고 전인류와 합하여 또 하나님과 합하여서 전근본창조목적 달성을 보고자 함이 표시로된 제물에 의의다. 제물중에 비둘기는 소생을 표시함이니 구약시기를 말함이고 양은 장성이니 신약시기를 표시함이고 소牛는 완성이니 재림을 말함이다. 장성과 완성과는 함께 하려는 뜻은 사람들이 불순종과 불신으로 인하여 예수를 죽이니 재림이라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소牛는 완성의 표시었는데 왜 암소牝牛였든가. 즉 완성할려면 해와 한 존재가 문제되는 중심점이니 암소牝牛는 해와를 표시하는 뜻이다. 이 해와가 즉 완성할 수 있는 목적상대이었다. 간단한 제물내용을 소개하였지만 다시금 본론으로 들어가면 사탄은 이삭의 실체에서 뜻을 세우지 못하고 다시금 기 자손에 대하여 대립적 태도는 물론이며 실체자손에 침입의 길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이삭의 한 존재가 예약대신제물에 침입을 보였기에 그 이삭에게도 불순종의 터는 벌써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잘못하면 생길 것을 사탄은 바라보게 되었다. 그것은 제물을 자기것으로 하였든 사실이 있음으로 사탄은 여전하게 그 후손에게 대하여 대립성을 갖고 대하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삭에게 자식을 낳으니 쌍태인지라 즉 에서와 야곱이었다. 이 쌍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아브라함의 실패로 인하여 제물에 원치 않는 존재의 침입이 있었든 것이므로 이 실체자식 이삭이 문제되어 또다시 찾았으나 이삭의 자식한테 대하여는 사탄 역시 찾고자하는 한 터를 양보하였든 실수가 있었으니 그 자식되는 쌍태는 원수적 표시의 소유자와 하나님적 표시의 소유자가 한 태중에 있음을 표시함이었다. 그래서 에서와 야곱은 복중에서부터 싸우심은 이와같은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존재이니 복중부터 싸운 것이다. 자식낳으니 에서와 야곱이러라. 에서는 원수 사탄의 대표요, 야곱은 하나님 편적 대표이었다. 즉 에서는 아브라함의 먼저 제물의 실패의 씨요, 다음 야곱은 잃어버린 이삭을 실체로써 찾아서 제물까지 찾아 세우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제2차적 존재인 야곱을 통하여서 뜻을 세우고자 함은 근본이 그와같이 되었기에 빼앗아서 성사하는 양이니 하나님은 에서의 축복을 야곱에게로 돌리는 근본의의는 여기에 있有다. 그때에 제물 실패

있으면 이삭 자식에 하나님이 미워하는 에서와 같은 존재는 없었다고 할 존재가 생기게 된 것은 다시금 사탄을 분립하여야 하늘 편과 사탄편을 완전분립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탄이 다시는 아브라함의 자손한테 미련을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므로 이와 같이 표시적 사실로서 야곱이 에서의 장자의 직분을 빼앗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예수와서 원수의 피를 받은 전인류를 빼앗아 넘길 것을 예고하는 사실이니 그런고로 이 한 사실이 근본을 밝혀주는 것인 동시에 뜻 성사의 한 표징으로 가는 바가 되어야 하는 바는 아브라함의 언약은 전목적의 표시인 약속이었기에 이런 의미의 한 분기 존재가 이삭이므로 기 자손 에서와 야곱이 사이에 되어진 사실이었다. 이러한 결과의 영향을 받고 났기에 맏 자식은 하나님 앞에 사랑 받지 못한 사실의 원인이나 창세기 전면에서 보여주는 사실이다. 예를 찾으면 이삭, 야곱, 요셉 에브라엘, 아벨 등등의 사실은 이와 같은 사탄 피를 받고 났기에 맏 자식은 미움의 상대이었다. 여기서 뜻 성사의 출발의 후손은 야곱을 중심하고 택한 백성 12 형제는 12지파으로 시작의 출발은 야곱부터 시작케한 것은 근본의의로 보아 알 수 있는 바이다. 이삭은 하나님과 사탄이 바라는 존재입장이 아담과 같은 두 상대입장이었기에 근본출발 못했다. 즉 이삭부터 애급 출발이 아니고 야곱부터 되는 바는 이상 해설 중 원리로서 명백한 사실이다. 이리하여 택한 하늘 백성이 되어야 할 그 근본은 애급으로 옮겨지게 되는 바는 뜻 성사의 첫 출발이다. 지금부터 하나님과 사탄과의 분립되어 복귀의 출발은 시작된다. 이것이 즉, 하나님적 분담책임성사의 출발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이것이 근본이 되어 즉 표본이 되어서 장성과 완성적 사명분담 책임자의 본이 되어야 하는 제1차 하늘적으로 하나님 직접 사명코저하는 기초는 시작함인 동시에 제물표시소생과정의 발로였다. 그런고로 애급에서부터 가나안 복귀까지는 예수 오셔서 할 기본표시공작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한 목적을 한 완성으로 볼 수 있는 한 터의 공작이니 애급서부터 솔로몬 왕까지 제2차 완성하여야 할 존재가 나타나서 성사할 한 예고적 표시로 되어있다. 즉 예수 오셔서 애급서부터 가나안 복지로가는 양으로 우리 인간이상 복귀지로 찾아들어가는 한 사명적 기초표시로 전개시키고자 함의 의의

를 알아야 한다. 애급서부터 가나안 복귀노정은 예수의 노정을 표시한바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근본 뜻이다. 그리하여 타락시킨 인간 대하여 하나님이 자기자신 책임분담 대하여 시작하는 것이 즉 모세의 세우심이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신하고 바로는 사탄을 대신하고 나오게 되었다. 모세가 택함을 받은 원인은 원수가 이스라엘 백성을 극도로 학대하는 동시에 강제로라도 전멸시키고자 하는 행동으로 나가게 되어 고역 중 원수의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과 싸우는 것을 보고 애급인을 죽이는 모세는 본래 애급 궁중에서 장성하였으나 애급 사람을 원수시하는 바는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표시하지 않는 지조는 과연 하나님이 택하시는 귀여운 행사였다. 애급 궁중에서 자라 났으나 애급 사람이 아니고 하늘의 백성의 변함없는 그 자체이었다. 이 자체는 애급 원수의 모든 제일 미워하는 자체인 동시에 사랑받고 자라는 존재였다. 이 자체가 애급 궁중에서 나왔으니 애급과는 다시 결탁 안하는 존재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고로 그 위에 애급 사람 대하여 증오심을 갖고 있는 확고한 존재이니 하나님이 택한바가 원인이 있는 바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서 애급 왕 바로를 대하여 공작을 하게 하기 위한 시작을 명령하게 되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되는 모세는 자기자신이 애급 백성앞에 믿信게 할 수 있는 증거를 요구하니 지팡이杖으로 뱀蛇이 되게 하는 첫 이적을 보게 하신지라. 그리하여 조상에 나타나現신 하나님을 알게 하여 뜻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함이었다. 그 다음에는 손手을 품에 넣으라 하심에 손手을 품에 넣으니 나병이 된지라. 그 다음에 다시금 품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매 낳은지라. 그 다음에는 듣지 않거든 강수를 가져다가 부으라 그리하면 피가 되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시었다. 그 다음에는 모세는 말言을 요구하였다. 이와같은 사살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려 할적에 이런 이적을 보여주었나하면 하나님이 장래하시고자 하는 사실의 터가 되는 행사이니 그 표시되는 모든 뜻은 전부 예수 오셔서 할 목적성사의 한 상징이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 되어야 할 원리적 목적이 있는 바이다. 또 지팡이杖라는 것은 대신 의지자를 표시함이었다. 즉 나를 대신보호할 것을 말함이고 전 앞길을 잡아준다는 뜻이며 또 합당치 않은 것을 치어 뜻대로 성사하게 하는 뜻이 있는 바이었다. 이것은 즉 예수가 우리의 전생명에 대하여 보호가 될 것을 말함이었다. 뱀蛇를 보여 주심은 뱀으로 유인한 표시적 존재로 해와 역사한 것을 보여 주었으니 예수와서 뱀과 같은 역사로 사탄 중에서 빼앗을 역사하여야 할 하늘 사적 표시를 예고하기 위하여서 착수할 것을 의미하심이었다. 사탄이 네가 뱀蛇갖고 했으니 나도 뱀蛇갖고 예수로 역사한다는 것이 근본장도 뱀蛇되게 한 의미가 있는 바이다. 모세 뱀蛇 예수는 사탄 뱀을 잡아먹어 승리할 것이 예고적 표시였다. 모세 손手을 품에 넣은 것은 첫 번은 사탄의 유인받아 사탄 품에 안긴 해와의 행동은 인간을 죽이는 역사였으니 다시금 손手를 품에 넣으심은 예수 오셔서 해와를 품는 사실은 나병과 같은 사중에서 소생하여 산다는 표시로 손手의 병病이 낳은 것을 보여줌이었다. 즉 제1차 품은 것은 사망이나 제2차 품으심은 생명이라는 영생의 시작을 예증한다. 강수로 피된다는 바는 물水은 세상을 표시함인데 예수와서 사망중에 처한 존재들이 예수 오셔서 피로되는 생명 주입을 시작한다는 것을 표시한 바이었다. 말言의 요구는 상대 목적 성사할 수 있는 중요 책임개성체니 말言을 요구하심은 창조물 전부를 말씀으로 지은 것이 잃어버린 것을 예수와서 말言 상대의 이상적 실체를 다시금 성사한다는 뜻을 표시한 바이었다. 즉 말言은 창조목적 물실체를 말하심이다. 아담 해와를 찾는다는 것과 전인류와 만물을 찾는다는 의미가 있음이다. 그 때 모세가 요구하는 전부를 허락하시고 애급級으로 가라하심에 모세는 자기의 처자를 데리고 하나님의 지팡이杖를 들고 애급級으로 들어가 바로에게 청하기를 이스라엘은 나의 장자라하라.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하라. 그래도 바로 보내지 않으면 장자를 죽이라 하는 명령을 받고 들어가는 도중 한 숙소에서 여호와 모세에게 현하여 모세를 죽이고자 할 때에 모세의 처는 아들 양피를 벗겨던져서 죽음死을 면케하면서 처가 말하길曰 당신은 피흘리는 남편이로다 한지라 그것은 할례를 한 연고여라. 여기에 야곱 모가 야곱과 합하여서 살리는 행례를 성사한 것이었다. 그 근본의의는 무슨 뜻인가하면 모세는 즉 할례를 성사못하면 죽死는 것이고 성사하면 산生다는 중대의미가 있는 바이다. 예수 오시면 무슨 목적이나 하면 할례 근본목적완성하는 실체인데 그것은 그 모친과 합하여서 만이 성립되는 근본의의있다는 것을 보여줌이었는데 처자가 합하는 일이 없으면 뜻 성사 못하고 예수는 죽음死은 십자가의 죽음死있다는 예고적 사실을 표시함이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장자로 성사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가 모세가 살아야生만 될 것이었는데 모세 한 생명은 전이스라엘의 대신생명이고 전 이스라엘의 대신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이 모세에게 있어서 할례 없으면 모세는 물론이고 전이스라엘 백성도 전부 사망하는 표시적 행례였다. 그런고로 모세 처자가 할례가 있었기에 살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생사의 중요문제를 우좌하는 근본문제성사의 책임을 표시한 바다. 이 입장에서 모세 처자 합함의 큰 승리적 조건의 성립을 봄이었다. 이 뜻을 세우지 못하였으면 모두 실패할 수 있는 곤란難한 문제이었다. 그런고로 이 한 모세의 처자의 한 할례가 전 택한 백성에게 대한 장자의 명분을 완성하게 하는 근본자체가 즉 할례였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오셔서 모친과 합력하여 할례성사의 뜻을 성사하여야 할 것이었으나 예수 이 뜻을 못 성사한 실패적 근본이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모친 뜻 받들지 못하였기에 예수는 모친에게 대하여 갈릴리 가나에서 이적을 볼 적에 여인이여하신 말씀의 근본의의가 있음이라. 그에 모친 대하여서 여인이여 너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한 말씀 등등의 시작은 예수는 뜻 성사의 제일 시작의 실패를 가져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십자가 상 죽음死의 시작의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다. 즉 모세가 하나님 앞에 뜻 성사할 수 없는 자기 삶生을 가지지 못한 것과 한가지 사실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하시는 노정의 숨어 있는 원리목적을 누가 알 수 있으랴. 여기에 할례에 대하여 말하기로 하다. 귀 본래 성경에 할례라는 명사가 생기게 된 것은 타락되었기에 기인되는 사실인데 본래 해와가 사탄 피를 받고 아담까지 타락되었기 때문에 할례의 중심문제가 요구되는 바이다. 그런고로 아담이 주관하여야 할 해와를 주관하였다면 타락조차 방지하였을 터인데 해와한테 주관받고나니 타락됨이었다. 즉 아담 양부를 통하여 전타락을 성사되었으니 귀임은 아담 남자에게 있는 것이었다. 이 남자되는 아담이 주관받고나니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존재로 되며 타락의 시작의 성립을 보게한 실체는 즉 남자의 양부였다. 그런고로 어두움의 피를 받아들인 그 자체이니 어두움의 피를 다시금 빼는 사실을 표징함이 목적이었다. 그런고로 아브라함 자손은 할례하여야만 즉 어두움의 피를 먼저 받아서 죽死게되었으니 그 자체로서 살려면 그 자체로서 사망의 피를 빼야만이 하나님께 속할 수 있는 시작을 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할례는 아브라함의 영원한 규례로 세움이었다. 그리고 할례있으므로 주관성을 다시금 복귀하는 남자의 자격을 부여함이다. 할례에는 미움의 할례가 있고(신10/16) 육신할례가 있고(창17/10) 만물할례가 있다(레19/23). 이것은 사람의 타락으로 인하여 온 천주가 더렵혀 짐을 말한다. 할례는 (1) 사망의 피를 빼는 표

