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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부분: 제2 편 제1 장 왜 타락케 하고 섭리하는가.
* 시작 부분: 그리하여야만 예수 와서 전하는 바의 복음에 순응함으로 예수의 몸될 수 있는 성전에서부터 우리는 한 분성전 건설이상을 조성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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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
== 원문 ==
<nowiki>
그리하여야만 예수 와서 <ruby>전<rt>傳</rt></ruby>하는 바의 <ruby>복음<rt>福音</rt></ruby>에 <ruby>순응<rt>順應</rt></ruby>함으로 예수의 몸될 수 있는 <ruby>성전<rt>聖殿</rt></ruby>에서부터 우리는 한 <ruby>분성전<rt>分聖殿</rt></ruby> <ruby>건설이상<rt>建設理想</rt></ruby>을 <ruby>조성<rt>造成</rt></ruby>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承 수 있는 터를 <ruby>성사<rt>成事</rt></ruby>하여야 할 <ruby>사명단계<rt>使命段階</rt></ruby>가 즉, 솔로몬 <ruby>왕이후<rt>王以後</rt></ruby>에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이 짊어진 근 <ruby>중대목적<rt>重大目的</rt></ruby>이었다. 그런 <ruby>반면<rt>反面</rt></ruby> 사탄은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들에게 <ruby>묘<rt>妙</rt></ruby><ruby>수단<rt>手段</rt></ruby>을 하여서라도 하나님이 <ruby>직접<rt>直接</rt></ruby> <ruby>취<rt>取</rt></ruby>하여 나오는 그 뜻 <ruby>성사<rt>成事</rt></ruby>의 길을 <ruby>분열<rt>分裂</rt></ruby>하고자 하여서 여러 모양으로 <ruby>불순<rt>不順</rt></ruby>과 <ruby>불신<rt>不信</rt></ruby>의 씨를 찾아서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에 <ruby>대<rt>對</rt></ruby>하여 <ruby>침입<rt>侵入</rt></ruby>의 <ruby>마수<rt>魔手</rt></ruby>를 뻗치려는 <ruby>시도<rt>試圖</rt></ruby>에 <ruby>강경<rt>强硬</rt></ruby>히 <ruby>대상<rt>對峠</rt></ruby>하여서 하나님 <ruby>편<rt>便</rt></ruby>에 더 깊이 서서 나아가야 할 <ruby>입장<rt>立場</rt></ruby>임에도 <ruby>불구<rt>不拘</rt></ruby>하고 <ruby>왕<rt>王</rt></ruby>으로부터 <ruby>백성<rt>百姓</rt></ruby>은 <ruby>음란<rt>淫亂</rt></ruby>의 <ruby>신<rt>神</rt></ruby>의 <ruby>근본<rt>根本</rt></ruby>인 원수를 섬기는 <ruby>방향<rt>方向</rt></ruby>으로 나아가려는 <ruby>백성<rt>百姓</rt></ruby>을 또 쳐打서 <ruby>각심<rt>覺心</rt></ruby>케 하여 오면서 가진 <ruby>수단<rt>手段</rt></ruby>을 다하여서 이 <ruby>백성<rt>百姓</rt></ruby>을 <ruby>보호<rt>保護</rt></ruby>하여 왔는바였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민족은 종교의 신념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민족이다. 그런고로 한국민족에게는 그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그 대하는 곳마다 종교적 신념으로만 대하여 나오는 민족이니 만큼 종교구성을 가지지 못한 d입장에서라도 신앙을 발휘하여 자기들의 신념목적을 달성하려고 많이 노력한 민족이다. 그러기에 한국인들은 종교관념이 강한 민족이다.
 
그러나 유교의 정신을 받아 삼강오륜을 완성하기 위하여 전국가적으로 노력한 전성시대의 결실인 조선 역사를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유교는 한국을 중심하고 그 목적을 최고발휘한 나라라는 바는 사실인 동시에 그의 신념심은 지금까지 숙련한 급에 사람들은 대개가 전부는 유교정신을 습득하여 나오고 있다. 이  유교적 정신은 지금까지 그 사명적 절개를 유지하였기에 한국은 지금까지 유교를 중심한 동양의 한 중심지로서 그 믿음을 높이 가지고 있음으로 한국을 동양예의지국이라는 역사적 유래를 가지고 있는 바이다. 이렇듯이 유교는 한국인에게 큰 교양적 중심으로 위대한 역활로서 ㅇ역사를 지내왔다. 그 유교적 사상은 외정하에 있으면서도 그 사상을 세워 나온바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외정 이후에 신문명 문화세계를 바라보아 신생을 하여 출발된 시대를 당하여서도 자기들이 유전하여 숭배하든 공맹의 사상을 중심한 도를 중심하고 고상한 도덕심을 가지고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 신시대를 당하여서 한국의 입장은 압정을 당하니 자연적 인습사상이 농후한 유교적 사상은 점차로 자극받아 감소하여 나오는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유교적 사상을 가진 인사들은 그 시대에 바라는 바는 다시 국토복귀를 희망하여 나오는 중에 한국에 대한 예언서로서 나타나 있는 정감록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외정을 대하여서 자기들의 태도를 정하고 한국이 복귀되어 전세계의 중심국으로 된다고 알려주는 정감록을 중심점으로 하여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민족은 유교를 숭배하는 지식층에 속하는 자들은 대다수가 이 정감록을 중심으로 하여서 국토복귀와 동시에 한국의 한 이상경을 논하면서 지금까지 나오고 있는 바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 예언서는 과연 시대적으로 모두가 맞아 나왔다는 예에는 지금 한국전민족을 말하면서 그 예언서를 많이 숭상도 하고 있다.
그러나 <ruby>심정<rt>心情</rt></ruby>을 알고 안타까하는 <ruby>자<rt>者</rt></ruby>는 <ruby>점점<rt>漸漸</rt></ruby> 그 뿌리조차 보기 어렵難게 <ruby>성전<rt>聖殿</rt></ruby>을 더럽힌 <ruby>행동<rt>行動</rt></ruby>몇번이었든고 하나님은 <ruby>성전<rt>聖殿</rt></ruby>을 세워서 뜻 <ruby>성사기초<rt>成事基礎</rt></ruby>의 <ruby>표시<rt>表示</rt></ruby>는 <ruby>완성<rt>完成</rt></ruby><ruby>목적기본<rt>目的基本</rt></ruby>을 잡아서 <ruby>약속<rt>約束</rt></ruby>은 <ruby>시작<rt>始作</rt></ruby>하였으니 그만 둘 수 없는 <ruby>책임감<rt>責任感</rt></ruby> <ruby>외<rt>外</rt></ruby> 사탄은 <ruby>기세당당<rt>氣勢堂堂</rt></ruby>하여 하늘뜻을 <ruby>파괴<rt>破壞</rt></ruby>하는 그것을 볼적마다 <ruby>공<rt>功</rt></ruby>드렸던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을 <ruby>파기<rt>破棄</rt></ruby>할 수 없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ruby>파기<rt>破棄</rt></ruby>하면 <ruby>전부<rt>全部</rt></ruby>가 <ruby>사망<rt>死亡</rt></ruby>의 괴로움苦에 삼켜질 것이며 하나님 <ruby>역시<rt>亦是</rt></ruby> <ruby>불안<rt>不安</rt></ruby><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를 <ruby>피<rt>避</rt></ruby>수 없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니 아무리하여도 그 뜻을 <ruby>성사<rt>成事</rt></ruby>하여야 할 바가 하나님의 <ruby>과업<rt>課業</rt></ruby>이니 <ruby>선지<rt>先知</rt></ruby>들을 세워서 그 뜻을 <ruby>백성<rt>百姓</rt></ruby>들이 <ruby>연화<rt>聯和</rt></ruby>할 수 있도록 <ruby>성전<rt>聖殿</rt></ruby> 뜻 <ruby>유지<rt>維持</rt></ruby>를 <ruby>계속<rt>繼續</rt></ruby>하여 왔든바이다. 그런고로 그 <ruby>근본목적<rt>根本目的</rt></ruby>은 예수 한 <ruby>존재<rt>存在</rt></ruby>가 <ruby>중심<rt>中心</rt></ruby>이었다.
이렇게 유교의 사상은 정감록을 중심하고 기본목적인 유교의 도덕관념보다도 정감록 지대사상으로 유교인들은 입장을 세울 수 있는 노선을 취하여 나타난바가 외정을 상대로하여 동학이라는 명칭으로 하여 민족운동을 일으킨 것이 즉 삼일운동 기미년 사건인 것이다. 이리하여 동학당은 한 교파를 세워 종교모양으로 이상을 잡아 세계없는 천국이상을 중심하고 천도교라는 명칭으로 나타나 지금까지 나오고 있다. 그 모든 중심은 한국을 중심한 예언서 정감록을 중심하고 그 목적완성표준을 정하고 나오고 있다. 유교는 한국의 신형체를 가진 한 교를 이루成어 놓게 되었다. 그런고로 유교적 한 결실한 존재를 천도교는 그 위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한국인은 신앙을 끝까지 변치 않고 나오고 있으니 신교리는 천리를 통하여 내게 된다.
 
또 불교를 두고 한국을 살펴보면 역시 불교도 조선시대를 중심하고 많은 발달을 해왔지만 외정하에서도 불교는 많은 장성을 보아왔다. 그리하여 불교역시 전성을 본 곳은 한국이다. 그리하여 불교는 한국에 있어서 특히 한 말래에 대한 극락사상으로 나오면서 한국에 대한 예언적 선언을 많이 하여 왔다. 그리하여 한국 예언서를 기록한 바도 불교에서 시작한 바도 사실이다. 이렇듯이 한국 삼천리를 중심하고 불교로 전성목적 완성하게 하여 창조주의 신희와 세계에 대한 예언을 찾는 그 사명적 책임이 큰 바도 사실이다. 이렇게 하나님 동양에는 기독교가 없든때도 이런 종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래의 지상목적과 천국목적을 종교로 세워서 그 노정을 발표한 것이다.
다음은 예수께 <ruby>합<rt>合</rt></ruby>하여 한몸되어 <ruby>제<rt>第</rt></ruby>2<ruby>차<rt>次</rt></ruby> 예수 <ruby>존재<rt>存在</rt></ruby>와 같은 <ruby>번식이상목적시작<rt>繁殖理想目的始作</rt></ruby>의 <ruby>전부<rt>全部</rt></ruby>가 이스라엘 <ruby>백성행동<rt>百姓行動</rt></ruby> <ruby>여하<rt>如何</rt></ruby>로 <ruby>기반<rt>基盤</rt></ruby>을 잡을 수 있는 바이니 얼마나 아버지 뜻에 안타까운 <ruby>심정<rt>心情</rt></ruby>이랴.
그러기에 하나님은 한 분이니 그 목적은 동서로 나누어 있는 대도 종국에는 한 목적 기점상을 향하여야 하는바가 하나님이 계시는 원리적 사실인 바다. 지금이 불교도 역시 그네들이 나가는 방향을 새로이하고 있는바는 사실이다. 즉 20세기 문명세계를 떠나서는 그 목적 미완성할 바로 알고 있다. 언제나 종교란 것은 사람을 중심하고 시작하는 것인데 사람 생활경지를 간격하고는 그 점을 대중에게 전할 수 없는 바도 사실이다. 이리하여 한국의 불교도 역시 지금 한국 예언서인 정감록은 천도교인과 유교인과 불교인이 전부 한 현실에 바라는 한 현실이상경으로 되어 있는 바는 사실이다. 이렇듯이 한국종교 중 유불교는 또 천도교는 전부가 한국 예언서로서 그 목적 표준을 한곳으로 향하여 집중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다면 최종말에는 원리완성을 중심하니 종교들도 통일이 목적이니 이런 고래에 오는 한국종교는 한 기점을 향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한국을 중심하여 섭리하고 있다는 증거는 사실이다.
 
여기에 특히 천도교는 근3천여년 역사를 중심하고 한국에서 시작한 바는 하늘의 존재목적완성할 앞날의 터를 닦기 위하여 그 존재가 나타나기 직전에 시작하게 한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상천국 목적을 바라고 나오는 그 교는 바로 하나님의 뜻 하는 한국에 있어서 준비한 교인바다. 이렇게 하나님이 하늘 존재를 보기 전 이와 같은 한 완성기대를 잡아야 하겠으니 이런 교가 생기는 것은 하늘 목적이었는 바이다.
그런고로 <ruby>성전<rt>聖殿</rt></ruby>지키면서 하늘 뜻을 받들 수 있는 <ruby>주위공작<rt>周圍工作</rt></ruby><ruby>계속<rt>繼續</rt></ruby>하면서 <ruby>기본<rt>基本</rt></ruby>되는 <ruby>자체<rt>自體</rt></ruby>인 메시아를 보내여서 뜻 <ruby>성사<rt>成事</rt></ruby><ruby>최고목적<rt>最高目的</rt></ruby>을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에게 <ruby>예고<rt>豫告</rt></ruby>하여서 그 뜻을 받들 수 있는 그 <ruby>노정<rt>路程</rt></ruby>을 지켜나가게끔 하여서 <ruby>선지자<rt>先知者</rt></ruby>를 <ruby>통<rt>通</rt></ruby>하여서 메시아 보내실 것을 <ruby>예언<rt>豫言</rt></ruby>하여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을 <ruby>자극<rt>刺戟</rt></ruby>하시었다. 그러나 그 뜻을 바라면서 <ruby>십수백년<rt>十數百年</rt></ruby> 동안을 <ruby>계속<rt>繼續</rt></ruby>하면서 <ruby>권고<rt>勸告</rt></ruby>하여 왔든 바이었다. 그러나 뜻을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ruby>적극협조<rt>積極協助</rt></ruby>못하여서 이와 같이 뜻 <ruby>성사<rt>成事</rt></ruby>의 <ruby>시일<rt>時日</rt></ruby>을 <ruby>연장<rt>延長</rt></ruby> 시켜왔든바이었다.
이리하여 한국을 중심하고는 전종교는 한 목적점을 향하여 움직여 나옴은 끝날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이니 종교목적도 하나님 뜻을 돕게 하기 위한바의 목적으로 완성을 보는 바가 원리인 바다.
 
세계통일운운하는 때時가 오기전에 종교적 통일점을 보지 않으면 세계통일의 완성을 보지 못하는 바다. 이외 종교는 지금 현문명과 합류화하여 역사하는 기독교를 살펴보자. 한국 기독교는 근 80년 역사를 두고 세계상 이와 같이 급속도로 교포한 나라는 없는 바다. 기독교는 한국에서 많은 학대를 받으면서 지금까지 신조를 유지하여온 역사를 갖고 있는 바다. 특히 구교의 희생도 더욱 큰 것이었다. 이리하여 하늘 대하여 빌 수 있는 길을 잡은 한국인은 정성을 다하여서 하늘 대하는 신앙생심을 한국민족은 세워 나왔다. 이 민족은 장래에서 제2 유태민족이라 하여서 전세계인이 말하는 바도 큰 의의있는 바이다. 모든 면으로 볼 때 관련있는 민족인 바는 사실이다. 특히 영적으로 교시받는 신앙자에게는 한국은 기독교를 중심하고 지금 최대 표준국과 합류를 보고 있는 바는 사실이다. 이 한국 신앙계도 역시 전세계의 한 결실지로서 그 입장의 위를 높여 잡고 있지 않는가. 신기한 이적도 지금 많이 보고 있는 사실로 보아도 과연 세계에 없는 위상을 갖고 있다. 이 한국교계는 20세기 현시대를 두고 세계상에서 대표적 고통도 신조를 위하여 받아왔다. 외정하의 그 극난에서도 참고 승리한 숭고한 신앙의 절개자 어디에 딴 곳에 볼 수 없는 현대적 최고 순교국가이다. 외정을 중심하고 고난과 그 공산주의를 중심하고 당한 처참한 학살 등 과연 현세계에 종류를 볼 수 없는 국가인 바다. 외정 신사참배문제로 신앙정조를 범한 것은 하늘적으로 완전하게 탕감키 위하려니 그 순교적 사람들은 한 제물로서 대신되어 짐을 한국교계신앙자는 잊어서는 아니 될 바이다. 재건교회가 나와 그 사명적 역할을 다하고는 다시금 하나님의 기본점 합하여 하나되어야 시대는 머지않아 바라는 바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복잡한 역사를 통하여 오면서 선혈의 순영을 높이 찬양하여 하늘 뜻 완성에 전력을 다하여야 바가 사실이 아니겠는가.
메시아 <ruby>약속<rt>約束</rt></ruby>을 받고 바라는 <ruby>백성<rt>百姓</rt></ruby>은 <ruby>조급<rt>躁急</rt></ruby>하게 바랐으나 하나님의 뜻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ruby>실천<rt>實踐</rt></ruby>에 <ruby>대<rt>對</rt></ruby>하여서는 <ruby>망각<rt>忘却</rt></ruby>하고 <ruby>자기<rt>自己</rt></ruby>의 <ruby>요구<rt>要求</rt></ruby>들만 바라는 그 <ruby>자체<rt>自體</rt></ruby>는 <ruby>타락<rt>墮落</rt></ruby>의 피血를 받은 <ruby>패역<rt>悖逆</rt></ruby>의 <ruby>백성<rt>百姓</rt></ruby>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면서 메시아 오기 <ruby>전<rt>前</rt></ruby>에 <ruby>대<rt>對</rt></ruby>한 <ruby>기간<rt>期間</rt></ruby>도 알려주어 그의 바라는 <ruby>희망성<rt>希望性</rt></ruby>을 높여주어왔다. 메시아 오기 전에 먼저 그의 <ruby>전목적<rt>全目的</rt></ruby>을 받들 수 있는 <ruby>준비공작사명자<rt>準備工作使命者</rt></ruby>로 오는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ruby>약속<rt>約束</rt></ruby>하여 그 <ruby>시기적<rt>時期的</rt></ruby> <ruby>한도<rt>限度</rt></ruby>를 보여주었든 바이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은 <ruby>전부<rt>全部</rt></ruby>가 메시아 <ruby>강림<rt>降臨</rt></ruby>이 <ruby>전<rt>全</rt></ruby> 바라든 <ruby>소망<rt>所望</rt></ruby>으로 그를 <ruby>생활내<rt>生活內</rt></ruby>로서 뜻을 찾아 나오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은 <ruby>성전중심<rt>聖殿中心</rt></ruby>하고 메시아 <ruby>소망<rt>所望</rt></ruby>이 한 <ruby>목적<rt>目的</rt></ruby>으로 바라오면서 <ruby>희망<rt>希望</rt></ruby>을 높이하여 <ruby>자연적<rt>自然的</rt></ruby>으로 <ruby>자기<rt>自己</rt></ruby>들의 <ruby>준비<rt>準備</rt></ruby>를 <ruby>계속<rt>繼續</rt></ruby>하여왔든 바였다.
그리하여 지금 한국의 신앙계를 살펴보면 특수한 새 일들이 신앙계를 중심하고 많이 보여지고 있다. 지금부터 근20년을 중심한 한국기독교회에 하늘편으로서 보냄을 받아 나타났던 최고신앙자들을 이단의 중심자로서 매장하였던 그 존재들은 과연 하늘 뜻 중에 크나큰 사명존재로 보내심을 받은 존재였다. 그는 멀지 않아 외정악마를 대비하여서 한 기대를 세우려고 하여 보냈던 존재를 가치없이 보내게 되었다. 지금 그 뜻을 중심하고 새 제단이 시작보았으니 그 자체의 위세를 지금 왜 잠기고 있는가. 과연 뜻에 무지한 인간을 대하는 하나님의 섭리는 어찌되어야 하겠는가. 완성하려니 사람 믿지 않음은 지난날昔日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바이다. 그러나 뜻은 참으로 성사를 보아야 하겠으니 하나님의 사명을 받들어 이 뜻을 기록하게 되니 어찌 마음으로 탄식치 않으랴.
 
한국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최후적 목적완성을 표준하고 바라보고 있기에 그 섭리적 역사로 어디에 특별한 신앙존재들을 통하여서 새로운 일들을 발표케한바도 크나큰 원리가 있는 바이다. 그것은 모두가 협력하는 기독교신앙 노중에 없는 전부 새로운 것을 발표하는 바는 뜻 성사 표준하는 바도 뜻 성사를 표준하여서라는 바는 사실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과 <ruby>합<rt>合</rt></ruby>하여서 <ruby>기초공작<rt>基礎工作</rt></ruby>과 함께 메시아를 <ruby>세상<rt>世上</rt></ruby>에 보내주어 그들의 <ruby>소망<rt>所望</rt></ruby>을 <ruby>성사<rt>成事</rt></ruby>하여주는 <ruby>동시<rt>同時</rt></ruby>에 <ruby>자기<rt>自己</rt></ruby>의 <ruby>목적실행<rt>目的實行</rt></ruby>의 한 기쁨과 <ruby>기대<rt>期待</rt></ruby>였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ruby>원<rt>願</rt></ruby>하시는 메시아 보내주면 <ruby>전<rt>全</rt></ruby>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은 <ruby>생명대신<rt>生命代身</rt></ruby> <ruby>귀<rt>貴</rt></ruby>하게 알면서 그의 <ruby>전<rt>全</rt></ruby> <ruby>주위<rt>周圍</rt></ruby>에 대한 <ruby>단속<rt>團束</rt></ruby>을 지어 <ruby>성전이상<rt>聖殿理想</rt></ruby>을 실현하고자 함이었는데 그 뜻을 아는 <ruby>자<rt>者</rt></ruby> 몇<ruby>명<rt>名</rt></ruby>이였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한 <ruby>소망<rt>所望</rt></ruby>을 갖고 <ruby>제<rt>第</rt></ruby>1<ruby>차<rt>次</rt></ruby> 하나님<ruby>적<rt>的</rt></ruby> <ruby>책임시기<rt>責任時期</rt></ruby>는 끝 맞추어 <ruby>제<rt>第</rt></ruby>2<ruby>차<rt>次</rt></ruby> <ruby>책임사명분담<rt>責任使命分擔</rt></ruby>의 <ruby>행로<rt>行路</rt></ruby>를 잡아주고 <ruby>섭리계속<rt>攝理繼續</rt></ruby>하여서 <ruby>자기<rt>自己</rt></ruby>몸으로 지었든 아담 해와의 <ruby>사명적<rt>使命的</rt></ruby> <ruby>분담성사노정<rt>分擔成事路程</rt></ruby>으로 옮기기 <ruby>위<rt>爲</rt></ruby>하여 오신바가 즉 예수였다.
한국기독교는 큰 난사로서 대할지 모르나 특히 내가 바라는 바는 교시받는 자는 이 발표를 보고 기도로서 해결받으라. 그러면 하고 예수 재림이란 발표에 대하여 그 근본을 알고 대하여야 할바가 현 한국기독교의 사명이다. 만일 부인하고 나면 전부를 미해결적 세계로 될바다. 그런고로 뜻을 알고 날 때 크나큰 역사적 변경을 한국을 통하여 섭리하는 바를 알 있다.
 
이리하여 모든 원시적 중심을 기독교가 쥐고 신소생출발하여야 할 책임이 있는 바다. 이리하여 한국에서 뜻 성사할 수 있게 하여야 하겠으니 외부적 종교들도 한 이상기점으로 바라고 있는 존재는 사람이란 존재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원리적 논리로 보면 아담으로 와야하는 기독교재림주도 한국인으로 와야한다는 모든 근본을 알게 될 때 세계신앙계 전부도 한 해결의 신( )정하는 바가 시작하지 아니하겠는가. 그러기에 현세계의 특별한 유지들은 재림한다는 발표를 바가 맞지 않고 있는 듯 하나 사람으로 오니 후30여간을 중심하고 재림한다는 발표가 있어야하는 바가 원리인 바이다.
예수는 <ruby>제<rt>第</rt></ruby>2 아담이다. <ruby>성경<rt>聖經</rt></ruby>에는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보아도 로마서 5장 14절을 보아도 예수는 <ruby>제<rt>第</rt></ruby>2아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 <ruby>조상<rt>祖上</rt></ruby> 아담 해와가 <ruby>타락<rt>墮落</rt></ruby>시켰으니 <ruby>원리<rt>原理</rt></ruby>대로 <ruby>자기<rt>自己</rt></ruby>들의 <ruby>범<rt>犯</rt></ruby>한 <ruby>책임사명<rt>責任使命</rt></ruby>을 다 찾아 <ruby>복귀<rt>復歸</rt></ruby>하여야만 <ruby>근본<rt>根本</rt></ruby>뜻을 <ruby>성사<rt>成事</rt></ruby>할 수 있는 <ruby>창조이상<rt>創造理想</rt></ruby>이 됨이었다.
그런고로 이 재림주 존재를 예언한 외부종교의 예언서로 된 정감록의 중심존재란 바가 동서양 분립하여 섭리하나 한 목적기점향하여 완성하려는 하나님 뜻의 성립는 보는바도 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나오는 기독교의 미해결을 해석하고 신이상세계 출발을 바라는 바는 사실이다. 지금 이와 같은 한국의 기독교적 사명을 완성하여야만 전세계를 통하여 뜻 완성의 한 노정을 조성할 바다. 그러므로 기독교 중심하고 한국의 종교는 합하여 한 노정을 조성할 바다. 그러므로 기독교 중심하고 한국의 종교는 합하여 한 목적기점을 향하여 이상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될 전한국민족의 사명인 바도 된다. 그러기에 전종교는 자기들이 숭배하는 하늘 대하여 교시로서 해결받아야 할바가 목적으로 되어있다. 어떤 종교신앙자나 최고위에 있는 신앙자로 신의 교시를 받는 바니 믿지 못할진대 신을 통하여 해결받아 대중 대하여 기본사명 다 하지 않으면 안될 바가 크나큰 나머진 과업으로 된다.
 
이리하여 한국으로부터 전세계 없는 한 소망인 동시에 한 기쁨의 소식인 바다. 그리하여 원리세계로 찾아 원리로 사는 자는 전부가 천국행은 물론인 바다. 원리복귀세계에 사는 민족 전부에게 천국은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바다. 그러기에 본원리복귀세계가 즉 이상세계인 바이다. 타락이 없었으면 종교란 문제없이 그저 뜻대로 생활하면 천국은 자연원리였든 바이다. 그런고로 앞날 이상세계는 종교란 명사가 필요치 않고 그저 생활로 되는 원리복귀세계로 된다. 그 원리로 살면 그저 구원완성이라는 바가 목적으로 된 시대가 이상시대인 바이다. 이 시대를 기독교의 지상천국시대라 하는 바이다. 때 예수의 최고목적을 완성하는 때라는 것는 사실이다. 그러니 한국이야 세계중심지가 되는 바가 원리세계를 시작하는 중심지이다. 세계의 중심지라는 바이다.
=== <ruby>제<rt>第</rt></ruby>3 <ruby>장<rt>章</rt></ruby> <ruby>제<rt>第</rt></ruby>2<ruby>차<rt>次</rt></ruby> 하늘 뜻 <ruby>성사책임사명자<rt>成事責任使命者</rt></ruby>로 오신 예수의 <ruby>책임분담<rt>責任分擔</rt></ruby> <ruby>섭리기간<rt>攝理期間</rt></ruby>에 대한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 ===
 
==== <ruby>제<rt>第</rt></ruby>1 <ruby>절<rt>節</rt></ruby> <ruby>지상섭리<rt>地上攝理</rt></ruby> <ruby>노정<rt>路程</rt></ruby>에 대한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 ====
 
<ruby>구약시대<rt>舊約時代</rt></ruby>의 <ruby>전목적<rt>全目的</rt></ruby> <ruby>종결<rt>終結</rt></ruby>은 예수 한분에 <ruby>기인<rt>基因</rt></ruby>하며 그의 <ruby>완성적<rt>完成的</rt></ruby> <ruby>사명<rt>使命</rt></ruby>도 예수 한 <ruby>존재<rt>存在</rt></ruby>가 <ruby>중심<rt>中心</rt></ruby>이었다. <ruby>성전<rt>聖殿</rt></ruby>을 세우기 <ruby>위<rt>爲</rt></ruby>한 <ruby>행의<rt>行義</rt></ruby>의 <ruby>노정<rt>路程</rt></ruby>은 <ruby>구약시대<rt>舊約時代</rt></ruby>의 한 <ruby>중심노정<rt>中心路程</rt></ruby>이었고 그 <ruby>노정탈선<rt>路程脫線</rt></ruby>은 <ruby>불의<rt>不義</rt></ruby>라는 <ruby>사망<rt>死亡</rt></ruby>의 <ruby>시작<rt>始作</rt></ruby>이라 한 것은 잘아는 바다. 예수 한 <ruby>존재<rt>存在</rt></ruby>의 <ruby>가치<rt>價値</rt></ruby>는 <ruby>즉<rt>卽</rt></ruby> <ruby>전<rt>全</rt></ruby> 이스라엘 <ruby>성전<rt>聖殿</rt></ruby> +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보다도 <ruby>귀<rt>貴</rt></ruby>한 한 <ruby>존재<rt>存在</rt></ruby>였다. <ruby>즉<rt>卽</rt></ruby> 4<ruby>천년<rt>千年</rt></ruby> <ruby>역사<rt>歷史</rt></ruby>를 <ruby>통<rt>通</rt></ruby>하여 하나님이 <ruby>섭리<rt>攝理</rt></ruby>한 <ruby>결실<rt>結實</rt></ruby>의 <ruby>자체<rt>自體</rt></ruby>가 예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 <ruby>전천주목적<rt>全天宙目的</rt></ruby>은 예수로부터 다시금 찾는 <ruby>가치<rt>價値</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니 이 모든 것보다도 예수는 하나님 앞에 <ruby>귀<rt>貴</rt></ruby>한 <ruby>존재<rt>存在</rt></ruby>였다. 예수 <ruby>완전<rt>完全</rt></ruby>히 살아서 <ruby>천주<rt>天宙</rt></ruby>살고 하나님 <ruby>완전<rt>完全</rt></ruby>히 살며 예수뜻 <ruby>성사<rt>成事</rt></ruby>하여야 하나님 뜻 <ruby>성사<rt>成事</rt></ruby>라는 한 <ruby>중심점<rt>中心點</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가 <ruby>지상<rt>地上</rt></ruby> 예수였다.
 
하늘 <ruby>성사<rt>成事</rt></ruby>로 예수 하나로부터 <ruby>시작<rt>始作</rt></ruby>이라는 <ruby>원인<rt>原因</rt></ruby>은 더 말하지 않아도 잘 알줄 안다. 이 <ruby>천주<rt>天宙</rt></ruby>의 <ruby>중심점<rt>中心點</rt></ruby> 예수의 한 <ruby>존재<rt>存在</rt></ruby>가 <ruby>지상<rt>地上</rt></ruby>에 오는 바는 땅地 아니면 뜻 <ruby>성사<rt>成事</rt></ruby> 못하는 하나님의 <ruby>창조원리<rt>創造原理</rt></ruby>의 <ruby>중심지<rt>中心地</rt></ruby>가 <ruby>즉<rt>卽</rt></ruby> <ruby>지상<rt>地上</rt></ruby>이었다. <ruby>지상<rt>地上</rt></ruby>에서 사람 <ruby>조상<rt>祖上</rt></ruby> 아담 해와는 <ruby>타락<rt>墮落</rt></ruby>하였으니 땅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ruby>복귀<rt>復歸</rt></ruby>하여 그냥 하나님의 <ruby>만세<rt>萬世</rt></ruby> <ruby>전<rt>前</rt></ruby> <ruby>이상<rt>理想</rt></ruby> <ruby>즉<rt>卽</rt></ruby> <ruby>창조이상<rt>創造理想</rt></ruby>을 <ruby>원리<rt>原理</rt></ruby>대로 <ruby>성사<rt>成事</rt></ruby>할 수 있는 <ruby>조건성사<rt>條件成事</rt></ruby>를 보는 바이었다. 그런고로 땅 없으면 하늘은 <ruby>미완성<rt>未完成</rt></ruby>하여만 하늘 뜻 <ruby>원만성사<rt>圓滿成事</rt></ruby>하고자 함이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의 뜻이니 모두가 <ruby>동일<rt>同一</rt></ruby>한 <ruby>기점상<rt>基點上</rt></ruby>을 <ruby>분리<rt>分離</rt></ruby>할 수 없는 <ruby>이유<rt>理由</rt></ruby>는 한몸된다는 <ruby>기본인과<rt>基本因果</rt></ruby>로 되어 있기에 이와같은 <ruby>귀<rt>貴</rt></ruby>한 한 <ruby>존재<rt>存在</rt></ruby>가 예수인데 이 예수를 보내기 <ruby>전<rt>前</rt></ruby>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마 하심은 예수한테 사탄으로부터 <ruby>피해<rt>被害</rt></ruby>를 받지 않게하기 <ruby>위<rt>爲</rt></ruby>하여서 엘리야를 보내어 이 <ruby>근본자체<rt>根本自體</rt></ruby> 오신 다음에 <ruby>전<rt>前</rt></ruby>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의 <ruby>대환영<rt>大歡迎</rt></ruby> 받게하여 <ruby>전<rt>全</rt></ruby> <ruby>백성<rt>百姓</rt></ruby>은 예수한분 만으로 <ruby>무한<rt>無限</rt></ruby>한 <ruby>영광<rt>榮光</rt></ruby>이며 그들의 자랑으로 믿信고 모셔侍야할 <ruby>사명적<rt>使命的</rt></ruby> <ruby>책임<rt>責任</rt></ruby>들을 다할 수 있는 <ruby>구비조건<rt>具備條件</rt></ruby>을 지어 놓기<ruby>위<rt>爲</rt></ruby>하여서 엘리야를 보내주마 하신바가 그 <ruby>목적<rt>目的</rt></ruby>이 있는 바이었다.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 <ruby>대<rt>對</rt></ruby>하여서는 <ruby>직접인도<rt>直接引導</rt></ruby>하여 뜻 <ruby>시봉<rt>侍奉</rt></ruby>으로 <ruby>배양<rt>培養</rt></ruby>하였지만 <ruby>세계적<rt>世界的</rt></ruby>으로는 하나님은 <ruby>전인류<rt>全人類</rt></ruby>에게 모실수 있는 <ruby>공작<rt>工作</rt></ruby>도 <ruby>역사적<rt>歷史的</rt></ruby> <ruby>성인<rt>聖人</rt></ruby>들을 <ruby>통<rt>通</rt></ruby>하여서 <ruby>동서양<rt>東西洋</rt></ruby>에 <ruby>섭리<rt>攝理</rt></ruby>를 하여 <ruby>합성화<rt>合成化</rt></ruby> 하려고 하는
 
뜻 <ruby>성사<rt>成事</rt></ruby> <ruby>예비<rt>豫備</rt></ruby> <ruby>공작<rt>工作</rt></ruby>도 <ruby>시작<rt>始作</rt></ruby>케 하심이다. 그其 <ruby>사명적<rt>使命的</rt></ruby> <ruby>대표<rt>代表</rt></ruby> <ruby>인물<rt>人物</rt></ruby>들이 <ruby>즉<rt>卽</rt></ruby> <ruby>공자<rt>孔子</rt></ruby>며 <ruby>석가<rt>釋迦</rt></ruby>였다. 또 <ruby>철인<rt>哲人</rt></ruby> 소크라테스 <ruby>등등<rt>等等</rt></ruby>의 <ruby>양심적<rt>良心的</rt></ruby> <ruby>도<rt>道</rt></ruby>를 중심한 <ruby>선<rt>善</rt></ruby>을 <ruby>표준<rt>標準</rt></ruby>하고 <ruby>교시<rt>敎示</rt></ruby>케함도 그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였음을 알아야 한다. 어느 <ruby>종교<rt>宗敎</rt></ruby>든지 근본을 <ruby>선<rt>善</rt></ruby>한 <ruby>신<rt>神</rt></ruby>을 <ruby>표준<rt>標準</rt></ruby>케 함은 <ruby>즉<rt>卽</rt></ruby> 하나님이 <ruby>섭리<rt>攝理</rt></ruby>하시는 <ruby>목적<rt>目的</rt></ruby>을 <ruby>근본<rt>根本</rt></ruby>하고 있다는 바를 <ruby>명시<rt>明示</rt></ruby>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 <ruby>근본<rt>根本</rt></ruby> 뜻 <ruby>성사<rt>成事</rt></ruby>하면 그 <ruby>자체<rt>自體</rt></ruby>인 가르침들도 한 <ruby>근본상<rt>根本上</rt></ruby>에서 <ruby>총합<rt>總合</rt></ruby>을 보여야 되는바도 <ruby>원리<rt>原理</rt></ruby>로 되었다. 그런고로 예수 한 <ruby>존재<rt>存在</rt></ruby>의 <ruby>이상중<rt>理想中</rt></ruby>에 뜻 <ruby>중심<rt>中心</rt></ruby>이니 <ruby>전<rt>全</rt></ruby> 하나님의 <ruby>이상<rt>理想</rt></ruby>을 <ruby>완성<rt>完成</rt></ruby>할 <ruby>근본체<rt>根本體</rt></ruby>이니 예수의 뜻 <ruby>성사시<rt>成事時</rt></ruby>는 <ruby>전<rt>全</rt></ruby> <ruby>천주<rt>天宙</rt></ruby>는 한 <ruby>중심<rt>中心</rt></ruby>에서 <ruby>기동<rt>起動</rt></ruby>되어야 한다. <ruby>종교<rt>宗敎</rt></ruby>도 <ruby>경제<rt>經濟</rt></ruby>도 <ruby>과학<rt>科學</rt></ruby>도 <ruby>합<rt>合</rt></ruby>하여 한 <ruby>기본상<rt>基本上</rt></ruby>에 <ruby>기동<rt>起動</rt></ruby>될 바이다. 그런 <ruby>목적<rt>目的</rt></ruby>으로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시어 찾아 맞추고자 함의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가 있다. 이와같은 크나큰 <ruby>사명적<rt>使命的</rt></ruby> <ruby>중심<rt>中心</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의 <ruby>강생<rt>降生</rt></ruby>과 함께 온 <ruby>천주<rt>天宙</rt></ruby>는 큰 <ruby>복음<rt>福音</rt></ruby>의 <ruby>소식<rt>消息</rt></ruby>을 보았다.
 
하늘은 <ruby>물론<rt>勿論</rt></ruby> 예수의 뜻 <ruby>성사<rt>成事</rt></ruby>를 바라는 바 그 땅은 예수의 앞에 <ruby>지도<rt>指導</rt></ruby>받고자 함이 요구였다. 예수 한분이 모든 <ruby>생명<rt>生命</rt></ruby>의 근본이며 <ruby>해방<rt>解放</rt></ruby>의 <ruby>주인공<rt>主人公</rt></ruby>이었다. 그것은 <ruby>즉<rt>卽</rt></ruby> 사탄 <ruby>세계<rt>世界</rt></ruby>인 <ruby>비공식세계<rt>非公式世界</rt></ruby>에서 <ruby>원리세계<rt>原理世界</rt></ruby> 예수의 <ruby>세계<rt>世界</rt></ruby>에로 <ruby>건설목적<rt>建設目的</rt></ruby>의 <ruby>완성<rt>完成</rt></ruby>의 <ruby>요구<rt>要求</rt></ruby>가 예수의 할 <ruby>책임<rt>責任</rt></ruby>인 <ruby>동시<rt>同時</rt></ruby>에 우리는 그에게 <ruby>순종<rt>順從</rt></ruby> <ruby>신종<rt>信從</rt></ruby> <ruby>시종<rt>侍從</rt></ruby>하여서 영광을 돌리는 것이 땅의 백성이 짊어진 <ruby>책임사명<rt>責任使命</rt></ruby>이었다. 이 <ruby>책임<rt>責任</rt></ruby>의 <ruby>요구<rt>要求</rt></ruby>를 <ruby>성립<rt>成立</rt></ruby>하려니 엘리야 와서 할 <ruby>사명전부<rt>使命全部</rt></ruby>는 <ruby>전백성<rt>全百姓</rt></ruby> <ruby>합<rt>合</rt></ruby>하여서 엘리야와 <ruby>합심일체<rt>合心一體</rt></ruby>가 되어서 뜻 <ruby>원만성사<rt>圓滿成事</rt></ruby>고자함이 <ruby>목적<rt>目的</rt></ruby>이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은 잘알고 있는 <ruby>승천<rt>昇天</rt></ruby>한 <ruby>존재<rt>存在</rt></ruby>였다. 그런고로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하였으니 틀림없이 올 줄알았다. <ruby>승천<rt>昇天</rt></ruby>한 엘리야 언제나 오실까하고 바라는 데는 하늘 <ruby>향<rt>向</rt></ruby>하여서 바라보는 것이 <ruby>중심<rt>中心</rt></ruby>으로 되었다. <ruby>즉<rt>卽</rt></ruby> 하늘로 올라갔으니 하늘로써 나려올 줄 만 바라본 바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었다. <ruby>승천<rt>昇天</rt></ruby>한 엘리야로 그 <ruby>당시<rt>當時</rt></ruby> <ruby>제일<rt>第一</rt></ruby> <ruby>귀<rt>貴</rt></ruby>하게 바라는 한 <ruby>상대<rt>相對</rt></ruby>로 된 바는 메시아 때문이었다.
 
메시아를 모실수 있게 하여주는 바도 엘리야니 엘리야를 바라지 않을 수 없는 <ruby>필연적<rt>必然的</rt></ruby> <ruby>요구<rt>要求</rt></ruby>이었다. 그런데 엘리야는 하늘로 내려오니라고 바라는 <ruby>자<rt>者</rt></ruby>는 <ruby>지금<rt>至今</rt></ruby>까지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함은 유대교적 <ruby>신자<rt>信者</rt></ruby> <ruby>등<rt>等</rt></ruby>이다. 메시아로 왔든 것은 <ruby>사실<rt>事實</rt></ruby>이매 <ruby>지금<rt>至今</rt></ruby>은 <ruby>전세계적<rt>全世界的</rt></ruby>으로 <ruby>역사<rt>歷史</rt></ruby>를 <ruby>통<rt>通</rt></ruby>하여 <ruby>확고<rt>確固</rt></ruby>한 것으로 되었으나 그 <ruby>당시<rt>當時</rt></ruby>에 있어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ruby>생각<rt>生覺</rt></ruby>할 수 없는 <ruby>존재<rt>存在</rt></ruby>로 <ruby>취급<rt>取扱</rt></ruby>되었든 바는 <ruby>성경<rt>聖經</rt></ruby>보아 잘 알 수 있는 바이다. <ruby>즉<rt>卽</rt></ruby> 바리새 <ruby>교인<rt>敎人</rt></ruby>과 <ruby>서기관<rt>書記官</rt></ruby>들은 예수 <ruby>대<rt>對</rt></ruby>하여 몇 번씩이나 묻기를
 
그대가 메시아면 엘리야는 왜 오지 않았는가? 엘리야는 어디에 왔는가? 하면서 예수 <ruby>대<rt>對</rt></ruby>하여 <ruby>반문<rt>反問</rt></ruby>한바는 <ruby>자기<rt>自己</rt></ruby>들이 <ruby>역사적<rt>歷史的</rt></ruby>으로 바라는 <ruby>사실<rt>事實</rt></ruby>과 <ruby>부합<rt>符合</rt></ruby>하지 않은 <ruby>사실<rt>事實</rt></ruby>을 <ruby>고백<rt>告白</rt></ruby>하는 것을 <ruby>성경<rt>聖經</rt></ruby>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바이다. <ruby>과연<rt>果然</rt></ruby> <ruby>당시<rt>當時</rt></ruby>에는 참말 믿고 <ruby>순종<rt>順從</rt></ruby>할 수 없는 바이었다. 메시아라는 그 <ruby>존재<rt>存在</rt></ruby>는 그대들이 잘 아는 요셉의 아들子로서 집에 묻혀 <ruby>목수업<rt>木手業</rt></ruby>으로서 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ruby>존재<rt>存在</rt></ruby>이며 그 <ruby>내용내막<rt>內容內幕</rt></ruby>까지 잘 아는 그 <ruby>자체<rt>自體</rt></ruby>이며 <ruby>생활체형<rt>生活體型</rt></ruby>으로 보아도 우리들과 다름없는 그 <ruby>자체<rt>自體</rt></ruby>인데 어디 그 <ruby>존재<rt>存在</rt></ruby>가 <ruby>자기<rt>自己</rt></ruby>들이 바라는 <ruby>이상<rt>理想</rt></ruby>한 <ruby>중심존재<rt>中心存在</rt></ruby>라고는 <ruby>생각<rt>生覺</rt></ruby>하는 <ruby>점<rt>點</rt></ruby>에 하도 먼 <ruby>거리<rt>距離</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게 보였다. 우리가 바라든 그 <ruby>존재<rt>存在</rt></ruby>는 <ruby>천수백년간<rt>千數百年間</rt></ruby> <ruby>약속<rt>約束</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요 <ruby>희망<rt>希望</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든 <ruby>자체<rt>自體</rt></ruby>가 예수라하니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은 무슨 영문인지 큰 <ruby>환난<rt>患難</rt></ruby>의 한 <ruby>존재<rt>存在</rt></ruby>로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메시아를 바람은 <ruby>전부<rt>全部</rt></ruby> 뜻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바라는 것 보다도 먼저는 <ruby>자기<rt>自己</rt></ruby>를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바란 것은 <ruby>사실<rt>事實</rt></ruby>이라 아니할 수 없다. 베들레헴에서 날줄로 알았다. 그러면 <ruby>자기<rt>自己</rt></ruby>들의 메시아 오면 한 조각의 <ruby>식물<rt>食物</rt></ruby>이나 <ruby>거처<rt>居處</rt></ruby>할 <ruby>방<rt>房</rt></ruby>이나 <ruby>의복<rt>衣服</rt></ruby>이나 그 <ruby>중<rt>中</rt></ruby> 한가지라도 <ruby>준비<rt>準備</rt></ruby>해놓고 베들레헴을 <ruby>향<rt>向</rt></ruby>하여 먼저 무슨 <ruby>색<rt>色</rt></ruby>다른 <ruby>소식<rt>消息</rt></ruby>이나 있는가 하여서 <ruby>고대<rt>苦待</rt></ruby>한 <ruby>자<rt>者</rt></ruby> <ruby>만일<rt>萬一</rt></ruby> 있다면 메시아 <ruby>탄생<rt>誕生</rt></ruby>도 알았으리라. 그런 <ruby>존재<rt>存在</rt></ruby>조차 없었다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을 볼때에 그들의 메시아 <ruby>고대<rt>苦待</rt></ruby>는 벌써 <ruby>전부<rt>全部</rt></ruby>가 <ruby>자기<rt>自己</rt></ruby> <ruby>중심<rt>中心</rt></ruby>이었고 <ruby>자기<rt>自己</rt></ruby>들이 메시아의 힘을 빌려서 좀더 좋은 것을 바랐든 것이 <ruby>사실<rt>事實</rt></ruby>이라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ruby>각자<rt>各自</rt></ruby> <ruby>각자<rt>各自</rt></ruby>는 <ruby>자기<rt>自己</rt></ruby>들이 <ruby>이상<rt>理想</rt></ruby>에 <ruby>부합<rt>符合</rt></ruby>하는 <ruby>이상<rt>以上</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로 바랐다는 그其 <ruby>입장<rt>立場</rt></ruby>에 있을 때 예수란 <ruby>자<rt>者</rt></ruby>가 <ruby>출현<rt>出顯</rt></ruby>하여 너희들의 <ruby>이상<rt>理想</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라는 <ruby>선언<rt>宣言</rt></ruby>은 하도 너무한 <ruby>동시<rt>同時</rt></ruby>에 <ruby>분개<rt>憤慨</rt></ruby>할 <ruby>사실<rt>事實</rt></ruby>이라 아니할 수 없다. <ruby>과연<rt>果然</rt></ruby> 예수는 <ruby>육신<rt>肉身</rt></ruby>쓰고 나니 <ruby>자기<rt>自己</rt></ruby>들과 <ruby>동일양식<rt>同一樣式</rt></ruby>으로 살아왔고 또 <ruby>지금<rt>至今</rt></ruby>도 <ruby>변<rt>變</rt></ruby>함없이 <ruby>동일<rt>同一</rt></ruby>한 <ruby>양<rt>樣</rt></ruby>이니 <ruby>과연<rt>果然</rt></ruby> 그 <ruby>자체<rt>自體</rt></ruby>에 <ruby>대<rt>對</rt></ruby>하여 <ruby>의심<rt>疑心</rt></ruby>하는 바 <ruby>당연지사<rt>當然之事</rt></ruby>였다.
 
이와같은 예수를 <ruby>대<rt>對</rt></ruby>하여서 더 <ruby>의심<rt>疑心</rt></ruby>케 된바는 엘리야가 <ruby>전제문제<rt>前提問題</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였다. <ruby>자기<rt>自己</rt></ruby>들이 엘리야라고 하는 그 <ruby>자<rt>者</rt></ruby>가 왔다면 예수니 메시아니 <ruby>여하<rt>如何</rt></ruby>튼 <ruby>문제<rt>問題</rt></ruby>는 <ruby>해결<rt>解決</rt></ruby>인데 엘리야도 오지 않고 메시아 왔다니 그 어찌 <ruby>신임<rt>信任</rt></ruby>할 수 있으랴! 지금 우리는 바꾸어 <ruby>생각<rt>生覺</rt></ruby>할 <ruby>필요<rt>必要</rt></ruby>를 느끼면서 <ruby>석일<rt>昔日</rt></ruby>에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을 <ruby>욕<rt>辱</rt></ruby>하여 되는 <ruby>문제<rt>問題</rt></ruby>다. 그러면 <ruby>지금<rt>至今</rt></ruby>은 예수 <ruby>즉<rt>卽</rt></ruby> 메시아가 <ruby>만민<rt>萬民</rt></ruby>의 <ruby>구주<rt>救主</rt></ruby>요 이스라엘이 <ruby>희망<rt>希望</rt></ruby>한 <ruby>중심존재<rt>中心存在</rt></ruby>라는 것은 <ruby>역사적<rt>歷史的</rt></ruby>으로도 <ruby>인식과정<rt>認識過程</rt></ruby>으로 나왔으니 예수는 메시아며 뜻하신 <ruby>예언<rt>豫言</rt></ruby>의 <ruby>실체<rt>實體</rt></ruby>라는 것을 알며 그 <ruby>전<rt>前</rt></ruby>에 올 엘리야도 왔었다는 바를 <ruby>세상<rt>世上</rt></ruby> <ruby>교인<rt>敎人</rt></ruby>들은 다 아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ruby>즉<rt>卽</rt></ruby> 엘리야는 왔는데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라는 것을 <ruby>역사<rt>歷史</rt></ruby>로서
 
<ruby>인정<rt>認定</rt></ruby>하여주는 <ruby>성경<rt>聖經</rt></ruby>을 보아 아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또 예수는 엘리야가 왔으나 <ruby>임의<rt>任意</rt></ruby>로 <ruby>대접<rt>待接</rt></ruby>하였다고 하면서 <ruby>복음서<rt>福音書</rt></ruby>에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을 <ruby>지적<rt>指摘</rt></ruby>하여 말한 바를 보아서 아는 <ruby>간접적<rt>間接的</rt></ruby> 앎知이었다. <ruby>과연<rt>果然</rt></ruby> 그 <ruby>당시<rt>當時</rt></ruby>의 <ruby>입장<rt>立場</rt></ruby>을 바꾸어 가지고 <ruby>생각<rt>生覺</rt></ruby>하면 <ruby>지금<rt>至今</rt></ruby>은 <ruby>과연<rt>果然</rt></ruby> 메시아로 믿고信 모시고侍 <ruby>순종<rt>順從</rt></ruby>을 할 <ruby>자<rt>者</rt></ruby> 몇 <ruby>명<rt>名</rt></ruby>이나 될까? 지금 <ruby>현교인<rt>現敎人</rt></ruby>들이 바리새 <ruby>교인신앙<rt>敎人信仰</rt></ruby> 만치도 못한 <ruby>자<rt>者</rt></ruby> 많은 이때에 <ruby>생각<rt>生覺</rt></ruby>할 <ruby>문제<rt>問題</rt></ruby>이면서 <ruby>염려<rt>念慮</rt></ruby>할 <ruby>중대문제<rt>重大問題</rt></ruby>이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고 어찌하여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 엘리야가 되는가 그 <ruby>근거<rt>根據</rt></ruby>는 무슨 뜻이며 하나님이 <ruby>섭리<rt>攝理</rt></ruby>하는바는 무슨 <ruby>의의<rt>意義</rt></ruby>를 두고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하고는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를 보내였는가 하는 <ruby>문제<rt>問題</rt></ruby>의 <ruby>근본<rt>根本</rt></ruby>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를 밝히지 못하는 <ruby>현실세계<rt>現實世界</rt></ruby>가 하늘이 <ruby>섭리<rt>攝理</rt></ruby>하는 뜻의 <ruby>시봉<rt>侍奉</rt></ruby>을 <ruby>완성<rt>完成</rt></ruby>할 것인가. 지금은 <ruby>말세<rt>末世</rt></ruby>라고 하는 때이니 <ruby>성경<rt>聖經</rt></ruby> <ruby>중<rt>中</rt></ruby>에 <ruby>미지<rt>未知</rt></ruby>였든 <ruby>사실<rt>事實</rt></ruby>이 <ruby>명백<rt>明白</rt></ruby>히 되어야만 <ruby>성경목적<rt>聖經目的</rt></ruby>을 끝내고 <ruby>재림주<rt>再臨主</rt></ruby>를 <ruby>영접<rt>迎接</rt></ruby>할 수 있는 <ruby>결정적<rt>決定的</rt></ruby> <ruby>관문<rt>關門</rt></ruby>을 삼을 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런 <ruby>중대시<rt>重大視</rt></ruby> 되는 <ruby>미지<rt>未知</rt></ruby>의 <ruby>근본<rt>根本</rt></ruby>을 밝히기로 하자.
 
==== <ruby>제<rt>第</rt></ruby>2 <ruby>절<rt>節</rt></ruby>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 엘리야되는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 ====
 
하나님이 <ruby>근본<rt>根本</rt></ruby> 뜻을 <ruby>성사<rt>成事</rt></ruby>하시려 할 때에 그 뜻 <ruby>성사<rt>成事</rt></ruby>에 제일 <ruby>요점<rt>要點</rt></ruby>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ruby>외<rt>外</rt></ruby> 사탄 <ruby>존재<rt>存在</rt></ruby>가 있有는 것인데 이 <ruby>존재<rt>存在</rt></ruby>가 하나님의 <ruby>근본<rt>根本</rt></ruby> 뜻을 <ruby>파괴<rt>破壞</rt></ruby>하였고 <ruby>지금<rt>至今</rt></ruby>까지 <ruby>적<rt>敵</rt></ruby>으로 나와 뜻을 <ruby>성사<rt>成事</rt></ruby>하지 못하게 하는 <ruby>존재<rt>存在</rt></ruby>가 있기에 큰 <ruby>중대<rt>重大</rt></ruby>한 <ruby>문제<rt>問題</rt></ruby>가 된다. <ruby>만일<rt>萬一</rt></ruby> 사탄이 없다면 뜻 <ruby>성사<rt>成事</rt></ruby>는 <ruby>문제<rt>問題</rt></ruby>되는 것이 아닌데 사탄이 있어서 <ruby>인간<rt>人間</rt></ruby>을 대하여 <ruby>자기<rt>自己</rt></ruby>의 <ruby>소유권외<rt>所有圈外</rt></ruby>로 보내지 않으려고 <ruby>극성<rt>極性</rt></ruby>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ruby>대<rt>對</rt></ruby>하여서 <ruby>역사<rt>役事</rt></ruby>를 하여 나옴으로 하나님의 뜻의 <ruby>성사<rt>成事</rt></ruby>는 <ruby>역사<rt>歷史</rt></ruby>로 <ruby>연장<rt>延長</rt></ruby>을 거듭하게 하여 온 바이다. 이 사탄을 <ruby>전폭적<rt>全幅的</rt></ruby>으로 <ruby>굴복<rt>屈服</rt></ruby>시켜서 뜻을 <ruby>미성사<rt>未成事</rt></ruby>케 하는 <ruby>공작<rt>工作</rt></ruby>이 없도록 사탄 <ruby>전멸<rt>全滅</rt></ruby>을 <ruby>기<rt>期</rt></ruby>약하는 바가 <ruby>요구<rt>要求</rt></ruby>되는 바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ruby>근본<rt>根本</rt></ruby> 뜻은 뜻을 <ruby>방해<rt>妨害</rt></ruby>하려는 사탄을 뜻의 <ruby>노정<rt>路程</rt></ruby>에 없게 하고자 함에 <ruby>근본<rt>根本</rt></ruby> 뜻 <ruby>중심<rt>中心</rt></ruby>이었다. 그런고로 이 <ruby>근본<rt>根本</rt></ruby> 뜻을 <ruby>성사<rt>成事</rt></ruby>하려고 메시아를 보내기 전에 하나님이 바라는 뜻을 <ruby>반대<rt>反對</rt></ruby>하는 사탄을 <ruby>굴복<rt>屈服</rt></ruby>시켜 다시는 예수의 뜻(메시아의 뜻) <ruby>성사<rt>成事</rt></ruby> <ruby>노정<rt>路程</rt></ruby>에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ruby>공작<rt>工作</rt></ruby>이 먼저 <ruby>문제<rt>問題</rt></ruby>였다.
 
이 <ruby>문제<rt>問題</rt></ruby>를 <ruby>해결<rt>解決</rt></ruby>할 <ruby>책임자<rt>責任者</rt></ruby>로 보내마 하신 <ruby>존재<rt>存在</rt></ruby>가 <ruby>즉<rt>卽</rt></ruby>, 엘리야였다. 엘리야는 잘 알다시피 하나님 앞에 혼자서 사탄 <ruby>전부<rt>全部</rt></ruby>하고 싸운 <ruby>최승세자<rt>最勝勢者</rt></ruby>이었다. 엘리야가 <ruby>요구<rt>要求</rt></ruby>하는 <ruby>당시<rt>當時</rt></ruby>의 <ruby>최고<rt>最高</rt></ruby> <ruby>목적<rt>目的</rt></ruby>은 사탄 <ruby>전멸<rt>全滅</rt></ruby>의 목적이었다. 다시는 사탄이 하나님의 뜻을 막는 곳 없
 
게끔 바라든 바가 엘리야가 바라든 <ruby>목적<rt>目的</rt></ruby>이었다. 그 <ruby>목적<rt>目的</rt></ruby>이 <ruby>즉<rt>卽</rt></ruby>, 하나님이 바라는 뜻 <ruby>성사<rt>成事</rt></ruby> <ruby>노정<rt>路程</rt></ruby>을 두고 바라보는 <ruby>목적<rt>目的</rt></ruby>과 같은 <ruby>목적<rt>目的</rt></ruby>이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바알<ruby>신<rt>神</rt></ruby>(사탄) 800<ruby>여<rt>餘</rt></ruby>를 <ruby>멸<rt>滅</rt></ruby>한 <ruby>자<rt>者</rt></ruby>이며 뜻 <ruby>성사<rt>成事</rt></ruby> <ruby>노정<rt>路程</rt></ruby>을 <ruby>완성<rt>完成</rt></ruby> 할 수 있게 하는 사탄 대한 <ruby>중요존재<rt>重要存在</rt></ruby>였다. 엘리야의 <ruby>목적<rt>目的</rt></ruby>은 <ruby>완성<rt>完成</rt></ruby>하였는가 하면 그 <ruby>당시<rt>當時</rt></ruby> 사탄 대한 <ruby>목적<rt>目的</rt></ruby>은 <ruby>미완성<rt>未完成</rt></ruby>하였다. 왜냐하면 다시금 사탄이 <ruby>침입<rt>侵入</rt></ruby>을 보아서 예수앞에까지 <ruby>침범<rt>侵犯</rt></ruby>할 <ruby>우려성<rt>憂慮性</rt></ruby>이 있음으로 다시금 이 사탄에 <ruby>대립<rt>對立</rt></ruby>하여 엘리야가 바라는 <ruby>근본목적<rt>根本目的</rt></ruby>을 <ruby>완성<rt>完成</rt></ruby>시켜서 예수 앞에 사탄 <ruby>자체<rt>自體</rt></ruby>의 <ruby>종적<rt>踪蹟</rt></ruby>이 없게하기 위한 <ruby>대표자<rt>代表者</rt></ruby>를 보내어 엘리야의 바라든 사탄 <ruby>전멸공작성사<rt>全滅工作成事</rt></ruby>할 것을 바람에서 엘리야를 새로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으로 <ruby>표시<rt>表示</rt></ruby>한바며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 엘리야되는 바의 <ruby>목적<rt>目的</rt></ruby>이 있는 바이다. <ruby>즉<rt>卽</rt></ruby> 엘리야의 <ruby>목적<rt>目的</rt></ruby>이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으로 <ruby>완성<rt>完成</rt></ruby>할 <ruby>사명적<rt>使命的</rt></ruby> <ruby>역할<rt>役割</rt></ruby>을 가지고 있었든 바이었다.
 
하나님의 뜻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말 할적에 엘리야의 <ruby>목적<rt>目的</rt></ruby>의 <ruby>성사<rt>成事</rt></ruby>는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으로 <ruby>종결<rt>終結</rt></ruby>짓게 되는 것이다.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 와서 한 <ruby>사명달성<rt>使命達成</rt></ruby>하면 하나님 뜻은 <ruby>완전성사<rt>完全成事</rt></ruby>하므로 사탄을 하나님 뜻 <ruby>노정상<rt>路程上</rt></ruby>에서 없애고자 함에서 <ruby>예언<rt>豫言</rt></ruby>하신 엘리야가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었다. <ruby>예<rt>例</rt></ruby>를 들면 하나님의 뜻은 하나인데 뜻 <ruby>성사<rt>成事</rt></ruby>하는데는 <ruby>갑<rt>甲</rt></ruby>(엘리야)과 <ruby>을<rt>乙</rt></ruby>(요한)이 <ruby>완성<rt>完成</rt></ruby>하였다.
 
그런고로 뜻은 하나이고 사람은 둘이다. 뜻 하나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말할때 <ruby>갑<rt>甲</rt></ruby>=<ruby>을<rt>乙</rt></ruby> 이라는 한 몸으로 <ruby>완성<rt>完成</rt></ruby>한 것과 같은 근본의의를 두고 <ruby>예언<rt>豫言</rt></ruby>하심이 있기에 엘리야=<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 이라고 하심이 <ruby>근본목적<rt>根本目的</rt></ruby>이 <ruby>완성<rt>完成</rt></ruby>되는 바이다.
 
하나님의 뜻 = <ruby>갑<rt>甲</rt></ruby>\<ruby>을<rt>乙</rt></ruby>
 
이런 뜻으로 말씀 하심을 알지 못하는 <ruby>백성<rt>百姓</rt></ruby>은 큰 <ruby>범행<rt>犯行</rt></ruby>의 <ruby>행로<rt>行路</rt></ruby>를 <ruby>취하면<rt>取下面</rt></ruby>서 <ruby>자연<rt>自然</rt></ruby>스러운 뜻의 <ruby>행<rt>行</rt></ruby>함이라고 <ruby>생각<rt>生覺</rt></ruby>하였다. 이제 엘리야 <ruby>대신<rt>代身</rt></ruby>으로 보냄을 받은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의 <ruby>사명<rt>使命</rt></ruby>은 무슨 <ruby>목적<rt>目的</rt></ruby>이 남아 있나 하면 하나님의 <ruby>목적<rt>目的</rt></ruby> 뜻 <ruby>성사<rt>成事</rt></ruby>가 <ruby>완성<rt>完成</rt></ruby> 하여야할 <ruby>토대<rt>土臺</rt></ruby>를 <ruby>조성<rt>造成</rt></ruby>하여 메시아 <ruby>즉<rt>卽</rt></ruby> 예수 <ruby>자체<rt>自體</rt></ruby>한테 <ruby>피해<rt>被害</rt></ruby> 없게끔 하여야 할 <ruby>역사적<rt>歷史的</rt></ruby> <ruby>책임<rt>責任</rt></ruby>이 <ruby>부담<rt>負擔</rt></ruby>되어 있다.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의 하여야 할 <ruby>사명<rt>使命</rt></ruby>은 엘리야의 <ruby>심정<rt>心情</rt></ruby>과 <ruby>재능<rt>才能</rt></ruby>으로 예수앞에서 아버지로 아들을 사랑 할 수 있게 하는 <ruby>동시<rt>同時</rt></ruby>에 <ruby>자식<rt>子息</rt></ruby>으로 그其의 아버지께 <ruby>효도<rt>孝道</rt></ruby>하게 하여 줄 <ruby>역사적<rt>歷史的</rt></ruby> <ruby>사명성<rt>使命性</rt></ruby>을 말라기 4<ruby>장<rt>章</rt></ruby> 5<ruby>절<rt>節</rt></ruby>, 6<ruby>절<rt>節</rt></ruby>에 <ruby>기록<rt>記錄</rt></ruby>함을 보아서 알 수 있는 바이다. (누가복음1/16-17)
 
그런고로 예수는 <ruby>즉<rt>卽</rt></ruby> 누구나 다 <ruby>전인류<rt>全人類</rt></ruby>의 <ruby>조상<rt>祖上</rt></ruby>인 <ruby>동시<rt>同時</rt></ruby>에 <ruby>전인류<rt>全人類</rt></ruby>는 예수의 <ruby>자식<rt>子息</rt></ruby>이라는 <ruby>창조원리<rt>創造原理</rt></ruby>로 되어있는 <ruby>목적<rt>目的</rt></ruby> 찾아서 맞출수 있는 길을 닦아야할 <ruby>책임<rt>責任</rt></ruby>이 요한의 <ruby>사명<rt>使命</rt></ruby>이었다. 밖으로는 사탄을 <ruby>방비<rt>防備</rt></ruby>하고 <ruby>내적<rt>內的</rt></ruby>으로는 <ruby>백성<rt>百姓</rt></ruby>으로하여금 <ruby>자식<rt>子息</rt></ruby>된 <ruby>도리<rt>道理</rt></ruby>를 알려주어
 
아버지를 모시어 사랑 받을수 있도록 그其 <ruby>시대<rt>時代</rt></ruby>에 대한 <ruby>책임<rt>責任</rt></ruby>을 <ruby>겸유<rt>兼有</rt></ruby>한 <ruby>중대입장<rt>重大立場</rt></ruby>에 요한은 서 있었다. 그런고로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의 <ruby>전<rt>全</rt></ruby> <ruby>목적<rt>目的</rt></ruby>은 메시아의 <ruby>도<rt>道</rt></ruby>를 <ruby>준비<rt>準備</rt></ruby>하는 <ruby>자<rt>者</rt></ruby>로써 <ruby>즉<rt>卽</rt></ruby> 메시아 한 분만이 그의 <ruby>생명<rt>生命</rt></ruby>의 <ruby>대신<rt>代身</rt></ruby>이며 <ruby>희망<rt>希望</rt></ruby>과 <ruby>소망<rt>所望</rt></ruby>의 <ruby>전부<rt>全部</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였을 것이었다.
 