(2) 주관성을 다시 찾는 표

(3) 근본 뜻의 자녀의 길을 찾는 약속의 표

이상과 같은 중대의미를 갖는 것이 즉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근본의미하는 것을 인간은 지금까지 미지의 것이다. 또 몰라야 하는 것이 한 원리였었다. 그런고로 모세의 이 행례는 전이스라엘에게 짊어진 전목적성사를 표시함을 다시금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모세 행동여 하는 예수 오셔서 할 사명적행로의 전형 표시로 그의 모든 일은 표징된 바라는 것이 원리로 보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의 사명분담책임의 과정은 예수의 기초되겠으니 같은 뜻의 목표표시으로 만사는 드러내어 나아가는 것이 근본의의였다. 모세에게 아론을 주어서 이스라엘의 속죄적 행례의 대표자로 세우심은 모세를 협조하여 한 목적 뜻을 성사코저하는 시종이었다. 즉 백성의 대신속죄책임 역할을 하심은 해와 자체로 될 성신과 함께 예수의 뜻을 시종하여 인간 대하여 직접 속죄귀임을 할 것을 표징함이었다. 모세에게 한 대신 협조자가 없다 하여서 아론을 준바는 아니지만 말씀의 대신을 요구하게 될 때에 아론을 세우심은 아론은 말씀 대신자임을 표시하니 말씀의 최고 문제자는 해와의 한 존재였다. 즉 말씀 성사는 해와를 완전하게 찾는 목적으로 기인되니 즉 아론을 세워 대신속죄하심은 예수, 해와가 합하여서 인간 속죄의 직접 문제를 하여야 할 자기 자신의 사명분담역할이었다. 즉 해와는 죄를 지었으니 해와로서 대신 씻는 역할을 해야 할 책임분담이 되었으니 아론은 모세의 한 상대격자로서 백성을 대하여 모세의 뜻 즉 하나님의 뜻을 성사하게 협조한 바는 예수 오셔서 말씀 상대찾아 뜻 성사를 잡을 것을 표징하는 의의이다. 모세의 이상과 같은 제조건의 성립을 보니 바로를 대하여 직접대면을 취하여 나서게 되었다. 그때 바로는 모세의 요구에 대하여서 순종치 않는 반면에 도리어 모세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증오심을 갖게 끔 하나님은 바로를 강폭케 할 것을 말하면서 바로 앞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어 광야에 나아가 3일쯤 여호와께 제사하기를 청하라 하시었다. 여기 3일노정 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전생명이 놓이느냐 안 놓이느냐 하는 문제는 3일노정이라는 문제를 걸어 놓고 시작하게 되는 기본요구조건이었다. 이 3일간이 허여 안되면 이스라엘 전부적 목적은 시작할 수 없는 문제를 말하는 바였다. 이 3일노정이라는 것이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성사하게하는 공작의 기본되는 요구조건이었다. 그런고로 예수 오셔서 사탄 대하여 3일기간에 대한 과정에 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이 과정을 성사하려면 모세에게 속한 구비조건 같은 제조건구비를 보아야 할 것이었는데 이 구비조건은 광야시험 통하여 그러는 사탄에게 승리함으로 성립되었으나 그의 대신역자 아론과 같은 해와의 존재의 구비성사를 보지 못하여서 3일노정 시작 노정을 자유롭게 넘어서지 못한 원인으로 십자가 3일간의 기본적 근본은 시작이었다. 이때 예수 앞에 어머님과 합하여 뜻 성사를 중심하고 해와 한 존재와 인간들이 하늘 편쪽으로 순종하였으면 예수의 십자가 노정은 다른 방향으로 효과적 노정을 보아 사탄 대하여 적극대상의 성립을 시작하였을 것인데 그 대상을 어떻게 해서라도 성사할 책임이 예수의 책임이니 죽어서 3일 기간을 거치는 사명적 책임분담을 완성하야 할 의미가 있음이었다.

제 3 절 모세에게 대한 하나님의 역사의 노정이 왜 예수의 노정 전모되는 이유

위에서도 간단히 표시하였지만 하나님이 본래 지은 것이 있기에 근본 책임존재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람이 타락한 후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었다(창세기 6장6절) 하심은 여기에 기인되는 바이다. 기 외에도 성경에는 하나님이 후회하시었다는 말씀도 있는 적을 볼 적에(사2/18) 하나님도 후회와 한탄하는 원인은 자기의 몸으로 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 잃어버린 것은 자기 몸을 잃은 것과 한가지였다. 그런고로 사람들이 제1차 심판으로 인하야 전멸 당한 후 하나님은 다시금 한탄하셔서 다시는 심판하지 않을 것을 선포하심과 동시에 심판받게 된 최종국점은 자기가 지었든 인간이었는데 타락되었음으로 심판이 생기였으나 타락하게 한 사탄도 본래 하나님 자신이 지으신 존재로부터 시작기인이나 전부의 책임은 하나님 자신이니 사람을 다시금 찾아서 근본을 다시금 성사코저 한 목적을 두고 심판한 것이지만 다시금 찾으려 할 때에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이 목적의 길을 닦기 위하여서 노아 이후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세를 통하여서 역사를 시작하였다. 즉 사람의 타락의 제1간접적 원인은 하나님이고 그 다음에는 아담이고 그 다음에는 해와이라는 본래 타락시킨 직접적 원인과는 반대로 하나님은 보게 되었다. 그래서 찾는 역사의 제일책임자는 하나님이 본이 되며 중심이 되어서 아담 해와가 찾을 수 있는 길을 닦고자 함이었다. 그래서만 아담 해와가 나아갈 직접 본으로 표시를 정하는 동시에 사탄 대한 승리노정이 되어야 되니 이 본대로 하여서 아담 해와의 승리할 수 있다는 길을 정하는 것과 같은 기초를 세워 놓으려 하는 것이 즉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시키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아담 대신 오는 예수는 하나님이 교시하여 준 승리의 본노정양으로 사탄 대하여 제1차 승리의 노정을 본삼아 나아가지 않으면 아니 될 의무가 있음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이 먼저 하신 일事을 본삼고 하신다는 말씀을 요한복음 5장 19절-20절에 기내용적 사실을 발표하였었다. 즉 아들子이 아버지父의 행하신 일事을 본見외에는 그일其事로 스스로自爲할 수 없나니 아버지父께서 행하시는 것을 아들도 또 그와 같이 행하시나니라. 아버지父께서 아들子을 사랑하사 그 하시는 것을 계시하시고 또 그 보다 더 큰일을 보이示시고 이등으로 기이히 여기게 하심이라 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는 하나님을 본받아 제2차 승리의 노정의 시작을 제1차 승리노정과 같은 노정을 취하여야 할 근본의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 (때에 )와서는 전사명역할은 하나님 책임분담 노정에서 보여진 사탄한테 더럽힌 바를 다 성사하여야만 시작의 출발을 보는 바를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책임분담을 모세를 세워 원수 품에서 뽑아내는 것과 같이 예수(때에 ) 와서 전인류를 찾아 사탄한테 뺏어야 할 사명적 기대를 상징사킨 사실의 근본원리를 알아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이 하신 길을 따라서 해야한다. 그래야 같은 목적하나를 합하게 할 수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이 분담하여 책임성사는 비공식노정을 아는 인간 우리는 절통치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예수와 성신분담역사도 사람 때문이었다. 이 모든 원리적 근본을 아는 우리는 전 정력을 뭐 아끼랴. 이와같은 기본원리를 알지 못한 타락인 세계에 처하였든 자아들을 알게 될 때에 그 원리의 전부가 사탄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인간이 되었으니 사탄 대하여 총공격하여 급속한 시일을 두고 복귀하여야 할 것을 알았도다. 이제야 참살길의 시작을 알았고 인생의 뿌리를 알았고 또 하나님이 누구라는 것을 알았으니 우리는 무엇으로 보답을 하랴. 문제가 이제 나타난 뜻 시봉이 최고문제로 되는 바는 두말할 바 없는 사실이다. 잃어버렸든 아버지는 6천년전이고 잃어버린 자식찾는 것도 6천년간에 쉬지 못하고 나를 찾으려시든 그의 존재 는 누구였는가. 즉 아버지 어머님의 존재이다. 이 기쁘고 고마운 소식을 널리 전할 자 세상에 어디있는가. 찾으시는 그 모습을 아는 자 몇 명이었는가. 지금까지 아버지 대하여 침 뱉었고 아들이로되 자식이 아버지를 모른다는 원통함을 길이 참으신 그 앞의 심정을 누가 동정할 효자가 세계에 어디 있는가. 이 길을 닦기 위하여 세상에 효자지도와 충신지도와 사제지도를 미리 전파하여 그 기반삼고저 함이었는데 지금 그 자체들이 없는 한탄지사를 또 몰라주는 인간이 되어지려는가 아는 자는 직접 대하여서 효자로 멀리 대하여만 뜻을 세울 수 있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대하여서 이상과 같이 삼강이라는 유교적 중심체로서 하나님을 모侍셨든가. 그 원리를 알지 못하므로 그리함이었다. 그와 같은 관계를 교시 못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슬펐으랴. 그것은 창조원리를 전부 완전히 찾아 첫 이상을 성사하려니 숨은 원리적 간격을 두고 타락하였기에 교시못함은 전번 말한바와 같다. 이와 같이 알아야 할 백성이 알지 못하고 왕으로 알아야 할 주인공을 알지 못하며 선생師이라면 이상없는 자로 시봉할바로 알지 못하는 원수편 대립하여 섰든 그 자체를 대하여서 하나님은 얼마나 안타까운 심정이었으랴. 무지한 백성을 찾아서 자녀삼으려니 모세를 세워서 바로를 직접 대립하심이었다. 지금부터 모세는 그 사명의 첫 출발을 원수 사탄의 대변인 바로에게로 발을 옮기게됨이 크나큰 역사의 희망의 초점이었다. 모세가 바로 앞에 나타나서 거듭나는 이적으로 바로를 굴복하게하는 역사를 시작하였다. 바로에 대하여 10여차에 대한 이적을 통하여서 바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다는 고백과 함께 완전굴복을 표준하고 역사하심이었다. 하나님이 바로를 굴복케 하심은 무슨 목적이었는가 하면

(1) 바로(사탄)가 다시는 택한 백성에게 생각조차 못하게 하고자 하심이고

(2) 바로(사탄)는 힘이 없으니 하나님의 요구대로 자복하는 동시에 순종하여야 할 것을 자각케 하기 위하여

(3) 원수의 모든 것을 선하게 하기 위하여

(4) 하나님을 반하는 자는 망한다는 것을 자각케 하기 위하여

(5) 장자의 근본 피血받은 자를 쳐서 원수의 피血을 멸하기 위하여

이상과 같은 것이 원수 바로(사탄)는 자각하여 자연굴복을 표준함이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무엇을 찾게 하기 위하여 바로를 강퍅케 하였냐하면

(1) 바로(사탄)은 원수로 증오심을 품게 하기 위하여

(2) 바로편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3) 우리편에는 절대능력 하나님이 같이함을 알게하기 위하여

(4) 애급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미련을 전소하게하기 위하여

(5) 애급 사람 대하여 한사람이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정을 통하는 자가 없게하기 위하여

(6) 하나님이 미워하는 정도만큼 이스라엘 백성을 올려놓게 하기 위하여

(7) 하나님의 뜻에 일관된 행동을 배양하기 위하여

(8) 어떤 난관이라도 하나님은 타개하여 주실 줄 알게하기 위하여

(9) 하나님을 대립하여 반대하는 자는 누구나 영원한 원수로 알게하기 위하여

(10) 전정의 승리적 요소를 배양하기 위하여

(11) 뜻을 바라 조급하지 않게하여 영원한 순종을 세우고자 하여

이상과 같은 의의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오래 연대시켜서 하나님의 바라는 조건이 구비할 때를 보기 위하여 바로(사탄)을 강퍅케 하심이었다. 이리하여 극도의 하나님을 대신한 모세와 사탄 대신한 바로와는 대립전을 전개함이었다. 그리하여서 최후 승리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은 희망과 소망과 행복의 곳 가나안 복지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작은 오늘 신앙생활 출발 노정한 표시적 노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장자를 치심은 하나님과 사탄과의 대상전 전개에 실패하는 종국에는 애급에 있는 장자에 대한 재앙을 내리심이었다. 이것은 무슨 의미냐하면 사탄의 어두움의 피血을 받은 백성대표의 장자들은 더욱이 그의 직접적 먼저 받은 피血의 종자니 하나님이 미워하심의 백성중 먼저 난 자로 무엇이나 치게 되었다. 즉 사탄의 소유물 중심이었다. 이스라엘에게도 장자에는 양의 피血로 대속하게 한바는 이 재앙을 피하게 하였음이라.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는 뱀피血을 받았던 백성을 치는 자체로 오는 동시에 예수편에 속하는 자도 대신피血로 즉 예수의 생명을 받아 살 수 있는 언약의 표시였다. 모세 앞에 굴복한 바로는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게 됨에 애급에 있는 재물을 취하여 가지고 오게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중심하고 출발함과 동시에 하나님과 직접생활하는 한 노중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아주 내보내게 된 것을 안 바로는 분하여 병거를 몰아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애급 병거가 오는 것을 소동하는지라.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히고 뒤에는 추병거가 있으니 할 수 없이 죽는구나하고 전민족을 소동하는지라. 그때 모세는 여호와께 알리니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손에 든 지팡이杖로 홍해를 치라 하심에 치打신지라. 홍해가 갈라져 육지와 같이 건너는지라. 이것은 우리 과거신앙노정에 있어 사탄 주관하에서 예수 품으로 들어올 적에 사탄은 바로와 같이 우리 뒤를 추병하는 것을 표징하는 바라. 예수를 의하고 나아가면 즉 지팡이杖로치면 홍해를 가른 것과 같이 우리로 예수는 지팡이杖의 대신으로 우리의 홍해같은 과거 세상에 고해를 갈라서 홍해를 건너는 것과 한가지로 살 수 있다는 표시였던 사실이 있는 바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에 메추리와 만나와 생수를 주어서 고통에서 구원하심은 예수 오셔서 우리 생명소생요소를 무조건으로 줄 것을 보여 줌이었다. 신광야로부터 호렙산 반석 샘물生水까지의 노정은 우리에게 무조건으로 만나와 메추리와 샘물生水까지의 노정을 우리에게 무조건으로 만나와 메추리와 샘물生水를 줌이었다. 그 생명요소를 받고 나아가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는 아말렉 족속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때 모세는 아말렉을 대하여서 여호수아에게 싸우라고 명하시고 산정에 올라가 하나님의 지팡이杖을 들고 서니라. 모세가 손手에 지팡이杖을 들면 여호수아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패하는지라. 그래서 아론과 훌은 돌石을 취하여 모세를 앉히고 아론과 훌은 우좌손을 종일들어 아말렉을 천하에서 제거하려니 이는 시사를 기념하기 위하여서 책에 기록하여 여호수아의 귀耳에 읽었더라. 모세가 제단을 쌓築고 그이름其名을 여호와 닛시(아의 기)라 하야 가로되 여호와의 보좌에 손手을 놓게置한 것이 있으有니 여호아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戰리라 한지라. 이 사실은 무슨 의미인가하니 무조건보호받은 이스라엘 민족에 승리 자격자로 세우고자하니 아말렉의 여전을 보게함이었다. 이 사실은 즉 예수와서 우리 인간에게 무조건으로 사랑을 세어주시라. 예수의 생명받아 산 자에게는 원수 사탄의 한 대립을 주어 그 자체가 다시는 원수와 합하지 않게 하고자 함이 목적이었다. 그런고로 언제나 신앙노정이 평탄한바가 아니고 혼자 살수 있는 보호 시기가 있으면 원수 대하여 승리하여만이 될 의무가 있는 바이다.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는 모세의 손을 들어주는 입장과 같은 조건을 보장하여만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원인으로 되어있다. 즉 모세는 손手을 든 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 하나님이 품으시는 표시요 아론과 훌은 품길수 있도록 협조함이요, 여호수아는 신앙자 중심 대표자를 표시하면서 우리 자체들을 표시함이었다. 이와 같은 뜻이 성립되어만 원수 아말렉을 문제없이 승리조건이 성립하는 바를 표시함이었다. 그런고로 이 모든 것을 후일 제2 차 책임분담 사명감당자로 오는 예수와 우리가 합하여만 승리한다는 조건들의 요소를 보여줌이었다. 모세와 지팡이杖은 하나님의 대신을 표시함이고 돌石은 하나님의 보좌를 표시하심이다. 아론과 훌은 예수와 해와를 표시함이고 여호수아는 믿는 신앙자를 표시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후일에 예수를 모시侍고 성신을 우좌에 두고 하나님을 받드는 자라야만 승리한다는 표시적 의의가 있음이다. 그리고 사탄은 즉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戰리라 하심은 돌石을 쌓아 모세를 앉히신 연고니라 이것은 아론과 훌이 한것이지만 하늘과 땅을 나눠 세워야할 입장에서 어렵다고 자기자의행사가 사탄이 하늘 성사시까지 대적할 수 있는 길을 지어주었으니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심이라 하시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사탄 대하여 서 있음으로 뜻에 속한 입장을 확고히 잡지못하면 끝까지 싸움戰을 하여서라도 승리하여야 할 것을 예고함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는 아말렉과 같은 원수 대하여 싸워 승리하여야할 책임이 있는 바이다. 성도를 사탄과 함께 싸우시게 하는 이유는 사람까지 전부가 사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자되어야만이 근본이니 이런 싸움이 있게하는 바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직접지도를 받으면서 낮이면 구름기둥 밤이면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아 시내 광야에 이르至심이었다. 즉 이것은 직접품에 보호하여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내 광야산전에 머무른留지라. 그때 모세는 산상에서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하며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선히 듣고 나의 규례를 지키면 축복받아 세계에 없는 제사장국과 성한 백성이 된다는 말씀을 선포하신지라. 이 말씀은 예수 오셔서 대제사장이 되어 전세계를 통치할 후일의 약속을 세우심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하는 바의 이상목적이다. 이와 같이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더욱 하나님에게 합할수록 사탄은 이스라엘 뒤를 따르면서 광야까지 따라나와 불신 불순종의 자체를 대하려고 시도는 여전히 계속하였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백성 뒤에 사탄은 뒤를 따르게 되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금 불신 불순종이면 사망에 처하는 것을 절절히 뼈에 새기지 못하였다. 때마침 시내 산상에 70 장로를 데리고 모세는 40일40야를 지내면서 십계명 말씀 석비를 받게 된지라. 그때에 6일간은 여호와의 영광의 구름雲이 시내 산을 덮더니 7일에도 여호와 구름 가운데雲中에서 모세에 나타남顯에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이 이스라엘의 목전에 화염과같이 비치심에 모세는 그 구름속雲裏으로 들어入가 40일40밤夜를 지내게 되었다. 이 기간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대한 기간인 동시에 백성에게 가장 지루한 기간이었다. 이 십계명 받음과 동시에 성전건설 시작을 보게된바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실체의 사실이었다. 성전구조를 살펴보면 지성소가 있고 성소가 있음이었다.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고 그 위에 두 그룹이 있고 그 사이間에 속죄소가 있고 또 그 앞에 성소가 있는지라 성소와 지성소는 구별되어 있게 되었다. 즉 성전은 예수님의 한몸의 건설의 터를 표시함이었다. 성전으로되는 예수속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표시함이었다. 그런고로 지성소는 하늘 세계를 표시함이고 성소는 지상세계를 상징시키는 뜻이 있는 것이었다. 예수 한 자체에게는 하늘과 땅 완성이 한 존재로 있어야 한다는 표시를 말함이었다. 지성소를 살펴보면 법궤가 있고 그 위에는 두그룹이 있고 그 사이其間에 속죄소가 있음은 무슨뜻이냐 하면 본래인간이 타락함에 말씀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말言의 이상실체인 하나님 몸인 아담과 해와를 잃어버림이었다. 아담 해와 타락한 후 그룹들을 두어서 하나님 세계와 상격(?)하였든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예수 오시면 하늘 생명수를 찾아 생명과를 받을 수 있으니 하나님이 그룹 사이間에 나타顯나시어 직접법궤를 덮으심을 말하심이니 하나님이 그룹의 간격을 통하게하는 것을 표시하여 이와같은 구조를 보게한바다. 속죄소에 나타나심은 속죄한곳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표시함이다. 이것은 즉 자신의 한몸인 예수와 성신을 통하여 죄를 속하신 후에 각사람의 마음까지 하나님이 계시고저 함이 목적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는 이 기본터를 닦는 존재로 올 것을 말함이고 그 성소같은 그에 접하여 안기게 되면 그도 역시 하나님을 모실수 있는 이상을 재건설코저함이 근본목적이었다. 그때 예수 오신 후부터도 지성소와 성소 구분이 없게 된 것은 성전 쓸데 없는 바는 예수의 한몸을 상징하였든 기본자체가 표현하니 성전은 무필요로되니 구약시대의 이상은

완성함을 결론할수 있음을 표시함이었다. 그때 예수는 자기가 성전이라는 것을 명백하게한 의의는 여기에 있음有이라. 예수 오셔서 그룹으로 막었던 하늘 세계와 통로를 지었고 생명과의 이상목적 달성의 시작은 전우주를 통하여 성사코자하는 중대목적의의를 두고 성전건설을 하게하였다 하심은 누구나 다 잘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아말렉을 승리한 후에 이 성전건설시작이라 하심은 예수를 믿는 신자들은 원수를 승리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면 우리 신자도 성전 건설할수 있다는 의의를 고함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전인류에게 대하여 고대하는 최고목적이니 이 얼마나 귀한 소망의 존재였을가. 즉 누구나 하나님을 직접 대할수 있는 한몸 될수 있는 기본원리를 세우고자함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은 인간과 부자지간인 근본을 찾는 뜻의 성립이 시작이다. 이와 같이 귀중한 성전의 시작을 보려고 모세는 산상에 40일 40밤夜을 지내는 중에 백성들은 아론을 충동시켜서 금송아지 우상을 지어 섬기는지라. 여기에 벌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탄 공작의 기초를 지어준 행동으로 나아가 그 우상을 자기들의 신으로 섬기는 것을 목견한 모세는 대노하여 손手에 든 두二석판을 던져 깬破지라. 그런고로 여기에 모세는 비법적 행동을 시작하였다. 석판들은 말씀言을 기록한 것이었으나 이것은 아담 해와의 실체들을 표시함이라. 즉 석비를 깨는 행동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대하고 있는 사탄 대하여서는 기뻐하는 행동이다. 즉 결과에 있어서는 사탄의 시킴 받은 행동에 지나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러니 여기가 하나님께 있어 크나큰 중대지사가 표현을 보는 사실이다. 즉 다시금 오실 존재에 대한 한 파괴를 의미하는 바를 표시하는 행동의 결과였다. 이 두二석판이 무엇이냐하면 자기의 몸을 표시한바요 전이스라엘 보다도 귀한 자체인것이었기에 여호와 대노하여 전백성과 아론 이하 전부를 도말하시고 모세로 하여금 이보다 강하고 담대한 나라로 되게 하시겠다고 하심에 모세는 다시금 40일 40밤夜를 금식하여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는 것을 돌리켜서 속함을 받고 석판 둘二을 만들게한 석판에다 다시금 여호와로부터 말씀言을 기록받으니 전과 같이 모세에게 광채가 발하는지라. 그런고로 다시금 뜻 계승할바를 알게함이었다. 그러나 사탄은 이스라엘 민족뒤를 다시금 이와같은 원인을 통하여 침입의 길을 엿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반대하여 애급에서 나온 것을

한탄하여 먹을것이 없음으로 애급에서 나온 것을 말하니 모세는 회막간에 도착하여 엎드리伏니 여호와의 영광이 그 위上에 나타나顯 가로되 지팡이杖로 아론과 더불어 회막을 묶고 그 목전에서 반석을 쳐서 물水를 내어서 회중과 목축에게 먹이게 하라하메 여호와의 명대로 모세는 그其 목전에서 지팡이杖를 들며 말하되 패역한 백성들아 내말我言을 들으라. 우리가 물은 이此 반석에서 물水을 내게하여 너희가 마시飮게 하려고 한다하면서 모세는 지팡이杖로 반석을 2차나 쳐서 물水이 더 많이 나오는지라. 이것이 가데스에서 한것이었는데 그 때에 여호와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謂시기를 너희가 나我를 믿信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나我를 거룩聖하게하지 아니함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我가 너희에게 베푸신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를 향하여 다투爭매 여호와 자기의 거룩함을 나타내顯심으로 이 물此水을 무리바라 하심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들지 못하는 행동이 즉 므리바 물水로 인함이었다. 이로 인하여 모세와 아론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근본의의였는가 하면 반석한번 친打것은 허락된바지만 두 번친打것은 허락하지 않은 일인 동시에 또 허락할수 없는 범죄였다. 반석한번 치打라는 것을 허락하는 바는 너희가 순종하고 믿信지 못함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몸되는 실체에 사탄으로 침해받아 하나님의 몸을 깨뜨리破는 행동의 시작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반석을 말함은 무엇을 말함인가 하면 즉 하나님의 몸의 표시다. 고린도전서 10장4절에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 하심을 보아도 반석은 하나님의 몸인 동시에 그리스도를 말함이었다. 그런데 한번 친打 바를 용서한 바는 아담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깨뜨린破 것을 표증하는 바였기에 하나님 자신의 대신 몸의 표시인 반석을 치打라고 하심이었는데 의외에 두 번을 친打 것은 한번은 의외의 것의 행동인 동시에 사탄이 다시금 하나님의 몸을 치는 표시적 행동을 함이었다. 한번더 치게打한 것은 모세가 치셨지만 사탄이 친打것과 같은 행동의 결과로 되어졌다. 이 표시적 실사의 실패는 다시금 석판과 함께 깨뜨림破을 받은 행동과 같은 바이었다. 석판 둘은 다시 찾을 수 있는 예수와 해와의 표시이므로 다시금 찾아서 세울 수 있으나 반석은 석판의 뿌리根가 되는 하나님의 근본되는 바를 표시하는 바의 몸이었다. 그런고로 실체 몸과 근본 몸을 범하는 범행이야 사탄에게 있어서는 다시금 승리할 수 있는 행동의 기초를 불순과 불신한 결과로 잡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하나님 앞에 범한 모세와 이스라엘의 죄는 사탄의 터가 되는 시작인 동시에 다시 보내시어 제2 차 책임분담 사명자로 오는 예수까지에 대한 미완성의 한 표시적 근본실체를