또 <ruby>자기<rt>自己</rt></ruby> <ruby>자신<rt>自身</rt></ruby>이 알고 있어야 할 <ruby>사실<rt>事實</rt></ruby>이었다. 그리하여야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의 <ruby>광야생활<rt>曠野生活</rt></ruby>이라는 <ruby>전<rt>全</rt></ruby> <ruby>목적<rt>目的</rt></ruby>은 여기에 <ruby>완성<rt>完成</rt></ruby>을 가져오는 바이었다. 예수보담 6<ruby>개월<rt>個月</rt></ruby> <ruby>전<rt>前</rt></ruby>에 사가랴의 <ruby>가정<rt>家庭</rt></ruby>에서 태어난 그 <ruby>자체<rt>自體</rt></ruby>는 하늘이 <ruby>무한<rt>無限</rt></ruby>한 <ruby>기대<rt>期待</rt></ruby>로서 보낸 <ruby>자<rt>者</rt></ruby>이면서 사탄이 제일 미워하는 <ruby>존재<rt>存在</rt></ruby>였다. 그其 <ruby>시대<rt>時代</rt></ruby>를 <ruby>대표<rt>代表</rt></ruby>하여 뜻을 세우기 위한 30<ruby>여년생애<rt>余年生涯</rt></ruby> 모두가 예수(메시아) 한 <ruby>존재<rt>存在</rt></ruby>가 <ruby>목적<rt>目的</rt></ruby>인데 그 메시아를 모시는 그 한날의 기쁨의 <ruby>영광<rt>榮光</rt></ruby>이 그대의 <ruby>목적<rt>目的</rt></ruby>이었다.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의 뜻을 <ruby>전<rt>全</rt></ruby>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앞에 <ruby>세례<rt>洗禮</rt></ruby>를 <ruby>시행<rt>施行</rt></ruby>하게되었다. <ruby>세례<rt>洗禮</rt></ruby>는 예수의 그 <ruby>근본<rt>根本</rt></ruby> 뜻을 <ruby>성사<rt>成事</rt></ruby>할수 있는 한 터의 <ruby>자격<rt>資格</rt></ruby>을 <ruby>부여<rt>賦與</rt></ruby>하여 주는 <ruby>약속<rt>約束</rt></ruby>의 <ruby>표시<rt>表示</rt></ruby>의 <ruby>예<rt>禮</rt></ruby>였다.(요한 <ruby>복음<rt>福音</rt></ruby> 1<ruby>장<rt>章</rt></ruby> 31<ruby>절<rt>節</rt></ruby>~34<ruby>절<rt>節</rt></ruby>)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 이 <ruby>예식<rt>禮式</rt></ruby>을 <ruby>시행<rt>施行</rt></ruby> 함은 <ruby>자기<rt>自己</rt></ruby> 뜻을 <ruby>성사<rt>成事</rt></ruby>하기 <ruby>위<rt>爲</rt></ruby>함이 아니고 예수의 뜻을 <ruby>계승<rt>繼承</rt></ruby>키 위하여서 하심이라는 바는 다 잘아는 사실이다. <ruby>당시<rt>當時</rt></ruby>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을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은 하늘이 보내신 한 <ruby>선지자<rt>先知者</rt></ruby>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한테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은 <ruby>세례식<rt>洗禮式</rt></ruby>이나마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에게 <ruby>세례<rt>洗禮</rt></ruby>를 받음은 하늘로써 보내심을 받은 <ruby>자<rt>者</rt></ruby>로 알고 있던 까닭이므로 <ruby>신법<rt>新法</rt></ruby>(요한복음 1<ruby>장<rt>章</rt></ruby> 15<ruby>절<rt>節</rt></ruby>) 그其 <ruby>세례<rt>洗禮</rt></ruby>를 받음이었다.
 
이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ruby>증거<rt>證據</rt></ruby>하기를 <ruby>자기<rt>自己</rt></ruby>는 물로 <ruby>세례<rt>洗禮</rt></ruby>를 주지만 다음 오시는 메시아는 불火과 <ruby>성신<rt>聖神</rt></ruby>으로 <ruby>세례<rt>洗禮</rt></ruby>를 준다고 하시며 <ruby>대중<rt>大衆</rt></ruby>앞에 <ruby>선포<rt>宣布</rt></ruby>하심은 <ruby>자기자신<rt>自己自身</rt></ruby>의 <ruby>사명<rt>使命</rt></ruby>과 메시아의 <ruby>사명<rt>使命</rt></ruby>은 <ruby>격별<rt>格別</rt></ruby>하게 <ruby>상이<rt>相異</rt></ruby>있음을 <ruby>고백<rt>告白</rt></ruby>하는 바이었다. 그래서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ruby>전목적<rt>全目的</rt></ruby> <ruby>실체<rt>實體</rt></ruby> 메시아의 한 <ruby>존재<rt>存在</rt></ruby>가 <ruby>소망성<rt>所望城</rt></ruby>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요한이 요단<ruby>강<rt>江</rt></ruby>에서 <ruby>세례<rt>洗禮</rt></ruby>를 베풀고 있을 때에 예수는 갈리리로부터 요단<ruby>강<rt>江</rt></ruby>에 이르러至 요한한테 <ruby>세례<rt>洗禮</rt></ruby>를 받고자 할때에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ruby>사<rt>辭</rt></ruby>양하야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나한테 나오시나이까하니 예수 말씀하시기를 <ruby>허락<rt>許諾</rt></ruby>하라. 우리들이 <ruby>의<rt>義</rt></ruby>를 <ruby>행<rt>行</rt></ruby>하는 것이 <ruby>합당<rt>合當</rt></ruby>하리라 하신데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 <ruby>허락<rt>許諾</rt></ruby>하여 <ruby>세례<rt>洗禮</rt></ruby>를 <ruby>시행<rt>施行</rt></ruby>함을 받고 물水에서 올라오시니 하늘天이 열리開고 하나님의 <ruby>신<rt>神</rt></ruby>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그其 위에 <ruby>임<rt>臨</rt></ruby>하심을 보시더니 하늘天로써 소리聲있어 말씀言하시대 이此는 나我의 사랑하는 아들愛子요 나我의 (기뻐하는 <ruby>자<rt>者</rt></ruby>라) 하시더라.
 
비둘기 모양으로 <ruby>성신<rt>聖神</rt></ruby>이 내린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는 이와같은 하늘의 뜻의 <ruby>존재<rt>存在</rt></ruby>라는 것은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 스스로가 알게 되었다. 그其때 누구나 <ruby>전부<rt>全部</rt></ruby>가 이 <ruby>사실<rt>事實</rt></ruby>을 듣고 보았든가 <ruby>전부<rt>全部</rt></ruby>는 알지 못하였지만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만은 잘 알고 있었다. 이렇듯이 한 <ruby>목적<rt>目的</rt></ruby>을 <ruby>책임<rt>責任</rt></ruby>진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한테 알려 <ruby>전<rt>全</rt></ruby>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한테 <ruby>전<rt>傳</rt></ruby>하여서 하늘뜻을 <ruby>성사<rt>成事</rt></ruby>하게 하고자 하심이 뜻이었다. 이와 같이 하늘로부터 예수는 메시아라는 것과 하늘로 보내신 <ruby>특별<rt>特別</rt></ruby>한 <ruby>자<rt>者</rt></ruby>라는 것은 알려주었으나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한테 예수는 메시아라고까지는 <ruby>지적<rt>指摘</rt></ruby>하여 <ruby>교시<rt>敎示</rt></ruby>하여 주지 않았다. <ruby>지혜<rt>智慧</rt></ruby>롭게 <ruby>행동<rt>行動</rt></ruby>을 <ruby>취<rt>取</rt></ruby>하여야 하는 한 <ruby>단계<rt>段階</rt></ruby>에 <ruby>처<rt>處</rt></ruby>하게 되었다. 그때에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ruby>자기<rt>自己</rt></ruby>가 바라든 메시아를 만났음은 그 <ruby>이상<rt>以上</rt></ruby> 무슨 딴 <ruby>목적<rt>目的</rt></ruby>이 어디에 있으며 다시금 무엇할 <ruby>사명적<rt>使命的</rt></ruby> 다른외<ruby>부분<rt>部分</rt></ruby>을 <ruby>요구<rt>要求</rt></ruby>할 무엇이 없었든 것이 <ruby>사실<rt>事實</rt></ruby>인 <ruby>동시<rt>同時</rt></ruby>에 기뻐서 <ruby>대중<rt>大衆</rt></ruby>을 대하여 <ruby>적극<rt>積極</rt></ruby> 예수는 보내시마 하신 메시아라고 <ruby>선포<rt>宣布</rt></ruby>하여서 <ruby>대중<rt>大衆</rt></ruby>이 예수앞에 <ruby>집결<rt>集結</rt></ruby>하게하는 <ruby>동시<rt>同時</rt></ruby>에 <ruby>자기<rt>自己</rt></ruby>도 <ruby>역시<rt>亦是</rt></ruby> 예수 앞에 있어서 모든 <ruby>대표적<rt>代表的</rt></ruby> <ruby>태도<rt>態度</rt></ruby>로 나서게 되었든가. 그 <ruby>자체<rt>自體</rt></ruby>의 <ruby>태도<rt>態度</rt></ruby> <ruby>여하<rt>如何</rt></ruby>로 <ruby>인<rt>因</rt></ruby>하여 <ruby>대중<rt>大衆</rt></ruby>에게 큰 <ruby>영향<rt>影響</rt></ruby>을 <ruby>전<rt>傳</rt></ruby>하는 <ruby>중대입장<rt>重大立場</rt></ruby>에 있다.
 
그런데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 예수 <ruby>대<rt>對</rt></ruby>하여 <ruby>적극적<rt>積極的</rt></ruby>으로 예수 <ruby>자신<rt>自身</rt></ruby>은 우리가 바라는 <ruby>목적<rt>目的</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 메시아라고 <ruby>대중<rt>大衆</rt></ruby>앞에 <ruby>선포<rt>宣布</rt></ruby> 못함은 사실이었다. 그저 요단<ruby>강<rt>江</rt></ruby>에서 <ruby>세례<rt>洗禮</rt></ruby> 받을때만 알 뿐이고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그냥 그대로 <ruby>자기<rt>自己</rt></ruby>가 처음 <ruby>시작<rt>始作</rt></ruby>한 <ruby>세례<rt>洗禮</rt></ruby>나 주면서 다니는 <ruby>행동<rt>行動</rt></ruby>을 <ruby>계속<rt>繼續</rt></ruby>하게 되니 예수를 대하여서도 <ruby>대중<rt>大衆</rt></ruby>은 메시아라고 보는 것 보다도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의 <ruby>행<rt>行</rt></ruby>한 <ruby>행례<rt>行禮</rt></ruby>의 도움자로써 아는 <ruby>자<rt>者</rt></ruby>라고 <ruby>생각<rt>生覺</rt></ruby>하는 <ruby>자<rt>者</rt></ruby>는 있는 <ruby>정도<rt>程度</rt></ruby>였다.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의 <ruby>목적<rt>目的</rt></ruby>은 그저 <ruby>세례<rt>洗禮</rt></ruby>나 주고 다니는 것이 <ruby>역사적<rt>歷史的</rt></ruby>으로 <ruby>부여<rt>賦與</rt></ruby>받은 <ruby>전사명<rt>全使命</rt></ruby>이었든가. 너무나 <ruby>가치<rt>價値</rt></ruby>없는 <ruby>행동<rt>行動</rt></ruby>이였었다. 모든全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대하여 <ruby>생명<rt>生命</rt></ruby> <ruby>계승<rt>繼承</rt></ruby>의 한 <ruby>중계존재<rt>中繼存在</rt></ruby>가 그냥 멋대로 <ruby>사방<rt>四方</rt></ruby>을 <ruby>자유<rt>自由</rt></ruby>로히 다니면서 <ruby>세례<rt>洗禮</rt></ruby>만 준다는 <ruby>행례<rt>行禮</rt></ruby>에는 우리는 <ruby>한심<rt>寒心</rt></ruby>한 <ruby>태도<rt>態度</rt></ruby>로 <ruby>주목<rt>注目</rt></ruby>하지 않을 수 없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었다.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 <ruby>자신<rt>自身</rt></ruby>은 <ruby>역시<rt>亦是</rt></ruby> 예수 앞에 서서 나타난 엘리야의 <ruby>대신<rt>代身</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라는 것을 잘알았는가 하면 <ruby>의심<rt>疑心</rt></ruby>할 <ruby>문제<rt>問題</rt></ruby>이다. 요한 <ruby>복음<rt>福音</rt></ruby> 1<ruby>장<rt>章</rt></ruby> 21<ruby>절<rt>節</rt></ruby>에 요한이 엘리야도 아니라 하심 보아도 <ruby>자기<rt>自己</rt></ruby> <ruby>자체<rt>自體</rt></ruby>가 그 <ruby>사명적<rt>使命的</rt></ruby> <ruby>입장<rt>立場</rt></ruby>을 <ruby>명백<rt>明白</rt></ruby>히 알지 못함을 알 수 있다. <ruby>자기<rt>自己</rt></ruby> <ruby>자신<rt>自身</rt></ruby>이 알았으면 왜 <ruby>대중<rt>大衆</rt></ruby>앞에 <ruby>자기<rt>自己</rt></ruby>를 <ruby>선포<rt>宣布</rt></ruby>하여서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의 <ruby>의문점<rt>疑問點</rt></ruby>을 없이하여야 할 <ruby>책임<rt>責任</rt></ruby>도 <ruby>준비<rt>準備</rt></ruby> 못하였든 바이었다.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 <ruby>자신<rt>自身</rt></ruby>이 엘리야란 것을 알았으면 <ruby>대중<rt>大衆</rt></ruby>에 대한 <ruby>책임<rt>責任</rt></ruby>을 <ruby>감당<rt>勘當</rt></ruby>하여야 할 <ruby>존재<rt>存在</rt></ruby>
 
로서 어디에 그 <ruby>책임<rt>責任</rt></ruby>을 다하기 <ruby>위<rt>爲</rt></ruby>하여서 싸워서 그 <ruby>기대<rt>基臺</rt></ruby>를 세웠든가 <ruby>자기<rt>自己</rt></ruby> <ruby>자신<rt>自身</rt></ruby>도 <ruby>확고<rt>確固</rt></ruby>한 엘리야의 <ruby>대신자<rt>代身者</rt></ruby>라는 것은 <ruby>자각<rt>自覺</rt></ruby>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ruby>사실<rt>事實</rt></ruby>이었다. 이렇게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ruby>자신사명<rt>自身使命</rt></ruby>에 대하여 <ruby>적극적<rt>積極的</rt></ruby> <ruby>준비<rt>準備</rt></ruby> <ruby>공작<rt>工作</rt></ruby>을 하여서 그 <ruby>목적<rt>目的</rt></ruby> <ruby>본체<rt>本體</rt></ruby>로 오신 예수 앞에 모두全를 <ruby>시종<rt>侍從</rt></ruby>의 중심 <ruby>존재<rt>存在</rt></ruby>로 서서 예수의 모든全 <ruby>사명<rt>使命</rt></ruby>의 <ruby>협조자<rt>協助者</rt></ruby>로서 또 <ruby>제일<rt>第一</rt></ruby> 큰 사랑받을 수 있는 예수의 한 <ruby>제자<rt>弟子</rt></ruby>로서 <ruby>시봉<rt>侍奉</rt></ruby>하는 <ruby>외<rt>外</rt></ruby>에 더 큰 다른 무슨 <ruby>목적<rt>目的</rt></ruby>이 있었으랴. 그런데도 <ruby>불구<rt>不拘</rt></ruby>하고 예수와 <ruby>분립<rt>分立</rt></ruby>하여 <ruby>행<rt>行</rt></ruby>하신데는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 하늘 앞에 <ruby>중대<rt>重大</rt></ruby>한 <ruby>책임<rt>責任</rt></ruby> <ruby>미완성<rt>未完成</rt></ruby>을 가져오는 <ruby>기본적<rt>基本的</rt></ruby> <ruby>대신<rt>代身</rt></ruby> <ruby>행동<rt>行動</rt></ruby>이라 아니할 수 없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었다.
 
<ruby>성경<rt>聖經</rt></ruby>을 보면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ruby>전폭적<rt>全幅的</rt></ruby>으로 메시아라는 것을 <ruby>확실<rt>確實</rt></ruby>하게 알지 못함을 알려주고 있다. <ruby>옥중<rt>獄中</rt></ruby>에 있어서 <ruby>제자<rt>弟子</rt></ruby>들을 보내며 묻기를 그대가 오실바의 메시아니까 하는 <ruby>질의<rt>質疑</rt></ruby>, 또 다른 사람을 기다리오리까 하는 것을 보면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 <ruby>자신<rt>自身</rt></ruby>도 메시아에 <ruby>대<rt>對</rt></ruby>한 <ruby>해결<rt>解決</rt></ruby>을 못하였든 바를 알려 준다. 이와 같이 뜻 <ruby>시봉자<rt>侍奉者</rt></ruby>가 되어야 할 그 <ruby>존재<rt>存在</rt></ruby>조차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알려주지 못하니 예수 <ruby>자신<rt>自身</rt></ruby>에 있어서의 <ruby>전기대<rt>全期待</rt></ruby>와 <ruby>소망<rt>所望</rt></ruby>은 <ruby>여하<rt>如何</rt></ruby>한 <ruby>정도<rt>程度</rt></ruby>이였을까? <ruby>과연<rt>果然</rt></ruby> <ruby>통한<rt>痛恨</rt></ruby>치 않을 길이 없을까. 누가 그 <ruby>심정<rt>心情</rt></ruby>을 알 <ruby>자<rt>者</rt></ruby> 있었으랴. 여기에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 예수 앞에 하늘 앞에 큰 <ruby>범행<rt>犯行</rt></ruby>의 <ruby>시작<rt>始作</rt></ruby>이 있다는 것을 아는<ruby>자<rt>者</rt></ruby>가 <ruby>현기독교계<rt>現基督敎界</rt></ruby>에 없는바를 나도 <ruby>통분<rt>痛憤</rt></ruby>하는 바이다.
 
그저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ruby>귀<rt>貴</rt></ruby>하고 하나님 앞에 없어서는 아니될 <ruby>존재<rt>存在</rt></ruby> <ruby>대우<rt>待遇</rt></ruby>하는 것은 <ruby>용서<rt>容恕</rt></ruby> 할 수 없는 <ruby>행동<rt>行動</rt></ruby>이라 아니할 수 없는것이다. 그런고로 <ruby>자기<rt>自己</rt></ruby> <ruby>책임<rt>責任</rt></ruby> 다하지 못하고 <ruby>자기<rt>自己</rt></ruby> 뜻대로 <ruby>행<rt>行</rt></ruby>하는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아버지 앞에 <ruby>귀<rt>貴</rt></ruby>함의 <ruby>존재<rt>存在</rt></ruby>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때문에 온 <ruby>자<rt>者</rt></ruby>가 그其 <ruby>본사명<rt>本使命</rt></ruby> <ruby>중심지<rt>中心地</rt></ruby>를 떠나서 <ruby>행<rt>行</rt></ruby>하는 그其 <ruby>자체<rt>自體</rt></ruby>는 <ruby>물론<rt>勿論</rt></ruby>이며 그其의 <ruby>시종자<rt>侍從者</rt></ruby>까지 하늘로서 <ruby>선<rt>善</rt></ruby>하게 <ruby>대<rt>對</rt></ruby>할 수 없는 <ruby>존재<rt>存在</rt></ruby>로써 그 <ruby>말로<rt>末路</rt></ruby>에까지 하나님은 <ruby>귀<rt>貴</rt></ruby>히 보지 않음은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이와 같은 <ruby>중대지사<rt>重大之事</rt></ruby> <ruby>여하<rt>如何</rt></ruby>가 예수 앞에 크나큰 <ruby>광야생활<rt>曠野生活</rt></ruby>이라는 <ruby>고통<rt>苦痛</rt></ruby>의 <ruby>노정<rt>路程</rt></ruby>을 <ruby>단행<rt>斷行</rt></ruby>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 <ruby>원인<rt>原因</rt></ruby>이 되었다. <ruby>광야<rt>曠野</rt></ruby>에 나아갈 때에 <ruby>고독<rt>孤獨</rt></ruby>한 <ruby>심중<rt>心中</rt></ruby>을 헤아려 <ruby>동정<rt>同情</rt></ruby>하는 <ruby>자<rt>者</rt></ruby> <ruby>세상<rt>世上</rt></ruby>에 몇사람이었든가?
 
여기에 人間을 <ruby>상대<rt>相對</rt></ruby>하여 예수의 <ruby>사명범위<rt>使命範圍</rt></ruby>는 한 어두운길暗路에 <ruby>봉착<rt>逢着</rt></ruby>하였음을 누가 아는가 아는 <ruby>자<rt>者</rt></ruby> 아버지와 예수뿐이었다. 그 <ruby>광야<rt>曠野</rt></ruby>의 <ruby>적막감<rt>寂寞感</rt></ruby>은 예수 앞에 큰 <ruby>낙망<rt>落望</rt></ruby>과 <ruby>동시<rt>同時</rt></ruby>에 다시금 <ruby>재출발<rt>再出發</rt></ruby>의 한 <ruby>노정<rt>路程</rt></ruby>을 <ruby>결심<rt>決心</rt></ruby>케 하는 <ruby>노정<rt>路程</rt></ruby>이라 아니 할 수 없다. <ruby>광야<rt>曠野</rt></ruby>까지 예수를 <ruby>시봉<rt>侍奉</rt></ruby>하여 따른 자 한 사람도 없다. 그때 먼저 예수를 메시아로 모시는 <ruby>자<rt>者</rt></ruby> 있다면 이는 하늘에서 내리는 큰 <ruby>상<rt>賞</rt></ruby>을 받을
 
<ruby>존재<rt>存在</rt></ruby>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ruby>생각<rt>生覺</rt></ruby>하면 <ruby>동방박사<rt>東方博士</rt></ruby>는 어디에 갔는고, <ruby>목자<rt>牧者</rt></ruby>는 어디에 있는고. <ruby>모친<rt>母親</rt></ruby>은 어디에 갔는고.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어디에 갔는고. 모두 <ruby>자기<rt>自己</rt></ruby> 뜻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ruby>행동<rt>行動</rt></ruby>하는 그其 <ruby>자체<rt>自體</rt></ruby>들은 예수 앞에 기쁨을 <ruby>변<rt>變</rt></ruby>하여 <ruby>탄식<rt>歎息</rt></ruby>하게 하는 한 <ruby>존재<rt>存在</rt></ruby> <ruby>등<rt>等</rt></ruby>에 <ruby>불과<rt>不過</rt></ruby>하였으며 더욱 슬픔을 <ruby>격동<rt>激動</rt></ruby>시켜주는 <ruby>기대<rt>基臺</rt></ruby>에 틀림없는 <ruby>존재<rt>存在</rt></ruby>들이었다. 그런 <ruby>심정<rt>心情</rt></ruby>을 품고 <ruby>광야생활<rt>曠野生活</rt></ruby>에 있어서는 <ruby>제<rt>第</rt></ruby>1<ruby>차<rt>次</rt></ruby> <ruby>낙심<rt>落心</rt></ruby>을 다시 <ruby>복귀<rt>復歸</rt></ruby>하기 위한 <ruby>목적<rt>目的</rt></ruby>인 <ruby>동시<rt>同時</rt></ruby>에 <ruby>적극적<rt>積極的</rt></ruby> 원수 사탄 <ruby>대<rt>對</rt></ruby>하여 <ruby>최종<rt>最終</rt></ruby> <ruby>결판시기<rt>決判時期</rt></ruby>였다. 사탄이 벌써 하늘 뜻 <ruby>성사<rt>成事</rt></ruby>할 터를 <ruby>침입<rt>侵入</rt></ruby>하여서 뜻 <ruby>순종<rt>順從</rt></ruby> <ruby>노정<rt>路程</rt></ruby>을 받들지 못하는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의 <ruby>기대<rt>基臺</rt></ruby>는 보았으니 그 다음엔 그 <ruby>중심<rt>中心</rt></ruby> <ruby>자체<rt>自體</rt></ruby>인 예수까지 와서 <ruby>시험<rt>試驗</rt></ruby>의 <ruby>시도<rt>試圖</rt></ruby>는 <ruby>원리적<rt>原理的</rt></ruby> 한 <ruby>행동<rt>行動</rt></ruby>이었다. 그러니 <ruby>광야생활<rt>曠野生活</rt></ruby> <ruby>중<rt>中</rt></ruby> 사탄의 <ruby>자유행동<rt>自由行動</rt></ruby>에 <ruby>대비<rt>對比</rt></ruby>한 예수에 <ruby>시험<rt>試驗</rt></ruby>이었다함을 알아야 한다.
 
==== <ruby>제<rt>第</rt></ruby>3 <ruby>절<rt>節</rt></ruby>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 <ruby>인간성<rt>人間性</rt></ruby> <ruby>표준<rt>標準</rt></ruby>으로 예수를 <ruby>대<rt>對</rt></ruby>함 ====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의 <ruby>행동<rt>行動</rt></ruby>이 어찌 <ruby>용서<rt>容恕</rt></ruby>받겠는가 <ruby>생각<rt>生覺</rt></ruby>하면 몸에 솜서리 치는 한 <ruby>행동<rt>行動</rt></ruby>이 아니었는가.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 <ruby>역시<rt>亦是</rt></ruby> 예수를 대하여서 뜻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서 <ruby>대<rt>對</rt></ruby>하지 못함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도 사람인지라 메시아라는 <ruby>자체<rt>自體</rt></ruby>는 좀더 <ruby>고귀<rt>高貴</rt></ruby>한 <ruby>위<rt>位</rt></ruby>치에서 <ruby>자기<rt>自己</rt></ruby>에게 보여졌을 것이 없는데 별다름 없는 <ruby>존재<rt>存在</rt></ruby>의 <ruby>용모<rt>容貌</rt></ruby>이면서 <ruby>자기<rt>自己</rt></ruby>들이 바라는 바와 같이 뜻의 <ruby>성사<rt>成事</rt></ruby>의 <ruby>노정<rt>路程</rt></ruby>을 <ruby>취<rt>取</rt></ruby>하여 나가지 못하는 <ruby>존재<rt>存在</rt></ruby>로써 어찌 메시아의 <ruby>자격<rt>資格</rt></ruby>이란 너무나 <ruby>거리<rt>距離</rt></ruby>가 멀었었다. 요한 <ruby>역시<rt>亦是</rt></ruby> 그 <ruby>시대적<rt>時代的</rt></ruby>으로 대하든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과 <ruby>동일<rt>同一</rt></ruby>한 <ruby>관점<rt>觀點</rt></ruby>으로 서게 됨이 큰 <ruby>실수<rt>失手</rt></ruby>의 <ruby>시작<rt>始作</rt></ruby>이었다. 그러니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은 두 말할 수 없는 <ruby>행동<rt>行動</rt></ruby>이었다.
 
그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예수 앞에 메시아라면 <ruby>전<rt>全</rt></ruby> <ruby>시종<rt>侍從</rt></ruby>하기 위하여서 <ruby>자기<rt>自己</rt></ruby>를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그其 <ruby>외<rt>外</rt></ruby> <ruby>제자<rt>弟子</rt></ruby>들까지도 함께 데려와서 예수의 <ruby>제자<rt>弟子</rt></ruby>가 되어야 할 <ruby>입장<rt>立場</rt></ruby>이었는데 그것이 <ruby>과연<rt>果然</rt></ruby> <ruby>인간성<rt>人間性</rt></ruby>에서 나온 <ruby>파괴행동<rt>破壞行動</rt></ruby>이었다. <ruby>자기<rt>自己</rt></ruby> <ruby>제자<rt>弟子</rt></ruby>들과 함께 예수 <ruby>제자<rt>弟子</rt></ruby>가 되어 어제昨日의 <ruby>선생<rt>先生</rt></ruby>의 <ruby>입장<rt>立場</rt></ruby>을 <ruby>변<rt>變</rt></ruby>하여 예수 앞에 <ruby>제자<rt>弟子</rt></ruby> <ruby>양<rt>樣</rt></ruby>으로 서니 <ruby>제자<rt>弟子</rt></ruby>였든 <ruby>자<rt>者</rt></ruby>들과 <ruby>동급적<rt>同級的</rt></ruby> <ruby>입장<rt>立場</rt></ruby>에서 그其 <ruby>입장<rt>立場</rt></ruby>이 <ruby>과연<rt>果然</rt></ruby> <ruby>인간세계<rt>人間世界</rt></ruby>에서는 어려운 <ruby>사실<rt>事實</rt></ruby>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ruby>관점<rt>觀點</rt></ruby> <ruby>등<rt>等</rt></ruby>은 <ruby>인간<rt>人間</rt></ruby>의 <ruby>전부<rt>全部</rt></ruby>가 <ruby>자기<rt>自己</rt></ruby>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하늘을 대하고자 하는 <ruby>대신<rt>代身</rt></ruby> 사탄 <ruby>공작<rt>工作</rt></ruby>이라고 보여주는 <ruby>결과<rt>結果</rt></ruby>를 <ruby>초래<rt>招來</rt></ruby>하여 사탄과 <ruby>합<rt>合</rt></ruby>하는 <ruby>방향<rt>方向</rt></ruby>으로 나가는 셈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와 같이 <ruby>논<rt>論</rt></ruby>하는 것은 <ruby>무근거<rt>無根據</rt></ruby>한 <ruby>원리<rt>原理</rt></ruby>위에서 <ruby>논<rt>論</rt></ruby>함이 아니다. <ruby>성경<rt>聖經</rt></ruby>에서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 <ruby>일대<rt>一大</rt></ruby> <ruby>실수<rt>失手</rt></ruby>의 <ruby>행동<rt>行動</rt></ruby>을 <ruby>폭로<rt>暴露</rt></ruby>한 <ruby>구절<rt>句節</rt></ruby>을 찾아서 <ruby>해설<rt>解說</rt></ruby>하여 보자. <ruby>지금<rt>至今</rt></ruby>까지 <ruby>신학계<rt>神學界</rt></ruby>
 
에는 <ruby>난해<rt>難解</rt></ruby> <ruby>문제<rt>問題</rt></ruby>의 <ruby>구절<rt>句節</rt></ruby>일 것이다. 즉 마태복음 12<ruby>장<rt>章</rt></ruby>을 보면 그 <ruby>내용적<rt>內容的</rt></ruby> <ruby>사실<rt>事實</rt></ruby>이 <ruby>여실<rt>如實</rt></ruby>하게 드러나 있다. <ruby>즉<rt>卽</rt></ruby> 예수께서 12<ruby>제자<rt>弟子</rt></ruby>에게 <ruby>명<rt>命</rt></ruby>하심을 <ruby>필<rt>畢</rt></ruby>하시고 거기에서 <ruby>이<rt>離</rt></ruby>사 <ruby>교주<rt>敎洲</rt></ruby>하시며 <ruby>영포<rt>領布</rt></ruby>하시라고 <ruby>각성<rt>各城</rt></ruby>에 가往시더라. 그때 왜 요한이 <ruby>옥<rt>獄</rt></ruby>에 있어 그리스도의 <ruby>행<rt>行</rt></ruby>함을 듣聞고 그 <ruby>제자<rt>弟子</rt></ruby>들을 <ruby>유<rt>遺</rt></ruby>야 예수께 <ruby>단<rt>亶</rt></ruby>야 <ruby>왈<rt>曰</rt></ruby> <ruby>당신<rt>當身</rt></ruby>이 오來실이니까. <ruby>선생임<rt>先生任</rt></ruby>이 오니까 우리들我等이 다른사람他人을 기다待리이까 예수 <ruby>대답<rt>對答</rt></ruby>하여 <ruby>왈<rt>曰</rt></ruby> 너희들爾等이 <ruby>왕<rt>往</rt></ruby>하야 듣聞고 보見는 것으로 요한에게 <ruby>고<rt>告</rt></ruby>하대 귀머거리가 들으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ruby>나자<rt>癩者</rt></ruby>가 깨끗潔하며 눈먼 자가 보며 <ruby>빈자<rt>貧者</rt></ruby>가 <ruby>복음<rt>福音</rt></ruby>을 <ruby>전<rt>傳</rt></ruby>한다하라. 그런지 나我로 <ruby>인<rt>因</rt></ruby>하여 <ruby>범죄<rt>犯罪</rt></ruby>하지 아니한 <ruby>자<rt>者</rt></ruby>는 <ruby>복<rt>福</rt></ruby>이 있도다 하시고 저들被等이 흩어짐離에 군중衆들에게 요한을 가르켜指하야 말씀言하시매 너희들爾等은 무엇何을 볼視려고 들野에 갔去더냐. 바람風에 움직動이는 갈대냐 또 너희들爾等이 무엇何을 볼視려고 갔去더냐. <ruby>미복<rt>美服</rt></ruby>을 입衣은 사람人이냐 아름다운 옷 입美服衣은 사람을 <ruby>대궐<rt>大闕</rt></ruby>에 있나이다. 너희들爾等이 어찌 갔去더냐. <ruby>선지자<rt>先知者</rt></ruby>를 보見려더냐. 옳是도다. 내我가 너희들爾等에게 말하노니 이사람此人은 <ruby>선지자<rt>先知者</rt></ruby>보다 크勝니라. 이사람此人을 가리켜指 <ruby>기록<rt>記錄</rt></ruby>하였으며 볼見지어다. 내我가 나我의 <ruby>사자<rt>使者</rt></ruby>를 너희들爾等 앞前에 전遺하노니 저被가 너희길爾路은 너희앞爾前에 <ruby>예비<rt>豫備</rt></ruby>하리라 하였나이다. 내我가 <ruby>진실<rt>眞實</rt></ruby>로 너희들爾等에게 <ruby>논<rt>論</rt></ruby>하노니 <ruby>여인<rt>女人</rt></ruby>이 낳은 사람 <ruby>중<rt>中</rt></ruby>에는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보다 <ruby>웅대<rt>雄大</rt></ruby>한 <ruby>자<rt>者</rt></ruby>가 일어起남이 없으無나 그러然나 <ruby>천국<rt>天國</rt></ruby>에서는 <ruby>지극<rt>至極</rt></ruby> 어린아이小子라도 그被보다 크大니라.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 올來때부터 <ruby>지금<rt>至今</rt></ruby>까지 <ruby>천국<rt>天國</rt></ruby>은 <ruby>용역<rt>用力</rt></ruby>함으로 얻得나니 <ruby>용력<rt>用力</rt></ruby>한 <ruby>자<rt>者</rt></ruby>는 빼앗奪느니라. 모든諸 <ruby>선지자<rt>先知者</rt></ruby>와 <ruby>율법<rt>律法</rt></ruby>에 <ruby>예언<rt>豫言</rt></ruby>한 것은 요한까지 도달至하였으니 <ruby>만일<rt>萬一</rt></ruby> 너희들爾等이 그것을 <ruby>수긍<rt>首肯</rt></ruby>할진대 오來리라한 엘리야가 그사람此人이니라. 귀耳가 있有어 듣는자聽者는 들을聽지어다. <ruby>차세대<rt>此世代</rt></ruby>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ruby>비유<rt>譬喩</rt></ruby>컨데 아이兒孩가 <ruby>시장<rt>市場</rt></ruby>에 앉座아 <ruby>동류<rt>同類</rt></ruby>를 불러 <ruby>왈<rt>曰</rt></ruby> 우리들我等이 너희를爾等을 <ruby>향<rt>向</rt></ruby>하야 나팔을 불吹어도 너희들爾等이 춤추舞지 않고 우리들我等이 슬픈 울음소리를哀音 내어도 너희들爾等이 울지 않았다함과 같으니 요한이 와서來 먹食지도 않고 마시飮지도 아니함에 그들被等이 말語하기를 <ruby>사귀<rt>邪鬼</rt></ruby>가 들렸다 하더니 <ruby>인자<rt>人子</rt></ruby>는 와서來 먹食고 마시飮에 또 말語하기를 먹食기를 탐貪하고 술酒을 즐기嗜는 사람人이요 <ruby>세리<rt>稅吏</rt></ruby>와 <ruby>죄인<rt>罪人</rt></ruby>의 <ruby>친구<rt>親舊</rt></ruby>로라하니 다만 <ruby>지혜<rt>智慧</rt></ruby>는 그 <ruby>행사<rt>行事</rt></ruby>로 <ruby>의<rt>義</rt></ruby>를 나타내顯느니라고 <ruby>이상<rt>以上</rt></ruby>과 같은 말씀言을 <ruby>선언<rt>宣言</rt></ruby>하였다. 이 <ruby>내용전부<rt>內容全部</rt></ruby>는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 <ruby>대<rt>對</rt></ruby>하여 놓고 한 말이었다. 그러면 요한 <ruby>제자<rt>弟子</rt></ruby>와서 물을때에 본대로 말하라. 내가 누구라고 말하지 않으나 너희는 스스로 <ruby>자각<rt>自覺</rt></ruby>하여라 하면서 여러 <ruby>이적<rt>異蹟</rt></ruby> <ruby>기사<rt>奇事</rt></ruby>로써 <ruby>표시<rt>表示</rt></ruby>하였다.
 
그러면 예수는 왜 이런 <ruby>대답<rt>對答</rt></ruby>을 하였는가. 그저 묻는 그대로 <ruby>대답<rt>對答</rt></ruby>하여 옳도다. 내가 오리來라고 한 <ruby>자<rt>者</rt></ruby>로라 하면 그만 <ruby>해결<rt>解決</rt></ruby>을 짓는 일인데 이와 같이 예를 들어 말한 바는 <ruby>인간<rt>人間</rt></ruby>으로 하여금 깨달을수 있도록 <ruby>교시<rt>敎示</rt></ruby>하였으니 그것 보아서 알라는 큰 <ruby>의의<rt>意義</rt></ruby>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ruby>이유<rt>理由</rt></ruby>는 <ruby>귀<rt>貴</rt></ruby>하고 높은 예수를 찾으면 그야말로 그에 더 <ruby>성공<rt>成功</rt></ruby>은 없는 것인데 누구나 <ruby>전부<rt>全部</rt></ruby>가 가르쳐주고 <ruby>전부<rt>全部</rt></ruby> 끌어다 주면 그 <ruby>귀<rt>貴</rt></ruby>한 <ruby>자체<rt>自體</rt></ruby>를 찾지 못한 <ruby>자<rt>者</rt></ruby> 어디에 있을까 밝히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으면 <ruby>자기<rt>自己</rt></ruby>들이 <ruby>지혜<rt>智慧</rt></ruby>를 <ruby>통<rt>通</rt></ruby>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세워야만 그 뜻 <ruby>성사<rt>成事</rt></ruby>는 <ruby>물론<rt>勿論</rt></ruby> 하늘의 <ruby>협조<rt>協助</rt></ruby>하여 주었지만 <ruby>자기<rt>自己</rt></ruby> <ruby>노력<rt>努力</rt></ruby>으로 찾아야만 <ruby>타락<rt>墮落</rt></ruby>하지 않고 이루었다하는 <ruby>결과<rt>結果</rt></ruby>를 보기 <ruby>위<rt>爲</rt></ruby>하여 그 찾는 <ruby>상급<rt>賞給</rt></ruby>에 <ruby>대<rt>對</rt></ruby>한 <ruby>영광<rt>榮光</rt></ruby>받을 <ruby>자격<rt>資格</rt></ruby>이 <ruby>결정<rt>決定</rt></ruby>되는 바이므로 <ruby>최종점<rt>最終點</rt></ruby>까지는 <ruby>교시<rt>敎示</rt></ruby>하여 주지 않는 바이다. <ruby>예<rt>例</rt></ruby>를 들면 100까지를 찾아야 하는데 95가량만 알려주고 5는 알려주지 않는 것이 한 뜻의 <ruby>노정<rt>路程</rt></ruby>의 <ruby>표시<rt>表示</rt></ruby>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100까지 <ruby>중<rt>中</rt></ruby> 100까지 <ruby>전부<rt>全部</rt></ruby>를 <ruby>교시<rt>敎示</rt></ruby>하면 그 <ruby>상급<rt>賞給</rt></ruby>은 하늘에 있는 <ruby>성도<rt>聖徒</rt></ruby>들 앞에서라도 그 <ruby>영광<rt>榮光</rt></ruby>누릴 <ruby>자격완성자<rt>資格完成者</rt></ruby>라 할 수 없기에 95까지만 가르쳐주고 5는 <ruby>자기<rt>自己</rt></ruby> <ruby>지혜<rt>智慧</rt></ruby>를 <ruby>통<rt>通</rt></ruby>하여 찾아 100까지를 채우시기를 바라서 <ruby>교시<rt>敎示</rt></ruby>하는 바가 지금 <ruby>역사<rt>役事</rt></ruby> <ruby>노정<rt>路程</rt></ruby>에서 많이 보여지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이 5이란 그것 찾아 <ruby>성사<rt>成事</rt></ruby>하는 그 <ruby>사실<rt>事實</rt></ruby>은 100의 <ruby>성사<rt>成事</rt></ruby>한 <ruby>영광<rt>榮光</rt></ruby>을 누리고 <ruby>기본권한<rt>基本權限</rt></ruby>을 <ruby>결정<rt>決定</rt></ruby>하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니 이와같은 <ruby>예<rt>例</rt></ruby>로서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 <ruby>대<rt>對</rt></ruby>하여서 <ruby>대답<rt>對答</rt></ruby>한바도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또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한테도 하늘로써도 이와 같이 <ruby>교시<rt>敎示</rt></ruby>하였다. <ruby>지혜<rt>智慧</rt></ruby>로 찾아서 <ruby>의<rt>義</rt></ruby>로 <ruby>정<rt>定</rt></ruby>함을 주시고자하여서 예수는 메시아라고 <ruby>확정<rt>確定</rt></ruby>지어 <ruby>교시<rt>敎示</rt></ruby>치 않은 바이다. 이런 것이 <ruby>지극<rt>至極</rt></ruby>한 하나님이 사랑 하시어 하시는 <ruby>섭리<rt>攝理</rt></ruby>인 <ruby>동시<rt>同時</rt></ruby>에 누구에나 <ruby>허락<rt>許諾</rt></ruby>한 예수니 <ruby>지혜<rt>智慧</rt></ruby>있는 <ruby>자<rt>者</rt></ruby>만 <ruby>합<rt>合</rt></ruby>하여만 원수의 <ruby>지혜<rt>智慧</rt></ruby>를 <ruby>파<rt>破</rt></ruby>할 수 있는 <ruby>기본동력<rt>基本動力</rt></ruby>이라는 <ruby>근본<rt>根本</rt></ruby>의 힘力의 터가 되기에 이와 같이 하나님은 <ruby>섭리<rt>攝理</rt></ruby>하신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ruby>특<rt>特</rt></ruby>히 어떤 <ruby>목적<rt>目的</rt></ruby>을 <ruby>교시<rt>敎示</rt></ruby>하였다가 다시금 <ruby>시험<rt>試驗</rt></ruby>하여 그 <ruby>목적<rt>目的</rt></ruby> <ruby>대<rt>對</rt></ruby>한 <ruby>의심<rt>疑心</rt></ruby>을 <ruby>발<rt>發</rt></ruby>하게 <ruby>교시<rt>敎示</rt></ruby>하여 주는 때도 있다. 그것은 <ruby>지혜<rt>智慧</rt></ruby>로서 그 <ruby>근본<rt>根本</rt></ruby>을 <ruby>확득<rt>確得</rt></ruby>할 수 있는 <ruby>자격자<rt>資格者</rt></ruby>가 되어야만 하나님 <ruby>자신<rt>自身</rt></ruby>이 <ruby>직접간섭<rt>直接干涉</rt></ruby>하지 않아도 사탄 원수 <ruby>대<rt>對</rt></ruby>하여 <ruby>승리<rt>勝利</rt></ruby>할 <ruby>자격자<rt>資格者</rt></ruby>로 세우려니 이런 <ruby>시험<rt>試驗</rt></ruby>도 있는바는 <ruby>영교시<rt>靈敎示</rt></ruby>로 받는 <ruby>자<rt>者</rt></ruby>들의 <ruby>체험<rt>體驗</rt></ruby>하는 <ruby>사실적<rt>事實的</rt></ruby>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로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즉 사탄이 <ruby>대<rt>對</rt></ruby>하여 <ruby>반대역사<rt>反對役事</rt></ruby>할 수 있는 것이기에 또 그리하여 <ruby>완성격자<rt>完成格者</rt></ruby> 되면 <ruby>전부<rt>全部</rt></ruby>를 하나님의 <ruby>간섭<rt>干涉</rt></ruby>을 하지 않고 <ruby>자유성사<rt>自由成事</rt></ruby>를 <ruby>표준<rt>標準</rt></ruby>하기에 이와같은 자리를 바라서 우리에게 <ruby>대취<rt>對取</rt></ruby>하기 <ruby>위<rt>爲</rt></ruby>하여 <ruby>섭리<rt>攝理</rt></ruby>하심은 알아야 한다. <ruby>지혜<rt>智慧</rt></ruby>로서 뜻 찾아 <ruby>완성<rt>完成</rt></ruby>하는 <ruby>자<rt>者</rt></ruby>는 저 하늘 <ruby>권<rt>圈</rt></ruby>에서도 말할수 없는 <ruby>귀<rt>貴</rt></ruby>한 <ruby>존재<rt>存在</rt></ruby>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ruby>존재<rt>存在</rt></ruby>의 <ruby>자격<rt>資格</rt></ruby>은 <ruby>지혜<rt>智慧</rt></ruby>를 찾음으로만 <ruby>존경<rt>尊敬</rt></ruby>의 <ruby>가치<rt>價値</rt></ruby>를 볼 수 있는 <ruby>근본<rt>根本</rt></ruby>의 <ruby>행동<rt>行動</rt></ruby>이 즉 <ruby>지혜<rt>智慧</rt></ruby>로 뜻 <ruby>성사<rt>成事</rt></ruby>를
 
<ruby>완성<rt>完成</rt></ruby>하는 <ruby>태도<rt>態度</rt></ruby>이다. 그리고 <ruby>빈자<rt>貧者</rt></ruby>에게 <ruby>복음<rt>福音</rt></ruby>을 <ruby>전<rt>傳</rt></ruby>한다 하심은 큰 <ruby>의미<rt>意味</rt></ruby>가 있다. 즉 여기는 이스라엘 <ruby>백성<rt>百姓</rt></ruby> <ruby>전부<rt>全部</rt></ruby>가 메시아를 <ruby>고대<rt>苦待</rt></ruby>하기를 <ruby>자기<rt>自己</rt></ruby>들이 더 좋아지기 <ruby>위<rt>爲</rt></ruby>하여서 <ruby>고대<rt>苦待</rt></ruby>하였기에 <ruby>지금<rt>至今</rt></ruby> 이와 같이 나 <ruby>자신<rt>自身</rt></ruby>은 너희들이 바라는 <ruby>목적상대<rt>目的相對</rt></ruby>로 되지 못하여 <ruby>빈자<rt>貧者</rt></ruby>와 같은 <ruby>자<rt>者</rt></ruby> 밖에 <ruby>상대<rt>相對</rt></ruby>할 수 없는 <ruby>모양<rt>貌樣</rt></ruby>에 있다함을 <ruby>고<rt>告</rt></ruby>하는 <ruby>동시<rt>同時</rt></ruby>에 너희들은 마음으로 <ruby>부<rt>富</rt></ruby>한 것이었기에 나 <ruby>대<rt>對</rt></ruby>할 수 없었다는 것을 <ruby>간접적<rt>間接的</rt></ruby>으로 <ruby>표시<rt>表示</rt></ruby>하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사탄이 <ruby>주관세상<rt>主管世上</rt></ruby>에서 <ruby>선<rt>善</rt></ruby>은 밝혀 <ruby>빈자급<rt>貧者級</rt></ruby>에 많은 것을 말하는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ruby>악<rt>惡</rt></ruby>의 <ruby>주관세상<rt>主管世上</rt></ruby>이니 악한사람惡者은 잘살富고 착한사람善者은 가난貧하니 이런 <ruby>원리적<rt>原理的</rt></ruby> <ruby>언사<rt>言詞</rt></ruby>로 되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다음 마태복음 11장 6절에는 말씀하시기를 누구誰든지 나我로 <ruby>인<rt>因</rt></ruby>하여 <ruby>범죄<rt>犯罪</rt></ruby>하지 아니한 <ruby>자<rt>者</rt></ruby>는 <ruby>복<rt>福</rt></ruby>이 있有도다 하심의 <ruby>구절<rt>句節</rt></ruby>을 보게 된다. 이 <ruby>구절<rt>句節</rt></ruby>이야 예수님의 숨은 <ruby>심정<rt>心情</rt></ruby>을 <ruby>표시<rt>表示</rt></ruby>한 말씀이었다. <ruby>즉<rt>卽</rt></ruby> 이 말씀에는 벌써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나에게 <ruby>범죄<rt>犯罪</rt></ruby>하였다는 <ruby>결론적<rt>結論的</rt></ruby> <ruby>사실<rt>事實</rt></ruby>을 <ruby>고백<rt>告白</rt></ruby>하는 것이다. <ruby>범죄<rt>犯罪</rt></ruby>하지 않은 <ruby>자<rt>者</rt></ruby>는 <ruby>복<rt>福</rt></ruby>이 있도다 하였으니 벌써 <ruby>복<rt>福</rt></ruby>된 <ruby>입장<rt>立場</rt></ruby>에서 <ruby>이탈<rt>離脫</rt></ruby>한 <ruby>존재<rt>存在</rt></ruby>하는 것을 <ruby>암시<rt>暗示</rt></ruby>한 바이었다. <ruby>과연<rt>果然</rt></ruby> 예수 앞에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 한 <ruby>자체<rt>自體</rt></ruby>는 크나큰 <ruby>타격<rt>打擊</rt></ruby>의 <ruby>존재<rt>存在</rt></ruby>였다. 예수의 <ruby>전목적<rt>全目的</rt></ruby>의 <ruby>대부분<rt>大部分</rt></ruby>에 <ruby>일대난사<rt>一大難事</rt></ruby>를 <ruby>초래<rt>招來</rt></ruby>케 한 큰 <ruby>범죄<rt>犯罪</rt></ruby>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없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그 다음은 너희들爾等은 무엇 보려 <ruby>광야<rt>曠野</rt></ruby>에 나갔出더냐. 그 <ruby>목적<rt>目的</rt></ruby>이 무엇이든지 그 들野에 나아감은 <ruby>전목적<rt>全目的</rt></ruby>은 예수 한 <ruby>자체<rt>自體</rt></ruby>를 보기 <ruby>위<rt>爲</rt></ruby>하여 <ruby>행동<rt>行動</rt></ruby>한바가 아니냐. 또 들野에서 요한 <ruby>자체<rt>自體</rt></ruby>가 <ruby>증거<rt>證據</rt></ruby>한바가 아니었든가. 그런데 그때 벌써 알아야 할 <ruby>시기<rt>時期</rt></ruby>를 놓치고 <ruby>지금<rt>至今</rt></ruby>와서 이렇게 <ruby>행동<rt>行動</rt></ruby>하는 것을 <ruby>암시<rt>暗示</rt></ruby>하면서 <ruby>책망<rt>責望</rt></ruby>하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 <ruby>증거<rt>證據</rt></ruby>한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ruby>과연<rt>果然</rt></ruby> <ruby>선지자<rt>先知者</rt></ruby> <ruby>중<rt>中</rt></ruby>에서는 <ruby>제일<rt>第一</rt></ruby>큰 <ruby>자<rt>者</rt></ruby>라고 하면서 말씀하시었다.
 
들野에서 본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ruby>과연<rt>果然</rt></ruby> <ruby>선지자<rt>先知者</rt></ruby> <ruby>중<rt>中</rt></ruby>에도 큰 <ruby>자<rt>者</rt></ruby>라고 하나 할 <ruby>책임<rt>責任</rt></ruby>을 <ruby>담당<rt>擔當</rt></ruby>하지 못하였다는 <ruby>의미<rt>意味</rt></ruby>로 말씀하시는 말씀이 내我가 <ruby>진실<rt>眞實</rt></ruby>로 너희爾等에게 이르論노니 <ruby>여인<rt>女人</rt></ruby>으로 난 사람 <ruby>중<rt>中</rt></ruby>에는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보다 <ruby>웅대<rt>雄大</rt></ruby>한 <ruby>자<rt>者</rt></ruby>가 일어남起이 없도無다. <ruby>천국<rt>天國</rt></ruby>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至極者라도 그被보다 크大니라 하심에 <ruby>결론적<rt>結論的</rt></ruby> <ruby>판결<rt>判決</rt></ruby>을 내리웠다. 이 말씀이 지금 <ruby>신학계<rt>神學界</rt></ruby>에서 <ruby>미해결점<rt>未解決點</rt></ruby>이나 그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는 예수 <ruby>대<rt>對</rt></ruby>한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의 <ruby>범죄행위<rt>犯罪行爲</rt></ruby>에 <ruby>대<rt>對</rt></ruby>한 <ruby>책망<rt>責望</rt></ruby>의 말씀이라는 것을 밝히 이제는 알아야 한다. <ruby>즉<rt>卽</rt></ruby>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는 무슨 뜻인고 하니 <ruby>여인<rt>女人</rt></ruby>으로 난 사람 <ruby>중<rt>中</rt></ruby>에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보다 <ruby>웅대자<rt>雄大者</rt></ruby>가 일어起남이 없無다함은 이 말씀에 <ruby>대<rt>對</rt></ruby>한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를 알아야 한다.
 
지난날昔日의 <ruby>선지자<rt>先知者</rt></ruby>도 <ruby>여인<rt>女人</rt></ruby>을 <ruby>통<rt>通</rt></ruby>하여 태어生고 <ruby>지금<rt>至今</rt></ruby>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도 여인女人을 <ruby>통<rt>通</rt></ruby>하여 태어生난 <ruby>자<rt>者</rt></ruby>라는 것은 틀림없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인데 왜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 <ruby>제일<rt>第一</rt></ruby>로 큰 <ruby>존재<rt>存在</rt></ruby>라고 하였는가 하면 <ruby>선지자<rt>先知者</rt></ruby>라면 하나님의 뜻을 <ruby>예언<rt>豫言</rt></ruby>하셔서 뜻을 알려주는 <ruby>대변인<rt>代辯人</rt></ruby>임에 틀
 
림없다. 그런데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ruby>역시<rt>亦是</rt></ruby> 하나님 뜻을 알리는 <ruby>대변인<rt>代辯人</rt></ruby>이라는 것은 같은 뜻의 <ruby>존재<rt>存在</rt></ruby>이나 그 <ruby>자체<rt>自體</rt></ruby>들이 <ruby>증거<rt>證據</rt></ruby> <ruby>입장<rt>立場</rt></ruby>을 취하여 보면 지난날昔日 <ruby>선지자<rt>先知者</rt></ruby> <ruby>전부<rt>全部</rt></ruby>는 <ruby>증거<rt>證據</rt></ruby>하되 <ruby>예언적<rt>豫言的</rt></ruby> <ruby>증거<rt>證據</rt></ruby>로서 예수를 <ruby>증거<rt>證據</rt></ruby>하였으나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ruby>증거<rt>證據</rt></ruby>하되 <ruby>직접적<rt>直接的</rt></ruby>으로 <ruby>증거<rt>證據</rt></ruby>하였으니 <ruby>증거적<rt>證據的</rt></ruby> <ruby>입장<rt>立場</rt></ruby>을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말할 때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의 <ruby>이상<rt>以上</rt></ruby>가는 <ruby>자<rt>者</rt></ruby> 없음은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그런고로 <ruby>증거적<rt>證據的</rt></ruby> <ruby>입장<rt>立場</rt></ruby>을 두고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에 <ruby>대<rt>對</rt></ruby>하여 말할 때 <ruby>과연<rt>果然</rt></ruby>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ruby>여인<rt>女人</rt></ruby>으로난 사람<ruby>중<rt>中</rt></ruby>에는 <ruby>제일<rt>第一</rt></ruby>큰 <ruby>존재<rt>存在</rt></ruby>라는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가 <ruby>확실<rt>確實</rt></ruby>하다는 것을 <ruby>명백<rt>明白</rt></ruby> 히 알아야 한다. 그 다음은 그러然나 <ruby>천국<rt>天國</rt></ruby>에서는 <ruby>지극자<rt>至極者</rt></ruby>라도 그被보다 크大니라 하심은 무슨 <ruby>의의<rt>意義</rt></ruby>냐 하면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가 이러하다.
 
<ruby>천국<rt>天國</rt></ruby>에 간 <ruby>자<rt>者</rt></ruby>도 <ruby>여인<rt>女人</rt></ruby>으로 난 <ruby>자<rt>者</rt></ruby>들이다. 그렇다면 <ruby>여인<rt>女人</rt></ruby>이 난 사람 <ruby>중<rt>中</rt></ruby>에는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 <ruby>제일<rt>第一</rt></ruby> 크大다고 하였는데 왜 <ruby>천국<rt>天國</rt></ruby>에서도 커야 할터인데 <ruby>제일<rt>第一</rt></ruby> 작은 <ruby>자<rt>者</rt></ruby>가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가 되는가 하는 것이 <ruby>의심<rt>疑心</rt></ruby>아니될 수 없는 수수께끼의 한 <ruby>관문<rt>關門</rt></ruby>이다. 이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도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의 <ruby>범죄적<rt>犯罪的</rt></ruby> <ruby>행위<rt>行爲</rt></ruby>를 <ruby>책망<rt>責望</rt></ruby>한 <ruby>중대구절<rt>重大句節</rt></ruby>이란 그 뜻은 이러하다. <ruby>지금<rt>至今</rt></ruby>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예수를 메시아로 <ruby>증거<rt>證據</rt></ruby>하여 놓고는 <ruby>자기<rt>自己</rt></ruby>는 <ruby>자기<rt>自己</rt></ruby> 멋대로 <ruby>행<rt>行</rt></ruby>하였으니 예수에 <ruby>대<rt>對</rt></ruby>하여서 <ruby>적극<rt>積極</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가 되어 <ruby>행<rt>行</rt></ruby>하여야 할 <ruby>입장<rt>立場</rt></ruby>을 떠나서 <ruby>행동<rt>行動</rt></ruby>하였으니 큰 <ruby>범죄<rt>犯罪</rt></ruby>라 아니할 수 없다. 예수를 메시아로서 <ruby>시봉<rt>侍奉</rt></ruby>하여야 할 <ruby>중심<rt>中心</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가 <ruby>시봉<rt>侍奉</rt></ruby>하지 못하고 도리어 뜻 <ruby>파<rt>破</rt></ruby>하는 <ruby>행동<rt>行動</rt></ruby>을 하였으니 그 <ruby>자체<rt>自體</rt></ruby>에서는 <ruby>과연<rt>果然</rt></ruby> 하늘에서 작은 자天微者의 <ruby>행동력<rt>行動力</rt></ruby>이 아니라 할수 없다.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 <ruby>적극시봉<rt>積極侍奉</rt></ruby>하였으면 그는 두말할 것 없이 하늘에서는 <ruby>지극<rt>至極</rt></ruby>히 큰 <ruby>존재<rt>存在</rt></ruby>가 될터인데 <ruby>시봉<rt>侍奉</rt></ruby>치 못하니 하늘天에서 작은자微者보다도 못한 <ruby>존재<rt>存在</rt></ruby>로 되었다하는 <ruby>의미<rt>意味</rt></ruby>였다. <ruby>즉<rt>卽</rt></ruby> 천에 있는 <ruby>성도<rt>聖徒</rt></ruby>나 또 <ruby>천사<rt>天使</rt></ruby>나 어떤 <ruby>존재<rt>存在</rt></ruby>라도 예수 <ruby>대<rt>對</rt></ruby>하여서는 메시아란 <ruby>근본존재<rt>根本存在</rt></ruby>라는 것을 다 알고 <ruby>극심<rt>極心</rt></ruby>으로 <ruby>시봉<rt>侍奉</rt></ruby>하고 있는데 <ruby>시봉<rt>侍奉</rt></ruby>할 <ruby>중심존재<rt>中心存在</rt></ruby>가 <ruby>시봉<rt>侍奉</rt></ruby>하지 못하니 <ruby>시봉<rt>侍奉</rt></ruby>에 있어서는 최고작은자最微者가 되었다하는 <ruby>의미<rt>意味</rt></ruby>를 알아야 한다.
 
이 말씀은 <ruby>시봉<rt>侍奉</rt></ruby>을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말씀하여서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에게 <ruby>대<rt>對</rt></ruby>한 <ruby>범죄행위<rt>犯罪行爲</rt></ruby>를 꾸짖策음이라는 <ruby>중대<rt>重大</rt></ruby>한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를 알아야 한다. 그 다음은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 올來때부터 <ruby>지금<rt>至今</rt></ruby>까지 <ruby>천국<rt>天國</rt></ruby>은 <ruby>용역<rt>用力</rt></ruby>함으로써 <ruby>득<rt>得</rt></ruby>하나니 <ruby>용역<rt>用力</rt></ruby>하는 <ruby>자<rt>者</rt></ruby>는 빼앗奪느니라 하심의 말씀도 <ruby>역시<rt>亦是</rt></ruby>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 <ruby>대<rt>對</rt></ruby>한 <ruby>범죄지사<rt>犯罪之事</rt></ruby>를 <ruby>지적<rt>指摘</rt></ruby>함의 말씀이었다.
 
요한 올來때부터 <ruby>지금<rt>至今</rt></ruby>까지라는 말씀은 무슨 뜻의 말씀인가 하면 먼저는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 <ruby>자체<rt>自體</rt></ruby>가 뜻을 받들어서 <ruby>시봉<rt>侍奉</rt></ruby>하였다면 예수님의 <ruby>수제자<rt>首弟子</rt></ruby>는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 될바는 <ruby>정<rt>定</rt></ruby>한 하늘의 <ruby>목적<rt>目的</rt></ruby>이었는데 <ruby>용력<rt>用力</rt></ruby>하지 못하였기에 <ruby>즉<rt>卽</rt></ruby> <ruby>시봉<rt>侍奉</rt></ruby>하지 못하였기에 요한부터 <ruby>지금<rt>至今</rt></ruby>까지라는 <ruby>중<rt>中</rt></ruby>에 요한이 <ruby>선유권리<rt>先有權利</rt></ruby>를 주었든 큰 <ruby>위치<rt>位置</rt></ruby>를
 
<ruby>지시<rt>指示</rt></ruby>한바였는데 그 <ruby>위치<rt>位置</rt></ruby>를 지키지 못하니 그 <ruby>지정<rt>指定</rt></ruby>되었는 <ruby>위치<rt>位置</rt></ruby>는 <ruby>용력<rt>用力</rt></ruby>하는 다른 <ruby>제자<rt>弟子</rt></ruby>에게로 옮겨지었다는 것을 <ruby>지적<rt>指摘</rt></ruby>함이었다.
 
그런고로 <ruby>천국<rt>天國</rt></ruby>은 <ruby>용력<rt>用力</rt></ruby>하는 <ruby>자<rt>者</rt></ruby>는 빼앗奪느니라 하심이었다. <ruby>예지<rt>豫知</rt></ruby> <ruby>예정<rt>豫定</rt></ruby>은 <ruby>근본<rt>根本</rt></ruby>을 두고 하신 말이란 뜻이 <ruby>근본<rt>根本</rt></ruby>이다. 그런고로 <ruby>용력<rt>用力</rt></ruby>하는 다른 <ruby>제자<rt>弟子</rt></ruby>들한테 그 자리位를 빼앗奪으심이라는 <ruby>근본의의<rt>根本意義</rt></ruby>를 <ruby>명백<rt>明白</rt></ruby>하게 <ruby>표시<rt>表示</rt></ruby>한바를 보아도 여기에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이 <ruby>범행<rt>犯行</rt></ruby>한 <ruby>자체<rt>自體</rt></ruby>이면서 예수 앞에 큰 하늘적 <ruby>반역자<rt>反逆者</rt></ruby>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런 <ruby>존재<rt>存在</rt></ruby> <ruby>대<rt>對</rt></ruby>하여서 오늘날까지 <ruby>존시<rt>尊侍</rt></ruby>하였다는 <ruby>과거<rt>過去</rt></ruby> <ruby>신앙자<rt>信仰者</rt></ruby>의 <ruby>무지<rt>無知</rt></ruby>의 서러움을 무엇으로 <ruby>방지<rt>防止</rt></ruby>할까. <ruby>과연<rt>果然</rt></ruby> <ruby>통분<rt>痛憤</rt></ruby>한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이 <ruby>사실<rt>事實</rt></ruby>의 <ruby>행동<rt>行動</rt></ruby>으로 <ruby>인<rt>因</rt></ruby>하여 예수의 <ruby>십자가<rt>十字架</rt></ruby>의 어려움難의 <ruby>시작<rt>始作</rt></ruby>을 <ruby>재촉<rt>再促</rt></ruby>하는 <ruby>행동<rt>行動</rt></ruby>이라는 것을 밝히 알아야 한다.
 