범하는 행동이 되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과 불신은 예수까지 다시금 칠打수 있다는 근본원리가 시작됨이라. 이 무서운 행동이라 아니할 수 있으랴. 이 행동은 즉 하나님만 앞에서 한 바가 아니고 사탄 앞에서 하였기에 이와같은 사탄의 기쁨의 한 승리권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탄은 더욱 이스라엘 백성 대하여 침입의 기대를 잡고 침입할 수 있는 행동이 시작됨으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뱀蛇을 놓遺아 물리게 하게 한 것은 다시금 그 타락시킨 본체의 침입한다는 것을 표시하여 준 바이었다. 이 뱀蛇에 물린바를 무사하게 되려면 불뱀火蛇을 지은 것이 기등상에 있는 것을 봐야만 나음을 받으리라고 한 것을 표시하여 준바였다. 그런고로 모세가 반석 두 번 친 것이 즉 하늘사적 예수의 자체가 침범당하여 죽死게 하는 행동의 기인을 허할수 있는 원인이 됨이러라 하는 표시였다. 이것은 즉 불순과 불신의 결과의 선물이니 이것을 방비하려면 무엇보다도 실체인 예수 앞에서 순종과 믿信는 것 외에 요구되는 근본이 없게 되었다. 그런고로 불순종 자손들은 뱀 사탄한테 편한바되어 광야에서 전멸하게 한지라. 그런고로 가나안 땅은 믿음信과 순종한 자만이 기업받을 곳이라는 것을 표시함은 우리 이상국가로 불순종자와 불신자와 공포자는 못가는 곳이라는 것을 상징함이라. 젖乳과 꿀이 흐른다고 하는 바는 가나안 복지는 우리 본이상 하늘 나라라는 곳을 표시하여 준바이다. 모세가 죽死는 것은 불순으로 인한 실수로다. 이와 같이 예수도 그其 결과를 보리라 한바를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기업받게 될 때에 가나안 민족을 물리치는 역사를 시작하여서만 기업지를 찾게됨이다. 모세가 실수로 인하여 여호수아가 뜻을 세움이었다. 이것은 반석 두 번친 연고니라. 여호수아는 예수의 한 표시적 존재도 되면서 모세의 뜻 성사자도 된다. 하나님의 전 뜻 성사적으로 보면 모세부터 예수까지 임에 여호수아는 예수로 상징한바고 모세한 뜻 중심하고보면 제2 모세 뜻 성사자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수 오셔서 승리하여야할 기초인 하나님적 책임분담노정이니 예수 세상에 와서도 즉 하늘나라 건설중에서 원수와 싸워 기업작정이 남어 있음을 표시함이었다. 사사들을 세워서 역사하여 기업을 완전성사할 수 있도록 협조하심이었다. 사사후에 왕을 세우심 왕으로 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에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수 오시기 전에 벌써 예수 오시면 직접왕으로 설수 있는 기초공작이 있다함을 예고함이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한 후에 사울왕을 세우심은 누구를 표시함였나하면 제1차 아담격자의 왕위격을 표시함으로 실패도 그 원인을 표시한바다. 다윗 왕을 세워 하나님의 권세를 드러내고 그 아들子 솔로몬은 영광의 왕으로 성전 완성왕이라는 것을 표시한바는 예수 오셔서 뜻 성사하여 권세로서 영광으로서 본뜻 성전완성이상이 전개될 것을 표징한바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는 이 목적을 완성하여야 할 사명적 과업을 받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믿지 않고 순종치 아니함으로 예수 자신의 죽死게 함을 보여 하늘적으로는 영광이요 땅적으로는 권세로 성사할 전근본이상을 미성사하고 갔기에 다시금 오시겠다고 하심이었다. 그런고로 이와같은 하나님적 제1차 책임분담 승리노정에서 사탄한테 침범을 받았기에 행동의 침범은 예수로 하여금 제2차 성사책임사명 분담을 미성사케하여 다시금 실체성사로서 오지 않으면 안될 중대과업인 영광왕으로 나타날 수 있는 터를 예수는 권세왕격으로 사탄 대하여 승리하여 전인류를 근본자녀대로 백성대로 복귀하여야 할 책임이 남아 있기에 재림하신다는 근본목적이 있음이었다. 재림이라는 것은 하늘 슬픔의 한 사실이고 사탄이 기뻐하는 행동의 발로의 결과이었다. 그리하여 예수오셔서 영적으로 이 무대를 세계무대로서 확대하여 영으로 전인류를 찾아서 근본터까지 즉 타락 사람 부분까지 영적으로 끌어 올려야할 책임적 사명을 성신과 합하여 성사하여 다시 몸으로 성사의 터를 세우심이었다. 이런고로 영먼저 성사하고 육신성사코저하여 남아지는 바가 목적이다. 그런고로 예수는 육신몸을 쓰고 재림하여야 된다는 바를 알아야 한다. 사탄 대하여 권세로 찾아 영광을 누려야만 근본목적이 완성하는 바이다. 이것을 전세계적으로 한 주관하에 성사하려고 하는 바가 하나님의 뜻이며 또 근본 창조이상이었다. 그런고로 세계에서 예수를 중심한 국가들이 권세로 사탄 대하여 승리하게 되면 영광왕 재림주가 나타남이 멀지 않음을 표시한다. 예수가 사탄 대하여 전세계적 대승리의 한 분수령 전쟁이 즉 심판 시기이다. 그其 후 재림주는 사람을 갖고 영광왕 격으로 나타난다. 그런고로 예수 와서 미성사 부분을 완전히 달성하여야만 예수의 요구와 목적이 완성할 것이다. 이 구약에 결과인 3대왕 즉 사울왕과 다윗왕, 솔로몬왕들은 전부 하나님의 섭리적 전부를 표시한바의 왕들이다. 사울왕은 타락케 하여 하나님 반하는 아담의 표시가 되고, 다윗왕은 예수를 표시함이 되고 솔로몬은 재림주를 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직접적으로 책임분담의 한 노정은 제1단계를 보게 되었다. 그런고로 최고목적인 하나님이 재림할 수 있는 성전조성한 근본완성의의는 한 성사를 보았으나 전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되는 것이 지금 이후의 한 사람 대한 요구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성전에서 요구하는 즉 하나님이 요구하는 전규례가 이스라엘 전백성 생명의 기본이면서 전재산의 기본이며 국가성사의 기본이며 이상완성의 기본이었다. 이것은 즉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가 성전을 높이면서 뜻 성사를 기초잡아야 할 중대의무가 남아 있음이었다. 여기에 성전성사하여서 예수와서 한 기대를 성사할 수 있다는 표시적 성사는 보았으나 백성으로 하여금 성전 뜻 즉 하나님의 말씀言이 전수행의 시작이 완성부터 예수와서 뜻 성사할수 있는 성전될수 있는 제2사명적 준비의 터를 각자가 닦는 것이 구약역사가 바라는 소망이었는데 전 백성은 어려우나 너무나 하나님과 합함에 계속하여 나아갔어야 할 의무를 분담하시었다. 그리하여야만 예수 와서 전하는 바의 복음에 순응함으로 예수의 몸될 수 있는 성전에서부터 우리는 한 분성전 건설이상을 조성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承 수 있는 터를 성사하여야 할 사명단계가 즉, 솔로몬 왕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짊어진 근 중대목적이었다. 그런 반면 사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묘한 수단을 하여서라도 하나님이 직접 취하여 나오는 그 뜻 성사의 길을 분열하고자 하여서 여러 모양으로 불순과 불신의 씨를 찾아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침입의 마수를 뻗치려는 시도에 강경히 대상하여서 하나님 편에 더 깊이 서서 나아가야 할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왕으로부터 백성은 음란의 신의 근본인 원수를 섬기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백성을 또 쳐打서 각심케 하여 오면서 가진 수단을 다하여서 이 백성을 보호하여 왔는바였다. 그러나 그 심정을 알고 안타까하는 자는 점점 그 뿌리조차 보기 어렵難게 성전을 더럽힌 행동이 몇번이었든고 하나님은 성전을 세워서 뜻 성사기초의 표시는 완성한 목적기본을 잡아서 약속은 시작하였으니 그만 둘 수 없는 책임감 그 외 사탄은 기세당당하여 하늘뜻을 파괴하는 그것을 볼적마다 공드렸던 이스라엘 백성을 파기할 수 없는 사실이다. 파기하면 전부가 사망의 괴로움苦에 삼켜질 것이며 하나님 역시 불안할 근본의의를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 아무리하여도 그 뜻을 성사하여야 할 바가 하나님의 과업이니 선지들을 세워서 그 뜻을 백성들이 연화할 수 있도록 성전 뜻 유지를 계속하여 왔든바이다. 그런고로 그 뜻 근본목적은 예수 한 존재가 중심이었다. 그 다음은 예수께 합하여 한몸되어 제2차 예수 존재와 같은 번식이상목적시작의 전부가 이스라엘 백성행동 여하로 기반을 잡을 수 있는 바이니 얼마나 아버지 뜻에 안타까운 심정이랴. 그런고로 성전지키면서 하늘 뜻을 받들 수 있는 주위공작을 계속하면서 기본되는 자체인 메시아를 보내여서 뜻 성사할 최고목적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고하여서 그 뜻을 받들 수 있는 그 노정을 지켜나가게끔 하여서 선지자를 통하여서 메시아 보내실 것을 예언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자극하시었다. 그러나 그 뜻을 바라면서 십수백년 동안을 계속하면서 권고하여 왔든 바이었다. 그러나 그 뜻을 이스라엘 백성이 적극협조못하여서 이와 같이 뜻 성사의 시일을 연장 시켜왔든바이었다. 메시아 약속을 받고 바라는 백성은 조급하게 바랐으나 하나님의 뜻 중심하고 실천에 대하여서는 망각하고 자기의 요구들만 바라는 그 자체는 타락의 피血를 받은 패역의 백성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면서 메시아 오기 전에 대한 기간도 알려주어 그의 바라는 희망성을 높여주어왔다. 메시아 오기 전에 먼저 그의 전목적을 받들 수 있는 준비공작사명자로 오는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약속하여 그 시기적 한도를 보여주었든 바이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백성은 전부가 메시아 강림이 전 바라든 소망으로 그를 생활내로서 뜻을 찾아 나오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중심하고 메시아 소망이 한 목적으로 바라오면서 희망을 높이하여 자연적으로 자기들의 준비를 계속하여왔든 바였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합하여서 기초공작과 함께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주어 그들의 소망을 성사하여주는 동시에 자기의 목적실행의 한 기쁨과 기대였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메시아 보내주면 전 이스라엘 백성은 생명대신 귀하게 알면서 그의 전 주위에 대한 단속을 지어 성전이상을 실현하고자 함이었는데 그 뜻을 아는 자 몇명이였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한 소망을 갖고 제1차 하나님적 책임시기는 끝 맞추어 제2차 책임사명분담의 행로를 잡아주고 섭리계속하여서 자기몸으로 지었든 아담 해와의 사명적 분담성사노정으로 옮기기 위하여 오신바가 즉 예수였다. 예수는 제2 아담이다. 성경에는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보아도 로마서 5장 14절을 보아도 예수는 제2아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 조상 아담 해와가 타락시켰으니 원리대로 자기들의 범한 책임사명을 다 찾아 복귀하여야만 근본뜻을 성사할 수 있는 창조이상이 됨이었다.

제3 장 제2차 하늘 뜻 성사책임사명자로 오신 예수의 책임분담 섭리기간에 대한 근본의의

제1 절 지상섭리 노정에 대한 근본의의

구약시대의 전목적 종결은 예수 한분에 기인하며 그의 완성적 사명도 예수 한 존재가 중심이었다. 성전을 세우기 위한 행의의 노정은 구약시대의 한 중심노정이었고 그 노정탈선은 불의라는 사망의 시작이라 한 것은 잘아는 바다. 예수 한 존재의 가치는 즉 전 이스라엘 성전 + 이스라엘 백성보다도 귀한 한 존재였다. 즉 4천년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섭리한 결실의 자체가 예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 전천주목적은 예수로부터 다시금 찾는 가치의 존재니 이 모든 것보다도 예수는 하나님 앞에 귀한 존재였다. 예수 완전히 살아서 천주살고 하나님 완전히 살며 예수뜻 성사하여야 하나님 뜻 성사라는 한 중심점의 존재가 지상 예수였다. 하늘 성사로 예수 하나로부터 시작이라는 원인은 더 말하지 않아도 잘 알줄 안다. 이 천주의 중심점 예수의 한 존재가 지상에 오는 바는 땅地 아니면 뜻 성사 못하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의 중심지가 즉 지상이었다. 지상에서 사람 조상 아담 해와는 타락하였으니 땅 중심하고 복귀하여 그냥 하나님의 만세 전 이상 즉 창조이상을 원리대로 성사할 수 있는 조건성사를 보는 바이었다. 그런고로 땅 없으면 하늘은 미완성하여만 하늘 뜻 원만성사하고자 함이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의 뜻이니 모두가 동일한 기점상을 분리할 수 없는 이유는 한몸된다는 기본인과로 되어 있기에 이와같은 귀한 한 존재가 예수인데 이 예수를 보내기 전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마 하심은 예수한테 사탄으로부터 피해를 받지 않게하기 위하여서 엘리야를 보내어 이 근본자체 오신 다음에 전이스라엘 백성의 대환영 받게하여 전 백성은 예수한분 만으로 무한한 영광이며 그들의 자랑으로 믿信고 모셔侍야할 사명적 책임들을 다할 수 있는 구비조건을 지어 놓기위하여서 엘리야를 보내주마 하신바가 그 목적이 있는 바이었다. 이스라엘 백성 대하여서는 직접인도하여 뜻 시봉으로 배양하였지만 세계적으로는 하나님은 전인류에게 모실수 있는 공작도 역사적 성인들을 통하여서 동서양에 섭리를 하여 합성화 하려고 하는

뜻 성사 예비 공작도 시작케 하심이다. 그其 사명적 대표 인물들이 즉 공자며 석가였다. 또 철인 소크라테스 등등의 양심적 도를 중심한 선을 표준하고 교시케함도 그 근본의의였음을 알아야 한다. 어느 종교든지 근본을 선한 신을 표준케 함은 즉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목적을 근본하고 있다는 바를 명시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 근본 뜻 성사하면 그 자체인 가르침들도 한 근본상에서 총합을 보여야 되는바도 원리로 되었다. 그런고로 예수 한 존재의 이상중에 뜻 중심이니 전 하나님의 이상을 완성할 근본체이니 예수의 뜻 성사시는 전 천주는 한 중심에서 기동되어야 한다. 종교도 경제도 과학도 합하여 한 기본상에 기동될 바이다.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시어 찾아 맞추고자 함의 근본의의가 있다. 이와같은 크나큰 사명적 중심 존재의 강생과 함께 온 천주는 큰 복음의 소식을 보았다. 하늘은 물론 예수의 뜻 성사를 바라는 바 그 땅은 예수의 앞에 지도받고자 함이 요구였다. 예수 한분이 모든 생명의 근본이며 해방의 주인공이었다. 그것은 즉 사탄 세계인 비공식세계에서 원리세계 예수의 세계에로 건설목적의 완성의 요구가 예수의 할 책임인 동시에 우리는 그에게 순종 신종 시종하여서 영광을 돌리는 것이 땅의 백성이 짊어진 책임사명이었다. 이 책임의 요구를 성립하려니 엘리야 와서 할 사명전부는 전백성 합하여서 엘리야와 합심일체가 되어서 뜻 원만성사고자함이 목적이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백성은 잘알고 있는 승천한 존재였다. 그런고로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하였으니 틀림없이 올 줄알았다. 승천한 엘리야 언제나 오실까하고 바라는 데는 하늘 향하여서 바라보는 것이 중심으로 되었다. 즉 하늘로 올라갔으니 하늘로써 나려올 줄 만 바라본 바는 사실이었다. 승천한 엘리야로 그 당시 제일 귀하게 바라는 한 상대로 된 바는 메시아 때문이었다. 메시아를 모실수 있게 하여주는 바도 엘리야니 엘리야를 바라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 요구이었다. 그런데 엘리야는 하늘로 내려오니라고 바라는 자는 지금까지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함은 유대교적 신자 등이다. 메시아로 왔든 것은 사실이매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역사를 통하여 확고한 것으로 되었으나 그 당시에 있어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할 수 없는 존재로 취급되었든 바는 성경보아 잘 알 수 있는 바이다. 즉 바리새 교인과 서기관들은 예수 대하여 몇 번씩이나 묻기를