그 다음은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은 엘리야라고 말하고 그는 <ruby>세상<rt>世上</rt></ruby>이 먹고<ruby>식구<rt>食口</rt></ruby> 마시飮지 않으니 <ruby>사귀<rt>邪鬼</rt></ruby>가 들렸다하고 나도 먹고 마시食口飮니 <ruby>세리<rt>稅吏</rt></ruby>와 <ruby>죄인<rt>罪人</rt></ruby>의 <ruby>친구<rt>親舊</rt></ruby>라하니 다만 <ruby>지혜<rt>智慧</rt></ruby>는 <ruby>행사<rt>行事</rt></ruby>로 <ruby>의<rt>義</rt></ruby>를 나타내顯느니라 하시었는데 이 말씀 <ruby>중<rt>中</rt></ruby>에는 <ruby>세상<rt>世上</rt></ruby>이 함부로 하늘뜻을 모르不知면서 <ruby>자기<rt>自己</rt></ruby> 멋대로 <ruby>정<rt>定</rt></ruby>하여 <ruby>평<rt>評</rt></ruby>한다는 것을 <ruby>지적<rt>指摘</rt></ruby>하면서 뜻을 갖고 온 <ruby>자<rt>者</rt></ruby>를 <ruby>대<rt>對</rt></ruby>하여 조금도 <ruby>응<rt>應</rt></ruby>하는 <ruby>자<rt>者</rt></ruby> 없다함을 <ruby>비유<rt>譬喩</rt></ruby>하여 아이兒孩가 <ruby>시장<rt>市場</rt></ruby>에서 앉座아 동료同類를 불러吹 말하되曰 우리我等가 너희爾等를 <ruby>향<rt>向</rt></ruby>하여 나팔을 불어도 너희爾等가 춤추舞지 않고 우리가我等이 애곡哀音하여도 너희들이 가슴胸을 치拍지 않는다는 것으로 <ruby>세상<rt>世上</rt></ruby>을 <ruby>비유<rt>譬喩</rt></ruby>하여서 <ruby>현재<rt>現在</rt></ruby> 뜻 <ruby>중심<rt>中心</rt></ruby>한 <ruby>자기<rt>自己</rt></ruby>의 <ruby>목적요구<rt>目的要求</rt></ruby>에 조금도 <ruby>응<rt>應</rt></ruby>치 않음을 <ruby>지적<rt>指摘</rt></ruby>하심이었다.
 
그러나 <ruby>지혜<rt>智慧</rt></ruby>로운 <ruby>자<rt>者</rt></ruby>만이 하나님의 뜻을 <ruby>행의<rt>行義</rt></ruby>로 나타顯낸다하심의 <ruby>경고<rt>警告</rt></ruby>를 볼 수 있다는 바를 <ruby>지금<rt>至今</rt></ruby> <ruby>교인<rt>敎人</rt></ruby>들이 아는가. 이와 같이 <ruby>초림<rt>初臨</rt></ruby>예수 앞에 <ruby>전개<rt>展開</rt></ruby>되었든 <ruby>진상<rt>眞狀</rt></ruby>이 <ruby>지금<rt>至今</rt></ruby> <ruby>재림<rt>再臨</rt></ruby>을 바라는 <ruby>세계신자<rt>世界信者</rt></ruby>들과 바리새 <ruby>교인<rt>敎人</rt></ruby>들과 <ruby>비<rt>比</rt></ruby>하여 볼때에 뜻에 <ruby>속<rt>屬</rt></ruby>한 <ruby>존재<rt>存在</rt></ruby>가 <ruby>지금<rt>至今</rt></ruby> <ruby>신도<rt>信徒</rt></ruby> <ruby>중<rt>中</rt></ruby>에 몇 <ruby>명<rt>名</rt></ruby>이나 있겠는가! 이와 같이 <ruby>근본원리<rt>根本原理</rt></ruby>들은 <ruby>말세<rt>末世</rt></ruby>가 되니 뜻 <ruby>성사시기<rt>成事時期</rt></ruby>가 오리니 <ruby>명백<rt>明白</rt></ruby>하게 되어야만이 <ruby>재림<rt>再臨</rt></ruby>은 오는 바가 아니겠는가. 이 <ruby>근본<rt>根本</rt></ruby>의 뜻 알고 <ruby>시봉자<rt>侍奉者</rt></ruby>는 하늘에서 <ruby>제일<rt>第一</rt></ruby>큰 <ruby>자<rt>者</rt></ruby>라는 것이 끝날도 <ruby>부여<rt>賦與</rt></ruby>하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이와같은 <ruby>환경<rt>環境</rt></ruby>을 본 예수 앞에는 <ruby>광야<rt>曠野</rt></ruby>라는 서러움의 <ruby>노정<rt>路程</rt></ruby>을 <ruby>전개<rt>展開</rt></ruby>시킨 <ruby>근본원리<rt>根本原理</rt></ruby>라고 위에 <ruby>논<rt>論</rt></ruby>한바를 <ruby>이해<rt>理解</rt></ruby>할 줄 안다. 이런 <ruby>근본<rt>根本</rt></ruby>을 밝히지 않으면 <ruby>적극반대<rt>積極反對</rt></ruby>할 <ruby>자<rt>者</rt></ruby>들은 <ruby>현교계<rt>現敎界</rt></ruby> <ruby>신앙자<rt>信仰者</rt></ruby>들일 것이다. 그러나 뜻과 <ruby>근본<rt>根本</rt></ruby>을 알적에 큰 두려운 <ruby>문제<rt>問題</rt></ruby>라 아니할 수없다.


<ruby>이상<rt>以上</rt></ruby> <ruby>논<rt>論</rt></ruby>한바 <ruby>근본문제<rt>根本問題</rt></ruby>는 <ruby>세례<rt>洗禮</rt></ruby>요한 <ruby>자체<rt>自體</rt></ruby>는 하늘적으로 <ruby>예정<rt>豫定</rt></ruby>적 <ruby>존재<rt>存在</rt></ruby>였으나 그 <ruby>사명<rt>使命</rt></ruby>을 <ruby>시봉<rt>侍奉</rt></ruby> 못하게 될 때에 하늘은 뜻 <ruby>시봉<rt>侍奉</rt></ruby>의 <ruby>가치<rt>價値</rt></ruby>를 알고 <ruby>시봉<rt>侍奉</rt></ruby>하는 <ruby>자<rt>者</rt></ruby>가 하늘적 <ruby>예정적<rt>豫定的</rt></ruby> <ruby>목적<rt>目的</rt></ruby>을 <ruby>계승<rt>繼承</rt></ruby>하여 <ruby>완성<rt>完成</rt></ruby>하는 바로 하나님은 뜻의 <ruby>섭리<rt>攝理</rt></ruby>를 돌리어 <ruby>역사<rt>役事</rt></ruby>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ruby>예지<rt>豫知</rt></ruby> <ruby>예정적<rt>豫定的</rt></ruby>이라는 것은 뜻을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말씀한 바이지


제2 편 제1 장 왜 타락케 하고 섭리하는가.
뜻 <ruby>대<rt>對</rt></ruby>하는 사람을 <ruby>대<rt>對</rt></ruby>하여서 말씀한바아니다. 이것 보아도 <ruby>현실<rt>現實</rt></ruby> <ruby>신앙계<rt>信仰界</rt></ruby>의 <ruby>예정론<rt>豫定論</rt></ruby> <ruby>등<rt>等</rt></ruby>은 그 <ruby>문제외<rt>問題外</rt></ruby> <ruby>위치<rt>位置</rt></ruby>것으로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받은 피조물은 어떤 존재나 물론하고 창조원리궤도를 가지고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있는 곳에 원리기대를 갖고 있다. 원리가 없는 곳에 존재하는 창조물이 없다. 창조주는 원리로서 완성 못하는 존재라는 것은 우주에 존재시키지 않는다.
==== <ruby>제<rt>第</rt></ruby>4 <ruby>절<rt>節</rt></ruby> <ruby>복귀섭리<rt>復歸攝理</rt></ruby> <ruby>표시<rt>表示</rt></ruby>로 예수 <ruby>조상<rt>祖上</rt></ruby>의 <ruby>혈통<rt>血統</rt></ruby> ====
그러나 무슨 존재나 원리기준을 상실한 곳은 자연히 파괴되는 것이다. 그것은 원리완성세계에 존재할 수 없음으로 무로된다는 것을 예고하는 바이다. 그러나 원리기준을 지으신 창조주는 질서적 원리단계를 두고 지으셨다. 어떤 피조물이든지 존재하는 완성체로 되기 위하여는 원리기준완성을 위하여 나가는데 소생과정을 통하여 장성과정으로 또 장성과정을 지나서 완성이란 궤도적 과정을 통과하여서 완전 존재물로 되게끔 지은 피조물 원리궤도가 있는 바이다.
이 궤도를 지나 원리기준기대를 넘어선 존재만이 완성존재물로 하나님은 지으신 바이다. 이 원리완성한 존재들은 사람에게 부여하신 바이다. 그런고로 모든 만물은 전부 완성위를 넘어선 격으로 사람을 대하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사람은 피조물이 갖고 있는 원리궤도를 원만히 통과못하여 완성원리기준을 못 넘어선 바다. 그러기에 사람은 만물주인공 격위를 상실한바다. 그러니 하나님이 계시는 이상 또 완전한 하나님이 지으신 이상 그 원리를 세워놓은 원리적 본래의 기준도 완전한 것으로 성사를 보아야만 하나님이 완전하다는 결과를 보는 바다. 하나님이 완전하게 지은 원리였던 사람 창조원리기준은 타락으로 그 위를 못한 바니 사람은 원리 완성위에 있는 다른他만물을 대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지었다. 그러니 사람으로 인하여서 만물도 미완전위에 머문 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의 타락은 피조물 전체를 타락의 위에 두게 되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창조는 미완전창조라는 결과를 보게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지은 것을 탄식한 바이다.(창6/6)
하나님은 완성원리기준을 넘어설 수 있는 존재를 대하여서 직접주관하기 위한바가 창조적 중심목적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완성 존재물만을 주관할 수 있는 바이다. 완성치 못하였을 때에는 원리를 두어 그 원리로 주관하게 지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하나님은 원리 미완성시에 처하는 존재는 간접적 주관으로 대하는 바다. 그것은 언제나 원리 기준을 무시 못하는 바이므로 이 원리완성하여야만 하나님이 지은 원리도 완전한 것으로 보아야만 하나님이 완전하다는 것이 성립을 본다.
만일 완전 원리로서 세운 존재물이 미완전한 위에 있으면 미완전한 하나님의 입장이 된다. 그러니 하나님은 미완전한 분으로 되는 양이니 완전 완성위를 갖게 지은 우주 대하여서 하나님의 주관행사를 못하고 간접적 주관 행사위에 계시는 바이다.
그것은 타락된 원리는 미완성위니 직접주관 못한다. 본래 하나님은 원리완성격자만을 주관하게끔 기준을 세운바가 창조적 중심의의였기 때문에 언제나 그 기준을 찾아 세우고자 하는바가 섭리적 목적으로 된다. 그런고로 사람의 이상은 무엇인가 하면 창조원리기준을 넘어서 하나님의 직접주관을 받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이 주관권내에 들어가면 하나님은 사람을 마음대로 주관할 수 있는 바이다. 지금 타락된 사람들을 마음대로 못하는 것은 원리노정을 못 통과한 과정상에 처하는 격위에 있기에 주관 못하는 바다. 즉 피조물에 부여하여 주었든 원리로서 주관을 당하여 완성위를 나오는 과정에 처하는 양이므로 하나님은 대할 수 없는 바다. 즉 원리결과주관권내이다. 이렇기에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지어도 주관못한다. 만일 주관하면 창조원리를 무시하는 격이니 주관 못한다. 그러니 그 기준을 사람에게 대하여 찾아 올라오기를 요구하는 바다.
이런 과정에 돌고 돈 것이 육천년 역사이다. 하나님이 사람 대하여 신앙을 요구하는 바는 타락되었으니 원리존재격을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하나되라는 것은 다시금 창조한 것과 같은 타락전 창조기준을 복귀하고자하여서 요구하는 바이다. 즉 재창조 완성위를 잡고자 함이다.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런 노정을 밟게 하였는가 하면 그도 사랑으로 지으셨든 창조원리기준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의 타락행동을 알면서 어찌 타락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가 하면
① 완전 원리적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즉 다음 도표次圖로 보아 창조원리완성기준선상에 주관하는 것이 본원리인데 원리결과주관권내에 있는 X 타락점행동을 간섭하면 본 창조원리를 무시하는 것이 됨으로 주관못하였다. 완전한 하나님이 지은 원리도 완전원리적 권위를 세워야 하나님적 위신을 세울 수 있는 바이므로 X 타락점 행동을 알면서 주관치 못하였다.


<ruby>인간<rt>人間</rt></ruby>은 해와의 <ruby>실수<rt>失手</rt></ruby>와 아담의 <ruby>실수<rt>失手</rt></ruby>는 <ruby>전인류<rt>全人類</rt></ruby>로 하여금 <ruby>사망<rt>死亡</rt></ruby>에 <ruby>지도<rt>指導</rt></ruby>받아 하나님과는 먼 <ruby>거리<rt>距離</rt></ruby>에서 <ruby>반대방<rt>反對方</rt></ruby>으로 나아가는 것을 다시 찾고자 하시어서 <ruby>역사<rt>歷史</rt></ruby>를 <ruby>통<rt>通</rt></ruby>한 <ruby>섭리노정<rt>攝理路程</rt></ruby>에 <ruby>전폭적<rt>全幅的</rt></ruby> 뜻 <ruby>표시<rt>表示</rt></ruby>로 <ruby>전<rt>傳</rt></ruby>하여 왔음을 <ruby>이상<rt>以上</rt></ruby> <ruby>논<rt>論</rt></ruby>한바에 <ruby>의<rt>依</rt></ruby>하여 잘 알줄 안다.


                                하나님 직접주관권내
그런데 <ruby>특<rt>特</rt></ruby>히 예수의 <ruby>직계<rt>直系</rt></ruby>의 <ruby>혈통<rt>血統</rt></ruby>을 가진 <ruby>역사적<rt>歷史的</rt></ruby> <ruby>조상<rt>祖上</rt></ruby>들의 <ruby>전부<rt>全部</rt></ruby>를 살펴볼 적에 우리가 <ruby>근본원리<rt>根本原理</rt></ruby>를 알지 못할때에는 한 <ruby>의심<rt>疑心</rt></ruby>되는 <ruby>혈통<rt>血統</rt></ruby>을 가진바를 누구나 다 <ruby>절감<rt>切感</rt></ruby>하여왔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 되어 왔다. 예수의 <ruby>조상<rt>祖上</rt></ruby>의 혈통은 <ruby>전부<rt>全部</rt></ruby>를 <ruby>섭리<rt>攝理</rt></ruby>하시는 하나님 뜻을 <ruby>중심<rt>中心</rt></ruby>하고 <ruby>조상<rt>祖上</rt></ruby>의 하나님을 <ruby>대<rt>對</rt></ruby>하여 왔든 바이다. <ruby>역대<rt>歷代</rt></ruby>의 <ruby>조상<rt>祖上</rt></ruby>의 <ruby>전표시적<rt>全表示的</rt></ruby> <ruby>중심<rt>中心</rt></ruby>되는 일은 <ruby>후일<rt>後日</rt></ruby> 예수의 <ruby>역사적<rt>歷史的</rt></ruby> <ruby>사실<rt>事實</rt></ruby>을 <ruby>전부<rt>全部</rt></ruby> <ruby>완성<rt>完成</rt></ruby>할 수 있는 <ruby>원리<rt>原理</rt></ruby>대로 <ruby>표시<rt>表示</rt></ruby>하면서 예수까지 <ruby>인도<rt>引導</rt></ruby>하여 <ruby>경유<rt>經由</rt></ruby>하심이었다는 바를 알아야 한다. <ruby>즉<rt>卽</rt></ruby> 예수와서 <ruby>타락<rt>墮落</rt></ruby>한 <ruby>전인류<rt>全人類</rt></ruby>를 <ruby>근본<rt>根本</rt></ruby>대로 <ruby>회복<rt>回復</rt></ruby>하여야 하는 <ruby>존재<rt>存在</rt></ruby>가 되려니 그 <ruby>역사<rt>歷史</rt></ruby>에 <ruby>대<rt>對</rt></ruby>하여서 <ruby>근본<rt>根本</rt></ruby> 하나님의 뜻에 대한 <ruby>표시적<rt>表示的</rt></ruby> <ruby>계통<rt>系統</rt></ruby>을 <ruby>취<rt>取</rt></ruby>하여 왔든 바이다.
    창조원리완성기준선          완성                       (대상권내)
                              C 완성기준선                  완성(성약)


              원
예수 <ruby>조상<rt>祖上</rt></ruby>에 보면 <ruby>세상<rt>世上</rt></ruby> 사람보기에는 <ruby>불결<rt>不潔</rt></ruby>한 <ruby>혈통<rt>血統</rt></ruby>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 <ruby>혈대<rt>血代</rt></ruby>는 <ruby>순수<rt>純粹</rt></ruby>한 <ruby>혈계<rt>血系</rt></ruby>가 아니고 여러 <ruby>여인<rt>女人</rt></ruby>들 <ruby>대표적<rt>代表的</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들이 나타나고 있다. <ruby>즉<rt>卽</rt></ruby> 다마, 라합, 룻, 밧세바 <ruby>등<rt>等</rt></ruby>의 <ruby>여성<rt>女性</rt></ruby>들이다. 이와같은 <ruby>혈계<rt>血系</rt></ruby>를 가진바는 <ruby>본래<rt>本來</rt></ruby> <ruby>인생조상<rt>人生祖上</rt></ruby> 아담 해와들이 더럽힌 <ruby>자<rt>者</rt></ruby>의 <ruby>행례<rt>行例</rt></ruby>로서 하나님의 <ruby>직계<rt>直系</rt></ruby>를 떠나서 사탄과 <ruby>합<rt>合</rt></ruby>하여 <ruby>사망<rt>死亡</rt></ruby>의 <ruby>혈계<rt>血系</rt></ruby>를 받은바를 다시금 <ruby>복귀<rt>復歸</rt></ruby>하여 <ruby>근본<rt>根本</rt></ruby>에 옮겨 놓고자하니 사탄한테 빼앗긴 <ruby>사실적<rt>事實的</rt></ruby> <ruby>예<rt>例</rt></ruby>와 같은 <ruby>반대행동<rt>反對行動</rt></ruby>으로 하나님께 <ruby>속<rt>屬</rt></ruby>하게 하여서 사탄의 <ruby>근본<rt>根本</rt></ruby> 더럽힌 <ruby>원리<rt>原理</rt></ruby>를 찾아 세우고자 함이 <ruby>중대요소<rt>重大要素</rt></ruby>이다. 그런고로 이런 더럽힌 <ruby>여성<rt>女性</rt></ruby>들과 같은 <ruby>자<rt>者</rt></ruby>들이 <ruby>행동<rt>行動</rt></ruby>의 뜻 <ruby>성사<rt>成事</rt></ruby>할 수 있는 하나님의 <ruby>근본<rt>根本</rt></ruby>, <ruby>순종<rt>順從</rt></ruby>, <ruby>시봉<rt>侍奉</rt></ruby>, <ruby>신종<rt>信從</rt></ruby>할 수 있는 그때야만이 뜻 <ruby>성사<rt>成事</rt></ruby>된다는 <ruby>원리성사<rt>原理成事</rt></ruby>를 <ruby>시작<rt>始作</rt></ruby>할 수 있는 바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런고로 예수와서 <ruby>복귀<rt>復歸</rt></ruby>하여야 할 <ruby>근본<rt>根本</rt></ruby> 뜻들을 <ruby>전적<rt>全的</rt></ruby>으로 <ruby>표시적<rt>表示的</rt></ruby> <ruby>순<rt>順</rt></ruby>, <ruby>신<rt>信</rt></ruby>, <ruby>시종<rt>侍從</rt></ruby>의 나타나는 곳에서만이 뜻이 <ruby>시작<rt>始作</rt></ruby>한다는 <ruby>표시<rt>表示</rt></ruby>로서 <ruby>역사<rt>歷史</rt></ruby>의 <ruby>조상<rt>祖上</rt></ruby>의 <ruby>행동<rt>行動</rt></ruby>의 <ruby>성립<rt>成立</rt></ruby>의 <ruby>표시<rt>表示</rt></ruby>가 <ruby>합의<rt>合意</rt></ruby>를 보아 예수의 <ruby>근본<rt>根本</rt></ruby>되는 <ruby>조상<rt>祖上</rt></ruby> <ruby>자격자<rt>資格者</rt></ruby>로서 <ruby>부여<rt>賦與</rt></ruby>하신 바이었다. 야곱은 에서를 두고 <ruby>장자<rt>長子</rt></ruby>의 <ruby>기<rt>基</rt></ruby>
              리        창 X B 장성    Y        육 복 G  장성(신약)
              결        조                        천 귀
              과        원                        년 원
              주        리    A 소생                  리 F  소생(구약)
              관        궤                            궤
              권        도                            도
              내                          Z
                        원리기대          파괴권내
                                          무원리권내


                                  지옥  D                  E
<ruby>업<rt>業</rt></ruby>을 빼앗아서 하나님의 <ruby>기업<rt>基業</rt></ruby>을 <ruby>성사<rt>成事</rt></ruby>할 <ruby>표시적<rt>表示的</rt></ruby> <ruby>사실<rt>事實</rt></ruby>의 <ruby>성립<rt>成立</rt></ruby>을 보았으나 이제는 다음 번째도 선 <ruby>자<rt>者</rt></ruby>가 먼저 <ruby>자<rt>子</rt></ruby>에로써 <ruby>본<rt>本</rt></ruby> <ruby>계대<rt>系代</rt></ruby>를 <ruby>성사<rt>成事</rt></ruby>할 <ruby>시작<rt>始作</rt></ruby>은 <ruby>즉<rt>卽</rt></ruby> 유다부터였다. 유다에게 있어서는 뜻 <ruby>성사적<rt>成事的</rt></ruby> <ruby>사실<rt>事實</rt></ruby>의 <ruby>표시<rt>表示</rt></ruby>와 <ruby>동시<rt>同時</rt></ruby>에 뜻 <ruby>실천<rt>實踐</rt></ruby> <ruby>성사출발<rt>成事出發</rt></ruby>을 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런고로 유다 <ruby>지파<rt>支派</rt></ruby>를 <ruby>통<rt>通</rt></ruby>하여 하나님의 뜻 <ruby>성사<rt>成事</rt></ruby>할 것을 미리 말하였든 바이나 뜻 <ruby>성사<rt>成事</rt></ruby>의 첫 <ruby>계대자<rt>繼代者</rt></ruby>로서 베레스와 세라를 보여 주심이었다. 이 유다부터 하나님은 뜻의 <ruby>기본<rt>基本</rt></ruby> <ruby>시작<rt>始作</rt></ruby>을 보는 것이었기에 다말에게 한 <ruby>쌍태<rt>雙胎</rt></ruby>를 주어 베레스와 세라 <ruby>역시<rt>亦是</rt></ruby> 야곱과 같이 <ruby>복중<rt>腹中</rt></ruby>에서 싸워서 그 뜻의 <ruby>기본<rt>基本</rt></ruby> <ruby>확립<rt>確立</rt></ruby>에 한 <ruby>표시<rt>表示</rt></ruby>를 <ruby>성사<rt>成事</rt></ruby>함이라는 큰 <ruby>의의<rt>意義</rt></ruby>가 있는 바이었다.
                                            공중권세


그러면 다말이 한 <ruby>행동<rt>行動</rt></ruby>으로부터 알아보자. 다말은 本來 하나님 뜻으로 <ruby>허락<rt>許諾</rt></ruby>한 <ruby>계대<rt>繼代</rt></ruby>를 <ruby>계승<rt>繼承</rt></ruby>하여야할 <ruby>입장<rt>立場</rt></ruby>이었는데 그 <ruby>남편<rt>男便</rt></ruby> 죽고 <ruby>혈대<rt>血代</rt></ruby>를 <ruby>계대<rt>繼代</rt></ruby>하여야 <ruby>자기<rt>自己</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에 대하여 많은 <ruby>고심<rt>苦心</rt></ruby>한 <ruby>존재<rt>存在</rt></ruby>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 하려는 <ruby>혈대<rt>血代</rt></ruby>를 <ruby>계승<rt>繼承</rt></ruby>하기 위하여 누구보다도 많은 <ruby>고통<rt>苦痛</rt></ruby>과 함께 그其 <ruby>혈대<rt>血代</rt></ruby>의 <ruby>가치성<rt>價値性</rt></ruby>을 안 <ruby>여성<rt>女性</rt></ruby>이었다. 그리하여 <ruby>자신<rt>自身</rt></ruby> 뜻을 <ruby>성사<rt>成事</rt></ruby>하는 <ruby>동시<rt>同時</rt></ruby>에 하나님의 뜻을 <ruby>계승<rt>繼承</rt></ruby>하기 위하여 부끄러움도 <ruby>사망<rt>死亡</rt></ruby>도 <ruby>제이차적<rt>第二次的</rt></ruby> <ruby>문제시<rt>問題視</rt></ruby>하고 <ruby>목적달성<rt>目的達成</rt></ruby>의 <ruby>행동<rt>行動</rt></ruby>으로 나간 바이었다.


② 사람을 만물의 주인격 완성을 위하여
그때 이런 <ruby>행동<rt>行動</rt></ruby>이라면 <ruby>용서<rt>容恕</rt></ruby>없는 죽음의 길이 다말 앞에 <ruby>시작<rt>始作</rt></ruby>되는 바도 알고 있지만 그런 <ruby>문제<rt>問題</rt></ruby>를 <ruby>문제시<rt>問題視</rt></ruby> 보다는 <ruby>차후<rt>此後</rt></ruby>의 <ruby>문제<rt>問題</rt></ruby>로 하고 아무리 하여도 유대의 <ruby>자손<rt>子孫</rt></ruby>을 <ruby>통<rt>通</rt></ruby>하여서 <ruby>계대<rt>繼代</rt></ruby>를 못할 것을 아는 다말은 <ruby>부득이<rt>不得已</rt></ruby> <ruby>자기<rt>自己</rt></ruby>의 <ruby>시부<rt>媤父</rt></ruby>를 <ruby>통<rt>通</rt></ruby>하여서 <ruby>계대<rt>繼代</rt></ruby>를 잇지 않으면 안될 바를 <ruby>각오<rt>覺悟</rt></ruby>하고 그其 <ruby>노중<rt>路中</rt></ruby>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때 마침 <ruby>시부<rt>媤父</rt></ruby>가 <ruby>양모<rt>羊毛</rt></ruby>를 깎으剪려 딤나에 온다는 말을 듣고 <ruby>과부<rt>寡婦</rt></ruby>의 <ruby>의복<rt>衣服</rt></ruby>을 입고 너울을 쓰蒙고 딤나 <ruby>노측<rt>路側</rt></ruby>에 앉坐으매 유다는 <ruby>창녀<rt>娼女</rt></ruby>로 여겨 <ruby>자부<rt>子婦</rt></ruby>인줄 모르고 나我와 <ruby>상관<rt>相關</rt></ruby>함이 어찜이뇨하니 <ruby>허<rt>許</rt></ruby>락하여 <ruby>동침<rt>同寢</rt></ruby>하니라. 그리하여 <ruby>잉태<rt>孕胎</rt></ruby>된 것이 베레스와 세라였었다.


사람 외 피조물은 창조원리궤도를 전부지나 완성기준점 C점을 넘어서 완성 위에 처하는데 사람도 주인되려면 원리적 면에서 만물 통과한 창조원리궤도를 더 원만히 통과치 않으면 아니될 공동원리궤도를 갖고 있는 바인데 만물은 완성위를 넘고 있는데 사람만이 완성위를 못넘은 X 타락점상에서 타락행동을 하게 되었다.
이런 <ruby>비원리<rt>非原理</rt></ruby>인 <ruby>행사<rt>行事</rt></ruby>가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ruby>시작<rt>始作</rt></ruby>되었다. <ruby><rt>卽</rt></ruby> 다말은 <ruby>비원리<rt>非原理</rt></ruby>로 <ruby>계대<rt>繼代</rt></ruby>를 잇는 <ruby>존재<rt>存在</rt></ruby>가 되었다. 이 다말의 <ruby>행동<rt>行動</rt></ruby>은 <ruby>즉<rt>卽</rt></ruby> 무엇을 <ruby>표시<rt>表示</rt></ruby>하는 바냐 하면 해와가 사탄한테 <ruby>정조<rt>貞操</rt></ruby>을 빼앗겨서 <ruby>비원리적<rt>非原理的</rt></ruby> <ruby>계대<rt>繼代</rt></ruby>를 세운자가 되었으니 <ruby>타락<rt>墮落</rt></ruby>을 <ruby>시작<rt>始作</rt></ruby>케 하였는데 그와 <ruby>반대<rt>反對</rt></ruby>로 다말은 뜻 <ruby>성사<rt>成事</rt></ruby>하기 위한 하늘 <ruby>편<rt>便</rt></ruby>쪽에서 <ruby>계대<rt>繼代</rt></ruby>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ruby>근본<rt>根本</rt></ruby> 뜻인 한 해와가 잃었든 <ruby>존재<rt>存在</rt></ruby>로 <ruby>후일<rt>後日</rt></ruby>에 나타나서 다말과 같이 <ruby>행동<rt>行動</rt></ruby>하는 것과 <ruby>동일<rt>同一</rt></ruby>한 <ruby>사실<rt>事實</rt></ruby>이 뜻 <ruby>노중<rt>路中</rt></ruby>에 있음을 <ruby>표시<rt>表示</rt></ruby>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주관하면 창조원리기준을 못간 존재이므로 공동원리궤도를 못 통과한 존재격으로 되는 바이니 만물의 주인격에 나설 수 없게 되는 바이므로 주관못하였다. 만일 주관한다면 사람이 하나님 주관이 최고의 소망이므로 원리완성 궤도를 남겨두고 하나님의 주관만을 요구하게 됨으로 원리완성격에 사람이 나설 수 없는 바이므로 주관 못한다. 또 사람은 본래부터 사탄 보담 높은 존재위에 처하는 존재이므로 사탄 유인한다고 하여서 사람다려 사탄을 삼가라 하면 사람은 벌써 사탄보담 못하다는 격으로 되는 바니 간섭할 수 없었다.


③ 원리 창조주는 분이라는 입장을 세우기 위하여
그런고로 <ruby>타락<rt>墮落</rt></ruby>된 <ruby>세상<rt>世上</rt></ruby>에 <ruby>여성<rt>女性</rt></ruby>이 하나님의 <ruby>근본<rt>根本</rt></ruby>뜻 <ruby>성사<rt>成事</rt></ruby>할 수 있는 한 <ruby>여성<rt>女性</rt></ruby>다말과 같이 <ruby>비원리적<rt>非原理的</rt></ruby>과 같은 <ruby>양<rt>樣</rt></ruby>으로 사탄 <ruby>세상<rt>世上</rt></ruby> <ruby>상대<rt>相對</rt></ruby>를 <ruby>대<rt>對</rt></ruby>하지 않고 하늘 <ruby>상대자<rt>相對者</rt></ruby>로 <ruby>계대<rt>繼代</rt></ruby>하여야 한다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의 <ruby>내포<rt>內包</rt></ruby>되어 있는
하나님은 피조세계의 주인공임으로 피조물 있는 곳에는 창조원리를 갖고 있는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원리와 존재물 계신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원리주인이다. 원리없는 존재물이란 없는 바면서 있다하여도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는 바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짓지 않은 원리나 짓지 않은 존재행동이나 대할 수도 없는 바이다. 그런데 에덴 동산에 아담 해와의 X 타락점 행동을 하나님은 알지라도 그런 원리는 자신이 짓지 않은 바이니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다. 행동을 사실적 존재와 같이 원리 있는 곳 대하는 하나님이 대하여 준다면 그其행동은 벌써 원리적 격에 선 양으로 되는 격을 취하게 되는 바이다. 즉 타락행동 그 스스로가 원리를 갖고 존재격을 취하여진 양으로 되니 이런 원리없는 세계에 원리적 존재를 지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서므로 사탄도 제2 창조주격을 취하는 바이므로 하나님은 타락행동을 대할 수 없는 바이다. 즉 창조주는 언제나 하나님 분이라는 원리를 바라서 타락행동을 간섭치 못하였다.
  이상이 타락을 지켜보신 원인인 바다. 타락세계가 시작하였으니 무원리형을 취하여서 X, C 로 향상할 존재적 인간은 원리 없는 창조전 무원리권내를 향하여 X 타락점으로부터 Y, D까지 타락되었다. 그리하여 사탄은 반원리를 시작한 주인으로써 반원리 인간을 취하여 사망세계 지옥 권내로 주관을 시작하였다. 본래는 사람이 반원리이면 파괴가 없無는 것으로 되어야 할 것인데 지옥에 가서 있는 바는 사람은 창조기준이 영원을 기준하여 지었던 것이었다. 그런고로 지옥이란 파괴된 무원리세계를 말한다.
  사탄 대하여 공중권세 잡은 자라고 하는 바는 무원리세계권내에 처하는 존재이므로 그렇게 말한다. 지금 사람하나가 전부의 원리를 파함으로 사망되니 원리완성위에 있는 방법도 파한듯이 간접적 위에 처하는 격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타락함으로 창조세계는 창조하기 전 세계와 같은 가치없는 피조세계로 되었다.
그러면 그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 섭리의 시작인 것이다. 그것이 즉 사람을 다시금 창조하여 놓은 격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대하여 찾기 위한 것이 섭리목적인 것이다. 사람이 X 타락점으로 Y, D까지 왔으니 그것은 결과로 보면 하나님이 사람 창조할 때에 말씀言으로 창조한 말씀言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반원리 X,Y,Z, 선은 말씀言을 파한 선이니 말씀言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말씀言을 찾아 원리를 찾아서 본 말씀言 원리완성인을 보고자하니 하나님은 말씀言 없는 파괴권내인 인간세계에 대하여서 말씀言을 세우기 위한 것이 섭리성사를 위한 신앙의 목적이며 이 신앙의 결과는 원리완성인을 회복하고자하는 목적으로 되어 지금까지 하나님은 사람 대하여 말씀言을 세워서 우리 사망인생을 대하여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E, F, G, H 복귀궤도선은 잃어버린 창조원리완성기준은 본 완성인 아담 해와를 찾아놓기 위한 것이 최고목적인 것이다. 그런고로 복귀궤도를 보면 육천년간이란 사람하나 찾기 위한 목적으로 된다. 즉 타락 침범을 받지 않은 아담 해와가 그 자녀를 찾기 위한 것이다. 이 기대를 잡으려니 하나님은 타락하였지만 타락하지 않은 결과적 목적을 보고자 함이다. 그런고로 지금 신령한 사람들은 에덴 복귀를 많이 말하는 바는 기본기준원리완성하라는 예고적 증거이다.
그리하여 완성한 아담과 완성한 해와를 찾아서 완성한 자녀들로 찾기 위하려니 구약시대 신약시대 성약시대로서 소생, 장성, 완성으로 한 원리기준완성인 아담 해와와 그 자녀를 택하기 위한바가 섭리역사이다. 그런고로 지금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인간은 완성한 원리적 부모를 가지지 못한 것이다. 즉 타락권을 지나서 완성한 부모를 대할 수 있는 완성자녀격에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 완성 자녀격을 이루기 위한 것이 성서에 말씀言을 중심한 신약신앙의 본 뜻意인 것이다.
지금 예수는 누구신고하니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아버지가 예수인 것이다. 즉 완성 아담격 존재가 예수인 것이다. 이 완성 아버지격자되는 예수는 어머님을 찾아 인류의 기준근본원리완성을 잡기 위한 잔치가 어린양잔치라한다. 그리하여 완성원리부모를 가지지 못한 인류가 그 부모를 지상에서 모시侍는 시대가 지상천국시대의 완성 성약시대인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은 완성적 부모를 통해야 하므로 하늘이나 땅이나 전부가 재림을 고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모를 찾는 자녀로서 천국생활이 처음으로 시작하여 낙원생활을 끝마치는 것이다.
우리 지상은 완성부모를 모侍시고 생활하면 낙원을 통하지 않고 직접천국이란 완전완성복귀세계로서 시작을 보는 것이다. 이 목적을 바라는 우리에게는 육천년간의 모든 실수를 취소하며 사탄까지 굴복시키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하는 것이다.


<ruby>표시적<rt>表示的</rt></ruby> 존재 <ruby>즉<rt>卽</rt></ruby> 다말이었다. 그런고로 다말과 같이 사탄 <ruby>세상<rt>世上</rt></ruby> <ruby>여인<rt>女人</rt></ruby>이 하늘 <ruby>남편<rt>男便</rt></ruby> 맞았어야할 <ruby>근본<rt>根本</rt></ruby>한 해와가 나타나서 <ruby>신부단장<rt>新婦端裝</rt></ruby>하여 <ruby>세상<rt>世上</rt></ruby> 보기에 <ruby>비원리양<rt>非原理樣</rt></ruby>으로 <ruby>생명<rt>生命</rt></ruby>을 아끼지 않고 뜻 <ruby>계승<rt>繼承</rt></ruby>을 찾아 <ruby>준비<rt>準備</rt></ruby>하는 <ruby>여성<rt>女性</rt></ruby>이 있어야 할 <ruby>후일<rt>後日</rt></ruby>의 <ruby>목적<rt>目的</rt></ruby>이니 이 다말은 그 <ruby>실체<rt>實體</rt></ruby>를 <ruby>표징<rt>表徵</rt></ruby>하는 한 <ruby>존재<rt>存在</rt></ruby>로 됨에 이런 다말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ruby>혈통적<rt>血統的</rt></ruby> <ruby>계대<rt>繼代</rt></ruby> 잇는 <ruby>제일<rt>第一</rt></ruby> 조상이 됨이다. 예수와서 이와 같은 한 해와를 찾아 하나님의 뜻을 <ruby>성사<rt>成事</rt></ruby>할 <ruby>암시적<rt>暗示的</rt></ruby> 숨은 <ruby>표시<rt>表示</rt></ruby>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교정 및 해설, 편집자 주
다말과 같이 해와는 아버지품에 들어가기 <ruby>위<rt>爲</rt></ruby>한 <ruby>노력<rt>努力</rt></ruby>이 다말 <ruby>모양<rt>貌樣</rt></ruby>으로 <ruby>세상<rt>世上</rt></ruby>에서 하늘로 옮겨지는 한 <ruby>행로<rt>行路</rt></ruby>가 있다함도 <ruby>표시<rt>表示</rt></ruby>함이다. 유다는 하나님의 <ruby>대상적<rt>對象的</rt></ruby>으로 <ruby>표시<rt>表示</rt></ruby>된 바고 다말은 다시 찾아져야할 한 해와를 <ruby>표시<rt>表示</rt></ruby>함이니 그 <ruby>표시<rt>表示</rt></ruby>가 <ruby>즉<rt>卽</rt></ruby> 예수의 뜻 <ruby>중심<rt>中心</rt></ruby>이니 예수의 <ruby>조상<rt>祖上</rt></ruby>의 <ruby>계대<rt>繼代</rt></ruby>로 <ruby>원리상<rt>原理想</rt></ruby>으로 <ruby>허여<rt>許與</rt></ruby>되는 뜻으로 되는 바이다. <ruby>남편<rt>男便</rt></ruby>되어야 할 <ruby>존재<rt>存在</rt></ruby>를 두어두고 <ruby>시부<rt>媤父</rt></ruby>의 품으로 들어가야 하나님이 사탄한테 다시 빼앗는 <ruby>양식<rt>樣式</rt></ruby>을 <ruby>실성<rt>實成</rt></ruby>하여서 <ruby>근본복귀<rt>根本復歸</rt></ruby>를 <ruby>성사<rt>成事</rt></ruby>할 수 있겠으니 이런 <ruby>표시<rt>表示</rt></ruby>로 됨이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다.
사자성어처럼 4글자이상 붙어 있는 한문을 따로 떼어서 적는 작업을 기회 있으면 해야겠다.
여기에 적힌 페이지 숫자는 글자의 크기나 줄간격에 의해 다소 변경된다.
장성 => 성장으로 바꿔야겠다.
참고: 아래첨자는 원문에 없었던 것을 이해를 돕기 위해 첨가함을 표시한 것이다. 아래첨자의 한자는 원문의 한자를 그대로 살려서 적음을 표시한 것이기 때문에 첨자의 앞부분은 대부분 원문에 없는 내용을 한글로 바꾸어서 추가한 것임을 표시한 것이다. (예를 들면 땅地) 땅은 원문에 없었던 것을 한글로 풀이한 내용이고 地는 원문에 있는 한자이다.
1페이지의 양이 각각 다른 것은 가급적 원문에 의거하여 인용을 정확히 하기 위한 것으로 글자체나 글자의 크기를 바꾸면 그림이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가로되 => 가로되 (p. 18)
이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의 <ruby>쌍태<rt>雙胎</rt></ruby>는 <ruby>본래<rt>本來</rt></ruby> 하나되어야 <ruby>존재<rt>存在</rt></ruby>가 둘이 되었다는 것을 <ruby>표시<rt>表示</rt></ruby>함이다. 사탄에게 <ruby>속<rt>屬</rt></ruby>한 <ruby>자<rt>者</rt></ruby>와 하나님께 <ruby>속<rt>屬</rt></ruby>한 <ruby>자<rt>者</rt></ruby>가 있다함의 <ruby>표시<rt>表示</rt></ruby>이다. <ruby>타락<rt>墮落</rt></ruby>이 없었으면 그냥 처음 태어난 <ruby>자<rt>者</rt></ruby>가 <ruby>장자<rt>長子</rt></ruby>가 될터인데 서로 <ruby>장자<rt>長子</rt></ruby>되겠다고 싸운 것은 <ruby>타락<rt>墮落</rt></ruby>의 피血를 받은 <ruby>자<rt>者</rt></ruby>가 되었기에 서로 뜻을 <ruby>계승<rt>繼承</rt></ruby>받은 <ruby>자<rt>者</rt></ruby>가 되기 <ruby>위<rt>爲</rt></ruby>하여서 싸웠음을 알아야 한다.
가롯 => 가룟 (p. 100)
가리우게 => 가리게 (p. 25)
가리우심 => 가렸음은 (p. 26)
가리울터인데 => 가릴 터인데 (p. 26)
가져온바이다 => 가져온 것이다. (p. 10)
같이한 => 같이한 (p. 140)
각요성 => 필요성 (p. 38)
갈렸으면 => 갈랐으면 (p. 106), 제물을 쪼갰으면
갈른것 => 가른 것 (p. 69), 갈라 세운 것
갈아대 => 가라대 (p. 56)
강팍케 => 강퍅하게 (p. 32)
갖고 => 육신을 쓰고 (p. 75) 육신재림
갖기에 => 갔기에 (p. 75)
갖었기에 => 가졌기에 (p. 7) 가졌기 때문에
갖었다 => 가졌다 (p. 168)
갖이고 => 가지고 (p. 96)
갖인 => 가짐 (p. 119)
갖임이고 => 가짐이고 (p. 11)
까라앉어 => 가라앉아 (p. 42)
건느난지라 => 건너는지라 (p. 69)
건느는것 => 건너는 것 (p. 69)
걷는 => 건넌 (p. 69)
격별하게 => 각별하게 (p. 83)
경향선 => 경향성 (p. 149)
게시지 => 계시지 (p. 146)
계시었다=> 계셨다 (p. 27) 2회 바꿈
~고저 => 하고자 (p. 31)
공작 => 섭리, 작업 (p. 51), 하나님이 하시면 섭리고, 사탄이 하면 작업이다.
과업 => 과제 (p. 52, 179) 과제 + 업무
교시치 => 가르쳐주시지 (p. 43)
과금 => 과거와 현재 (p. 4)
국토복귀 => 해방 (p. 195)
굴복 => 굴복의 의미로 이해하여야 옳을 것이다.
굴으기 => 구르기 (p. 180)
귀임 => 귀여운 임 (p. 63) 모세는 본래 애급 궁중에서 장성하였으나 애급 사람을 원수시하는 바는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표시하지 않는 지조는 과연 하나님이 택하시는 귀여운 행사였다.
그대루 => 그대로 (p. 21)
그래 => 그래서 (p. 114) 30여 차례 바꿈
그러구보니 => 그러고 보니 (p. 31)
그러야만이 => 그래야만 (p. 32) 4회 바꿈
그릅 => 그룹 (p. 71) 6회 바꿈
그위에다가 => 그 위에 (p. 11)
근 => 거의 (p. 76), 짊어진 것은, 누락된 내용
끄러올리고저함이 => 끌어올리고자 함이 (p. 102)
끝마추어 => 끝 맞추어 (p. 77)
기 => 그 (p. 19, 33), it
기대리 => 기다리 (p. 85) 기다리오리까?
기대리심 => 기다리심 (p. 29)
기등상 => 깃발 들 위에 (p. 74)
기리 => 길이 (p. 16)
기버서 => 기뻐서 (p. 149)
기시 => 그때 (p. 30)
기인 => 빌미 (p. 74) 빌미를 제공하는
나려오게 => 내려오게 (p. 105)
나려오든 => 내려오던 (p. 114)
나려왔다 => 내려왔다 (p. 134)
나린 => 내린 (p. 83)
나아가여야 => 나아갔어야 (p. 76)
나아갔드랬으면은 => 나갔더랬으면 => 나갔더라면 (p. 114)
나옴 => 나음 (p. 74) 낫게 됨, 치료됨
나을 => 나올 (p. 53)
나종 => 나중 (p. 136) 10여회 바꿈
나중이 => 나중이 (p. 120)
나타나여만이 => 나타나야만 (p. 118)
나타나여야만이 => 나타나야만
나타나야만이 => 나타나야 (p. 16) 2회 바꿈
난 => 낳은 (p. 87)
난하지 => 난해하지 (원문을 살려서 고치지 않음)
남어서 => 남아서 (p. 100)
남어있음 => 남아있음 (p. 113)
남어지게 => 남아지게 (p. 96) 5회 바꿈
내린다면은 => 내린다면 (p. 2)
내에게 => 나에게 (p. 89)
너머 => 너무 (p. 165)
너이에는 => 너희에게는 (p. 124)
노았다 => 놓았다 (p. 138)
놀으여야할 => 놓아야할 (p. 114)
능지 => 능히 앎 (p. 5) 누구나 바로 알 수 있을 정도
닐러 => 일러 (p. 18) 물어
다마 => 다말 (p. 92) 8회 바꿈
~되로 => ~대로 (p. 8) 원문을 살려서 바꾸지 않았지만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닦도저 => 닦고자 (p. 38)
단겨보나 => 당겨보나 (p. 180)
丹和世界 => 원화세계 (p. 143), [고문 p. 338]
당기어져 => 당겨져 (p. 181)
대리고 => 데리고 (p. 100)
對버할 => 대접할 (p. 85), 대할 수 없는
대상 => 대항 (p. 76, 138), 대치의 오타로 보임
대안 => 대안 (p. 54)
대취 => 상대하여 취하시기 (p. 88)
더럽히었으니 => 더럽혔으니 (p. 45)
더렵혔든 => 더럽혔던 (p. 118)
떠너서는 => 떠나서는 (p. 38)
떠러져나와 => 떨어져 나와 (p. 123)
떠러졌으니 => 떨어졌으니 (p. 99)
떠러지고 => 떨어지고 (p. 45)
떠러진다 => 떨어진다 (p. 109)
데가 => 곳이 (p. 183)
도라가 => 돌아가 (p. 146)
도라가는 => 돌아가는 (p. 135)
도라오니 => 돌아오니 (p. 118)
도힌다 => 된다 (p. 166)
되면 => 되면 20회 바꿈
되안 => 된 (p. 22)
되어진다 => 된다 (p. 16) 7회 바꿈
되있나니 => 되어 있나니 (p. 8)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됨바는 => 된 바는 (p. 31)
될려면 => 되려면 (p. 20) 2회 바꿈
독단 => 홀로 (p. 96), 홀로 외로이
드러가서 => 들어가서 (p. 102)
드러서는 => 들어서는 (p. 118)
드러와서 => 들어와서 (p. 74)
드러와섰으니 => 들어왔었으니 (p. 94)
드르며 => 들으며 (p. 87)
들면은 => 들며는 (p. 82) => 들면 (p. 88) 5회 바꿈
들러오야 => 들어가야 (p. 94)
들어나 => 드러나 (p. 86)
마리야 => 마리아 (p. 95)
마추고 => 맞추고 (p. 100)
만남이 => 만나니 (p. 53)
만상체 => 만상체 (p. 5) 한문의 약자를 사용하지 않음
만침 => 만큼 (p. 67) 3회 바꿈
말게되니 => 말았던 것이니 (p. 47)
말삼 => 말씀 (p. 21) 79회 바꿈
말슴 => 말씀 (p. 22)
말심아 => 말씀이 (p. 89)
말하야 => 말하여 (p. 83)
맛난슴 => 만났음 (p. 84)
맞는 => 적중하는 (p. 193)
맞으어야할 => 맞았어야 (p. 93)
맞추고저 => 맞추고자 (p. 79) 2회 바꿈
먼츰 => 먼저 (p. 17) 94회 바꿈
메시야 => 메시아 (p. 76) 56회 바꿈
몇잿날이러라 => 몇째 날이더라 (p. 22) 2회 바꿈
명사를 => 이름을 (p. 19)
모다 => 모두 (p. 86) 2회 바꿈
모시어여만이 => 모셔야만 (p. 15)
몬츰 => 먼저 (p. 15) 3회 바꿈
못바뜨는 => 못 받드는 (p. 149)
못하였다면은 => 못하였다면 (p. 8)
무경 => 무아지경 (p. 40)
무른 => 물은 (p. 18)
무엇이던지 => 무엇이든지 (p. 89)
무엇때문에인가 => 무엇 때문인가 (p. 6) 2회 바꿈
무통체 => 무형체 (p. 8)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임
물론 => 막론 (p. 194)
뭇치어 => 묻혀 (p. 80)
므릇 => 무릇 (p. 124)
미처주는 => 미쳐지는 (p. 33) 3회 바꿈
바뜨러 => 받들어 (p. 149)
바뜰지 => 받들지 (p. 120)
바래서 => 바라서 (p. 88)
바리세 => 바리새 (p. 79)
반다시 => 반드시 (p. 125)
반석 => 반석 (p. 69)의 의미가 더 큰 것으로 여겨짐.
받고저 => 받고자 (p. 25) 4회 바꿈
받는데는 => 받는다는 (p. 118)
받아드렸으니 => 받아들였으니 (p. 12) 수용한다는 의미
받어야 => 받아야 (p. 11)
받으여만이 => 받아야만 (p. 118)
발기는 => 밝히는 (p. 27)
밝히고저 => 밝히고자 (p. 15)
밝히어시어야 => 밝히셔야 (p. 44)
방기시기 => 분립시기 (p. 131), 사탄 분립 시기
배암 => 뱀 (p. 18) 15회 바꿈
배풀고 => 베풀고 (p. 83)
빼앗기었든 => 빼앗겼던 (p. 100)
벌려 => 벌려 (p. 21) 2회 바꿈, 전개해
벌서 => 벌써 (p. 19) 2회 바꿈
병조 => 병조 병동 (p. 8) 한문의 약자를 사용하지 않음
보고저 => 보고자 (p. 15) 13회 바꿈
보담 => 보다는 (p. 43)
보담도 => 보다도 (p. 78) 15회 바꿈
보면은 => 보면 (p. 2) 47회 바꿈
보여만 => 봐야만 (p. 74)
보여준느 => 보여줌과 (p. 26)
볼내니 => 보려고 하니 (p. 47)
볼적에 => 볼 적에 (p. 15) 23회 바꿈
부득기 => 부득이 (p. 57) 어쩔 수 없이
부칠 => 붙일 (p. 52)
분기 => 분립역사 (p. 110), 갈라짐 (p. 113)
분기령 => 분수령 (p. 123), 갈라 세우는 정점
분지 => 분기 (p. 5) 의미는 통하므로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둠
비러서 => 빌려서 (p. 80)
비로서 => 비로소 (p. 109) 5회 바꿈
비어서 => 빌려서 (p. 19) 이름을 빌려서
빈자 => 가난한 (p. 89)
사탄이 => 사탄이 (p. 88), 사탄이 상대하여
사탄이는 => 사탄은 (p. 109) 10여회 바꿈
사하야 => 사양하여 (p. 83)
살어왔고 => 살아왔고 (p. 80)
상격 => 서로 간격 (p. 71) 사이에 간격을 두어
상용 => 장님 코끼리 만지기 (p. 5) 서로 부분적인 것만 인식하여 전체로 보는 특칭긍정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
싸와서 => 싸워서 (p. 94) 2회 바꿈
쌍것이 => 천한 것 (p. 50) 2회 바꿈, 생식기, 욕된 것
쌍소리 => 욕 (p. 50) 천한 욕설, 생식기에 관한 언급
생기었으나 => 생겼으나 (p. 65)
생기였구나 => 생겼구나 (p. 28)
생력 => 생명력 (p. 11) 원문을 살려서 고치지 않음
새워서 => 세워서 (p. 122)
생할여면은 => 생하려면 (p. 11)
서 => 수 (p. 39)
서둘르는 => 서두르는 (p. 127)
석일 => 옛날 (p. 81)
善아히 => 선하게 (p. 85)
선에 => 선의 (p. 30)
선후 => 선후 (p. 50)
성전성사 => 성전건축의 이상을 이루어 (p. 76), 하나님이 재림하실 수 있는 선전건축의 이상을 이루어
성충 => 곤충을 잘못 기록한 것 (p. 9)
세우고저 => 세우고자 (p. 25) 19회 바꿈
세우여야 => 세워야 (p. 32) 16회 바꿈
소망성 => 소망성 (p. 83)
소흘 => 소홀 (p. 107)
솜서리 => 몸서리 (p. 86)
쓸대 => 쓸데 (p. 167)
誰던지 => 누구든지 (p. 89)
시봉 => 받들어 모시다 (p. 179)
侍시여야만이 => 모셔야만 (p. 116)
시종자 => 모시고 따르는 (p. 85)
시키고저 => 시키고자 (p. 17) 7회 바꿈
신념심 => 신앙심 (p. 194)
실무더기 => 실뭉치 (p. 180), 엉킨 실타래
실아 => 실제의 자기 자신 (p. 4) 실체적 자아
실타래 => 실마리 (차례) 14회 바꿈
실현코저 => 실현하고자 (p. 17)
심기난지라 => 섬기는지라 (p. 72)
십수백년 => 천몇백년 (p. 77)
아니매 => 아님에 (p. 31)
아다싶이 => 알다시피 (p. 81)
아달 => 아들 (p. 82)
아듬두고 => 안아주고 (p. 101)
아라보지 => 알아보지 (p. 107)
아라보자 => 알아보자 (차례) 2회 바꿈
아라서 => 알아서 (p. 29) 2회 바꿈, 알게 되어서
아라야 => 알아야 (p. 85)
아러보자 => 알아보자 (p. 93)
아러야 => 알아야 (p. 11) 73회 바꿈
아렀다 => 알았다 (p. 103)
아모리 => 아무리 (p. 76), 아무리 어렵다고 하여도
아므런 => 아무런 (p. 21)
아바지 => 아버지 (p. 66) 24회 바꿈
아비지 => 아버지 (p. 93)
아브라함 => 아브라함 (차례) 9회 바꿈
아지 => 알지 (p. 71) 10차례 바꿈
아지못함이 => 알지 못함이 (p. 18)
아침 => 아침 (p. 22) 3회 바꿈
악우 => 나쁜 근심 (p. 180), 지독한 근심
안이하였는가 => 아니 하였는가 (p. 43)
안인가 => 아닌가 (p. 99)
않고저 => 않고자 (p. 16)
않받는 => 받지 않는 (p. 124)
않어도 => 않아도 (p. 78)
않었을때에 => 않았을 때에 (p. 24)
않이 => 아니 (p. 106)
않이었음 => 아니었음 (p. 101)
않이하였더면 => 아니하였더라면 (p. 101)
알고저 => 알고자 (p. 5) 2회 바꿈
아러주지 => 알려주지 (p. 85)
알리워 => 알려 (p. 85)
알리있가 => 알겠습니까? (p. 56)
알므로 => 앎으로 (차례)
알아야 => 알아야 (p. 68) 20여 차례 바꿈
앞은 => 아픈 (p. 116)
양모 => 모양 (p. 192)
어데 => 어디에 (p. 79) 5회 가량 바꿈
어데나 => 어디나 (p. 26) 5회 바꿈, 어디까지나
언리적 => 원리적 (p. 120), 오타로 보임
언통함 => 원통함 (p. 66)
업은 => 등지고 있는 (p. 188), 얻은, 받은
없갔기에 => 없겠기에 (p. 113)
없애고저 => 없애고자 (p. 82)
없었드라면 => 없었더라면 (p. 10)
없었으면은 => 없었으면 (p. 9) 4회 바꿈
없이하기 => 없애기 (p. 99)
여년생애 => 여년생애 (p. 83)
여실 => 똑같은 (p. 33)
여하 => 어떻게 하여 (p. 33), 어떻게 되어, 무엇 때문에, 어떤
연지 => 연결하여 앎 (p. 4) 실제로 연결시켜 알 수 (없다고 할 때)
연화 => 연합하고 화합하여 (p. 76), 서로 화합하여
엽부 => 잎에 해당하는 부분 (p. 4)
영인 => 영인 (p. 12) 한자의 약자를 사용하지 않음
예증 => 예증 (p. 12) 한자의 약자를 사용하지 않음
오날 => 오늘 (p. 27) 5회 바꿈, 오늘날
오닜까 => 오니까 (p. 87),선생님 입니까?
외정하 => 외래 정부의 통치 아래 (p. 195), 주로 왜정치하, 일제강점아래
요구케되나니 => 요구하게 되니 (p. 13)
용역 => 침노 (p. 90)
우에 => 위에 (p. 83)
우에는 => 위에는 (p. 71)
우에다 => 위에다 (p. 29) 5회 바꿈
우의 => 위의 (p. 119)
움지겨 => 움직여 (p. 186)
움지겨지게 => 움직여지게 (p. 129)
웅크러져 => 헝클어져 (p. 180)
위신 => 위신 (p. 201)
웨 => 왜 (p. 28)
위할려면 => 위하려면 (p. 5)
유물사관 => 유물사관 (p. 145)
유인받아 => 유혹을 받아 (p. 113)
유하난 => 유한한 (p. 39)
유함으로 => 있음으로 (p. 15)
은택 => 혜택 (p. 192)
의하고 => 의지하고 (p. 69)
이겨야 => 극복해야 (p. 169)
이상체하로 => 이상체 밑으로 (p. 31) 이상하신 본래의 계획대로
일년선 => 일년선 (p. 182), 일년 단위로 늘어선, 일련, 일렬로,
잇는 => 있는 (p. 88)
잇어야 => 있어야 (p. 93)
있갔으니 =>  있겠으니 (p. 94)
자유향선 => 자유로 향하는 길 (p. 183), 탈선할 수 없는 원리적인 길로
자적 => 자국 (p. 144), 발자국
장성 => 성장 (p. 11) 자람
재림하여만이 => 재림하여서만 (p. 119), 재림함으로써 비로소
저야되는가! => 져야 되는가! (p. 9) 져야하는가
적발 => 지적 (p. 183), 고발
전수행 => 전체를 지켜서 행하여 (p. 76),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켜서 그대로 행하여야
전정 => 노정에 앞서 (p. 67) 출발노정에 앞서
절개 => 절개 (p. 195)
절개자 => 절개자 (p. 197), 절개를 지키는 사람
정밀기 => 정밀기 (p. 188)
제사물 => 모든 사물 (p. 2)
존봉 => 존경하고 받들어야 (p. 178), 상대방의 뜻을 존중하고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줘야
종국 => 종국 (p. 68), 결국
주고저 => 주고자 (p. 28) 5회 바꿈
주나니라 => 주느니라 (p. 12)
주시고저 => 주시고자 (p. 88)
주의국가체진 => 이데올로기국가 체제의 진영 (p. 134), 민주주의 이데올로기 국가 체제 진영
주장 => 주장 (p. 132)
죽난 => 죽는 (p. 12)
쥐이게 => 조이게 (p. 181)
지내면은 => 지내면 (p. 8)
지어야 => 져야 (p. 107), 십자가까지 져야하리라
지어지였기 => 지어졌기 (p. 39)
지으섰다는것은 => 지으셨다는 것은 (p. 21) 지었다는 것은
지으섰다는 => 지으셨다는 (p. 21)
지음받었는데 => 지음 받았는데 (p. 26)
지팽이 => 지팡이 (p. 141)
직결처분하였든 => 즉결처분하였던 (p. 142)
직향 => 지향 (p. 29) 바르게 지향
질머진 => 짊어진 (p. 34) 5회 바꿈
차저 => 찾아서 (p. 190)
참말 => 정말 (p. 80)
참주고 => 잘주고 (p. 168), 수수작용은 잘주고 잘 받음으로써 힘을 내게 된다. 잘 주고 잘 받는다는 것은 이렇게 진실하게 참되게 할 때 가능하다.
찾고저 => 찾고자 (p. 15) 31회 바꿈
찾아 => 차지해 (p. 15, 188)
찾아보자 => 찾아보자 (p. 7)
찾으면 => 찾으면 (p. 30) 4회 바꿈
찾으여야만이 => 찾아야만 (p. 88)
찾으여야할 => 찾아져야할, 찾았어야할 (p. 95)
찾이 => 차지 (p. 188)
처케 => 처하게 (p. 14)
체증 => 실체 증명 (p. 2) 진리 자체(본체)존재함을 증명해야 하는
춤배았고 => 침 뱉고 (p. 66)
치어 => 쳐 (p. 97)
칭호 => 호칭 (p. 192)
~코저 => ~하고자 (p. 31)
타나난다 => 나타난다 (p. 40)
티어지게 => 틔어지게 (p. 113)
파양 => 파괴 (p. 52) 오기로 보임.
표로 => 드러내는 (p. 53)
하고저 => 하고자 (p. 8) 61회 바꿈, 하려고
하나니라 => 하느니라 (p. 14) 5회 바꿈
하나이되는 => 하나 되는 (p. 14)
하날 => 하늘 (차례) 391회 바꿈
하난 => 하는 (p. 22)
하난것이 => 하는 것이 (p. 21)
하려니 => 하니 (p. 47) (단 1회에 한해서만 적용됨)
하면 => 하면 (p. 2) 124회 바꿈
하믄 => 하면 (p. 167)
하시고저 => 하시고자 (p. 15) 6회 바꿈
하였기에라는 => 하였기 때문이라는 (p. 32) 2회 바꿈
한난류 => 한난류 (p. 192)
한 서리 => 한 서리(한상) (p. 96), 한맺힌 타격을 입혔다.
~한테 => ~에게 (p. 48)
할려고 => 하려고 (p. 78) 20여회 바꿈
할려는 => 하려는 (p. 7) 6회 바꿈
할려면은 => 하려면 (p. 8) 5회 바꿈
합의 => 합당 (p. 57)
합하게 => 합성일체화하게 (p. 169)
햇치러니 => 헤치려니 (p. 180)
허시 => 헛된 모심 (p. 128)
헤기우고 => 가볍게 되고 (p. 181), 가벼워지면
헷치어 => 헤쳐 (p. 183)
활동인인 => 활동증인 (p. 11) 활동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활미 => 체험 (p. 4) 현실로 느낄 정도로 일치된 삶을 통한 경험을 끊임없이
力 => 힘 (p. 6)
        力
흥크러짐 => 헝클어짐 (p. 180)
과제:
아벨이러 => ???? (p. 151)
신( ) => 신? (p. 200)


차례
야곱 때時에는 나온 동생으로부터 빼앗을 것을 <ruby>표징<rt>表徵</rt></ruby>하여 그 <ruby>기업<rt>基業</rt></ruby>을 빼앗고는 <ruby>기업성사자<rt>基業成事者</rt></ruby> 베레스와 세라는 하나님의 <ruby>기업계대<rt>基業繼代</rt></ruby>에 들어왔었으니 먼저 태어난 <ruby>자<rt>者</rt></ruby>가 뜻 <ruby>계승자<rt>繼承者</rt></ruby>가 되는 바는 <ruby>사실<rt>事實</rt></ruby>이니 베레스와 세라는 싸워서 먼저 나오려는 세라를 물리치고 베레스가 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림 1
이것은 예수와서 원수의 <ruby>세상<rt>世上</rt></ruby>에서 원수 물리치고 <ruby>장자<rt>長子</rt></ruby>의 <ruby>기업성사<rt>基業成事</rt></ruby> 할 것을 <ruby>표시<rt>表示</rt></ruby>함이었다. <ruby>즉<rt>卽</rt></ruby> 같은 <ruby>세상<rt>世上</rt></ruby>에서 <ruby>장자<rt>長子</rt></ruby>되려고 하는 <ruby>자<rt>者</rt></ruby>를 물리치고 <ruby>근본<rt>根本</rt></ruby>자리에서부터 <ruby>장자<rt>長子</rt></ruby>를 <ruby>성립<rt>成立</rt></ruby>시켜 <ruby>기업성사<rt>基業成事</rt></ruby>할바를 알아야 한다. 이와같은 <ruby>원인<rt>原因</rt></ruby>으로 <ruby>인<rt>因</rt></ruby>하여 다말은 하나님의 뜻에 <ruby>성사자<rt>成事者</rt></ruby>의 어머니母가 되었음이다. 그 아들 베레스가 <ruby>장자<rt>長子</rt></ruby>됨이었다.
(第1券 p. 76)
그림 2
그림 3 (第2券 p. 323)
그림 4
그림 5 (第4券 p. 469)
그림 6
그림  (웨 타락케 하고 섭리하는가 p. 8 원리강론 p. 150의 그림과 비슷)7
그림 8 (第3券 pp. 354~355 추정, 유실된 부분에 나오는 사랑과 의의 미의 관계로서 선을 설명하는 내용)


미주
이 <ruby>전부<rt>全部</rt></ruby>는 예수와서 <ruby>직접<rt>直接</rt></ruby> 싸워서 <ruby>승리<rt>勝利</rt></ruby>하여 <ruby>기업성사<rt>基業成事</rt></ruby>함을 <ruby>역사적<rt>歷史的</rt></ruby> <ruby>거리<rt>距離</rt></ruby>를 두고 <ruby>표시<rt>表示</rt></ruby>한바이다. 라합 <ruby>역시<rt>亦是</rt></ruby> 그러하고 룻 <ruby>역시<rt>亦是</rt></ruby> 그러하다. 이 <ruby>여성<rt>女性</rt></ruby>들은 하나님의 뜻을 <ruby>위<rt>爲</rt></ruby>하여서 <ruby>지금<rt>至今</rt></ruby> <ruby>현실<rt>現實</rt></ruby>의 <ruby>입장<rt>立場</rt></ruby>을 떠나는 <ruby>존재<rt>存在</rt></ruby>들로서 되었기에 그런 <ruby>비원리행례양<rt>非原理行例樣</rt></ruby>과 같은 <ruby>허락<rt>許諾</rt></ruby>으로 뜻의 <ruby>성사<rt>成事</rt></ruby>를 <ruby>계승<rt>繼承</rt></ruby>한다는 하나님의 <ruby>근<rt>根</rt></ruby>
그其 대상이 나와 같이 설 수 있는 위치를 조성하여야 의다=> 상대기준을 조성해야 의다


첨부된 교정 내용을 인쇄하여 옆에 놓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ruby>본<rt>本</rt></ruby>뜻을 <ruby>암시<rt>暗示</rt></ruby>하는 <ruby>표시적<rt>表示的</rt></ruby> <ruby>존재<rt>存在</rt></ruby>들이었다.
천일국 원년 4월 15일
책임감수: 경남교구 하동교회장 김정섭
</nowiki>


[[분류:통일교 교리 원문]]
[[분류:통일교 교리 원문]]
[[분류:원리원본]]
[[분류:원리원본]]

2026년 7월 7일 (화) 18:01 기준 최신판

원리원본 원문 005/012이다. 이 페이지는 DOCX의 윗글자 한자를 <ruby> 형식으로 보존한다.