그대가 메시아면 엘리야는 왜 오지 않았는가? 엘리야는 어디에 왔는가? 하면서 예수 대하여 반문한바는 자기들이 역사적으로 바라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은 사실을 고백하는 것을 성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바이다. 과연 당시에는 참말 믿고 순종할 수 없는 바이었다. 메시아라는 그 존재는 그대들이 잘 아는 요셉의 아들子로서 집에 묻혀 목수업으로서 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존재이며 그 내용내막까지 잘 아는 그 자체이며 생활체형으로 보아도 우리들과 다름없는 그 자체인데 어디 그 존재가 자기들이 바라는 이상한 중심존재라고는 생각하는 점에 하도 먼 거리의 존재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게 보였다. 우리가 바라든 그 존재는 천수백년간 약속의 존재요 희망의 존재든 자체가 예수라하니 이스라엘 백성은 무슨 영문인지 큰 환난의 한 존재로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메시아를 바람은 전부 뜻 중심하고 바라는 것 보다도 먼저는 자기를 중심하고 바란 것은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베들레헴에서 날줄로 알았다. 그러면 자기들의 메시아 오면 한 조각의 식물이나 거처할 방이나 의복이나 그 중 한가지라도 준비해놓고 베들레헴을 향하여 먼저 무슨 색다른 소식이나 있는가 하여서 고대한 자 만일 있다면 메시아 탄생도 알았으리라. 그런 존재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볼때에 그들의 메시아 고대는 벌써 전부가 자기 중심이었고 자기들이 메시아의 힘을 빌려서 좀더 좋은 것을 바랐든 것이 사실이라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각자 각자는 자기들이 이상에 부합하는 이상의 존재로 바랐다는 그其 입장에 있을 때 예수란 자가 출현하여 너희들의 이상의 존재라는 선언은 하도 너무한 동시에 분개할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연 예수는 육신쓰고 나니 자기들과 동일양식으로 살아왔고 또 지금도 변함없이 동일한 양이니 과연 그 자체에 대하여 의심하는 바 당연지사였다. 이와같은 예수를 대하여서 더 의심케 된바는 엘리야가 전제문제의 존재였다. 자기들이 엘리야라고 하는 그 자가 왔다면 예수니 메시아니 여하튼 문제는 해결인데 엘리야도 오지 않고 메시아 왔다니 그 어찌 신임할 수 있으랴! 지금 우리는 바꾸어 생각할 필요를 느끼면서 석일에 이스라엘 백성을 욕하여 되는 문제다. 그러면 지금은 예수 즉 메시아가 만민의 구주요 이스라엘이 희망한 중심존재라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인식과정으로 나왔으니 예수는 메시아며 뜻하신 예언의 실체라는 것을 알며 그 전에 올 엘리야도 왔었다는 바를 세상 교인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즉 엘리야는 왔는데 세례요한이라는 것을 역사로서 인정하여주는 성경을 보아 아는 사실이다. 또 예수는 엘리야가 왔으나 임의로 대접하였다고 하면서 복음서에 세례요한을 지적하여 말한 바를 보아서 아는 간접적 앎知이었다. 과연 그 당시의 입장을 바꾸어 가지고 생각하면 지금은 과연 메시아로 믿고信 모시고侍 순종을 할 자 몇 명이나 될까? 지금 현교인들이 바리새 교인신앙 만치도 못한 자 많은 이때에 생각할 문제이면서 염려할 중대문제이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고 어찌하여 세례요한이 엘리야가 되는가 그 근거는 무슨 뜻이며 하나님이 섭리하는바는 무슨 의의를 두고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하고는 세례요한이를 보내였는가 하는 문제의 근본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근본의의를 밝히지 못하는 현실세계가 하늘이 섭리하는 뜻의 시봉을 완성할 것인가. 지금은 말세라고 하는 때이니 성경 중에 미지였든 사실이 명백히 되어야만 성경목적을 끝내고 재림주를 영접할 수 있는 결정적 관문을 삼을 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런 중대시 되는 미지의 근본을 밝히기로 하자.

제2 절 세례요한이 엘리야되는 근본의의

하나님이 근본 뜻을 성사하시려 할 때에 그 뜻 성사에 제일 요점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외 사탄 존재가 있有는 것인데 이 존재가 하나님의 근본 뜻을 파괴하였고 지금까지 적으로 나와 뜻을 성사하지 못하게 하는 존재가 있기에 큰 중대한 문제가 된다. 만일 사탄이 없다면 뜻 성사는 문제되는 것이 아닌데 사탄이 있어서 인간을 대하여 자기의 소유권외로 보내지 않으려고 극성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대하여서 역사를 하여 나옴으로 하나님의 뜻의 성사는 역사로 연장을 거듭하게 하여 온 바이다. 이 사탄을 전폭적으로 굴복시켜서 뜻을 미성사케 하는 공작이 없도록 사탄 전멸을 기약하는 바가 요구되는 바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근본 뜻은 뜻을 방해하려는 사탄을 뜻의 노정에 없게 하고자 함에 근본 뜻 중심이었다. 그런고로 이 근본 뜻을 성사하려고 메시아를 보내기 전에 하나님이 바라는 뜻을 반대하는 사탄을 굴복시켜 다시는 예수의 뜻(메시아의 뜻) 성사 노정에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공작이 먼저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할 책임자로 보내마 하신 존재가 즉, 엘리야였다. 엘리야는 잘 알다시피 하나님 앞에 혼자서 사탄 전부하고 싸운 최승세자이었다. 엘리야가 요구하는 당시의 최고 목적은 사탄 전멸의 목적이었다. 다시는 사탄이 하나님의 뜻을 막는 곳 없 게끔 바라든 바가 엘리야가 바라든 목적이었다. 그 목적이 즉, 하나님이 바라는 뜻 성사 노정을 두고 바라보는 목적과 같은 목적이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바알신(사탄) 800여를 멸한 자이며 뜻 성사 노정을 완성 할 수 있게 하는 사탄 대한 중요존재였다. 엘리야의 목적은 완성하였는가 하면 그 당시 사탄 대한 목적은 미완성하였다. 왜냐하면 다시금 사탄이 침입을 보아서 예수앞에까지 침범할 우려성이 있음으로 다시금 이 사탄에 대립하여 엘리야가 바라는 근본목적을 완성시켜서 예수 앞에 사탄 자체의 종적이 없게하기 위한 대표자를 보내어 엘리야의 바라든 사탄 전멸공작성사할 것을 바람에서 엘리야를 새로 세례요한으로 표시한바며 세례요한이 엘리야되는 바의 목적이 있는 바이다. 즉 엘리야의 목적이 세례요한으로 완성할 사명적 역할을 가지고 있었든 바이었다. 하나님의 뜻 중심하고 말 할적에 엘리야의 목적의 성사는 세례요한으로 종결짓게 되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와서 한 사명달성하면 하나님 뜻은 완전성사하므로 사탄을 하나님 뜻 노정상에서 없애고자 함에서 예언하신 엘리야가 세례요한이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뜻은 하나인데 뜻 성사하는데는 갑(엘리야)과 을(요한)이 완성하였다. 그런고로 뜻은 하나이고 사람은 둘이다. 뜻 하나 중심하고 말할때 갑=을 이라는 한 몸으로 완성한 것과 같은 근본의의를 두고 예언하심이 있기에 엘리야=세례요한 이라고 하심이 근본목적이 완성되는 바이다. 하나님의 뜻 = 갑\을

이런 뜻으로 말씀 하심을 알지 못하는 백성은 큰 범행의 행로를 취하면서 자연스러운 뜻의 행함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제 엘리야 대신으로 보냄을 받은 세례요한의 사명은 무슨 목적이 남아 있나 하면 하나님의 목적 뜻 성사가 완성 하여야할 토대를 조성하여 메시아 즉 예수 자체한테 피해 없게끔 하여야 할 역사적 책임이 부담되어 있다. 세례요한의 하여야 할 사명은 엘리야의 심정과 재능으로 예수앞에서 아버지로 아들을 사랑 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자식으로 그其의 아버지께 효도하게 하여 줄 역사적 사명성을 말라기 4장 5절, 6절에 기록함을 보아서 알 수 있는 바이다. (누가복음1/16-17) 그런고로 예수는 즉 누구나 다 전인류의 조상인 동시에 전인류는 예수의 자식이라는 창조원리로 되어있는 목적 찾아서 맞출수 있는 길을 닦아야할 책임이 요한의 사명이었다. 밖으로는 사탄을 방비하고 내적으로는 백성으로하여금 자식된 도리를 알려주어 아버지를 모시어 사랑 받을수 있도록 그其 시대에 대한 책임을 겸유한 중대입장에 요한은 서 있었다. 그런고로 세례요한의 전 목적은 메시아의 도를 준비하는 자로써 즉 메시아 한 분만이 그의 생명의 대신이며 희망과 소망의 전부의 존재였을 것이었다. 또 자기 자신이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이었다. 그리하여야 세례요한의 광야생활이라는 전 목적은 여기에 완성을 가져오는 바이었다. 예수보담 6개월 전에 사가랴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 자체는 하늘이 무한한 기대로서 보낸 자이면서 사탄이 제일 미워하는 존재였다. 그其 시대를 대표하여 뜻을 세우기 위한 30여년생애 모두가 예수(메시아) 한 존재가 목적인데 그 메시아를 모시는 그 한날의 기쁨의 영광이 그대의 목적이었다. 세례요한의 뜻을 전 이스라엘 백성앞에 세례를 시행하게되었다. 세례는 예수의 그 근본 뜻을 성사할수 있는 한 터의 자격을 부여하여 주는 약속의 표시의 예였다.(요한 복음 1장 31절~34절) 세례요한이 이 예식을 시행 함은 자기 뜻을 성사하기 위함이 아니고 예수의 뜻을 계승키 위하여서 하심이라는 바는 다 잘아는 사실이다. 당시 세례요한을 이스라엘 백성은 하늘이 보내신 한 선지자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례요한한테 이스라엘 백성은 세례식이나마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은 하늘로써 보내심을 받은 자로 알고 있던 까닭이므로 신법(요한복음 1장 15절) 그其 세례를 받음이었다. 이 세례요한은 증거하기를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다음 오시는 메시아는 불火과 성신으로 세례를 준다고 하시며 대중앞에 선포하심은 자기자신의 사명과 메시아의 사명은 격별하게 상이있음을 고백하는 바이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전목적 실체 메시아의 한 존재가 소망성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에 예수는 갈리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至 요한한테 세례를 받고자 할때에 세례요한은 사양하야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나한테 나오시나이까하니 예수 말씀하시기를 허락하라. 우리들이 의를 행하는 것이 합당하리라 하신데 세례요한이 허락하여 세례를 시행함을 받고 물水에서 올라오시니 하늘天이 열리開고 하나님의 신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그其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天로써 소리聲있어 말씀言하시대 이此는 나我의 사랑하는 아들愛子요 나我의 (기뻐하는 자라) 하시더라. 비둘기 모양으로 성신이 내린 근본의의는 이와같은 하늘의 뜻의 존재라는 것은 세례요한 스스로가 알게 되었다. 그其때 누구나 전부가 이 사실을 듣고 보았든가 전부는 알지 못하였지만 세례요한만은 잘 알고 있었다. 이렇듯이 한 목적을 책임진 세례요한한테 알려 전이스라엘 백성한테 전하여서 하늘뜻을 성사하게 하고자 하심이 뜻이었다. 이와 같이 하늘로부터 예수는 메시아라는 것과 하늘로 보내신 특별한 자라는 것은 알려주었으나 세례요한한테 예수는 메시아라고까지는 지적하여 교시하여 주지 않았다. 지혜롭게 행동을 취하여야 하는 한 단계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에 세례요한은 자기가 바라든 메시아를 만났음은 그 이상 무슨 딴 목적이 어디에 있으며 다시금 무엇할 사명적 다른외부분을 요구할 무엇이 없었든 것이 사실인 동시에 기뻐서 대중을 대하여 적극 예수는 보내시마 하신 메시아라고 선포하여서 대중이 예수앞에 집결하게하는 동시에 자기도 역시 예수 앞에 있어서 모든 대표적 태도로 나서게 되었든가. 그 자체의 태도 여하로 인하여 대중에게 큰 영향을 전하는 중대입장에 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예수 대하여 적극적으로 예수 자신은 우리가 바라는 목적의 존재 메시아라고 대중앞에 선포 못함은 사실이었다. 그저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때만 알 뿐이고 세례요한은 그냥 그대로 자기가 처음 시작한 세례나 주면서 다니는 행동을 계속하게 되니 예수를 대하여서도 대중은 메시아라고 보는 것 보다도 세례요한의 행한 행례의 도움자로써 아는 자라고 생각하는 자는 있는 정도였다. 세례요한의 목적은 그저 세례나 주고 다니는 것이 역사적으로 부여받은 전사명이었든가. 너무나 가치없는 행동이였었다. 모든全이스라엘 백성대하여 생명 계승의 한 중계존재가 그냥 멋대로 사방을 자유로히 다니면서 세례만 준다는 행례에는 우리는 한심한 태도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세례요한 자신은 역시 예수 앞에 서서 나타난 엘리야의 대신 존재라는 것을 잘알았는가 하면 의심할 문제이다. 요한 복음 1장 21절에 요한이 엘리야도 아니라 하심 보아도 자기 자체가 그 사명적 입장을 명백히 알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알았으면 왜 대중앞에 자기를 선포하여서 이스라엘 백성의 의문점을 없이하여야 할 책임도 준비 못하였든 바이었다. 세례요한 자신이 엘리야란 것을 알았으면 대중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여야 할 존재