  • 문헌 색인: 통일교 교리 원문/원리원본
  • 시작 부분: 그리하여야만 예수 와서 전하는 바의 복음에 순응함으로 예수의 몸될 수 있는 성전에서부터 우리는 한 분성전 건설이상을 조성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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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그리하여야만 예수 와서 하는 바의 복음福音순응順應함으로 예수의 몸될 수 있는 성전聖殿에서부터 우리는 한 분성전分聖殿 건설이상建設理想조성造成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承 수 있는 터를 성사成事하여야 할 사명단계使命段階가 즉, 솔로몬 왕이후王以後에 이스라엘 백성百姓이 짊어진 근 중대목적重大目的이었다. 그런 반면反面 사탄은 이스라엘 백성百姓들에게 수단手段을 하여서라도 하나님이 직접直接 하여 나오는 그 뜻 성사成事의 길을 분열分裂하고자 하여서 여러 모양으로 불순不順불신不信의 씨를 찾아서 이스라엘 백성百姓하여 침입侵入마수魔手를 뻗치려는 시도試圖강경强硬대상對峠하여서 하나님 便에 더 깊이 서서 나아가야 할 입장立場임에도 불구不拘하고 으로부터 백성百姓음란淫亂근본根本인 원수를 섬기는 방향方向으로 나아가려는 백성百姓을 또 쳐打서 각심覺心케 하여 오면서 가진 수단手段을 다하여서 이 백성百姓보호保護하여 왔는바였다.

그러나 그 심정心情을 알고 안타까하는 점점漸漸 그 뿌리조차 보기 어렵難게 성전聖殿을 더럽힌 행동行動이 몇번이었든고 하나님은 성전聖殿을 세워서 뜻 성사기초成事基礎표시表示완성完成목적기본目的基本을 잡아서 약속約束시작始作하였으니 그만 둘 수 없는 책임감責任感 사탄은 기세당당氣勢堂堂하여 하늘뜻을 파괴破壞하는 그것을 볼적마다 드렸던 이스라엘 백성百姓파기破棄할 수 없는 사실事實이다. 파기破棄하면 전부全部사망死亡의 괴로움苦에 삼켜질 것이며 하나님 역시亦是 불안不安근본의의根本意義할 수 없는 사실事實이니 아무리하여도 그 뜻을 성사成事하여야 할 바가 하나님의 과업課業이니 선지先知들을 세워서 그 뜻을 백성百姓들이 연화聯和할 수 있도록 성전聖殿유지維持계속繼續하여 왔든바이다. 그런고로 그 뜻 근본목적根本目的은 예수 한 존재存在중심中心이었다.

그 다음은 예수께 하여 한몸되어 2 예수 존재存在와 같은 번식이상목적시작繁殖理想目的始作전부全部가 이스라엘 백성행동百姓行動 여하如何기반基盤을 잡을 수 있는 바이니 얼마나 아버지 뜻에 안타까운 심정心情이랴.

그런고로 성전聖殿지키면서 하늘 뜻을 받들 수 있는 주위공작周圍工作계속繼續하면서 기본基本되는 자체自體인 메시아를 보내여서 뜻 성사成事최고목적最高目的을 이스라엘 백성百姓에게 예고豫告하여서 그 뜻을 받들 수 있는 그 노정路程을 지켜나가게끔 하여서 선지자先知者하여서 메시아 보내실 것을 예언豫言하여 이스라엘 백성百姓자극刺戟하시었다. 그러나 그 뜻을 바라면서 십수백년十數百年 동안을 계속繼續하면서 권고勸告하여 왔든 바이었다. 그러나 그 뜻을 이스라엘 백성百姓적극협조積極協助못하여서 이와 같이 뜻 성사成事시일時日연장延長 시켜왔든바이었다.

메시아 약속約束을 받고 바라는 백성百姓조급躁急하게 바랐으나 하나님의 뜻 중심中心하고 실천實踐하여서는 망각忘却하고 자기自己요구要求들만 바라는 그 자체自體타락墮落의 피血를 받은 패역悖逆백성百姓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면서 메시아 오기 기간期間도 알려주어 그의 바라는 희망성希望性을 높여주어왔다. 메시아 오기 전에 먼저 그의 전목적全目的을 받들 수 있는 준비공작사명자準備工作使命者로 오는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약속約束하여 그 시기적時期的 한도限度를 보여주었든 바이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백성百姓전부全部가 메시아 강림降臨 바라든 소망所望으로 그를 생활내生活內로서 뜻을 찾아 나오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백성百姓성전중심聖殿中心하고 메시아 소망所望이 한 목적目的으로 바라오면서 희망希望을 높이하여 자연적自然的으로 자기自己들의 준비準備계속繼續하여왔든 바였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百姓하여서 기초공작基礎工作과 함께 메시아를 세상世上에 보내주어 그들의 소망所望성사成事하여주는 동시同時자기自己목적실행目的實行의 한 기쁨과 기대期待였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하시는 메시아 보내주면 이스라엘 백성百姓생명대신生命代身 하게 알면서 그의 주위周圍에 대한 단속團束을 지어 성전이상聖殿理想을 실현하고자 함이었는데 그 뜻을 아는 이였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한 소망所望을 갖고 1 하나님 책임시기責任時期는 끝 맞추어 2 책임사명분담責任使命分擔행로行路를 잡아주고 섭리계속攝理繼續하여서 자기自己몸으로 지었든 아담 해와의 사명적使命的 분담성사노정分擔成事路程으로 옮기기 하여 오신바가 즉 예수였다.

예수는 2 아담이다. 성경聖經에는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보아도 로마서 5장 14절을 보아도 예수는 2아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 조상祖上 아담 해와가 타락墮落시켰으니 원리原理대로 자기自己들의 책임사명責任使命을 다 찾아 복귀復歸하여야만 근본根本뜻을 성사成事할 수 있는 창조이상創造理想이 됨이었다.

3 2 하늘 뜻 성사책임사명자成事責任使命者로 오신 예수의 책임분담責任分擔 섭리기간攝理期間에 대한 근본의의根本意義

1 지상섭리地上攝理 노정路程에 대한 근본의의根本意義

구약시대舊約時代전목적全目的 종결終結은 예수 한분에 기인基因하며 그의 완성적完成的 사명使命도 예수 한 존재存在중심中心이었다. 성전聖殿을 세우기 행의行義노정路程구약시대舊約時代의 한 중심노정中心路程이었고 그 노정탈선路程脫線불의不義라는 사망死亡시작始作이라 한 것은 잘아는 바다. 예수 한 존재存在가치價値 이스라엘 성전聖殿 + 이스라엘 백성百姓보다도 한 한 존재存在였다. 4천년千年 역사歷史하여 하나님이 섭리攝理결실結實자체自體가 예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 전천주목적全天宙目的은 예수로부터 다시금 찾는 가치價値존재存在니 이 모든 것보다도 예수는 하나님 앞에 존재存在였다. 예수 완전完全히 살아서 천주天宙살고 하나님 완전完全히 살며 예수뜻 성사成事하여야 하나님 뜻 성사成事라는 한 중심점中心點존재存在지상地上 예수였다.

하늘 성사成事로 예수 하나로부터 시작始作이라는 원인原因은 더 말하지 않아도 잘 알줄 안다. 이 천주天宙중심점中心點 예수의 한 존재存在지상地上에 오는 바는 땅地 아니면 뜻 성사成事 못하는 하나님의 창조원리創造原理중심지中心地 지상地上이었다. 지상地上에서 사람 조상祖上 아담 해와는 타락墮落하였으니 땅 중심中心하고 복귀復歸하여 그냥 하나님의 만세萬世 이상理想 창조이상創造理想원리原理대로 성사成事할 수 있는 조건성사條件成事를 보는 바이었다. 그런고로 땅 없으면 하늘은 미완성未完成하여만 하늘 뜻 원만성사圓滿成事하고자 함이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의 뜻이니 모두가 동일同一기점상基點上분리分離할 수 없는 이유理由는 한몸된다는 기본인과基本因果로 되어 있기에 이와같은 한 한 존재存在가 예수인데 이 예수를 보내기 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마 하심은 예수한테 사탄으로부터 피해被害를 받지 않게하기 하여서 엘리야를 보내어 이 근본자체根本自體 오신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百姓대환영大歡迎 받게하여 백성百姓은 예수한분 만으로 무한無限영광榮光이며 그들의 자랑으로 믿信고 모셔侍야할 사명적使命的 책임責任들을 다할 수 있는 구비조건具備條件을 지어 놓기하여서 엘리야를 보내주마 하신바가 그 목적目的이 있는 바이었다.

이스라엘 백성百姓 하여서는 직접인도直接引導하여 뜻 시봉侍奉으로 배양培養하였지만 세계적世界的으로는 하나님은 전인류全人類에게 모실수 있는 공작工作역사적歷史的 성인聖人들을 하여서 동서양東西洋섭리攝理를 하여 합성화合成化 하려고 하는

성사成事 예비豫備 공작工作시작始作케 하심이다. 그其 사명적使命的 대표代表 인물人物들이 공자孔子석가釋迦였다. 또 철인哲人 소크라테스 등등等等양심적良心的 를 중심한 표준標準하고 교시敎示케함도 그 근본의의根本意義였음을 알아야 한다. 어느 종교宗敎든지 근본을 표준標準케 함은 하나님이 섭리攝理하시는 목적目的근본根本하고 있다는 바를 명시明示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 근본根本성사成事하면 그 자체自體인 가르침들도 한 근본상根本上에서 총합總合을 보여야 되는바도 원리原理로 되었다. 그런고로 예수 한 존재存在이상중理想中에 뜻 중심中心이니 하나님의 이상理想완성完成근본체根本體이니 예수의 뜻 성사시成事時 천주天宙는 한 중심中心에서 기동起動되어야 한다. 종교宗敎경제經濟과학科學하여 한 기본상基本上기동起動될 바이다. 그런 목적目的으로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시어 찾아 맞추고자 함의 근본의의根本意義가 있다. 이와같은 크나큰 사명적使命的 중심中心 존재存在강생降生과 함께 온 천주天宙는 큰 복음福音소식消息을 보았다.

하늘은 물론勿論 예수의 뜻 성사成事를 바라는 바 그 땅은 예수의 앞에 지도指導받고자 함이 요구였다. 예수 한분이 모든 생명生命의 근본이며 해방解放주인공主人公이었다. 그것은 사탄 세계世界비공식세계非公式世界에서 원리세계原理世界 예수의 세계世界에로 건설목적建設目的완성完成요구要求가 예수의 할 책임責任동시同時에 우리는 그에게 순종順從 신종信從 시종侍從하여서 영광을 돌리는 것이 땅의 백성이 짊어진 책임사명責任使命이었다. 이 책임責任요구要求성립成立하려니 엘리야 와서 할 사명전부使命全部전백성全百姓 하여서 엘리야와 합심일체合心一體가 되어서 뜻 원만성사圓滿成事고자함이 목적目的이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백성百姓은 잘알고 있는 승천昇天존재存在였다. 그런고로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하였으니 틀림없이 올 줄알았다. 승천昇天한 엘리야 언제나 오실까하고 바라는 데는 하늘 하여서 바라보는 것이 중심中心으로 되었다. 하늘로 올라갔으니 하늘로써 나려올 줄 만 바라본 바는 사실事實이었다. 승천昇天한 엘리야로 그 당시當時 제일第一 하게 바라는 한 상대相對로 된 바는 메시아 때문이었다.

메시아를 모실수 있게 하여주는 바도 엘리야니 엘리야를 바라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必然的 요구要求이었다. 그런데 엘리야는 하늘로 내려오니라고 바라는 지금至今까지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함은 유대교적 신자信者 이다. 메시아로 왔든 것은 사실事實이매 지금至今전세계적全世界的으로 역사歷史하여 확고確固한 것으로 되었으나 그 당시當時에 있어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生覺할 수 없는 존재存在취급取扱되었든 바는 성경聖經보아 잘 알 수 있는 바이다. 바리새 교인敎人서기관書記官들은 예수 하여 몇 번씩이나 묻기를

그대가 메시아면 엘리야는 왜 오지 않았는가? 엘리야는 어디에 왔는가? 하면서 예수 하여 반문反問한바는 자기自己들이 역사적歷史的으로 바라는 사실事實부합符合하지 않은 사실事實고백告白하는 것을 성경聖經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바이다. 과연果然 당시當時에는 참말 믿고 순종順從할 수 없는 바이었다. 메시아라는 그 존재存在는 그대들이 잘 아는 요셉의 아들子로서 집에 묻혀 목수업木手業으로서 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존재存在이며 그 내용내막內容內幕까지 잘 아는 그 자체自體이며 생활체형生活體型으로 보아도 우리들과 다름없는 그 자체自體인데 어디 그 존재存在자기自己들이 바라는 이상理想중심존재中心存在라고는 생각生覺하는 에 하도 먼 거리距離존재存在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게 보였다. 우리가 바라든 그 존재存在천수백년간千數百年間 약속約束존재存在희망希望존재存在자체自體가 예수라하니 이스라엘 백성百姓은 무슨 영문인지 큰 환난患難의 한 존재存在로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메시아를 바람은 전부全部중심中心하고 바라는 것 보다도 먼저는 자기自己중심中心하고 바란 것은 사실事實이라 아니할 수 없다. 베들레헴에서 날줄로 알았다. 그러면 자기自己들의 메시아 오면 한 조각의 식물食物이나 거처居處이나 의복衣服이나 그 한가지라도 준비準備해놓고 베들레헴을 하여 먼저 무슨 다른 소식消息이나 있는가 하여서 고대苦待 만일萬一 있다면 메시아 탄생誕生도 알았으리라. 그런 존재存在조차 없었다는 사실事實을 볼때에 그들의 메시아 고대苦待는 벌써 전부全部자기自己 중심中心이었고 자기自己들이 메시아의 힘을 빌려서 좀더 좋은 것을 바랐든 것이 사실事實이라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각자各自 각자各自자기自己들이 이상理想부합符合하는 이상以上존재存在로 바랐다는 그其 입장立場에 있을 때 예수란 출현出顯하여 너희들의 이상理想존재存在라는 선언宣言은 하도 너무한 동시同時분개憤慨사실事實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연果然 예수는 육신肉身쓰고 나니 자기自己들과 동일양식同一樣式으로 살아왔고 또 지금至今함없이 동일同一이니 과연果然자체自體하여 의심疑心하는 바 당연지사當然之事였다.

이와같은 예수를 하여서 더 의심疑心케 된바는 엘리야가 전제문제前提問題존재存在였다. 자기自己들이 엘리야라고 하는 그 가 왔다면 예수니 메시아니 여하如何문제問題해결解決인데 엘리야도 오지 않고 메시아 왔다니 그 어찌 신임信任할 수 있으랴! 지금 우리는 바꾸어 생각生覺필요必要를 느끼면서 석일昔日에 이스라엘 백성百姓하여 되는 문제問題다. 그러면 지금至今은 예수 메시아가 만민萬民구주救主요 이스라엘이 희망希望중심존재中心存在라는 것은 역사적歷史的으로도 인식과정認識過程으로 나왔으니 예수는 메시아며 뜻하신 예언豫言실체實體라는 것을 알며 그 에 올 엘리야도 왔었다는 바를 세상世上 교인敎人들은 다 아는 사실事實이다. 엘리야는 왔는데 세례洗禮요한이라는 것을 역사歷史로서

인정認定하여주는 성경聖經을 보아 아는 사실事實이다. 또 예수는 엘리야가 왔으나 임의任意대접待接하였다고 하면서 복음서福音書세례洗禮요한을 지적指摘하여 말한 바를 보아서 아는 간접적間接的 앎知이었다. 과연果然당시當時입장立場을 바꾸어 가지고 생각生覺하면 지금至今과연果然 메시아로 믿고信 모시고侍 순종順從을 할 이나 될까? 지금 현교인現敎人들이 바리새 교인신앙敎人信仰 만치도 못한 많은 이때에 생각生覺문제問題이면서 염려念慮중대문제重大問題이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고 어찌하여 세례洗禮요한이 엘리야가 되는가 그 근거根據는 무슨 뜻이며 하나님이 섭리攝理하는바는 무슨 의의意義를 두고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하고는 세례洗禮요한이를 보내였는가 하는 문제問題근본根本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근본의의根本意義를 밝히지 못하는 현실세계現實世界가 하늘이 섭리攝理하는 뜻의 시봉侍奉완성完成할 것인가. 지금은 말세末世라고 하는 때이니 성경聖經 미지未知였든 사실事實명백明白히 되어야만 성경목적聖經目的을 끝내고 재림주再臨主영접迎接할 수 있는 결정적決定的 관문關門을 삼을 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런 중대시重大視 되는 미지未知근본根本을 밝히기로 하자.

2 세례洗禮요한이 엘리야되는 근본의의根本意義

하나님이 근본根本 뜻을 성사成事하시려 할 때에 그 뜻 성사成事에 제일 요점要點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사탄 존재存在가 있有는 것인데 이 존재存在가 하나님의 근본根本 뜻을 파괴破壞하였고 지금至今까지 으로 나와 뜻을 성사成事하지 못하게 하는 존재存在가 있기에 큰 중대重大문제問題가 된다. 만일萬一 사탄이 없다면 뜻 성사成事문제問題되는 것이 아닌데 사탄이 있어서 인간人間을 대하여 자기自己소유권외所有圈外로 보내지 않으려고 극성極性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하여서 역사役事를 하여 나옴으로 하나님의 뜻의 성사成事역사歷史연장延長을 거듭하게 하여 온 바이다. 이 사탄을 전폭적全幅的으로 굴복屈服시켜서 뜻을 미성사未成事케 하는 공작工作이 없도록 사탄 전멸全滅약하는 바가 요구要求되는 바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근본根本 뜻은 뜻을 방해妨害하려는 사탄을 뜻의 노정路程에 없게 하고자 함에 근본根本중심中心이었다. 그런고로 이 근본根本 뜻을 성사成事하려고 메시아를 보내기 전에 하나님이 바라는 뜻을 반대反對하는 사탄을 굴복屈服시켜 다시는 예수의 뜻(메시아의 뜻) 성사成事 노정路程에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공작工作이 먼저 문제問題였다.

문제問題해결解決책임자責任者로 보내마 하신 존재存在, 엘리야였다. 엘리야는 잘 알다시피 하나님 앞에 혼자서 사탄 전부全部하고 싸운 최승세자最勝勢者이었다. 엘리야가 요구要求하는 당시當時최고最高 목적目的은 사탄 전멸全滅의 목적이었다. 다시는 사탄이 하나님의 뜻을 막는 곳 없

게끔 바라든 바가 엘리야가 바라든 목적目的이었다. 그 목적目的, 하나님이 바라는 뜻 성사成事 노정路程을 두고 바라보는 목적目的과 같은 목적目的이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바알(사탄) 800이며 뜻 성사成事 노정路程완성完成 할 수 있게 하는 사탄 대한 중요존재重要存在였다. 엘리야의 목적目的완성完成하였는가 하면 그 당시當時 사탄 대한 목적目的미완성未完成하였다. 왜냐하면 다시금 사탄이 침입侵入을 보아서 예수앞에까지 침범侵犯우려성憂慮性이 있음으로 다시금 이 사탄에 대립對立하여 엘리야가 바라는 근본목적根本目的완성完成시켜서 예수 앞에 사탄 자체自體종적踪蹟이 없게하기 위한 대표자代表者를 보내어 엘리야의 바라든 사탄 전멸공작성사全滅工作成事할 것을 바람에서 엘리야를 새로 세례洗禮요한으로 표시表示한바며 세례洗禮요한이 엘리야되는 바의 목적目的이 있는 바이다. 엘리야의 목적目的세례洗禮요한으로 완성完成사명적使命的 역할役割을 가지고 있었든 바이었다.

하나님의 뜻 중심中心하고 말 할적에 엘리야의 목적目的성사成事세례洗禮요한으로 종결終結짓게 되는 것이다. 세례洗禮요한이 와서 한 사명달성使命達成하면 하나님 뜻은 완전성사完全成事하므로 사탄을 하나님 뜻 노정상路程上에서 없애고자 함에서 예언豫言하신 엘리야가 세례洗禮요한이었다. 를 들면 하나님의 뜻은 하나인데 뜻 성사成事하는데는 (엘리야)과 (요한)이 완성完成하였다.

그런고로 뜻은 하나이고 사람은 둘이다. 뜻 하나 중심中心하고 말할때 = 이라는 한 몸으로 완성完成한 것과 같은 근본의의를 두고 예언豫言하심이 있기에 엘리야=세례洗禮요한 이라고 하심이 근본목적根本目的완성完成되는 바이다.

하나님의 뜻 = \

이런 뜻으로 말씀 하심을 알지 못하는 백성百姓은 큰 범행犯行행로行路취하면取下面자연自然스러운 뜻의 함이라고 생각生覺하였다. 이제 엘리야 대신代身으로 보냄을 받은 세례洗禮요한의 사명使命은 무슨 목적目的이 남아 있나 하면 하나님의 목적目的성사成事완성完成 하여야할 토대土臺조성造成하여 메시아 예수 자체自體한테 피해被害 없게끔 하여야 할 역사적歷史的 책임責任부담負擔되어 있다.

세례洗禮요한의 하여야 할 사명使命은 엘리야의 심정心情재능才能으로 예수앞에서 아버지로 아들을 사랑 할 수 있게 하는 동시同時자식子息으로 그其의 아버지께 효도孝道하게 하여 줄 역사적歷史的 사명성使命性을 말라기 4 5, 6기록記錄함을 보아서 알 수 있는 바이다. (누가복음1/16-17)

그런고로 예수는 누구나 다 전인류全人類조상祖上동시同時전인류全人類는 예수의 자식子息이라는 창조원리創造原理로 되어있는 목적目的 찾아서 맞출수 있는 길을 닦아야할 책임責任이 요한의 사명使命이었다. 밖으로는 사탄을 방비防備하고 내적內的으로는 백성百姓으로하여금 자식子息도리道理를 알려주어

아버지를 모시어 사랑 받을수 있도록 그其 시대時代에 대한 책임責任겸유兼有중대입장重大立場에 요한은 서 있었다. 그런고로 세례洗禮요한의 목적目的은 메시아의 준비準備하는 로써 메시아 한 분만이 그의 생명生命대신代身이며 희망希望소망所望전부全部존재存在였을 것이었다.

자기自己 자신自身이 알고 있어야 할 사실事實이었다. 그리하여야 세례洗禮요한의 광야생활曠野生活이라는 목적目的은 여기에 완성完成을 가져오는 바이었다. 예수보담 6개월個月 에 사가랴의 가정家庭에서 태어난 그 자체自體는 하늘이 무한無限기대期待로서 보낸 이면서 사탄이 제일 미워하는 존재存在였다. 그其 시대時代대표代表하여 뜻을 세우기 위한 30여년생애余年生涯 모두가 예수(메시아) 한 존재存在목적目的인데 그 메시아를 모시는 그 한날의 기쁨의 영광榮光이 그대의 목적目的이었다. 세례洗禮요한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百姓앞에 세례洗禮시행施行하게되었다. 세례洗禮는 예수의 그 근본根本 뜻을 성사成事할수 있는 한 터의 자격資格부여賦與하여 주는 약속約束표시表示였다.(요한 복음福音 1 31~34)

세례洗禮요한이 이 예식禮式시행施行 함은 자기自己 뜻을 성사成事하기 함이 아니고 예수의 뜻을 계승繼承키 위하여서 하심이라는 바는 다 잘아는 사실이다. 당시當時 세례洗禮요한을 이스라엘 백성百姓은 하늘이 보내신 한 선지자先知者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례洗禮요한한테 이스라엘 백성百姓세례식洗禮式이나마 세례洗禮요한에게 세례洗禮를 받음은 하늘로써 보내심을 받은 로 알고 있던 까닭이므로 신법新法(요한복음 1 15) 그其 세례洗禮를 받음이었다.

세례洗禮요한은 증거證據하기를 자기自己는 물로 세례洗禮를 주지만 다음 오시는 메시아는 불火과 성신聖神으로 세례洗禮를 준다고 하시며 대중大衆앞에 선포宣布하심은 자기자신自己自身사명使命과 메시아의 사명使命격별格別하게 상이相異있음을 고백告白하는 바이었다. 그래서 세례洗禮요한은 전목적全目的 실체實體 메시아의 한 존재存在소망성所望城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요한이 요단에서 세례洗禮를 베풀고 있을 때에 예수는 갈리리로부터 요단에 이르러至 요한한테 세례洗禮를 받고자 할때에 세례洗禮요한은 양하야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나한테 나오시나이까하니 예수 말씀하시기를 허락許諾하라. 우리들이 하는 것이 합당合當하리라 하신데 세례洗禮요한이 허락許諾하여 세례洗禮시행施行함을 받고 물水에서 올라오시니 하늘天이 열리開고 하나님의 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그其 위에 하심을 보시더니 하늘天로써 소리聲있어 말씀言하시대 이此는 나我의 사랑하는 아들愛子요 나我의 (기뻐하는 라) 하시더라.

비둘기 모양으로 성신聖神이 내린 근본의의根本意義는 이와같은 하늘의 뜻의 존재存在라는 것은 세례洗禮요한 스스로가 알게 되었다. 그其때 누구나 전부全部가 이 사실事實을 듣고 보았든가 전부全部는 알지 못하였지만

세례洗禮요한만은 잘 알고 있었다. 이렇듯이 한 목적目的책임責任세례洗禮요한한테 알려 이스라엘 백성百姓한테 하여서 하늘뜻을 성사成事하게 하고자 하심이 뜻이었다. 이와 같이 하늘로부터 예수는 메시아라는 것과 하늘로 보내신 특별特別라는 것은 알려주었으나 세례洗禮요한한테 예수는 메시아라고까지는 지적指摘하여 교시敎示하여 주지 않았다. 지혜智慧롭게 행동行動하여야 하는 한 단계段階하게 되었다. 그때에 세례洗禮요한은 자기自己가 바라든 메시아를 만났음은 그 이상以上 무슨 딴 목적目的이 어디에 있으며 다시금 무엇할 사명적使命的 다른외부분部分요구要求할 무엇이 없었든 것이 사실事實동시同時에 기뻐서 대중大衆을 대하여 적극積極 예수는 보내시마 하신 메시아라고 선포宣布하여서 대중大衆이 예수앞에 집결集結하게하는 동시同時자기自己역시亦是 예수 앞에 있어서 모든 대표적代表的 태도態度로 나서게 되었든가. 그 자체自體태도態度 여하如何하여 대중大衆에게 큰 영향影響하는 중대입장重大立場에 있다.

그런데 세례洗禮요한이 예수 하여 적극적積極的으로 예수 자신自身은 우리가 바라는 목적目的존재存在 메시아라고 대중大衆앞에 선포宣布 못함은 사실이었다. 그저 요단에서 세례洗禮 받을때만 알 뿐이고 세례洗禮요한은 그냥 그대로 자기自己가 처음 시작始作세례洗禮나 주면서 다니는 행동行動계속繼續하게 되니 예수를 대하여서도 대중大衆은 메시아라고 보는 것 보다도 세례洗禮요한의 행례行禮의 도움자로써 아는 라고 생각生覺하는 는 있는 정도程度였다. 세례洗禮요한의 목적目的은 그저 세례洗禮나 주고 다니는 것이 역사적歷史的으로 부여賦與받은 전사명全使命이었든가. 너무나 가치價値없는 행동行動이였었다. 모든全이스라엘 백성百姓대하여 생명生命 계승繼承의 한 중계존재中繼存在가 그냥 멋대로 사방四方자유自由로히 다니면서 세례洗禮만 준다는 행례行禮에는 우리는 한심寒心태도態度주목注目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事實이었다.

세례洗禮요한 자신自身역시亦是 예수 앞에 서서 나타난 엘리야의 대신代身 존재存在라는 것을 잘알았는가 하면 의심疑心문제問題이다. 요한 복음福音 1 21에 요한이 엘리야도 아니라 하심 보아도 자기自己 자체自體가 그 사명적使命的 입장立場명백明白히 알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자기自己 자신自身이 알았으면 왜 대중大衆앞에 자기自己선포宣布하여서 이스라엘 백성百姓의문점疑問點을 없이하여야 할 책임責任준비準備 못하였든 바이었다. 세례洗禮요한 자신自身이 엘리야란 것을 알았으면 대중大衆에 대한 책임責任감당勘當하여야 할 존재存在

로서 어디에 그 책임責任을 다하기 하여서 싸워서 그 기대基臺를 세웠든가 자기自己 자신自身확고確固한 엘리야의 대신자代身者라는 것은 자각自覺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사실事實이었다. 이렇게 세례洗禮요한은 자신사명自身使命에 대하여 적극적積極的 준비準備 공작工作을 하여서 그 목적目的 본체本體로 오신 예수 앞에 모두全를 시종侍從의 중심 존재存在로 서서 예수의 모든全 사명使命협조자協助者로서 또 제일第一 큰 사랑받을 수 있는 예수의 한 제자弟子로서 시봉侍奉하는 에 더 큰 다른 무슨 목적目的이 있었으랴. 그런데도 불구不拘하고 예수와 분립分立하여 하신데는 세례洗禮요한이 하늘 앞에 중대重大책임責任 미완성未完成을 가져오는 기본적基本的 대신代身 행동行動이라 아니할 수 없는 사실事實이었다.

성경聖經을 보면 세례洗禮요한은 전폭적全幅的으로 메시아라는 것을 확실確實하게 알지 못함을 알려주고 있다. 옥중獄中에 있어서 제자弟子들을 보내며 묻기를 그대가 오실바의 메시아니까 하는 질의質疑, 또 다른 사람을 기다리오리까 하는 것을 보면 세례洗禮요한 자신自身도 메시아에 해결解決을 못하였든 바를 알려 준다. 이와 같이 뜻 시봉자侍奉者가 되어야 할 그 존재存在조차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알려주지 못하니 예수 자신自身에 있어서의 전기대全期待소망所望여하如何정도程度이였을까? 과연果然 통한痛恨치 않을 길이 없을까. 누가 그 심정心情을 알 있었으랴. 여기에 세례洗禮요한이 예수 앞에 하늘 앞에 큰 범행犯行시작始作이 있다는 것을 아는현기독교계現基督敎界에 없는바를 나도 통분痛憤하는 바이다.