로서 어디에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서 싸워서 그 기대를 세웠든가 자기 자신도 확고한 엘리야의 대신자라는 것은 자각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렇게 세례요한은 자신사명에 대하여 적극적 준비 공작을 하여서 그 목적 본체로 오신 예수 앞에 모두全를 시종의 중심 존재로 서서 예수의 모든全 사명의 협조자로서 또 제일 큰 사랑받을 수 있는 예수의 한 제자로서 시봉하는 외에 더 큰 다른 무슨 목적이 있었으랴.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와 분립하여 행하신데는 세례요한이 하늘 앞에 중대한 책임 미완성을 가져오는 기본적 대신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성경을 보면 세례요한은 전폭적으로 메시아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지 못함을 알려주고 있다. 옥중에 있어서 제자들을 보내며 묻기를 그대가 오실바의 메시아니까 하는 질의, 또 다른 사람을 기다리오리까 하는 것을 보면 세례요한 자신도 메시아에 대한 해결을 못하였든 바를 알려 준다. 이와 같이 뜻 시봉자가 되어야 할 그 존재조차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알려주지 못하니 예수 자신에 있어서의 전기대와 소망은 여하한 정도이였을까? 과연 통한치 않을 길이 없을까. 누가 그 심정을 알 자 있었으랴. 여기에 세례요한이 예수 앞에 하늘 앞에 큰 범행의 시작이 있다는 것을 아는자가 현기독교계에 없는바를 나도 통분하는 바이다. 그저 세례요한은 귀하고 하나님 앞에 없어서는 아니될 존재 대우하는 것은 용서 할 수 없는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는것이다. 그런고로 자기 책임 다하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행하는 세례요한은 아버지 앞에 귀함의 존재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때문에 온 자가 그其 본사명 중심지를 떠나서 행하는 그其 자체는 물론이며 그其의 시종자까지 하늘로서 선하게 대할 수 없는 존재로써 그 말로에까지 하나님은 귀히 보지 않음은 사실이다. 이와 같은 중대지사 여하가 예수 앞에 크나큰 광야생활이라는 고통의 노정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광야에 나아갈 때에 고독한 심중을 헤아려 동정하는 자 세상에 몇사람이었든가? 여기에 人間을 상대하여 예수의 사명범위는 한 어두운길暗路에 봉착하였음을 누가 아는가 아는 자 아버지와 예수뿐이었다. 그 광야의 적막감은 예수 앞에 큰 낙망과 동시에 다시금 재출발의 한 노정을 결심케 하는 노정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광야까지 예수를 시봉하여 따른 자 한 사람도 없다. 그때 먼저 예수를 메시아로 모시는 자 있다면 이는 하늘에서 내리는 큰 상을 받을

존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생각하면 동방박사는 어디에 갔는고, 목자는 어디에 있는고. 모친은 어디에 갔는고. 세례요한은 어디에 갔는고. 모두 자기 뜻 중심하고 행동하는 그其 자체들은 예수 앞에 기쁨을 변하여 탄식하게 하는 한 존재 등에 불과하였으며 더욱 슬픔을 격동시켜주는 기대에 틀림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심정을 품고 광야생활에 있어서는 제1차 낙심을 다시 복귀하기 위한 목적인 동시에 적극적 원수 사탄 대하여 최종 결판시기였다. 사탄이 벌써 하늘 뜻 성사할 터를 침입하여서 뜻 순종 노정을 받들지 못하는 세례요한의 기대는 보았으니 그 다음엔 그 중심 자체인 예수까지 와서 시험의 시도는 원리적 한 행동이었다. 그러니 광야생활 중 사탄의 자유행동에 대비한 예수에 시험이었다함을 알아야 한다.

제3 절 세례요한 인간성 표준으로 예수를 대함

세례요한의 행동이 어찌 용서받겠는가 생각하면 몸에 솜서리 치는 한 행동이 아니었는가. 세례요한 역시 예수를 대하여서 뜻 중심하고서 대하지 못함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세례요한도 사람인지라 메시아라는 자체는 좀더 고귀한 위치에서 자기에게 보여졌을 것이 없는데 별다름 없는 존재의 용모이면서 자기들이 바라는 바와 같이 뜻의 성사의 노정을 취하여 나가지 못하는 존재로써 어찌 메시아의 자격이란 너무나 거리가 멀었었다. 요한 역시 그 시대적으로 대하든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한 관점으로 서게 됨이 큰 실수의 시작이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은 두 말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 세례요한은 예수 앞에 메시아라면 전 시종하기 위하여서 자기를 중심하고 그其 외 제자들까지도 함께 데려와서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할 입장이었는데 그것이 과연 인간성에서 나온 파괴행동이었다. 자기 제자들과 함께 예수 제자가 되어 어제昨日의 선생의 입장을 변하여 예수 앞에 제자 양으로 서니 제자였든 자들과 동급적 입장에서 그其 입장이 과연 인간세계에서는 어려운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 등은 인간의 전부가 자기 중심하고 하늘을 대하고자 하는 대신 사탄 공작이라고 보여주는 결과를 초래하여 사탄과 합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셈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와 같이 논하는 것은 무근거한 원리위에서 논함이 아니다. 성경에서 세례요한이 일대 실수의 행동을 폭로한 구절을 찾아서 해설하여 보자. 지금까지 신학계 에는 난해 문제의 구절일 것이다. 즉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그 내용적 사실이 여실하게 드러나 있다. 즉 예수께서 12제자에게 명하심을 필하시고 거기에서 이사 교주하시며 영포하시라고 각성에 가往시더라. 그때 왜 요한이 옥에 있어 그리스도의 행함을 듣聞고 그 제자들을 유야 예수께 단야 왈 당신이 오來실이니까. 선생임이 오니까 우리들我等이 다른사람他人을 기다待리이까 예수 대답하여 왈 너희들爾等이 왕하야 듣聞고 보見는 것으로 요한에게 고하대 귀머거리가 들으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나자가 깨끗潔하며 눈먼 자가 보며 빈자가 복음을 전한다하라. 그런지 나我로 인하여 범죄하지 아니한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고 저들被等이 흩어짐離에 군중衆들에게 요한을 가르켜指하야 말씀言하시매 너희들爾等은 무엇何을 볼視려고 들野에 갔去더냐. 바람風에 움직動이는 갈대냐 또 너희들爾等이 무엇何을 볼視려고 갔去더냐. 미복을 입衣은 사람人이냐 아름다운 옷 입美服衣은 사람을 대궐에 있나이다. 너희들爾等이 어찌 갔去더냐. 선지자를 보見려더냐. 옳是도다. 내我가 너희들爾等에게 말하노니 이사람此人은 선지자보다 크勝니라. 이사람此人을 가리켜指 기록하였으며 볼見지어다. 내我가 나我의 사자를 너희들爾等 앞前에 전遺하노니 저被가 너희길爾路은 너희앞爾前에 예비하리라 하였나이다. 내我가 진실로 너희들爾等에게 논하노니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는 세례요한보다 웅대한 자가 일어起남이 없으無나 그러然나 천국에서는 지극 어린아이小子라도 그被보다 크大니라. 세례요한이 올來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용역함으로 얻得나니 용력한 자는 빼앗奪느니라. 모든諸 선지자와 율법에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 도달至하였으니 만일 너희들爾等이 그것을 수긍할진대 오來리라한 엘리야가 그사람此人이니라. 귀耳가 있有어 듣는자聽者는 들을聽지어다. 차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데 아이兒孩가 시장에 앉座아 동류를 불러 왈 우리들我等이 너희를爾等을 향하야 나팔을 불吹어도 너희들爾等이 춤추舞지 않고 우리들我等이 슬픈 울음소리를哀音 내어도 너희들爾等이 울지 않았다함과 같으니 요한이 와서來 먹食지도 않고 마시飮지도 아니함에 그들被等이 말語하기를 사귀가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來 먹食고 마시飮에 또 말語하기를 먹食기를 탐貪하고 술酒을 즐기嗜는 사람人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라하니 다만 지혜는 그 행사로 의를 나타내顯느니라고 이상과 같은 말씀言을 선언하였다. 이 내용전부는 세례요한 대하여 놓고 한 말이었다. 그러면 요한 제자와서 물을때에 본대로 말하라. 내가 누구라고 말하지 않으나 너희는 스스로 자각하여라 하면서 여러 이적 기사로써 표시하였다. 그러면 예수는 왜 이런 대답을 하였는가. 그저 묻는 그대로 대답하여 옳도다. 내가 오리來라고 한 자로라 하면 그만 해결을 짓는 일인데 이와 같이 예를 들어 말한 바는 인간으로 하여금 깨달을수 있도록 교시하였으니 그것 보아서 알라는 큰 의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귀하고 높은 예수를 찾으면 그야말로 그에 더 성공은 없는 것인데 누구나 전부가 가르쳐주고 전부 끌어다 주면 그 귀한 자체를 찾지 못한 자 어디에 있을까 밝히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으면 자기들이 지혜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세워야만 그 뜻 성사는 물론 하늘의 협조하여 주었지만 자기 노력으로 찾아야만 타락하지 않고 이루었다하는 결과를 보기 위하여 그 찾는 상급에 대한 영광받을 자격이 결정되는 바이므로 최종점까지는 교시하여 주지 않는 바이다. 예를 들면 100까지를 찾아야 하는데 95가량만 알려주고 5는 알려주지 않는 것이 한 뜻의 노정의 표시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100까지 중 100까지 전부를 교시하면 그 상급은 하늘에 있는 성도들 앞에서라도 그 영광누릴 자격완성자라 할 수 없기에 95까지만 가르쳐주고 5는 자기 지혜를 통하여 찾아 100까지를 채우시기를 바라서 교시하는 바가 지금 역사 노정에서 많이 보여지는 사실이다. 이 5이란 그것 찾아 성사하는 그 사실은 100의 성사한 영광을 누리고 기본권한을 결정하는 사실이니 이와같은 예로서 세례요한 대하여서 대답한바도 사실이다. 또 세례요한한테도 하늘로써도 이와 같이 교시하였다. 지혜로 찾아서 의로 정함을 주시고자하여서 예수는 메시아라고 확정지어 교시치 않은 바이다. 이런 것이 지극한 하나님이 사랑 하시어 하시는 섭리인 동시에 누구에나 허락한 예수니 지혜있는 자만 합하여만 원수의 지혜를 파할 수 있는 기본동력이라는 근본의 힘力의 터가 되기에 이와 같이 하나님은 섭리하신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특히 어떤 목적을 교시하였다가 다시금 시험하여 그 목적 대한 의심을 발하게 교시하여 주는 때도 있다. 그것은 지혜로서 그 근본을 확득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만 하나님 자신이 직접간섭하지 않아도 사탄 원수 대하여 승리할 자격자로 세우려니 이런 시험도 있는바는 영교시로 받는 자들의 체험하는 사실적 근본의의로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즉 사탄이 대하여 반대역사할 수 있는 것이기에 또 그리하여 완성격자 되면 전부를 하나님의 간섭을 하지 않고 자유성사를 표준하기에 이와같은 자리를 바라서 우리에게 대취하기 위하여 섭리하심은 알아야 한다. 지혜로서 뜻 찾아 완성하는 자는 저 하늘 권에서도 말할수 없는 귀한 존재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존재의 자격은 지혜를 찾음으로만 존경의 가치를 볼 수 있는 근본의 행동이 즉 지혜로 뜻 성사를

완성하는 태도이다. 그리고 빈자에게 복음을 전한다 하심은 큰 의미가 있다. 즉 여기는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메시아를 고대하기를 자기들이 더 좋아지기 위하여서 고대하였기에 지금 이와 같이 나 자신은 너희들이 바라는 목적상대로 되지 못하여 빈자와 같은 자 밖에 상대할 수 없는 모양에 있다함을 고하는 동시에 너희들은 마음으로 부한 것이었기에 나 대할 수 없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시하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사탄이 주관세상에서 선은 밝혀 빈자급에 많은 것을 말하는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악의 주관세상이니 악한사람惡者은 잘살富고 착한사람善者은 가난貧하니 이런 원리적 언사로 되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다음 마태복음 11장 6절에는 말씀하시기를 누구誰든지 나我로 인하여 범죄하지 아니한 자는 복이 있有도다 하심의 구절을 보게 된다. 이 구절이야 예수님의 숨은 심정을 표시한 말씀이었다. 즉 이 말씀에는 벌써 세례요한은 나에게 범죄하였다는 결론적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범죄하지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하였으니 벌써 복된 입장에서 이탈한 존재하는 것을 암시한 바이었다. 과연 예수 앞에 세례요한 한 자체는 크나큰 타격의 존재였다. 예수의 전목적의 대부분에 일대난사를 초래케 한 큰 범죄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없는 사실이다. 그 다음은 너희들爾等은 무엇 보려 광야에 나갔出더냐. 그 목적이 무엇이든지 그 들野에 나아감은 전목적은 예수 한 자체를 보기 위하여 행동한바가 아니냐. 또 들野에서 요한 자체가 증거한바가 아니었든가. 그런데 그때 벌써 알아야 할 시기를 놓치고 지금와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암시하면서 책망하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 증거한 세례요한은 과연 선지자 중에서는 제일큰 자라고 하면서 말씀하시었다. 들野에서 본 세례요한은 과연 선지자 중에도 큰 자라고 하나 할 책임을 담당하지 못하였다는 의미로 말씀하시는 말씀이 내我가 진실로 너희爾等에게 이르論노니 여인으로 난 사람 중에는 세례요한보다 웅대한 자가 일어남起이 없도無다.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至極者라도 그被보다 크大니라 하심에 결론적 판결을 내리웠다. 이 말씀이 지금 신학계에서 미해결점이나 그 근본의의는 예수 대한 세례요한의 범죄행위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라는 것을 밝히 이제는 알아야 한다. 즉 근본의의는 무슨 뜻인고 하니 여인으로 난 사람 중에 세례요한보다 웅대자가 일어起남이 없無다함은 이 말씀에 대한 근본의의를 알아야 한다. 지난날昔日의 선지자도 여인을 통하여 태어生고 지금 세례요한도 여인女人을 통하여 태어生난 자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왜 세례요한이 제일로 큰 존재라고 하였는가 하면 선지자라면 하나님의 뜻을 예언하셔서 뜻을 알려주는 대변인임에 틀 림없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역시 하나님 뜻을 알리는 대변인이라는 것은 같은 뜻의 존재이나 그 자체들이 증거 입장을 취하여 보면 지난날昔日 선지자 전부는 증거하되 예언적 증거로서 예수를 증거하였으나 세례요한은 증거하되 직접적으로 증거하였으니 증거적 입장을 중심하고 말할 때 세례요한의 이상가는 자 없음은 사실이다. 그런고로 증거적 입장을 두고 세례요한에 대하여 말할 때 과연 세례요한은 여인으로난 사람중에는 제일큰 존재라는 근본의의가 확실하다는 것을 명백 히 알아야 한다. 그 다음은 그러然나 천국에서는 지극자라도 그被보다 크大니라 하심은 무슨 의의냐 하면 근본의의가 이러하다. 천국에 간 자도 여인으로 난 자들이다. 그렇다면 여인이 난 사람 중에는 세례요한이 제일 크大다고 하였는데 왜 천국에서도 커야 할터인데 제일 작은 자가 세례요한이가 되는가 하는 것이 의심아니될 수 없는 수수께끼의 한 관문이다. 이 근본의의도 세례요한의 범죄적 행위를 책망한 중대구절이란 그 뜻은 이러하다. 지금 세례요한은 예수를 메시아로 증거하여 놓고는 자기는 자기 멋대로 행하였으니 예수에 대하여서 적극 존재가 되어 행하여야 할 입장을 떠나서 행동하였으니 큰 범죄라 아니할 수 없다. 예수를 메시아로서 시봉하여야 할 중심 존재가 시봉하지 못하고 도리어 뜻 파하는 행동을 하였으니 그 자체에서는 과연 하늘에서 작은 자天微者의 행동력이 아니라 할수 없다. 세례요한이 적극시봉하였으면 그는 두말할 것 없이 하늘에서는 지극히 큰 존재가 될터인데 시봉치 못하니 하늘天에서 작은자微者보다도 못한 존재로 되었다하는 의미였다. 즉 천에 있는 성도나 또 천사나 어떤 존재라도 예수 대하여서는 메시아란 근본존재라는 것을 다 알고 극심으로 시봉하고 있는데 시봉할 중심존재가 시봉하지 못하니 시봉에 있어서는 최고작은자最微者가 되었다하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이 말씀은 시봉을 중심하고 말씀하여서 세례요한에게 대한 범죄행위를 꾸짖策음이라는 중대한 근본의의를 알아야 한다. 그 다음은 세례요한 올來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용역함으로써 득하나니 용역하는 자는 빼앗奪느니라 하심의 말씀도 역시 세례요한 대한 범죄지사를 지적함의 말씀이었다. 요한 올來때부터 지금까지라는 말씀은 무슨 뜻의 말씀인가 하면 먼저는 세례요한 자체가 뜻을 받들어서 시봉하였다면 예수님의 수제자는 세례요한이 될바는 정한 하늘의 목적이었는데 용력하지 못하였기에 즉 시봉하지 못하였기에 요한부터 지금까지라는 중에 요한이 선유권리를 주었든 큰 위치를

지시한바였는데 그 위치를 지키지 못하니 그 지정되었는 위치는 용력하는 다른 제자에게로 옮겨지었다는 것을 지적함이었다. 그런고로 천국은 용력하는 자는 빼앗奪느니라 하심이었다. 예지 예정은 근본을 두고 하신 말이란 뜻이 근본이다. 그런고로 용력하는 다른 제자들한테 그 자리位를 빼앗奪으심이라는 근본의의를 명백하게 표시한바를 보아도 여기에 세례요한이 범행한 자체이면서 예수 앞에 큰 하늘적 반역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존재 대하여서 오늘날까지 존시하였다는 과거 신앙자의 무지의 서러움을 무엇으로 방지할까. 과연 통분한 사실이다. 이 사실의 행동으로 인하여 예수의 십자가의 어려움難의 시작을 재촉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밝히 알아야 한다. 그 다음은 세례요한은 엘리야라고 말하고 그는 세상이 먹고식구 마시飮지 않으니 사귀가 들렸다하고 나도 먹고 마시食口飮니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하니 다만 지혜는 행사로 의를 나타내顯느니라 하시었는데 이 말씀 중에는 세상이 함부로 하늘뜻을 모르不知면서 자기 멋대로 정하여 평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뜻을 갖고 온 자를 대하여 조금도 응하는 자 없다함을 비유하여 아이兒孩가 시장에서 앉座아 동료同類를 불러吹 말하되曰 우리我等가 너희爾等를 향하여 나팔을 불어도 너희爾等가 춤추舞지 않고 우리가我等이 애곡哀音하여도 너희들이 가슴胸을 치拍지 않는다는 것으로 세상을 비유하여서 현재 뜻 중심한 자기의 목적요구에 조금도 응치 않음을 지적하심이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만이 하나님의 뜻을 행의로 나타顯낸다하심의 경고를 볼 수 있다는 바를 지금 교인들이 아는가. 이와 같이 초림예수 앞에 전개되었든 진상이 지금 재림을 바라는 세계신자들과 바리새 교인들과 비하여 볼때에 뜻에 속한 존재가 지금 신도 중에 몇 명이나 있겠는가! 이와 같이 근본원리들은 말세가 되니 뜻 성사시기가 오리니 명백하게 되어야만이 재림은 오는 바가 아니겠는가. 이 근본의 뜻 알고 시봉자는 하늘에서 제일큰 자라는 것이 끝날도 부여하는 사실이다. 이와같은 환경을 본 예수 앞에는 광야라는 서러움의 노정을 전개시킨 근본원리라고 위에 논한바를 이해할 줄 안다. 이런 근본을 밝히지 않으면 적극반대할 자들은 현교계 신앙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뜻과 근본을 알적에 큰 두려운 문제라 아니할 수없다. 이상 논한바 근본문제는 세례요한 자체는 하늘적으로 예정적 존재였으나 그 사명을 시봉 못하게 될 때에 하늘은 뜻 시봉의 가치를 알고 시봉하는 자가 하늘적 예정적 목적을 계승하여 완성하는 바로 하나님은 뜻의 섭리를 돌리어 역사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예지 예정적이라는 것은 뜻을 중심하고 말씀한 바이지 뜻 대하는 사람을 대하여서 말씀한바아니다. 이것 보아도 현실 신앙계의 예정론 등은 그 문제외 위치것으로 된다.

제4 절 복귀섭리 표시로 된 예수 조상의 혈통

인간은 해와의 실수와 아담의 실수는 전인류로 하여금 사망에 지도받아 하나님과는 먼 거리에서 반대방으로 나아가는 것을 다시 찾고자 하시어서 역사를 통한 섭리노정에 전폭적 뜻 표시로 전하여 왔음을 이상 논한바에 의하여 잘 알줄 안다. 그런데 특히 예수의 직계의 혈통을 가진 역사적 조상들의 전부를 살펴볼 적에 우리가 근본원리를 알지 못할때에는 한 의심되는 혈통을 가진바를 누구나 다 절감하여왔는 사실이 되어 왔다. 예수의 조상의 혈통은 전부를 섭리하시는 하나님 뜻을 중심하고 조상의 하나님을 대하여 왔든 바이다. 역대의 조상의 전표시적 중심되는 일은 후일 예수의 역사적 사실을 전부 완성할 수 있는 원리대로 표시하면서 예수까지 인도하여 경유하심이었다는 바를 알아야 한다. 즉 예수와서 타락한 전인류를 근본대로 회복하여야 하는 존재가 되려니 그 역사에 대하여서 근본 하나님의 뜻에 대한 표시적 계통을 취하여 왔든 바이다. 예수 조상에 보면 세상 사람보기에는 불결한 혈통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 혈대는 순수한 혈계가 아니고 여러 여인들 대표적 존재들이 나타나고 있다. 즉 다마, 라합, 룻, 밧세바 등의 여성들이다. 이와같은 혈계를 가진바는 본래 인생조상 아담 해와들이 더럽힌 자의 행례로서 하나님의 직계를 떠나서 사탄과 합하여 사망의 혈계를 받은바를 다시금 복귀하여 근본에 옮겨 놓고자하니 사탄한테 빼앗긴 사실적 예와 같은 반대행동으로 하나님께 속하게 하여서 사탄의 근본 더럽힌 원리를 찾아 세우고자 함이 중대요소이다. 그런고로 이런 더럽힌 여성들과 같은 자들이 행동의 뜻 성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근본, 순종, 시봉, 신종할 수 있는 그때야만이 뜻 성사된다는 원리성사를 시작할 수 있는 바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런고로 예수와서 복귀하여야 할 근본 뜻들을 전적으로 표시적 순, 신, 시종의 나타나는 곳에서만이 뜻이 시작한다는 표시로서 역사의 조상의 행동의 성립의 표시가 합의를 보아 예수의 근본되는 조상 자격자로서 부여하신 바이었다. 야곱은 에서를 두고 장자의 기 업을 빼앗아서 하나님의 기업을 성사할 표시적 사실의 성립을 보았으나 이제는 다음 번째도 선 자가 먼저 자에로써 본 계대를 성사할 시작은 즉 유다부터였다. 유다에게 있어서는 뜻 성사적 사실의 표시와 동시에 뜻 실천 성사출발을 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런고로 유다 지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 성사할 것을 미리 말하였든 바이나 뜻 성사의 첫 계대자로서 베레스와 세라를 보여 주심이었다. 이 유다부터 하나님은 뜻의 기본 시작을 보는 것이었기에 다말에게 한 쌍태를 주어 베레스와 세라 역시 야곱과 같이 복중에서 싸워서 그 뜻의 기본 확립에 한 표시를 성사함이라는 큰 의의가 있는 바이었다. 그러면 다말이 한 행동으로부터 알아보자. 다말은 本來 하나님 뜻으로 허락한 계대를 계승하여야할 입장이었는데 그 남편 죽고 혈대를 계대하여야 자기 존재에 대하여 많은 고심한 존재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 하려는 혈대를 계승하기 위하여 누구보다도 많은 고통과 함께 그其 혈대의 가치성을 안 여성이었다. 그리하여 자신 뜻을 성사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계승하기 위하여 부끄러움도 사망도 제이차적 문제시하고 목적달성의 행동으로 나간 바이었다. 그때 이런 행동이라면 용서없는 죽음의 길이 다말 앞에 시작되는 바도 알고 있지만 그런 문제를 문제시 보다는 차후의 문제로 하고 아무리 하여도 유대의 자손을 통하여서 계대를 못할 것을 아는 다말은 부득이 자기의 시부를 통하여서 계대를 잇지 않으면 안될 바를 각오하고 그其 노중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때 마침 시부가 양모를 깎으剪려 딤나에 온다는 말을 듣고 과부의 의복을 입고 너울을 쓰蒙고 딤나 노측에 앉坐으매 유다는 창녀로 여겨 자부인줄 모르고 나我와 상관함이 어찜이뇨하니 허락하여 동침하니라. 그리하여 잉태된 것이 베레스와 세라였었다. 이런 비원리인 행사가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즉 다말은 비원리로 계대를 잇는 존재가 되었다. 이 다말의 행동은 즉 무엇을 표시하는 바냐 하면 해와가 사탄한테 정조을 빼앗겨서 비원리적 계대를 세운자가 되었으니 타락을 시작케 하였는데 그와 반대로 다말은 뜻 성사하기 위한 하늘 편쪽에서 계대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근본 뜻인 한 해와가 잃었든 존재로 후일에 나타나서 다말과 같이 행동하는 것과 동일한 사실이 뜻 노중에 있음을 표시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타락된 세상에 한 여성이 하나님의 근본뜻 성사할 수 있는 한 여성이 다말과 같이 비원리적과 같은 양으로 사탄 세상 상대를 대하지 않고 하늘 상대자로 계대하여야 한다는 한 사실의 내포되어 있는 표시적 존재 즉 다말이었다. 그런고로 다말과 같이 사탄 세상 여인이 하늘 남편 맞았어야할 근본한 해와가 나타나서 신부단장하여 세상 보기에 비원리양으로 생명을 아끼지 않고 뜻 계승을 찾아 준비하는 여성이 있어야 할 후일의 목적이니 이 다말은 그 실체를 표징하는 한 존재로 됨에 이런 다말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혈통적 계대 잇는 제일 조상이 됨이다. 예수와서 이와 같은 한 해와를 찾아 하나님의 뜻을 성사할 암시적 숨은 표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말과 같이 해와는 아버지품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이 다말 모양으로 세상에서 하늘로 옮겨지는 한 행로가 있다함도 표시함이다. 유다는 하나님의 대상적으로 표시된 바고 다말은 다시 찾아져야할 한 해와를 표시함이니 그 표시가 즉 예수의 뜻 중심이니 예수의 조상의 계대로 원리상으로 허여되는 뜻으로 되는 바이다. 남편되어야 할 존재를 두어두고 시부의 품으로 들어가야 하나님이 사탄한테 다시 빼앗는 양식을 실성하여서 근본복귀를 성사할 수 있겠으니 이런 표시로 됨이 사실이다. 이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의 쌍태는 본래 하나되어야 할 존재가 둘이 되었다는 것을 표시함이다. 사탄에게 속한 자와 하나님께 속한 자가 있다함의 표시이다. 타락이 없었으면 그냥 처음 태어난 자가 장자가 될터인데 서로 장자되겠다고 싸운 것은 타락의 피血를 받은 자가 되었기에 서로 뜻을 계승받은 자가 되기 위하여서 싸웠음을 알아야 한다. 야곱 때時에는 나온 동생으로부터 빼앗을 것을 표징하여 그 기업을 빼앗고는 기업성사자 베레스와 세라는 하나님의 기업계대에 들어왔었으니 먼저 태어난 자가 뜻 계승자가 되는 바는 사실이니 베레스와 세라는 싸워서 먼저 나오려는 세라를 물리치고 베레스가 난 것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예수와서 원수의 세상에서 원수 물리치고 장자의 기업성사 할 것을 표시함이었다. 즉 같은 세상에서 장자되려고 하는 자를 물리치고 근본자리에서부터 장자를 성립시켜 기업성사할바를 알아야 한다. 이와같은 원인으로 인하여 다말은 하나님의 뜻에 성사자의 어머니母가 되었음이다. 그 아들 베레스가 장자됨이었다. 이 전부는 예수와서 직접 싸워서 승리하여 기업성사함을 역사적 거리를 두고 표시한바이다. 라합 역시 그러하고 룻 역시 그러하다. 이 여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서 지금 현실의 입장을 떠나는 존재들로서 되었기에 그런 비원리행례양과 같은 허락으로 뜻의 성사를 계승한다는 하나님의 근 본뜻을 암시하는 표시적 존재들이었다. 밧세바를 살펴보자. 인간세상에는 용납할 수 없는 비행에서 생긴生起 한 존재가 즉 밧세바의 표시적 은사를 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탄이 해와를 빼앗을 때에 남편되는 하나님을 두고 빼앗은 것이었다. 이런 것을 다시금 빼앗아서 찾았어야 할 원리로서 한 남편있는 여성이 밧세바였다. 즉 다윗 왕께 있어서는 한 충신인 우리야를 다윗왕은 전장 제일선에 보내어 죽이게 하여서 그의 부인을 빼앗은 존재 즉 다윗왕에게 동침한 솔로몬의 모친이 밧세바였다. 이런 밧세바가 어찌 예수의 조상되었는가. 또 지극한 영광의 왕 솔로몬의 모친이 되었는가 하는 것의 근본의의는 다윗왕은 하나님을 표시함이고 우리야는 천사장 누시엘을 표시함이고 솔로몬은 친히 찾고자 하는 영광주 예수의 중심을 표시한바이었다. 예수와서 하나님과 함께 하여야할 사명은 사탄의 처와 같은 해와를 우리야의 처 밧세바를 다윗왕이 취한바와같이 세상에서 성사하여야 할 사명있다는 근본 뜻 중심하였기에 이와같은 예수의 한 뜻 성사의 표시였다. 우리야를 죽인것과 같이 사탄이 이런 입장에 처하게하기 위한 뜻을 표시한 존재였기에 하나님은 사랑하여서 그 아들子을 영광의 왕 솔로몬으로 삼은것과 같이 이와 같이 찾는 이유로 뜻 성사하여 예수가 영광 누리게 하고자 함의 근본의의를 둔 뜻이 있기에 이와 같은 비공식적 존재들이 예수의 조상들의 어머니母들로 서게 된 바를 표징시키는 하나님의 중심의의였다. 이와 같이하여 예수와서 하여야할 사명적 내용을 표시하게하는 역사적 조상이었음을 알적에 과연 이 근본문제가 전부 해결의 중심의 시작이니 이런 표시로서 섭리하셨다. 예수는 세상에 탄생할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동정녀마리아로부터 탄생케하심이었다. 이도 역시 하나님이 사탄한테 동정녀 해와를 빼앗겨서 타락시켰으니 하나님도 정혼한 요셉을 한 상대로도 빼앗아서 제2차 아담 예수로 탄생하게 하심이었다. 이때 대상적으로는 요셉과 마리아는 근본 아담 해와가 타락때에 미성혼의 한 사실적 입장에서 사탄한테 빼앗겼으니 그와같은 원리로서 빼앗는 양으로 하나님의 동정녀한테 수태케함의 근본의의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 친히 영으로 빼앗았으니 예수는 육으로 또 그 근본의의를 복귀하여야 할 의의를 갖고 있음인데 마리아가 불순응 함으로 뜻 미성사로서 예수 앞에 난점의 시작을 보게 되었다. 그런고로 예수 육신으로 해와 한 자체를 찾으려고 하니 새 노정을 취치 않을 수 없는 입장의 노정이 삼년 공생애의 노정이었다. 그런고로 예수 앞에 보여지는 마리아 는 중대한 하나님의 뜻 중심하고는 원수적 존재로 되었다. 그런고로 예수 모친보고 여인이여 너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뇨 한 것은 하나님 뜻 성사케 못한 존재니 이런 말씀言의 한 상대의 존재였다. 인간적으로 알지 못하는 이와같은 근본원리를 세우려는 예수 앞과 하나님 앞에서는 사탄이 제일 무서워하는 근본역사인 이 터가 파괴하는 일이니 사탄은 예수 앞에 언제나 대립하여 나아감을 다시금 인식치 않으면 안될 사실이다. 이와같은 세상없는 한 노정의 시작이 있다함을 완성하여야할 그때(하나님)의 심정에는 말할수 없는 큰 생명대신하여서라도 성사치 않으면 아니될 과업이 남아지게 되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여 하늘 뜻 성사못하는 그 입장인 요셉의 가정과 마리아와 예수와는 상관없는 생활의 시작으로 나서게 되는 첫 시작이 광야생활이다. 이때 제자들로 완성하여야할 세례요한 일파 등도 예수 앞에는 하등도움 못되는 존재들이었다.