그저 세례洗禮요한은 하고 하나님 앞에 없어서는 아니될 존재存在 대우待遇하는 것은 용서容恕 할 수 없는 행동行動이라 아니할 수 없는것이다. 그런고로 자기自己 책임責任 다하지 못하고 자기自己 뜻대로 하는 세례洗禮요한은 아버지 앞에 함의 존재存在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때문에 온 가 그其 본사명本使命 중심지中心地를 떠나서 하는 그其 자체自體물론勿論이며 그其의 시종자侍從者까지 하늘로서 하게 할 수 없는 존재存在로써 그 말로末路에까지 하나님은 히 보지 않음은 사실事實이다. 이와 같은 중대지사重大之事 여하如何가 예수 앞에 크나큰 광야생활曠野生活이라는 고통苦痛노정路程단행斷行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 원인原因이 되었다. 광야曠野에 나아갈 때에 고독孤獨심중心中을 헤아려 동정同情하는 세상世上에 몇사람이었든가?

여기에 人間을 상대相對하여 예수의 사명범위使命範圍는 한 어두운길暗路에 봉착逢着하였음을 누가 아는가 아는 아버지와 예수뿐이었다. 그 광야曠野적막감寂寞感은 예수 앞에 큰 낙망落望동시同時에 다시금 재출발再出發의 한 노정路程결심決心케 하는 노정路程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광야曠野까지 예수를 시봉侍奉하여 따른 자 한 사람도 없다. 그때 먼저 예수를 메시아로 모시는 있다면 이는 하늘에서 내리는 큰 을 받을

존재存在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생각生覺하면 동방박사東方博士는 어디에 갔는고, 목자牧者는 어디에 있는고. 모친母親은 어디에 갔는고. 세례洗禮요한은 어디에 갔는고. 모두 자기自己중심中心하고 행동行動하는 그其 자체自體들은 예수 앞에 기쁨을 하여 탄식歎息하게 하는 한 존재存在 불과不過하였으며 더욱 슬픔을 격동激動시켜주는 기대基臺에 틀림없는 존재存在들이었다. 그런 심정心情을 품고 광야생활曠野生活에 있어서는 1 낙심落心을 다시 복귀復歸하기 위한 목적目的동시同時적극적積極的 원수 사탄 하여 최종最終 결판시기決判時期였다. 사탄이 벌써 하늘 뜻 성사成事할 터를 침입侵入하여서 뜻 순종順從 노정路程을 받들지 못하는 세례洗禮요한의 기대基臺는 보았으니 그 다음엔 그 중심中心 자체自體인 예수까지 와서 시험試驗시도試圖원리적原理的행동行動이었다. 그러니 광야생활曠野生活 사탄의 자유행동自由行動대비對比한 예수에 시험試驗이었다함을 알아야 한다.

3 세례洗禮요한 인간성人間性 표준標準으로 예수를

세례洗禮요한의 행동行動이 어찌 용서容恕받겠는가 생각生覺하면 몸에 솜서리 치는 한 행동行動이 아니었는가. 세례洗禮요한 역시亦是 예수를 대하여서 뜻 중심中心하고서 하지 못함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세례洗禮요한도 사람인지라 메시아라는 자체自體는 좀더 고귀高貴치에서 자기自己에게 보여졌을 것이 없는데 별다름 없는 존재存在용모容貌이면서 자기自己들이 바라는 바와 같이 뜻의 성사成事노정路程하여 나가지 못하는 존재存在로써 어찌 메시아의 자격資格이란 너무나 거리距離가 멀었었다. 요한 역시亦是시대적時代的으로 대하든 이스라엘 백성百姓동일同一관점觀點으로 서게 됨이 큰 실수失手시작始作이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百姓은 두 말할 수 없는 행동行動이었다.

세례洗禮요한은 예수 앞에 메시아라면 시종侍從하기 위하여서 자기自己중심中心하고 그其 제자弟子들까지도 함께 데려와서 예수의 제자弟子가 되어야 할 입장立場이었는데 그것이 과연果然 인간성人間性에서 나온 파괴행동破壞行動이었다. 자기自己 제자弟子들과 함께 예수 제자弟子가 되어 어제昨日의 선생先生입장立場하여 예수 앞에 제자弟子 으로 서니 제자弟子였든 들과 동급적同級的 입장立場에서 그其 입장立場과연果然 인간세계人間世界에서는 어려운 사실事實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觀點 인간人間전부全部자기自己 중심中心하고 하늘을 대하고자 하는 대신代身 사탄 공작工作이라고 보여주는 결과結果초래招來하여 사탄과 하는 방향方向으로 나가는 셈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무근거無根據원리原理위에서 함이 아니다. 성경聖經에서 세례洗禮요한이 일대一大 실수失手행동行動폭로暴露구절句節을 찾아서 해설解說하여 보자. 지금至今까지 신학계神學界

에는 난해難解 문제問題구절句節일 것이다. 즉 마태복음 12을 보면 그 내용적內容的 사실事實여실如實하게 드러나 있다. 예수께서 12제자弟子에게 하심을 하시고 거기에서 교주敎洲하시며 영포領布하시라고 각성各城에 가往시더라. 그때 왜 요한이 에 있어 그리스도의 함을 듣聞고 그 제자弟子들을 야 예수께 당신當身이 오來실이니까. 선생임先生任이 오니까 우리들我等이 다른사람他人을 기다待리이까 예수 대답對答하여 너희들爾等이 하야 듣聞고 보見는 것으로 요한에게 하대 귀머거리가 들으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나자癩者가 깨끗潔하며 눈먼 자가 보며 빈자貧者복음福音한다하라. 그런지 나我로 하여 범죄犯罪하지 아니한 이 있도다 하시고 저들被等이 흩어짐離에 군중衆들에게 요한을 가르켜指하야 말씀言하시매 너희들爾等은 무엇何을 볼視려고 들野에 갔去더냐. 바람風에 움직動이는 갈대냐 또 너희들爾等이 무엇何을 볼視려고 갔去더냐. 미복美服을 입衣은 사람人이냐 아름다운 옷 입美服衣은 사람을 대궐大闕에 있나이다. 너희들爾等이 어찌 갔去더냐. 선지자先知者를 보見려더냐. 옳是도다. 내我가 너희들爾等에게 말하노니 이사람此人은 선지자先知者보다 크勝니라. 이사람此人을 가리켜指 기록記錄하였으며 볼見지어다. 내我가 나我의 사자使者를 너희들爾等 앞前에 전遺하노니 저被가 너희길爾路은 너희앞爾前에 예비豫備하리라 하였나이다. 내我가 진실眞實로 너희들爾等에게 하노니 여인女人이 낳은 사람 에는 세례洗禮요한보다 웅대雄大가 일어起남이 없으無나 그러然나 천국天國에서는 지극至極 어린아이小子라도 그被보다 크大니라. 세례洗禮요한이 올來때부터 지금至今까지 천국天國용역用力함으로 얻得나니 용력用力는 빼앗奪느니라. 모든諸 선지자先知者율법律法예언豫言한 것은 요한까지 도달至하였으니 만일萬一 너희들爾等이 그것을 수긍首肯할진대 오來리라한 엘리야가 그사람此人이니라. 귀耳가 있有어 듣는자聽者는 들을聽지어다. 차세대此世代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譬喩컨데 아이兒孩가 시장市場에 앉座아 동류同類를 불러 우리들我等이 너희를爾等을 하야 나팔을 불吹어도 너희들爾等이 춤추舞지 않고 우리들我等이 슬픈 울음소리를哀音 내어도 너희들爾等이 울지 않았다함과 같으니 요한이 와서來 먹食지도 않고 마시飮지도 아니함에 그들被等이 말語하기를 사귀邪鬼가 들렸다 하더니 인자人子는 와서來 먹食고 마시飮에 또 말語하기를 먹食기를 탐貪하고 술酒을 즐기嗜는 사람人이요 세리稅吏죄인罪人친구親舊로라하니 다만 지혜智慧는 그 행사行事를 나타내顯느니라고 이상以上과 같은 말씀言을 선언宣言하였다. 이 내용전부內容全部세례洗禮요한 하여 놓고 한 말이었다. 그러면 요한 제자弟子와서 물을때에 본대로 말하라. 내가 누구라고 말하지 않으나 너희는 스스로 자각自覺하여라 하면서 여러 이적異蹟 기사奇事로써 표시表示하였다.

그러면 예수는 왜 이런 대답對答을 하였는가. 그저 묻는 그대로 대답對答하여 옳도다. 내가 오리來라고 한 로라 하면 그만 해결解決을 짓는 일인데 이와 같이 예를 들어 말한 바는 인간人間으로 하여금 깨달을수 있도록 교시敎示하였으니 그것 보아서 알라는 큰 의의意義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理由하고 높은 예수를 찾으면 그야말로 그에 더 성공成功은 없는 것인데 누구나 전부全部가 가르쳐주고 전부全部 끌어다 주면 그 자체自體를 찾지 못한 어디에 있을까 밝히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으면 자기自己들이 지혜智慧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세워야만 그 뜻 성사成事물론勿論 하늘의 협조協助하여 주었지만 자기自己 노력努力으로 찾아야만 타락墮落하지 않고 이루었다하는 결과結果를 보기 하여 그 찾는 상급賞給영광榮光받을 자격資格결정決定되는 바이므로 최종점最終點까지는 교시敎示하여 주지 않는 바이다. 를 들면 100까지를 찾아야 하는데 95가량만 알려주고 5는 알려주지 않는 것이 한 뜻의 노정路程표시表示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100까지 100까지 전부全部교시敎示하면 그 상급賞給은 하늘에 있는 성도聖徒들 앞에서라도 그 영광榮光누릴 자격완성자資格完成者라 할 수 없기에 95까지만 가르쳐주고 5는 자기自己 지혜智慧하여 찾아 100까지를 채우시기를 바라서 교시敎示하는 바가 지금 역사役事 노정路程에서 많이 보여지는 사실事實이다. 이 5이란 그것 찾아 성사成事하는 그 사실事實은 100의 성사成事영광榮光을 누리고 기본권한基本權限결정決定하는 사실事實이니 이와같은 로서 세례洗禮요한 하여서 대답對答한바도 사실事實이다. 또 세례洗禮요한한테도 하늘로써도 이와 같이 교시敎示하였다. 지혜智慧로 찾아서 함을 주시고자하여서 예수는 메시아라고 확정確定지어 교시敎示치 않은 바이다. 이런 것이 지극至極한 하나님이 사랑 하시어 하시는 섭리攝理동시同時에 누구에나 허락許諾한 예수니 지혜智慧있는 하여만 원수의 지혜智慧할 수 있는 기본동력基本動力이라는 근본根本의 힘力의 터가 되기에 이와 같이 하나님은 섭리攝理하신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히 어떤 목적目的교시敎示하였다가 다시금 시험試驗하여 그 목적目的 의심疑心하게 교시敎示하여 주는 때도 있다. 그것은 지혜智慧로서 그 근본根本확득確得할 수 있는 자격자資格者가 되어야만 하나님 자신自身직접간섭直接干涉하지 않아도 사탄 원수 하여 승리勝利자격자資格者로 세우려니 이런 시험試驗도 있는바는 영교시靈敎示로 받는 들의 체험體驗하는 사실적事實的 근본의의根本意義로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즉 사탄이 하여 반대역사反對役事할 수 있는 것이기에 또 그리하여 완성격자完成格者 되면 전부全部를 하나님의 간섭干涉을 하지 않고 자유성사自由成事표준標準하기에 이와같은 자리를 바라서 우리에게 대취對取하기 하여 섭리攝理하심은 알아야 한다. 지혜智慧로서 뜻 찾아 완성完成하는 는 저 하늘 에서도 말할수 없는 존재存在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존재存在자격資格지혜智慧를 찾음으로만 존경尊敬가치價値를 볼 수 있는 근본根本행동行動이 즉 지혜智慧로 뜻 성사成事

완성完成하는 태도態度이다. 그리고 빈자貧者에게 복음福音한다 하심은 큰 의미意味가 있다. 즉 여기는 이스라엘 백성百姓 전부全部가 메시아를 고대苦待하기를 자기自己들이 더 좋아지기 하여서 고대苦待하였기에 지금至今 이와 같이 나 자신自身은 너희들이 바라는 목적상대目的相對로 되지 못하여 빈자貧者와 같은 밖에 상대相對할 수 없는 모양貌樣에 있다함을 하는 동시同時에 너희들은 마음으로 한 것이었기에 나 할 수 없었다는 것을 간접적間接的으로 표시表示하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사탄이 주관세상主管世上에서 은 밝혀 빈자급貧者級에 많은 것을 말하는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관세상主管世上이니 악한사람惡者은 잘살富고 착한사람善者은 가난貧하니 이런 원리적原理的 언사言詞로 되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다음 마태복음 11장 6절에는 말씀하시기를 누구誰든지 나我로 하여 범죄犯罪하지 아니한 이 있有도다 하심의 구절句節을 보게 된다. 이 구절句節이야 예수님의 숨은 심정心情표시表示한 말씀이었다. 이 말씀에는 벌써 세례洗禮요한은 나에게 범죄犯罪하였다는 결론적結論的 사실事實고백告白하는 것이다. 범죄犯罪하지 않은 이 있도다 하였으니 벌써 입장立場에서 이탈離脫존재存在하는 것을 암시暗示한 바이었다. 과연果然 예수 앞에 세례洗禮요한 한 자체自體는 크나큰 타격打擊존재存在였다. 예수의 전목적全目的대부분大部分일대난사一大難事초래招來케 한 큰 범죄犯罪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없는 사실事實이다.

그 다음은 너희들爾等은 무엇 보려 광야曠野에 나갔出더냐. 그 목적目的이 무엇이든지 그 들野에 나아감은 전목적全目的은 예수 한 자체自體를 보기 하여 행동行動한바가 아니냐. 또 들野에서 요한 자체自體증거證據한바가 아니었든가. 그런데 그때 벌써 알아야 할 시기時期를 놓치고 지금至今와서 이렇게 행동行動하는 것을 암시暗示하면서 책망責望하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 증거證據세례洗禮요한은 과연果然 선지자先知者 에서는 제일第一라고 하면서 말씀하시었다.

들野에서 본 세례洗禮요한은 과연果然 선지자先知者 에도 큰 라고 하나 할 책임責任담당擔當하지 못하였다는 의미意味로 말씀하시는 말씀이 내我가 진실眞實로 너희爾等에게 이르論노니 여인女人으로 난 사람 에는 세례洗禮요한보다 웅대雄大가 일어남起이 없도無다. 천국天國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至極者라도 그被보다 크大니라 하심에 결론적結論的 판결判決을 내리웠다. 이 말씀이 지금 신학계神學界에서 미해결점未解決點이나 그 근본의의根本意義는 예수 세례洗禮요한의 범죄행위犯罪行爲책망責望의 말씀이라는 것을 밝히 이제는 알아야 한다. 근본의의根本意義는 무슨 뜻인고 하니 여인女人으로 난 사람 세례洗禮요한보다 웅대자雄大者가 일어起남이 없無다함은 이 말씀에 근본의의根本意義를 알아야 한다.

지난날昔日의 선지자先知者여인女人하여 태어生고 지금至今 세례洗禮요한도 여인女人을 하여 태어生난 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事實인데 왜 세례洗禮요한이 제일第一로 큰 존재存在라고 하였는가 하면 선지자先知者라면 하나님의 뜻을 예언豫言하셔서 뜻을 알려주는 대변인代辯人임에 틀

림없다. 그런데 세례洗禮요한은 역시亦是 하나님 뜻을 알리는 대변인代辯人이라는 것은 같은 뜻의 존재存在이나 그 자체自體들이 증거證據 입장立場을 취하여 보면 지난날昔日 선지자先知者 전부全部증거證據하되 예언적豫言的 증거證據로서 예수를 증거證據하였으나 세례洗禮요한은 증거證據하되 직접적直接的으로 증거證據하였으니 증거적證據的 입장立場중심中心하고 말할 때 세례洗禮요한의 이상以上가는 없음은 사실事實이다.

그런고로 증거적證據的 입장立場을 두고 세례洗禮요한에 하여 말할 때 과연果然 세례洗禮요한은 여인女人으로난 사람에는 제일第一존재存在라는 근본의의根本意義확실確實하다는 것을 명백明白 히 알아야 한다. 그 다음은 그러然나 천국天國에서는 지극자至極者라도 그被보다 크大니라 하심은 무슨 의의意義냐 하면 근본의의根本意義가 이러하다.

천국天國에 간 여인女人으로 난 들이다. 그렇다면 여인女人이 난 사람 에는 세례洗禮요한이 제일第一 크大다고 하였는데 왜 천국天國에서도 커야 할터인데 제일第一 작은 세례洗禮요한이가 되는가 하는 것이 의심疑心아니될 수 없는 수수께끼의 한 관문關門이다. 이 근본의의根本意義세례洗禮요한의 범죄적犯罪的 행위行爲책망責望중대구절重大句節이란 그 뜻은 이러하다. 지금至今 세례洗禮요한은 예수를 메시아로 증거證據하여 놓고는 자기自己자기自己 멋대로 하였으니 예수에 하여서 적극積極 존재存在가 되어 하여야 할 입장立場을 떠나서 행동行動하였으니 큰 범죄犯罪라 아니할 수 없다. 예수를 메시아로서 시봉侍奉하여야 할 중심中心 존재存在시봉侍奉하지 못하고 도리어 뜻 하는 행동行動을 하였으니 그 자체自體에서는 과연果然 하늘에서 작은 자天微者의 행동력行動力이 아니라 할수 없다. 세례洗禮요한이 적극시봉積極侍奉하였으면 그는 두말할 것 없이 하늘에서는 지극至極히 큰 존재存在가 될터인데 시봉侍奉치 못하니 하늘天에서 작은자微者보다도 못한 존재存在로 되었다하는 의미意味였다. 천에 있는 성도聖徒나 또 천사天使나 어떤 존재存在라도 예수 하여서는 메시아란 근본존재根本存在라는 것을 다 알고 극심極心으로 시봉侍奉하고 있는데 시봉侍奉중심존재中心存在시봉侍奉하지 못하니 시봉侍奉에 있어서는 최고작은자最微者가 되었다하는 의미意味를 알아야 한다.

이 말씀은 시봉侍奉중심中心하고 말씀하여서 세례洗禮요한에게 범죄행위犯罪行爲를 꾸짖策음이라는 중대重大근본의의根本意義를 알아야 한다. 그 다음은 세례洗禮요한 올來때부터 지금至今까지 천국天國용역用力함으로써 하나니 용역用力하는 는 빼앗奪느니라 하심의 말씀도 역시亦是 세례洗禮요한 범죄지사犯罪之事지적指摘함의 말씀이었다.

요한 올來때부터 지금至今까지라는 말씀은 무슨 뜻의 말씀인가 하면 먼저는 세례洗禮요한 자체自體가 뜻을 받들어서 시봉侍奉하였다면 예수님의 수제자首弟子세례洗禮요한이 될바는 한 하늘의 목적目的이었는데 용력用力하지 못하였기에 시봉侍奉하지 못하였기에 요한부터 지금至今까지라는 에 요한이 선유권리先有權利를 주었든 큰 위치位置

지시指示한바였는데 그 위치位置를 지키지 못하니 그 지정指定되었는 위치位置용력用力하는 다른 제자弟子에게로 옮겨지었다는 것을 지적指摘함이었다.

그런고로 천국天國용력用力하는 는 빼앗奪느니라 하심이었다. 예지豫知 예정豫定근본根本을 두고 하신 말이란 뜻이 근본根本이다. 그런고로 용력用力하는 다른 제자弟子들한테 그 자리位를 빼앗奪으심이라는 근본의의根本意義명백明白하게 표시表示한바를 보아도 여기에 세례洗禮요한이 범행犯行자체自體이면서 예수 앞에 큰 하늘적 반역자反逆者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존재存在 하여서 오늘날까지 존시尊侍하였다는 과거過去 신앙자信仰者무지無知의 서러움을 무엇으로 방지防止할까. 과연果然 통분痛憤사실事實이다. 이 사실事實행동行動으로 하여 예수의 십자가十字架의 어려움難의 시작始作재촉再促하는 행동行動이라는 것을 밝히 알아야 한다.

그 다음은 세례洗禮요한은 엘리야라고 말하고 그는 세상世上이 먹고식구食口 마시飮지 않으니 사귀邪鬼가 들렸다하고 나도 먹고 마시食口飮니 세리稅吏죄인罪人친구親舊라하니 다만 지혜智慧행사行事를 나타내顯느니라 하시었는데 이 말씀 에는 세상世上이 함부로 하늘뜻을 모르不知면서 자기自己 멋대로 하여 한다는 것을 지적指摘하면서 뜻을 갖고 온 하여 조금도 하는 없다함을 비유譬喩하여 아이兒孩가 시장市場에서 앉座아 동료同類를 불러吹 말하되曰 우리我等가 너희爾等를 하여 나팔을 불어도 너희爾等가 춤추舞지 않고 우리가我等이 애곡哀音하여도 너희들이 가슴胸을 치拍지 않는다는 것으로 세상世上비유譬喩하여서 현재現在중심中心자기自己목적요구目的要求에 조금도 치 않음을 지적指摘하심이었다.

그러나 지혜智慧로운 만이 하나님의 뜻을 행의行義로 나타顯낸다하심의 경고警告를 볼 수 있다는 바를 지금至今 교인敎人들이 아는가. 이와 같이 초림初臨예수 앞에 전개展開되었든 진상眞狀지금至今 재림再臨을 바라는 세계신자世界信者들과 바리새 교인敎人들과 하여 볼때에 뜻에 존재存在지금至今 신도信徒 에 몇 이나 있겠는가! 이와 같이 근본원리根本原理들은 말세末世가 되니 뜻 성사시기成事時期가 오리니 명백明白하게 되어야만이 재림再臨은 오는 바가 아니겠는가. 이 근본根本의 뜻 알고 시봉자侍奉者는 하늘에서 제일第一라는 것이 끝날도 부여賦與하는 사실事實이다. 이와같은 환경環境을 본 예수 앞에는 광야曠野라는 서러움의 노정路程전개展開시킨 근본원리根本原理라고 위에 한바를 이해理解할 줄 안다. 이런 근본根本을 밝히지 않으면 적극반대積極反對들은 현교계現敎界 신앙자信仰者들일 것이다. 그러나 뜻과 근본根本을 알적에 큰 두려운 문제問題라 아니할 수없다.

이상以上 한바 근본문제根本問題세례洗禮요한 자체自體는 하늘적으로 예정豫定존재存在였으나 그 사명使命시봉侍奉 못하게 될 때에 하늘은 뜻 시봉侍奉가치價値를 알고 시봉侍奉하는 가 하늘적 예정적豫定的 목적目的계승繼承하여 완성完成하는 바로 하나님은 뜻의 섭리攝理를 돌리어 역사役事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예지豫知 예정적豫定的이라는 것은 뜻을 중심中心하고 말씀한 바이지

하는 사람을 하여서 말씀한바아니다. 이것 보아도 현실現實 신앙계信仰界예정론豫定論 은 그 문제외問題外 위치位置것으로 된다.

4 복귀섭리復歸攝理 표시表示로 된 예수 조상祖上혈통血統

인간人間은 해와의 실수失手와 아담의 실수失手전인류全人類로 하여금 사망死亡지도指導받아 하나님과는 먼 거리距離에서 반대방反對方으로 나아가는 것을 다시 찾고자 하시어서 역사歷史섭리노정攝理路程전폭적全幅的표시表示하여 왔음을 이상以上 한바에 하여 잘 알줄 안다.

그런데 히 예수의 직계直系혈통血統을 가진 역사적歷史的 조상祖上들의 전부全部를 살펴볼 적에 우리가 근본원리根本原理를 알지 못할때에는 한 의심疑心되는 혈통血統을 가진바를 누구나 다 절감切感하여왔는 사실事實이 되어 왔다. 예수의 조상祖上의 혈통은 전부全部섭리攝理하시는 하나님 뜻을 중심中心하고 조상祖上의 하나님을 하여 왔든 바이다. 역대歷代조상祖上전표시적全表示的 중심中心되는 일은 후일後日 예수의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전부全部 완성完成할 수 있는 원리原理대로 표시表示하면서 예수까지 인도引導하여 경유經由하심이었다는 바를 알아야 한다. 예수와서 타락墮落전인류全人類근본根本대로 회복回復하여야 하는 존재存在가 되려니 그 역사歷史하여서 근본根本 하나님의 뜻에 대한 표시적表示的 계통系統하여 왔든 바이다.

예수 조상祖上에 보면 세상世上 사람보기에는 불결不潔혈통血統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 혈대血代순수純粹혈계血系가 아니고 여러 여인女人대표적代表的 존재存在들이 나타나고 있다. 다마, 라합, 룻, 밧세바 여성女性들이다. 이와같은 혈계血系를 가진바는 본래本來 인생조상人生祖上 아담 해와들이 더럽힌 행례行例로서 하나님의 직계直系를 떠나서 사탄과 하여 사망死亡혈계血系를 받은바를 다시금 복귀復歸하여 근본根本에 옮겨 놓고자하니 사탄한테 빼앗긴 사실적事實的 와 같은 반대행동反對行動으로 하나님께 하게 하여서 사탄의 근본根本 더럽힌 원리原理를 찾아 세우고자 함이 중대요소重大要素이다. 그런고로 이런 더럽힌 여성女性들과 같은 들이 행동行動의 뜻 성사成事할 수 있는 하나님의 근본根本, 순종順從, 시봉侍奉, 신종信從할 수 있는 그때야만이 뜻 성사成事된다는 원리성사原理成事시작始作할 수 있는 바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런고로 예수와서 복귀復歸하여야 할 근본根本 뜻들을 전적全的으로 표시적表示的 , , 시종侍從의 나타나는 곳에서만이 뜻이 시작始作한다는 표시表示로서 역사歷史조상祖上행동行動성립成立표시表示합의合意를 보아 예수의 근본根本되는 조상祖上 자격자資格者로서 부여賦與하신 바이었다. 야곱은 에서를 두고 장자長子

을 빼앗아서 하나님의 기업基業성사成事표시적表示的 사실事實성립成立을 보았으나 이제는 다음 번째도 선 가 먼저 에로써 계대系代성사成事시작始作 유다부터였다. 유다에게 있어서는 뜻 성사적成事的 사실事實표시表示동시同時에 뜻 실천實踐 성사출발成事出發을 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런고로 유다 지파支派하여 하나님의 뜻 성사成事할 것을 미리 말하였든 바이나 뜻 성사成事의 첫 계대자繼代者로서 베레스와 세라를 보여 주심이었다. 이 유다부터 하나님은 뜻의 기본基本 시작始作을 보는 것이었기에 다말에게 한 쌍태雙胎를 주어 베레스와 세라 역시亦是 야곱과 같이 복중腹中에서 싸워서 그 뜻의 기본基本 확립確立에 한 표시表示성사成事함이라는 큰 의의意義가 있는 바이었다.

그러면 다말이 한 행동行動으로부터 알아보자. 다말은 本來 하나님 뜻으로 허락許諾계대繼代계승繼承하여야할 입장立場이었는데 그 남편男便 죽고 혈대血代계대繼代하여야 자기自己 존재存在에 대하여 많은 고심苦心존재存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 하려는 혈대血代계승繼承하기 위하여 누구보다도 많은 고통苦痛과 함께 그其 혈대血代가치성價値性을 안 여성女性이었다. 그리하여 자신自身 뜻을 성사成事하는 동시同時에 하나님의 뜻을 계승繼承하기 위하여 부끄러움도 사망死亡제이차적第二次的 문제시問題視하고 목적달성目的達成행동行動으로 나간 바이었다.

그때 이런 행동行動이라면 용서容恕없는 죽음의 길이 다말 앞에 시작始作되는 바도 알고 있지만 그런 문제問題문제시問題視 보다는 차후此後문제問題로 하고 아무리 하여도 유대의 자손子孫하여서 계대繼代를 못할 것을 아는 다말은 부득이不得已 자기自己시부媤父하여서 계대繼代를 잇지 않으면 안될 바를 각오覺悟하고 그其 노중路中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때 마침 시부媤父양모羊毛를 깎으剪려 딤나에 온다는 말을 듣고 과부寡婦의복衣服을 입고 너울을 쓰蒙고 딤나 노측路側에 앉坐으매 유다는 창녀娼女로 여겨 자부子婦인줄 모르고 나我와 상관相關함이 어찜이뇨하니 락하여 동침同寢하니라. 그리하여 잉태孕胎된 것이 베레스와 세라였었다.

이런 비원리非原理행사行事가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시작始作되었다. 다말은 비원리非原理계대繼代를 잇는 존재存在가 되었다. 이 다말의 행동行動 무엇을 표시表示하는 바냐 하면 해와가 사탄한테 정조貞操을 빼앗겨서 비원리적非原理的 계대繼代를 세운자가 되었으니 타락墮落시작始作케 하였는데 그와 반대反對로 다말은 뜻 성사成事하기 위한 하늘 便쪽에서 계대繼代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근본根本 뜻인 한 해와가 잃었든 존재存在후일後日에 나타나서 다말과 같이 행동行動하는 것과 동일同一사실事實이 뜻 노중路中에 있음을 표시表示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타락墮落세상世上에 한 여성女性이 하나님의 근본根本성사成事할 수 있는 한 여성女性이 다말과 같이 비원리적非原理的과 같은 으로 사탄 세상世上 상대相對하지 않고 하늘 상대자相對者계대繼代하여야 한다는 한 사실事實내포內包되어 있는

표시적表示的 존재 다말이었다. 그런고로 다말과 같이 사탄 세상世上 여인女人이 하늘 남편男便 맞았어야할 근본根本한 해와가 나타나서 신부단장新婦端裝하여 세상世上 보기에 비원리양非原理樣으로 생명生命을 아끼지 않고 뜻 계승繼承을 찾아 준비準備하는 여성女性이 있어야 할 후일後日목적目的이니 이 다말은 그 실체實體표징表徵하는 한 존재存在로 됨에 이런 다말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혈통적血統的 계대繼代 잇는 제일第一 조상이 됨이다. 예수와서 이와 같은 한 해와를 찾아 하나님의 뜻을 성사成事암시적暗示的 숨은 표시表示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말과 같이 해와는 아버지품에 들어가기 노력努力이 다말 모양貌樣으로 세상世上에서 하늘로 옮겨지는 한 행로行路가 있다함도 표시表示함이다. 유다는 하나님의 대상적對象的으로 표시表示된 바고 다말은 다시 찾아져야할 한 해와를 표시表示함이니 그 표시表示 예수의 뜻 중심中心이니 예수의 조상祖上계대繼代원리상原理想으로 허여許與되는 뜻으로 되는 바이다. 남편男便되어야 할 존재存在를 두어두고 시부媤父의 품으로 들어가야 하나님이 사탄한테 다시 빼앗는 양식樣式실성實成하여서 근본복귀根本復歸성사成事할 수 있겠으니 이런 표시表示로 됨이 사실事實이다.

이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의 쌍태雙胎본래本來 하나되어야 할 존재存在가 둘이 되었다는 것을 표시表示함이다. 사탄에게 와 하나님께 가 있다함의 표시表示이다. 타락墮落이 없었으면 그냥 처음 태어난 장자長子가 될터인데 서로 장자長子되겠다고 싸운 것은 타락墮落의 피血를 받은 가 되었기에 서로 뜻을 계승繼承받은 가 되기 하여서 싸웠음을 알아야 한다.

야곱 때時에는 나온 동생으로부터 빼앗을 것을 표징表徵하여 그 기업基業을 빼앗고는 기업성사자基業成事者 베레스와 세라는 하나님의 기업계대基業繼代에 들어왔었으니 먼저 태어난 가 뜻 계승자繼承者가 되는 바는 사실事實이니 베레스와 세라는 싸워서 먼저 나오려는 세라를 물리치고 베레스가 난 것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예수와서 원수의 세상世上에서 원수 물리치고 장자長子기업성사基業成事 할 것을 표시表示함이었다. 같은 세상世上에서 장자長子되려고 하는 를 물리치고 근본根本자리에서부터 장자長子성립成立시켜 기업성사基業成事할바를 알아야 한다. 이와같은 원인原因으로 하여 다말은 하나님의 뜻에 성사자成事者의 어머니母가 되었음이다. 그 아들 베레스가 장자長子됨이었다.

전부全部는 예수와서 직접直接 싸워서 승리勝利하여 기업성사基業成事함을 역사적歷史的 거리距離를 두고 표시表示한바이다. 라합 역시亦是 그러하고 룻 역시亦是 그러하다. 이 여성女性들은 하나님의 뜻을 하여서 지금至今 현실現實입장立場을 떠나는 존재存在들로서 되었기에 그런 비원리행례양非原理行例樣과 같은 허락許諾으로 뜻의 성사成事계승繼承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암시暗示하는 표시적表示的 존재存在들이었다.