제5 절 예수 삼년 공생애의 노정은 뜻 성사의 터를 찾기 위함

삼십년이란 장기간에 걸쳐서 하나님의 뜻을 품고 예수는 꾸준히 요셉의 집에서 목수업으로 생계를 취하여 나오든 그 심중에는 다만 뜻 성사의 마음을 단몇 시何時라도 잊어 본적이 없는 입장이었다. 삼십년간 여러 가지로 하나님 뜻을 가지고 시련를 거듭하여 오면서 뜻 성사할 수 있는 성취자가 되도록 내적완성을 위한 준비시대였다. 그 중에 내적으로 마리아 모친과 협조을 보지 못한 예수는 출가하여서 새 뜻을 성사하기 위한 제2차 뜻을 세워 찾고자 함에서 나서게 되었다. 예수 한 존재가 그 시대에도 귀한 존재라는 것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요단강변 선포가 있은 후에 요한은 뜻과 사명을 다하지 못하여서 외부로 성사하려는 예수의 뜻 성사의 노정에 한 서리를 퍼부었다. 내부로는 요셉 가정이고 외부로는 세례요한이 하도 험난한 행로를 독단히 가려하니 원수 사탄 대한 싸움의 보조로써 광야40일 금식기간은 시작을 봄이다. 광야에 나아가서 40일 금식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예수 앞에 부여한 길 보다도 하나님이 근본 잃어버렸든 여러 가지의 조건들을 사탄과 결판判結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즉 예수는 제1차 하나님 책임분담 과정에 있어서 사탄한테 잃어버렸든 제조건을 찾아 성사할 역사적 복귀책임이 있는 동시에 자기로서 감당하여야 할 제2차 책임분담사명노정을 잡고 나서고자 하니 구약 시기에 보여주신 제1차 하나님의 책임분담노정을 본받아 성사하여야 할 시작이 있어야겠으니 먼저 사탄한테 역사적으로 표시적 약속의 물건에 침입을 본 근본사탄이 전적으로 예수 앞에 다시금 그 실체자로서 침범을 방지하여야 할 근본을 찾아 세우고자 하는 기간이 이 기간이었다. 예수는 제2 아담 하나님 몸으로 온 자였다. 출애급 시대에 광야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言에 두석판二石板을 깬破 사실과 반석 두 번친 사실들은 즉 예수 몸을 쳐 하나님 몸까지 칠 사실적 의의를 잊었기에 한번은 허락으로 한바이나 2차식이라는 것은 큰 문제 즉 사탄이 행한바의 간접적 결과점을 보게 되니 사탄이 하나님의 몸을 쳐 그 근본자체에 침입한다는 표시적 자체가 이미 침입을 보았으니 사탄은 벌써 예수 자체한테 이런 침입의 근본으로 인하여 다시금 사람들이 불순, 불신, 불시에 나가는 것을 바라든 차인데 내외로 예수는 실패보니 즉 불순과 불신과 불시를 보니 벌써 사탄은 지난날昔日의 자기가 소유할 수 있는 표시로부터 그 근본 실체물까지 침입하여 굴복케 하고자 하는 의도의 실현상이 사탄의 시험이었다. 그래서 사탄은 실체 예수를 시험시키는 것은 실체를 굴복시켜 하나님 뜻 깨破하고자하는 일대 중요의의가 있었다. 그런고로 사탄은 예수를 시험에 대립하여 서게 되는 이유가 있는 바이었다. 이때 사탄이 시험주인격으로 설수 있었다는 바는 벌써 표정물 두이석판과 반석을 취할 수 있다는 그 이유로서부터였다. 그리하여 사탄은 실체 예수앞에 침입하려고 가진 근본을 잡으려하나 예수는 전체가 하나님 뜻을 완전히 성사할 수 있는 자체격 구비를 보니 사탄은 그 목적을 미달성하심이었다. 끝까지 뜻을 세울수 있는 터라 예수 앞에 보였다면 큰 사실이었겠는데 시험하여보아도 그 자체를 여하히 할수 없기에 사탄은 떠나가고 천사는 시종들었다는 기본의의를 알아야 한다. 사탄은 시험할적에 근본목적은 예수가 시험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면 그것은 예수 앞에 중요한 전목적을 갖고 하여만이 예수를 유인시킬것이 사실이니 예수 자체와 분립못할 그 목적체식을 갖고 시험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사탄은 승리하면 예수의 전목적을 파괴라는 그 근본목적을 갖고 시험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가 온바는 구약을 완성하여야할 존재다. 즉 하나님적 사명책임노정을 실체로 완성하여야 할 책임자가 즉 예수였다. 그런고로 그 책임 다 하려면 네가 모세의 실패한 부분을 찾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사탄은 아니 이 중요점을 가지고 시험한 첫 것 즉 돌石로 시험하심이었다. 40일 고로 인하여 받은것도 찾아 세워야 할 사명이 있으니 역시 40일 금식이 요구되었다 이 잃어버린 돌石을 찾으려니 굶주리고 있는 중에 사탄 와서 이 돌石로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떡이 되게하여 먹으라 하심이었다. 이것은 석판을 파하게되는 제일원인은 먹는 것을 기인하였으니 너도 그리 굶주리지 말고 먹으라하심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먹는 것 때문에 실패하였으니 너도 먹으라마 하심이었다. 그 근본실패케 하든 자리로 돌아가라하는 사실실패한 그 표시적 요구로 시험하였다. 그때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口으로 나오는 말씀言으로 산다하심이었다. 이는 즉 전부가 말씀言을 찾아서만이 산다는 것이었다. 이 말씀이란 뜻이 근본체를 찾아야 산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바이다. 즉 돌石과 반석인 동시에 그 근본실체인 예수 자체를 말함이었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로써 산다는 것으로 승리하였었다. 예수=하나님의 말씀의 전표시완성자이었다. 그런고로 예수 있는 곳에 하나님은 뜻 성사하니 너는 어서 물러가라는 근본목적으로 승리함이었다. 이러므로 잃어버린 그 실체인 터는 세워 놓았다. 이 반석과 돌石되는 터는 예수 하나로써 한 기반지었으나 이 다음은 뜻 실천성사는 남아있는 바이다. 그런고로 예수는 누구신고하니 성전 대신자이면서 성전의 주인공이라는 근본의의를 갖고 시험키 시작하였다. 이것은 즉 예수의 전목적체였다. 그런고로 사탄은 사실의 요구중요목적을 다시금 표시하여 시험키 시작하였다. 예수를 성전꼭대기頂에다 세우시고 왈 네爾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子이어든 뛰어내리라. 대개 기록하였으되 하나님께서 너爾를 위하여 사자들에게 분부하여 손手으로 떠받쳐서 발足이 돌石에 부딪히지 않게하시리라 하여 시험하시었다. 그러나 뛰어내리라하심은 그 성전 주인격에서 한 평민과 같이 되어라 하시어 그렇게 되면 사탄이 자기가 성전주관자가 되겠으니까 너는 원리대로 되는 존재인이니 그 원리적 존재는 즉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의 몸이 나이다. 그러니 나밖에 성전 주인공은 없으니 너는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 즉 그 주인공은 언제나 주인공이니 너는 물러가라하시는 그 근본의의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이리하여 성전 완성적 표시존재 예수는 그 표시적 실체존재로써 설수 있는 한 승리를 보았으니 너는 방해하지 말라는 근본 뜻 성사하는 과정에 사탄을 대방할수 있는 기초를 세워 대중 성전 번식의 시작은 할 수 있다는 터를 성사하시었다. 다음은 예수를 높은至高한 산에 올라上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示여 왈 만일 나我에게 엎드伏려 절拜하면 이 모든 것을 주與시리라 하시었다. 예수 대답하여 왈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하였으되 주, 너爾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유독 그를 섬기事라하여서 일대승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 근본의의는 예수 자신은 과연 하나님 뜻 중에서 천하만국에 지극히 높은至高은 존재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은 높은산至高山에 올上라 보임이 즉 예수는 하나님 뜻 중에서 제일 귀하고 천하만국에 제일높高은 자라는 것을 알며 그 영광 전부도 차지할 존재인것도 알고 있음으로 이런 것이 예수에게 제일귀한 목적이니 이런 예수의 전목적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엎드려절伏拜하면 이 모든 것을 주與리라하셨다. 이에 사탄아 물러가退라 하심은 이것은 원리적으로 나에게 속하여 있는 것이요 또 내것이면서 하나님 뜻에서 완성되어 하나님이 존경받으셔야 하는 바가 원리인데 네게 엎드려 절伏拜하라는 그 말은 사탄 본성폭로니 너는 물러가라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비원리가 말씀에도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惟獨 그를 섬기事라하셨다. 내가 섬길바는 하나님 한 자체밖에 없고 너도 근본은 그분한테 경배할 자 아닌가 하여서 대승리하여 사탄을 패하게 하였다. 이 승리로 인하여 예수는 승리의 출발이라는 뜻을 품고 나서게 되었다. 이와 같이 사탄과 예수와는 원리적 사실을 두고 싸웠으나 결과는 원리적으로 승리하는것이라는 승리점을 세워가지고 나서게 되었다. 사탄은 떨어졌으니 사람이 예수께 절대하면 사탄 시험한바와 같이 구약 완성자면서 성전완성주인자면서 세계대주재이라는 확고한 기본궤도를 잡고 나서게 되었다. 그 후에는 12제자와 70 문도를 택함이다. 40일 기간은 노아 홍수심판시도 40일주야로 죽이게 한 것도 즉 아담 때문이고 모세가 40일 주야를 고생함도 아담때문이니 제2 아담으로 오는 예수는 40일 고난의 기간에 잃어버린 전부를 완성하여야 할 대신책임이 있으니 40일 금식기간이었다. 그리하여 고난의 기간이라는 것을 없애기 위한 목적이 있기에 40일을 고생하는 것이었다. 모세가 40일 금식한바도 말씀言을 찾으려 하였으니 말씀 성사한 예수는 고통을 없애기 위한 금식이 40일 금식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로 인하여서 고생없이 말씀言 완전성사한다는 것이었다. 여기 부언하려는 바는 예수 요단강에서 세례받고 올라올적에 성신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위上에 임하심은 무슨뜻인가 하니 예수 한 존재는 아브라함의 약속받은 전부를 완성하는 중심자체였다. 즉 아브라함의 예약제물을 사탄한테 침입받았던 사실은 사탄이 따를 수 있는 터가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